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거리”는 쓰면 안 되는 말인가?
‘먹거리’라는 낱말이 한때 제법 쓰이다가 잠시 자취를 감춘 듯했었는데 이제 다시 살아났다. 한때 제법 쓰인 데에도 어느 한 분의 애태움이 있었고, 자취를 감춘 말미에도 어느 한 분의 걱정이 있었음을 나는 안다. 나처럼 이런 속내를 아는 사람은, 말이라는 것이 저절로 생겨났다가 저절로 죽어 버린다는 통설을 곧이 믿기가 어려워진다.
말이라는 것이 더불어 쓰는 사람들의 소리 없는 약속으로 살아나기도 하고 죽어 버리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반드시 맨 처음에는 누군가가 씨앗을 뿌려야 하고 마침내 누군가가 싹을 자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나는 ‘먹거리’를 살리려 애태우던 분을 만나지는 못했으나, 그분이 ‘먹거리’라는 낱말을 살리려고 애를 태우던 시절의 한 고비를 잘 알고 있다. 내가 대학에 있던 1970년대 후반에 그분은 우리 대학으로 ‘먹거리’라는 낱말을 써도 좋으냐고 글을 보내 물어 왔다.
그분이 보낸 글에는 자신이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에서 일하며, 우리말에는 영어 ‘food’처럼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싸잡는 낱말이 없어 찾아 헤맨 사연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먹거리’라는 낱말을 찾았으나, 우리말을 연구하는 이름난 두 학회에서 조어법에 맞지 않으므로 쓸 수 없다고 해서 실망에 빠져 있다는 사연도 들어 있었다.
▲ '식량농업기구' "food"를 우리말로 "먹거리"로 쓰면 안 되냐고 묻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이름난 두 학회에서 한결같이 쓸 수 없다고 했는데도 굳이 우리에게 그런 물음을 보낸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바로 그해 우리 대학 학장의 졸업 식사에 ‘먹거리’라는 낱말이 쓰였고, 그것이 학보에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던지 그분은 학장에게 그 낱말을 쓰게 된 말미를 편지로 물었고, 학장은 식사 초안을 잡은 교수에게 그분이 보낸 글들을 그대로 주면서 답변을 당부했다.
그래서 졸업 식사 초안을 잡은 교수와 나는 ‘먹거리’라는 낱말은 당당히 쓸 수 있으며 마땅히 살려 써야 한다는 사실을 논리에 맞추어 알려 주었다. 그분은 우리의 답변을 복사하여 여러 곳에 두루 알리고 마침내 그 낱말을 쓸 수 없다던 학회에서까지 쓸 만하다는 대답을 다시 얻어서 ‘먹거리’의 전도사 노릇을 부지런히 했다. 그런 덕분에 ‘먹거리’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쓰는 낱말로 살아났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을 남달리 사랑하고 몸소 깨끗한 우리말로 세상을 살리려 애쓰시던 분이 ‘먹거리’라는 낱말은 마땅하지 않다는 뜻을 글로 써서 밝히자 사정이 달라졌다. 그분이 ‘먹거리’라는 낱말은 못마땅하다는 뜻을 두루 밝히니까, 우리말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먹거리’라는 낱말은 갑자기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나는 ‘먹거리’를 못마땅하다고 하신 분을 잘 안다. 자주 뵈었고 그분의 삶은 나에게 우러러보이는 거울이 되기도 했다. 그분은 말이란 이름 없는 백성들이 나날이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쓰는 것을 본으로 삼아야 하고, 배웠다는 사람들이 괜히 머리를 굴려서 억지 낱말을 만들어 퍼뜨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했다. 이런 가르침의 속뜻은 말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살리려 애쓰는 사람이 지녀야 할 올바른 잣대가 되고도 남는다.
그러나 나는 ‘먹거리가 참으로 백성들이 쓰던 낱말이 아닌가?’, ‘배웠다는 사람들이 억지로 만들어 낸 낱말임에 틀림없는가?’ 하는 물음을 다시 일으켜 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어릴 적에 시골에서 자라며 ‘먹거리’라는 말을 더러 듣고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끼니를 마련하면서 ‘아침거리, 저녁거리, 반찬거리, 고음거리, 횟거리, 국거리’ 같은 낱말을 자주 썼다.
일을 하자면 ‘일거리’가 있어야 하고, 명절이나 잔치에서 벌이는 놀이판에는 ‘놀거리’가 많아야 하고, 구경이 벌어지면 ‘볼거리’나 ‘구경거리’가 좋아야 하고, 장터에 나가서는 ‘장거리’를 빠뜨리지 않아야 하고, 가난한 집에서는 나날이 끼니마다 ‘먹거리’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이런 말을 자주 주고받으며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한때 고향에 가면 ‘먹거리’라는 말을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나이 드신 어른들에게 지난날에는 썼던가를 물어봐도 모두들 긴가민가해서 잘 모르겠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내 기억을 장담하지 못하여 속으로는 어정쩡했었다.
한편, 처음에 ‘먹거리’를 조어법에 맞지 않는 낱말이라고 판단했던 두 학회의 논리도 따지고 보면 백성들이 두루 쓰지 않는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백성들이 두루 쓰는 말이면 학자들은 반드시 그렇게 쓰이는 논리를 찾아내고, 그런 논리를 조어법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처음에 두 학회에서 쓸 수 없다고 내세운 논리는, ‘먹거리’가 움직씨의 몸통인 ‘먹’에 ‘거리’라는 이름씨가 붙은 낱말인데 우리말에는 그런 조어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거리’ 같은 이름씨는 [반찬+거리]처럼 이름씨 밑에 바로 붙거나 [볼+거리]처럼 움직씨의 매김꼴 밑에 붙는 것이 우리네 조어법이라는 것이다. ‘먹거리’를 쓰지 말라 하신 분도 굳이 쓰려면 ‘먹을거리’라고 해야 옳다고 하셨는데, 그것 또한 움직씨의 매김꼴 밑에 붙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두 학회가 애초에 판단을 잘못한 것이었다. 예로부터 우리 겨레 백성들은 움직씨의 몸통에 이름씨를 붙여서 ‘먹거리’ 같은 낱말을 두루 만들어 썼다. “썩돌에 불난다.” 하는 속담이 있다. 여기서 ‘썩돌’은 움직씨 ‘썩다’의 몸통 ‘썩’에 ‘돌’이라는 이름씨가 사이좋게 붙어서 이루어진 낱말이다.
디룩디룩 잘 쪘으나 힘을 쓰지 못하는 살을 뜻하는 ‘썩살’, 썩은 짚이나 억새풀이 쌓여 있는 더미인 ‘썩새’ 더미, 이리저리 방향이 헷갈려서 쓸모가 없는 바람인 ‘썩바람’, 아직 설익은 박으로 만들어 쉽게 깨지는 바가지인 ‘썩바가지’, 이런 낱말들은 보다시피 모두 움직씨의 몸통 ‘썩’에 이름씨 낱말 ‘살’, ‘새’, ‘바람’, ‘바가지’ 같은 것들이 붙어서 이루어진 낱말이다.
‘먹거리’와 꼭 같이 움직씨 ‘먹다’의 몸통에 이름씨가 붙는 낱말도 적지 않다. 먹는 데에 이골이 난 사람인 ‘먹보’나 ‘먹쇠’를 비롯하여, 먹는 것에 남달리 타고난 성미나 성질이라는 ‘먹성’, 먹는 분량이나 정도를 뜻하는 ‘먹새’ 같은 낱말들이 모두 그렇다. 남부 지역에서는 먹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언제나 어디서나 결코 마다하지 않는 사람을 ‘묵돌이(먹돌이)’라 하는데, 이도 그렇게 만들어진 낱말이다. 입으로 먹는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귀가 먹어서 듣지 못하는 사람인 ‘먹보’도 조어법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갓을 치면서 높은 소나무 가지를 꺾을 적에 장대에다 매어 걸어 당기는 ‘꺾낫’, 기둥이나 서까래처럼 도막 난 나무를 하나로 이을 적에 서로 걸어서 박는 ‘꺾쇠’, 목수들이 쓰는 ㄱ자 모양으로 꺾어지게 만든 잣대인 ‘꺾자’, 창날의 끝을 꺾어지게 만든 ‘꺾창’도 모두 움직씨 ‘꺾다’의 몸통에 이름씨가 붙은 낱말들이다. 하늘과 땅을 이어서 서낭님들이 오르내리는 장대인 ‘솟대’ 같은 낱말도 보다시피 움직씨 ‘솟다’의 몸통에 이름씨가 붙어서 이루어졌다.
‘막국수, 막사발, 막일’ 같은 낱말은 어찌씨 ‘마구’에 이름씨가 붙었지만, ‘막둥이(막내)’ 같은 낱말은 움직씨 ‘막다’의 몸통에 이름씨가 붙은 낱말이다. 마지막에 맺은 ‘막매듭’, 마지막에 거두어들이는 농산물인 ‘막물’, 마지막에 맞은 손님인 ‘막손’, 마지막에 떠나는 ‘막차’, 마지막에 먹는 ‘막참’, 막다른 곳까지 들어간 ‘막창’, 마지막으로 벌인 ‘막판’, 이런 것들이 모두 움직씨 ‘막다’의 몸통 ‘막’에 이름씨를 붙여서 만든 낱말이다.
‘날개’, ‘덮개’, ‘지개(지게)’, ‘노래(놀애)’, ‘마개(막애)’, ‘얼개(얽애)’, ‘홀태(홅애)’ 같은 낱말도 움직씨 ‘날다, 덮다, 지다, 놀다, 막다, 얽다, 홅다’의 몸통에 이름씨 ‘개(애)’를 붙여서 만든 것들이다. ‘날치’, ‘놀부’, ‘놀거리’, ‘들물’, ‘밀낫’, ‘밀물’, ‘울보’ 같은 낱말도 움직씨 ‘날다, 놀다, 들다, 밀다, 울다’의 몸통에 이름씨가 붙어서 이루어진 낱말들이다. 이것들은 마치 움직씨의 매김꼴에 이름씨가 붙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들 움직씨는 몸통이 본디 ‘ㄹ’로 끝나 매김꼴과 모습이 같아서 그럴 뿐이다.
▲ '먹거리'과 같은 조어법으로 된 낱말에 "볼거리, 썰물, 막차, 날개" 따위도 있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요즘에도 이런 조어법으로 생겨나는 낱말이 없지 않다. 값싼 식당의 차림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덮밥’은 ‘덮다’라는 움직씨의 몸통에 이름씨 ‘밥’이 붙은 낱말로서, 쓰인 지가 꽤 오래되었다.
보기로 가져오기가 참으로 꺼림칙하지만, 한때 떼를 지어서 짐승보다 못한 짓을 저지른 젊은이들이 스스로 ‘막가파’라 했는데, 이것도 ‘막가다’라는 움직씨의 몸통에 이름씨 ‘파’를 붙여서 만든 낱말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움직씨의 몸통에다 이름씨를 바로 붙이는 조어법을 예나 이제나 꺼리지 않는 것이므로, 지난날 우리 고향에서 썼다는 내 기억이 틀렸다 하더라도 ‘먹거리’를 억지로 만든 낱말이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움직씨의 매김꼴에다 이름씨를 붙여서 낱말을 만드는 조어법도 우리 겨레는 꺼리지 않는다. ‘갈길, 날물, 썰물, 볼거리, 볼낯, 잘새’ 같은 것들이 모두 그런 낱말들이다. 보다시피 이들은 ‘가다, 나다, 써다, 보다, 자다’ 같은 움직씨의 매김꼴에 ‘길, 물, 거리, 낯, 새’ 같은 이름씨를 붙여서 만든 낱말들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런 낱말은 참된 낱말이 아니고, 두 낱말이 모여서 이루어진 어구다. 그래서 글말에서는 ‘갈 길’, ‘날 물’, ‘썰 물’ ‘볼 거리’, ‘볼 낯’, ‘잘 새’처럼, 매김을 하는 움직씨와 매김을 받는 이름씨를 띄어서 적어야 마땅하다. ‘먹거리’를 ‘먹을거리’로 쓰자고 하면 그 또한 낱말을 어구로 바꾸어 놓는 것이기에, 글로 적을 때에는 ‘먹을 거리’처럼 띄어 써야 옳다.
이처럼 이름씨 낱말 위에 움직씨 매김꼴을 놓아서 어구로 쓰는 말법은 두루 널려 있는 것이다. ‘먹거리’를 시비하여 굳이 ‘먹을거리’를 쓰자고 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얼마든지 절로 쓸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먹거리’를 버리고 ‘먹을거리’를 쓰는 것은 우리말의 보배로운 낱말만 하나 죽이는 노릇일 뿐이다. ‘먹거리’가 예로부터 쓰던 낱말이 아닐지라도 우리말의 말본에 맞는다면 새로운 낱말로 받아들여 쓰는 것이 남달리 뛰어난 우리말의 생명력을 살리는 길이 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