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오늘」 2024년 가을호
서치라이트
한창옥
바리캉과 비누통이 든 헐렁한 가방은 그의 재산이다
촌길을 질주하는 낡은 트럭에 흙먼지 뒤집어쓰고 마을에 들어선다
그를 깔보지 않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다
무거운 레퀴엠 같은 시절을 반겨주는 사람들
마을 사람들을 근사하게 이발해주고 포마드를 발라주며 받은 쌀은 가방에 담고 다닌다 장날엔 운수 좋아 장꾼들과 어울려 국밥에 막걸리로 맘껏 취해보는 날이다 장이 파하고 어둑해지면 석촌새내를 건너 굴뚝에 연기 따라 마당 넓은 우리 집에 쌀을 쏟아놓는다
군대서 배운 머리 깎는 재주로 떠돌다가 삼청교육대에서 복종하는 법은 알았어도 반항하는 법은 모른다고 뼛속에서 볼멘소리가 들린다
이발사가 쏟고 간 쌀은 슬픔 같아서 차마 밥을 짓지 못하던 어머니는 어느 날 저녁밥을 지었다 가방 속에서 비누냄새가 쌀알에 파고들어 깊이 배인 밥을 먹지 못했다
처서가 한참 지나서 찾아온 이발사는 결빙된 언어를 겨울비에 녹이며 ‘낙화유수’를 목구멍에 흘러내리도록 불렀다 사는 게 힘들다고 떠돌이의 눈물을 바리캉으로 밀어내던 날
분신 같은 가방은 비누거품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 후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집이 어딘지 처자식은 있는지 사람들은 궁금했다 수십 년을 돌아서 서치라이트가 비춰지는 기억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한창옥 -서울송파출생. 2000년 시집 「다시 신발 속으로」 등단. 시집 「빗금이 풀어지고 있다」. 「내 안의 표범」. 「해피엔딩」 등 (2017세종나눔도서선정) 인간문화재49호 부친을 기린 ‘한유성문학상’ 제정. 현재 송파문화재단 이사 .「포엠포엠」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