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선의 시 명상] 정화(웬델베리)
"자연 아래 고백하는 나의 죄, 어둠"
셔터스톡
봄이 시작되면 나는 대지에
구멍 하나를 판다 그리고 그 안에
겨울 동안 모인 것들을 집어넣는다
종이 뭉치들, 다시 읽고 싶지 않은
페이지들, 쓸모 없는 말들,
파편들, 실수들을
또한 헛간에 보관한 것들도
그 안에 넣는다
햇빛과 땅의 기운,
여정의 일부를 마친 것들을
그런 다음 하늘에게, 바람에게
충실한 나무들에게
나의 죄를 고백한다
나에게 주어진 행운을 생각하면
나는 충분히 행복해 하지 않았다
나는 너무 많은 소음에 귀 기울였다
경이로움에 무관심했다
천사를 갈망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곳에 모여진
몸과 마음의 쓰레길들 위로 구멍을 메운다
그 어둠을, 그 죽음 없는 대지를 닫으며
그 봉인 아래서 낡은 것이
새것으로 피어난다
융은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논했지만, 기실 인간에게는 늘 여러 모습이 있다.
여성성이거나 남성성으로만 표현할 수 없는 모습들이 있어 융 자신도 거론했듯 인간은 만나는 이마다 다른 모습을 꺼내 보인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 모든 모습을 꺼내게 만드는 것이 사람과의 만남이라면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자연 앞의 모습이다.
자연 앞에서 우리는 그저 고요해진다.
자연의 힘을 알고 경이로운 모습들을 알고 있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 중장비를 들고 저 자연을 정복하고자 덤비는 이라면야 다르겠지만 그들마저도 한 겨울은 피한다.
모든 것이 얼어붙었기 때문에 인간의 힘이 도무지 통하지 않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글 | 이강선 교수
출처 : 마음건강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