•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 프로필 이미지
I Love NBA
 
 
 
카페 게시글
非스포츠 게시판 성탄, 버러지 같은 인간의 욕심을 diss하고자 마굿간에 나신 구세주
Verna 추천 0 조회 1,241 12.12.25 19:56 댓글 24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댓글
  • 12.12.25 20:09

    첫댓글 그 목사가 이상한겁니다.

  • 작성자 12.12.25 20:14

    성탄 전야 마굿간 비하인드 스토리는 목사들은 대개 본문과 비슷한 기조(구세주를 못알아보고 마굿간에 돼지우리 취급한 어리석고 각박한 욕심 많은 인간)를 유지했음...

  • 12.12.25 20:15

    그래요? 얼마나 많은 목사들의 성탄절 설교를 들으셨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제게는 처음 듣는 얘기네요 ㅎㅎ

  • 12.12.25 20:19

    방이 꽉찼는지 안찼는지 정확치는 않지만 일단 주인이 방이없다고 했으면

    곧이곧대로 들을것이지... 일단 '있는데 행색이 초라해서 안줬다' 라고 안믿고 의심부터 해대는 아주 못된 심보죠

  • 12.12.25 20:19

    베르나님은 여전하시네요~ 그렇게까지 기독교 까는 이유가 궁금할 지경이네요~

  • 12.12.25 20:29

    베르나님은 상당히 피해의식 갖고계신가요... 교회 25년째 다녀보지만 이런 극단적인 얘기는 처음 들어봅니다.

  • 작성자 12.12.25 20:39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5&aid=0000187614

    "빈 방 있습니까?"

  • 12.12.26 02:07

    본문에 써 두신 대로 알고 계시는군요. 오해이십니다, 네 잘못 이해하셨습니다. 저는 개신교도가 아닌 가톨릭인이지만, 어제 저희 신부님께서 강론해주신 내용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가난하고 힘든 환경을 택하셨음은 가난하고 어려운 자를 더 이해해주시기 위함이었다."라는 내용이었거든요. 너무 안좋은 쪽으로만 해석하고 계심이 아닐런지요

  • 12.12.29 19:10

    성서는 역사화된 예언이라는 존 도미닉 크로선의 말이 있듯이 복음서는 저자가 예수의 일생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공적인 삶을 신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즉 역사적으로 완벽한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죠.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를 올바르게 캐치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애써 성서를 비틀려는 행동은 본인 스스로의 성서에 대한 왜곡과 오해를 불러올 수 있어요.
    비판치고는 상당히 조악해서 실망했습니다.

  • 작성자 12.12.26 22:30

    "신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기독교인들의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삼위일체, 절대무오설, 예정설, 문자주의, 축자영감설, 정통주의, 자유주의, 속죄론, 세대주의, 종말론 등 신과 성서말씀에 대해 온갖 썰을 풀어놓지요. 바로 성서의 역사화된 예언, 신학적 형상 어쩌구 하시는 지금의 후안베론님처럼...

  • 12.12.29 12:58

    역사화된 예언이라는 말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알아들으시는지요?

  • 작성자 12.12.29 13:40

    음... 말장난? 저는 크로선인가 하는 양반이 누군지도 잘 모르고요. 제가 성서를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 그다지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나 아퀴나스 정도면 모를까 그 외에 언급하신 신학자를 비롯한 여러 신학자들을 모릅니다. 흔히 철학 논쟁을 할 때 예를 들어 "야, 너 조르지오 아감벤 아냐?"라고 치고 들어오면 위축됩니다. 일단 자기가 접해보지 않은 철학자니까요. 그런데 '네가 모르는 철학자 리스트' 뽑아서 공격해봤자 실제 논쟁에서의 우위와는 별개라는걸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마찬가지로 일부 열혈 신학생들이나 끼리끼리 덕질할 전혀 대중적이지 않은 신학의 내용을 들먹여봤자 논쟁에서

  • 작성자 12.12.29 13:44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정신승리하는 효과 외에는 없죠.

    그리고 저에게 신학이란 학문은요. 현대인의 이성과 윤리관으로는 도저히 이해(용납)할 수 없는 신의 가르침을 사랑인 것처럼 포장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라 저한테 신학강론은 하신다는건 별 의미가 없을거에요. 재미있는 사실 하나 알려드리면 이 신학이라는 용어를 번역할 때도 귀신 신(神)자에 배울 학(學)이라는 말로 번역을 해요. 말 그대로 귀신 신을 배우는 학문 ,즉 신학(神學 )이란 결국 귀신들의 학문을 배우는 귀신의 신학인데 그러니 귀신의 학문에서 말하는 소릴 알아들을리 만무하고 이해해봤자 별 도움도 안되는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 12.12.29 16:08

    일단 역사화된 예언이라는 말 자체가 의미하는 바는 복음서의 내용을 절대화시켜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을 뜻합니다. 복음서의 저자는 예수 시대 때의 운동을 그 나름대로의 신학적 이야기로 재구성하여 예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겁니다.
    이 말인 즉슨, 실제로 신학이라는 것은 귀신들의 학문이 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이 지향하고자 하는 이상, 혹은 윤리들이 담겨 있는 일종의 오래된 문학적 컨텐츠라는 거죠.

  • 12.12.29 16:05

    19세기 무렵부터 그간 종교적 권위에 갇혀 있던 고답적인 인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일군의 역사학, 인류학 계열의 학자 집단이 성서의 내용을 과학적으로 검증해보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고 그 결과 역사적으로 성서의 기록은 실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이미 내린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서는 그런 식으로 쓰여졌는가를 물어볼 때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화적 원형의 틀을 볼 필요가 있다는 거죠. 성서를 읽으면서 우리가 볼 것은 이것이 맞느냐 틀리느냐가 아니라 일종의 신화로 보아 그것이 아직도 살아있는 신화인지, 아니면 죽은 신화인지를 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 12.12.29 15:51

    성서에 나와 있는 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 이것은 개 뻥이다! 라고 하는 것은 허수아비에다 돌팔매질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 시대에 성서가 우리들에게 가져다주는 의미는 그런 게 아니니까요.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떤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느냐를 이해하고 그걸 감안해서 현재적 의미를 뽑아 올리는 것이 성서를 이해하는 바람직한 자세라고 봅니다. 성서에서 창세기의 원죄에 대한 서술을 해석할 때, 그걸 문자 그대로 읽어 사기친다고 단정짓는 것이 아니라 결국 모든 것을 참고 이겨낸 인간의 인내력에 대한 비유로 읽는 것처럼요.

  • 12.12.29 16:00

    앞서 제시한 저 이야기도 실제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지 않은 이상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저자는 마굿간에서 태어날 정도로 예수란 사람이 비천한 출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죠. 근데 그걸 보고 어떤 사람들은 더 나아가 저 목사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달리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서를 이해하는 방식은 제각각입니다. 그걸 어떤 한 사람의 말이 모든 신자들의 시각이라고 단정짓고 그 컨텐츠를 공격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죠.

  • 작성자 12.12.29 21:27

    님의 말은 자유주의 신학의 한 썰로 들리는데요. 성서를 문자 그대로 풀이하는 것, 다시 말해 근본주의/문자주의적으로 읽는 것을 직독직해라고 합니다. 베론님은 성서를 직독직해하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맞지 않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이는 결국 성서를 사실성의 차원이 아니라 유용성의 차원에서(기존과는) 다르게 보자고 주장하는 셈입니다. 성서를 님의 말씀처럼 당시 사람들이 지향하고자 하는 이상 혹은 윤리라고 할 때, 성서에 어떤 유용성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물론 여기서 말하는 유용성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과 현대의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 작성자 12.12.29 21:29

    제 생각을 우선 말씀드리면 (현재 전해지고 있는)성서는 창조-타락-구원을 위한 (신의)고난-부활-심판-영원한 구원의 구도로 이어지는 메시지 이외에는 다른 전달의도 혹은 윤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저 일원적 메시지 사이사이에 사랑이니 징벌이니 믿음과 소망이니 교훈이니 하는 것들이 양념으로, 그것도 구차한 표절물들로 끼워져 있을 뿐 창조, 타락, 고난, 부활, 심판/구원의 메시지를 빼면 성서는 그냥 구약이라는 신화와 신약이라는 서간문 묶음에 불과할 뿐이죠.

  • 12.12.29 22:48

    성서의 유용성에 대한 제 관점을 말씀드리자면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처해 있었던 척박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진 삶의 지혜, 윤리가 히브리 성서라는 형태로 나타났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율법이라는 제도가 당시 피지배층에게 압제로 자리하고 있는 현실에서 율법 그 자체에 얽매여 가난의 악순환에 처한 다수에게 지배적인 종교적 정치적인 굴레를 벗어나 새로운 삶의 윤리를 보여준 것이 그리스도교 성서라고 보구요.

  • 12.12.30 03:52

    성서 안에 들어있는 창조 구원의 메시지는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봅니다. 최소한의 생존도 담보하기 힘든 토양에서 살아가야 했던 이스라엘인들에게 신에 대한 믿음은 삶을 유지하게 하는 하나의 질서였죠. 안식일과 정기적으로 몇년간 토지를 쉬게 하는 제도 등은 그러한 문화적 토대 위에서 자라난 것이니까요.

  • 12.12.29 22:51

    성서의 현재적 의미를 창조와 심판으로 두는 건 역시나 시대착오적인 일이겠죠. 요한복음서에서 얘기하는 구원 등의 이야기 플롯 또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신학적으로 재구성한 이야기니까요. 신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당시 세계에서 있을 법한 상상력입니다. 성서를 읽는데 있어 중요한 지점으로 봐야 할 부분은 예수라는 한 사람이 살아가던 시절에 있어왔던 사회적 부정의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한 새로운 삶의 윤리인거죠. 가장 비천한 계층에서 태어나 목수로 자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며 권력과 힘을 가진 자들의 윤리에 맞서 이겨낸 것이 주목할 부분입니다.

  • 12.12.29 23:51

    그리고 율법보다는 인간 서로에 대한 자비와 사랑을 보편의 윤리로 역설한 것이 그 시대의 맥락을 뛰어넘어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종교에 있어 뜨거운 가슴이 없는, 체계화 된 율법목록들은 인간을 수단화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기 때문이죠. 현재로 시선을 돌리면, 자본주의적 시장질서에서 인간은 효율성이라는 기준에 따라 수단화되면서 소외와 차별이 자연스럽게 정당화되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예수가 역설했던 윤리는 아직도 현재적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 작성자 12.12.30 21:04

    메일 보냈습니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