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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면
참고말씀: 출3:13,14; 6:6; 신33:8; 왕하4:3-6; 5:11,12; 7:2; 대상4:10; 대하19:12; 시121:1,2; 렘1;6,7; 단9:2; 욘1:2,3; 합2:4; 말3:10; 마13:58; 19:26; 눅6:38; 롬1:17,24; 엡6:17; 약1:5
읽을말씀: 시81:1-16
주제말씀: 시81:10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첫째, 능력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쁘게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소리칠지어다.”(시81:1)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종종 한계(限界)에 부딪히곤 합니다. 보이지 않는 벽들을 만나곤 하는 것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은 언제든지 그때마다의 한계와 벽을 뛰어넘으면서 성장해가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신앙의 한계, 곧 보이지 않는 벽의 특징들은 무엇입니까? 일시적 구속력(拘束力)입니다. 즉 그것을 뛰어넘을 때까지는 우리를 그 속에 가두어두지만, 이를 넘어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물러나고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니 이것이 언제까지 우리 앞에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또 상황적 가시력(可視力)입니다. 즉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하다가 극단적 상황에 내몰렸을 때 비로소 우리의 한계를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없던 게 지금 막 생겼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지금 어떤 신앙적 한계에 부딪히고 있으며, 어떤 보이지 않는 벽들을 만나고 있습니까? 그리고 이를 넘어서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원컨대 야베스처럼 지금의 한계(지경)을 뛰어넘기를 갈망하면서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로 나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4:10)
다윗 시대의 찬양대장 중 한 사람이었던 아삽은 어떻게 자신의 신앙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능력(能力)의 하나님’, 즉 ‘자신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찬양함으로써 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쁘게 노래하며...”(1절 상)
그는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까? 자신에게는 지금의 한계상황(限界狀況)을 넘어설 힘이 도무지 없으나, 하나님께는 얼마든지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대하19:12) /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19:26)
지금의 한계상황을 뛰어넘기를 원합니까? 당면한 상황 속에서 출구(出口)를 찾기 원합니까? 그렇다면 시전 전환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눈을 들어 위를 올려다보기를 원합니다. 그곳에는 누가 계십니까?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1절 상) 이 같은 능력의 하나님을 주목하기 시작하고 또 붙들기 시작하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까? 굳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찬양하게 됩니다. 기쁜 노래가 시작되고 즐거운 외침이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쁘게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소리칠지어다.”(1절 하) 어째서입니까? 비로소 길이 보이고 방법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찬양이 좀처럼 나오지 않습니까? 기쁘게 노래하거나 즐거이 외칠 수 없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시선이 어디에 고정되어 있는지를 살필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의 시선이 여전히 우리의 한계상황에 고정되어 있으면 절망과 탄식뿐일 것이나, 그렇지 않고 능력의 하나님께로 옮겨간다면 내 영 깊숙한 곳으로부터 기쁨의 찬양이 샘솟듯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
지금 우리의 시선은 어디에 맞춰져 있습니까? 원하건대 지금 당장 하나님께로 옮기기를 바랍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로다.”(시121:1)
둘째,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애굽 땅을 치러 나아가시던 때에 요셉의 족속 중에 이를 증거로 세우셨도다 거기서 내가 알지 못하던 말씀을 들었나니.”(시81:5)
또한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의 한계들을 극복해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집중함으로써 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말씀 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고, ‘말씀을 통해’ 이를 풀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삽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그는 신앙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성경, 특히 출애굽 사건을 다룬 내용을 찾아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 땅을 치러 나아가시던 때에 요셉의 족속 중에 이를 증거로 세우셨도다...”(5절 상) 그러다가 거기에서 무엇을 듣게 되었습니까? ‘알지 못하던 말씀’입니다. “...거기서 내가 알지 못하던 말씀을 들었나니.”(5절 하) 이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전에는 깨닫지 못하다가 새롭게 깨달은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경험들이 자주 자주 있습니까? 말씀을 읽을 때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성령의 감동하심과 조명하심 등을 부지런히 경험하고 있습니까? 원컨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마다 이 같은 역사들이 가득하기를 원합니다.
이를테면 다니엘이 예레미야서를 읽다가 바벨론 포로생활이 70년 만에 그칠 것을 깨닫고 더욱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고,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나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 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단9:2)
바울이 하박국서를 읽다가 복음의 진수를 깨달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아무튼 아삽의 경우는 성경의 어느 부분들이 새롭게 다가왔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짐을 벗기시고 놓게 하시며, 고난 중에 건지시고 응답하시며, 때로는 그들을 단련하셨다는 부분입니다(6-10절). “이르시되 내가 그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의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셀라).”(6,7절)
이는 구약성경의 어느 부분들을 인용한 듯합니까?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출6:6) /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신33:8 하)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무거운 짐을 벗기시고, 고난 가운데서 친히 건지시며, 은밀한 곳에서 세미한 소리로 응답하시며, 여러 가지로 단련하시는 분이므로, 이 하나님께만 나아가 그 말씀 듣기를 힘쓸 것입니다. “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이스라엘이여 내게 듣기를 원하노라.”(8절)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신앙생활의 한계 극복은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가령 무거운 짐을 만나도 하나님께서 이를 벗겨주시고, 고난의 수령에 빠져도 하나님께서 능히 여기에서 건져주시며, 침묵의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그 세미한 음성으로 응답해주시며,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해도 하나님은 이를 통해 우리를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적 한계를 극복하려면 어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나아가 그 말씀 듣기를 힘써야 합니다. 어떤 한계상황에 맞닥뜨려도 ‘말씀 속에서’ 답을 찾고, ‘말씀을 힘입어서’ 돌파해가야 할 것입니다. “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이스라엘이여 내게 듣기를 원하노라.”(8절)
왜냐하면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도 답을 줄 수 있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또 어떤 상황도 헤쳐 나가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7 하)
셋째, 크게 구하고 크게 받아야 합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시81:10)
또한 우리는 어떻게 신앙적 한계를 극복해갈 수 있습니까? 능력의 하나님께(1절) 크게 구하고 크게 받음으로써 입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10절)
하나님은 ‘네 입을 크게 열라’고 하셨는데, 어째서입니까? 그만큼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10절 하) 마치 선지자의 한 과부가 준비한 그릇 만큼 기름을 모두 채워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르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하니라 여인이 물러가서 그의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그들은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오고 그는 부었더니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아들이 이르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왕하4:3-6)
구하고 준비한 만큼만 허락하십니까? 아닙니다. 그 이상으로 채워주십니다.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시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주실 것이 분명합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 상)
그런데 이처럼 크게 구하고 크게 받는 것이 신앙적 한계를 극복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늘 해오던 대로만 하면 그저 현상유지(現狀維持)만 하게 되고, 평소보다 작게 구하면 축소(縮小) 내지는 퇴보(退步)를 면할 수 없지만, 평소보다 조금씩 더 크게 구하기 시작하면 그만큼 우리도 성장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의 지경 역시 점점 더 확장되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신앙적 한계를 확장해가기 위해서라도 무슨 말씀을 주목하기 시작해야 합니까? ‘네 입을 크게 열라’는 말씀입니다.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10절 하)
넷째, 부정적이며 회의적인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시81:11)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부정적(否定的)이며 회의적(懷疑的)이었습니다.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11절) 즉 하나님의 소리를 좀처럼 들으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11절 상) 어째서입니까? 하나님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11절 하) 하나님을 원하지 않았기에 응당 그분의 소리도 좀처럼 들으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혹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냉소적이며 비관적이지 않습니까? 부정적이며 회의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명심하십시오. 이 같은 태도와 자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온갖 좋은 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지금의 한계상황에 계속 가두어 두고 좀처럼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는 점을 말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마13:58) /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왕하5:11,12) / “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왕하7:2)
만일 사람이 끝까지 이 같은 태도를 버리지 못하면 어찌 됩니까? 하나님께 버림받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가장 큰 형벌인 유기(遺棄)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12절) /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롬1:24)
이리 되지 않으려면 이제라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부정적이고도 회의적인 태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기 시작해야 합니다.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들으라.”(13절)
이제라도 말씀을 듣고 따르기 시작하면 어떤 은혜들을 주십니까? 신속히 응답하시며, “그리하면 내가 속히 그들의 원수를 누르고 내 손을 돌려 그들의 대적들을 치리니.”(14절) 끝까지 붙들고 놓지 않으시며,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는 그에게 복종하는 체할지라도 그들의 시대는 영원히 계속되리라.”(15절) 기르시고 만족하게 해주시는 은혜 등입니다. “또 내가 기름진 밀을 그들에게 먹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하게 하리라 하셨도다.”(16절)
그러니 우리는 이제라도 어찌 해야 합니까? 신앙생활의 온갖 부정적이며 회의적인 태도 등을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을 과감히 버려야 합니까?
이를테면 우리의 가나안 입성을 가로막는 메뚜기 콤플렉스를 버려야 하고,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33) 사명의 수행을 주저하게 만드는 우리의 겁 많고 심약한 태도를 버려야 하며,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출3:13,14)
우리를 자꾸만 뒷걸음치게 만드는 소아적 태도를 버려야 하며, “내가 이르되 슬포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렘1;6,7)
우리를 자꾸만 엇나가게 하는 용서치 못하는 마음을 과감히 버려야 할 것입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욘1:2,3)
이런 것들을 과감히 버리면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또 한 번 넘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우리가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 없음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부정적인 태도에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지금의 상황에 가둬두고 있으며, 무엇이 우리가 더 넓은 데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고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든지 과감히 뛰어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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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주안교회】모황민목사 주일설교 : 『우리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면』 시편 81편 1~16절 (구약 862쪽)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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