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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마태 15,29-37)
Great crowds came to him,
having with them the lame, the blind, the deformed, the mute,
and many others.
They placed them at his feet, and he cured them.
사람들이 예수님께 병자들을 데리고 왔다. 대부분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다. 치유를 포기하며 살고 있던 중에 예수님의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문둥병을 고치시고 죽은 이를 살리시는 분이 오셨다고 하기에 몰려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모두를 치유해 주신다. 그분의 지극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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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병자가 예수님 주변에 모여들었습니다. 눈먼 이들을 비롯하여 대부분 불치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며 살아왔습니다. 몹쓸 병에 걸린 것은 죄 때문이라는 의식이 팽배해 있던 시절입니다. 본인의 죄 때문이거나 부모의 잘못 때문에, 어쨌든 죄의 결과로 불치병에 걸렸다고 믿던 시절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이중으로 고통 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병자들에게 관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은 웬만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반드시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중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의 아픔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어느 대목에서는 병을 낫게 하시며, 죄를 용서하신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병의 원인인 죄를 없애 주니 안심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그들을 고쳐 주십니다. 그분의 사랑입니다. 그들 역시도 예수님 앞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주님께서는 그들의 사정을 잘 아십니다. 그들의 눈빛만 보아도 무엇을 바라는지 아십니다. 얼마나 큰 애절함이 그들의 눈빛에 담겨 있었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눈빛을 통하여 마음을 읽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눈빛으로 주님 앞에 나아갑니까? 가끔은 애절한 눈빛이어야 합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눈빛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만 생기게 합니다.
새벽을 열며
며칠 전, 무엇을 찾으러 창고에 갔다가 거미 한 마리가 허공에 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것도 연결되어 있는 것 같지 않은데,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지요. 그렇다면 이 거미는 날고 있는 것일까요? 날개 없는 거미가 날 리 없지요. 이 거미는 거미줄에 의해 매달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거미줄이 워낙 얇다보니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지요.
거미줄이 얇아서 잘 보이지 않지만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잘 보이지 않고 힘도 없어 보이는 거미줄이 이 거미를 지켜주는 생명줄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생명줄이 있습니다.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계시는 하느님. 바로 하느님이 우리의 생명줄입니다. 어떠한 순간에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써 매순간 우리를 지켜주시지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 하느님이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외면할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요? 그래서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하느님 봤어요? 봤으면 증거를 대 보세요. 과거에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도 사천 명이나 되는 군중을 배 불리 먹으셨다는데 왜 그런 기적을 요즘에는 하지 않습니까? 다리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을 왜 요즘에는 고쳐주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들이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은 이런 기적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직접 목격했고 예수님의 말씀도 직접 들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기적이 우리의 믿음을 키워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믿음이란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있는 거미줄처럼, 우리의 눈으로 잘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계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에는 두 종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풍향계 믿음이고, 또 하나는 나침반 믿음입니다.
일기예보를 보다보면 종종 화면에 풍향계가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지금 바람이 어디서 어디로 분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풍향계를 설치하지요. 그런데 이 풍향계는 어떻게 움직일까요? 바로 바람의 방향에 따라 움직입니다.
우리들의 믿음도 이 풍향계와 같을 때가 있습니다.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풍향계처럼, 자기에게 처해진 상황에 따라서 쉽게 흔들리는 믿음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러한 풍향계 믿음이 아니라, 나침반 믿음을 갖춘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나침반은 어디에 놓이든지 가리키는 방향이 항상 일정합니다. 즉, 북쪽(N극)만을 가리킵니다. 우리도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어도 주 하느님만을 향하는 믿음을 간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제시하는 사랑의 길로 그리고 참 행복의 길로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나침반 믿음을 갖도록 노력하세요.
빠다킹신부
예수님 VS 우리
-조명연 신부-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지 않을 이유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미움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또한 사랑하는 것을 얼마나 많은 이유로 거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일이 많다는 핑계로, 시간이 없다는 말로
사랑하는 일을 외면하고 있었던 나는 아니었는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그 많은 군중들에게 좋은 말씀을
전해주신 것은 물론, 아픈 병자들의 병을 낫게 해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는 것 자체에 만족하면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사람들의 배고픔. 사실 예수님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나 많았고,
그들이 이곳에 온 목적은 배를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의 목적을 뛰어넘어 배고픔까지도 해결해주시지요.
이 세상은 어떻게든 사랑을 주려는 예수님과 어떻게든 사랑을 주지 않으려는
우리와의 대립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과연 어디를 선택하시겠어요?
함께 나누고자 했기에
-김인숙 수녀(살레시오 수녀회)-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는 그 나라 음식을 맛보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 음식 섭취가 힘든 사람이 있다. 그래서 여행사의 ‘안내문’을 읽어보면 유의사항에 튜브형 고추장이나 김, 깻잎 등을 가지고 가면 좋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하지만 나는 준비하지 않았다. 언제 또 여길 오겠느냐 싶어 억지로라도 요리의 깊은 맛을 보고 오겠다는 각오를 했기 때문이다. 세계 3대 요리로 꼽힌다는 터키 음식은 그 종류와 형태가 다양했다. 특히 빵은 원더풀 브라보 웰빙 식품이었다.
식사시간은 지친 여행길에 반가운 순간이다. 신기한 것은 하루 종일 떠돌아다니다가도 밥을 먹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생기가 돌았다. 그런데 4일째인가 5일째 되던 날, 나는 심한 설사와 몸살을 앓았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세계 3대 요리고 나발이고 냄새도 맡기 싫었다. 이런 나에게 여기저기에서 자신들이 가져온 고추장·멸치볶음·컵라면을 건네주면서 이거라도 먹고 기운을 내라고 격려했다. ‘아니, 이거라도 먹으라니…. 얼마나 귀한 음식인가.’ 나는 어제만 해도 안 먹겠다고 거절했던 고추장을 터키의 대표 요리인 케밥에 듬뿍 넣고 비벼서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유심히 살펴보니 식사 때마다 우리나라 반찬이 담긴 플라스틱통이 식탁을 돌고 있었다. 가장 연세가 많은 분이 편찮으실 때는 토종 누룽지도 나타났다. 누군가가 이곳 터키까지 열심히 챙겨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국 반찬을 양념 삼아 터키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으며, 아픈 이들한테는 그 이상의 비상약이 없을 정도로 회복 효과가 컸다. 자신만 먹으려 하지 않고 함께 나누고자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 변성수 신부-
어느덧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12월 대림시기가 이미 다가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다림은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그 사랑을 만끽하길 기대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영혼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따라가는 것처럼, 오늘 복음에도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 말 못하는 사람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닙니다. 이 사람들은 사흘 동안 굶주리면서까지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사람들입니다. 이 수많은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따라다녔을까? 단순히 예수님께서 병을 잘 고쳐서 그럴까…? 물론 요즘도 ‘어디 병원 잘 고치더라…, 아니~ 기들어갔던 사람이 걸어서 나오더라.’는 소문이 퍼지면, 그 병원은 이제 새벽부터 줄서서 기다리는 병원이 됩니다. 더군다나 관절염 있고 허리 아픈 할머니들이 두세 시간씩 기다리고 치료를 받는, 소이 잘~ 나가는 병원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그 수많은 사람들이 사흘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닌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단순히 예수님께서 병을 잘 고쳐서 사람들이 따라다니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분명 그 사람들은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느끼고 발견했을 겁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군중을 가엾게 보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예수님을 통해서 느꼈기 때문입니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아~ 예수님의 연민과 사랑 가득한 이 마음에 지금도 녹아버릴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마음을 묵상하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메시지도 잘 들어야 하겠습니다. ‘너희도 연민 가득한 사랑의 마음으로 니가 만나는 사람들을 대하여라.’
신앙인이란 내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주님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인자하고 사랑 가득한 나의 눈빛을 통해서, 주님의 축복과 위로가 가득한 나의 입술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보여 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참으로 복된 신앙인이 될 겁니다. 오늘 하루 자그마한 몸짓에서도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우리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주님을 향한 희망으로 살아가자.
-경규봉 신부-
예언자는 메시아 시대에 하느님 백성이 누리게 될 기쁨에 대해 예언한다.
그날이 오면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위하여 풍성한 잔치를 베풀어주실 것이다. 종살이로 인하여 굶주리고 야윈 그들에게 살진 고기로 기름지게 해주실 것이며, 종살이에 찌들려 고통과 슬픔에 잠겼던 그들에게 맑은 술을 주심으로써 여유와 웃음을 안겨주시리라. 그날 하느님과 그들을 가로막던 모든 장벽은 허물어지고 사람들은 마치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처럼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1고린 13,12;1요한 3,2).
인생의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죽음(1고린 15,26)을 없애시고 영원한 삶을 주심으로써 눈물과 슬픔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묵시 7,17; 21,4). 다른 나라로부터 웃음거리가 되었던 당신 백성의 수치를 깨끗이 씻어주시리라(로마 11,11-12). 그리하여 하느님의 구원이 도래 할 때 그 약속을 의지하고 기다린 사람들은 기쁨과 즐거움을 만끽할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권능과 구원의 손길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기뻐 노래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을 찬양할 것임을 예언한다.
삶이 괴롭고 힘들 때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많다. 이들은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다. 사람은 희망이 없이는 살 수 없다. 절망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잃어버리면 더 이상 살 수 없다. 사람은 꿈과 희망을 먹고 살아간다. 희망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해주는 힘이며, 우리를 살아가도록 하는 원동력이다.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이 있기에 현실의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며 사는 것이다. 꿈과 희망은 그처럼 우리에게 소중하고 귀한 것이다.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인간적인 꿈과 희망이 전혀 없었다. 대제국인 바빌론을 상대로 전쟁을 할 수도 없었고, 고국의 땅을 되찾을 희망도 없었으며, 언제 포로 생활이 끝날지도 모르는 암담하고 절망적인 상태였다. 그러한 그들이 그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오직 주님께 희망을 두고 포로생활의 어려움을 헤쳐 나갔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메시아 시대가 올 것이며, 그들이 구원되고 복을 누릴 것임을 약속해주셨다.
그렇다. 우리가 비록 현실이 암담할지라도 그러한 암담하고 절망적인 상태에서도 희망을 찾으며, 희망을 갖고 역경과 고난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것은 주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인은 주님의 부활을 통해서 희망을 찾으며 믿음으로 살아간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에게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을 주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건져내시고, 영원한 삶을 보증하셨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죽음 너머의 세계가 분명히 있음을 보여주셨다. 천국과 연옥, 지옥이 존재함을 분명히 보여주심으로써 인간이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를 확실히 알려주셨다.
인간은 바람처럼 왔다가 연기처럼 사라져 없어지는 덧없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고귀하고 소중한 존재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향한 희망과 믿음으로 이 세상의 고난과 역경을 헤치며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과 희망 안에서 우리의 삶은 의미를 가진다. 잠자고 일어나는 것도, 먹고 마시는 것도, 일하고 쉬는 것도, 우리가 행하는 그 모든 것은 믿음과 희망 안에서 비로소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며,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살며, 궁극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을 믿음으로 알기 때문이다.
오늘 예언자가 이사야서를 통해서 들려주는 약속은 곧 우리에게 들려주신 약속임을 굳게 믿자.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해서 주님을 보고, 천국을 보며, 그 희망으로 살아가자.............◆
저 군중이 가엾구나...
-곽승용 신부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주님의 평화와 축복 속에 기쁜 하루를 보내길 빕니다.
오늘복음에는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중에 혹은 가족들 중에 아픈 이들이 있으면 그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을 빕니다.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 그리고 모든 의료인들에게 특별한 주님의 평화와 은총을 청합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와 여러 단체 및 의료기관이 병자들에게 최선의 도움을 베풀어 주고, 병자들에게 인간적, 초월적 차원에서 고통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도록 도와주며, 각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특별한 방법으로 병자와 병원 종사자들에게 도와주고 있습니다. 아울러 자원 봉사자들의 참여를 더욱더 장려하고, 의료계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의 정신적, 도덕적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며, 사제들을 비롯하여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병자에 대한 신앙적 도움의 필요성이 더욱더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세계 병자의 날을 “교회의 선익을 위한 기도와 나눔, 고통을 봉헌하고 병자의 얼굴에서 고통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한 그리스도의 거룩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는 날”로 기념해 줄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아파하는 이, 힘들어하는 이, 가난한 이들에 대한 지속적 관심과 사랑을 표현해야 함을 다시 한번 상기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만나게 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떻게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배고파하는 이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가를 잘 보게 됩니다. 복음의 내용을 살펴보면, 삼일 전부터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군중들이 모여 있는데 먹을 것이 없습니다.
이를 예수님께서 보시고 “저 군중이 가엾구나” 하십니다. 이 가엾음이란 말은 어원적으로 볼 때 함께 고통에 참여하고 그 고통 속에 뛰어 들어 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때문에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 스스로 군중이 먹을 것이 없어 배고파하는 그 고통을 함께 느끼고 그 고통에 직접적으로 뛰어 들어가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관심과 사랑에 의해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배고픔에 있는 군중들의 상태를 아셨습니다. 곧 그들과의 친밀감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 친밀감이 그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촉발시키고 이 관심과 애정이 가엾음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이 가엾음이 그들의 고통과 힘듦을 나누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힘듦과 고통을 풀 수 있는 것을 행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아파하는 이, 힘들어하는 이, 그리고 가난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고통에 함께하고 그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껴안으며 그 고통의 현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그네들에게 표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내장에서부터 그네들에 대한 가엾음이 용솟음칠 것이고 이 마음이 우리를 그네들과 하나 되게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네들의 아픔을 기쁨으로 나눌 수 있도록 행동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아파하는 이들, 힘들어하는 이들, 배고파하는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가엾음을 느낍니까? 그리고 그들을 위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까?..........◆
연예인
-민경철 신부-
“그대의 연예인이 되어 항상 즐겁게 해줄게요… 연기와 노래 코미디까지
다 해줄게요… 언제나 처음 같은 마음으로… 난 그대의 연예인….”
싸이라는 가수가 부르는 ‘연예인’이란 곡의 가사입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 이 한 몸 불살라 여인의 기분에 따라 영화배우, 개그맨, 탤런트, 가수가
되어 평생토록 만능 연예인으로 살아주겠노라고 다짐을 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왠지 예수님이 만능 연예인처럼 보입니다. 당신도 피곤하고, 힘들고,
쉬고 싶었을 텐데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 눈먼 이, 다리 저는 이, 각종 불구자와
병자들에게 각각 맞춤 치료를 해주십니다. 몸만 건강해서야 되겠습니까?
영혼의 건강을 위해 따끈따끈한 말씀도 전해주시고,
배도 고플 것 같아 먹을 것도 마련해주시지요.
우리의 갈증을 채워주시려 땀을 뻘뻘 흘리며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이
왠지 안쓰러워 보입니다. 제가 좀 도와드려야겠습니다.
두번째 약속
-신금재(캐나다 캘거리 성 안나 한인 천주교회)-
◆“이 아이를 얼른 큰 병원으로 옮기셔야 합니다. 여기서는 살릴 수 없습니다. 서두르세요.” 여기저기 병원을 전전하면서도 병명을 찾지 못한 채 어느 소아과에서 정신을 잃은 나를 보고 간호사가 친정어머니에게 했던 말이다. 다음날 나는 부평 성모병원으로 실려갔고 바로 그날부터 나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그렇다. 나도 갈릴래아 호숫가의 많은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그분의 치유를 기다리던 한 사람이었다.
나는 병원 침대에 누워서 자신을 많이 원망했다. 내가 아픈 것은 많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구약시대의 사람들처럼 지금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방과후 같은 반 친구들이 자주 문병을 오곤 했는데, 한 친구가 심각하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금재는 죽을지도 몰라. 병원 앞마당에 있는 성모님의 얼굴이 아주 슬픈 표정이셨어.” 나는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지만 다행히 그해 성탄절을 며칠 앞두고 퇴원했다. 무성한 소문을 뒤로한 채 다음해 개학 때는 학교로 다시 돌아갔다.
퇴원할 때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두 가지를 당부하셨다. “3년 동안 연시와 곶감을 조심해야 한다. 대장의 일부를 잘라냈기 때문에 소화가 잘 안 될 거야. 그리고 엄마를 업고 다녀도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으니 잘 해드려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의사 선생님과 한 두 가지 약속 중에서 첫번째 약속은 잘 지켜서 다시 건강한 삶을 누리고 있지만 두번째 약속은 아직도 남아 있는 영원한 숙제다. 이렇게 어머니의 땅, 고국을 멀리 떠나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찾으리라. 치유를 받은 이스라엘의 군중처럼 하느님을 찬양하리라.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과 함께 기도 중에 어머니를 만나리라.
<몸에 밴 작은 사랑의 실천>
-윤경재-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리하여 말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시자, 그들이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 (마태 15,29-37)
미국의 어느 심리학자가 책에 자기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달라이 라마’라고 썼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참 특이 했습니다. 언젠가 자기가 아는 사람에게서 달라이 라마 초청 강연회 초대장이 배달되어 왔는데, 자기는 종교도 다르고, 또 불교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 참석을 망설이게 되었답니다. 그래도 초청한 사람의 따뜻한 마음에 걸려 참석했습니다. 우연히 달라이 라마와 마주치게 되어 그분과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미는 순간 옆구리에 끼고 있던 봉투가 떨어지며 종이 몇 장이 바닥에 날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달라이 라마는 거의 순간적으로 허리를 굽혀 종이 서류 몇 장을 주워주며 “저도 자주 물건을 떨어뜨린답니다.”라고 하면서 눈인사를 하시는데 안경너머 그분의 눈에서 맑은 호수 같은 평화가 느껴졌다고 고백합니다. 그 눈길을 평생 잊은 적이 없다고 적어 놓습니다.
영문학자이며 수필가인 장영희 교수는 소아마비로 양다리가 불편하여 목발에 의지하여 걷는다고 합니다. 그녀가 쓴 수필 책에 ‘하면 된다?’ 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어느 날 ‘홀스또메르’ 라는 연극을 지하 극장에서 보고 나오는 중이었습니다. 계단이 많은 통로에서 힘들게 올라오려는데 마침 옷을 갈아입고 나오던 배우 유인촌 씨가 층계 때문에 힘들어하는 자신을 보더니 등을 내밀어 들쳐 업고는 밖에까지 데려다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의 행동이 한번 베풀어지는 치기어린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을 저자는 알았기에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어느 수도회 소속 사제는 수도회에서 피정 때 의무적으로 거치는 무전여행에 대해 말합니다. 수련기 피정 마지막 일주일간 아무 것도 지니지 않고 떠나는 구걸여행이었다고 말합니다. 몇 끼를 쫄쫄 굶어 뱃가죽이 등짝에 달라붙었을 때, 무작정 찾아 들어간 어느 시골 집 할머니께서 주시던 개떡이 그렇게 달고 맛있었다고 합니다. 평생 그 맛을 못 잊어 때마다 그 할머님을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 할머님이 잘 견디며 하느님께 봉헌하시라는 부탁 말씀에 수도 사제 생활의 어려움을 견딘다고 하십니다.
우리들은 오늘 복음에서 커다란 기적에 눈이 더 쏠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치유와 빵을 많게 하시는 기적들이 모두 군중이 가엽다고 여기는 마음에서 출발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가족, 친지들이 아파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들쳐 메고 업고 예수님 발치에 모였습니다. 또 그들이 사흘이나 제대로 먹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지닌 모든 고난과 배고픔을 다 아셨습니다. 사랑을 지니셨고 또 그 고난을 직접 겪으신 분이셨습니다. 인간의 어려움을 미리 살펴 배려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은 기적을 행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지닌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나눈다면 모든 사람들이 흡족하게 먹고도 더 많이 넘칠 것이라는 사실을 체험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감동받는 것은 그들이 베푸는 커다란 선물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평소에 지니고 사는 사랑의 자세를 발견할 때 우리는 감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내게는 처음 경험되지만, 그가 베푸는 작은 행동을 통해 사랑이라는 큰 물줄기가 여전히 흐르고 있다는 감사함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사랑이 발견된다는 희망 때문이며, 그로인해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가 베푸는 사소한 행동이 내게는 삶의 용기를 불어 넣어 주기 때문입니다.
장영희 교수는 그 글 모두에서 ‘하면 된다!' 는 말이 지닌 모순을 지적합니다. 층계하나를 못 올라가는 휠체어 장애인들에게는 “당신은 할 수 있소”하고 아무리 외쳐도 그가 벌떡 일어나 걸어 올라갈 리 만무하다고 씁니다. 그 말 뒤에는 자신이 지녔던 사회적 굴레를 그렇게 항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글 말미에서 제자가 선물로 주었고 ‘하면 된다!’고 쓰인 그 자갈돌을 버리지 않고 책상위에 놓아두었다고 씁니다. 바로 한 배우가 보여준 작은 사랑의 실천에서 그녀는 삶의 희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나눌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몸에 밴 작은 사랑의 실천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듣는 하루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병자를 낫게하시고, 빵의 기적을 베푸시다
-서울대교구 김웅태 신부-
오늘 복음[마태 15,29-37]에서 예수께서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주린 자를 먹여주시는 사건을 통해, 우리 인간에게 대한 예수님의 자비, 불쌍히 여겨주시는 마음이 어떠한지를 찾아볼 수 있고, 또 그것은 유대인에게만 국한되어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에게도 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예수님의 자비심과 인간을 사랑하시는 차별 없는 순수한 사랑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그 사실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는 가를 알아볼 수 있는 점이라고 하겠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
1) 예수님은 당신에게로 오는 절름발이, 불구자, 맹인들과 벙어리들을 고쳐주심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신체적인 장애와 고통을 당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동정을 베풀고 계심을 알 수 있으며,
2) 먼 길에서 온 사람들이 지쳐있음을 알아주시면서, 험한 길을 되돌아 걸어 갈 수 있게끔 힘을 주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로 그러한 예수님의 마음씨는 인생에서 나그네 된자, 세상일로 고되게 시달리는 사람들, 피곤한 사람들의 그 고됨을 알아주시면서, 삶의 용기를 주시는 모습이다.
3)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무엇보다도 주린 자를 먹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우리 인간의 영혼 구령의 관심을 크게 가지신 만큼, 인간 육신에 대한 관심도 가지셨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복음 전파의 생활을 3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예수께서는 그 각각의 단계를 끝마칠 때마다 자기를 따르는 백성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주셨다는 사실이다.
1) 5,000명을 먹이신 사건으로서, 그것은 갈릴레아 지방의 전교생활을 끝마칠 때 일이었다. 그 후 예수님은 다시는 갈릴레아 지방에서 가르치시거나, 설교하고 병 고쳐주시는 일이 없었다는 점이다.
2) 4,000명을 먹이신 사건으로서, 이것은 팔레스티나의 국경을 넘어, 뚜로와 시돈 지방, 데가뽈리 지방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끝맺으실 때 일이었다.
3)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만찬을 베푸신 일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서 삶을 마치실 때 일인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당신을 따르며 당신과 함께 길을 걷는 자에게는 힘이 되어 주셨고, 또한 생명의 빵을 주셨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간에게 대한 예수님의 애정을 생각할 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도 어떠한 환경에서나, 예수님을 찾아갈 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힘과, 그분께서 주시는 빵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 속에서 생활해야 하겠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해 오신 것일까요?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복음 : 마태 15,29-37
찬미예수님
옛날 어느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외딴 곳에 한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눈이 하나인 사람들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마을에 눈이 둘 있는 정상인 한 사람이 길을 잃고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그 사람을 보고 놀라며 그 사람을 불구자 취급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남들보다 눈이 하나 더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리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 말 못하는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말 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게 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병자들을 고쳐주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는 오늘의 복음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세상에도 오셔서 우리를 고쳐주려고 하신다는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예전과는 달리 의학이 발달하여 대부분의 병들은 고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과연 어떤 환자를 위해 지금의 이 세상에 오시려는 것일까요?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의 치유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몸이 불편하고 병들고 가난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하느님의 저주를 받았다며 손가락질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병을 고쳐주시며 그들이 소외받지 않았음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써 그들이 하느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고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해 오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천년이 지난 지금 이 세상에도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대상은 예전과는 다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가난하고 버림받고 병든 사람들은 소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이 세상에는 그들 외에도 또 다른 종류의 소외된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또 다른 종류의 소외된 사람, 그들은 바로 스스로 자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시키는 사람들입니다. 이 시대의 소외된 사람들은 옛날의 소외된 사람들과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정상적인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 시대의 소외된 사람들이 불구의 몸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 사람들은 매우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건강한 몸 안에 있는 마음은 그렇지 못한 몸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보다 더 일그러지고 비정상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욕심과 죄에 찌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세상을 일그러진 시선으로 바라보고 의심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남을 속이기 위해 말을 하며 자신에 대한 보복이 두려워 밝은 세상에서 마음 놓고 걷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깨끗하고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런 사람에게는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이들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과거 불구자들을 고쳐주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불구를 가진 이런 사람들도 고쳐주러 오셨습니다. 옛날의 불구자들이 예수님 곁으로 다가가서 치유를 받은 것처럼 오늘날의 불구자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말씀과 가르침으로 치유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치유는 단지 병을 고쳐주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곁에 머무는 군중들을 보시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군중들을 배불리 먹이는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리고 그 기적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고쳐주실 뿐만 아니라 바른 몸으로 다시 태어나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주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
아름답고도 생명 찬 전경
-홍성만 신부-
갈릴래아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 군중들에게 둘러싸인 예수님이 당신 앞에 데려다 놓은 절름발이, 소경, 곰배팔이, 벙어리, 그 밖의 많은 병자들을 정성을 다해 하나하나 고쳐주십니다. 이에 벙어리가 말을 하고 곰배팔이가 성해지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걷고 소경이 눈을 뜹니다. 군중들은 놀라며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복음으로 그려 볼 수 있는 정경입니다.
그리고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별로 먹은 것도 없이 벌써 사흘이나 지납니다. 그러나 군중들을 향한 연민의 정이 깊어져만 가는 주님이십니다. 제자들에게 그들을 굶겨 보내서야 되겠느냐고 물으나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합니다. 또다시 "너희에게 빵이 몇 내나 있느냐?"는 물음에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라는 대답을 들을 뿐입니다.
이에 사람들을 땅에 앉게 하시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를 손에 들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습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주워 모으니 일곱 바구니에 가들 찹니다.
참으로 조건 없는 사랑, 주님의 끝없는 사랑이 물 흐르듯 흐르는 아름답고도 생명 찬 정경입니다.
그 아름답고도 생명 찬 정경이 바로 지금 이 미사에서 구형되고 있습니다.
'이는 내 몸, 내피, 너희는 받아먹고 마셔라' 라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그야말로 자신을 통째로 주시면서 말입니다.
- 이보다도 더 나를 배부르게 할 수 있는 것이 어디에 있을 가?
- 이보다도 더 나를 건강하게 만들고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어디에 있을 까?
오늘도 주님의 끝없는 용서와 사랑을 먹고 마신 그 힘으로, 이웃과 나누며 빵의 기적을 이어가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참 보기에 안 되었구나. 가다가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 보내서야 되겠느냐?”
-양승국신부-
<역 광장에서 만난 천국(天國)>
얼마 전의 일입니다. 회의 차 지방에 갔다가 밤늦은 시간에 집 가까이 있는 국철역에 도착했습니다. 역 광장으로 내려오니 참으로 흐뭇한 광경이 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국철역을 배경으로 숙식을 해결하고 계시는 노숙자분들을 위해 인근 한 교회신자들의 무료 급식 봉사가 한창이었습니다.
저희 수도회에서도 노숙청소년들을 위해 뭔가 해야 되지 않겠냐는 논의가 있어 저는 한참동안 바짝 다가가서 유심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봤습니다.
저를 놀라게 한 것은 봉사자들의 일사 분란함이었습니다. 손발이 척척 맞았습니다. 배식봉사를 하시는 분들, 뒷정리를 하시는 분들, 질서를 잡는 분들...아마도 많은 연구과 시행착오, 기도 끝에 얻어진 결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봉사자들이 환한 얼굴로 기쁜 마음으로 봉사에 전념하고 있음에 보기가 좋았습니다.
줄은 모두 세 줄이었습니다. 첫 번째 줄에서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넘어가는 쇠고기 국밥을 나눠드리고 있었습니다. 저도 ‘한 그릇 받아먹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냄새가 그럴 듯 했습니다. 국밥을 받아든 분들의 얼굴이 일순간 환해졌습니다. 잠시나마 행복함을 맛보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분들에게 그 순간은 아마도 천국을 맛보는 순간이겠지요.
그리고 두 번째 줄에서는 긴 밤을 꼬박 새우잠을 자야할 노숙자 형제들의 새벽녘 출출함을 달래주기 위해 먹음직스럽고 커다란 빵이 하나씩 나눠지고 있었습니다. 보너스로 빵까지 받아든 분들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깃드는 것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 번째 줄에서는 후식으로 커피를 원하는 분들에게 일일이 타드리고 있었습니다. 노상이었지만, 소박했지만 정성이 담긴 풀코스 서비스를 받은 분들의 모습이 행복해보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이 생겼습니다. 20분 이상 배식하는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저를 흘끔흘끔 바라보시던 봉사자 아주머니께서 참다 참다 못해 제게 한 소리 크게 외쳤습니다.
“아저씨, 백날 여기 서 있어봐야 소용없어요. 아저씨도 저 뒤로 가서 줄 서세요!”
아주머니의 한 마디에 제가 받은 충격이 컸지만 당시 역 앞에서 저는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밤늦은 시간 잠깐이었지만 역전에서 있었던 그 소박한 행사(무료급식)는 진정 감동 깊은 축제의 한마당이었습니다.
소박하지만 정성을 다해 준비한 따뜻한 음식들이 세파에 지친 이웃들의 시름을 잠시나마 잊게 하는 사랑과 나눔의 축제, 다름 아닌 최후의 만찬, 즉 미사였습니다.
오늘 복음 역시 예수님의 측은지심이 발휘되는 복음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능력을 전해들은 수많은 불치병환자들과 그 가족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있었습니다. 실낱같은 마지막 희망을 안고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의 옷자락 끝이라도 붙잡아보려고 필사적으로 예수님께 몰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과도 같은 고통에서 한번 벗어나고 싶어 기를 쓰고 예수님을 에워쌌습니다. 병자들과 그 가족들은 자신들의 차례를 놓칠까봐 끼니마저 거르면서 자신들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간은 흘러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났습니다. 허기에 휘청휘청 거리며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예수님 눈에 목격되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의 측은지심이 발휘되는 순간입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나와 함께 지내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으니 참 보기에 안 되었구나. 가다가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 보내서야 되겠느냐?”
배고픈 사람들에게 밥 한 끼 제공하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은 바로 복음이 실현되는 행위, 구원을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무료급식에 대해 말들이 많습니다. 단기처방에 불과하다. 노숙인들을 더 양산시키는 일이다. 그들에게 근본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좀더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들 나름대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온 분들인지 모릅니다. 가난의 악순환을 한번 벗어나 보려고 얼마나 발버둥쳐온 분들인지 모릅니다. 어쩌면 그분들은 공정한 부의 재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냉혹한 우리 사회의 피해자이자 희생자들일지 모릅니다.
점점 쌀쌀해져가는 날씨에 노숙인들을 위한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강구되길 기원합니다. 수많은 노숙인들, 또 후보 노숙인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이 우리들의 손을 통해서 작동되길 바랍니다.
도랑치고 가재잡고, 마당 쓸고 돈 줍고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서로 다른, 그러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치유이적사화를 집약하여 상황설명으로 보도하는 내용(30-31절)이며, 다른 하나는 7개의 빵과 물고기 몇 마리로 사흘 동안 굶은 사천 명의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사화를 사건으로 보도하는 내용(32-37절)이다. 이 두 가지 내용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이유는 사천 명의 군중 속에 방금 치유 받은 곰배팔이, 절름발이, 소경, 벙어리, 병자들이 대다수 들어있기 때문이다. 병도 고치고 음식도 배불리 먹고, 그야말로 도랑치고 가재잡고, 마당 쓸고 돈 줍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행복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우리는 또 다른 빵의 기적을 알고 있다. 그것은 4복음서 모두가 보도하는 바, 예수께서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소위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다.(마태 14,13-21; 마르 6,30-44; 루가 9,10-17; 요한 6,1-14) 그런데 마태오와 마르코는 오병이어의 기적에 이어 사천 명을 먹인 빵의 기적을 따로 전하고 있다.(마태 15,32-37; 마르 8,1-10) 제일 먼저 씌어진 마르코복음을 고려한다면 빵의 기적은 두 번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빵의 기적이 있었던 시점을 살펴보면 이해가 빨라진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상경하시 전까지의 갈릴래아 활동기는 사실상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는 활동장소를 따른 구분이다. ① 처음에는 갈릴래아 호수 주변에서 활동하셨다. 이 활동의 마무리 시점에서 많은 병자들을 한꺼번에 고쳐주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다. ② 그 다음에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북쪽 시리아 페니키아 지방의 띠로와 시돈(마태 15,21; 마르 7,24)에서 활동하셨다. ③ 오늘 복음이 첫 구절이 말하듯이 예수께서는 띠로와 시돈에서 다시 갈릴래아로 돌아오셨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빵의 기적으로 사천 명을 배불려 주신 것이다. 갈릴래아에서 활동을 속계하신 예수께서는 필립보의 가이사리아(갈릴래아 북쪽 40Km)에서 베드로의 메시아고백을 받으시고, 근처 산에서 거룩하게 변한 모습을 보여주셨으며, 두 번이나 수난과 죽음을 예고 하셨다. 그 후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향하신다.(마태 19,1) 빵의 기적이 또 한번 있다면, 그것은 바로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 당신 스스로를 빵으로 내어주시는 기적이다.(마태 26,26)
곰배팔이, 절름발이, 소경, 벙어리, 그리고 병자들이 치유되어 신체의 자유를 되찾고, 자유를 되찾은 그들이 빵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는 사건은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외치듯이 ‘메시아 출현의 기본 패턴’이다. 그 날이 오면 산 위에서 만군의 주님이 모든 민족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살지고 연한 고기에 맑은 술을 곁들인 잔치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이다. 만군의 주님은 사람들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벗겨 주실 것이며, 죽음까지도 영원히 없애버릴 분이시라는 것이다. 이렇게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가 예고하는 만군의 주님은 마태오복음이 선포하는 예수님이시다. 그분은 갖은 육체적 고통으로 신음하는 병자들을 모두 고쳐주시고,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며, 사흘이나 굶은 그들이 집으로 가는 중에 길바닥에서 행여 쓰러질세라 손수 걷어 먹이시는 인자하신 주님이시오 구세주이시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기까지 우리는 “여기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 뿐”인 그런 존재인 것이다. 이것으로 사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일곱 바구니가 남게 될 그런 일을 꿈에서조차 생각지 못하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영혼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고 쓰러져 가는 영혼을 세워주실 “♬ 구세주 빨리 오사 ♪” 하며 목청을 돋우지 않는가
흐트러뜨리지 마라!
-상지종신부-
사람들은 참 이상합니다. 혼자서 살 수 없기에 모이지만, 막상 모여서는 이런 저런 이유로 갈라지고 흩어지니 말입니다. 이렇게 흩어지면 또 다시 모이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어찌보면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과정의 반복이 바로 삶의 본질적인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모였다 흩어질 때 서로에게 많은 상처를 남길 수 있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기왕 모였다면, 흩어져야 할 이유보다는 애초에 모였을 때의 첫마음을 떠올리며 모임을 새롭게 일구어 가는 지혜로운 모습을 지녔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모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치유를 받고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모임이 지닌 신비한 힘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 모임도 배고픔이라는 인간적인 한계 앞에서는 무기력하게 느껴집니다. 적어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말입니다. 모두가 굶주릴 수는 없으니 최선의 방법은 각자 굶주린 배를 채우도록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흩어져야 하는 절박한 상황보다 모여서 함께 하는 삶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보셨습니다.
이제 다른 방법을 택합니다. 가진 것을 나누는 방법이죠. 예수님께서는 얼마 안되는 것이지만 나눌 것이 있기에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육신의 치유로 새 삶을 살게 되었지만 이미 며칠 동안의 굶주림을 원망하며 떠나갔을 사람들이 여전히 당신과 함께 있기에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또다른 기적이 이루어집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음식이 남았습니다. 함께 하는 삶의 의미를 온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흩어진 사람들을 당신의 품 안에 하나로 모아들이기 위해 오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모여, 예수님 안에,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이들이 교회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갈라진 세상에 하나됨의 기쁨을 전하는 주님의 도구입니다.
그러나 과연 주님의 도구로서 제대로 사명을 수행하고 있는지 묻게 됩니다. 겉모습은 온전할지라도 속으로는 서로 갈라지고 흩어져 싸우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갈라진 세상에 모범으로 다가가기는 커녕 오히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 안에 세상의 온갖 부조리를 담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무늬만 교회, 이름만 교회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님의 교회로 거듭나도록, 작은 교회로서 내가 먼저 다른 이들과 갈라서려는 마음을 씻어내고, 인간적으로 흩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기보다는 당신 안에 모으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고 기쁘게 응답하는 대림시기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유광수 신부-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 중에는 절름거리는 사람, 눈먼 이들, 다른 불구자와 말 못하는 이들이 있었다.
하늘나라란 무엇인가? 이런 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이 모두 치유되어 건강한 모습으로 하느님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그런 하늘 나라는 죽음 다음에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이미 여기에서 맛볼 수 있고 체험될 수 있는 나리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라고 말씀하신 대로 이런 병자들을 고쳐주러 오셨기 때문이다..
오늘날 예수님은 이런 병자들을 누구를 통해서 어떻게 고쳐주시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빵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그것을 손에 드시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준 빵은 무슨 빵인가? 예수님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요한 6,51)라고 말씀하셨다. 살아있는 빵이란 무엇인가?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라고 베드로가 말한 대로 빵은 "생명의 말씀"이다.
오늘날 우리가 병든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빵은 바로 "생명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병든 것은 아모스 예언자가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아모8,11)라고 말씀하신 대로 생명의 빵인 영원 생명을 주는 말씀을 먹지 못한 데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은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는 마치 자기 곳간에서 새 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2)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명의 말씀을 먹고 그것을 자기 곳간에서 나누어 주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란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거기에서 생명을 얻고 거기에서 병을 치유 받고 거기에서 배불리 먹고 그것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다. 하늘 나라는 이 생명의 빵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 안에서 체험되고 건설되는 나라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 주위 사람들에게 이 생명의 말씀을 나누어 주라고 불리움을 받고 파견되는 사람이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먹은 사람만이 생명의 빵을 병든 이웃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