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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네트는 백작부인이라는 호칭이 무색하게 화려한 드레스를 휘날리며, 거칠게 말을 몰다 브리를 찾아냈
다. 그녀가 루엥을 떠난 브리를 찾아낸 건 기적에 가까웠다. 칸이 루엥과 가까운 도시긴 했지만 루엥과
가까운 도시는 그보다 더 많았다. 데스칸테의 마차가 동남쪽으로 갔다는 병사의 말이 아니었다면 더 어
려웠을 것이다.
브리와 에르웬은 그녀가 말을 몰며 자신들을 찾아냈는지 의아해했고, 불쾌해했다. 허나 다급한 아네트
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들을 칸으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한 오르겔이라는 작은 마을로 데려갔
고 그 곳의 좁아터진 여관으로 인도했다. 여관에 도착한 후, 각각 한 아이들씩 품에 안고 2층으로 올라간
세 사람은 어색할 틈도 없이 이어진 아네트의 말에 쉴 틈이 없었다.
“왕은 미쳤습니다.” 라는 말을 창백해진 얼굴을 한 채 문득 브리를 바라보더니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
녀가 쓰는 소파만한 침대에 불쾌한 얼굴로 앉으며 브리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짓고 아네트를 바라봤
다. 가드미온. 동생이 조금 퇴폐적인 부분이 있는 건 인정하겠지만 미쳤다는 건 인정할 수 없었다. 어쨌
건, 아네트가 자기도 만나면 불편한 브리를 찾아온 덴 큰 이유가 있다. 결국은 들어주마. 하는 도도한 얼
굴로 아네트를 바라보는 브리다.
아돌프를 끌어안고 칭얼거리는 두 쌍둥이들을 걸리며 다른 방으로 떠나는 에르웬은 마치 아네트가 당장
이라도 브리의 목을 졸라 죽이기라도 할 것 같은지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고 참다못한 아네트는 결
국 루야드 부인의 체통을 잊고 어서 나가라며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그녀가 떠난 것을 확인하고 문을 걸
어 잠근 아네트는 다시 루야드 부인으로 돌아와 브리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 말은 절대 거짓이 아님을 맹세합니다.”
“빨리 말해주세요 루야드 부인. 어째서 이 나라의 제왕이자 나의 동생인 폐하께 감히 미쳤다고 했는지.
혹시...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제가 루엥을 떠난 두 시간 동안 폐하께서 폭군, 이라 칭할만한 엄청난 짓이라
고 저질렀나요?”
그 말에 아네트는 괴롭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그녀는 그대로 브리를 올려다본 채 말한다.
“초저녁에 스타니슬라스 왕자님께서 천연두로 돌아가셨습니다.”
여과 없는 그 말에 브리는 곧 도도한 얼굴은 지워버리고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얼굴을 하고 아네트를 바
라봤다. 스타니슬라스? 후안 못지않게 사람을 싫어하는 가드미온이 노르베르라는 예명까지 지어주며 귀
여워하던 갈색머리의 아기? 통통한 볼에 보조개가 팬, 자기 엄마의 노란색의 눈을 닮은 그 아이가?
“말도 안 돼.”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에 두 쌍둥이들을 데리고 왕궁으로 놀러가 농담 삼아 로잘린과 왕자의 혼담을 얘
기하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낸 기억이 있는 브리는 귀여운 조카를 떠올리며 곧 얼굴이 창백해졌다. 자신
이 불행이 떠오르며 가드미온, 그리고 아름다운 그의 왕비가 겪을 고통을 생각하며 브리는 신음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신도 너무하시지..”
“물론 왕자님의 죽음은 온 백성이 슬퍼할 대 사건이지만 더 큰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습니다.”
아네트는 그렇게 말했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브리의 곁에 앉았다. 작은 침대엔 커다란 드레스자락이 덮
었고 곧 두 여자의 드레스에 덮인 침대는 자취를 감추었다.
“폐하께서 그 책임을 왕비전하께 물으셔서 그 저녁에... 오 끔찍하지만 칼로 베셨어요.”
“....뭐?”
믿기 힘든 그 소리에 브리는 두 눈을 치켜뜨고 다시 물었다. 설마. 그녀는 아네트가 짓궂은 장난이라고
한다는 듯 그녀를 노려본다. 그러나 아네트는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마치 그 모든
것들이 사실임을 간증하는 듯 했다.
“폐하께서 왕비전하를 직접.. 칼로 베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에요. 물론 이도
끔찍한 일이지만... 폐하께선 소중한 두 사람을 잃으셨으니까. 하지만 그들보다 더 중요한건 바로 공작부
인의..가족..아니겠어요?”
공작부인의 가족. 그녀의 말에 브리는 문득 후안을 떠올렸다. 후안이 루엥에 있다. 아! 설마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브리도 아네트처럼 창백해져, 그녀는 아네트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들을 앗아
갔었는지 모든 것을 잊고 친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후안의 걱정에 그녀는 말해, 라는 단 두 마디도 던지
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본다. 어쩌면 그녀의 눈엔 제발 아네트 입에서 후안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길,
아니며 공작전하라는 말도 나오지 않길 바라는 그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을 것이다.
“폐하께선 왕비전하를 직접 죽이시고..”
그런 그녀의 눈을 바라보기 힘들었다. 아네트는 그야말로 비극적인 소식을 들고 온 것이다.
“그 전에 드릴 말씀이 있어요. 사실 공작전하께선 (브리는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길 바랐기에 공작전하라
는 말이 나오자 그녀는 부르르 떨며 한숨을 내쉬었다.) 큰 죄를 지셨답니다.”
“..죄? 죄라니? 난 그가 바깥에서 뭘 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가 죄악을 저지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는 무결해! 오, 루야드 부인. 혹시 내 동생이 그를 오해하여 죄를 묻겠다는 그런 뜻인가요?
당장 편지를 써야겠어요. 아니 루엥으로 돌아가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 말을.. 끝까지 들어주세요. 공작전하와 폐하사이에 힘겨루기가 있었던 것도 모
르시는 건 아니겠죠?”
아네트는 브리가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 또다시 망치를 맞은 듯 한 얼굴을 하자 다시 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 싸움에선 공작께서 이기셨답니다. 들리는 풍문으로는 공작께서 은행을 사셨는데 외국으로 떠나기 전
에 화폐를 더 이상 발행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고 해요. 덕분에 루엥엔 화폐가 줄어들고 나라살림이
너무나도 어려워 졌답니다. 공작이 드디어 상인들을 괴롭힌 왕에게 복수를 한다며 상인들은 좋아했지만
백성들은 죽어나갔고. 세금이 원활해지지 않자 국정 또한 힘들어졌죠. 결국 왕께선 그에게 굴욕적인 화
해를 청하기로 하시고... 바로 그 날이 오늘이었는데. 왕비전하를 죽이시고 마음이 바뀌셨는지.. 후우. 군
사를 보냈어요.”
아네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도대체 어떤 말인지, 브리는 결국 왕께선, 부터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
한 채 갑자기 거칠어지고 힘들어지는 호흡을 몰아쉬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답답했다. 가슴이 터질 것 같
은 불안감에 그녀는 해가 떠오르기 전 보랏빛을 띠는 창문을 열었다. 새벽의 빛과, 새벽의 바람이 불어온
다. 그러자 아네트가 서둘러 달려와 창문을 닫았다. 남이 볼까 두려워서였다.
“아, 군사 군사라니. 군사라니..”
이성을 잃은 그녀는 풍성한 드레스를 끌며 그 좁은 방을 오갔다.
“믿을 수가 없어. 내 동생이 내 남편에게.....”
아네트는 결국 그녀의 작은 어깨를 쥐었고 하마터면 휘청거릴 뻔한 브리는 애써 아네트를 응시했다.
“오늘 밤. 왕이 내 남편을 불렀다는 소식을 듣고 난 당신에게 찾아갔어요. 하지만.. 뭐 그렇잖아요. 전 쫓
겨났고 겨우 하녀에게 당신이 그 저택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고. 당신처럼... 당연히 후안이 그 곳에 없
다고 생각했기에 지부에 사람을 보냈죠. 하지만 난 아무 소식도 알 수 없었어요. 데스칸테 저택이든 지부
든 아네트라는 인간은 지우개로 지워버린 것처럼 무시해버리니까. 내가 보낸 사람도 마찬가지였죠. 그에
게 알릴 방도가 없어 난 미친 듯이 당신을 찾았고 신의 도움으로 당신을 찾아냈어요. 이미... 늦은 뒤였
지만.”
아네트는 한줄기 눈물을 보였다. 브리의 마음은 더욱 타들어갔다. 브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네트가 지
껄이는 말들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브리는 그녀의 말에서, 공작, 후안이라는 단어만 찾는데 열
중했다. 그리고 아직까지 죽음이라는 단어가 들어오지 않았기에 희망을 가득 품고 그녀를 바라봤다. 아
네트는 다시 두서없이 말을 시작했다.
“아.. 부인, 당신이 저택에 없어서 다행이에요. 만약, 당신까지 죽어버렸다면 나는 평생 용서받지 못한 죄
악을 진 채 우울 속에서 살아가겠죠. 부인, 제가 모든 것을 돕겠어요. 내 철없던 과거의 죄를 회개할 수 있
는 기회를 주세요. 용서해요. 나는 내 남편이 폐하와 무언가를 꾸민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신과,, 그리고
공작.. 아니 후안을 돕지 못했어요. 그러니 제발 제가 당신을 도울 수 있도록. 부인을 도울 수 있도록 허락
해주세요.”
“알 수 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구 말해줘요. 제발, 후안은, 저택에 없었죠? 그렇죠? 그는 새벽에나 되어서
돌아오는걸. 그렇지 아네트? 그는, 그는 무사하지? 아 제발. 제발.. 무사하다고, 무사하다고 말해!”
어느새 브리는 울고 있다. 그녀의 머릿속엔 오직 군사, 가드미온, 그리고 후안이라는 이 세 가지. 그녀는
오직 후안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기다렸다.
“그는 죽었어요.”
아네트는 말했다. 브리는 아네트의 손을 쥔 손을 떨어뜨리고 그녀를 응시했다. 언젠가 후안의 마음을 차
지하고 한 구석도 내어주지 않았던, 검은머리의 아름다운 아가씨를. 이젠 루야드 부인이 되어 자신의 죄
를 회개하고 그녀에게 소식을 전하겠다고 루엥을 떠나온 그녀를. 거짓말 일거야. 브리는 당연하게 생각
했다. 아네트는 나쁜 여자다. 그녀의 아기도 죽였고, 후안을 뺏어간 적이 있다. 그녀는 거짓말을 잘한다.
브리는 곧 불신을 띤 눈으로 아네트를 바라보았다.
건방지게도, 브리를 가엽단 눈으로 바라보는 아네트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 검은 눈으로 브리를 바라
보며 말한다.
“저택은 아마 이미 타서 흔적조차 없을 거예요. 데몬가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하인과 하녀들까지 모두 죽
었습니다. 생명이라곤.. 없어요.”
브리는 후안을 떠올렸다. 상아빛 머리에 도자기처럼 완벽한 피부. 차가울 땐 얼음처럼 차갑고 열정적일
땐 무척이나 열정적인. 바이올린을 좋아하고, 자신의 일도 좋아하며, 브리를 누구보다도 사랑해주던 그
남자. 오만한 웃음을 짓기도 하고, 짜증이 나면 언제나 미간을 구기고, 브리가 헛소리 같은 농담을 하면
실없이 웃어주던. 자던 모습이 너무나도 예쁘고. 가끔 자는 자신을 예뻐 죽겠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그를. 어설픈 동작으로 로렌초를 안아보면서 신기해하던 모습이나, 가끔 하루 일과를 말해주며 죽겠다는
표정을 짓던 그 얼굴을.
아네트가 다시 입을 연다. 브리는 멍한 인형처럼 그녀를 바라봤다. 어떤 말이 흘러나와도 상관없다는 투
다.
“그는 죽었어요... 하지만 당신껜 세 아이들이 있잖아요? 강해져요. 미망인들은 어디에도 많아요. 내 어떤
말도 위로는 되지 못하겠지만.. 나는 당신을 위해 이미 헤렌부인에게 사람을 보내놨어요. 당신이 그녀의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헤렌부인도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거예요. 귀여운 세 아이들과 아름답고 가엾은 당
신을 그녀는 반길 겁니다. 부디, 신의 축복이 함께하길.”
“후안은 무사해 아네트?”
아네트는 결국 눈물을 보인다. 그녀는 브리의 어깨를 꽉 쥐었다. 아픔이 느껴졌지만 이상하게 그 아픔이
싫지 않았다. 아니, 그 아픔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브리는 후안을 기억하는데 온 정신을 쏟았다. 그
의 목소리가 어땠던가, 그의 키가 정확히 몇이었지? 그는 어떤 음식을 좋아 했었지?
“아... 제발 브리. 죽었어요. 그는 죽었어요. 불타는 저택에서 그는 나오지 못했어요.”
모든 것이 정지한 듯 브리의 시야에서 굳어졌다. 죽었어요. 죽었어요. 죽었어요. 아네트의 그 말만 들렸
다.
브리는 아네트에게서 벗어났다. 그리고 몇 걸음 걸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절벽에서 뛰어내릴 것처럼
절박해 보이진 않았지만 작은 등은, 안아주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더욱 작아보였다. 브리는 이마를 짚었
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아까부터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심장소리는 더더욱 커져 귓가에
까지 울렸고 브리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에게 어떤 말을 했던가. 그와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는 뭐였던가. 미안하다고? 네가 없으면,
나는 나로 있을 수 없다고? 목숨보다도 후안을 사랑한다고? 당신이 곁에 있어서 행복하다고? 너무 소중
하다고? 나를 사랑해줘서 고맙다고? 다시 만나도 후안을 사랑할 거라고?
‘살인마!’
‘더러운 건 팔아버리면 그만이야!’
‘지옥? 그건 후안이 가야할 곳이야.’
―― 배신자는 넌데. 왜 넌 날 미워하는 거지?
.
.
.
.
“꺄아아아아악!!!!!!!”
머리를 쥐고 브리는 주저앉았다. 그녀의 비명에 아마 이 작은 여관의 사람들은 모두 깨어버렸을 것이다.
어느덧 이른 해가 떴다. 에르웬은 당장 아네트를 죽여 버릴 기세로 문을 열고 들어왔고 아네트는 머리를
쥔 채 벽에 기대어 쓰러진 브리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다. 곧 달려온 에르웬이 아네트를 던지다시피 하
곤 자신이 브리에게 물었다.
-마님 무슨 일이에요? 저 못된 년이 또 뭐라고 한 거예요?
-예의를 지켜! 나는 루야드 백작부인이고 공작부인을 위해 이곳 까지 왔단 말이야!
아득하게 들려왔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괴로웠다. 브리는 곧 거친 호흡소리를 내며 옆으로 쓰러졌다. 따
듯한 눈물이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그가 보고 싶다. 못내 보고 싶다. 네가 죽었데, 라고 말을 하면 당장에
라도 나타나 또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듣고 온 거야? 라며 한심한 듯 바라보다 이내 히죽 웃고 말.
나는 그에게 뭐라고 말했었지? 브리는 끝내 정신을 놓았다.
다시 아침. 그녀가 눈을 떴을 땐 또 마차 안이었다. 여전히 훌륭한 마차의 뒤편엔 데스칸테의 문장은 지
워지고 없었다. 아이들은 답답한지 칭얼거리며 엄마의 풍성한 드레스자락에 묻어 잠이 들었고. 아돌프는
에르웬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침묵 속 브리가 눈을 뜨자 그 맞은편에 앉은 울 것 같은 얼굴의 에르웬
이 그녀를 바라본다. 투덕투덕 복스럽게 생긴 그녀의 붉은 얼굴에도 걱정, 근심, 그리고 슬픔이 가득하
다.
“아네트가 루엥으로 간 뒤 또 편지를 보내왔어요. 보시겠어요?”
에르웬은 물었다. 허나 브리는 대답이 없었다. 브리가 잠이 들었던 건 꼬박하루. 하루 동안 아무것도 먹
지도 마시지도 않은 그녀는 막연히 창가를 바라봤다. 커튼이 걷힌 창가엔 슬슬 가을이 되려고 하는 바깥
의 풍경이 완연하다. 넋 나간 사람처럼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브리는 곧 한줄기의 눈물을 보인다. 후안
이 죽었어. 아, 그가 죽었어. 그녀는 결국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보였다. 터져 나오는 눈물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는지, 엄마의 우는 소리에 잠이 깬 로렌초가 그 작은 손으로 엄마의 손가락을 쥐며 위로해보
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로렌초, 네 아버지가 죽었데.”
브리가 로렌초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기어들어가는 얇고, 가는 목소리다. 죽음. 이라는 뜻을 모르는 아이
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파파?”
라며 반문했다. 그리곤 말을 이었다. 맑은 웃음과 함께.
“어디이?”
로렌초는 후안이 금방이라도 올 것처럼 브리를 닮은 다갈색의 커다란 눈으로 주변을 기웃거렸다. 주변
이라고 해봤자 이 좁은 마차 안인데. 아이는 아버지가 재밌게 놀았던 며칠 전을 떠올리며 신난다는 얼굴
로 제 엄마의 품을 빠져나왔다. 결국 에르웬은 눈물을 보였다. 그녀의 품에 안겨있던 아돌프는 자신을 안
고 있는 사람이 눈물을 보이자, 덩달아 자신도 울 것 같은 얼굴이다. 이 민감한 아이는 아버지가 죽었다
는 걸 알고 있을까? 자고 있는 이 두 아이는? 아버지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던 두 아이는? 후안이 얼마
나 아이들을 귀여워했었는지 떠올랐다. 에르웬은 제 가슴이 무너지는 것처럼 아파왔다. 서럽다. 정말 이
건 말도 안 된다. 하루아침에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저 어린것들은 자기의 조카고, 에르웬의 눈앞에 창
백한 얼굴의 미망인은 자기의 누나다. 잔인한 놈. 욕지거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분노는 점점 더 안타까
운 마음으로 변하고, 어느새 울어버린 아돌프는 겨우 터져 나오려는 에르웬의 눈물을 막았다.
브리는 자신을 벗어나려는 어린 로렌초를 다시 품어 안았다. 빠져나오고 싶어 아니는 칭얼거리는데도,
그녀는 놓지 않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내 아가, 네 아버지가 죽었데.”
커다란 눈에 눈물이 고였다. 감긴 눈. 주룩, 눈물은 흐르고 아이의 숱 많은 갈색 빛이 도는 금발위에 떨어
진다. 그 느낌에 로렌초는 브리를 올려다봤다. 엄마가 왜 우는 것일까. 아무것도 모르는 로렌초는 그저
엄마가 아픈 줄 알고 품에서 벗어나 이마를 짚는다.
그로부터 5일 후. 브리와 아이들은 헤렌부인의 집에 도착했다. 헤렌부인은 자신의 고향 브레델에서 가장
큰 저택에 살고 있었는데, 여러 꽃나무로 가득한 그녀의 정원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디에고의 무덤이 있
는 곳엔 따로 울타리를 쳐두어 화려한 곳과 격리를 시켜두었고, 그녀는 그곳을 특별히 관리하는 듯, 디
에고의 비석은 마치 방금 세운 것처럼 깔끔했다.
“나중엔 다 이렇게 되는 거란다. 시간에 희석되고, 익숙해져. 밥을 먹을 수 있게 되고, 웃을 수도 있게 되
지. 사는 게 그런 거야.”
라고 말한 헤렌부인은 곧 자신의 응접실 의자에서 일어나 에르웬의 품에 안겨오는 두 쌍둥이들을 품에
안았다. 헤렌부인은 여전했다. 아름다웠고, 당당해보였다. 다만 세월은 감추지 못해 그녀의 붉은 머리엔
어느덧 하얀 가닥이 곳곳을 차지했다. 하지만 그 사치스러운 취향은 여전해 루엥에서 유행하는 향수냄새
가 그녀에게 진동했고, 화장 또한 진했다.
“에르웬도 오랜만이군. 그래, 제제부인이 죽고 자네가 그 자리를 차지했나?”
“전 제 목숨보다도 더 마님을 소중히 여기고 모셨을 뿐입니다.”
헤렌부인의 말이 모욕적으로 느껴졌기에 에르웬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 모습이 우스운 헤렌부인은 곧
깔깔 웃고는 자신의 품을 벗어나려는 로잘린을 놓아주곤 더욱 로렌초를 끌어안았다. 로렌초는 정말 붙임
성이 좋은 아이였다. “나중엔 여자들을 울릴 거야.” 라는 후안의 예언과 적중하듯 이미 로렌초는 할머니
인 헤렌부인의 마음을 차지했고. 로렌초가 쏙 마음에 든 헤렌부인은 아이를 무릎에 앉힌 채 즐겁게 웃는
다.
한편 로잘린은 아장아장 걸어 제 엄마가 앉아있는 소파에 도착했다. 보랏빛의 브리의 드레스에 매달린
다. 기계적으로 아이를 들어 올린 브리는 무릎에 앉힌 채 끌어안았고.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얼굴로 창
백하게 붉은 융단만을 응시한다. 그 모습이 헤렌부인의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로렌초가 집으려고 안달
이 난 쟈스민꽃 한 송이를 간이 테이블에 놓인 사기꽃병에서 꺼내어 건네준 헤렌부인은 두서없이 말했
다.
“사람은 언젠가 죽어. 후안의 경우는 조금 빨랐을 뿐이야. 특히 녀석은 루엥의 중심이 있었으니 죽음이
빨랐던 건 당연해. 나이도 어린 녀석이 모든 것을 쥐고 흔들었으니 왕이 가만히 있지 못했겠지. 디에고가
죽고 나서도 후안 녀석은 돈만 벌었다지? 얼마나 다행 아니니? 고작 너희 부부의 사치나, 아이들을 양육
하는데 쓰고 그것도 아니면 은행에서 썩어버렸을 돈이 왕에 의해 백성들을 위해 써지니. 네 남편은 죽음
으로써 선행을 한 거다.”
헤렌부인은 자신의 말이 꽤나 즐겁게 들렸는지 히죽 웃었다. 그녀의 말에 에르웬은 분노가 넘쳐 숨이 막
힐 지경인지 두 눈이 빠질 듯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감히! 라며 화를 냈겠지만 그녀도 많이
여유로워졌는지, 헤렌부인은 콧방귀를 뀌곤 말했다. 여전히 브리는 인형과도 같이 그저 아이를 안고 있
을 뿐이었다.
“정말.. 누가 부자지간 아니랄까봐. 디에고와 후안은 끔찍할 만큼 닮았어. 별로 친한 것 같지도 않았는데
이상한 노릇이야. 후후. 너 혹시 아니? 네 진짜 시어머니가 외로워서 죽었다는 사실을. 쿡, 너는 용케도
이겨냈구나. 하긴 그녀도 바람을 폈다면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야. 바람을 핀 건 잘 한 거다. 난 너를 아껴.
너도 외로워서 자살을 해버렸다면 난 후안을 다시 미워해버렸을 거야.”
브리는 여전히 듣지 않았다. 에르웬은 도저히 못 봐주겠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브리의 팔을 잡
아끌었지만 브리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자리에 앉은 에르웬은 못마땅한 얼굴로 헤렌부인을
바라봤다. 그 어떤 말에도 꿈쩍없는 브리에게 헤렌부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일에 미쳐 살다가 결국은 부인보다 일찍 갔다는 것조차도 같아. 브리, 너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니? 데스
칸테의 유전자엔 분명 문제가 있는 게야. 하하하.”
헤렌부인은 웃었다. 여전히 브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 농담에 웃을 사람은 아마 헤렌부인밖에 없을
거라고 에르웬은 중얼거린다. 브리는 다갈색의 눈동자를 굴려 헤렌부인을 바라보았다. 헤렌부인이 입은
화려한 은빛의 드레스와, 그 색으로 변해가는 그녀의 붉은 머리도 시야에 들어온다. 헤렌부인은 로렌초
를 안고 있었다. 로렌초를 안은 팔의 소매는 흘려 내려져 있었고 그 팔은 이미 살가죽이 늘어져 있었다.
그녀도 늙은 것이다. 그녀도 변한 것이다. 약 7년의 시간동안.
곧 헤렌부인은 조금 더 단호하고, 위엄있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왕의 군사에 의해 모든 것이 태워진 채 죽었다고 해도. 그것이 불명예스러운 죽음이라는 생각은 하지 마
라. 생각해 봐. 그 어떤 사내가 왕에게 대항했지? 상세를 올려가며 상인들을 쥐어짜 한편으론 나라를 어
렵게 만들었던 왕에게 감히 그 누가 대항했어? 오직 후안뿐이다. 네 남편이자 내 양아들인. 그 점을 자랑
스럽게 생각해라 브리. 그의 죽음은 명예로웠어. 오히려 비겁하게 밤에 기습하여 그를 죽인 왕이 더럽고
치졸했던 거야. 슬퍼하지 마. 오히려 명예롭게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를 기리며, 아이들에게 자부심을 심
어 줘. 역사 속에서도 네 남편만한 사람은 없었다. 평민출신으로 공주를 아내로 맞은 사내가 있었니? 평
민출신이면서, 열아홉 살에 공작으로 출세한 사람이 있었느냔 말이야. 그런 이력을 가진 사내는 먼 훗날
에 배나온 공작이 되어 여러 명의 정부를 거느리고 죽었다는 결말보다는 오히려 왕에게 대항하여 한줌
재로 사라졌다는 결말이 훨씬 더 어울려. 나는 자랑스럽다. 그런 놈이 내 아들이란 게. 피 한 방울 섞이진
않았지만...”
쉴 새 없이 떠든 헤렌부인은 히죽 웃었다. 로렌초는 마치 재미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그녀의 녹색 눈
을 끊임없이 바라본다. 브리도 그녀를 바라봤다. 헤렌부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자랑스러워 해. 그런 사내가 너의 남편이란 것을. 슬퍼 울 시간이 어디 있니?”
이윽고 에르웬은 노한 얼굴을 풀었다. 남도 배려할 줄 모르고, 후안이라면 죽도록 싫어했던 헤렌부인.
그녀가 후안의 죽음에 슬퍼하는 브리를 달랜다. 허나 브리는 아무런 답이 없다. 그녀는 마냥 슬플 뿐이었
다. 후안이 어떤 이력이 있든, 후안이 밖에서 어떤 사내였든 그녀는 마냥 슬프기만 했다. 그 어떤 것도 위
로해 주지 않았다. 앞으로 그 어떤 누구도 자는 브리를 끌어안아 주지도 않을 것이고, 그 보다 더 아이들
을 귀여워해줄 남자는 없을 것이다. 그 보다 더 브리를 잘 아는 남자도 없을 것이고. 그 보다 더, 그 보다
더 사랑할 남자도 없을 것이다. 다 소용없다. 이젠 끝난 것이다.
브리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잘린은 에르웬에게 건네고 그녀는 ‘아버님께 인사를 드려야겠어
요.’ 라며 조용히 현관으로 나갈 뿐이었다. 더욱 마른 그 뒷모습을 보며 헤렌부인은 한숨을 내쉰다. 곧 측
은한 눈이 된다.
42
3년 후
다섯 살이 되어가는 로렌초와 로잘린은 벌써 가정교사를 두고 글과 그림 예절 등을 배웠고 곧 세 살을 벗
어날 아돌프도 형과 누나를 따라할 만큼은 자랐다.
로렌초는 사내아이답지 않게 유독 애교가 많은 아이로 컸고, 자랄수록 후안이 아닌 브리를 닮아갔다. 그
래서일까, 여자아이처럼 귀여운 로렌초는 유독 하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로잘린은 그 반대로 무척이나
쌀쌀 맞았다. 푸른 눈과 함께 후안의 쌀쌀맞고 도도한 부분을 몽땅 닮아온 것 같은 아이였다. 분명 미인
이 될 것이지만 상냥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헤렌부인은 늘 말했고 이에 에르웬은 어린 아가씨를 두고 못
하는 소리가 없다며 혀를 찼다. 아돌프는 전적으로 모두 외모는 모두 후안을 닮아, 밝은 상아빛을 띄는
금발에 푸른 눈 그리고 무척이나 말이 없고 생각이 많은 아이로 자라났다. 브리는 종종 후안과 나를 반반
닮은 아이라면서 감회가 깊은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아돌프는 좀 느렸다. 그래도 브
리는 걱정하지 않았다. 헤렌부인 또한 원래 느린 아이들이 나중에 더 뛰어난 법이라며 여유 자적했고 에
르웬도 마찬가지였다.
3년. 적으면 적고, 많으면 많은 시간. 빠르면 빠르고, 느리면 느린 시간. 그 시간은 모든 것이 헤렌부인의
말처럼 돌아갔다. 그를 따라 죽을 것처럼 괴로웠는데 어느새 브리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말도
했으며. 아이들의 재롱에 웃기도 했다. 가끔은 함께하지 못하는 후안 생각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그
해 이후 한 번도 상복을 벗은 적이 없었지만. 가끔은 후안을 생각하지 않는 시간이 생기기도 했다. 기적
이었다. 인정하긴 싫었고, 상상조차 못했지만 브리는 무뎌진 것이다.
“엄마아!!!!”
“마마!!!!”
아이의 목소리에 브리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어있던 그녀는 곧 여전
히 천사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느새 철없던 공작부인은 한 없이 성숙한 어머니가 되어 아이들을 바
라본다. 검은 레이스가 달린 상복도, 장식 없이 그저 동그랗게 말아 아래에 고정시킨 어두운 금발도 그녀
가 변했음을 알린다. 어느새 열일곱의 철없던 공주는 스물여섯의 미망인이 되어있었다.
브리는 저 멀리서부터 로렌초가 뛰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돌프도. 현관에서부터 아이들은
서로 시합을 하기라도 한 건지 로렌초를 뒤를 따라 작은 아돌프가 열심히 달렸고, 로잘린은 마지못해 달
리는 듯 행여 드레스가 구겨지면 어떡하지 하는 난감한 얼굴로 뛰어오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그저 귀엽고 우스웠기에 브리는 곧 입을 가리고, 소리를 내며 웃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건
로렌초. 아이를 향해 두 팔을 벌린 브리는 곧 돌진해오는 아이를 치마폭에 안았다. 바스락거리는 비단의
감촉이 좋은지 여러 번 부빈 로렌초는 다갈색 눈을 뜨고 브리를 바라본다.
“할머니가 들어 오시랬어요. 저녁 드시래요.”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이에게 온화하게 미소 지은 브리는 로렌초가 먼저 뛰어든 바람에 품에 안기지 못
해 샐쭉해진 얼굴의 로잘린도 팔로 끌어안았다. 다시 미소를 찾은 로잘린을 말했다.
“어머니께서 좋아하는 연어래요.”
“넌 꼭 어른처럼 말하는구나, 로잘린.”
“로잘린은 숙녀니까요. 할머니가 그러셨어요. 우리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셨다고. 그러니까 로잘린도 훌
륭한 숙녀가 될 거예요.”
새침하게 말한 로잘린은 곧 브리의 팔에서 벗어났다. 곧 그 팔은 아돌프가 차지했고 두 아이를 꼭 끌어안
은 브리는 곧 아이들을 놓아주었다. 그러자 두 사내아이들은 다시 경주를 하는 듯 현관까지 향해 뛰고 브
리는 로잘린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우아하게 잡은 로잘린은 곧 싱긋 웃으며 브리를 올려다봤다.
“너, 정말 네 아빠를 꼭 닮았어.”
그러자 더욱 기분이 좋아진 로잘린은 부드러운 브리의 손에 짧게 키스를 했다. 그리곤 의기양양하게 가
슴을 편다.
그날 밤. 오랜만에 브리와 티타임을 갖은 헤렌부인은 즐거운 표정으로 오늘 루엥에서 가져온 소설얘기
에 한참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정말 우스운 생각을 한다며 그녀는 위트 있게 조롱을 했고 브리도 종종
웃었지만, 그 웃음은 꽤 짧았다. 헤렌부인은 눈치 빠른 여자였기에 곧 브리가 다른 할 말이 있음을 알아
차렸다.
"할 말이 따로 있나보구나. 지루한 소설이야기는 집어 치워주마.”
“즐거웠어요.”
브리는 헤렌부인의 말에 짧게 답한 후 말을 이었다.
“로아국으로 떠날까 해요.”
“..로아국?”
브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왜?’ 라는 얼굴로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헤렌부인을 보며 짧은 미소를 지은 브리는 말했다.
“다른 나라로 가고 싶어요. 멀리는 가고 싶지 않고, 그나마 가장 가까운 곳이 나을 것 같아요.”
“또 예전에 후안이 있는 곳이기도 했고?”
게슴츠레 눈을 뜨고 헤렌부인이 말한다. 브리는 피식 웃고 말았다. 허나 곧 헤렌부인은 미소를 거둔 채
말을 이었다.
“그 말은 내가 저 귀여운 것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거구나.”
“..미안해요.”
“...뭐 어차피 네 아이들이지. 하지만 섭섭한 건 섭섭한 거야. 정이 붙어버렸어. 난 앞으로 혼자 늙어갈 건
데. 너무하는 구나.”
헤렌부인은 꽤 섭섭한 모양이다. 하긴, 그럴 만 했다. 나이가 들어가고 아이들이 자라는데 낙을 붙였던
헤렌부인이다. 자식보다 더 귀하게 여기며 모든 것을 다 해주었는데 브리가 타국으로 떠나겠다니. 허나
브리로썬 어쩔 수 없는 일. 브리는 곧 의자에서 일어나 헤렌부인에게로 향해 그녀를 끌어안았다. 헤렌부
인은 징그럽다면서 떨치려고 하지만 브리는 더욱 끌어안는다. 결국 헤렌부인도 미소를 지었다. 브리에겐
정말 좋은 향이 났기에, 그녀와 포옹하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었다.
“실은... 폐하께서 자꾸 서신을 보내오는데.... 솔직히 견디기 힘들어요.”
브리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가드미온. 그는 그녀의 동생이자 원수이다. 남편을 죽인 사람이자 유일한
형제다. 지극한 마음은 없었지만 그래도 남동생으로 어느 정도의 애정이 있던 브리였기에 그를 완벽하게
미워하기엔 너무 힘들었다. 특히 생명에 대한 사랑은 예전보다 더 깊어져버렸고. 이에 동생을 미워할 수
없는 브리는 동생의 불행을 진심으로 안타깝게 생각했다.
지난 3년간 왕실에서도 많은 일이 있었다. 왕비를 죽인 가드미온은 즉시 왕비의 시녀였던 가브리엘을 자
신의 정부로 들였다. 소문에 의하면 족히 100명의 시체는 있었다는 아버지부터 써온 침실을 폐쇄한 가드
미온은 동쪽의 언젠가 브리가 쓴 적이 있던 일곱 개의 방에 열 개를 더 지어 자신의 침실로 만들었고 거
기에 비밀계단을 연결해 가브리엘의 방을 만들었다.
가브리엘은 창백한 얼굴의 미녀로. 표독스럽기로 무척이나 유명했다. 3년 동안 가드미온의 정부자리에
앉은 그녀는 한명의 아들과 한명의 여아를 낳았는데 가드미온은 두 아이를 모두 자신의 아이로 인정했
다. 이에 더욱 기세가 높아진 그녀는 가드미온의 주변에 조금이라도 어린 여자아이가 눈에 띠면 즉시 사
람을 시켜 죽이고, 권력을 잡으려는 다른 세력이 가드미온에게 아름다운 여자를 소개시킬 참이면 “만약
그 여자를 만나면 난 뛰어내려버리겠어요.” 라며 그를 협박했다. 참으로 건방진 행동이지만, 소문에 의하
면 가드미온은 “그래, 그래” 라며 그녀의 말이라면 다 들어준다고 했다. 루엥의 사람들은 데스칸테를 죽
인 뒤 부자가 된 왕은 나라를 훌륭하게 다스리지만, 가브리엘 덕분에 아름다운 여자들은 보지도 못할 거
라며 뒷말을 하곤 한다나.
그런 와중 가드미온과 주렛국의 막내공주와 혼담이 오갔다. 공주는 고작 열다섯 살의 어린 소녀인데 잘
생긴 델프라의 왕과 결혼한다는 소식에 뛸 듯이 기뻐했다고 하나 결혼을 하러 델프라로 향하던 도중 가
드미온에게 가브리엘이라는 미모의 정부가 있고 이미 그 사이 두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하루 종
일 먹은 것을 토했다고 한다. 당장 아버지에게 돌아가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때를 쓰던 공주는 결국 직접
가드미온을 만나고 나서 그의 훤칠한 키와, 빼어난 용모, 카리스마 보고 마음을 뺏기고 말았으며 가브리
엘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며 자신만만하게 델프라의 왕비가 됐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가브리엘이 아니었
다. 가브리엘은 자기보다 못생긴 왕비를 왕이 사랑할 리가 없다며 무도회와 파티를 열며 왕비를 욕해댔
고, 왕비는 왕비 나름대로 어여쁘기로는 자신이 더욱 어여쁘고, 자신은 왕족이지만 가브리엘은 저속한
창녀라며 그녀를 비난했다.
어느새 플로라 궁은 정부인 가브리엘파와 왕비파로 나뉘었고 가드미온은 “왕비랑 가브리엘이 많이 심심
하나보군. 각자의 방에 광대나 보내 줘.” 라고 말하며 그저 웃어 넘겼다. 그러나 사건은 터졌다. 어느 날
어린 왕비가 임신을 했다. 그러자 질투에 눈이 뒤집힌 가브리엘은 사람을 써서 왕비에게 비상을 먹였고.
아이를 잃음과 동시에 열다섯의 어린 왕비는 그만 목숨까지도 잃었다. 모든 것이 가브리엘의 소행임일
알게 된 가드미온은 재빨리 왕비가 병에 걸려 죽은 것이라고 발표했으나 왕비가 데려온 주렛국의 시녀덕
분에 모든 것이 정부인 가브리엘의 계략임을 주렛국왕도 알게 되었다. 자신의 딸이 고작 정부 따위에 목
숨을 잃게 된 것을 왕이 반길 리 없었다. 외교가 걸린 문제였으니 결국 가드미온은 가브리엘에게 그것도
죽은 왕비와 같이 그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던 그녀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수밖에 없었고. 오늘은 그녀
가 죽은 지 한 달이 되는 날이었다.
세 명의 여자를 사랑한 그는 셋 모두 잃었고 둘은 자신이 죽였다. 심신이 고달파진 그는 기댈 곳을 찾다
결국 자신의 누나이자, 언젠가 자신이 죽여 버린 사내의 남편인 그녀, 브리를 떠올렸고. 그녀를 떠올린
순간부터 하루에 한통 씩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의 내용은 자신이 그녀에게 죄를 저질렀고, 무척 괴로우
니 성으로 와서 조카들과 함께 곁에 있어달라는 내용으로, 브리로썬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가드미온을 여전히 동생으로 아끼지만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큼 브리는 아량이 넓지 않았다.
“그래 알았다. 내가 또 뭐라고 하겠니? 내일이라도 떠나. 하지만 꼭 연락을 해야 해. 힘들더라도 이곳을
다시 들러주고... 슬퍼지는구나. 내일부터 로렌초를 볼 수가 없다니.. 그 아이의 재롱을 보는것이 내 삶의
낙인데.”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헤렌부인이 말했다. 섭섭함이 앞섰지만 상황이 그런데 브리를 계속 델프라에만 잡
아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브리는 기쁘게 헤렌부인의 볼에 키스하고 그 날 밤부터 당장 에르웬을 시켜
짐을 쌌다.
다음날 아침. 할머니와 헤어지기 싫다며 칭얼거리는 로렌초는 결국 현관에서 주저 앉아버렸고,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로잘린도 할머니와 헤어지는 것이 꽤 짜증이 난 듯 자신의 풍성한 연노랑 드레스를 괜
히 예쁘지가 않다며 토라질 얼굴이었다. 어린 아돌프는 그저 어디론가 여행을 간다는 사실에 들떴고. 덕
분에 누나인 로잘린의 눈총을 샀다.
주저앉은. 붉은 옷을 입은 로렌초를 꼭 끌어안은 헤렌부인은 곧 브리를 바라봤다. 검은 옷의 브리는 헤
어지기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죄를 지는듯한 기분이 되어, 딱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런 그녀를 보며 헤렌
부인은 곧 한숨을 내쉬었다. 브리가 세 아이들을 딱하게 생각한다면, 부인은 브리를 딱하게 여겼다. 여전
히 종종 브리의 방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아직도 후안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혼자
만 산 것 같아요. 그냥 그 곳에 아이들과 함께 있었다면 우리 가족은 이렇게 헤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라
요. 어머니, 난 내가 너무 미워요. 왜 곁에 있지 않았을까요? 죽는 날 까지 함께하기로 했었으면서....”
언젠가, 브리가 했던 말을 떠올린 헤렌부인은 곧 울고 마는 로렌초를 사내는 울면 못쓴다, 라고 쓴 소리
를 한 뒤 일으켜 세웠다. 그리곤 그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서 잘 기를 수 있겠니?”
“유모를 쓸 건데요 뭐.”
씁쓸하게 웃는 브리를 보며 쓴웃음을 짓는 헤렌부인은 곧 고개를 어깨너머로 돌리곤 눈짓했다. 그러자
현관의 한편에 푸른색의 작은 상자를 들고 서 있던 하녀가 다가온다. 하녀는 부인에게 그 상자를 건네고.
헤렌은 그것을 브리에게 건넸다. 의아한 표정으로 브리가 바라봤다. 브리는 이미 그것을 잊어버렸는지
그 어떤 말을 하지 않았고. 결국 헤렌부인이 입을 열었다.
“다이아몬드야.”
브리는 곧 놀란 두 눈을 뜨고 사양할 기색이다. 헤렌부인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사양 마. 어차피 네가 내게 준거다. 기억나니? 언제였더라... 훗,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가네. 옛날, 네가 아
네트 때문에 벨이 꼬여 후안의 돈을 어마어마하게 썼던 날. 그 날 샀던 다이아몬드야. 친해져보자고 네가
내게 주었던 것..보석이란 보석은 남들 손에 들어가 버렸잖니. 반은 네 동생이 갖고있겠지.. 여튼, 후안은
죽음과 동시에 공작이란 자리에서 내려왔지만, 넌 여전히 공작부인이고 왕의 손윗사람이다. 보석하나 없
는 게 말이 되니?”
“...하지만...”
브리는 말끝을 흐렸다.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울 것 같은 얼굴로 마차로 달려가고 싶어 안
달이 난 아돌프의 손을 놓아버린 채, 그것을 받았다.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로
“추억할 것 하나 없이 긴 세월을 보내는 건 못할 짓이다. 가져가라. 내겐 필요 없어. 후안이 주는 거라고
생각해.”
브리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봤다. 늙은 헤렌부인의 얼굴을. 여전히 우아하고, 여전히 고귀하지만 죽은
남편을 가슴에 묻고 그저 끔찍한 농담을 하며 긴 시간을 보내는.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는 가엾은
미망인을.
“감사해요.”
브리는 짧게 답했다. 창백한 얼굴엔 옅은 미소를 띤 채.
초록색 지붕의 2층 집. 대문에서 현관까지는 마차로 총 3분이 걸렸고 마차 안에서 브리와 아이들은 인공
미가 물씬 나는 정원을 볼 수 있었다. 로렌초는 분수를 보고 벌써 뛰어가고 싶어 몸이 안달이었고 그 반
면 로잘린은 꽃나무에도, 네모반듯한 정원수에도 반응 없이 턱을 괴고 앉아있었다.
곧 마차가 멈췄다. 마부 석에서 사내가 뛰어내리는 둔탁한 발 소리가 들렸고, 문이 열린다.
“부인, 도착했습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보실 집입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한 브리가 곧 마차에서 내렸다. 에르웬은 이맛살을 찌푸린 채, 아름다운 브리를 힐
긋힐긋 바라보는 저 붉은 수트의 사내를 노려보고. 사내는 그런 에르웬의 눈치를 무시한 채 브리에게 자
연스레 팔짱을 꼈다. 사내라면 물론 에스코트를 해야겠지만 왠지 저 능글맞은 얼굴의 사내는 마음에 들
지 않는 에르웬이다. 그녀는 뒤질세라 무거운 몸을 이끌고 브리의 뒤를 부산스레 쫓는다.
“예쁜 집이네요.”
녹색지붕의 2층집을 보며. 브리는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사내의 소개가 뒤잇는다.
“정원이 아주 훌륭하죠? 노 백작이 살았던 집입니다. 관리도 잘 되어있고 방들도 넓습니다. 살롱도 커다
라니, 파티를 열기에 좋을 겁니다.”
사내는 히죽 웃는다. 사내의 설명을 들은 에르웬의 얼굴은 어느덧 구긴 표정을 사라지고 없었다. “썩 괜
찮군요.” 에르웬의 말은 딱딱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집이 마음에 든 것이 분명한 것인지 제발 이 집을 샀
으면 하는 간절한 눈으로 브리를 바라봤다.
브리는 집을 응시하고 있었다. 슬픔을 억누르느라 딱딱해진 얼굴로.
“난.. 잘 모르겠어.”
브리는 말했다. 그리고 낮게 한숨을 내쉰 채 말을 이었다.
“집을 볼 때마다 ... 예전 살았던 집이 생각나. 이미 불타서 없을 테고, 내 처지로는 그런 집을 다시 구할
수도 없겠지만.. 그렇게 좋아했던 집은 아니었지만. 예쁘다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러다 그녀는 에르웬을 바라봤다. 울 것 같은 두 눈으로 미소를 짓고 있다. 차마 다음 말을 잊지 못한 채
브리는 말한다.
“에르웬이 마음에 드니 나도 좋아. 스테판 씨와 계약서를 작성하고 올 테니까, 아이들을 봐줘.”
별다른 대답 없이 에르웬은 고개를 끄덕였다. 브리는 종종 그런 표정을 짓곤 했다. 에르웬은 어느덧 분수
대로 달려가 물장난을 하고 있는 세 아이들에게 호통을 치며 달려갔고, 세 아이들은 혼비백산하여 넓은
정원을 뛰어다닌다. 오래 마차 안에 갇혀있던 아이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에르웬을 놀리고, 에르웬의 얼
굴은 어느덧 홍시처럼 붉어졌다.
“아름다운 위더 D 부인. 자, 그럼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쓰던 가구들을 놔두고 갔으니 아마 계약서를 작
성할 순 있을 겁니다.”
“그러죠.”
브리는 사무적인 어투로 답한다. 그리고 스테판의 뒤를 따라 집으로 향했다. 브리는 위더 부인이란 자신
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데스칸테라는 이름은 어느새 숨겨야할 이름이 된지 오래다. 고결한 그 이
름이, 한 때는 자신들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서라도 가까워지고 싶어 했던 그 이름을. 사람들은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취급한다.
“가구들을 두고 갔다니. 귀찮은 일이 하나 늘었군요.”
브리는 말했다. 그러자 스테판은 미소를 짓는다.
슬픈 얼굴은 딱딱한 가면으로 가린 채. 이렇게 무뎌진다. 예전 같았으면 울어버렸을 텐데. 브리는 그저
슬픈 표정한번 짓고 말았다. 울어 봤자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사랑은 추억으로 남아, 그 간절하고 열정
적인 사랑도 한낱 추억으로 남아 오직 브리에게만 존재한다.
그 많은 이야기들, 둘 만의 추억들, 오직 혼자만이 간직한 채 혼자만이 곱씹으며 그렇게 살아야 함에. 그
녀는 이미 적응하고 있었다.
◈
부유한 미모의 미망인이 세 명의 아이들과 한명의 유모. 그리고 몇몇 하녀, 하인들과 함께 이사를 왔다
는 소식에 주변 여인들은 궁금해 했다. 그녀가 혼자가 된 사유, 아이들의 나이나 성격, 죽은 남편에 대한
이야기, 어째서 델프라에서 로아국으로 온 것인지. 신분도 나이도 베일에 싸인 미망인은 호기심을 자극
하기에 충분했고. 예전의 브리처럼 화려한 지위, 화려한 옷, 화사한 얼굴을 한 여인들은 앞 다투어 브리
에게 초대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브리는 모두 응하지 않았고 그녀는 오직 아이들에게만 관심을 두었
다. 아이들이 이 집을 마음에 들어 하는지, 아이들이 새로 바꾼 요리사의 음식을 좋아 하는지, 아이들의
의복이 깔끔한지, 아이들이 가정교사의 가르침을 잘 따르는지, 아이들이 아픈 곳이 없는지. 등등.
결국 브리에게 호기심을 느꼈던 여자들은 모두 그녀를 자신들의 사교계엔 절대 어울리지 않는 고리타분
한 여자 취급을 했고 조롱하였다. 허나 브리는 이에 전혀 괘념치 않았다. 사교계, 파티 따위는 이미 잊은
지 오래다. 후안의 죽음과 동시에 그것들도 죽어버렸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잊고 묻어버린 브리도 걱정이 있었다. 더 이상 후안이 돌아오지 않음을 잘 알고 있는
브리는 오직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 그 아이들을 잘 기르려면 돈이 필요했는데 집을 사고 가구를
사는데 헤렌부인이 동봉한 대부분의 돈을 탕진했다.
가정교사는 늦어지는 월급을 재촉했고. 그는 언제나 부인이 끼고 다니는 다이아몬드를 팔면 아마 5년 치
봉급은 될 것이라며 비아냥거렸다. 건방진 그는 남편이 없고 홀로 아이를 기르는 브리를 종종 그런 식으
로 조롱했고 그 모든 것이 화가 나지만 브리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꼭 돈은 줄 테니까 아이들을 성의껏 돌봐주세요. 미안해요.”
그러면 그는 아주 관대한 미소를 지으며
“부인의 아름다운 얼굴을 봐서 제가 자비를 베풀어 드리겠습니다.”
라며 능글맞게 미소를 지었다. 에르웬은 저 놈을 죽여 버리겠다며 부지깽이를 들었지만 곧 놓았다. 그를
죽여 봤자 이득이 없음을 그녀는 알고 있다. 더럽고 치사하지만 돈을 주어야한다. 그래야 저 건방진 주둥
이를 다물 테니까.
그로부터 몇 개월 후. 가을이 봄이 되고 브리가 스물일곱이 되던 해 에르웬은 일을 시작했다. 다른 집의
바느질을 도우며 조금씩 돈을 벌기 시작했고. 이미 하녀와 하인들은 도망간 지 오래였기에 브리는 스스
로 집안일을 해야 했다. 접시는 깨기 일수고, 빨래를 하다가 쓰러질 만큼 그녀에겐 고됐지만 할 수 없었
다. 가드미온에게 서신을 보내볼까 라는 최악의 생각도 해봤지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손가
락에 걸린 반지에 시선을 돌렸다. ‘후안이 준 것이라 생각해’ 라고 말한 헤렌부인의 얼굴이 어른거리고,
점점 바라지는 후안도 스친다. 그러나 아이들을 위해선 어쩔 수 없다 결론을 내린 그녀는 내일 당장 그
반지를 팔아버리기로 결심했고 그렇게 침실로 돌아가는데 들뜬 얼굴의 에르웬이 쿵쾅거리며 계단을 올
라왔다.
“아이들이 자고 있는데 무슨 짓이야?”
브리가 까칠하게 말했지만, 에르웬은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았다. 곧 에르웬이 품안에 무언가를 안고 있
음을 깨달은 브리는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게 뭐야?”
“마님, 놀라지 마세요. 아아, 정말 하늘이 도우신거에요.”
에르웬은 곧 그것을 브리에게 건넸다. 꽤 무거웠기에 상체를 쑤욱 숙인 브리는 곧 바닥에 던지듯 두고,
곧 몸을 굽혀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반짝이는 금화를 확인하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세상에!”
가녀린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브리는 에르웬을 바라본다.
“저도 몰라요. 현관에 놓여 있었어요. 사람도 없었고 오직 그것뿐이었어요.”
찬바람이 묻은 겉옷을 벗으며 에르웬은 말했다. 피곤에 쩐 얼굴이지만 연신 싱글벙글 이다. 그 얼굴을 보
며 브리도 따라 웃었다. 분명 다른 이의 돈이 확실하지만 그녀를 위해 놓고 간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브리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이 돈이면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다! 로아국에 온 뒤 한 번도 먹이지 못
한 고기도 먹일 수 있다. 무슨 걱정인가. 반짝이는 금화, 로아국의 화폐를 보며 브리는 미소 지었다. 기적,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브리는 그 날 신에게 기도를 했다.
그 날 이후 2주일에 한번 돈뭉치가 놓여있었다. 던져진 강아지 크기만 한 자루를 열어보면 으레 돈이 가
득했다. 하지만 어느덧 6개월 째 이 같은 일이 발생하자 브리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많은 돈
을 보내자 분명 브리가 델프라에서 중요한 신분의 사람과 친분이 있다는 것으로 추측한 가정교사의 태도
는 훨씬 좋아졌고, 매일 훌륭한 음식을 먹으며 훌륭한 가정교사에게 배워가는 아이들의 품행은 좋아졌지
만. 브리는 점점 그 돈을 쓰는 것이 꺼려졌다. 출처를 알지 못하는 돈. 혹시 이 댁에 살고 있던 전 주인과
아는 사람이 보내왔던 돈이라면? 나중에 브리에게 모든 것을 돌려주기를 요구한다면? 불안한 생각이 들
기 시작한건 에르웬도 마찬가지였다.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 보내는 돈. 어느덧 그것은 찝찝함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일찍 산보를 하던 가정교사가 정원을 가로질러 담을 넘는 금발머리의 작은 소년을
발견하면서 사건은 전환점을 맞았다.
◈
‘들켜버렸으면 어떡하지?!’
숨이 거칠어진 아이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미 담을 넘었지만 여전히 뛰는 심장이 귓가에까지 울렸다.
하지만 더 쫓아오진 못해. 안심한 아이는 곧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재빨리 수풀을 벗어나 자신의
금발에 묻은 나뭇잎들을 작은 손으로 떼어낸다. 더러워진 옷도 탈탈 털며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걷다
문득 자리에서 멈추고 물끄러미 위를 바라봤다. 저택. 고대풍의 화려한 저택의 2층 발코니에 사람이
나와 있었다. 큰 키에 비교적 마른 몸. 은회색의 소매가 길게 늘어진 가운을 걸친 마른 팔의 남자가
발코니에 턱을 괸 채 내려다보고 있다. 긴 상아빛 머리는 반쯤 잡아 묶어 올리고 입가엔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주인님!”
그를 보며 소년은 방긋 웃는다.
걸음이 바빴다. 숨이 차고 너무나도 길게만 느껴지는 영원과도 같아 그녀는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서서히 아침이
되어가는 때. 바람은 차가웠고 놀라서 덩달아 그녀를 따라 나오는 에르웬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브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상복이 거추장스럽다.
[소년이라뇨?]
[예, 소년이요. 소년이 돈을 두고 사라지는 걸 봤습니다. 거리가 멀어서 잡진 못했지만..]
[어디로 도망갔었죠? 왜 잡지 않았어요?]
“마니임!!! 어디 가시는 거예요!!!!”
몸이 무거운 에르웬은 벌써 포기했는지 풀밭에 주저 앉아버렸고. 애타게 브리만을 부른다. 브리의 검은 옷자락이 멀
게만 느껴지고 어느덧 그녀의 금발머리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에휴, 하는 긴 한숨을 내쉰 에르웬.
“그 사람이 전하일 리가 없잖아요..”
넋두리를 한다. 퉁퉁한 그 얼굴엔 어느덧 걱정이 가득하다.
[그야 너무 빨랐으니까.. 담을 훌쩍 넘어버리는데 저라고 무슨 도리가 있나요?]
[담을 넘었다면..]
[예, 이웃집 아이 같던데요?]
숨이 거칠어지는 바람에 브리는 도중에 달리는 것을 멈춰야했다. 하지만 이제 이웃집이 코앞이다. 그 집의 2층에 여
전히 불이 켜져 있음을 확인한 브리는 더욱 걸음을 빨리했다. 마차로 들어가야 옳겠지만 그녀는 무작정 대문에 매달
렸다.
“위더 부인입니다. 이사 온 뒤 인사를 못 드려서, 이렇게 늦게나마 찾아왔어요.”
그녀를 보고 다가오는 경비병에게 서둘러 말한 브리는 간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상복과 얼굴을 훑던 경비병은
곧 흔쾌히 문을 열어주었고. 안으로 들어선 뒤, 장식하나 없는 밋밋한 정원과 넓은 길 그리고 그 뒤에 우뚝 선 고풍스
러운 상아빛의 저택을 바라보고 브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웃집에 대해 말해 달라고요? 음.. 제가 아는 건 별로 없어요. 그냥 원랜 노백작의 집이었는데 1년 전에 그 백작이
죽고, 지금은 그 막내아들이 살고 있어요. 노른자 같은 유산들은 모두 형들이 가져가고 근근이 운영되는 상단과 집
을 물려받았다는데. 몸이 너무 허약해서 그 상단도 운영하지 못하고 어떤 여자에게 일임했다더군요. 언젠가 한번 본
적 있는데 아주 밝은 금발에 키가 크더군요. 하지만 오래 살지 못할 얼굴이었어요.]
[밝은 금발이요?]
.
.
.
[예, 마치.. 상아색 같은.]
이 안에 그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무작정 걸었다. 긴장함에 땀이 흐르는 두 손을 맞잡고 어느덧 아침 해가 뜨기
시작하는 정원을 걸으며 무수한 생각들을 머릿속에 인 채. 어쩌면 실망할지도 모르는 때를 생각하며 기대는 저버리
고 아침식사인 스튜나 저녁에 먹기로 한 양고기 따위를 머리에 그렸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 그가 아닐 확률이
더 높아.
그렇게, 저 멀리 보이는 현관을 향해 걸으며 점점 그 현관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브리는 마른침을 삼
키고 수만 가지 생각을 이었다. 그렇게 현관으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장미 목을 지나칠 무렵 마치 숲속을 거니는 것
같은 느낌에 브리가 살짝 미소를 지을 수 있던 무렵. 문득 무언 느낌이 들었다. 브리는 고개를 돌렸다. 어떤 귀족의
정원에나 있는 인공적인 관목들이 정교하게 둘러싸여있는 곳이 아득하게 보였다. 그 곳을 따라 그녀는 무작정 걸었
다. 그리고 그녀는 멈췄다. 한참 걸은 뒤 나타난 곳엔 연못이 있었다. 어느 귀족의 정원에나 있는 대리석 바닥위에 인
공으로 만들어 놓은.
곧 그녀의 시야에 뿌연 것이 찬다. 상아빛의 머리카락을 확인하고 점점 차오르는 그것은 푸른 관목들과, 푸른 연못
도 스스로 일렁이게 만들었고 뒤 쪽으로 돌려진 상아빛 머리와, 은회색의 옷도 물에 번진 것처럼 아스라이 어린다.
그리고 은회색의 중간쯤에 자리한 연한 금색과 그 밑에 번져있는 갈색. 곧 그녀가 눈을 감음으로 모든 것이 사라졌
고 볼엔 따스한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 후안!”
연못 앞에 그가 있었다. 10년도 더 된 옛날. 겨우 열여섯의 소녀였던 그녀가 만났던, 열아홉의 새침한 모습으로, 아
름다운 그 얼굴을 하고 지었던 그 오만한 웃음 그대로.
★ 나비보호구역 cafe.daum.net/101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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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두 편! 내일 올라옵니다! ^^
근데 솔직히 장담은 못드리겠어요.ㅠㅠ
오늘은 좀 일찍 퇴근해서 올리는건데요.
평소엔 이시간에 집에 오거든요. ㅠㅠ
그리고 바로 족욕하고 쓰러지고;
(사실 지금도 무척 피곤해요; )
이번편, 읽어주셔서 감사하구요.
두편 남은 델프라의 상인. 끝까지 응원해주세요!
감사합니다♡
+ 답글 못달아드려서 죄송합니다. ㅠㅠ
첫댓글 보고 온 저는 매우 흐뭇해요.
후후, 미툽니다. 흐뭇흐뭇!
이제 완결이 얼마 안 남았군요,.....정말 둘이 잘됬으면 좋겠어요.,...
에에? 후안이 어떻게 살게 된거죠??? 완전궁금!!! 두편남았다니ㅠ. 이젠 볼게 없어지겠네요~
후우. 후안 죽은 줄 알았어요! 다행이다 정말!! 완결도 얼마 안남았군요. 딱 두 편-. 참. heejay님- 델프라 끝나면 엄청 슬픈 사극쓰신다고 했는데 정말이죠?? 기대할게요!
아 ㅜㅜ 후안 살았군요 ㅜㅜ!! 히제이님 저 기로야랍니다 ;ㅂ; 오랜만이여요 ㅜㅜ.. 역시 너무 재밌어요 델프라 !!
후안 살아있던거였어요 아 다행이다 후안이 죽었다는 말에서 전 눈물을 쏟을 뻔 했어요 가드미온은 역시나 나쁘군요. 사람이 얼굴에 철판을 10cm는 깔았는지... 재수없어
후안이 살아있을줄 알고 있었어요. <-
꺅히제이니임임! 얼마나기다렸다구요! 후안살아있었군요 ! 다행이에요ㅜㅜ! 아아 너무너무 기대되요 완결말이에요! 진짜 요거 끝나면 볼게없어서 들어올맛이안날거같아요ㅜㅜ 너무너무 재밌습니다♡
다행이예요T_T.. 후안후안후안 - 오늘 올라오네요 -완존 기대기대♥
오오 !! ㅠ ㅠ후안 살아있었네요 !! 가드미온이 비앙카를 직접 죽이다니.. 깜딱 놀랐으삼 !! ㅠ ㅠ 비앙카.. 사랑한다고 한마디만 하지.. ㅠ ㅠ 그리고 저택이 불에 탔다고 햇을때 울뻔해어용 ㅠ ㅠ 후안 마지막에 브리찾을라고 방에 들어간거죠? 다음편에 후안이 어떻게 살았는지 올려주실꺼죠? 히제이님!! 제가 오늘 막 시험을 끝내서 .. 그동안 읽지 못햇답니다 - 0 - 평균은 그럭저럭.. ;; 90나왔어요 ;; 국어를 왕창 틀려불어서 ;; ㅠ ㅠ 어제봤는데 울었으삼 ㅠ ㅠ
후안 살은거죠 그쵸?? ? 정말 감사해요 후안 죽은 줄 알고 얼마나 우울하고 막 울었답니다ㅠㅠ 으히히히 전에 막 못 읽어드려서 죄송해요ㅠㅠ 아팠거등요!! 근데 이제 안 아파용!!! 으히히히♥ 그리구 저요 오늘 꼬리표 나왔는데 92.88이예요~~~ 음화화화 잘 본 거죠?? 그쵸?? 잘본거라구 해주세용~ 후안 나와서 너무너무 좋았구용ㅋㅋㅋㅋ 건필하세요 히제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