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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박 3일 영남알프스 7봉 일주를 마무리하고 지난 21일 김천구미역에서 택시(3만 2000원)로 이동, 김천시 지례읍 비타민 모텔에 또 신세를 졌다. 편의점에서 도시락 둘을 구입해 캔맥주 하나 곁들여 저녁으로 반쯤 비웠다. 오후 8시 김명복 기사님(010-3542-4717)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 새벽 6시 우두령까지 태워주십사" 부탁을 드렸다.
지례읍에 오는 택시 기사님이 들려준 얘기는 인상적이었다. 김천구미역 위치가 묘하다는 내 말에 기사님이 20분 걸려 들려준 요지만 추리면 이렇다. "역이 들어선 율곡 혁신도시의 원래 위치는 직지사 바로 앞이었다. 그런데 구미 쪽에 가까워 혁신도시의 성장 잠재력을 높인다는 명분을 내세워 하루 아침에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김천 주민은 분양 신청을 못하게 하는 바람에 분양이 잘 안돼 청와대에까지 민원이 올라갔고, 결국 김천 주민 뜻대로 되긴 했다. 그 덕에 너도나도 앞다퉈 분양을 받았는데 한꺼번에 내놓은 기존 주택들이 팔리지 않아 가격이 형편없이 추락했다. 그것을 알고 떳다방들이 싼값에 사들인 뒤 시간이 지나자 비싸게 되팔아 배를 채웠다. 이렇게 우왕좌왕하는 바람에 혁신도시 선정이 늦어졌다. 덩달아 공기업 유치도 늦어져 하청기업이 없거나 적은 공기업들만 이곳에 들어오게 돼 경제 활성화 효과가 없었다. 원래 혁신도시가 들어서기로 했던 직지사 앞은 부지가 넓었는데 현재 혁신도시는 비좁아 아파트 간격이 좁아 종일 볕이 안 드는 동도 있다. 또 역사도 처음에는 직지사 앞에 세워졌다가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짓느라 늦어졌다. 직지사 앞 역사는 철도공사의 다른 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잘못된 행정과 결정에 대한 책임은 누구도 지지 않았다. 황악산이 1111m인데 1000m가 넘는 산의 터널을 뚫으면 고속열차는 제 속도를 내지 못하고 탈선한다고 한다. 해서 시속 100km 정도로 천천히 달린다. KTX 많이 타보셨으니 알지 않느냐?"(까마득히 몰랐다)
여튼 월요일 아침 5시쯤 김태연 선생(전북지역 지리 교사)이 쓴 역저 '백두대간을 그리다'의 해당 구간을 다시 읽으며 예습했는데 산새 소리가 꽤 요란하다. 오전 5시 57분쯤 전화 걸어 기사님을 깨웠다. 대간 종주 6회차 부항령~우두령 구간을 이용하며 낯을 익혔던 터라 "오랜만입니다" 인사를 교환했다.
모텔 앞까지 태우러 오셨다. 현금을 찾을까 했는데 읍내 ATM 기계는 작동하지 않아 시간을 조금 허비한 끝에 2만원을 계좌로 이체한 뒤 6시 27분 산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안개에 휩싸여 오늘 조망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우두령에서 2.4km 떨어진 삼성산(986m)에 7시 25분 다다랐다. 통나무 계단을 오르면 시원한 바람을 맞는 곳에 어김없이 벤치가 설치돼 있었다. 김천시에서 많은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호젓하다. 너무 좋다.
오전 8시 우두령에서 4.8km 떨어진 여정봉(1030m)에서 한숨 돌린다. 김천시 대항면과 충북 영동군 상촌면 경계를 이룬다. 바로 아래 직지사 삼성암이 있는데 험준한 길이라 대부분은 황악산 정상을 지나 이곳을 거쳐 삼성산 쪽으로 하산한다. 길의 중간에 있다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으리라 짐작될 뿐이다.
700m를 내려오니 바람재다. 다듬어지지 않은 표지석에 바람에 날리는 글자체로 '바람재'라 새긴 것이 인상적이다. 뒤를 돌아보니 바람재 정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극적으로 날이 개이고 있다. 백두대간 초기 개척 단계에 이곳을 찾은 이들이 착각해 영동군 상촌면 궁촌리로 하산해버린 일이 있었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은 길이 완연해 그럴 위험은 없어 보였다.
영남알프스 일주 때 후배가 넘겨준 연양갱 둘로 아침을 때웠다. 나흘째 산행이라 피곤이 누적될 법한데 몸이 가벼웠다. 이상하리 만큼,
신선봉과 황악산 갈림길이 나와 왼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조붓한 숲길이 상큼하다. 25분 형제봉에 이른다. 그래도 사위는 안온한 안갯속이다. 10m 앞에 일행이 나타날 때까지만 해도 앞에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남녀 커플 두 쌍이다. 직지사를 꽤 이른 시각 출발한 것이 분명했다. 47분 황악산 정상에 도착했는데 전혀 조망되는 것이 없었다. 사실 몇십 년 전 직지사 마당에서 올려다본 황악산 정상은 꽤 매력적이라 기대가 적지 않았는데 굉장히 실망스러웠다. 사진을 찍자니 트레일 러닝하는 젊은이가 헉헉 거리며 달려온다.
정상을 내려오는데 중년 남성 혼자 삶의 무게를 잔뜩 짊어진 듯 피로한 얼굴로 올라온다. 10시 선유봉(1045m)에 이르렀는데 역시 안개가 걷히지 않는다. 25분 백운봉(770m)을 거쳐 41분 직지사 갈림길이 나온다. 11시 4분 운수봉(740m)에 도착했다. 국토지리정보원에는 천덕산으로 기재돼 있다. 김천 대항면과 영동군 매곡면 경계를 이룬다. 직지사 운수암이 아래에 위치한단다.
운수봉에서 내려와 여시굴을 만난다. 11시 28분이다. 정말 여우 가족이 웅크리고 있겠다고 싶을 정도로 깊다. 20분 뒤 여시굴산(620m) 정상에 이르니 날이 무척 밝아졌다. 김태연 선생은 길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황악산 정상에서도 보이지 않던 괘방령이 보이는 조망 포인트가 있다는데 나는 찾지 못했다.
내려가는 길이 갈짓자 형태로 아찔하다. 통나무 계단이 유실돼 흔들거리나 위치가 바뀌어 위태로운 지형에 걸쳐만 있어 신경을 바짝 써야 했다. 12시 26분 괘방령(311m)에 내려섰다. 과거 합격자 방을 내걸어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추풍령 다음으로 낮은 지역이라 차량 통행이 빈번한 느낌을 준다. 도로 건너 가성산 3200m라 써붙인 표지판을 보고 올라간다. 김태연 선생은 영동과 김천을 연결하는 길이 상당히 얽혀 있어 주의해야 한다고 책에 썼는데 생각보다 길이 뚜렷해 걱정을 덜었다. 책이 발간된 것이 2017년이어서 그 뒤 많은 이들의 발길이 쌓여 길이 또렷해진 것으로 어루짐작했다.
이번 종주 처음으로 시원한 조망을 만끽했다. 오후 3시. 산행 시작한 지 8시 30분 뒤라 조망점에 대한 갈급이 상당했다. 가성산(730m) 정상에서다. 가운데 여시골산, 운수봉, 백운봉, 황악산이 일렬로 서 환송하는 듯했다. 그 뒤 아득한 산그리메 대부분도 내가 걸어온 길이라 생각돼 반갑기만 했다. 괘방령~가성산은 4.1km인데 상당히 힘겨웠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여러 차례 반복되기 때문이다.
가성산을 내려섰다가 김천공동묘지가 있는 광천리, 또 그 뒤 추풍령 휴게소로 내려가는 길로 이어지는 길이 나온다는데 눈에 띄지 않았다.
49분 장군봉(606m)에서 쉴 틈을 찾지 못하고 눌의산 쪽으로 오르는데 고빗사위를 기신기신 오른다. 누군가 키가 2m는 됨직한 바위에 '웃고, 참자'라고 노란 글씨를 새겼다. 위에는 참외 반쪽 자른 것 같은 것이 놓여 있다. 다가가 보니 음식 메뉴 전시할 때 쓰는 것이었다. 다른 반쪽은 바닥에 떨어져 있다. 일종의 설치미술인가 싶었다. 보통 쉼표는 나같은 직업병에 걸린 자들이나 굳이 쓰는 것인데 무슨 뜻으로 이 깊은 산중에 이런 작품을 남겨놓았나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4시 48분 눌의산(743m) 정상에 당도했다. 대간 가운데 가장 낮다는 추풍령(220m) 일대와 추풍령 저수지, 금산, 돌기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마지막 숨도 고를 겸, 지도를 찬찬히 살폈다. 김태연 선생의 책과 휴대폰 다음 지도를 번갈아 봤다. 이렇게 뜸을 들인 것은 정상 왼쪽과 오른쪽 모두 표식기들이 내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왼쪽이 약간 많았다.
두 번 세 번 아래를 보니 추풍령역이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장고 끝에 악수였다. 아래 지도를 보며 설명해 보자. 눌의산 정상에서 왼쪽을 택했어야 했다. 나는 오른쪽을 택해 내려가다 볼펜으로 그린 선을 따라 내려가 지방도로 내려섰다. 김태연 선생의 책에는 '정상에서 조금만 내려오면 헬기장이 나온다'고 했는데 나오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발길을 돌려 정상으로 올라갔어야 했다. 하지만 워낙 표식기들이 많고 헬기장도 자주 이용하지 않으면 흔적이 없어질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아래를 보니 공원묘원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와 초조해졌다. 하지만 길이 워낙 확연했다. 내려서니 금릉공원묘원이란다. 결과적으로 엄청난 체력 소모를 불러왔다. 제대로 갔으면 22.8km인데 공원묘원 나와 지방도를 타고 추풍령IC로 나와 빙 돌아 추풍령에 들어서느라 27km쯤 걷게 됐다.
카카오 택시나 일반 택시 호출이 되지 않았다. 추풍령까지 4.3km 밖에 안돼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보는 듯했다. IC 쪽으로 나와 지방도를 걷자 카리브 모텔 전방 500m 표지판이 들어왔다.
낙담도 낙담이고, 몸도 피곤해 터덜터덜 걸었다. 지나치는 차들이 모두 경계하는 눈치가 역력한 것도 속상했다. 치매 어르신이 길에 나와 헤맨다는 식으로 경계하는 듯했다.
오전 6시 27분 산행을 시작해 오후 6시 32분 모텔에 도착했다. 12시간을 걸었다. 5만보가 조금 되지 않았다. 바로 다음날 산행을 시작해야 하는 금산 아래, 산행 들머리 지척에 모텔이 있었다. 형편없는 불운의 연속 가운데 행운 하나였다.
동남아시아 근로자 숙소로 쓰이는 듯했다. 모텔 안에 캄보디아 인삿말이 내걸려 있다. 주인 할머니는 "현금이면 3만원, 카드면 3만 5000원"이라고 말씀하신다. 카드로 결제했다. 방은 걱정했던 것보다 괜찮았다. 하우스키핑은 불만족스러운데 난방이 잘 됐다. 서둘러 샤워를 했는데 물이 미지근했다. 이만하면 뭐, 스스로를 달랬다.
씻고 모텔 나와 100m쯤 내려오니 순대국집이 나온다. 소머리국밥을 시켰는데 오랜 술자리가 이어졌는지 경상도 아재들과 아지매들이 꽤 어수선하다. 계속 소리가 높아진다. 추풍령은 행정구역 상 영동군에 속하는데 경상도 사투리가 요란하다. 내 뒤에 서너명, 내 왼쪽에 아재 한 분, 그리고 문제의 아재와 아지매 7~8명이 자리했는데 시끄러운 이들은 도무지 자리를 파할 것 같지 않다.
첫 술을 떴을 때 역시 경상도 했는데, 워낙 이날 제대로 된 한끼가 처음이라 게눈 감추듯 없앴다. 계산하며 빵 살 곳 물으니 편의점 밖에 없다고 했다. 폐업한 가게가 적지 않아 지방소멸을 또 절감한다. 숙소 돌아오는데 캄보디아 여인네로 보이는 이가 승합차에서 나를 피해 내리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객실에서 영남알프스 가지산장에서 남긴 좋은데이 소주를 들이키고 붕어빵싸만코를 해치운 뒤 밤 9시쯤 잠이 들었다.
다음날(23일) 새벽 2시 조금 넘어 눈을 떴다. 난방이 너무 잘돼 더운 탓이었다. 상의를 모두 벗고 전전반측했다. 즐겨 듣는 '명연주 명음반' 재방송을 들으며 김태연 선생 책을 다시 들여봤다. 어제의 결정적인 패착을 반추하며 정독하려 했는데 잘 되지 않는다. 전북 익산에 사는 우정 김창배 선생이 대간의 교통과 숙박 정보를 정리한 것을 살피니 상주시 모동면 상판리를 출발해 공성면, 상주터미널로 향하는 버스가 오후 2시 조금 넘어 오늘 목적지인 큰재를 통과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에 맞추려면 오전 5시에 모텔을 나서야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것을 알게 된 것이 5시 10분 무렵이었다. 서둘러 배낭을 싸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그게 가능할지 저울질했다.
오늘 길은 해발고도 300~400m 지대라 조붓한 숲길이 많은 편이다. 용문산(710m)과 웅이봉(국수봉, 793m)이 가장 높은 곳이었다. 그런데 김태연 선생도 8시간 10분을 예상했는데 9시간 30분이 걸렸다고 했다.
해서 포기하고 객실에서 전날 편의점에서 구입한 수종발효 단팥빵 둘에 에티오피아 커피 우려내 먹었다. 아침 대신이었다. 배낭을 챙기고 모텔에서 제공하는 생수 둘 챙겨 모텔 앞 금산 안내도 앞에 서니 오전 5시 47분이었다.
700m쯤 걸으니 금산(384m) 들머리 표지가 나온다. 조금 오르니 큰재까지 19.6km 떨어져 있으며 7시간 30분이 걸린다고 나온다. 결론부터 서두르자면, 배낭 없이 트레일러닝해야 가능한 시간이다!
여튼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 된다. 추풍령면과 아래 김천시 봉산면의 경계다. 초반은 조금 지겹다. 계속 인간의 개발 흔적과 만난다. 도로 소음과 채석장 굉음, 농사 장비 소리가 섞여 들린다. 더욱이 금산 정상의 북동쪽 용문산으로 바로 길이 이어지지 않고 돌기산()과 사기점 고개, 작점 고개, 갈현 등 수많은 고개를 넘나든 뒤 용문산 정상에 이른다. 산경과 수경을 모두 감안해 그런 것이라 짐작한다. 사기점 고개와 작점 고개는 임도와 포장로를 넘나들어 등산로를 찾아야 해 긴가민가, 자꾸 좌고우면하게 된다. 주변에 농가와 하우스, 농장도 즐비해 방향과 앞선 이들의 표식기를 우직하게 따라가야 한다.
오전 6시 50분 들기산(498m)를 밟고, 7시 30분에야 처음으로 어제 발 아래 둔 눌의산 자락이 눈에 들어온다. 단조로운 길을 재쳐 걷는다. 추풍령 저수지와 작점리가 내려다보인다.
이 길 어디쯤에서 '백두대간 481m 준-희' 판넬을 매단 봉우리를 만났다. 김태연 선생에 따르면 2000년대 전반 먼저 세상을 등진 부인의 넋을 위무하려고 부부의 이름을 대간 곳곳에 남긴다는 애틋한 사연이었다. 대간을 종주하며 '대구 비실이 부부' 리본도 많이 만났는데 앞으로 '준-희' 리본을 만나면 마음이 먹먹해질 것 같다.
김태연 선생은 2017년 10월 4일 사기점고개(390m)에서 야영하던 프랑스인 젊은 부부와 마주친 사연을 비교적 상세히 소개했다. 설악이나 지리, 덕유처럼 큰 산도 아니고, 한국말도 전혀 하지 못하는 벽안들이 이 시골 산길에서 야영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이들 부부와 용문산 정상에서 다시 만났는데 이들이 프랑스판 백두대간 지도를 펼쳐 보이며 자신들의 목적지를 알려주더라고 돌아봤다. 그리고 책을 내기 얼마 전에야 뉴질랜드 남성 로저 셰퍼드가 2007년 남한 구간을, 2011~12년 북한 구간을 섭렵해 최초의 남북한 백두대간-찐백두대간 종주자로 기록된다는 부끄러움에 일단 남한 구간을 완주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는 사연을 들려줬다.
나는 사기점고개 지나 갈기봉 오르는 길(임도 건너 뒤쪽으로 표식기가 매달려 있음)을 외면하고 임도를 따라 500m쯤 걷다가 아니다 싶어 표식기대로 걷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시간 여유가 있었다면 군 기지가 있으며 말 갈기를 닮은 것 같은 난함산(733.4m) 정상에서 조망하는 것도 좋다고 했는데 아쉽게도 그럴 만한 여유는 없었다.
작점고개 생태이동통로에서 이날 유일하게 중년 남성과 마주쳐 어색한 수인사를 나눴다. 9시 23분 한참 떨어진 지기재 산장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10시 2분 무좌골산(474m)을 거쳐 계속 오르기만 한다. 11시 10분쯤 힘에 부쳐 편의점에서 산 도시락 '고진많'을 까먹었다. 참 이름 특이하네, 여기기만 했는데 조금 자세히 살폈어야 했다. 고기진짜많이란 뜻이었다. 소와 돼지, 닭 등 고기 반찬만 좌르르했다. 김치와 계란말이 한쪽이 다른 메뉴의 전부였다. 퍽퍽해 밥에 물을 말아 겨우겨우 삼켰다.
12시 정각에 용문산(708.5m)을 발 아래 뒀다. 오를 때는 주변을 조망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웬걸 높다란 나무의 가지들이 모두 가려버린다.
오른쪽 아래 용문산기도원을 끼고 길을 재촉해 내려갔다가 다시 웅이산(국수봉)을 향한다. 370m 내려와 웅북리(상웅) 내려가는 갈림길을 거쳐 오후 1시 청운봉(734.2m) 거쳐 1시 20분 웅이산에 이른다. 비로소 이날 처음 시원한 조망을 얻었다.
큰재 내려서기까지 거리 안내가 제각각이라 불만이었다. 지도를 곁들인 안내판에는 2.7km로 돼 있고, 바로 그 옆 방향 표지판에는 3.3km로 돼 있다.
아무튼 큰재 도로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르러 상주 공성 택시에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조금 고민하다 추풍령 택시 장성주 기사님(010-3404-1098)에게 전화를 했더니 받았다. 오는 데 족히 30분은 걸린다고 해 백두대간 생태교육장(인성분교가 폐교돼 그 자리에 세운 듯했다) 정자에서 등산화와 양말 벗어버린 채 배낭에 몸 기대며 명연주 명음반을 들었다. 오늘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18.7km를 9시간 10분쯤 걸었다. 약간 무리해 30분을 단축했더라면 상주행 버스를 탈 수 있었겠다 싶었다.
3시 20분 무렵 택시가 도착했다. 기사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맨발로 택시에 올랐다.
장성주 기사님은 개인 볼일을 보고 달려오느라 정신 없었다며 제발 도착지에 이르기 한참 전에 전화를 해달라고 통사정을 하신다. 나도 나름 변명해보려 했지만 내 잘못이었다.
어쩌면 2시 10분 전후로 큰재를 통과하는 버스를 탔더라도 상주에서 서울 가는 버스편이 마땅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택시를 탈 때만 해도 추풍령역으로 가 대전역에서 서울행 KTX로 갈아 탈 요량이었는데 기사님은 대전행 열차가 3시 22분 추풍령역을 떠났다며 황간역에 가면 4시 18분 대전 거쳐 서울 가는 무궁화호가 있다고 해 황간역으로 가주십사 말씀드렸다. 큰재에서 추풍령까지는 3만원, 황간까지는 4만 5000원을 달라 했다.
3시 55분쯤 황간역에 도착, 짬을 이용해 휴대폰을 충전했다. 10년 전쯤 이곳에서 중국집에서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다고 말했더니 기사님이 아 덕승관요? 한다. 맞았다. 열차 도착 10분 전에 플랫폼으로 나오라는 안내가 나온다. 정말 오랜만에 간이역 철로 둘을 건너 걸어 무궁화호 열차를 탔다.
너무 피곤해서일까, 졸린 느낌은 드는데 잠이 들지는 않았다. 5시 10분쯤 대전역에 내려 아이스아메리카 한 잔 사들고 5시 31분 열차에 올라 6시 45분 서울역에 도착, 집에 돌아오니 7시 30분이라 아내와 엿새 만에 저녁을 들 수 있었다. 장성주 기사님에게 거듭거듭 감사의 문자를 드렸다.
이번 백두대간 종주는 시원한 조망이 주어지지 않아 아쉬움 한가득이었다. 24일 수요일 전국적으로 비가 예보돼 있고 경북 지방에도 30mm가 내린다고 해 부득이 1박 2일로 줄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금 결핍된 구간도 우리의 소중한 산하다. 곳곳에 인간과 개발의 생채기가 크고 앞으로도 커지기만 할 것 같은 안타까움은 쉬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