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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28. 묵상글 (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 복음의 겨자 씨를 뿌리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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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28.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7.28 03:44
- 복음의 겨자 씨를 뿌리자!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오늘도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입니다.
첫째 비유는 겨자씨의 비유로서
겨자씨는 하늘나라인데 어떤 사람이 그 씨를 자기 밭에 뿌린다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세 요소는 ‘어떤 사람’과 ‘겨자씨’와 ‘자기 밭’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이라고 하심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겨자씨 곧 하늘나라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도 주어지고 너에게도 주어지는 것으로서
누가 심든 주어지는 대로 겨자씨를 심기만 하면
그 씨는 크게 자라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씨가 중요합니다.
사실 씨란 겨자씨뿐 아니라 모든 씨가 작고,
작지만 크게 자라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관건은 겨자씨 곧 하늘나라라는 씨를 뿌려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자기 씨를 뿌린다거나 악마의 씨를 뿌린다거나
욕망이라는 씨를 뿌릴 경우, 그때가 문제이고, 그 사람이 문제입니다.
자기 씨를 뿌리면 자기가 자기 안에서 크게 자라날 것이고,
악마의 씨를 뿌리면 악이 자기 안에서 크게 자라날 것이며,
욕망이라는 씨를 뿌리면 욕망이 자기 안에서 크게 자라날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밭’이 자기 마음일 수도 있지만
자기 교회나 자기 사업이나 자기 계획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 교회에 자기 씨를 심으면 자기 교회는 하늘나라로 성장하지 않고,
자기 소유의 나라가 되고 말 것이고 자기 교회가 대형 교회가 될 것입니다.
제가 볼 때 개신교 많은 대형 교회가 이런 식으로 커진 교회이고,
가톨릭의 경우엔 성당이 사제 개인의 소유는 아니지만
본당이 하느님 중심의 하느님 나라가 자라게 하는 사목이 아니라
자기가 왕인 양 자기중심의 사목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겨자씨 곧 하늘나라의 씨앗을 뿌리는 사목이 아닌 겁니다.
자기 사업이나 계획도 하느님 사업이나 계획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식당에 가면 네 시작은 미미하나 그 끝은 창대하다는 성경 구절을
달아놓곤 하는데 이처럼 자기 사업이 번창할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제가 하는 협동조합과 식당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제게 이 사업이 잘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며
그렇게 되기 위해 방송을 타면 좋겠다고도 하십니다.
저도 그런 마음이 없지 않고 그래서 그것이 유혹으로 다가올 때도 있는데
저는 그것을 항상 경계하고 그럴 때마다 단호하게 끊어버립니다.
프란치스코가 세운 작은형제회의 작은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작은형제회가 자기 수도회가 될까 봐 조심하였고,
작은형제회가 큰 수도회가 될까 봐 더 조심하고
그래서 형제들의 수가 갑작스럽게 늘어나는 것도 걱정했습니다.
사실 수도회가 큰 것이 중요하지 않고 복음적인 것이 중요하고,
형제들의 숫자가 많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한 명이라도 프란치스칸다운 프란치스칸이 있는 것이 좋겠지요.
제가 가끔 얘기하듯 저와 같은 사람 수만보다
프란치스코 성인 한 분이 세상을 진정 복음화하잖습니까?
그러므로 우선 내 안에,
다음으로 우리 공동체에 복음의 겨자씨를 뿌리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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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28.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늘 나라의 삶
“관상과 활동의 일치와 조화”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제 주일도 오전 미사전, 미사후 많은 분들에게 면담 고백성사를 드렸습니다. 보속으로는 꼭 셋을 챙겨 드립니다. 첫째는 말씀처방전, 둘째는 행복기도 소리내어 바치기, 셋은 ‘하늘과 산’ 그림의 수도영성을 상징하는 로고 스티카를 휴대폰에 붙여드리는 것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꽃자리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늘 읽어도 새롭게 와닿는 행복기도중 한 대목입니다. 이어 하늘과 산의 수도원 로고 스티카를 붙여 드리며 첨가하는 설명입니다.
“하늘보고 땅보고,.. 기도하고 일하라 바로 수도영성의 모토입니다. 스티카를 볼 때 마다 하느님을 생각하고, ‘기도하고 일하라’를 연상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바로 관상과 활동의 일치와 조화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관상과 활동의 일치와 조화에서 실현되는 하늘 나라의 꿈입니다. 새벽 인터넷 유투브에서 본 유명 정치인의 언급이 참 멋지고 신선했습니다.
“정치의 본령은 둘입니다. 하나는 사회적 약자를 챙기는 것, 하나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나무도 보고 숲도 보는 통합적 시각이 복음적이며 하느님의 시선을 닮았습니다. 비단 정치지도자들뿐 아니라 교회지도자들이 지녀할 시각이요 관상과 활동의 일치와 조화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어제 주일 “조부모와 노인의 날” 삼종기도후 교황님의 강론중 두 말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조부모와 노인들은 ‘희망의 증거들’(witnesses of hope)’이다.”
주변의 젊은 후배들에게 희망의 증거들, ‘희망의 표징들(signs of hope)’이 되는 노년이 되도록 관상과 활동의 일치와 조화로 하늘 나라의 삶을 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만일 너희가 잔인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너희는 하느님을 너희 아버지라 부를 수 없다.”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야 비로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느님의 자녀가 됨을 봅니다. 오늘 옛 현자의 지혜도 참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일깨웁니다.
“하루를 마치며 되돌아본다. ‘나는 오늘 나로 산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다산>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논어>
아버지의 아들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비로소 참나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의 비유로,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둘이 소개됩니다. 하늘 나라의 비유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관상신비가와 활동가의 면모가 잘 드러납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하는 하늘 나라의 표징들입니다. 오래전 써놓은, 지금 바야흐로 피어나기 시작한, 예전에 소개했던 무려 28년전 지금 여기서의 <달개비꽃>이란 시입니다.
“오, 하느님이 밤사이 쏟아 놓은
남보랏빛 생명의 보석들!
아주 낮은 그늘 속에 있어 잘 눈에 띄지 않는
남보랏빛 생명의 보석들!
아무도 주워가지 않는
바라볼 수는 있어도 가져 갈 수는 없는
달개비꽃 생명의 보석들!”<1997.8.25.>
하늘 나라의 신비요 하늘 나라의 발견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관상신비가와 활동가가 되어 살아야 할 하늘 나라의 현실입니다. 바로 관상신비가와 활동가의 모범이 하느님 마음에 정통해 있던 예수님과 모세입니다. 작은 보잘 것 없는 겨자씨에서, 누룩에서 하늘 나라의 표징을 발견한 예수님의 눈입니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가만히 침묵중에 경탄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지켜봐야할 저절로 성장하는 하늘 나라의 전개 과정입니다. 묵묵히 조용히 숨어서 끊임없이 일하시는 겸손하고 부지런한 하느님이요, 참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신비롭고 놀랍고 새로운 하늘 나라의 현실입니다. 정말 조심스런 우리 인간의 협조가 필요할 뿐입니다. 참으로 겨자씨 같은 내외적 성장의 개인이나 가정, 교회, 수도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봅니다.
과연 겨자씨같이 성장하는 수도공동체로 많은 이들이 와서 깃들 수 있는 ‘하느님의 품’같은 하늘 나라의 실현인 요셉수도원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겨자씨처럼 여러분의 삶도 끊임없는 내외적 성장으로 날로 하늘 나라의 실현이, 넓고 깊은 하느님의 품이 되고 있는지 되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소원은 단 하나 우리 믿는 이들 하나하나가 예수님을 닮아 하늘 나라의 꿈이 현실화되는 것뿐이란 생각입니다. 이래서 복음선포의 겨자씨같은 삶이 필요합니다. 흡사 겨자씨가 상징하는 바, 살아 성장하는 ‘하느님의 말씀’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말씀의 겨자씨에 이어 말씀의 누룩입니다.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과 하나된, 관상과 활동이 일치된 삶일 때 개인이든 공동체든 누룩과 같은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세상과 격리된 빛이요 소금이요 누룩이라면 존재이유의 상실이요 그러니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듯 세상속의 누룩입니다. 과연 나는, 우리 가정공동체는, 교회 공동체는, 수도공동체는 예수님처럼 세상에 희망의 누룩, 사랑의 누룩, 정의의 누룩, 평화의 누룩, 진리의 누룩이 되고 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탈출기에서 우리는 중재자 예수님의 예표와 같은 모세를 만납니다. 하느님과 백성을 참으로 사랑했던, 관상과 활동이 일치와 조화를 이뤘던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간의 유일한 중재자 경천애인의 사람, 모세입니다. 모세의 담대한 뱃장은, 배수진을 친 비장한 결의는, 그가 얼마나 하느님 마음에 일치되어 있는지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려거든, 당신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저를 지워주십시오.”
이와 흡사한 바오로의 고백도 연상됩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안 동포를 위해서라면, 자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로마9,3). 불교의 “모두가 지옥에서 구출되기까지 지옥에 머물겠다”는 불교의 지장보살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마침내 모세의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려는 불퇴전의 고집스런 기도에 마음을 접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을 잊은 시대, 실용만 강조되는 시대에 관상과 활동의 일치와 조화로운 삶이, 하늘나라의 삶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내외적성장의 겨자씨로, 내외적성숙의 누룩으로, 또 주님의 관상신비가와 활동가로 살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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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28.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우리는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가라지의 비유”에 이어,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태 13, 31)
‘겨자씨’는 유다 문학에서 ‘작은 것’의 전형적인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합니다.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밭’에 심었을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이게 됩니다. 마치 십자나무가 모든 인류를 품고 있듯이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거창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가르치십니다. 아니, 오히려 가장 작은 모습으로 오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당신께서도 아주 작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라는 말에서, “깃들다”(κατασκηνω)는 단어의 뜻은 “밑에 거주하다” 곧 “장막에 들어가다”,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곧 새들이 단순히 가지 위에 잠시 내렸다가 다시 날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안전하고 영속적인 거처를 마련하고 지속해서 거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교회’라는 생명의 말씀나무에 한 둥지를 틀고 사는 새 떼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미 한 그루의 생명나무입니다. 당신께서 뿌려진 생명의 씨앗이 자라나 사랑으로 피어난 나무입니다.
한편, ‘겨자씨의 비유’가 하늘나라의 외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 ‘누룩의 비유’는 내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랑으로 반죽되는 것’이 ‘누룩의 비유’입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들어가 자기의 능력을 전체에 돌려줍니다. 그러나 먼저 반죽되어야 하고, 섞여야 됩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묻혀 보이지 않지만, 결코 죽지 않습니다. 단지 밀가루 속으로 들어가 섞일 뿐입니다. 그리고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룩’을 밀가루 “속에” 집어넣었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이 ‘누룩’을 우리 ‘속에’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적은 양의 ‘누룩’이 자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갈라진 우리의 내부를 통합할 것입니다. 그렇게 성장시키고 변화시킬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누룩’이 되어 세상 속으로, 형제들 속으로 들어가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하여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시작된 것처럼 보이는 하늘나라의 복음은 세상을 해방하는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적은 양의 ‘누룩’이 밀가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말입니다.
또한 “집어넣다”(εγκρυπτω)는 동사는 “숨기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밀가루 서 말 속에 숨긴 ‘누룩’이 온통 부풀어 오르듯이, 하늘나라도 현재는 숨겨져 있지만 미래에는 엄청나게 확장되리라는 전망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겨자씨가 이미 ‘우리’라는 밭에 뿌려졌고, ‘누룩’이 이미 ‘우리 공동체’라는 밀가루 안에 넣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맘껏 자라나고, 맘껏 부풀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마태 13,33)
주님!
제 안에 넣은 누룩이 제 속을 파고들게 하소서!
섞여들지 못한 까닭에 부풀어 오르지 못하지 않게 하소서!
제 안에 뿌려진 씨를 묻어두고만 있지 않게 하소서!
죽지 못한 까닭에 싹을 피우지 못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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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28.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중국 고대의 법가 사상가 한비자는 “비리법권천(非理法權天)”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치는 법을 이기지 못하고, 법은 권력을 이기지 못하고, 권력은 하늘을 이기지 못한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단순히 하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마음, 곧 민심을 가리킵니다. 아무리 강력한 권력도 민심을 거스르면 결국 무너진다는 지혜가 담긴 말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은 민심이 원하는 평화를 거스르고 있습니다. 한국은 특검으로 전직 대통령을 수사하고 있습니다. 비상계엄으로 국회를 해산하고,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것은 하늘의 뜻, 국민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국회의 탄핵과 헌법재판소의 파면이 있었습니다. 대통령 선거로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였습니다. 한 나라의 권력이 국민의 생명을 희생시키며 자기 정당성만을 고집할 때, 그것은 하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역사는 반복해서 보여 주었습니다. 권력자는 한비자의 말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하며, 자신이 하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 늘 성찰해야 합니다.
문무왕은 죽으면서 호화로운 장례식을 지양하고 간소하게 화장하여 동해에 뿌려달라고 유언했습니다. 또한,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뜻을 밝혀, 동해 가운데 큰 바위 위에 묻어달라고 했습니다. 이 유언에 따라 대왕암에 묻혔고, 감은사라는 절이 세워졌으며, 현신한 장소를 이견대라고 합니다. 문무왕은 삼국 통일을 이룬 왕입니다. 당나라를 쫓아내고 완벽하게 삼국을 통일한 왕입니다. 그런 왕이 화려한 왕릉을 마다하고, 죽어서라도 나라를 지키겠다면 최초로 화장하여 그 재를 바다에 뿌린 왕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였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금을 모아서 송아지를 만들었고, 그 앞에 절하였습니다. 하느님 대신에 우상을 섬겼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 않아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듯이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느님께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뜻을 어겼지만,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청을 받아 주셨습니다. 지도자는 자신보다 백성을 앞세워야 하며, 정죄보다 구원을 바라는 마음이 있어야 함을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문무왕과 모세의 헌신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말씀하십니다. 가장 작은 씨앗 하나가 큰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이게 된다는 이 말씀은, 단지 자연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권력이나 세속적 힘으로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작고 겸손한 마음, 사랑과 희생, 정의를 향한 갈망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지금 손에 쥔 스마트폰 하나로도 우리는 무한한 가상 세계에 접속할 수 있습니다. 작지만 연결되면 커다란 세상이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겨자씨에 비유하신 하느님 나라도 이와 같습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것 같지만, 그 속에는 온 세상을 품을 수 있는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 나라에 접속할 수 있을까요? 첫째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늘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연결되는 통로이며,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는 영혼의 안테나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 하느님 나라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둘째는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은 단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는 사랑과 정의의 실천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살아갑니다. 하지만 기도와 사랑으로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접속할 수 있습니다. 권력을 지닌 사람은 문무왕처럼 백성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모세처럼 용서를 청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도 작은 겨자씨 같은 믿음을 소중히 키워서, 하늘의 새들이 깃들이는 그늘진 나무처럼 이웃에게 쉼과 희망을 주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새롭게 시작되는 한 주간의 첫날입니다. 스마트 폰으로 접속하는 시간을 잠시 멈추고 기도로 하느님 나라에 접속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작은 선행과 나눔이 우리의 이웃들에게는 하느님 나라로 접속하는 길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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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28.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완벽주의라는 이단!
하느님의 숨
2025.07.27. 16:32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7월 27일 일요일 - 서른한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우리의 불완전함을 끌어안기
그리스도교는 성과 올리기나 도덕적 성취와 관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리처드 로어 신부는 완벽해지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우리를 더 사랑스럽고 소중하게 만든다고 하는 오래 지속되어 온 신화를 일축해 버립니다.
성경을 읽는 데 있어서와 영성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는 데 있어 우리 마음을 깊이 왜곡시키는 일반적인 오해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영적 자본주의"(spiritual capitalism)라고 일컫습니다. 이는 "나는 그것을 할 수 있어. 나는 그것을 해야 해. 나는 그것을 할 거야."와 같은 평범한 철학을 중심으로 맴도는 오해입니다. 이것은 에고 의식의 초기 단계에서 나타나는 정신 구조입니다. 이 오해는 "나"와 나의 노력, 나의 영적 성취에 모든 강조점을 두고 전적으로 그것에 의존하는 데서 옵니다. 여기에는 하느님 은총과 자비에 대한 적극적인 신뢰가 거의 없습니다. 불행히도 이 구동 에너지는 고요한 확신과 감사가 아닌 두려움과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는 강박감에서 나오는 에너지입니다. 이는 항복이 아닌 정복과 관련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느낌이 있지만 그 다음에는 넘어지거나 실패하거나 심지어 죽는 느낌까지 옵니다. 누가 그것을 좋아할까요? 분명히 분리된 자아는 아닐 겁니다. 에고는 언제나 자기가 어떻게든 구원을 성취했다고 느끼기를 원합니다. 은총과 용서는 언제나 에고에게 굴욕을 줍니다.
17세기와 18세기에 유행했던 얀세니즘이라고 알려진 영성 운동은 하느님 자비에 대한 신뢰심보다는 도덕적 금욕과 하느님 정의에 대한 두려움을 더 많이 강조했던 신학적 왜곡의 한 형태입니다. 하느님은 노기등등하고 복수심 가득하며 징벌하고자 하는 분으로 이해되었고, 이에 적절한 모든 성경 구절들이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색출되었습니다. 가톨릭교회든 개신교든 이 신학에 의해 양성되지 않은 서구 그리스도인을 한 사람이라도 찾기란 힘들 지경입니다. 주류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은 은총과 자비에 진심이 어린 것처럼 입에 발린 말을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우리 삶은 거의 전적으로 성과나 도덕적 성취와 관련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계속해서 나타나는 이런 패턴의 일반적인 형태를 우리는 완벽주의라고 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자 되어라." 하신 마태오 복음 5,48의 말씀 하나만을 가지고 사람들은 완벽주의를 말합니다. 물론 그와 같은 완벽함의 개념은 신적인 개념이거나 수학적 개념이지 절대 인간적인 개념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려주시면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 바로 앞에서 원수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5,43-47).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가 우리 의지력으로는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계명에 순종할 수 없지만, 오직 우리 존재를 통해 흐르는 하느님의 완전하심에 온전히 항복함으로써 이 계명에 순종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완전할 수 없지만, 하느님은 우리를 완전하게 하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하나의 성경 구절을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정반대의 인상을 주었습니다. 즉 사람들이 실제로 스스로 완전해질 수 있다는 인상 말입니다!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를 교회의 박사로 선포하면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녀는 우리 시대에 복음을 아주 매력적으로 빛나게 하였습니다.... 성녀는 [하느님의] 신성한 자비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의 정의에 강조점을 두려는 얀세니즘의 경직성과 두려움의 병에서 영혼들을 치유해 주었습니다." [1]
데레사는 이 영성을 "작은 길"이라는 적절한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이 영성은 순수한 복음의 메시지를 분명하고 단순하게 회복시켜 주는 치료제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 어떤 거대한 가능성의 렌즈가 아니라 이런 작음이라는 제일차적인 렌즈를 통해 성서를 읽을 수 있도록 용기를 준 사람은 바로 성녀 데레사(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였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다른 어떤 기관들과 마찬가지로 봅니다. 교회도 때때로 다른 이들에게 심각한 해를 끼치는 불완전한 사람들에 의해 운영됩니다. 이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저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교회를 하느님 사랑에 뿌리를 두고 예수님 안에서 그 사랑을 초월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헌신하는 신앙 공동체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 초월적인 사랑에 대한 헌신이 저를 그리스도인으로 머물게 해주는 것입니다.I
—Mark S.
References
[1] John Paul II, Divini Amoris Scientia [The Science of Divine Love], apostolic letter, October 19, 1997, section 8.
Adapted from Richard Rohr, Yes, And…: Daily Meditations (Franciscan Media, 2019), 291–293.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Martin Baron, untitled (detail), 2025,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우리는 우리의 깨어진 조각들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신뢰하면서 우리 자신에 대해 온화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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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사랑과 선의 하느님께서 이루고 계신 희망을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정치가가 아니십니다! 정치가들은 미래에 대해 공적으로 약속해 놓고는 그때가 되면 그 약속이 이루어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언론이자 정치가였던 링컨 스테펀스(Lincoln Steffens)는 1919년에 소련 연방에 다녀와서 이런 유명한 말을 했다고 하지요. "난 미래를 보았다. 그런데 그게 효력을 내더군!"(I've seen the future, and it works!)
대격변의 시기를 거치고 있던 소련 연방의 사회주의적 사회 정책과 경제 정책에 대해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미래를 내다보며 한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이 큰 논쟁의 중심에 서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 이 말이 부정확한 시각에서 나온 견해임이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미래를 보는 사람이 있나요?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예언자"나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성서적인 의미에서의 "예언자"는 미래를 보는 사람들이 아니라 '현재'를 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언자란 지금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과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정확하게 말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가 이러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사람을 앞을 내다보는 사람, 혹은 미래를 이야기하는 사람인 "예언자" 혹은 "선지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경의 예언자들은 지금 이렇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말했던 사람들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 예언이 하느님의 자비로 이루어지지 않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 예언을 들은 사람들이 현재를 제대로 직시하도록 요청하는 예언자의 말을 알아듣고 자신들의 현실을 보는 눈, 혹은 이해하는 눈을 바꾸고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성으로 들어섰기(metanoia)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회개라고 합니다.
그만큼 지금, 이순간, 즉 현재를 보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링컨 스테펀스가 현재를 제대로 보지 못해서 논란을 일으켰던 것이 하나의 예겠지요?!
사실 누구도 미래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미래에 대해 말하는 것이 틀리다고 증명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 이 현재]를 예수님처럼 '참된 현실을 보는 눈', 하느님 나라를 보는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참으로 긍정적인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참된 현실을 보는 눈이란 우리를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 주는 도전을 받아들일 수 있는 눈이고, 그렇기에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을 이 도전을 통해 과감히 바꿀 수 있게 해주는 눈입니다.
지금 여기에 무엇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소식이 바로 복음입니다. 미래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기쁜 소식이 복음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혹은 "하느님 나라는 너희 내면에 있다!"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씨앗처럼 눈에 띄지 않게 현존합니다. 겨자씨는 실제로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씨앗은 아닙니다만, 통상적으로 가장 작은 씨앗을 대표하는 씨앗입니다. 씨앗은 땅속에 들어가 자신은 사라지게 하고 새로운 생명을 싹틔웁니다. 누룩도 마찬가지입니다. 누룩이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가면 보이지 않게 되지만 밀가루 반죽을 부풀려 줍니다.
또 다른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금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소금도 겨자씨나 누룩처럼 다른 음식에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렇듯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눈에 잘 띄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주의를 다해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을 가지라고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겸손과 사랑으로써 말입니다. 그분은 그 당시 사람들이 기대했던 대로 불로 사악한 자들과 세상의 나라들을 쓸어 버리시고 하느님 나라를 세우시는 그런 메시아가 절대 아니셨습니다. 그분은 마태오 복음 저자가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을 인용하여 선포해 준 메시아이십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19-21).
예수님은 권력을 공고히 하고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얻는 데는 관심이 없으셨고, 오히려 병들고 고통받는 이들을 치유해 주시고 죄인들을 용서해 주시며 그들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게 하는 데 주력하셨던 분이십니다.
복음의 논리는 단도직입적 논리가 절대 아닙니다. 복음의 논리는 역설의 논리입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약함이 강함이 되고, 가장 힘센 자가 가장 미천한 자가 되고, 가장 가난한 이가 가장 부유한 이가 되고, 가장 약한 이가 가장 강한 이가 되고, 잃었던 것이 되찾아지고, 가장 낮은 이가 가장 높은 이가 되고, 죽는 것이 사는 것이고 등등.... 한 마디로 괜찮은 것이 괜찮지 않은 것이고, 괜찮지 않은 것이 괜찮은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별로 괜찮지 않은 우리에게는 이 복음이 진짜 복음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괜찮은 사람 중에 끼나요, 아니면 괜찮지 않은 사람 중에 끼나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무리 괜찮지 않은 사람들일지라도 하느님께서 겨자씨와 누룩, 그리고 소금처럼 이 세상에 이루시는 눈에 잘 띄지 않게 일하시는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눈만 있다면 괜찮은 것이니, 정말로 괜찮지 않겠습니까?!
늘 말씀드립니다만, 모든 것을 이끌어가는 주도권은 사랑과 선의 하느님께 있지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늘 명심해야 합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시각을 변화시킬 필요만 있을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사랑과 선의 하느님께서 이루고 계신 희망을 보는 눈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다 경험한 것이겠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서야 "아하~"하는 순간이 오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그러니 우리도 일해야 하겠지요! 어쩌면 그 일의 핵심이자 첫 걸음은 하느님께서 일하는 것을 예수님처럼 의식하여 보는 것일 겁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시는 모습을 우리가 세상에서 보지 않고 일한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구원을 이루려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사랑의 일을 하시는 아버지를 의식하고 볼 수 있다면 지금부터 "아하~"하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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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28.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마태 13,32)
어떤 씨앗보다 작은 씨앗
저는 겨자씨에서 자라난 복음 나무의 가지들은 새들이 각기 걸터앉은 다양한 가르침을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이 나무의 가지에 깃들여 다양한 교의로 둥지를 지을 수 있도록 비둘기의 깃털을 입고, 세상적인 것들에서 달아나 거룩한 것들로 서둘러 갑시다.
많은 사람이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 작다는 말씀을 읽습니다. 또 제자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하고 말하자, 구원자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마태 17,20)라고 하신 이야기도 읽습니다. 그러고는 사도가 작은 신앙을 청한 것인가 의아해하거나 믿음이 모자람에 관해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 의혹을 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믿음을 겨자씨 정도가 아니라 더 놀라운 일에 비유합니다. 사도가 뭐라고 합니까?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2)라고 합니다.
-히에로니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1
세가지 탄생
우리의 탄생, 하느님의 탄생, 하느님 자녀인 우리의 탄생
평화로운 침묵이 온 세상을 덮고 밤이 달려서 한고비에 다다랐을 때(지혜 18,14).
흔히 사람들은 사물의 배후를 알고 나면 곧 싫증을 내고, 무언가 다른 것을 배우려고 하며, 이 새로운 것을 알고자 하는 갈망을 불안스레 품으면서도, 정작 그것을 맛보고 알기 위해 시간을 내지는 않습니다. 영혼을 오랫동안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은 무지의 지식뿐입니다. 무지의 지식을 맛보고 추구하기 위해 영혼은 오랜 시간을 들이는 것입니다.
지혜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평화로운 침묵이 온 세상을 덮고 밤이 달려서 한고비에 다다랐을 때 하늘의 옥좌로부터 주님의 전능하신 말씀이 마치 사정없는 전사처럼 멸망한 땅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지혜 18,14-15).
어찌하여 지혜자는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는 것을 “말씀”이라고 부를까요?
아무튼,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말씀의 본성입니다. 그것이 내 앞에서 활짝 열려 번쩍였습나다. 그것은 내게 무언가를 나타내 보였고, 하느님에 대해 알려 주었습니다. 그것이 말씀이라 불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감추어져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내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속삭임과 침묵으로 몰래 다가와서, 자신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그것이 감추어져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찾아다니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번쩍이지만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찾아내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바울로 사도는 그것을 알아챌 때까지 경주하고, 그것을 붙잡을 때까지 멈추지 마라고 권고합니다. 셋째 하늘로 붙들려 올라가, 즉 하느님이 주시는 지식의 선물을 받아서, 모든 것을 보고 돌아와서도 그는 그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이성이 미치지 못하는 그의 터 깊숙한 곳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추적할 수밖에 없었고, 자기 밖에서가 아니라 자기 속에서 그것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한결같이 밖이 아닌 안에 있습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 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로마 8,38-39).(435)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콜로 4,2-6
여러 가지 권고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
말씀을 전할 수 있는 문을 하느님께서 열어 주시어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비를 말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나는 그 신비를 위하여 지금 갇혀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마땅히 해야 하는 말로 그 신비를 분명히 드러낼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바깥 사람들에게는 지혜롭게 처신하고 시간을 잘 쓰십시오.
여러분의 말은 언제나 정답고 또 소금으로 맛을 낸 것 같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누구에게나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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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28.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예전에 읽었던 소설책의 내용이 생각납니다.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평범한 외판원인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착실한 청년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커다란 벌레가 되었습니다. 왜 벌레가 되었는지 이유도 또 설명도 없습니다. 나중에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등에 박혀 살 속에 파묻히면서 심한 상처와 염증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다 조용히 죽음을 맞이합니다.
신학생 때 이 책을 읽고는 곧바로 “뭐야?”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이 줄거리를 들은 분들 역시 “뭐야?”라고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그러나 이 책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최고의 극찬을 받습니다.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책입니다.
처음에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몇 번을 읽게 만들고 계속 생각나는 내용입니다. 인간 존재의 부조리함, 고독, 정체성 상실 등에 대해, 또 사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심지어 가족이라는 가장 가까운 공동체마저도 이기적일 수 있음을 날카롭게 보여주는 깊이 있는 책이었습니다.
그렇게 깊이 있는 내용이지만, 계속 읽지 않고 또 마음에 새기지 않았다면 이해하기 힘든 책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의 말씀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 말씀도 단번에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계속 읽고 마음에 새기면 두고두고 자기 삶 안에서 그 깊이가 드러나게 됩니다. 딱 한 번 읽고 도저히 모르겠다고 포기한다면, 세상의 어떤 책보다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책을 버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서,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끌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복음도 두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먼저 겨자씨의 비유로, 작고 보잘것없는 씨앗이 성장하여 많은 이들이 의지할 수 있는 나무가 되는 모습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이야기합니다. 다음으로는 누룩의 비유로, 은밀히 작용하는 누룩이 밀가루 전체를 변화시키듯 하느님 나라가 세상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일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이 작고 보잘것없는 시작 같지만, 하느님께서 그 안에서 강력하게 일하시어 모든 민족에게 구원의 안식처를 제공하실 것임을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쉽고 편안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로 말씀하시는 주님의 배려 깊은 사랑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말씀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서 큰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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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길을 잃지 않는다(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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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28.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신앙은 작은 일부터 실천하면서 믿는 것
박윤식 [big-llight] 250727. 20:57 ㅣNo.183743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이가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날아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이르셨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온통 부풀어 올랐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비유를 들어서만 말씀을 하셨다.’
우리가 잘 아는 이솝 이야기가 들을수록 매우 재미있다.
거기 담긴 비유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지침이 되기에.
예언자들도 비유로써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거나 하느님의 뜻을 알렸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많은 비유를 들려주셨다.
그분의 비유 이야기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알아듣기 쉽게 하며,
기억 속에 오래 남게 해 준다.
비유는 정말 힘이 있다.
하느님의 신비는 비유가 아니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 뜻이 매우 깊기에.
예수님께서도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왜 비유로만 말씀하셨을까?
두 가지 생각이 든다.
하늘 나라는 비유가 아니면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고,
또 상상하기 힘든 하늘 나라의 신비는 비유를 통해서만 알기에.
그렇지만 비유는 듣는 이에 따라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신비는 비유에 귀 기울이는 이들에게 빛이 되지만,
그것을 흘려들으면 여전히 감추어진 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남는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드신 겨자는 밭에서 재배된다.
봄이 되면 노란 꽃이 피고, 동그란 열매에는 씨가 들어 있다.
겨자씨는 하도 작아, 보면 볼수록 무슨 가루 같단다.
이렇게 작은 게 나중에는 키 큰 나무로 1~2m까지 자란다나.
씨를 가루 내어 물에 갠 것이 겨자이다.
‘울며 겨자 먹는다.’는 그 겨자다.
예수님의 이 행적도 지금은 비록 미미하지만, 나중엔 큰 가르침이 되리라.
사람들은 사랑과 집착을 혼동한다.
사랑하면 행복하지만 집착하면 허무에 젖는다.
사랑하면 자유로워지지만 집착하면 아쉬움에 잠긴다.
그런데도 사랑보다 집착에 쉽게 기운다.
소유욕 때문일 게다.
내 것으로 만들어야 안심할 수 있는 어설픈 그 소유욕 때문에.
하느님의 다스림은 사랑하고 나누고 보듬어 안으라는 거다.
집착의 딱 반대이다.
가로채고 쌓아놓지 말라는 거다.
이를 바꿀 수 있는 힘은 오직 믿음뿐이다.
겨자씨 같은 믿음만 있어도, 바꿀 수가 있을 게다.
그런데 우리 가정, 우리 공동체,
우리 교회의 모습은 왜 이렇게 하늘 나라의 모습과 거리가 있어 보일까?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다는 말씀을 들으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고 때로는 의심도 고개를 드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라신다.
하늘 나라가 지금 겨자씨나 누룩처럼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반드시 완성되리라는 것을 믿자.
이를 받아들이기가 벅차면 믿음의 은총을 먼저 구하자.
하늘 나라는 하느님의 다스림을 의미한다.
겨자씨의 비유는 그분 다스림이 시작했음을 전한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미미하지만 활동을 시작했다는 선언이다.
큰 것도 작은 것에서 출발하고 겨자씨 같은 믿음이 나중에는 산까지 움직인다.
믿음엔 작고 큰 것이 없다.
겨자씨가 큰 나무 되듯,
작은 선행이 이웃에게 확산하여 큰 사랑의 공동체가 형성될게다.
당장 눈앞의 작은 일부터 실천해 나갈 것을 다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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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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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28.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슬로우 묵상] 겨자씨
서하 [nansimba] 2025-07-27 ㅣNo.183747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마태 13, 32)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겨자씨는 어떤 존재일까'라는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시간을 갖었습니다.
작지만 생명력 있는 존재
겨자씨는 작지만 충만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겨자씨는 보통 눈에 잘 띄지 않을 정도로 작지만,
심기만 하면 크고 가지도 넓게 뻗습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로, 작고 보잘것 없는 나처럼 보이지만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생명,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 숨어 있습니다.
존재는 크기나 외양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생명력으로 정의됩니다.
뿌려졌을 때 비로소 자라는 가능성
겨자씨는 혼자 있을 땐 그저 작은 알갱이입니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고,
기다림과 돌봄을 통해 성장할 때 비로소 그 본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는 마치 우리 존재가
관계 속에서, 기도 속에서,
고통과 기다림 속에서 자라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를 설명하시며 겨자씨를 사용하신 것은
작고 연약해 보이는 나라는 존재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자라고 있다는 확신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다른 생명을 품는 존재
겨자씨가 자라 큰 나무가 되면
그 아래에 다른 생명들이 깃들 수 있는 공간이 생깁니다.
이것은 단순히 '성장'의 목적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품을 수 있는 존재로 자라나는 것임을 뜻합니다.
나는 너를 위한 그늘이 되고, 쉼터가 되며,
네가 마음을 열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되는 것—
하느님 나라는 그렇게 ‘함께 머물 수 있는 자리’로 자라납니다.
작음 속에 심어진 하느님의 뜻은
성급히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 뜻은 자라고 있고, 퍼지고 있으며
때가 되면 나무가 되어 누구든 깃들 수 있는 '사랑의 공간'이 됩니다.
주님,
제가 작다고 느낄 때,
무의미해 보이는 시간 속에서
당신이 심으신 씨앗을 기억하게 하소서.
제 안의 겨자씨가 자라나
당신 나라의 그늘이 되게 하소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자리에서도
하느님의 뜻은 자라고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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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28.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과 비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고는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비유의 특징은 그것을 들었을 때
누구나 선뜻 이해하지는 못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비유를 통해 말하는 그 대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대상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알아야
그 비유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때로는 해석이 필요합니다.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그 뜻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를 말씀하시는데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단순한 하나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의도는 감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드러내는 것임을 복음은 말합니다.
비유를 통해 숨겨진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씀하고 계심을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원래 의도는
하늘 나라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한 쪽에서는 감추기 위한 것으로 보이고
다른 한 쪽에서는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데
둘은 모순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원래 의도에 집중하자면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다르게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비유는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해석을 원하는 제자들에게
직접 설명해 주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하늘 나라를 말씀하시지만
그것을 알아듣고 싶은 사람만이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누구나 하늘 나라에 초대되지만
들어가고 싶은 사람만이 그 안에 들어갑니다.
비유가 알아듣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비유를 알아들으려는 마음이 있는지가 문제입니다.
누구나 다 하늘 나라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하늘 나라를 원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내가 꿈꾸는 하늘 나라
내가 들어가고 싶은 하늘 나라는 어떤 곳인지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늘 나라는 어떤 곳인지
비교해 보는 것도
우리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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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28.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13,31-35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희망하고 바라는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시작되고 실현되는지, 이 세상에 하느님의 뜻과 다스림이 실현되면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며 우리가 어떤 유익을 누리게 되는지를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 군중들에게 설명하십니다.
먼저 하늘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십니다. 그 크기가 너무나 작아서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겨자씨처럼, 하느님을 믿고 따른다고 해서 당장 내 삶에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씨앗이 나의 수용과 결단으로 싹을 틔우고, 그 싹에 실천이라는 물과 인내라는 거름을 주며 정성으로 키우면 그것은 어느 새 훌쩍 자라 나를 지탱해줄 수 있을 정도로 커지지요. 그러면 그 가지가 고통이라는 해를 가려주고 시련이라는 비바람을 막아주며 든든하게 나를 지켜줍니다.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는 우리 신앙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그 가치가 겨자씨만큼 작아보이지만, 수많은 체험을 통해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며 내가 참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심을 알게 되고, 그분 뜻을 따름으로써만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받아들이면 하느님이 그리고 그분을 믿고 따르는 신앙이 내 삶에 큰 의미가 되고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되는 겁니다.
이처럼 ‘겨자씨의 비유’가 내 삶에서 하늘나라가 갖는 가치가 외적으로 커지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다음으로 드시는 ‘누룩의 비유’는 하늘나라의 복음, 즉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이들의 마음이 내적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누룩은 음식에 넣어주는 첨가물로 음식을 발효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누룩을 곡식에 섞어 반죽한 후 적당한 온도에서 일정 시간 숙성시키면 반죽이 크게 부풀어 부드러워지고 맛도 좋아지지요. 그렇게 변화된 반죽으로 우리 생명을 유지시키는 빵도 만들고, 우리 삶에 맛을 더하는 술도 만듭니다. 예수님은 당신 말씀이 바로 우리 삶에서 누룩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당신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며 따르면, 그 말씀이 우리를 하느님 보시기 좋은 모습으로 변화시키고, 우리 삶에 다채롭고 풍요로운 ‘맛’을 더해준다는 겁니다.
이 두가지 비유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속에”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겨자씨, 즉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나의 삶이라는 흙 속에 심어야 합니다. 누룩, 즉 예수님의 말씀은 나의 마음이라는 반죽 속에 넣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를 성장키시고 변화시키지요.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겨자나무가 또 다른 씨앗을 퍼뜨리듯, 밀가루 반죽이 발효되어 또 다른 누룩이 되듯, 우리도 믿음의 씨앗이 되어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증거하는 일꾼이 되어 형제들 가운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믿고 희망하는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 온전히 실현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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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 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298
7월28일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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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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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작은형제회 양두승 미카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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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작은 것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연일 계속되는 폭염 경보 속에서 작업을 하던 외국인 근로자들이 온열 질환으로 쓰러지고 사망하는 사고들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통이라도 잘 되면 어지러우면 어지럽다고,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라고 의사 표현을 했을 텐데...
가난하고 고된 인생 한번 바꿔보겠다고, 이역만리 타국까지 와서, 꿈도 채 이뤄보지 못하고, 그렇게 억울하게 유명을 달리한 소식을 고국의 가족들이 전해 듣게 된다면, 또 얼마나 가슴이 무너져 내릴 것인지...
저도 요즘 아이들이 오기 전, 안전한 공간을 준비하기 위해 열심히 예초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한여름 예초 작업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예초기 칼날이 땅에 닿으면 잔돌들이 튀기 때문에, 긴 팔에 긴바지, 장화와 안전모, 거기다 앞치마까지 두르면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릅니다.
그래도 저는 기본 수칙을 철저히 지키는 편입니다. 온열 질환 예방을 위해 3가지가 중요합니다. 규칙적인 수분 공급, 그리고 햇볕 아래 일하다가 정기적으로 그늘을 찾는 것. 그리고 더위로 인해 핑 돌거나 어질어질할 때는 즉시 휴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사장님들이나 관리자들께서는 폭염 속에서 고생하는 직원들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시원한 사무실에만 앉아계시지 마시고, 수시로 현장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직원들 얼굴도 살펴보고, 적정한 휴식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실 때는 그냥 가지 마시고 시원한 생수나 음료수를 들고 가서 하나씩 권해드리면 얼마나 좋은 모습이겠습니까?
저도 바깥에서 자주 일하다보니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시는 분들에 대한 동지 의식이 자연스레 생겼습니다. 그래서 작은 나눔이지만 실행하고 있습니다. 시원하게 얼린 생수를 냉동고와 냉장고에 잔뜩 준비해놓습니다. 혹서 속에 바삐 움직이시는 택배기사님들, 안전관리자들, 기술자분들에게 얼린 물을 하나씩 드리니, 별것 아니지만 참 좋아하십니다.
살다 보니 작은 것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더군요. 오늘 내가 행하는 지극히 작은 친절 하나, 작은 선행 하나, 작은 격려의 말 한 마디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누군가에게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일상 안에서 반복하는 작은 사랑의 실천 하나를 대체 누가 알아주고,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 하늘나라에서는 깜짝 놀랄 정도로 큰 것이 되어, 우리에게 건네질 주님의 상급이 엄청날 것입니다.
오늘 겨자씨 비유 말씀과도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마태 13,32)
다들 무더위에 힘들어하는 요즘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힘겨워하는 이 세상과 동료 인간들에게 어떤 사랑의 겨자씨 하나를 뿌릴 것인지 고민해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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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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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비유를 통하지 않고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을까?>
혹시 누군가의 삶의 이야기나 그가 남긴 말 한마디가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마치 내 이야기처럼 곱씹고 또 곱씹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다가, 혹은 한 위인의 일대기를 듣다가, 그 사람의 삶이 통째로 내 마음에 들어와 나의 생각과 방향을 바꾸어 놓는 그런 체험 말입니다. 위대한 사랑을 품은 이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잘 쓰인 이야기, 즉 ‘비유’가 됩니다.
오늘 복음의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유는 비유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삶으로 이 비유를 증명해내면 그것은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 진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가 되고 누룩이 되셔서 진리로 보여주셨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먼저,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렸던 임진왜란의 바다로 가봅시다. 영화 ‘명량’은 당시의 절망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133척이 넘는 왜군 함대 앞에 남은 것은 고작 12척의 낡은 배. 모두가 공포에 질려 더 이상 나아가기를 주저합니다.
이순신에게 고대 병법서인 『오자병법』의 구절인,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必死則生 必生則死).” 이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진리입니다. 그러나 다른 장군들은 그 진리를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두려워 감히 싸우러 나서지 않습니다.
이때 이순신 장군 혼자만이 홀로 적진을 향해 노를 젓습니다. 그리고 홀로 수많은 적과 싸워 이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때 다른 장군들에게도 그 말씀이 진리로 다가옵니다. 그러자 그들도 실천할 힘이 생깁니다. 이순신 장군 스스로 진리를 비유로 드러낸 것입니다. 그 씨앗은 그들의 내면에서 순식간에 자라나, 두려움을 이겨내는 용기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그들도 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마침내 그들이 함께 달려들자, 수많은 일본 배들이 줄행랑을 치고 파괴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 스스로 작은 씨앗이 되셨고 많은 이들의 그늘이 되어주셨습니다. 땅으로 내려오셔서 안식일 법을 어긴다고 나무라는 바리사이들 앞에서 제자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도 그러한 삶이 행복인 것을 믿고 자신들도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힘든 이들에게 그늘이 되어주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때 참으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느낍니다.
누룩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하느님이시자 스승이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서로 자신들이 높다고 주장하던 제자들의 마음이 누룩으로 부푼 빵처럼 부드러워졌습니다. 누군가에게 그늘이 되어주고 양식이 되어주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 실현된 비유를 보며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참 진리를 믿게 되고 실천하는 존재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진리는 실천된 비유로만 전달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하지 않고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말이 이런 뜻입니다.
5세기의 로마, 당시 로마는 끝없는 전쟁과 정치적 암투, 도덕적 타락으로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노르치아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젊은이, 베네딕토는 그 안에서 깊은 회의와 영적 갈증을
느꼈습니다. 그는 이대로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서는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음을 직감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수비아코의 한 동굴로 들어갑니다.
그는 그곳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3년간 아무도 만나지 않고, 오직 하느님과 단독으로 마주하며 자신의 내면과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깨닫습니다. 즉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는 단순하지만 위대한 규칙을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믿을까요?
베네딕토 성인은 단순한 말의 가르침을 넘어 자신의 삶으로 그 진리가 실현된 비유가 되게 하였습니다. 수도 공동체를 세우고 그 공동체 안에서 8시간 일하고, 8시간 기도하고, 8시간 쉬는 규칙을 만듭니다. 그렇게 사는데도 행복한 모습을 유지하는 베네딕토 성인을 보며 많은 이가 일하고 기도하라는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지금까지 천 년 이상을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 안에 심긴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야고 1,21-22)
그렇습니다.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나를 통해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의 삶이 그 말씀이 진리임을 증거하는 하나의 비유가 됩니다. 이것이 진리를 전하는 방식입니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편지’, 즉 세상이 읽을 수 있는 ‘살아있는 비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과 같습니다. 우리는 진리 자체이신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실천된 비유들입니다. 그 비유의 가치는 영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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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중국 고대의 법가 사상가 한비자는 “비리법권천(非理法權天)”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치는 법을 이기지 못하고, 법은 권력을 이기지 못하고, 권력은 하늘을 이기지 못한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단순히 하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마음, 곧 민심을 가리킵니다. 아무리 강력한 권력도 민심을 거스르면 결국 무너진다는 지혜가 담긴 말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은 민심이 원하는 평화를 거스르고 있습니다. 한국은 특검으로 전직 대통령을 수사하고 있습니다. 비상계엄으로 국회를 해산하고,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것은 하늘의 뜻, 국민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국회의 탄핵과 헌법재판소의 파면이 있었습니다. 대통령 선거로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였습니다. 한 나라의 권력이 국민의 생명을 희생시키며 자기 정당성만을 고집할 때, 그것은 하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역사는 반복해서 보여 주었습니다. 권력자는 한비자의 말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하며, 자신이 하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 늘 성찰해야 합니다.
문무왕은 죽으면서 호화로운 장례식을 지양하고 간소하게 화장하여 동해에 뿌려달라고 유언했습니다. 또한,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뜻을 밝혀, 동해 가운데 큰 바위 위에 묻어달라고 했습니다. 이 유언에 따라 대왕암에 묻혔고, 감은사라는 절이 세워졌으며, 현신한 장소를 이견대라고 합니다. 문무왕은 삼국 통일을 이룬 왕입니다. 당나라를 쫓아내고 완벽하게 삼국을 통일한 왕입니다. 그런 왕이 화려한 왕릉을 마다하고, 죽어서라도 나라를 지키겠다면 최초로 화장하여 그 재를 바다에 뿌린 왕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였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금을 모아서 송아지를 만들었고, 그 앞에 절하였습니다. 하느님 대신에 우상을 섬겼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 않아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듯이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느님께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뜻을 어겼지만,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청을 받아 주셨습니다. 지도자는 자신보다 백성을 앞세워야 하며, 정죄보다 구원을 바라는 마음이 있어야 함을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문무왕과 모세의 헌신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말씀하십니다. 가장 작은 씨앗 하나가 큰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이게 된다는 이 말씀은, 단지 자연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권력이나 세속적 힘으로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작고 겸손한 마음, 사랑과 희생, 정의를 향한 갈망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지금 손에 쥔 스마트폰 하나로도 우리는 무한한 가상 세계에 접속할 수 있습니다. 작지만 연결되면 커다란 세상이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겨자씨에 비유하신 하느님 나라도 이와 같습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것 같지만, 그 속에는 온 세상을 품을 수 있는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 나라에 접속할 수 있을까요?
첫째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늘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연결되는 통로이며,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는 영혼의 안테나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 하느님 나라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둘째는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은 단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는 사랑과 정의의 실천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살아갑니다. 하지만 기도와 사랑으로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접속할 수 있습니다. 권력을 지닌 사람은 문무왕처럼 백성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모세처럼 용서를 청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도 작은 겨자씨 같은 믿음을 소중히 키워서, 하늘의 새들이 깃들이는 그늘진 나무처럼 이웃에게 쉼과 희망을 주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새롭게 시작되는 한 주간의 첫날입니다. 스마트 폰으로 접속하는 시간을 잠시 멈추고 기도로 하느님 나라에 접속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작은 선행과 나눔이 우리의 이웃들에게는 하느님 나라로 접속하는 길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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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오늘 독서의 앞부분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수송아지 상을 만들어 자기들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신 주님이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수송아지 신상 앞에 제단을 쌓고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바치며 먹고 마시는 가운데 흥청거리며 놉니다.(탈출 32,4.6 참조) 하느님과 계약 관계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 수송아지 상을 숭배하여 십계명의 첫째 계명을 깨면서 그분과의 관계도 깨졌습니다.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시고 글씨를 새기신 돌판을 모세가 깨 버린 것은 이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가 깨짐을 뜻하며, 모세의 화는 하느님의 화를 닮았습니다.(32,10 참조)
그런데 왜 이스라엘 백성은 이리도 빨리 하느님과 맺은 관계를 깨뜨렸을까요? 그들은 그분의 막강한 현존을 체험하였지만, 모세의 부재로 암시되는 하느님의 부재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자신들을 이끌어 주셨는데, 그 모세가 시나이산 위로 올라가 사십 일 밤낮을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떠나 있었습니다(24,18 참조). 그래서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 대신에,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신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잘 보이지도 잘 느껴지지도 않는 하느님 대신에 당장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에 의지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내 옆 사람일 수도 있고 물건일 수도 있고 나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우상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을 식별하는 방법은 그에 대하여 집착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나는 어떤 우상을 가지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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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3,31-35: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예수께서는 하늘나라를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지만 매우 매운 맛을 가진 겨자씨에 비유하신다. 이 씨앗은 밭에 뿌려지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고 한다. 복음이라고 하는 씨앗은 다른 씨들에 비해 무척 작다. 그러나 이 씨앗이 뿌려지면, 평범한 식물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것은 나무로 자라나 믿는 이들을 상징하는 하늘의 새들이 와서 가지에 깃들인다고 한다. 겨자씨는 크기가 아니라, 그 안에 가지고 있는 완전한 생명력이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32절)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구보다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 안에 있던 위대한 능력, 즉, 그리스도의 권능, 성령에 힘입어 복음의 씨앗이 자라났고, 세상의 모든 곳으로 퍼져나갔다. 사도들은 세상에 그늘을 드리우는 가지이다. 이 가지에 다른 민족들이 생명을 희망하며 그 가지에 깃들인다.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33절). 누룩은 반죽 속으로 없어지는 것 같지만 죽지 않고, 반죽 전체를 변화시킨다. 밀가루 서 말에 골고루 섞인 누룩은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든다. 누룩이 많은 양의 반죽을 발효시켜 부풀게 하듯이 우리들의 삶도 누룩의 역할을 하여 온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다. 사도들은 군중과 섞였을 때, 달아나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누룩은 반죽 속에 넣어지면 자기는 반죽 속에 녹아 들어가 반죽 전체를 변화시킨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 그들과 하나가 될 때, 그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시킬 것이다. 겨자씨와 누룩의 기능이란 비록 지금은 잘 보이지 않을 만큼 하찮은 것으로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더욱더 작용하여 결국 커다란 힘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우리의 역할이 눈에 띄지 않고 아주 작은 것으로 보일지라도 우리가 하느님 앞에 올바로 서 있으면, 우리 주위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세상에 살지만, 우리를 통해서 세상이 변화될 수 있음을 알고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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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나라처럼>
마태오 13,31-35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언자를 통하여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하늘나라처럼>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태 13,31)“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마태 13,33)
지금여기
정성껏 품고
한걸음 또 한걸음
쉼 없이
더디더라도
한걸음 또 한걸음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한걸음 또 한걸음
온 누리 품는
여리고 자그마한
한걸음 또 한걸음
하나 이루러
서로에게 스미는
한걸음 또 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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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모든 신앙인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겨자씨이고 누룩입니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언자를 통하여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13,31-35)
1)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다.” 라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당신이 하시는 일의 놀라운 결과를 미리 예고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인간들은 어떤 일의 시작 단계만 보면서 그 일의 결과가 보잘것없을 것이라고 함부로 판단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작은 일에서도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내시는 분입니다.
이 두 비유는, 하느님께서 항상 작은 일로 시작하신다는 뜻은 아니고, ‘결과’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일의 결과를 보기도 전에 미리 실망하면서 포기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인간적인 눈으로만 보면, 처음에는 작고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시작한 것이 사실인데, 그 일의 결과는 위대하고 엄청난 것입니다.
2) 예수님 자신이 겨자씨이고, 누룩입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겨자씨라고 하든지 밀알이라고 하든지 간에,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하나의 씨가 되셨고, 그 씨에서 수많은 사람의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3) 초대교회 공동체도 처음에는 작고 보잘것없었다는 점에서 겨자씨였습니다. 최고의회가 사도들을 박해할 때,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사도 5,38-39)
만일에 사도들과 초대교회가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즉 메시아께서 직접 세우신 교회가 아니라 자기들 마음대로 모인 집단이었다면, 저절로 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과 초대교회는 ‘주님의 겨자씨’였습니다. 바로 그 씨 속에 인류 전체를 구원하는 하느님의 생명력이 들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생명력은 변함없이 교회 안에 살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실 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태 16,18) ‘주님의 겨자씨’가 인류 전체를 구원하는 ‘큰 나무’로 자라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세력이나 힘 같은 것은 없습니다.
4) 사도들과 초대교회 공동체는 훌륭한 누룩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과 표징이 일어나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두려움에 사로잡혔다."(사도 2,42-43)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6-47)
“그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솔로몬 주랑에 모이곤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그들 가운데에 끼어들지 못하였다. 백성은 그들을 존경하여,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사도 5,12ㄴ-14)
지금도 사람들을 변화시키면서 ‘주님의 누룩’으로서 훌륭하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지역 교회 공동체들이 많이 있습니다.
5) 모든 신앙인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겨자씨’이고 ‘주님의 누룩’입니다. 내가 바치는 한 번의 기도가, 내가 실천하는 작은 선행과 사랑이,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겨자씨가 되고 누룩이 됩니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구원하게 됩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주님의 기준으로는 신앙인의 작은 기도와 선행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 전부 다 위대한 일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교만에 빠지면 안 되고,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겸손하게 스스로 낮춰야 합니다.(루카 17,10)
그래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서 크게 기뻐하시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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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단순하지만 하늘 나라의 특징을 잘 표현합니다. 여느 씨앗보다 작지만 그 어느 풀보다도 커지는 겨자와, 작은 양으로도 밀가루를 온통 부풀어 오르게 하는 누룩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처음과 매우 대조적인 결과라는 점입니다. 겨자씨가 다른 씨앗에 견주어 얼마나 작은지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앗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비유는 처음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성장하고 풍성해진다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가장 먼저 생각하여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지상 업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지방에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3,2)라는 선포로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화려하거나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을 만한 시작은 아니었지만 그분의 활동으로 점점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믿게 됩니다.
그분의 활동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절정에 이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온 세상에 선포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상상하기 힘든 결과입니다.
하늘 나라는 이런 예수님의 활동 안에서 확장되어 갑니다. 하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치 누룩처럼 사람들 안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완성으로 나아갑니다. 하늘 나라는 하느님의 다스림을, 그분의 뜻을 따르는 이들을 통하여 세상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시편의 인용은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우리 안에서 커져 갑니다. 과정에 있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하면서 종말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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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하늘 나라가 다가오는 비밀을 알려 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일 정도로 성장한다.’ ‘적은 누룩이 밀가루에 들어가면 부풀어 올라 빵을 만들어 낸다.’
이 말씀은, 하늘 나라는 현실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아도, 일단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겨자씨와 누룩처럼 자라나서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가끔 주변을 둘러보면 하느님 사랑에 푹 빠져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이 달다는 이들, 성당에 가는 발걸음이 행복하다는 이들, 봉사하고 말씀을 전하는 것이 세상의 돈벌이보다 행복하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제들이 미사와 강론, 성사를 집전하는 기쁨으로 살고, 수도자들이 분주함 속에서도 기도하며 고유한 은사를 교회와 세상 안에서 나누며 살 때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이 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예언자의 표징처럼, “사악한 백성이 내 말을 듣기를 마다하고, 제 고집스러운 마음에 따라 다른 신들을 좇아 다니며 그것들을 섬기고 예배”한다면, 바위 틈새에 오랫동안 숨겨져 있다가 썩어 버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띠처럼 될 수 있다는 경고도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날이 온다면, 내가 하느님 나라의 겨자씨와 누룩을 간직하고 살았는지, 썩어 쓸모가 없어진 띠처럼 하느님을 외면하며 살지는 않았는지 스스로의 인생에 책임을 져야 할 순간이 될 것입니다. 그날에 무슨 말을 하게 될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깨어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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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박상병 루도비코 신부님]
겨자씨를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겨자씨는 복음 말씀처럼 정말 작은 씨앗이다. 그런데 이렇게 작은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게 되면 나무가 된다. 우리 눈에는 보잘것 없는 작은 씨앗이지만 자신을 죽이면 그것도 좋은 나무가 된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겨자나무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다. 고작 1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어쩌면 나무라기보다는 푸성귀라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하느님 나라를 푸성귀에 불과한 겨자나무에 비유했을까? 어쩌면 우리는 내심 하느님 나라가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드러나기를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보잘것 없는 교회보다는 멋지고 웅장한 교회를 꿈꾸기도 하고, 나 또한 그러한 삶을 살기를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실질적인 모습을 보자.
나는 그만큼 화려하고 웅장한가? 보잘것없어 보일 때가 적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하느님 나라와는 별개의 존재일까? 그렇지 않다. 내가 바로 겨자나무인 것이다.
겨자나무는 크지 않지만 몇 마리의 새들이 날아와서 깃들인다. 나한테도 단 두 세 사람이라도 와서 깃들인다면, 나는 하느님 나라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한테 필요한 것은, 내가 보잘것 없는 겨자씨만 한 존재라도 나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씨앗은 죽어야 나무로 자랄 수 있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보잘것 없고 자그마한 나무이지만, 그러한 나무들이 많이 있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살맛 나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가득한 세상으로 변해 갈 것이다. 나부터 그러한 겨자나무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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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전에 읽었던 소설책의 내용이 생각납니다.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평범한 외판원인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착실한 청년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커다란 벌레가 되었습니다. 왜 벌레가 되었는지 이유도 또 설명도 없습니다. 나중에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등에 박혀 살 속에 파묻히면서 심한 상처와 염증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다 조용히 죽음을 맞이합니다.
신학생 때 이 책을 읽고는 곧바로 “뭐야?”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이 줄거리를 들은 분들 역시 “뭐야?”라고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그러나 이 책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최고의 극찬을 받습니다.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책입니다.
처음에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몇 번을 읽게 만들고 계속 생각나는 내용입니다. 인간 존재의 부조리함, 고독, 정체성 상실 등에 대해, 또 사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심지어 가족이라는 가장 가까운 공동체마저도 이기적일 수 있음을 날카롭게 보여주는 깊이 있는 책이었습니다.
그렇게 깊이 있는 내용이지만, 계속 읽지 않고 또 마음에 새기지 않았다면 이해하기 힘든 책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의 말씀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 말씀도 단번에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계속 읽고 마음에 새기면 두고두고 자기 삶 안에서 그 깊이가 드러나게 됩니다. 딱 한 번 읽고 도저히 모르겠다고 포기한다면, 세상의 어떤 책보다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책을 버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서,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끌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복음도 두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먼저 겨자씨의 비유로, 작고 보잘것없는 씨앗이 성장하여 많은 이들이 의지할 수 있는 나무가 되는 모습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이야기합니다. 다음으로는 누룩의 비유로, 은밀히 작용하는 누룩이 밀가루 전체를 변화시키듯 하느님 나라가 세상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일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이 작고 보잘것없는 시작 같지만, 하느님께서 그 안에서 강력하게 일하시어 모든 민족에게 구원의 안식처를 제공하실 것임을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쉽고 편안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로 말씀하시는 주님의 배려 깊은 사랑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말씀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서 큰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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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늘 나라의 삶>
-“관상과 활동의 일치와 조화”-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어제 주일도 오전 미사전, 미사후 많은 분들에게 면담 고백성사를 드렸습니다. 보속으로는 꼭 셋을 챙겨 드립니다. 첫째는 말씀처방전, 둘째는 행복기도 소리내어 바치기, 셋은 ‘하늘과 산’ 그림의 수도영성을 상징하는 로고 스티카를 휴대폰에 붙여드리는 것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꽃자리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늘 읽어도 새롭게 와닿는 행복기도중 한 대목입니다. 이어 하늘과 산의 수도원 로고 스티카를 붙여 드리며 첨가하는 설명입니다.
“하늘보고 땅보고,.. 기도하고 일하라 바로 수도영성의 모토입니다. 스티카를 볼 때 마다 하느님을 생각하고, ‘기도하고 일하라’를 연상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바로 관상과 활동의 일치와 조화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관상과 활동의 일치와 조화에서 실현되는 하늘 나라의 꿈입니다. 새벽 인터넷 유투브에서 본 유명 정치인의 언급이 참 멋지고 신선했습니다.
“정치의 본령은 둘입니다. 하나는 사회적 약자를 챙기는 것, 하나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나무도 보고 숲도 보는 통합적 시각이 복음적이며 하느님의 시선을 닮았습니다. 비단 정치지도자들뿐 아니라 교회지도자들이 지녀할 시각이요 관상과 활동의 일치와 조화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어제 주일 “조부모와 노인의 날” 삼종기도후 교황님의 강론중 두 말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조부모와 노인들은 ‘희망의 증거들’(witnesses of hope)’이다.”
주변의 젊은 후배들에게 희망의 증거들, ‘희망의 표징들(signs of hope)’이 되는 노년이 되도록 관상과 활동의 일치와 조화로 하늘 나라의 삶을 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만일 너희가 잔인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너희는 하느님을 너희 아버지라 부를 수 없다.”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야 비로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느님의 자녀가 됨을 봅니다. 오늘 옛 현자의 지혜도 참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일깨웁니다.
“하루를 마치며 되돌아본다. ‘나는 오늘 나로 산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다산>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논어>
아버지의 아들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비로소 참나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의 비유로,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둘이 소개됩니다. 하늘 나라의 비유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관상신비가와 활동가의 면모가 잘 드러납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하는 하늘 나라의 표징들입니다. 오래전 써놓은, 지금 바야흐로 피어나기 시작한, 예전에 소개했던 무려 28년전 지금 여기서의 <달개비꽃>이란 시입니다.
“오, 하느님이 밤사이 쏟아 놓은
남보랏빛 생명의 보석들!
아주 낮은 그늘 속에 있어 잘 눈에 띄지 않는
남보랏빛 생명의 보석들!
아무도 주워가지 않는
바라볼 수는 있어도 가져 갈 수는 없는
달개비꽃 생명의 보석들!”<1997.8.25.>
하늘 나라의 신비요 하늘 나라의 발견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관상신비가와 활동가가 되어 살아야 할 하늘 나라의 현실입니다. 바로 관상신비가와 활동가의 모범이 하느님 마음에 정통해 있던 예수님과 모세입니다. 작은 보잘 것 없는 겨자씨에서, 누룩에서 하늘 나라의 표징을 발견한 예수님의 눈입니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가만히 침묵중에 경탄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지켜봐야할 저절로 성장하는 하늘 나라의 전개 과정입니다. 묵묵히 조용히 숨어서 끊임없이 일하시는 겸손하고 부지런한 하느님이요, 참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신비롭고 놀랍고 새로운 하늘 나라의 현실입니다. 정말 조심스런 우리 인간의 협조가 필요할 뿐입니다. 참으로 겨자씨 같은 내외적 성장의 개인이나 가정, 교회, 수도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봅니다.
과연 겨자씨같이 성장하는 수도공동체로 많은 이들이 와서 깃들 수 있는 ‘하느님의 품’같은 하늘 나라의 실현인 요셉수도원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겨자씨처럼 여러분의 삶도 끊임없는 내외적 성장으로 날로 하늘 나라의 실현이, 넓고 깊은 하느님의 품이 되고 있는지 되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소원은 단 하나 우리 믿는 이들 하나하나가 예수님을 닮아 하늘 나라의 꿈을 현실화하는 것이란 생각입니다. 이래서 복음선포의 겨자씨같은 삶이 필요합니다. 흡사 겨자씨가 상징하는 바, 살아 성장하는 ‘하느님의 말씀’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말씀의 겨자씨에 이어 말씀의 누룩입니다.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과 하나된, 관상과 활동이 일치된 삶일 때 개인이든 공동체든 누룩과 같은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세상과 격리된 빛이요 소금이요 누룩이라면 존재이유의 상실이요 그러니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듯 세상속의 누룩입니다. 과연 나는, 우리 가정공동체는, 교회 공동체는, 수도공동체는 예수님처럼 세상에 희망의 누룩, 사랑의 누룩, 정의의 누룩, 평화의 누룩, 진리의 누룩이 되고 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탈출기에서 우리는 중재자 예수님의 예표와 같은 모세를 만납니다. 하느님과 백성을 참으로 사랑했던, 관상과 활동이 일치와 조화를 이뤘던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간의 유일한 중재자 경천애인의 사람, 모세입니다. 모세의 담대한 뱃장은, 배수진을 친 비장한 결의는, 그가 얼마나 하느님 마음에 일치되어 있는지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려거든, 당신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저를 지워주십시오.”
이와 흡사한 바오로의 고백도 연상됩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안 동포를 위해서라면, 자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로마9,3). 불교의 “모두가 지옥에서 구출되기까지 지옥에 머물겠다”는 불교의 지장보살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마침내 모세의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려는 불퇴전의 고집스런 기도에 마음을 접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을 잊은 시대, 실용만 강조되는 시대에 관상과 활동의 일치와 조화로운 삶이, 하늘나라의 삶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내외적성장의 겨자씨로, 내외적성숙의 누룩으로, 또 주님의 관상신비가와 활동가로 살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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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복음의 겨자 씨를 뿌리자!>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오늘도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입니다. 첫째 비유는 겨자씨의 비유로서 겨자씨는 하늘나라인데 어떤 사람이 그 씨를 자기 밭에 뿌린다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세 요소는 ‘어떤 사람’과 ‘겨자씨’와 ‘자기 밭’입니다..주님께서 ‘어떤 사람’이라고 하심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겨자씨 곧 하늘나라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도 주어지고 너에게도 주어지는 것으로서 누가 심든 주어지는 대로 겨자씨를 심기만 하면 그 씨는 크게 자라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씨가 중요합니다. 사실 씨란 겨자씨뿐 아니라 모든 씨가 작고, 작지만 크게 자라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관건은 겨자씨 곧 하늘나라라는 씨를 뿌려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자기 씨를 뿌린다거나 악마의 씨를 뿌린다거나 욕망이라는 씨를 뿌릴 경우, 그때가 문제이고, 그 사람이 문제입니다.
자기 씨를 뿌리면 자기가 자기 안에서 크게 자라날 것이고, 악마의 씨를 뿌리면 악이 자기 안에서 크게 자라날 것이며, 욕망이라는 씨를 뿌리면 욕망이 자기 안에서 크게 자라날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밭’이 자기 마음일 수도 있지만 자기 교회나 자기 사업이나 자기 계획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 교회에 자기 씨를 심으면 자기 교회는 하늘나라로 성장하지 않고, 자기 소유의 나라가 되고 말 것이고 자기 교회가 대형 교회가 될 것입니다.
제가 볼 때 개신교 많은 대형 교회가 이런 식으로 커진 교회이고, 가톨릭의 경우엔 성당이 사제 개인의 소유는 아니지만 본당이 하느님 중심의 하느님 나라가 자라게 하는 사목이 아니라 자기가 왕인 양 자기중심의 사목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겨자씨 곧 하늘나라의 씨앗을 뿌리는 사목이 아닌 겁니다.
자기 사업이나 계획도 하느님 사업이나 계획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식당에 가면 네 시작은 미미하나 그 끝은 창대하다는 성경 구절을 달아놓곤 하는데 이처럼 자기 사업이 번창할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제가 하는 협동조합과 식당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제게 이 사업이 잘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며 그렇게 되기 위해 방송을 타면 좋겠다고도 하십니다.
저도 그런 마음이 없지 않고 그래서 그것이 유혹으로 다가올 때도 있는데 저는 그것을 항상 경계하고 그럴 때마다 단호하게 끊어버립니다. 프란치스코가 세운 작은형제회의 작은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작은형제회가 자기 수도회가 될까 봐 조심하였고, 작은형제회가 큰 수도회가 될까 봐 더 조심하고 그래서 형제들의 수가 갑작스럽게 늘어나는 것도 걱정했습니다.
사실 수도회가 큰 것이 중요하지 않고 복음적인 것이 중요하고, 형제들의 숫자가 많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한 명이라도 프란치스칸다운 프란치스칸이 있는 것이 좋겠지요.
제가 가끔 얘기하듯 저와 같은 사람 수만보다 프란치스코 성인 한 분이 세상을 진정 복음화하잖습니까?
그러므로 우선 내 안에, 다음으로 우리 공동체에 복음의 겨자씨를 뿌리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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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마태 13,31.33)
<작은 기적들!>
오늘 복음(마태13,31-35)은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작은 씨앗인 겨자씨와 부패의 상징인 누룩에 비유해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마태 13,32)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마태 13,33)
누룩은 술을 빚는데 쓰는 발효제입니다. 누룩 자체로는 별 가치가 없을 수 있지만, 술을 빚을 때에 없어서는 안 되는 꼭 필요한 재료입니다.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 마음의 새겨야 할 것들을 떠올려봅니다.
'작은 것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작은 희생과 봉사들이 모여 기적을 만든다.'
'보잘것 없어 보이는 것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건설된다.'
'회개는 이제와 영원한 구원의 결정적 시작이다.'
이번 집중 폭우로 피해를 입은 이들을 돕기 위해 곳곳에서 달려와 땀을 흘리는 많은 자원봉사자들을 만났습니다. 귀한 시간과 땀을 너를 위해 내어놓는 그들의 모습과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임에도 더 큰 힘듦을 겪고 있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성금을 내어놓는 형제자매들의 모습을 통해서, 모두의 구원을 위한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땀과 희생과 죽음을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땀과 희생과 죽음이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참으로 보잘것 없어 보이고, 그들에게는 그것이 단지 죽음의 표지로만 보이겠지만, 그것은 부활로 나아가는 본질이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의 작은 땀과 수고와 희생들이 모여,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큰 용기와 큰 희망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여기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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