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송(盤松)
“반중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 유자 아니라도 품음 직도 하다마는 / 품어가 반길 이 없을세 글로 설워하나이다” 조선 중기 노계 박인로가 남긴 시조로 ‘조홍시가’ 또는 ‘사친가“로 불리는 작품이다. 노계는 그의 친구 한음 이덕형 집에 초대 받아 빨간 홍시를 보고 ’육적회귤‘의 고사를 떠올렸다. 옛날 육적은 원술의 집에서 어머니를 위해 소맷자락에 귤을 품어간 것을 떠올렸다.
노계에겐 쟁반 위의 홍시를 보고 어머니가 돌아가고 안 계서 그 옛날 육적처럼 품어 갈 수 없음을 안타까워한 내용이다. 노계는 본디 무인이지만 ‘누항사’를 비롯한 몇몇 가사를 남긴 문사이기도 했다. 그는 무인으로 임진왜란 이후 부산 앞 바다를 지킨 수군 첨사였다. 얼마나 청빈했으면 은퇴 후 낙향해 농사철에 논을 갈려니 소가 없어 이웃집에 빌리러 갔다가 퇴짜를 맞기도 했다.
여기서 ‘반중(盤中)’은 소반 가운데나 쟁반 위라는 뜻이다. 소반은 자그마한 밥상이다. 쟁반은 상다리가 없는 동글납작하거나 네모 난 그릇이다. 노계가 친구 한음 집을 방문했을 때가 가을이었지 싶다. 한음은 친구가 왔다고 다과처럼 꺼내 놓은 것이 제철에 빨갛게 익은 감 홍시였다. 노계는 그 감 홍시를 바라보면서 냉큼 손을 뻗어 바로 집지 못하고 시상을 떠올려 사친가를 남겼다.
예전 소목장이가 만드는 가구 가운데 가장 흔하게 제작하는 것이 ‘개다리소반’이다 개다리소반은 양반이나 서민을 가리질 않고 가정의 필수품이다. 개다리소반은 겸상보다 외상으로 차리기에 알맞은 밥상이다. 밥상의 기능도 하지만 다과상을 차리기에도 알맞다. 때로는 문갑이나 서책을 올려두는 서안의 기능을 한다. 비록 작은 상이지만 실로 다양한 용도로 쓰이는 개다리소반이다.
개다리소반은 말 그대로 소반의 다리가 개다리처럼 생겼다. 개의 다리는 네발짐승 가운데 특이하다. 사람으로 치면 무릎 안쪽이 몹시 오그라져 둔각으로 휘어진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어느 개그맨은 개다리 춤을 잘 추어 눈길을 끌었다. 소목장이 장인이 개다리소반을 만들 때 기교를 부려야 할 부분은 바로 상다리지 싶다. 자귀나 끌 같은 연장으로 솜씨를 발휘해야할 상다리다.
앞서 소반을 언급함은 반송(盤松) 얘기를 하기 위해서다. 반송은 키가 작고 가지가 옆으로 퍼진 소나무를 이른다. 소나무는 지역이나 모양에 따라 여러 이름이 붙는다. 금강산엔 미끈하게 자란 적송을 미인송이라 부르고 봉화엔 춘양목이 있다. 금강송이라고도 불리는 소나무도 있고 왕족의 관을 만든 황장목이라 불리는 소나무도 있다. 바닷가 해풍을 막아주는 해송은 곰솔이라고 한다.
근래 소나무엔 재선충이라는 벌레가 끼면 치명적이다. 솔수염하늘소에 기생하며 솔수염하늘소를 통해 나무에 옮는다. 이 벌레가 붙은 소나무는 발갛게 말라 죽고 그 옆 나무로 옮겨가 전염성이 빠르다. 산림 당국에서는 소나무 재선충이 붙으면 많은 예산을 들려 나무를 자르고 뿌리까지 훈증해 비닐을 덮씌워야 한다. 산기슭에 곳곳 재선충 피해 소나무를 잘라 덮은 무덤이 즐비하다.
분재를 가꾸는 이들은 그 재질로 소나무를 많이 택한다. 분재 애호가들은 소나무에 재선충이 붙을까 전전긍긍이다. 소나무의 여러 유형 가운데 반송은 정원수로 각광을 받는다. 반송이라고 재선충이 달라붙지 않는 것은 아니다. 창원에서 가지가 부챗살처럼 펼쳐진 반송이 집단적으로 식재된 곳은 도청 뜰 도립미술관 곁이다. 의창도서관 뜰도 그렇다. 창원여고 교정도 빠지지 않는다.
내가 사는 곳이 반림동이고 아파트단지 뒤가 반송공원이다. 가까이 반송시장이 있다. 초중학교 이름도 반송이다. 행정구역으로 반송동주민자치센터가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 반송은 보통명사인데 지명으로 쓰일 땐 고유명사가 되었다. 예전 반송공원 일대엔 키가 작고 가지가 옆으로 퍼져 자라는 소나무가 많았다. 그런데 세월 따라 식생도 바뀌어 오리나무나 아키사나무가 더 많아졌다. 16.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