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논산 돈암서원에 도착하니 고즈넉한 서원 마당에 붉게 피어난 한그루의 배롱나무꽃이 마치 오래된 한 폭의 풍경화를 마주한 듯하였다. 파란 하늘 아래 붉은 꽃송이를 가득 피운 배롱나무는 고풍스러운 한옥과 담장 사이에서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가지가 살랑이고 조용한 서원 마당에는 따가운 햇살과 고요함이 내려앉아 있었다.
오랜 세월을 품은 돈암서원의 고풍스런 건축물과 화사한 배롱나무꽃이 어우러진 모습은 세월의 깊이와 은은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니 꽃송이 하나하나가 바람결에 살랑이며 오랜 세월 묵묵히 제자리를 지켜온 듯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부귀와 떠나간 벗을 그리워하는 배롱나무 꽃말을 알고 다시 바라보니 조금 전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붉게 피어난 꽃은 화사한데 그 나무가 서 있는 풍경에는 왠지 모를 잔잔한 그리움이 느껴졌다. 어쩌면 오랜 시간을 견디며 한자리에서 계절을 맞이해 온 나무라서 그런 것일까?
수많은 사람들은 떠나고 시간은 흘러 가지만 배롱나무는 그 자리에 남아 여름이 돌아올 때마다 다시 꽃을 피운다. 그래서인지 돈암서원의 이 배롱나무 한 그루는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으로만 보이지 않고 지나간 시간과 그리운 사람들을 조용히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여행에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은 꼭 화려한 풍경만은 아닌 것 같다. 그날의 햇살 살랑이던 바람 그리고 마당 한가운데 피어 있던 배롱나무 한 그루처럼 마음에 조용히 스며든 풍경들이었다. 올여름 돈암서원을 다시 떠올린다면 아마도 가장 먼저 생각나는 풍경은 고즈넉한 서원 마당에 홀로 피어 있던 배롱나무 한 그루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