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씨삼효자기적비 全氏三孝子紀蹟碑
옛날 숙종 · 영조 시대에 대구의 만촌(晚村)에는 옥천 전씨(沃川全氏)형제 세 분이 있었는데, 모두 지극한 효행을 가졌으므로 '한 집안에 세 효자[一家三孝]'라 일컬어졌다. 맏이는 창항(昌 恒)이고 호가 화정(花亭)이며, 둘째는 창익(昌益)이고 호가 만정(晚汀)이며, 막내는 창정(昌鼎) 이고 호가 경묵재(敬黙齋)이다. 세 분은 어려서부터 함께 학업에 종사하여 책상을 맞대고 매진하며 경전의 뜻을 강구하였다. 지극한 효로 부모를 섬겼으니, 부모의 질환을 간호할 때 모두가 자신이 대신하기를 하늘에 기도했으며 대변을 맛보고 손가락을 자르는 정성이 있었다. 상 (喪)을 당해서는 모두 애통해하여 몸이 쇠약해지면서도 스스로 극진히 하였으며 3년동안 여묘 (蘆墓)하였는데, 둘째는 또한 어려서 모친을 잃은 것을 한스럽게 여겨 무덤 아래에 풍수암(風樹菴)을 짓고 다시 삼년동안 상복을 입었다. 뒤에 계모의 상을 당해서도 역시 삼 년을 여묘하였으니, 이로써 '삼효자'라 일컬어지게 된 것이다. 안찰사 이기진(李箕鎭)공이 조정에 알려서 모두 복호(復戶)를 제공받고, 맏이는 호조좌랑에 추증되었는데 이 일은 「대구읍지(大邱邑誌)」 에 실려 있다.
그리고 윤석문(尹石門)", 황대제학(黃大提學) 신관찰사(申觀察使), 권산수헌(權山水軒)", 송성담 (宋性潭), 이경호(李鏡湖) 등 여러 공이 찬술한 세 분의 행장과 묘갈 및 발문은 또한 백세토록 징험이 될 만하다. 여러 후손들이 선조의 행적이 오래되면 없어질까 두려워하여 돌을 다듬어 기록하여 마을 머리에 세우기를 도모하였다. 재철(在哲)은 그 족조(族祖)인 병조(柄朝)군에게 행장을 가지고 나에게 글을 요청하게 하였다. 나는 일찍이 세 효자의 명성을 듣고 경모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어찌 글을 잘 짓지 못한다고 사양할 수 있겠는가?
아, 무릇 효도란 모든 행동의 근원이지만 그것을 잘하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고금에 효도로 일컬어지는 자가 많지 않으며, 더욱이 형제가 아울러 일컬어지는 경우는 소연(小連)과 대연( 大連) 이후에는 또한 거의 듣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세 분이 한 집안에서 아울러 일컬어지는 것은 어찌 고인에게는 전혀 없거나 겨우 있는 정도가 아니겠는가? 마땅히 그것을 드러내어 후손들에게 보여야 할 것이다. 세 분에게는 모두 유고(遺稿) 약간이 있으니 그 학문의 실상을 고찰할 수 있으며, 그 외에도 훌륭한 행적 가운데 기록할만한 것이 또한 많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모두 효도에서 유추된 것이므로 그 효도가 이미 드러났으니 그 나머지는 모두 드러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들의 증조고는 유경(有慶)이고 호가 각암(覺菴)인데 사계(沙溪) 김 선생(金先生)에게 수업하였으며, 조고는 극명(克命)이고 호가 강재(剛齋)인데 우암(尤菴) 송 선생(宋先生)에게 수업하였다. 그 집안 대대로 연원이 이와 같이 바르니 세 분의 행실과 학업은 아마도 근본을 삼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 세계(世系)와 생졸(生卒), 배위(配位) 및 후사(後嗣)에 대한 기록은 관례에 따라 모두 실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명(銘)에 이르기를,
효도가 범상한 행동이라면
특이함을 구하지 않을 것이네
오직 그 정성을 다할 뿐이니
이것을 지극하게 해야하네
단지하고 하늘에 기도하며
여묘에서 상제를 다하였네
오직 참된 효성에서 나왔으니
어찌 외형에 힘썼겠는가
진실로 세 분께서는
동기이고 동지였네
타고난 천성은
하나이고 둘이 아니었도다
책상을 맞대고 매진하였으니
학업에는 그 취향이 같았도다
힘을 합해 어버이를 섬겼으니
행동에는 그 궤적이 같았도다
삼효자라는 훌륭한 명성으로
온 집안이 아울러 빛났도다
조정의 포상과 현인들의 서술로
백세토록 증명할 수 있도다
세상은 쇠잔하고 인륜은 무너져
누가 그 귀함을 알겠는가
우뚝하게 솟은 비석에는
그 행적이 모두 실려 있도다
누구인들 자식이 아니겠으며
누구인들 형제가 없겠는가
후세에도 본받을 만하며
영세토록 견주어 볼 것이다
孝爲常行
非以求異
惟盡其誠
是之爲至
血指禱天
廬墓盡制
惟出真誠
豈勉於外
允矣三公
同氣同志
出天其性
一而無二
聯床征邁
學同其趣
幷力事親
行同其軌
三孝芳名
一門幷耀
朝褒賢述
可徵百古
世降倫斁
孰知其貴
有屹貞珉
其蹟幷載
孰非人子
孰無兄弟
來者可則
永世其視
광복 후 36 년 경신년 ( 1980 ) 9 월 일에, 밀양 ( 密陽 ) 박효수 ( 朴孝秀 ) 는 삼가 찬술하고,
종칠대손 ( 從七代孫 ) 사열 ( 土烈 ) 은 삼가 글씨를 쓰다.
全氏三孝子紀蹟碑
昔在肅英之世 大邱之晚村 有沃川全氏昆季三公 俱有至孝行 稱以一家三孝 伯公諱 昌恒號花亭 仲公諱昌益號晚汀 季公諱昌鼎號敬黙齋 三公自少俱從事於學 聯床証邁 講究經禮之旨 事親至孝 其侍親疾 俱有禱天願代 嘗糞斷指之誠 喪而俱哀毁自盡 廬墓三年 仲公則又恨幼失母 構風樹菴於墓下 追服三年 後遭繼母喪 亦廬墓三年 此其有三 孝之稱也
按察使李公箕鎭聞于朝 皆給復戶 而伯公贈兵曹佐郎 事載大邱邑誌 而尹石門黃大提學申觀察使權山水軒宋性潭李鏡湖諸公所撰 三公狀碣及跋文 亦可爲百世之徵矣 諸後孫 懼其蹟之久而或泯 謀伐石以紀之 竪于巷首 在哲以其族祖柄朝君狀 徵其辭于余 余嘗聞三孝之名而景慕者 久矣 豈可以不文辭諸
嗚乎 夫孝爲百行之源 而人鮮能之 故古今之以孝稱者無多 而至於兄弟之幷稱者 自小連大連以後 亦罕有聞焉 則如三公幷稱於一家者 豈非古人之絶無而僅有者耶 宜其表章而示後者也 三公俱有遺稿若干 可考其學問之實 而其他懿行之可書者 亦多 然是皆孝之推 而其孝既著 則其餘有不待悉而著也
其曾祖曰有慶號覺菴 受業沙溪金先生 祖曰克命號剛齋 受業尤菴宋先生 其家世淵源之正有如此 則三公之行學 盖有所本也 若其世系生卒配嗣之錄 則在例有不必具載云
銘曰
孝爲常行 非以求異 惟盡其誠 是之爲至 血指禱天 盧墓盡制 惟出眞誠 豈勉於外 允矣三公 同氣同志 出天其性 一而無二 聯床征邁 學同其趣 幷力事親 行同其軌 三孝芳名 一門幷躍 朝褒賢述 可徵百古 世降倫斁 孰知其貴 有屹貞珉 其蹟幷載 孰非人子 孰無兄弟 來者可則 永世其視
光復後三十六年庚申九月日
密陽 朴孝秀 謹撰
從七代孫 士烈 謹書
[출처] 옥천전씨 수당공파 실기 (沃川全氏 壽堂公派 實記) [옥천전씨 수당공파 종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