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2세 시기 프로이센 군대의 성격과 한계

‘군인왕’이라는 별명답게 평소 군복입기를 즐겨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1세. 독일병정이라는 말은 바로 그의 치하에서 생겼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뒤를 이은 프리드리히 2세의 군대 건설, 국가건설 작업은 그 이전 군주들에 의해 토대가 마련된 것을 완성시켰다는 의미를 지닌다. 우선 군사적 필요에 바탕을 둔 재정 기구의 개혁을 통해 프로이센은 계속 확장되는 병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1751년에는 13만 3천 명, 1768년에는 16만 명, 1786년에는 19만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군대는 단순히 병력 규모의 증가에서만 위력이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국가와 군주에 대한 충성심을 지상에 구현했다는 평을 받을 만큼 헌신적인 장교단, 그리고 고도의 훈련을 통해 높은 전투효율성을 자랑하던 병사들이 의도적으로 육성됨으로써 단순한 양적 규모의 의미를 훨씬 능가하는 군사력을 표출할 수 있었다. 이를 토대로 여러 차례의 전쟁과 전투에서 살아남음으로써 프로이센 군대는 유럽 최강의 군대로 평가받을 수 있었고, 프로이센의 강국으로서의 지위가 보장되었다.
국가와 군주에 대한 프로이센 장교단의 충성과 헌신은 프리드리히 2세가 의도적으로 부여한 융커(지주귀족) 계층에 대한 특권의 결과였다.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에 의한 귀족 세력에 대한 배려는 이들로부터 정치적 권력을 박탈하는 대가, 즉, 불가피한 타협의 결과였으나 프리드리히 2세는 단순한 대가 차원을 넘어서서 이들에게 각종 정치적, 사회적 특권을 부여하고 여기에서 발생하는 계급적 자부심을 자신의 절대왕정을 유지하는 기반으로 삼았다. 이러한 정책 중 대표적인 것으로 프로이센 관료제의 상위직에는 대단히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는 오직 귀족신분의 인사만 임명하였으며 7년 전쟁 이후 군장교 후보생으로 귀족 출신의 자제들만을 선발하였다는 점, 전시 중 위급시에 임관된 부르주아 출신 장교들이 전후 전부 장교직을 박탈당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여기에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지주들에게 장기상환이 가능한 국가적 대출을 제공하여 귀족이 보유한 토지를 유지하게 하는 정책 또한 중요한 사례이다.
위와 같은 친귀족정책은 프리드리히 2세 자신에게 헌신하는 장교단을 양성하기 위한 것으로 귀족들만이 전쟁을 통한 물질적 보상에 구애되지 않고 여러 곤경과 위험을 겪어낼 수 있는 자질을 보유하고 있으며 자신의 천직에 대한 강력한 자부심을 가졌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이에 비해 부르주아는 물적 조건을 계산하는데 치중해 비상시 자기 희생을 기꺼이 감수해야 하는 장교직에 부적합한 계층이라고 보았으며, 앞서 언급한 7년전쟁 이후의 장교 선발은 이러한 판단에서 기인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의 군대가 보인 전술상의 특징으로는 고도의 훈련을 통한 부대이동의 신속성, 기민성, 정확성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당시의 관점에서 보아도 대단히 엄격했던 기율과 고도의 훈련을 통해 획득된 것으로 이렇게 단련된 군대를 통해 로스바흐, 로이텐 전투에서 적의 측면으로의 우회기동과 재빠른 부대 재편성을 통해 적을 산산조각 내는데 성공했으며(편집자 주: 적은 횡열로 죽 이어져 이동하고 있는데 그 한쪽 끝에 프로이센 군이 종열로 나타나 집중사격을 가하는 장면을 상상해봅시다.) 실제로 프리드리히 2세가 이룩한 전술적 공격법은 당시 군대의 일반적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완성도를 보였다. 그러나 부대의 신속성, 기민성, 정확성은 특정 전투에 국한된 지역에서만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고 전체적인 전략적 우세로 직접 연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쿠네르스도르프에서의 패배에서 알 수 있듯이 프리드리히 2세가 초래한 양면전선이라는 전략적 열세를 극복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프리드리히 2세가 보인 군사작전상의 성취는 그의 전술보다 이전 세대부터 이어져 프리드리히 2세 때 완성된 방대한 전쟁물자와 인력을 지속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공급력을 확보했기 때문이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프리드리히 2세의 전투법은 3열 선형으로 진형을 갖춰 근거리에서 일제 사격을 가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상당수의 인명 및 물자의 손실을 야기했다.
7년 전쟁 동안 전사자는 18만명에 육박하였고 병사들의 생존율이 15분의 1밖에 되지 않은 반면, 물자공급 면에서는 포츠담의 머스킷 공장을 통해 1740년대 이후 연간 1만 5천정이 제작되었고 화약 생산 역시 1746년의 44만 8천 파운드에서 7년전쟁이 시작되는 1756년에는 56만 파운드로 크게 증가하였다. 또한 식량 공급에 있어서도 저장 거점들을 활용하여 베를린, 브레슬라우의 저장소에 총 7만 2천 부셀에 달하는 밀을 저장하였는데 이는 6만명의 병사에게 2년간 공급할 수 있는 분량이었다.

상수시 궁전에서 본인이 작곡한 플룻 연주를 하던 프리드리히 대왕. 음악과 철학, 문학을 좋아해 대표적인 계몽군주로 꼽힌다
프로이센 군대의 또다른 특징으로는 자국민 출신의 병사가 다수였으나 여전히 고용계약을 통해 충원된 외국인 용병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1751년에는 총 13만 3천 명의 병사 가운데 5만 명, 1763년에는 15만 명 중 3만 7천 명, 1768년에는 16만 명 중 7만명, 1786년에는 19만 명 중 8만 명이 용병이었다. 이러한 용병군을 지휘하기 위해 병사들의 탈영 방지는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야간 행군, 숲을 따라 이뤄지는 행군, 숲속에서의 야영 등은 철저하게 금지되었고, 적정을 순찰하기 위한 순찰대의 파견도 탈영의 위험 때문에 회피하였다. 이런 병사들의 전선 이탈 위험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전투가 성공적으로 끝난 경우에도 적병을 계속 추격하여 적의 중심부를 와해시키는 전략적 승리로 쉽게 연결할 수 없다는 한계가 발생했으며 이러한 사정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민족주의와 애국심으로 무장된 국민군을 통해 지휘관들이 보다 큰 행동의 자유를 얻은 이후에야 해결되었다.
결국 프리드리히 2세의 전쟁과 전쟁술은 당시 절대왕정들의 일반적 수준에 앞서있는 것이기는 하였으나 그 자신이 속해 있던 시대적 조건들, 즉, 제한된 국가자원, 한정된 교통수단에 의한 보급, 전쟁 목적에 대한 신념 없이 기계적으로 훈련된 병사들을 극복해낸 것은 아니었다. 독일의 군사사가인 델브뤽이 지적한 것처럼 프리드리히 2세의 군사체제는 여전히 구체제(앙시앵 레짐)의 전통에 속하는 것이었고 프리드리히 2세 역시 구체제 군대 전체의 한계점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박상섭, 『근대국가와 전쟁: 근대국가의 군사적 기초, 1500~1900』, 나남, 2004, pp.174~177.
요약:
①프리드리히 2세의 승리는 질적, 양적으로 증강된 군대를 통해 이뤄졌으며 이런 군대는 군주에게 충성하는 장교단과 고도로 훈련받은 병사들에 의해 유지될 수 있었다.
②장교단을 유지하기 위해 프리드리히 2세는 귀족계급에 막대한 특권을 부여하고 시민계급을 억제하였으며 이는 프리드리히 2세 자신의 계급별 성격에 대한 믿음에서 기인하였다
③고도로 훈련받은 병사들은 전투에 돌입하였을 때 신속, 정확, 기민한 기동과 전투력을 보여주었으나 프리드리히 2세가 초래한 양면전선이라는 전략적 열세를 극복할만한 수준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④프리드리히 2세의 승리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을 위한 인력 및 물자공급 체제가 완성되었다는 점이 크게 일조했다는 평가도 있다.
⑤여전히 군대의 다수를 차지하는 용병들은 유용한 군사력이면서 급료 지불, 부대 이탈 등 여러 측면에서 골칫거리이기도 하였으며 프랑스 혁명 이후 국민군이 등장하기 전까지 이런 한계는 지속되었다.
cf) 프리드리히 2세가 비록 대왕의 칭호를 달고 있긴 하나 여전히 그 자신이 속한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하였다는 점에서 나폴레옹이 평한 ‘그가 살아있었다면 프로이센이 승리했을 것’이라는 평가는 나폴레옹이 대단히 겸손했거나 아니면 프랑스 혁명과정이 전쟁에 미친 영향을 인식하지 못하고 내린 평가라고 보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