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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피의자가 검사 같고,
신문하는 검사가 되려 피의자 같은 공손한 자세를 한
이 한 장의 사진은
대한민국 검찰이
현재 얼마나 문제적 집단인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던 우병우는
검찰의 인사권을 쥐고 있었다.
우병우는 이를 통해
자신의 인맥으로 하여금
검찰의 주요 보직을 독점하도록 하는,
이른바 '우병우 라인' 형성했다는데...
이는 국가기관 내에 형성된
명백한 '사조직'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두 사람이 있다.
그들 역시
국가기관 내에 '사조직'을 만들고
그 인맥들로 하여금
주요 보직을 독점하도록 했다.
바로 전두환과 노태우이다.
그들이 만들었던 '사조직'의 이름은
하.나,회.
하나회는 박정희 군부독재 시절부터 형성된
대한민국 국군 내 '사조직'으로
군부의 주요 요직을 독점해왔으며,
상층부의 주요 인사가
출처가 불분명하거나 불법적으로 수뢰한 자금을
용돈 형식으로 아래로 뿌리는 식으로
그 조직을 관리, 확대했다.
당연히 조직의 입회 절차도 까다로웠다.
특정 지역 출신이거나
조직원과 인맥이 닿아야 함은 물론,
조직원 몇 명 이상의 추천이 있어야 했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수장으로 있는
군부 '사조직' 하나회는
전두환의 군사 쿠데타인
1979년의 '12.12 군사반란'과
국민을 지켜야 할 군인이
도리어 대한민국 국민을 향해 발포 및 살육을 한
1980년의 '5.18 광주 학살'의
주역이 된다.
그리고 십여 년 뒤,
1961년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 이래로
약 32년 만에 군부로부터 자유로운 정권
이른바 '문민(文民)'에 의해 통치되는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탄생한다.
하지만 김영삼은
전두환과 노태우가 만든 정치세력인
이른바 '민정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김영삼은 1988년 총선에서
자신의 당인 '통일민주당'이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에 밀려
원내 3당으로 전락하자 위기의식을 느낀다.
그리고 2년 뒤,
노태우가 '여소야대' 정국 타개책으로 제안한
이른바 '3당 합당'을 받아들인다.
이는 김영삼 자신이 평생을 싸워온
'군부독재' 세력과 타협을 하는 동시에
그를 지지하고, 또 함께 '반독재투쟁'을 해온
많은 이들을 배반하는 일이었다.
1990년,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탄생했다.
민주자유당 안에서
김영삼의 세력인 '민주계'는 비주류였다.
전두환, 노태우의 세력인 '민정계'가
여전히 주류인 상황.
그럼에도 김영삼은
'민정계'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대선 후보로 선출되고,
92년 대선에서
평생의 라이벌 김대중을 꺾은 끝에
드.디.어.
대통령에 당선된다.
정치 입문 40년 만이었다.
김영삼 본인은 '신사고(새로운 사고)'로 포장했지만,
평생을 함께한 '반독재투쟁' 세력을
등지고 대통령이 된 만큼
이전의 군부 정권과는 달라야 했다.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독재 세력이 국가권력을 사유화하는
대한민국이 아닌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거듭나게 할
개혁 조치가 필수였다.
'신한국'을 외친 김영삼은
취임 후 첫 인선에서
국방부장관에 '하나회'가 아닌 사람을 임명한다.
그동안의 관례와는 다른 선택이었다.
그리고 이는 곧 김영삼의 어떤 '의지'이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김영삼의 '숙군(국군 정화)' 작업
즉, '하나회 척결'이 며칠 만에 단숨에 끝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김영삼 본인이
'하나회 척결이 완료되었다'라고
선포할 때까지 무려 1년이 넘게 걸린
대장정이었다.
끝내 다른 길을 걷게 되긴 했지만
'반독재투쟁'에 청춘을 바쳤던 김영삼은
대한민국에 충성하는 것이 아닌
조직의 우두머리에게 충성하는
국군 내 사조직 '하나회'의 척결에 나선다.
그 과정의 첫 걸음이 바로
비(非)하나회 출신 국방부장관 임명이었다.
김영삼은 먼저 하나회 출신인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날려버린다.
육군참모총장은
국군의 최대 세력인 '육군'의 수장이고,
기무사령관은
국군의 정보기관장으로
군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취급하는 자리였다.
6월 정기인사를 무려 세 달이나 앞두고
하루 아침에 목이 날아간 두 사람은
실질적으로 군에 남은
하나회의 최고위급 인사였다.
새로 임명된 인사들은
당연히 비(非)하나회 출신이었다.
하루 아침에 별 몇 십개가 날아갔다는
항간의 이야기와는 달리
당시 김영삼은 하나회의 우두머리 격만 자르고
아무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달 뒤,
이번엔 수방사령관과 특전사령관을 날려버린다.
두 사람 역시 하나회 군맥이었다.
군부의 통치를 겪은 것이
불과 몇 년 전인 당시였다.
당연히 군부의 움직임과 관련해
쿠데타를 비롯한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함은 물론
무엇보다 신중해야 했다.
6월이었던 군의 정기인사는
4월로 당겨졌다.
그런데 군의 인사를 앞두고
돌발상황이 벌어진다.
그동안 군의 인사에 불만이었던
한 장교가 하나회 명단이라며
군인아파트 등에 유인물을 살포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예정된 군 인사는 차근차근 실행되었다.
전국 각지의 군사를 통제하는 요직엔
하나회 출신이 배제된다.
그러나 장성급 인사에서 하나회 출신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했다.
그만큼 하나회는 국군에 뿌리깊게 박혀있었다.
그 와중에 장성 진급을 댓가로
뇌물이 오간 사건이 터진다.
비교적 정치성이 덜하다고,
또는 진급할 경력이 된다는 이유로
하나회 출신임에도 눈 감아준
국방부의 미온적인 '하나회 배제' 조처는
장성급의 매관매적 스캔들이 터짐에 따라
동시에 비난의 대상이 된다.
비(非)하나회 출신의 새로운 육군참모총장은
"어떤 사조직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지휘서신을 각 대대로 보낸다.
그리고 며칠 뒤,
장성 진급이 유력했던
주요 직책의 하나회 출신 대령 8명을
한직인 전방부대로 전출시켜버린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장성급 매관매직 스캔들을 그냥 덮어버리고,
그와 관련해 구속된 장성들도 모두 석방한다.
내부로부터의 개혁이 왜 불가능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한편으로 국방부와 육군은
하나회 명단 살포 사건의 수사 결과를 발표한다.
육군은 명단 대부분이 사실이라 발표한다.
그동안 최소한 육군에서는 공식화 하지 않던
'하나회'라는 단체를 인정한 것이다.
이어서 그 명단에 있는 100여명의 인물들을
'특별관리'하겠다고 확언한다.
육군의 발표에 이어
야당 의원이 국회에서 하나회 현역 장교가
무려 200여명에 달한다는 폭로를 한다.
김영삼이 취임한지 불과 80여일,
5월의 그날이 다가왔다.
국민들은 문민정부가 5.18의 진상을 밝혀
광주 학살의 죄인들을 처벌할 것을 촉구했다.
이같은 국민의 요구에 발맞춰
김영삼은 전두환의 군사쿠데타인
12.12 사태에 가담한 현역들을
모조리 잘라버린다.
뒤이어,
12.12 당시 전두환과 하나회의 쿠데타를 막던 끝에
결국 목이 날아갔던 전직 장성들이
당시 반란 가담자들을 국가내란죄로 검찰에 고소한다.
역사를 바로세우고자 하는 움직임은
정치권에서도 일어나
김영삼의 3당 합당의 댓가로 아직도 공직에 남아있던
12.12와 5.18 가담자들에 대한 사퇴요구로 이어진다.
그런데 군 비리 사건이 또 터진다.
'율곡 사업'으로 명명된
전력확보무기 도입 사업에서
록히드 마틴社가 자사의 전투기 F-16 도입을 위해
군 수뇌부에 뇌물을 뿌린 것이 확인되었다.
뇌물수수 혐의자엔
당시 권력 상층부의 인사들도 꽤 되어
김영삼 정권에 큰 부담을 주는 사건이었다.
당시 감사원장이었던 이회창은
온갖 외압에도 이 사건과 관련된
비리와 부정을 밝혀낸다.
이회창은 이 때 얻은 '대쪽' 이미지를 동력으로
국무총리에 이어 훗날 대선후보까지 된다.
문제는 그동안 하나회 척결 작업을 하던
국방부장관의 동생도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
당연히 국방부장관 권영해는
정치권으로부터 사퇴 압박을 받는다.
권영해 역시 자신이 정권에 부담으로 작용하자
대통령 김영삼에게 사표를 제출한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한다.
국군의 최고위직인 합참의장이 주관하는 회식에서
합참의장을 보좌하는 한 장성이
김영삼의 '하나회 척결' 작업에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출한 것이다.
이는 즉시 동석한 다른 참석자의 고발로
국방부장관과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김영삼은 이를 시작으로 아직 군에 남은 하나회와
그에 동조하는 세력이 집단 행동을 할까 염려했다.
결국 김영삼은
'하나회 척결' 사업에 앞장서온
권영해의 사표를 돌려준다.
김영삼 입장에서
군을 잘 아는 내부인사이면서
또한 자신의 생각에 동조하는
믿을 만한 사람은 권영해 뿐이었다.
같은 날, 12.12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자
전두환에 의해 불법적으로 체포되었던 정승화가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군사반란 가담자들을 대검찰청에 고소한다.
전직 장성들이 연이어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군사반란 가담자를 고발하자
검찰은 결국 수사에 착수한다.
'하나회 척결' 작업은 차곡차곡 진행되어
척결 대상이 장성급에서 영관급까지 확대되었다.
국군 기무사령부는
대통령의 '하나회 척결' 의지에 발맞춰
군에 퍼져있는 다수의 사조직을 적발하고 해체시켰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적발된 조직원의 명단은 발표하지 않았다.
결국엔 말 뿐인 개혁 조처라는 비난이 뒤를 이었다.
게다가 기무사령부 자체도
특정 지역과 특정 인맥에 편중된 조직이었다.
얼마 뒤, 결국 기무사령관이 경질된다.
이같은 김영삼의 숙군 작업에 겁을 먹은
한 하나회 출신의 전직 대사는
스웨덴에 정치적 망명을 시도하기도 했다.
12월이었다.
김영삼의 취임 첫 해가 저물고 있었다.
그런데 우루과이 라운드 사태가 터진다.
무역 자유화 협상에서 농산물 시장 개방에 동의한 것이다.
당장 쌀시장 개방에 반대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폭격 맞은 분위기 속에서 김영삼은
무려 14개 부처의 개각을 단행한다.
동생의 율곡사업 비리 연루로
자리에서 버티기 힘들었던 권영해 대신
이병태 국방부장관이 새로 임명된다.
그런데 새로 임명된 국방부장관은
다름 아닌 하나회 출신이었다.
사람들이 대통령의 의중을
궁금해한 것은 당연했다.
이병태 국방부장관이 하나회 출신임에도
일찌감치 김영삼에게 전향해서
그동안의 '하나회 척결'에 대한 일종의 내부고발자 역할을 했다는
추측이 있었지만, 그저 추측일 뿐
당사자의 시원한 답변은 없었다.
이듬해인 94년에도
'하나회 척결' 작업은 계속 되었다.
신임 국방부장관은
하나회 출신 장성들의 자진전역을 종용한다.
93년 3월부터 당장에 군대 요직에서 목은 날렸지만
차마 전역은 못 시켰던 장성들의 처리는 이내 난관에 부딪힌다.
하나회 장성들이 군 정기인사 때까지 버티겠다고 반발한 것이다.
군 내부에서는 입장이 애매해진 사람들이 늘었다.
특히나 비(非)하나회 출신의 육참총장은
육사 동기생이자 하나회 출신의 국방부장관의
지휘를 따라야 하는 입장이 된 것.
게다가 지난해인 93년에 한 장교가 살포하고
국방부가 대부분 사실이라고 인정한 하나회 명단이
상당부분 부정확하고,
하나회가 아님에도 하나회로 몰린 사람이 다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동안 김영삼 정권의 '하나회 척결' 작업이
제대로 된 것인지 의문을 가질만한 사건이었다.
군의 정기인사철이 되자
끝끝내 버티던 하나회 현역 장성들은
옷을 벗는다.
그러나 하나회 출신 장성이 없다고 해도
국군의 인사를 책임지는 국방부장관이 하나회 출신이라
김영삼의 의지는 끊임없이 의심받는다.
1994년 4월 18일,
군 내에 더이상 하나회 출신 장성이 없어지자
김영삼은 청와대에서 '하나회 척결' 완료를 선포한다.
그러나 '숙군(국군 정화)'은 아직 미완이었다.
5.18 당시 광주에서 작전을 벌였지만
비(非)하나회 출신이었던 지휘관들은
아무 불이익도 없이 현역으로 자리를 보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회 척결', '하나회 배제'는
이후로도 국군의 확고한 방침으로 남아
하나회 출신의 장교들은 진급에서 전부 배제되어
짧게는 수 개월, 길게는 몇 년 뒤에 결국 군을 떠나게 된다.
오늘날 검찰이 당시의 군부와 다르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검찰과 군대는 국가에 꼭 필요한 조직이기에
무턱대고 없애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또한 국가에 꼭 필요한 조직이기에
특정인이 그 조직의 권한을 사유화해서도 안 된다.
'하나회 척결' 당시 김영삼은
높은 지지를 받음은 물론 거대 여당을 등에 업고 있었다.
그럼에도 군부 개혁의 과정이 이토록 힘들었다.
검찰 개혁 역시 그것과 필적할 정도로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결코 포기할 수도 없다.
대한민국의 정의를 바로세우는 작업이고,
국가의 미래가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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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금 군 꼬라지보면 그대로인거같은데
IMF만 아니었으면 하나회 척결과 금융실명제 도입으로도 역대급이라 불러도 될정도긴 했음
차기 총리가 리더십을 십분발휘하여 정국을 안정시키고 검찰개혁에 성공한다면 차기 대선주자로 발돋움할수있는것임 따라서 정치야망보다는 원칙주의자이고 빳빳한사람이 총리가 되어야한다봄
알자회 척결할차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