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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北大學校文學碩士學位論文
全州柳氏水谷派家學의 形成과 展開
大學院漢文學科漢文學專攻
柳榮洙
2008년 12월
慶北大學校大學院
全州柳氏水谷派家學의 形成과 展開
이 論文을 文學碩士學位論文으로 提出함
大學院漢文學科漢文學專攻
柳榮洙
指導敎授朴英鎬
柳榮洙의 文學碩士學位論文을 認准함
2008年12月
委員場
委員
委員
慶北大學校大學院委員會
- 目次-
Ⅰ. 序 論················································································································· 1
Ⅱ. 水谷派의 形成과 家學의 淵源······················································· 6
1. 卜居 過程과 婚姻 關係·············································································· 7
2. 家學 淵源으로서 岐峯 柳復起 父子와 岐陽書堂························ 18
Ⅲ. 水谷派 家學의 傳承 過程································································ 31
1. 童蒙敎育을 통한 家學傳承의 基盤 造成 ······································ 31
2. 傳承方法의 核心 - 家系內的 師承關係의 形成·························· 47
3. 講學과 討論의 空間 ‘亭子’ ································································ 53
Ⅳ. 水谷派 家學의 展開 樣相································································ 62
1. 程朱學 根幹의 思想的 性向·································································· 62
2. 退溪學脈의 繼承과 ‘湖學’의 完成······················································ 68
3. 多樣한 著述과 學問的 性向·································································· 77
4. 仕宦과 牧民官의 모습 ·············································································· 88
Ⅴ. 結 論·············································································································· 95
【 參 考 文 獻 】······························································································ 101
【 英 文 抄 錄 】······························································································ 108
【 국 문 초 록 】······························································································ 111
Ⅰ. 序論
우리나라 漢文學은,日帝강점기를 벗어난 후 光復을 맞이하였음에도 거의 단절되어 한문학 排除論이 보편화되면서 한문학에 대한 연구는 그 의의를 정당하게 확보하지 못한 채,1)1970년대 초반까지 거의 방치된 상태였다.이후 새로운 국면을 맞아2)지금까지 수많은 선배제현들의 심혈을 바친 노고를 바탕으로엄청난 업적을 이루어냈다.그 동안의 우리 한문학계의 연구업적과 흐름을 분야별로 대략적으로 살펴보면,國文學範疇로의 귀속여부에 대한 논쟁 속에서漢文學의 구체적 위상설정 문제,漢文學樣式에 따른 연구 방법론에 대한 반성과 제시,韓國漢文學史의 정립문제,한문학 작가 발굴 및 작가론․작품론․문학론․비평론․문체론 등의 통상적인 흐름을 넘어 최근에 시도되고 있는 한문 및
한문학 작품의 國譯[飜譯]방법론,經學의 한문학적 접근 시도,한문학 연구주제의 外延擴張을 통한 사회․문화사적 접근,文獻學[書誌學]등 國學全般의 분야별 유기성 문제,地域學[地方學]의 범주 안에서 한문학 연구현황과 가치정립문제 등으로 넓혀져 가고 있다.이 밖에도 가장 최근 한국한문학과 국토산천,한문학 창작공간과 관련유적에 대한 탐색,한문학의 性談論등도 학자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개괄해보면,大主題別包括的인 연구흐름에서 小主題別深層的연구흐름으로 전환되어 한문학 연구의 범위가 세분화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이러한 최근 한문학계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주목할 만한 학술대회가 있었다.먼저,東方漢文學會가 <地域學으로서의 漢文學>을 주제로 기획하여 2003년에 개최했던 ‘제67회 학술발표 전국대회’와 韓國漢文學會가 <地方化와 漢文學> 이란 기획주제로 2006년에 개최했던 ‘동계 학술발표대회’등이 대표적인 것이다.前者의 대회에서 李潤甲교수는 “한문학을 그 자체만 분리시켜 연구하기보다 생활세계의 모순과 변동을 해명하는 지역연구의 일환으로 연구하는 것이 그 실체적가치를 드러내는데 보다 有意味한 방법이 될 것이다.”3)고 하였다.이 말은 漢文
1) 朴英鎬,「韓國에서의 漢文學 硏究 動向」,『退溪學과 韓國文化』35집,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04.
2) 李佑成, 기조강연,「한국한문학연구의 회고와 전망」『제1회 한국한문학대회, 한국한문학연구의 제문제-그 방법적 검토』
3) 『東方漢文學』제26집, 동방한문학회, 2004.6. 이 대회에서는 서울․경기․부산․충남․전라남북도․경상남북도지역 등의 한문학과 관련된 여러 논문들이 발표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진영미「서울경기지역 한문학의특성과 변모양상」, 정경주「한문학에 나타난 부산지역 문화전통의 특성」, 김풍기「오대산 인식의 역사적 변천과 문화사적 의미」, 박우훈「충남지역의 한문학 연구」, 홍성욱「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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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혹는 漢文學的生活世界]을 떼어놓고서는 지역학 연구에서 실제적 가치를드러낼 수 없고,오히려 한문학계의 역할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後者의 대회에서는 李鍾虎교수가「地域漢文學硏究의回顧와 展望-安東地域을 중심으로」에서 “특정지역에서 생산된 한문학 유산을발굴하고 연구하여 공시적 혹은 통시적으로 존재하는 학문특질을 찾아냄으로써한국한문의 지평을 넓히고 내용을 풍부하게 만드는데 기여하는 학문이다.”4)라고 하면서 ‘지역 한문학’을 정의하였다.
이와 같이,한문학 연구에 있어서 ‘지역’을 연구하는 통합 과학적 학문분야에 일견 분과 학문적 성격의 한문학적 연구를 반드시 선행한 후,그 뒷받침이되도록 해야 하고 ‘지역’의 한문학 유산을 발굴 분석하여 학문특질을 찾아내는데 한문학계의 역할이 요구된다 할 것이다.그렇다면,우리가 ‘지역’의 범위를좀 더 좁혀서 그 지역의 일정 공간을 차지하였으면서 한문학적 연구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자료를 가진 집단,즉 ‘家門’과 그 가문의 학문과 사상을 대변하는 ‘家學’에 대해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다.5)왜냐하면,한문학의지역학이라는 개념에서 각각의 가문들은 ‘地域全體’의 一構成員으로서 각각의역할에 따라 ‘지역’을 발전시켜 왔으며,또한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 속에 해당
지역에서 思想․學問․文化․社會的으로 저마다의 한문학 유산을 남기고,그固有의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본고는 안동의 여러 가문들 중에서 16세기 중반부터 약 450여 년간 慶尙北道安東市臨東面水谷[세칭 ‘무실’]에서 同姓의 마을을 이루며 世居하였던9)‘全州柳氏水谷派’(이하 ‘水谷派’)10)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다.수곡파는 入鄕祖인 柳城이 최초 卜居한 水谷마을을 중심으로 瓢谷[박실]․大坪[한들]․高川[고랫골]․葛田[갈밭]․馬嶺[맛재,午峴]․舟津[배나들,三峴,三山]․靑松[송생]11) 지역 등 주변일대로 가문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家學’을 바탕으로 누대에 걸쳐 가문을 이어 온 가문이다.수곡파에 대해서는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소개된 적이있었고,12) 수곡파 가학과 관련해서는 사상․학문․문화사적 방향에서 접근한본격의 관심과 연구도 있었다.13)
4) 『한국한문학연구』, 제39집, 한국한문학회, 2007.
5) 각각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 家門
①‘집안, 문중, 대대로 내려오는 그 집안의 사회적 지위[지체]’(『국어대사전』,한국어사전편찬회편, 삼성문화사, 1986.)
②‘家族’․‘家’․‘鄕里’․‘門第’․‘上古指卿大夫之家’(『辭海』,상해사서출판사, 1989.]
③‘上古指卿大夫之家’․‘자기 집의 문 ․ 자기의 집을 가리킴’․‘가족과 같음’․‘師門과 같음 ․ 師承傳受의 門戶系統을 이름’․‘家勢․門第’․‘가정의 門風’․‘家鄕’(『漢語大詞典』,漢語大詞典出版社, 2006.]
* 家學
①‘한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학문, 특히 그 집안에서 세습하는 전문적인 학문 ․ 집안에서 배운학문’(『국어대사전』,한국어사전편찬회편, 삼성문화사, 1986.)
②‘家傳之學’(『辭海』,상해사서출판사, 1989.]
③‘가족세대간 서로 전해지는 학문’․‘家塾’: (『漢語大詞典』,漢語大詞典出版社, 2006.]
* 家學淵源:가학이 세대 간에 서로 전해짐이 뿌리와 기반이 깊고 두터움. (『漢語大詞典』,漢語大詞典出版社,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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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地方學]으로서의 새로 한문학적 분야’를 조명해 보고자 하였으며,최근의연구동향을 참고하여 가능한 한 한문학적 자료가 풍부한 가문에 접근하고자 하였다.6)
가문과 그들의 가학을 고찰하고자 한다면,대상으로 삼고자하는 특정가문이대대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한 同姓의 주체여야 하고,그 주체가 세대 간에 서로 수수한 학문의 뿌리와 기반이 깊고 두터워야 할 것이며,그 학문의 뿌리와기반을 바탕으로 한문학적 결과물이 드러나 있어야 한다는 조건,즉 그 사전적의미가 종합적으로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이러한 조건들을 잘 갖추고 있는 가문들을 보유하고 있는 지역 중의 하나가 慶尙北道‘安東[圈]’임은 자타가 공인한다.安東[圈]은 소위 ‘〇〇宗宅’등을 비롯한 ‘門閥’이 姓氏別로 여러 지역에분포되어 있고,7)한문학 관련 자료가 풍부하며,그 가문들의 구성원 중 학문적성취를 이룬 文人및 學者들이 많이 있다.아울러 國學專門硏究機關이 안동을 비롯해 주변의 역사․문화․학문 등에 대해 종합적으로 ‘安東學’이라 통칭하고,그곳에 분포하고 있는 家門[門中]들에 대해 비중 있게 연구와 소개를 진행하고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8)
6) 특정가문에 대한 연구는, 아무리 연구자의 입장에서 객관적 사실과 증거를 바탕으로 논술한다하더라도,자칫 해당 가문을 貶毁하는 愚를 범하기 쉽다. 그 반면 오히려 전자의 그것을 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자신도 모르게 연구본연의 취지를 해치고 특정가문을 선양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숙제로 인해, 그 동안 연구자들에게는 일면 부담되는 분야인 것도 사실이었으나 그 동안 가문과 가학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어왔다. 하지만 그 대부분이 역사학계와 사회학계 및 서지학계의 연구 실적이다.
7) 다산 정약용(1762~1836)은『택리지』 발문에서“우리나라에서 庄土나 別墅의 아름답기로는 오직 영남이최고이다. 그러므로 사대부가 때로 수백 년 동안 액운을 입었어도 그 존귀함과 부유함이 시들지 않았고, 그 풍속은 집집마다 각각 한 조상을 추대하고 한 장토를 차지하며 종족들이 함께 살며 흩어지지 않았는데, 때문에 조상의 업적을 공고하게 유지하면서 근본이 뽑히지 않았다.(國中莊墅之美 唯嶺南爲最
故士大夫阨於時 數百年而其尊富不衰 其俗 家各戴一祖占一莊 族居而不散處 所以維持鞏固而根本不拔也)”또한, 정약용은‘안동’에 대해서“眞城李氏는 退溪를 모시고 陶山을 점유하였고, 豊山柳氏는 西厓를모시고 河回를 점유하였고, 義城金氏는 鶴峰을 모시고 川前을 점유하였고, 安東權氏는 冲齋를 모시고鷄谷[酉谷]을 점유하였고, 의성김씨는 開巖을 모시고 虎坪[海氐]을 점유하였고, 豊山金氏는 鶴沙를 모시고 五嵋[五美]를 점유하였고, 禮安金氏는 柏巖을 모시고 鶴亭을 점유하였고, 載寧李氏는 存齋를 모시고 葛山을 점유하였고, 韓山李氏는 大山을 모시고 蘇湖를 점유하였다.”고 하였다.(如李氏戴退溪占陶山柳氏戴西崖占河洄 金氏戴鶴峰占川前 權氏戴冲齋占鷄谷 金氏戴開嵒占虎坪 金氏戴鶴沙占五嵋 金氏戴柏巖占鶴亭 李氏戴存齋占葛山 李氏戴大山占蘇湖)(『與猶堂全書』第一集詩文集, 第十四卷.)
8) 국학전문연구기관은 ‘한국국학진흥원’을 말한다. 1995년 5월에 설립되었다. 한국국학진흥원은 2001년‘綾城具氏 柏潭宗宅’이 소장하던 국학 자료를 최초 受託한 것을 시작으로 안동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가문과 문중의 자료를 적극 수집하여 보관하고 있고, 문중유물특별전 ․ 기탁문중 특별전-‘全州柳氏 水谷派자료로 본 조선후기 양반가의 생활상’(2004. 5.7) ․ ‘溫溪 家의 학문세계와 현실대응’ 학술대회(2006.06.24) ․ ‘기탁문중특별전-昌寧曺氏 芝山門中’ (2007.10.24) ․ ‘西厓 柳成龍 선생 逝世 400주년특별전’ (2007.12.10) ․ ‘때때옷의 선비, 聾巖 李賢輔’ (2008.4.14)등과 같이 문중과 인물에 대해 특별한관심을 보이며 새롭게 조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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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안동의 여러 가문들 중에서 16세기 중반부터 약 450여 년간 慶尙北道安東市臨東面水谷[세칭 ‘무실’]에서 同姓의 마을을 이루며 世居하였던9)‘全州柳氏水谷派’(이하 ‘水谷派’)10)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다.수곡파는 入鄕祖인 柳城이 최초 卜居한 水谷마을을 중심으로 瓢谷[박실]․大坪[한들]․高川[고랫골]․葛田[갈밭]․馬嶺[맛재,午峴]․舟津[배나들,三峴,三山]․靑松[송생]11) 지역 등 주변일대로 가문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家學’을 바탕으로 누대에 걸쳐 가문을 이어 온 가문이다.수곡파에 대해서는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소개된 적이있었고,12) 수곡파 가학과 관련해서는 사상․학문․문화사적 방향에서 접근한본격의 관심과 연구도 있었다.13)
본고는 ‘水谷派와 그 家學’을 큰 主題로 하였다.따라서 이 주제를 연구하기9) ‘세거하였던’ : 수곡파는 1980년대 후반 국토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추진된 임하댐공사로 인하여 세거지가 수몰되는 가문의 위기상황을 맞게 되었고, 가문의 대부분이 불가피하게 離散하게 되었다. 한편 水谷派 宗宅과 岐陽書堂 ․ 定齋宗宅 등 몇몇 대표적 상징물들은 댐 수위를 고려하여 원위치에서 크게벗어나지 않은 곳에 이건 되어 그 명맥을 보존하고 있으며 또 다른 일부는 우여곡절 끝에 1987년 慶尙北道 龜尾市 海平面 一善里에 새로이 卜居하고, 그 터전을 ‘水柳寓鄕’이라 명명하면서 동성의 집성촌을재조성하였다. 구미시에 의해 문화재마을로 지정되었으며, 가구 수는 약 70여 호이다.
10) ‘수곡파’를 지칭하는 다른 말로는 ‘水柳派 ․ 무실柳氏 ․ 水谷柳氏’등이 있고, 한국국학진흥원의 기탁문중특별전을 계기로 관련 학자들에게는 ‘수곡파’로 통칭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무실류씨’라고 불리는경우가 더 많았다.
11) 瓢谷[박실] 등의 명칭은 거의가 행정구역명[世稱, 異稱]이다. 이하 경우도 같다. 그 중 대평은 수곡2동에 속했으며, 표곡은 동네 생김새가 항아리와 표주박 모양을 닮았다하여 壺谷․瓠谷․瓢溪 혹은 음차하여博谷이라 쓰이고 있었는데, 일제시대에 難字라는 이유 등으로 ‘朴谷’으로 개칭되었다.
12) 박종환에 의해 동족부락의 형성과정과 특색에 대한 연구방향으로 소개된 적이 있으나 지리․문화적 연구 성격에 가깝다. 또 안미경은 전주류씨 수곡파 종택에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기탁한 442건 1150책분량의 고문서에 대해 書誌學的 측면에서 연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안미경은 논문 머리말에서 ‘안동에 거주하는 전주류씨는 定齋 柳致明의 후손’으로 오해하는 실수를 하였다. 또한 그의 연구는 비록 전주류씨 종택의 기탁 문서를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그 중 수곡파 인물이 직접 편찬한 자료는 15% 정도에불과하기 때문에 전체를 살피기에는 매우 부족한 면이 없잖아 있다. 가장 최근에는 2008년 안동대학교안동문화연구소에서『안동무실마을-문헌의 향기로 남다』에서 수곡파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전반적으로다룬 적이 있다.
13) 2004년 5월 한국국학진흥원이 개최한 <문중기탁특별전>을 통해서이다.
이 특별전에서 정만조는 조선후기 수곡파의 문화사적 의의를 고찰하면서 ‘오늘날 다산이 다시 태어나같은 글을 쓴다면 定齋를 받드는(의미상 자칫 전주류씨 上祖가 정재(류치명)인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여지가 있은 말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정재가 퇴계-학봉-대산의 학맥을 잇는 전주류씨 수곡파의 대표학자임을 다산의 입장에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무실의 전주류씨를 반드시 넣었을 것이다.’ 라고 평가하면서 다산이 언급한 지역과 비견할 만한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기도 하였다.(정만조,「조선후기 전주류씨 수곡파의 문화사적 의의」,『조선후기 양반가의 생활상』,한국국학진흥원, 2004.) 권오영은 처음으로 수곡파의 가학에 대해 연원과 전개과정을 인물과 저술활동 중심으로 살피고 사상적으로 퇴계-학봉으로 이어지는 학맥을 계승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권오영,「전주류씨 수곡파의 가학연원과 사상적 특징」,『조선후기 양반가의 생활상』,한국국학진흥원, 2004.) 그는 또 퇴계학맥의 전개과정에서 전주류씨 수곡파의 역할과 위상에 대해 인물중심으로 접근하여 설명한 적이 있었다.(권오영,「학봉 김성일과안동지역의 퇴계학맥」,『퇴계학맥의 지역적 전개』,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04.12.30. 보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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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水谷派와 그 家學’을 큰 主題로 하였다.따라서 이 주제를 연구하기.위하여 기왕의 접근과 연구 성과를 참고하여 水谷派의 形成過程과 背景,家學淵源및 家學의 傳承過程과 展開樣相등에 초점을 맞추어 고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논의 전개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한다.
제 Ⅱ장에서는 全州[完山]를 貫鄕으로 하는 수곡파가 안동의 ‘수곡’에 卜居하게 되는 과정과 그 후 정착하는 데 배경이 되는 卜居初期婚姻關係를 살펴본 후,人物및 空間中心으로 家學의 淵源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았다.
제 Ⅲ장에서는 수곡파가 가학의 전승을 위해 후손들에게 그 기초를 마련해주는 童蒙敎育방법과 이후의 전승 상에 중요하고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家系內的師承關係를 알아보고,마지막으로 수곡파의 대표적인 ‘亭子’를 살펴봄으로서 가학전승의 공간적 역할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제 Ⅳ장에서는 水谷派家學의 展開樣相에 대해 첫째,程朱學根幹의 學問性向둘째,退溪學脈의 繼承과 ‘湖學’의 完成셋째,多樣한 著述活動을 펼치며『全州柳氏水谷派之文獻叢刊』이라는 문헌으로 드러나는 학문적 성향 넷째,仕宦과 牧民官의 모습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이러한 가학의 전개 양상은 자연스럽게 수곡파의 학문적․실천적 특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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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水谷派의 形成과 家學의 淵源
본장의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水谷派以前全州柳氏와 영남과의 인연을 살펴보기로 한다.전주류씨는 본래 全羅北道全州[完山]府의 土姓으로 始祖인 柳濕의 5子1婿가 모두 登科出仕하며 흥기하기 시작하여 麗末新興士大夫로 성장하였다.14)류습의 次孫인 柳濱15)은 前後妻가 모두 禮安에 거주하였던 易東禹倬의 외증손녀인 德山尹氏와 증손녀 丹陽禹氏였다.이를 계기로 전주류씨는 영남과의 인연을 맺었다.또 柳克恕16)․류빈 부자의 묘가 각각 예안의 虎巖洞과 영주 鐘陵에 있다.이후 3대를 지나 16세기 중반에 류윤선이 영주의 사족이었던 朴承張의 사위가 되면서 다시 본격적으로 영남과 인연을 이어갔고,류성이義城金氏靑溪金璡의 사위가 되면서 실질적으로 全羅北道全州를 관향으로 하
는 경상북도 ‘安東府人’이 되어간다.
이어서 水谷派上系17)의 由來와 系譜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이것은수곡파의 ‘上系’와 ‘上祖’를 구분하고자 하는 의도로,이후의 논의를 위해서도필요한 부분이다.『全州柳氏水谷派之文獻叢刊』의「水柳系譜」에서 수곡파의上系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全州柳氏는 고려 말 完山伯으로 受贈한 濕을 본관시조로 하였다.시조의 五子一婿가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그 둘째 아들 克恕는 直提學이고,또 그 둘째 아들 濱은 永興府使를 지냈으며,또 그 둘째 아들 義孫18)은 호가 檜軒이다.(중략)그의 後嗣子는 季4) 전주류씨가 여말 신흥사대부였음은 류습의 차자 류극서가 고려 말 新舊勢力間의 갈등으로 피살된 점과 그의 매부가 沈孝生이고 처남이 河崙이었던 점, 그의 차자 류빈이 태종 이방원과 동갑계원이었다는 사실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류빈은 태종조에 출사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5) 柳濱(1367∼1436):克恕의 子. 1386년 문과 급제. 眞寶縣監 ․ 永興大都護府使 등 여러 官職을 역임.
太宗 李芳遠과 同甲契員으로 交分이 두터웠으며 조선 창업의 功을 인정받아 개국 1등 공신에 錄勳됨.
贈職:嘉善大夫 戶曹參判 同知義禁府事 行通政大夫.
16) 柳克恕(?∼1388): 完山伯 濕의 子. 문과 급제. 내직으로 宗溥令 ․ 判典客寺事 ․ 巡軍衛當直千戶 ․ 寶文閣直提學 ․ 知製敎 역임. 외직으로 驪興郡守 ․ 楊廣道按察使 ․ 延安府使 역임. 贈職:通政大夫吏曹參議.
17) 수곡파의 上系의 기준에 대해서는 약간의 혼동이 있을 수 있다.『柳氏上代文獻』에는 ‘水柳氏上祖文獻’제하에『岐陽世稿』의 서문에 ‘水柳上祖에 회헌선생(류의손)은 전주류씨의 대다수에 선조가 되지만 기봉(류복기) ․ 도헌(류우잠) 兩代는 水柳의 上祖만 되는데, 도헌선생의 년대는 仁祖 때까지니 여러 류씨의名祖도 인조때까지로 한정하였다.’고 하고, ‘上祖’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전주류씨 다른 파들의 상조와 비교하는 차원에서 ‘수곡파만의 상조’를 기준하고 있다. 본고에서 사용한 ‘상계’라는 용어는 ‘수곡파 상조의 선대계보’를 말하는 것이다.
18) 柳義孫(1398∼1450): 자 孝叔. 호 檜軒. 濱의 子. 1426년 문과 급제. 翰林을 거쳐 集賢殿에 뽑힘. 저서 檜軒逸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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潼으로 회헌의 막내 동생 末孫의 막내아들로서 부사직 贈도승지이며 서울 墨寺洞에 주거하였다.그의 장자 軾19)은 호가 西溪이며 강릉판관을 지냈다.(중략)그의 넷째 아들 潤善20)은 引儀[校尉]를 지냈으나 벼슬을 싫어하였고,젊은 나이에 부인을 잃고 伯氏인 監司潤德21)을 따라 영주로 落南한 후 羅州朴氏22)를 娶하면서 이거하였다.그의 長子23)城이 安東臨河縣川前의 靑溪金璡의 사위가 되어 水谷으로 다시 이거하였다.(중략)그러니 류성이 수곡파의 入鄕祖이다.24)
위의 계보를 정리해보면,수곡파의 入鄕祖는 柳城이고,그의 상계는 柳濕-柳克恕-柳濱-柳義孫-柳季潼-柳軾-柳潤善까지이다.따라서 본고는 수곡파의 상계기준을 柳潤善의 代까지로 삼았으며,본고에서 논술되는 수곡파의 最上祖는 류성이 된다.그러므로 수곡파에 있어서 상계라는 용어는 수곡에 입향하기 전의전주류씨 시조까지의 계보를 말하는 것이고,상조는 단순히 當代를 기준으로수곡파 범주 안에서 入鄕祖까지의 선대를 말하는 것이다.즉 류성 代가 水谷派가문 및 가학 연원의 기준이 되는 입향 1세대이다.이후 본고에서 별도의 언급이 없는 경우 ‘세대’는 모두 ‘입향’을 기준으로 삼았다.
1.卜居過程과 婚姻關係
가문과 가학이 형성되고 발전하려면 안정적인 卜居를 바탕으로 世居基盤을마련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또 가학이 형성되어 어떤 형태로든 존재한다면,이후 그것을 傳受하여 발전시킬 수 있는 후손의 번창이 필수요건 중 하나이다.
본절에서는 조선 중기 이전 在京士族이었던 전주류씨가 당시 경상북도 榮川
19) 柳軾(생몰년 미상):자 和仲. 호 西溪. 季潼의 子. 1486년 생원시 합격. 1507년 문과에 冲庵 金淨 ․忠定公 冲齋 權橃 ․ 文簡公 柳公權 등과 동반 급제하였다. 江陵判官 ․ 弘文館典翰 ․ 仁川府使 등을 역임하였고 이조참판으로 증직되었다. 문집은 유실되어 전하지 않고 敬差官으로 陟州[삼척]를 지나며 지은시 1수만 전한다.
20) 柳潤善(1500∼1557):자 善之. 軾의 子. 通禮院 引儀를 지냈고 한양 墨寺洞에서 살다가 당시 榮川郡守에 부임하는 형 潤德을 따라 落南하여 迃川[元川, 외내]에 거주하였다. 전주류씨 수곡파의 落南祖.
21) 柳潤德(1489∼?) : 자는 善叔. 호는 南川. 軾의 子. 150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22) 류윤선은 재혼을 하였는데, 초혼처는 ‘陽川許氏 璫’의 딸이고, 재혼처는 ‘羅州朴氏 承張’의 딸이다.(『全州柳氏大同譜』卷2.)
23) 류윤선은 세 아들을 두었다. 長子는 수곡파 입향조 柳城이고, 次子는 水南位 派祖 柳垣, 三子는 柳堢이다. (『全州柳氏大同譜』卷2.)
24) 인용문 상에 敬稱과 尊稱은 배제하였고 계보와 무관한 부분은 생략하였다. (<解題 1.由來系譜>,『文獻叢刊』第1輯, 安東水柳文獻刊行會,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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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榮州]로 落南한 이후 다시 안동에서 새롭게 ‘水谷派’라는 가문을 형성하는 卜居과정에 대해 알아보고,세거기반을 마련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던 婚姻關係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수곡파는 柳城(1533〜1560)이 安東川前[내앞]의 義城金氏靑溪金璡(1500〜1580)의 長婿가 되어 妻鄕인 安東府臨河縣동쪽으로 약 15里떨어진 ‘水谷’에卜居하고 入鄕祖가 되었다.류성의 부인은 바로 김진의 長女인데,항상 ‘아름다운 딸[令女]’이라며 아끼던 玉貞(1536〜1563)이다.그녀는 鶴峯金誠一(1538∼1593)의 누이기도 하다.옥정은 15세에 수곡파로 出嫁하여 岐峯柳復起(1555〜1617)와 墨溪柳復立(1558〜1593)두 아들을 낳았다.25)류복기 형제는 바로 김진의 外孫이자 김성일의 甥姪이 되는 것이다.26)
수곡파는 당시 안동의 名門士族중 臨河[川前]의 의성김씨의 실질적인 中興祖라 할 수 있는 김진의 長婿家가 되면서 경제적 지원까지 받아 별 무리 없이복거 기반을 마련하는 듯하였다.27)그러나 류성이 28세의 나이로 요절하는 불행을 겪게 된다.28) 김옥정은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손수『家禮』를 언문으로번역해 가면서 3년 상례를 遵行하였고,상을 마치는 날부터 곡기를 끊고 두 아들을 남겨둔 채 남편을 따라 순절하였다.이 일을 계기로 그녀는 仁祖때 조정으로부터 烈女로 旌閭를 받았다.29)
류복기 형제는 각각 3,6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6,9살에 또다시 어머니마저 잃게 되어 고아의 신세가 되었다.이들 형제는 조모 羅州朴氏슬하에서 外家인 鶴峯家에 의탁되어 성장하게 된다.유년기에 류복기 형제가 외가에서 성장한 사실은 수곡파가 학문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초적인 환경을 제공해주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
「鶴峯先生行蹟」에서 류복기 형제가 처한 당시의 상황과 학봉의 생질들에대한 가르침과 보살핌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25) “淑人 姓金諱玉貞 十五歲入門 中宗三十一年 丙申十一月二十七日 誕生 明宗十八年 癸亥正月二十四日殉節 仁祖十三年乙亥旌閭”(柳鼎文,<寺正公諱城配位金氏夫人事蹟>,『文獻叢刊』首篇.)
26) 이런 이유로 지금까지도 세인들은 수곡파에 대해 말할 때 종종 ‘무실의 전주류씨는 모두 의성김씨[청계]의 외손들이다.’라고 하기도 하고, 양 가문의 관계에 대해 ‘450년 世誼’라는 말로 표현한다.
27) 류복기의 처 정씨부인은 시외조부 김진으로부터 皮穀 100석과 奴婢 1구를 받아 46년 만에 마침내 奴婢는 96구, 田畓은 274斗落으로 增殖시켰다. 참고로 당시 전주류씨 수곡파의 경제적 상황에 대해서는‘정진영,「1장 전주류씨와 무실마을 그리고 수류사람들, 4. 전주류씨의 경제적 기반」,『안동 무실마을-문헌의 향기로 남다』, 2008.’ 을 참조.
28) “公生以嘉靖十二年癸巳十二月二十二日 歿以三十九年庚申七月五日 享年二十八”(「七代祖考贈通訓大夫司僕寺正府君墓誌」,『三山文集』卷6, 墓誌)
29) 주2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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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기 형제는 10세 전에 부모님을 잃고 외가에서 자랐다.선생[학봉]께서는 보살펴 주고 길러 줌에 있어서 은혜와 사랑을 지극하게 하여,음식이나 의복,가르치는 일 등에있어서 한 결 같이 자기 자식과 똑같이 하셨다.우리들이 이미 水谷에 자리 잡고 살 때에는 모든 일을 시작하는 단계라서 뒤죽박죽 두서가 없었는데,선생께서는 더욱 더 불쌍히 여겨 돌보아 주셨다.매번 猿谷30)에서 오가는 즈음에 비록 날이 저물어 황급한 가운데서도 반드시 친히 우리들의 집에 오시어 먼저 안부를 물은 다음 祭祀의 절차를 물으셨다.그리고 농사짓는 데 관한 일에 대해서는 奴僕들을 엄하게 신칙하면서 모든 일을지시해 주셨다.또 몸가짐을 단속하고 학문을 부지런히 닦으라는 뜻으로 면려하고 경계하기를 마다하지 않으셨다.우리들이 대충이나마 글을 알고 땅과 家業을 지켜 올 수 있었던 것은 사소한 것까지도 모두 외숙의 힘이었다.그러니 평생토록 그 은공을 사모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후략)31)
다음은 학봉이 생질들을 걱정하며 쓴 편지이다.이 편지를 쓸 때는 류복기가 35세이던 1590년이다.
이별한 뒤에 모두들 편히 잘 있느냐?이곳에서 그리워하는 마음은 말하지 않아도 잘알 것이다.나는 일 때문에 머물러 지체하다가 지금에서야 비로소 배를 타고 동쪽으로떠나게 되었다.구름과 물이 하늘에 닿아 가없이 아득하기만 하니,오늘 저녁에는 어느해안에 정박할는지 모르겠다.모두들 부지런히 공부해서 늙은 삼촌의 소망에 부응하기를바랄 뿐이다.(여러 甥姪柳復起,柳復立,柳仁榮[柳崇祖증손]에게 부친 편지.경인년(1590년,선조23)32)
위의 두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류복기 형제는 10세 전에 부모를 잃고약 10년간을 외가에서 학봉의 어버이 같은 보살핌 속에서 성장하였다.성장기에 외가에서의 생활과 학봉의 가르침은 류복기 형제가 향후 복거기반을 다지는데 전반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주게 된다.
30) ‘원곡’은 학봉의 별저가 있던 곳이다. 속칭 ‘납실’이라고도 한다. “임하현 동30리 지점에 있으니 곧 선생의 별장이다. 선생이 중년 이전에 여기에서 살면서 일찍이 소나무 수백그루를 심었는데, 오늘날까지‘舍人松’이라 일컬으니, 사인으로 재직할 때에 심은 것이기 때문이다.”(‘선조10년정축선생40세’條,「학봉선생년보」,이정섭 역,『학봉의 학문과 구국활동』,학봉선생기념사업회,1993)
31) “復起兄弟 十歲前失怙恃 依養於外家 先生撫育極恩愛 凡飮食衣服訓誨之事 一如己子 孤等旣定居水谷 凡事草刱 罔有紀極 先生尤加愍恤 每於猿谷往來之際 雖昏暮忙遽 必親到孤家 先問安否 次及祭祀之節 農作之事 嚴飭奴僕 指敎凡百 又以勅身勤學之意 勉戒不置 孤等之粗辨魚魯 保守田業 秋毫皆舅氏力也 平生慕恩泣何極 (후략)” (柳復起.「鶴峯先生行蹟」,「岐陽世稿」卷2.)
32) “別後擧得安好否 此中懸懸不須言也 我因事留滯 今始解纜東去 雲水接天 杳無涯畔 未知今夕泊何岸耳 餘冀僉勤鍊 以副老叔之望” (『鶴峯先生文集續集,卷之四』, 書, 寄諸甥姪柳復起復立仁榮. 庚寅). * 번역문인용 : 한국고전번역원. * 이 편지는 학봉이 1589년 12월 일본통신사로 差任되어 가는 도중 1590년 3월 21일에 천전 본가에 들렀다가 4월 말 부산에 도착한 후 일본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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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행적에서 ‘우리들이 수곡에 자리 잡고 살 때’는 류복기가 결혼을 한 후를 말한다.33) 결혼을 한 후에도 당시의 상황이 두서가 없었기 때문에,학봉은 早失父母한 조카 형제를 위하여 祭祀․農事․謹身․學問등을 포함하여 매우사소한 것까지 보살펴 주었음을 알 수 있다.류복기 형제를 위한 학봉의 이러한 생활 전반에 대한 보살핌은 류복기의 결혼초기와 특히 이후 定居과정에 커다란 힘이 되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학봉의 가르침 중에서도 ‘勤愼’과 ‘學問’에 대한 남다른 소망은 류복기 형제와 수곡파에게 가문을 정착시키고 유지해가는 원천이 되었다 할 수 있다.수곡파 학문성향과 후대에 가학의 전개과정에 영향을 준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학봉이 조카들의 안부에 이어 ‘祭祀節次’에 대해 물었다는 점이다.
이는 일면 사소한 것 일 수도 있지만,학봉의 ‘禮’에 대해 정신34)과 수곡파 복거 초기에 ‘예’의 중요성을 제일 먼저 단속했다는 일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류복기가 학봉 사후에 외숙의 행적을 기록하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제사절차’에 대해 단속한 사실을 빠뜨리지 않고 언급한 점을 감안한다면,그 자신도복거 초기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고,학봉의 예학정신을 계승한 일면이라 할 수 있다.이 점은 수곡파가 안정적으로 가문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학정신의 일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류복기의 동생 류복립은 京畿道陽智의 큰집인 柳潤德의 손자로 출계하게 되고,35) 이후 壬辰倭亂이 발발하자 晉州城전투에 참전하였다가 36세의나이로 殉節하였다.36)이로써 수곡파의 운명은 오직 류복기에게 맡겨지게 되었33) 류복기는 약관의 나이에 醮行을 가고 결혼하였다.
34) 학봉의 예학정신과 관련해서는 김언종의 논문 ‘「학봉선생의 예학」,『학봉의 학문과 구국활동』, 학봉선생기념사업회,1993.’에서 구체적으로 논급하였다.
35) “二子長復起 號岐峯 壬辰倡義 官禮賓寺正 贈左承旨 次復立 爲伯祖參判潤德子墀後 居陽智 官宗府主簿壬辰殉節 贈吏曹參判” (「七代祖考贈通訓大夫司僕寺正府君墓誌」,『三山文集』卷6.)
36) 행장에 의하면, 1588년 무렵 큰집으로 출계하였던 류복립은 형을 따라 생가로 가서 잠시 거처한 적이있었다.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에 류복립은 학봉을 따라 참전하여 사천, 고성 등을 수복하였다.
1593년 4월 학봉이 병환으로 전장에서 별세하자 창의사 김천일, 복수장 고종후, 병사 최경희 등과 회합을 갖고 서로 힘을 합하여 성을 사수하기로 맹세하였다. 60여일의 항전 끝에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 고종후, 최경희 등은 모두 강물에 투신 자결을 하였고, 류복립은 오직 단신으로 큰칼을 들고 적에게 달려들어 분전하다 전사하였다.(“公嘗以忠義自勉爲士友所推 萬曆戊子朝廷授宗簿寺主簿不就 棄京家從伯氏岐
峯公於安東寓舍 壬辰夏四月 倭大擧兵來 朝野竄伏 時鶴峯公爲招諭使南下 公慨然撫劒 曰我世臣義當死於國遂往從之 鶴峯公喜與之 參籌畫督 諸軍遂復泗川固城等邑 其拜右觀察守晉州城 公與趙宗道李魯朴惺諸賢 常在軍中 應變決機 忠膽益烈 衆心咸服 翌年四月鶴峯公病且卒以其軍屬公 公與倡義使金千鎰復讐將高從厚兵使崔公慶會同心戮力 誓死捍禦 三里孤堞 當十萬兇鋒而尙且榰拄自六十餘日矣 是歲六月二十九日城陷我軍潰金公高公崔公皆赴江而死 公猶單身赴敵 奮劒而死 時年三十六”,『墨溪先生實記』卷2,「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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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연로한 조모와 일찍 과부가 된 숙모37)를 봉양하면서,그의 가장 큰 책임과의무는 가문을 定居시키고 부흥시키는 것이었다.따라서 그에게는 후손의 번창이 절실하였을 것이다.
류복기의 부인은 參奉盈德鄭氏溍의 딸이다.38)그는 淑夫人으로 受贈한 부인과의 사이에서 友潛․得潛․知潛․守潛․宜潛․希潛등 6명의 아들을 두게되었고,장자 우잠도 直長인 羽溪李氏纘의 딸 사이에서 橚․㮨․㮋․㰒․格등 5男을 두었으며,이하 다섯 아들은 차례대로 2남․2남․1남․4남․2남을 두게 되었다.류복기는 자신의 孫子代까지 가문을 이어줄 22명의 후손을 얻은것이다.이로써 수곡파는 3〜4世代만에 가문의 안정과 번창의 기본적이면서도중요한 요소인 人的土臺를 갖춘 셈이다.이들 자손들은 수곡파 宗家를 중심으로 인근지역으로 분파해가며 지역적 활동기반을 넓혀가기 시작하였다.39)
한편,류복기는 22명의 자손과 함께 딸 3명과 손녀 21명을 두었다.그 딸들은 차례로 東萊鄭氏․全義李氏․義城金氏에게,그 손녀들은 安東權氏․英陽南氏․安東金氏․羽溪李氏․宣城[禮安]金氏․光山金氏․興海裵氏등에게 각각 출가하면서 서서히 지역의 名門家들과 혼인관계를 맺어 가기 시작한다.40)이러한혼인관계는 점차 번창해가는 수곡파에게 지역사회에서 立地의 기반이 된다.
대체로 영남지방 양반후예들의 혼인은 相對先祖의 혈통을 절대적으로 중시한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41) 靑溪[鶴峯]長婿[姊夫]家門인 수곡파는 의성김씨와의 혼인관계를 시작으로 점차 안동을 중심으로 한 명문사족과의 혼인관계를 형성해 나갈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가졌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여기서는『全州柳氏大同譜』42)의 기록을 근거로 수곡파 후손들의 혼인관계를 확인하여 수곡파 ‘卜居初期’에 가문의 입지와 가학형성의 대외적 환경을 살펴보았다.‘복거 초기’의 기준은 입향조 柳城이후 玄孫代인 4세대까지로 하였다.
37) 柳城의 아우 水南位 柳垣의 부인을 말한다.
38) 류복기의 행장에는 그의 결혼과 관련하여 일화가 전한다. 그가 弱冠의 나이로 醮行을 가는 도중에 주변에서 신부가 盲人이고 聾啞라 하는 등 자신을 시험하는 間婚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흔들림 없이 인륜의 도리를 지켜 아내로 맞이하여 주변으로부터 분명 큰 복이 있을 것이라 칭송받기도 했다한다.
39) 수곡파는 3세대에 宗派인 柳友潛의 陶軒派, 柳得潛의 燕巖位派, 柳知潛의 龍巖位派, 柳守潛의 徑谷位派, 柳宜潛의 密洞位派, 柳希潛의 參判位派, 僉知 柳時潛派 등으로 분파되었으며, 4세대에 이르러서는 종파인 도헌파가 상대적으로 왕성한 분파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4세대의 자손의 수와 관련이 있는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40) 『全州柳氏大同譜』에 의하면, 류복기의 세 딸은 차례로 進士 石門 鄭榮邦, 進士 李明遠, 金遠에게 출가하였다.
41) 趙康熙,『영남지방 양반가문의 혼인관계』2006,경인문화사.
42) 全州柳氏時思齋大同譜所 刊行, 1976년 丙辰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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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本貫과 地域別婚姻分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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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별로는 義城金氏․盈德鄭氏․羽溪李氏․延安李氏․順興[竹溪]安氏․丹陽禹氏․安東金氏․英陽南氏․漢陽趙氏․眞城李氏․安東權氏․光山[光州]金氏․永川李氏․固城李氏등이다.이들의 거주 지역별로는 安東臨河[川前]․盈德․奉化[桃村]․醴泉[虎鳴面松谷․沙谷]․英陽․豊山[回川및 莫谷․素山]․禮安[烏川및 佳野․汾川]등이다.
(2)婚姻家門의 主要人物
1세대 柳城의 동생인 柳垣의 妻父44)權安世는 1444년 문과 급제하여 관직이 司諫院大司諫에 이르렀다.45) 그의 조부 權輗도 1516년 문과 급제하였고,1519년 己卯士禍때 靜庵趙光祖의 탄압을 반대하는데 앞장섰다.이후 관직이大司成․慶尙道觀察使등을 거쳐 吏曹判書에 이르렀다.
2세대 류복기와 그의 종제 柳解文의 처부는 참봉을 지낸 鄭溍으로 同壻사이가 되었다.또 처조부 鄭昌世는 隱窩南讚의 長婿이다.46)
3세대 류득잠의 처부 愼庵李成春은 宣祖朝에 蔭補로 참봉․찰방을 역임하였다.그는 鶴川李逢春의 아우이기도 한데,이봉춘은 퇴계의 족자로서 역시퇴계의 문인이자 權希孟의 아들인 松溪權應仁․金湜등과 교유하였고,1576년문과급제 후 成均館學諭로 임명되어 典籍에 이르고,1593년 新寧․醴泉․大邱등의 假守를,만년에 國子監에 들어가 直講에 제수되었다가 1600년 安東堤督을역임하였다.류지잠의 처부 訥軒李應은 퇴계의 제자이다.그는 천부적인 자질로 선조 때 생원이 되었고,당시 쟁쟁한 퇴계의 제자들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이후 경상도관찰사의 추천으로 通禮院引儀에 임명되기도 하였다.그러나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성리학 연구와 수양에만 전념하였다.이때 동문수학하던 학봉․月川趙穆등과 사귀면서 時局과 정치․학문을 논하며 山林學派의 길을 걸었다.또 그의 伯兄梅村李愈와 仲兄栗里李憙도 퇴계의 제자이며,모두 학문과 충절로 『襄陽誌,1616』․『仁祖實錄』․『嶠南誌』․『醴泉郡誌』․『朝鮮寰輿勝覽』등에서 그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47)류희잠의 처부 金元은 縣監을지낸 蒼筠金箕報의 아들이다.김기보는 聾巖李賢輔의 6자이자 퇴계의 제자인梅巖李叔樑의 사위이기도 하다.그는 蔭補로 彦陽․居昌․懷仁등의 수령을44) 이하 指稱은 모두 <표> 항목을 따랐다.
45) 『安東市史』권5, ‘성씨별 인물’ * 이하 안동지역 인물들에 대해 앞의 책을 참조하였다.
46) “公諱鑽 號隱窩 姓南氏系出英陽(중략) 生三男三女 男千齡萬齡億齡參奉 女吳滭鄭昌世朴舜年(후략)” (金道和,「副司果隱窩南公墓碣銘[幷序]」,『拓菴先生文集』 卷27.)
47) 한국국학진흥원, www.ugyo.net,, ‘역사체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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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하며 八弊疏를 올리는 등 당시 지방행정의 모순과 병폐를 지적하고 시정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4세대 류숙과 류위는 종형제간으로 漢陽趙氏의 英陽입향조인 趙源의 손자인 趙佺의 두 딸에게 각각 장가를 들어 同壻사이가 되었다.류직의 처조부權慶生은 惟一齋金彦璣의 제자이다.48) 류욱의 처부 金善繼는 梅隱金安繼와형제지간으로 牧使를 지냈고,김안계는 김언기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賁趾南致利․玉峯權暐․梧峯申之悌등과 교유하였다.류학은 재혼을 하였는데,첫 부인의 아버지 丹邱[또는 ‘光風堂’]權際可는 文學과 行義로 알려진 인물이다.그는 權稑의 손자이며 權善文의 아들이자,평생을 벼슬하지 않고 처사로 지냈으며,퇴계와 서애로부터 “山林掃灑의 풍도가 있다”혹은 ‘江湖高士’라 칭송되면서학봉과도 동문이었던 松巖權好文의 조카이다.권선문은 參議를 지냈으며 가학을 이어받아 寬重厚德하여 향촌의 推重을 받았던 인물로 퇴계의 外從祖가 되기도 한다.둘째 부인은 권승경의 딸로,한강의 문인이었던 權重常의 집안이다.
류격의 처부 金光澍는 金得硏의 아들로,1616년 생원시 합격하였으나 출사하지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김득연은 김언기의 장자로서 서애의 門徒이기도 하다.
한편 김언기의 三子로 숙부에게 출계한 金得礒는 1654년 사마시 합격하였는데,류격의 종제인 류은의 처부가 된다.류래의 처부 이명운은 퇴계의 문인으로 藥圃鄭琢과 교유하였으며 秉節校尉를 역임한 東巖李令承의 손자이다.또 이령승은,聾巖李賢輔의 四子이자 문과 급제 후 청송․안동부사 등을 거쳐 觀察使․右承旨등을 역임한 賀淵李仲樑의 아들이다.류지의 처부 南恕는 김언기의 次婿남태화의 아들이다.
(3)婚姻家門의 社會的地位및 學問力量
수곡파 혼인상대의 사회적 지위를 가늠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여기에서는 몇몇 가문을 선별하여 위 <표>에 표시한 관직과 학문정도및 상기 (2)항에서 언급한 인물들의 이력을 참고하여 판단하였다.
1세대 류성의 처가인 의성김씨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적이 있어 생략하기로 한다.안동권씨는 贈職으로 判書․參判․通禮등과 實職으로 承旨․判書를배출한 가문이다.특히 류원의 처가인 안동권씨는 처부와 처조부는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고,처증조부도 진사였다.
2세대 영덕정씨는 참봉을 지내거나 진사가 된 이도 있다.
48) 「門人錄」,『惟一齋先生實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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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대 혼인가문 중 우계이씨는 直長과 奉事,진성이씨는 찰방,연안이씨는 인의․교위․별좌를,순흥안씨는 郡守를,단양우씨는 奉事․參議․秉節校尉를, 안동김씨는 縣監․司僕寺正․禮賓寺正등을 배출한 가문이었다.
4세대 중 한양조씨는 直長․判決事,안동권씨는 司宰監․同知中樞,의성김씨는 牧使․判官을 배출하였다.류학의 처가 안동권씨는 증직으로 漢城參軍․判決事와 실직으로 四宰正을 배출한 가문이자 敎授도 있었고,권호문과 혈연적관계에 있었다.류간의 처가 안동권씨는 그의 妻父가 訓導였고 軍資正․參奉을 역임한 가문이었다.또 고성이씨는 參奉․判決事,영양남씨는 縣令․正郞,안동권씨는 察訪․僉正을 배출한 가문이었다.이상과 같이 수곡파의 혼인가문은 대체로 관직을 역임하였거나 지역사회에서 어느 정도 역량을 갖추었다고 할 수있다.
학문적으로 살펴보면,3세대에 진성이씨는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고,연안이씨는 이응의 두 형 이유와 이희 등이,안동김씨는 김기보가 퇴계의 제자가되어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다.4세대 류직의 처가인 안동권씨는 권경생,의성김씨는 김선계의 형 김안계가 김언기 문하에서 수학하였다.류격과 류은의 처가인 광산김씨는 모두 생원이며 학덕과 명망을 얻은 바로 김언기 가문이고,류지의 처가는 김언기의 사위 가문이다.류학의 재혼처인 안동권씨는 鄭逑의 문인이었던 권중상의 집안이다.류래의 처가인 영천이씨는 문과에 급제한 이중량과퇴계의 문인으로 정탁과 교유하였던 이령승을 배출한 聾巖후손이었다.
(4)妻外家의 本貫과 官職
4세대까지 수곡파 인물들의 처외가는 驪興閔氏,安東金氏,務安朴氏,仁洞張氏,順興安氏,慶州安氏,全州崔氏,東萊鄭氏,安東權氏,平山申氏,羅州朴氏,眞城李氏,光山金氏,英陽南氏,綾州具氏등이다.더불어 이들 가문의 관직을 보면,증직으로 참의를 지냈거나 秉節校尉․禮賓寺正․佐郞․護軍․僉正․監役․參奉등 어느 정도 그 사회적 역할을 담당한 가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수곡파는 4세대까지만 보더라도 의성김씨와의 혼인관계를 위시하여주변의 士族家門과의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가문의 족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지역별로는 의성김씨의 안동 臨河룰 비롯해 영덕․봉화․예천․영양․풍산․예안 등으로 넓혀갔다.또한 주요 혼인가문의 先代인물들은 대․소과에 급제한 후 각각 여러 대소 관직을 역임하며 사회적 지위를 어느정도 갖추고 있었다.더불어 수곡파는 복거 초기단계에 지역사회에서 인정받을만한 학문역량을 갖춘 가문들과 혼인관계를 맺었다.그 중에서도 3세대에는 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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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의 제자가 된 인물들의 가문들과 혼인을 맺고,4세대에 이르러서는 퇴계학통을 이은 김언기 가문과 직접 혼인관계를 맺거나 그의 제자가 되는 등의 밀접한관련이 있는 가문과 인연을 맺은 점은 더욱 주목을 끈다.이 점은 당시의 대체적은 영남의 학풍과도 연관이 있다 하겠는데,학문적으로 학봉의 영향아래 있던 수곡파의 자연스러운 통혼사례라 하겠다.또 무엇보다도 이러한 혼인관계는 상대의 학문적 역량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일면이다.이 외에도 당대에 名門이었던 영천이씨 가문 등과의 인연도 확인할 수 있었다.
처외가를 살펴본 결과,수곡파는 자신들의 직접적인 혼인관계를 통해 여흥민씨․무안박씨․인동장씨․경주안씨․전주최씨․동래정씨․평산신씨․나주박씨․능주구씨 등과 간접적인 결연을 맺었다.잘 알다시피,일반적으로 족보에그 배우자의 外祖[妻父의 妻父]를 기록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그 중에서도 母系의 가문적 배경을 중요시하였다는 단적인 증거이다.이들 가문의 관직 현황만을 보더라도 어느 정도 그 사회적 역할을 담당한 가문이었다
고 할 수 있는데,수곡파에 있어서 직접적인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적다하더라도 혼인을 통하여 간접적인 족적결속을 맺음으로써 일정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전체적으로,수곡파에 있어서 당시 안동의 여러 가문과의 혼인관계는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그 중에서도 중요한 점은 수곡파 외부로 가문의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在地士族으로서 지위를 형성할 수 있었다는점이다.49)수곡파에 있어서,가학은 당시의 명문가․문벌가와의 혼인관계를 통해서도 자연적인 학문적 교유관계가 구축되었고 발전시켜나갔음을 간과할 수없다.50) 따라서 본고는 婚姻關係에서 발전한 學緣關係[혹은 학연을 위한 혼인관계]에 있어서,수곡파 복거 초기 대표적 인물들의 혼인관계를 선별적으로 살49)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양반을 크게 중앙의 ‘在京官人’과 지방의 ‘在地士族’으로 구분한다.
재경관인은서울을 중심으로 중앙정계를 무대로 삼고 재지사족의 생활터전은 鄕黨과 村落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수곡파는 문과 급제자 10명을 포함하여 다수의 과거급제자도 배출하였고 관직을 경험한 자도 있었지만,거의 전형적으로 향촌을 중심으로 형성 발전한 ‘在地’ 문중이라 할 수 있다. 수곡파 문중에서 대내적으로 발행한「全州柳氏 水谷派 名人錄」등을 살펴보면, 불천위 5인․일천 5인․문무과 13인․생원과 진사 33인․안동 좌수 별감 40인․항일투사 및 삼일독립운동 29인․음사 39인․증직 21인 등이며, 물론 항목 사이에
중복된 자들도 있다. 반면 문집 혹은 遺稿의 유무를 기준으로 분류된 ‘文人’ 의 숫자는 140명이나 되는데, 이것이 이들이 ‘在地’ 하면서 대내외적으로 학문적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었던 가문이었다는 반증일것이다.
50) 이와 관련하여 문화인류학자 故 趙康熙 교수는 문중이 통혼의 단위가 되어 村落의 범위를 넘어서 이루어지는 조선시대 양반후예들의 혼인관계가 어떤 문화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지를 밝혀내고자 노력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전통적인 용례를 통해 영남지방 양반가문의 혼인에 대해 血緣, 地緣, 學緣의 관계에서 분석한 적이 있었다. (趙康熙,『嶺南地方 兩班家門의 婚姻關係』, 경인문화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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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보았다.이러한 혼인관계는 수곡파가 복거 초기단계에 대외적으로 안정적인정착을 도와주었을 뿐 만 아니라 지역적 위상도 제고할 수 있었다.
이상으로 본고는 수곡파 入鄕祖부터 4세대까지 그들의 복거 과정과 혼인관계를 통해 가문과 가학의 형성 환경을 살펴보았다.이는 수곡파가 복거 초기에 가문과 가학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형성해 갈 수 있었던 대외적인 환경들이라고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이와 같은 환경을 갖춘 수곡파가 안정된 복거 기반을 유지하면서 점차적으로 형성하기 시작한 수곡파의 실질적이고 내부적인 학문연원은 어디에있는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또 그 학문의 연원과 정도가 ‘가학’으로서 전승할 만한 가치를 지닌 것인지의 여부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이와 관련하여 본고는 수곡파 가학의 연원에 대해 인물과 공간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한다.
2.家學淵源으로서 岐峯柳復起父子와 岐陽書堂
특정가문의 가학이 있다고 하면,그것을 대표적으로 증거 할 수 있는 자료는 그 구성원들이 남긴 문집이나 저술일 것이다.수곡파와 관련해서,그들 가학의 결과는『全州柳氏水谷派之文獻叢刊』(이하『文獻叢刊』)51)으로 대표될 수있다.따라서 본절에서는 수곡파 가학의 결과가 있기까지 어디에 연원을 두고시작되고 형성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가학의 연원을 탐색하려면 가문의 最上祖인물의 학문정도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수곡파 가문의 입향조는 류성이지만 2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 확인할 만한 자료가 없다.다음으로 수곡파의 실질적인 중흥조는 류복기이다.그러므로51) 『文獻叢刊』은 그 명칭에 있어『河東叢書』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河東’은 ‘임하의 동쪽, 즉 수곡’이라는 뜻이다. 수곡파에서 恬庵 柳淵龜가 상조의 행적을 편성하면서『河東世蹟』이라 제명하였고, 故 李家源 박사가 “貴先祖 岐峯(柳復起)선생의 후손에는 문인과 學士가 배출되었고, 따라서 수많은 저서를 남겼으니 그것들을 年代的 순서로 정리하여『河東叢書』를 간행한다면 반드시 좋은 자료가 될 것이 아니겠는가!”(『全州柳氏 水谷派之文獻叢刊』序文)라고 한데서 연유하기도 한다.
최초의 간행계획은 총 25권이며, 1983년부터 1991년까지 순차적으로 13권이 간행되었다. 13권의『文獻叢刊』에 수록된 문집을 남긴 문인 ․ 학자의 수는 대략 37명 정도이고, 미간행된 것까지 포함하면 약 80여명의 숫자가 된다. 참고로 한문학 관련자료 중 ‘叢刊’의 개념으로 현재 가장 대표적인 것이『韓國文集叢刊』과 『韓國歷代文集叢書』 등이 있다. 모두 ‘문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수곡파는 ‘문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있다. 이것은 수곡파의 저술이 대부분 ‘문집’의 형태로 발간되었으나 일부 필사본이 ‘유고’로 전해지는경우도 있었다. ‘문집’고유의 의미를 감안한다면, 수곡파에서 ‘유고’ 및 ‘별저’까지 포함하여 수록하였기때문에 ‘문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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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學問’淵源과 程度를 반드시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류복기가 生長하여 수곡파의 토대를 마련하던 당시는 학봉에게 학문을 배우고 수학하며 아직 후대에 전해지 않은 시기이기 때문이다.따라서 ‘류복기 자신의 학문 연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그 정도를 살피고자 한 것이다.
한 개인에 대한 학문 연원과 정도를 살피려면,일반적으로 文集이나 著述을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그러나 류복기의 문집은,대부분 화재로 소실되어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고,52)그나마 남아있는 일부와 다른 文籍에서 발견된 漢詩2수 및 附錄을 합친『岐峯逸稿』가 전해진다.그러나 그 양도 극히 소략하여『岐陽世稿』53)에 편입되어 간행되었다.
『岐峯逸稿』중에 류복기의 작품은 漢詩「書齋韻二首」(2수)․「八公山諸義將會盟」(2수),「公山聯句」(1수)등 총 5수만이 전하고,書「與族兄永詢書」․「上鶴峯先生」등 2편과 雜著「鶴峯先生行蹟」1편에 불과하다.부록에는 그의교유인물들과 후손들이 지은 輓詞․祭文․墓碣銘․遺事․行狀등을 편집하여겨우 문집의 면모를 갖춘 정도이다.따라서 그의 학문 연원이나 성취의 정도를 밝히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먼저,貞窩黃龍漢이 지은 류복기의 行狀을 근거로 생애와 행적을 대략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공의 휘는 復起이고 자는 聖瑞이고 岐峯은 그 호이다.(중략)공은 嘉靖乙卯生(1555)으로서 6,9세 때 연이어 考妣를 여의고 외가에서 교육을 받았다.(중략)醮行을 가는 도중에 신부가 귀머거리에 盲啞라는 말이 들리니,어른들이 놀라서 수레를 돌리고자 하였으나 공은 義理상 그럴 수 없다고 하며 行禮를 하고 보니 그 말을 전한 자가 잘못이었다.
외숙 학봉선생을 좇아 수학해서 文學과 德行으로 존경을 받았다.(중략)相國柳永慶54)은 겨우 8촌을 넘는 족친으로서 공의 이름을 사모하여 여러 차례 불렀으나 공은 權門이라는 이유로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거처하는 곳 남쪽 언덕에 書室을 짓고 ‘岐陽書堂’이라 명명하고,날마다 그 안에서 거처하면서 경전을 공부하고 후진을 훈회하면서 일생토52) “府君隱居求志 未嘗聞名於當世 家又失火 遺集燒盡 無以傳信於來後 惟是紀行 乞言責在後人 而因徇至今未有所屬 深恐世代愈下聲響寢遠 則並與其掇拾萬一者 而終歸於泯沒矣”(「遺事」,『岐峯逸稿』附錄.)
53) 『岐陽世稿』 : 류복기의 5대조 柳義孫 문집『檜軒逸稿』, 류복기 문집『岐峯逸稿』, 류복기의 장자 류우잠 문집『陶軒逸稿』 등을 합편하였다.
54) 柳永慶(1550~1608) : 조선 중기의 相臣. 본관은 全州. 자는 善餘, 호는 春湖. 참봉 儀의 아들이며, 예조참판 永吉의 동생이다. 1572년 春塘臺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 등 淸要職을 역임하였고 정승에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간으로서 招諭御史가 되어 많은 의병을 모집하는 활약을 보였다. 선조 말년에 왕의 뜻을 따라 永昌大君을 광해군에 대신하여 옹립하려 하였다. 1608년 선조는 죽기전에 영창대군을 부탁하였는데, 그는 遺敎七臣의 한 사람이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小北의 영수였던 그는 大北의 영수인 觀松 李爾瞻과 萊菴 鄭仁弘 일파의 탄핵을 받고 경흥에 유배되었다가 賜死되었다. 유생의 명단인 靑衿錄에서 그의 이름이 삭제되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官爵이 복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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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은거하면서도 원망과 후회가 없었다.정사년(1617)2월 비로소 禮賓寺正에 제수되었으나,그해 3월 23일 正寢에서 돌아가니 향년 63세였다.임하현 동쪽 林塘산 丙향의 둔덕에 장사지냈다.후에 좌승지로 증직되었고 ‘岐陽里社’에 향사하였다.55)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류복기의 생애를 간략하게 다시 정리해보기로 한다.
그는 1555년에 태어나 열 살이 되기 전 양친을 모두 여의고 외숙이자 스승이었던 학봉을 좇아 수학하였고,弱冠에 부인을 맞이해서는 인륜의 의리를 지키고자 하였다.만년에는 서당을 설립해 자신의 수양처로 삼고 후학을 가르치면서 여생을 보내다가 1617년,6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주변으로부터 문학과덕행으로 존경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구체적으로 그의 성품과 학문 정도를 알아보기로 한다.
다음은 류복기의 행장 중에서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기개가 있어 일에 민첩하고 義에 용기가 있었다.임진년 兵亂이 일어나자 공은 廬江書院[虎溪書院]에 가서 동지를 모아 의거를 首倡하니 여러 郡에서 응하였다.드디어 예안의 翰林金垓를 帥將으로 추대하고 안동의 副率裵龍吉을 副帥로 삼았다.공은 典餉參謀였다가 다시 정제장이 되어 협찬하여 처사를 정당하게 하였다.그해 겨울 예천 松邱에서 적을 쳐서 포로로 잡고 죽인 자들이 많았다.계사년(1593)에 밀양으로 진영을 옮겨적의 공격을 막았으나 경주에 이르러 수장 김해가 진영에서 죽자 군의 사기가 떨어졌다.
공은 더욱 분발하여 도내의 여러 義士들과 팔공산에서 會盟하였다.정유년(1597)에는 방어사 郭再祐공을 따라 창녕 화왕산성을 지켰다.군영에 있은 지가 전후로 6∼7년이었으나 조금도 해이한 적이 없었고 병란과 흉년으로 굶어 죽는 사람들이 도로에 깔리자 공은 길옆에 솥을 걸고 죽을 끓여 유민들을 날마다 먹이니 목숨을 보존한 자가 매우 많았다.56)
인용문에서 보듯이,그는 기개가 있고 義에 용기가 있었다.그는 이러한 성품으로 1592년 38세 되던 해,임진왜란이 勃發하자 제일 먼저 廬江書院57)에서
55) “公諱復起 字聖瑞 岐峯其號也.(중략) 公以嘉靖乙卯生 八九歲時 連喪考妣 鞠於外家 (중략) 旣醮取婦 道聞婦聾瞽啞 長者驚欲回車 公義不可 遂前委禽 實傳者妄也 從舅氏鶴峯先生學 以文學德量見重 (중략) 柳相國永慶於族纔逾緦慕公名 屢欲屈致之 公以門熱終不顧 築室於所居之南厓 命曰 岐陽書堂 日處其中 料理舊聞 訓誨後進 沿齒坎壈而無怨悔也 丁巳二月 始除禮賓寺正 以其年三月二十二日 考終于正寢 享年六十三 葬臨河縣東林塘山丙向之原 後贈左承旨 享岐陽里社”(「岐峯柳公行狀」,『貞窩集』卷10.)
56) “有氣幹 遇事敏給 勇於爲義 壬辰兵起 公出廬江書院會同志首倡義旅 數郡響應 遂推禮安金翰林垓爲帥 安東裵副率龍吉爲副 公以典餉參謀 復爲整齊 將恊贊機宜 其冬 抄賊於醴泉之松邱 多所捕斬 癸巳 移陳于密陽以遏其鋒 至慶州金公歿于陳 軍中喪氣 公益奮與道內義士會盟于八公山 丁酉 從防禦使郭公再祐 守昌寧之火旺城 前後在軍 凡六七年 未嘗少懈 兵荒之後 餓殍載路 公於道傍設釜作糜粥 流民日就餔之 全活甚衆”(「岐峯柳公行狀」,『貞窩集』卷10.)
57) 廬江書院 : 경북 안동시 임하면 소재. 경북유형문화재 제35호. 안동 지방의 대표적인 서원으로 157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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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들을 모아 창의한 후 醴泉․密陽․慶州․八公山등으로 수차례 진영과 임무를 옮겨가며 종군하였다.58) 또 1597년 43세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忘憂堂 郭再祐를 따라 종군하여 火旺山城을 지키는 등 전공을 세웠다.두 차례 전란후에는 유민을 구휼하는 데 적극적으로 힘썼다.
류복기는 전장에서 6여 년을 의병으로 활동하였는데,그가 팔공산에서 여러의병장들과 회맹한 후 지은 시를 통해 다시 한 번 충절과 기개의 면모가 드러난 救國意志를 엿볼 수 있다.
하늘이 이 나라에 불운을 내리시어 天以東方値否運
섬 오랑캐 감히 小中華를 어지럽게 하네. 島夷敢擾小中華
그 누가 능히 나라를 위해 干城將이 되어 誰能爲國干城將
三都의 왜적들을 말끔히 소탕할까. 掃盡三都一隊倭
군왕께서 西行하니 차마 말로 못하겠고 忍說鸞輿西路幸
신하된 도리로 복수할 때 이르렀도다. 爲人臣子復讎時
창을 베고 칼을 밟는 끝없는 憤恨으로 枕戈蹈刃無窮恨
江河를 터트리듯 한 칼에 씻어내리.59) 欲決江河一洗之
그는 또 8圖8幅의 의병용 지도를 직접 그려 의병 활동 시 전장에서 활용하기도 하였는데,이를 통해 그가 병법․지리 등에도 식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60)
그런데 행장에서 류복기가 수학기에 학문적으로 학봉의 가르침을 받았고,만년에는 서당을 지어 학문에 전념하는 등 존경의 대상이었다고는 하지만,그안동부 동북쪽 廬山村 五老峯 아래에 있는 白蓮寺 절터에 廬江書院을 세워 퇴계의 위패를 봉안하고 도학을 강론하였는데, 1605년 대홍수로 인해 유실되자 중창하였다. 숙종 2년(1676)에 현판을 하사하여‘虎溪書院’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安東의 鄕校와 書院』,安東地域鄕校書院發展協議會, 한빛, 2005. 참조) 이 서원은 학봉과 서애의 從享問題를 불러일으킨 소위 ‘屛虎是非’의 虎派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고,그 시비의 전말을 호파입장에서 기록한 ‘廬江顚末’ 등의 제목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원래 月谷面 道谷洞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해 1973년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58) 近始齋 金垓의『鄕兵日記 (壬辰·癸巳)』1592년 8월 13일 條에는 餉軍都監, 동년 9월 3일 조에는 本陣整齊將, 동년 11월 5일 조에는 道軍官을 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59) 「八公山諸義將會盟」,『岐峯逸稿』, 詩.
60) “이 지도첩은 왕고부군(류복기)께서 손수 모사해 작첩한 것인데 세월이 오래되고 글자가 안보여가니불초 榰는 이것이 없어져 전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개고하려는 계획은 하면서도 그 방법도 모르고 손재주도 없어 감히 하지 못하다가 숙종 15년(1689) 여름에 호남 綾州에 목사로 부임하니 하급관리 李應梅라는 사람이 자못 글씨에도 능하고 모사하는 기술이 있어 본첩을 주고 改圖하라고 하였다. 그는 먼저 첩 위에 潔薄한 密紙를 놓은 다음 물에 담가서 배접을 하고 글자를 보충하여 신첩을 하니 중신되었다.”
(후략) (柳榰,『岐峯逸稿』,附錄. 柳正基 譯,『水柳典籍要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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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을 놓고 볼 때 그 학문의 깊이가 어느 정도였는지 여전히 가늠하기 힘들다. 따라서 그의「墓誌」와 寒岡鄭逑[文穆公]의 인물평과 교유인물들의 輓詞를 통하여 그 학문정도를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다음은 三山柳正源이 지은「墓誌」의 일부이다.
만년에는 거처하시는 곳 남쪽 언덕에 집을 짓고 ‘岐陽書堂’이라 명명하고 날마다 그곳에 거쳐하시면서 書史에 흠뻑 젖으시어 사람들이 그 끝을 살필 수 없었다.대개 그 덕성은 深厚하고 操行이 확실하셨다.寒岡鄭逑선생이 매우 敬服하여 말하기를 “류모는가히 心性을 논할 만하다.”고 하였고,息庵黃暹공은 추천하여 말하기를,“그 곧음이 화살과 같다.”고 하였으며,瓢隱金是榲공도 역시 “그 덕행과 학식이 사라져서 전함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니,그 존중됨이 이와 같았다.61)
아래의 글은 정구가 1607년 1월,65세에 安東府使가 되었을 무렵,안동부의여러 儒生들에게 諭示한 것이다.
府의 유생들이 心學에 뜻을 두고 通讀하는 모임을 마련하니 지극히 가상하다.오직 老守는 스스로 득력한 곳이 없어 장차 제현들을 바르게 지도할 수 없음을 걱정하여 밤낮으로 삼가고 두려워하였으나 제현들의 마음을 아끼고 사모하니 또한 스스로 그만둘수 없을 따름이다.다만 講會의 제군은 모두 나이 어린 후학이고,그 중 연로하면서 크게 성취하고 기질이 넓고 순박함이 권순․류복기 등과 같은 24명은 함께 한 자리에서이 모임을 귀하게 생각하면서도 오히려 모두 물러나 앉아 좇아 따르기를 기꺼이 하지않으니 어찌 老物은 함께 배우기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후략)62)
위 두 글에서,류복기는 만년에 書史에 심취하여 그 학문의 끝을 엿볼 수없었고,심후한 덕성과 行身에 志操가 있었다고 평가받고 있다.또 주변의 교유인물들에게도 근후한 심성뿐 만 아니라 학식과 덕행으로도 인정받았다.특히諭示文에서는 류복기가 당시 50세를 넘긴 나이에 향당에서 학문적 성취를 이룬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음은 류복기에 대한 愛景堂金潗과 金得硏의 輓詞이다.
61) “(전략)晩年築室于所居之南岸 命曰岐陽書堂 日處其中 酣飫書史 人不能窺其際 蓋其德性深厚 操履確實寒岡鄭先生逑 甚敬服 嘗曰 柳某可與論心 黃息庵暹薦曰 其直如矢 金瓢隱是榲 亦謂行誼學識 不可泯沒無傳其見重如此(후략)”(柳正源,<六代祖考通訓大夫禮賓寺正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府君墓誌>,『三山文集』卷6.)
62) “俯中儒生 有意心學 方設通讀之會 至爲嘉尙 惟恐老守自無得力之地 將不能導迪諸賢 夙夜兢惕 而愛慕諸賢之心 則又不能自已焉耳 但講會諸君 皆是年少後學 而其中 老大成就 氣質庬淳 如權淳柳復起二十四員 合在席上 以珍斯會 而尙皆退坐 不肯追隨 豈不以老物不足與共學也耶”(후략) (<播諭安東諸生文>,『寒岡先生文集續集』卷5,「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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早年부터 강학하며 함께 노닐었는데 청순한 그 기질은 하늘에서 나온 것.
청춘의 모든 사업은 詩書안에 두었고 만년의 생애는 자연과 함께 했네.
자손들 번성하니 이후 경사 원대한데 유수 같은 세월은 밤 배따라 흘러가네.
이제 수곡63)에 남은 어른 사라지고 백발로 글 지으니 눈물이 황천에 이르네.64)
그대는 동갑의 나의 친구로 서로 종유한지 사십 여년.
初試에서 만나 얼굴 익히고 文會에서 몇 번이나 함께 하였네.
함께 금란의 계를 맺고 서로가 철석처럼 단단하길 기약했네.
서재에서 같은 베게 담소를 나누고 서원에서 등불 마주하며 잠들었네.(후략)65)
위 만사에서는 류복기가 청년시절 교유인물들과 함께 詩書를 강학하고 과거에 응시하거나 文會에서 학문한 모습들이다.
한편,류복기는 학봉과 같은 직접적인 학문연원과 더불어 그 내면에는 또다른 정신적 연원이 있었다.수곡파의 상계에는 始祖柳濕이후 7世柳潤善까지仕宦과 學問으로 명성을 얻었던 이들이 많았다.그 중 류복기가 報本追遠의 의지로 정신적인 연원을 삼은 대표적 두 인물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기로 한다.
그 첫 번째 인물은 檜軒柳義孫이다.그는 1419년 생원시에 합격한 후 世宗朝에 式年文科同進事및 文科重試乙科에 급제하고 世子侍講院左輔德․都承旨등을 역임하면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그는 또 文學에 조예가 깊어『東文選』에 작품이 실릴 정도였고66),敬齋南秀文․權採와 함께 文章과 德行으로 集賢殿三先生으로 일컬어졌다.67)이런 이유로 수곡파는 류의손을 ‘文學의鼻祖’로 추숭하고 있다.
또 眞一齋柳崇祖(1452∼1512,文穆公)는 1489년 式年試丙科에 급제하여 校書館正字에 발탁되고 師儒錄에 들었다.그는 18년 동안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대부분의 벼슬은 거의 성균관에서 역임하였고,靜庵趙光祖등 신진유림
63) 수곡 : 원문의 ‘河上’을 옮긴 것이다. 즉 수곡은 ‘임하의 위쪽’에 있다.
64) “講學同遊自早年 淸淳氣質出天然 靑春事業詩書裏 暮世生涯水石邊 蘭玉滿庭餘慶遠 光陰如水夜舟遷 從今河上無遺老 白首題詞淚徹泉“ (金潗, <輓詞>,『岐峯逸稿』.)
65) “君是同庚友 從遊四十年 試圖初識面 文會幾隨肩 共結金蘭契 相期鐵石堅 黌齋聯枕話 廬院對燈眠” (金得硏, <輓詞>,『岐峯逸稿』.)
66) <誡酒敎書>(「敎書」,『東文選』,제24권.)와 <平海郡風月樓記>(『東文選』,제82권.) 등이 있다.
67) “류의손 선생, 권채 선생, 文僖公 辛碩祖와 南秀文 선생 등이 함께 집현전에 있으면서 그 문장이 다 같이 일세에 유명하였는데, 남선생을 더욱 세상에서 중하게 추대하였다.『高麗史節要』의 초고는 대부분남선생의 손에서 나왔다. 제공들이 모두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柳先生義孫 權先生採辛文僖碩祖 南先生秀文 同在集賢殿 文章齊名一時 而物論尤推重南先生 高麗史節要初草 大抵皆出於南手也諸君皆不大達 惜也”,『筆苑雜記』제1권, 徐居正 撰.) * 번역문 전재 :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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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다수 배출시켰으며 性理學風을 크게 북돋우었다.68) 『書經』․『易經』․『禮記』등에 밝았고,69)특히 天文과 曆象에 통달하여 손수 혼천의를 만들기도 하였다.특히,그가 필생의 정력을 쏟아 만든『七書諺解』는 언해의 효시로 후학들에게 큰 공적을 남겼다.70)또한 그가 벼슬길에서 강직함과 직언을 서슴지않았던 언간의 정신은 또한 후학들에게도 모범이 되었다.
류복기는 류의손․류숭조 등으로 대표되는 先代名祖의 명성을 이어서 ‘水谷’에서 재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내면에 잠재해 있었고 특히,류의손을 수곡파 內의 ‘精神的淵源’으로 삼고 그 유업을 후손들에게 전하여 대대로 계승하고자하였다.
이 점은 류복기에 대한 后山李宗洙의 岐陽書堂追遠祠常享祝文과 陶軒柳友潛의 시를 통해 다시 한 번 잘 드러난다.
檜軒선생의 家統을 이어 받고 鶴峯옹의 제자로서깊은 덕 후손에게 전해주시니 永世라도 잊으리까!71)
위의 축문에는 수곡파 특히,류복기의 내면적 연원이 류의손에게 있으며,직접적으로는 학봉의 학문을 전수받고 있음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다음은 류우잠이 아버지 류복기와 류의손을 추모하여 지은 시이다.
을해년은 바로 나의 회갑이 되는 해이다.늘그막에 온갖 생각이 다 사라지는데 매일68) “성균관을 살펴보았다. 상이 직접 先聖에게 酌獻하고 명륜당으로 물러가서 유생들과 함께 經의 뜻을강론하였다. 하교하기를, ‘經術이 근본이고 詞章은 말단이다. 지금 세상의 선비들이 모두 말단으로 달려가 근본을 추구하지 않으니, 경서를 가지고 묻고 논란한 후에 三所로 나누어 강경하여 선비들을 시취하도록 하라.’하였다. 이어 學田 100결을 하사하였다. 대사성 柳崇祖가 유생들을 거느리고 箋文을 올려 사은하고,《綱目十箴》및《性理淵源撮要》를 올리니, 상이 보고 훌륭하게 여겨 두 책을 간행해서 조정의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명하였다. 류숭조를 가자하고 金帶와 表裏 한 벌을 하사하였다. 다시 하교하기를, ‘성균관에 유생이 많이 모여 공부한다고 듣고 있었는데, 과연 듣던 대로이다. 쓸 만한 자를 뽑아아뢰라.’하였다. 이에 성균관이 趙光祖, 金錫弘, 黃澤 세 사람을 천거하니, 상이 銓曹에 명하여 調用하게하였다.(『國朝寶鑑 』제18권, 중종조 1, 6년(신미, 1511).) *번역문 전재 : 한국고전번역원.
69) “柳崇祖 과거에 급제하여 成均館 同知를 지냈다. 經學에 정통하고 사람을 가르치는 데 부지런하였다.”(『新增東國輿地勝覽』 제33권, 全羅道 全州府) *번역문 전재 : 한국고전번역원.
70) “[선배들의 著述] 우리나라 사람들은 재질이 거칠고 둔해서, 비록 글을 읽었다 하더라도 선배들의 저술이 큰 공력을 들인 것인 줄을 모르고 대부분 인몰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후인들이 저술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없다. 예를 들면, 經書의 諺解는 참의 柳崇祖로부터 시작되었다고 眉菴 柳希春이 日記에서 말하고 있다.” (“前輩著述 東人鹵莽 雖云讀書而不知前輩著述用工之深 而率多湮沒 後人無從而知之 如經書解 始于柳參議崇祖 柳眉菴日記言之矣”(<橡軒隨筆下 戶牖雜錄並附>,『順菴先生文集』卷13,「雜著」.)), *번역문 전재 : 한국고전번역원.
71) “檜爺裘箕 鶴老衣鉢 德深裕後 永世可忘”(<常享祝文>,『岐峯逸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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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홀로 서재로 가서 아버님께서 손수 심은 檜나무를 마주하여 가지를 잡고서 감흥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더욱이 어버이를 모시지 못한 회한이 커졌다.감히 남기신 자취를본받아 또 옛 나무 옆에 작은 회나무를 심어 훗날의 기념으로 삼고자 하여 시 일률을지어 여러 아우와 子姪들에게 보이노라..72)
생각건대 옛날 어버이 회갑 되시던 해에 憶昔先君換甲年
손수 창연한 회나무를 뜰 앞에 심으셨네. 手移蒼檜野堂前
천 가지 빽빽한 잎 지금 땅에 드리웠고 千枝密葉今垂地
열 길 웅장한 재목 이미 하늘을 찌를 듯. 十丈䧺材已拂天
桑梓비록 微小하나 오히려 우러러 공경하고 桑榟雖微猶敬止
선조가 심으신 것 어찌 차마 상하게 하리오. 祖先遺植忍傷焉
백년의 쇠령에도 을해년 감회 새로 나니 衰齡亦感㫋蒙歲
옛 나무 곁에다 새 뿌리를 이어 심네.73) 繼種新根舊樹邊
위의 시는 류우잠이 세상을 떠나던 해에 지은 것이다.그는 이 시에서 1575년 아버지 류복기가 류의손을 추모하며 심었던 檜나무의 의미를 계승하고 있다.즉,그 자신도 아버지가 심었던 자리 곁에 새로운 회나무를 심어 다시 한번 그 유지를 후대에 전하고자 하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결론적으로,류복기의 사상과 학문적 연원은 무엇보다도 혈연적 관계에 있는 의성김씨,특히 학봉의 사상과 학문이었다.이것은 그의 직접적인 연원이었고,내면적으로는 류의손 등의 名祖를 연원으로 하고 있다.하지만 그것은 수곡파의 복거 당시를 기준했을 때,류복기 자신만의 학문연원이었으며 뿌리였다.
그는 이렇게 학봉을 연원으로 하는 수곡파 가학의 바탕을 만들고 자신의 호를‘岐峯’으로 하였다.호에 대한 별다른 설이 없지만 추측컨대,‘기봉’의 의미가 선대가 터를 잡은 鵝岐山74)아래에서 실질적인 중흥조로서 수곡파의 봉우리가 되고자 했고,외숙인 학봉의 가르침을 받고 성장한 만큼 아기산 아래 ‘水谷派의鶴峯’이 되고자 했기 때문이 아니었는지 유추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따라서 그는 퇴계를 嫡傳한 학봉 문하에서 성장하고 수학하면서 전수받은 사상과 학문
72) “乙亥之歲 乃余之換甲也 桑楡已晩 百念俱灰 每於日夕獨徃書齋 對先人手植之檜 未嘗不攀枝興感 益增風樹之懷也 敢效遺跡 又植小檜子舊樹之側 以爲他日記年之地 因草一律 以示諸季及子姪輩”(<種檜 幷小序>,『陶軒逸稿』.)
73)<種檜 幷小序>,『陶軒逸稿』,詩.
74) 수곡파의 최초 복거지역인 수곡[무실]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역이다. 마을 뒤에는 태백산-일월산으로 이어지는 한 자락이 남으로 뻗어와 ‘아기산’을 이루었고, 앞에는 渭水가 흐른다. 『永嘉誌』에는 ‘阿岐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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및 류의손 등의 정신적 연원을 자신의 후대에 전승할 수 있는 방법적 모범을찾고자 하였을 것이다.그것은 바로 ‘書堂’의 건립이었다.
書堂은 조선시대 공교육기관인 鄕校와 함께 향촌 사회에 설립된 초·중등 단계의 사교육 기관이었던 書院의 前身이기도 하였다.또 서당의 주요 기능은 단순히 동몽교육의 기능을 벗어나 점차 학자 및 선비들이 藏修하는 중요한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퇴계가 61세에 陶山書堂을 지어 자신의 수양과 후학의 강학의 장소로 삼았던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수곡파 가까이로는 류복기의 외조부 김진이 일찍이 傅巖書堂과 臨川書堂등을 열어 문중 및 향촌 자제들의 교육에 치력하여75)아들 오형제가 모두 대․소과에 합격하면서 세칭 ‘川金五龍’으로 불리며 천전의 의성김씨 문호를 여는데 크게 기여했다.76)
이러한 모범을 가장 가까이서 보고 경험했던 류복기는 61세가 되던 1615년에 비로소 ‘岐陽書堂’을 건립하게 된다.77)기양서당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2년전에 건립한 것으로,건립당시에는 만년에 이곳에 거처하면서 자신의 공부와 후학을 양성하는 개인 書齋및 家塾의 형태였음은 그의 행장 등에서도 확인하였다.100여년 후 후손들이 1차 重修하여 서당의 면모를 갖추었고,78)1752년 서당 뒤에 追遠祠를 건립하여 祠宇의 형태로 발전시켜 수곡파 文學의 鼻祖로 받들어지는 류의손과 중흥조 류복기를 祭享하였다.79)또 다시 100여년 후 1860년
75) “부암 옆에 서당을 지어 자제 및 마을의 어린 선비들을 모아 학칙을 마련하여 과정을 엄하게 하고 거듭거듭 친절히 가르쳐 싫어하거나 게을리 하지 않도록 하셨다. 이와 같이 하여 수십년 동안 끊임없이계속하시니 학도들이 공부하기를 힘써 글 읽는 소리가 온 경내에 들렸다.(傅巖傍構書堂一區 聚子弟及鄕黨蒙士 立學令嚴課程 敎誨諄諄 不厭不倦 如是積數十年不輟 學徒多興起 絃誦之聲 聞於一境)” (金誠一,<靑溪先生行狀>,『聯芳世稿』 國譯 卷1, 중문, 김시황 역, 1992. )
76) “아들 克一은 嘉靖 병오년(1546)에 문과 급제하여 前密陽府使였고, 차자 守一은 을묘년(1555)에 생원을 했으며, 삼자 明一은 갑자년(1564)에 생원이 되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사자 誠一은 隆慶 무진년(1568)에 문과 급제하여 議政府 舍人이 되었고, 오자 復一은 경오년(1570)에 문과 급제하여 형조좌랑이 되었다.” (“男克一 登嘉靖丙午文科 前密陽府使 次守一 乙卯生員 次明一 甲子生員 早卒 次誠一 登隆
慶戊辰文科 議政府舍人 次復一 登庚午文科 刑曹佐郞”(金誠一, <先考成均生員府君行狀>,『鶴峯先生文集』卷7.)
77) “我家古無家乘 後生渺末於先故事蹟 茫然無可徵已 以今所聞我六代祖秉節公 自洛而南 始寓于榮川 其卜居于水村 則自我五代祖司僕正公始而推其年代 當在嘉靖末乎 越萬曆乙卯年間 我高祖考岐峰公剏書室于村之西偏 則今之所稱岐陽書堂也 ” (柳顯時,<岐陽書堂重修記>,『壺窩遺稿 』卷2.)
78)“今距乙卯 已至百有餘年之久矣” (柳顯時,<岐陽書堂重修記>『壺窩遺稿 』卷2. )
79) “成毁因時運 任玄宰之推遷 繼述在後謨 肯丹雘而塗墍 無念厥舊 有侐其新 恭惟我岐陽世祠 大可徵河東文獻,往在英陵晠際 有若檜爺先生 彤庭對揚,贊繪日於奎翰 黃方高臥 挹淸風於箕山 邃學最瀛,洲殆可擬宋朝 群哲貞忠 貫日月 恨不編魯陵 名臣月樓 華扁尙傳小華 古樂雲端 老石剩葆大笑 遺墟滾滾乎靈醴 眞源繩繩乎弓箕赫業延蔓於海 左千里軒寃 組簪恢拓於山南 一區文章禮樂 粤我岐峯大祖 種德積學 裕後光前受衣 鉢於渭
陽 早承鶴爺旨訣 許襟靈於武屹,晩托岡老 心期烏梅濟飢 范西淮之德惠 白衣糾衆 張南軒之義聲 歌叢桂於小山 世慮雲淡 詠薖軸於衡泌 晩計日賖 不亦樂乎朋來 數楹書屋,誰將儔歟夢破 一榻道經,杖屨遺芬 寔至今而未沫 籩豆縟禮 粤自昔而旣成 遠放白鹿 古規巖爺之經,畫密勿始 在玄狗新創晩 老之偉頌 煥然儼六架之奐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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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중건하였다.80)서당의 구조는 강당인 亦樂堂을 두고 東西에 각각 廣業齋․崇德齋를 두었다.81)
류우잠이 아버지를 대신해 지은「岐陽書齋上樑文」과 이후의 重修記․重建記등을 보면 서당의 건립목적과 학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여기서는「岐陽書齋上樑文」의 일부를 통하여 그 내용을 확인하기로 한다.
가만히 말하건대,家塾과 鄕校는 蒙士를 위하여 학교를 둔 것이고 地靈에 인걸은 또한德丘를 보고서 터를 닦는 것이다.그 누가 “互鄕의 사람들과 말하기 어렵다.”고 하였는가!나는 오직 “어린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노라.(중략)어찌 하늘이 재주를다르게 내렸겠는가!비록 堯舜도 뭇사람들과 같을 뿐이리라.가르침에는 차이를 두지 않음은 이미 聖經에서 교훈을 주셨는데 하지 않고 어찌될까?또 옛말에서 훈계함을 들으니,진실로 흥기하고자 하는 뜻이 있다면 어찌 새로이 만들 방법이 없겠는가!(중략)삼가바라건대,상량한 후에 숲속에서는 虎豹가 멀어지고 골짜기에는 蛟龍이 없게 하소서.동인을 이끌고서 난실에 들어가 麗澤에 힘쓰며 세속 꿈을 사절하고 맑은 물에 몸을 씻고고산을 우러르며 입에는 吟詩가 멈추지 않고 손에서는 책 펴기를 멈추지 않아 더욱 발전하여 앞으로 나아가며,혀는 耕이 되고 마음은 織이 되어 항상 밤낮으로 부지런하면향기로운 덕이 선량하고 어린 초학자들 博文約禮하여 선비가 이에 많이 나서,그 文이여기에 있지 않을까!82)
요컨대,류복기는 서당을 건립하면서 가장 중요한 의식이라 할 수 있는 상량식에서 “어린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孺子可敎]”라고 그 목적을 告하였다.
이것은 바로 그가 성현의 교훈을 바탕으로 진실로 가문을 흥기시키고자 한 절실한 소망이었고,가문의 命運을 오직 후손의 교육과 학문에 걸었다고 할 수
指百世而妥謐 烏鳥情切 嗟未盡觀盥之誠 龍蛇運非遽爾 撤泰山之宇 便齋行萊 已閱二十星霜 滿庭荒榛同憂
五百雲裔 乃聚吳中衆族 俾謀齊力重恢 更就祧廟舊基 頓覺移步 改觀何嫌 講舍前障 亦足摳衣升降 間架規模
不費力於仍舊 刀鉅樸斲 乃省工而維新 土木旣完 風水增色 岐岑橫黛 正似獨樂園屋 上靑山儉溪鳴琴 宛是嶽
鹿 祠劫後眞景 抑有數也 歷四紀於先庚 尙愼旃哉 盍一心於諸子 敢陳偉唱更助脩樑 抛樑東峩岐 秀色入簾櫳
丹禽 不返孤桐 老祗見朝 朝瑞日紅,抛樑西水 箕山何處兮 百世淸風 無地仰孱 孫猶誦笑亭題 抛樑南上屛 縈
繞泗流涵 分明一脈靈源 在剎剎塵塵 報瞿曇 抛樑北巖亭 龜築此中 特傳心的訣 儘如私看 取寒潭秋月色 抛
樑上九天 寥廓星河 朗微風時 灑杏壇 春宛似當年絃誦響 抛樑下密邇 梓桑連舊社 追遠從知 民厚歸一區吳族
應純嘏上樑之後 廟宇益鞏門 風復振春嘗秋 禴更尋昔日儀 文夜誦朝 絃勿替後學規 法堂構世業趾 佳子而令
孫 簪盍朋徒會圓冠 而方領襟佩趨趨 以肆夏花樹 融融乎長春 反朴回淳 所宜 勉於闔族 扶傾補敗 竊有望於
胄宗” (<岐陽書堂追遠祠上樑文>,『汎庵文集』卷5. )
80)柳致皜, <岐陽書堂重建上樑文>,『東林集』.
81) 각 건물의 명칭은 류우잠이 지었다.(<創建沿革>,『岐陽誌』卷1.)
82) “竊以家塾黨庠 旣爲蒙士而設學 地靈人傑又相德丘而開基 夫孰云互鄕難言 吾獨曰孺子可敎(중략) 豈皇天
降才殊哉 雖堯舜與人同耳 有敎無類 旣垂訓於聖經 不爲何成 又聞戒於古語 苟興起之有志 豈作新之無方(중
략) 㐲願上梁之後 林遠虎豹 壑遁蛟龍 提攜同人 襲蘭室而資麗澤 謝絕塵夢 浴淸水而仰高山 口不停吟 手不
停披 益步趣之進進 舌爲之耕 心爲之織 恒晝夜而孜孜 薰德善良 發蒙博約 士多生此 文不在玆”(<岐陽書齋
上樑文 代大人作>,『陶軒逸稿』下,「雜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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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부분이다.따라서 가문을 흥기시키고자 방법을 모색하였던 것은 바로 ‘서당’이라는 공간을 마련하여 ‘훈몽’하는 것이었다.또 훈몽의 결과로서 미래에 수곡파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염원하였는데,그 수단은 바로 ‘글[文]’을 통한것이었다.
그는「鶴峯先生行蹟」에서 학봉의 遺訓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평거하실 때는 매번 자제들에게 각각 뜻하는 바를 말하게 하시고 이어 훈계하시기를“세간의 뜬 영화는 귀하다 할 만한 것이 아니다.입신양명이 내 비록 원하는 바이지만만약 이루지 못한다하더라도 처신에 허물이 없이 한 고을의 ‘훌륭한 선비[善士]’가 된다면 족할 것이다.”라고 하셨다.83)
위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그가 소망한 것은 학봉이 전해준 교훈,즉‘입신양명’보다는 오히려 한 고을의 ‘훌륭한 선비’가 되는 것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기양서당은 가문의 결속을 다지고 가학이 형성되고 발전하는데 있어 공간적으로 중요한 산실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이후 기양서당은 수곡파의 講會와宗會의 장소로 활용되어 19세기까지 지속적으로 그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이 점은『岐陽誌』84)와『朔望講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그 중『삭망강안』은 류치명이 1831년(辛卯)작성한 것인데,기양서당에서 매월 초하루․보름에 학생들을 가르쳤던 講案이다.동년 9월,류치명은 편지를 통하여 가학의 유풍이 쇠퇴하고 후손들이 習俗에 빠져 해이해지는 것을 염려하여 문중 전체를대상으로 학문을 장려하도록 권고하였다.이후 11월,류건휴․류휘문 등과 함께후진들을 倡率하여 본격시행하게 된다.85)특히,師表가 될 만한 선배들을 선발하여 기양서당에 3명의 훈장을 두고,각 지역별로 별도로 훈장을 두어 학문의연속성을 고려하면서,86)「門講時節目」․「齋居學規」등 구체적인 운영방안과학칙을 마련하였다.87) 또「朔望講笏記」88)와「白鹿洞規」를 부록하여 門講절
83) “燕居 每令子弟 各言所志 因戒之曰 世間浮榮 不足爲貴 立身揚名 雖余所望 如其不成 處身無咎 爲一鄕之
善士 足矣”(<鶴峯先生行蹟>,『岐峯逸稿』,「雜著」.)
84) 필사본으로 기양서당 창건 이후의 중요한 사항을 기록한 것으로 서당의 전말을 알 수 있다.
85) 「定齋先生年譜」,『定齋文集附錄』卷1.
86) 講案에 따르면, 당시 岐陽書堂 訓長은 柳健休 ․ 柳徽文 ․ 柳致明 등 3명이었고, ‘各村訓長’은 기록순대
로 馬嶺 柳進文 ․ 水谷 柳觀文 ․ 中坪 柳鮐文 ․ 高川 柳允休 ․ 瓢谷 柳鼎文 ․ 遠坡 柳覺文 등 6명이었고,
執禮 柳致敎 1명을 두었다.
87) 절목은 총 19조목, 학규는 7조목이다.
88) 笏記의 차례는 ‘行謁廟禮-行庭揖禮-行相揖禮’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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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와 교육목표를 분명히 마련해 놓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류복기는 불행히도 서당건립 2년 후 세상을 떠나게 된다.기양서당은그의 다섯 아들 중 수곡파의 또 한 명의 중심이 되는 장자 류우잠이 아버지의뜻을 계승하여 실질적인 가학의 전당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89)
류우잠은 1575년에 태어났다.立齋鄭宗魯가 지은 행장에 의하면 ‘성장하면서 학문을 좋아하고 날마다 書史만을 가까이하고,蒼石李埈․敬堂張興孝․瓢
隱金是榲등과 道義之交로 교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또 임진․정유 양란시에는 아버지를 따라 함께 의병으로 참전하기도 하였다.병란 후에는 당시 體察使가 安東府를 순찰하자 鄕中을 대신하여「體相入府時陳弊條目」을 지어 올려 府民들이 겪고 있는 현안문제에 대하여 진정하는 등 적극적인 애민정신을보여준 인물이다.90)특히,1627년 丁卯胡亂당시 仁祖의 강화도 피난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동지들과 구원을 도모하였다가 三田渡굴욕으로 이어지는 和議소식에 과거를 접고 폐문한 후 독서와 강학에 전념하였고,특히 시문학에 뛰어났다.그는 또 金得硏․石門鄭榮邦․景玉李簠등 교유인물들에게 인정을 받고있었고,91) 당시 權紀가 편찬하던『永嘉誌』편찬에도 김득연․權晤등과 함께하기도 하였다.
류우잠은 수곡파 안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그는 단순히 家系上宗孫이라는 지위뿐 만 아니라,퇴계를 적전한 학봉의 학문을 계승한 아버지 류복기의 사상과 학문을 후대로 전수해야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었기때문이다.그는 먼저「門中完議」92)를 통하여 번창해 가는 후손들에게 報本追
89) “重葺先公弊廬 以讀書敎後進爲樂(중략) 盖自岐峯公學有淵源 用詩禮裕後 公幼襲家庭之訓 長資麗澤之益
沈潛經傳 砥礪名行” (鄭宗魯,<行狀>,『陶軒先生逸稿』下.)
90)「體相入府時陳弊條目」은『陶軒先生逸稿』下,「雜著」에 수록되어 있는데, 도체찰사가 안동부를 방문할때 건의할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6개 조목으로 진술하고 있다. 제 1조는 100여년 만에 다시 量田을 실시했는데 그 결과가 시행되지 않고 있어 조세가 均平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제 3조는 還上의 결손이 수천 석이나 되어 만약 이를 백성들에게 분배하여 징수한다면 그 피해가 엄청날 것이므로 결손 된 수량을검사하여 元數를 경감해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양전과 환상에 대한 두 항목을 뺀 나머지 네 항목은 모두 軍政에 관련된 것으로 三政의 문란이 군정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먼저 안동부의 兵額은 원래 11哨였는데 나중에 4초가 더하여 15초가 된 것에 대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병란으로 인구가 감소하여 늘어난 4초를 채울 길이 없으니 이를 감해 달라고 건의하는 내용이다. 그 외에도 保障을설치하고도 부역은 더 심해진 현실, 그리고 사망한 군졸이나 도망한 군졸의 番價를 隣族으로부터 징수하는 문제, 원래 15세로 되어 있는 軍役을 5·6세나 3·4세 아이에게까지 부담케 하는 黃口簽丁의 현실등을 군정과 연관하여 폐단을 시정해 달라고 건의하는 내용이다.
91) “及歿金葛峯得硏誄之曰 五柳淸風 北窻皇羲 鄕稱領袖 人倚蓍龜 鄭石門榮邦哭之曰 斯人云兦 無復有若人
者 李景玉簠亦云 自少從鄕父老 聞山林宰相 惟柳陶軒其人 觀於此數者 公大致 豈不亦可想也㦲” (鄭宗魯,
<行狀>,『陶軒逸稿』下.)
92) 「門中完議」의 내용은 확인할 길이 없고, 다만 그 序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夫報本返始之誠 尊祖敬宗之義 實民彝之固有 而有家者之所不可一日而不講也 朱文公家禮 有始基之祖 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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遠의 정신을 함양하고 종족 간에 厚意를 모으도록 하였다.입향 초기에,그의學德과「門中完議」는 수곡파가 족적결속의 바탕을 마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한 것으로,향후 450여 년간 끊임없이 지탱해 갈 수 있었던 정신적이고 실천적인 버팀목이 되었다.
이상을 요약하면,수곡파 가학의 연원은 류복기에게 있으며 거슬러 올라가그의 사상과 학문적 연원은 무엇보다도 혈연적 관계에 있는 의성김씨와 학봉의사상과 학문이었다.이것은 류복기의 직접적 연원이었고,내면적으로는 류의손등 선대 명조의 유업를 연원으로 하고 있다.이후,그의 학문은 수곡파 내부적으로 류우잠에 의해 계승되었다.따라서 수곡파 스스로 가문을 중흥시킨 岐峯柳復起와 가문의 결속을 다진 陶軒柳友潛부자가 ‘수곡파 전체의 뿌리이자 가학의 연원’인 것이다.이 점은 수곡파가 류복기 부자의 호를 따서 ‘岐陶遺業’이라고 口號하고 있는 것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된다.93)아울러,岐陽書堂은 그 건립목적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수곡파 가학의 형성초기에 중요한 산실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수곡파 미래에 가학전승의 공간적인 연원이 되었다.
存墓祭 歲率宗人一祭之文 此古人所以奉先祖 收宗族之厚義也 爲人子孫者 可不以此爲心 而畵其追遠之誠哉
惟我先祖寶文閣直提學公墓 在禮安西虎巖山 吏曺參判公墓 在榮川郡南鍾陵山 世代綿邈 子孫遠居 不能保護
松楸 若直提學公墓 則表碣失傳 丘隴崩夷 廢爲無主之山 爲子孫者孰無戚中泚外之痛哉 上年秋 柳公永詢拜
本道監司 入界之初 巡到榮川 祭于參判墓 翼日到禮安 祭于提學墓 又合內外諸族 慨然諗之曰 祖先墳墓蕪穢
至此 而子孫遠在不能省護 修補之事 其可緩乎 玆令族中分定有司 首舉兩處碣石 及鍾陵齋舎之役 越明年寒
食 修改封植 各竪碑碣 嗚呼 累代荒廢之墓 得至今日 封域重新 香火載陳 相公追遠之誠 可謂至矣 後世子孫
不失衣冠之藏 永有報本之地 闔門感幸之心 又如何也 但念世代愈遠 恩愛漸殺 將來之計 難必其永保 故今我
諸族 用是爲懼 相與立議 以爲遠久之計 若兩處祭祀祭器祭田 及齋舎守護等事 一遵約朿 不至墜廢 則此非畵
子孫誠敬之道者乎 惟我一門 荷祖先積德餘蔭 日益蕃衍 若不益懋以奉先祀 則其於報本返始之誠 尊祖敬宗之
意 何如哉 古人云 爲子孫者 常以保墳墓爲心 則祖宗安寧於冥寘之中 而子孫獲佑於昭昭之際矣 凡我一門諸
人 盍相與勉之 約朿諸規 列之如左云” (<門中完議序>,『陶軒先生逸稿』下.)
93) 현재도 류복기가 건립한 ‘水谷宗宅[岐峯舊廬]’ 대청에는 蘭曲 金江漢이 葛筆로 쓴 ‘岐陶遺業’이라 제호
된 현판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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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水谷派家學의 傳承過程
어느 가문의 특정 인물의 학문과 덕행이 연원이 되어 ‘家學’이 형성되었다면,그것이 전승되어 지속적인 학문적 결과를 만들어내야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한 개인의 학문과 사상에 불과하다.
안동의 명문가들이 대부분 이러한 전통을 잘 유지하여 가문마다 가학으로서의면모를 갖추고 있음은 잘 아는 사실이다.대부분의 가문과 가학은 그 전승 과정에 있어 당시의 보편적인 혹은 독자적인 방법으로 전수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제 하에 본장에서는 수곡파 가학의 전승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 논의에 있어서는 가학 전승의 가장 기초적인 것부터 시작하여 심화시켜 발전하는 모습,가학 전승을 위해 제공되었던 공간의 역할 등으로 대별하여 살피고자 한다.
1.童蒙敎育을 통한 家學傳承의 基盤造成
童蒙敎育은 조선시대 어느 가문에서나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논의자체가 진부한 것일 수도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언급하는 것은 가학이 세대별로 형성되어 전승 될 때,그 과정에서 가장 기초적이면서도必須不可缺한 모태가 되기 때문이다.누구에게나 童蒙,특히 子孫교육에 있어서 각기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나 무엇보다도 가정교육이 중요하다.
퇴계는 家庭에 대해서 ‘완결된 宇宙이며,인간의 도덕성이 배양되는 텃밭이며,유교적 인격의 修道場이며,일생을 거쳐 마쳐야하는 學校’등으로 정의를내리면서 가정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였다.94) 또 雲川金涌은「戒子孫」에서,“門戶의 興亡盛衰는 자손에게서 드러나니 자손들의 賢否에 가문의 존귀함이 달려있고,선대에 입신양명을 우러러보면 가정에서의 敎誨가 돈독한데 있다”95)라고 경계하였다.이와 같이 가문을 부흥시키고 입신양명하는 길은 바로
94) 금장태, <제 2부 13장 退溪의 가정관과 인간관계의 규범, 6절 선비가정의 의미>, 『퇴계의 삶과 철
학』,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95) “門戶興衰視子孫 子孫賢否係家尊 仰惟先代身名顯 猶在親庭敎誨敦”(金涌,『雲川集』卷1.)
한편, 金涌은 동몽교재인『童子禮』를 편찬하였다. 이 책은 원래 학봉이 명나라에서 가져온『鄕校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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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에서부터 자손들을 바르게 기르는 ‘童蒙敎育[家庭敎育]’에 있으며,그 교육을 받은 후손들이 선대의 뜻을 얼마나 잘 계승하느냐하는 문제도 중요한 부분이다.이것은 ‘가학’이란 용어 자체가 가지는 여러 가지 의미 가운데,본장의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한 가문이 前代를 계승하고 後代로 이어가서[繼往開來]최소한 數代를 지속할 수 있는 누적된 학문적 성취가 있어야만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만약 그렇지 않고 연속성이 단절된다면 아무리 학문 등으로 인정받는 인물을 배출했다하더라도 단순히 개인의 학문과 사상일 뿐,가학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수곡파가 ‘훌륭한 선비’를 배출하여 가학을 계승,유지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대를 거칠 때마다 그 학문적 기반을 다지고 가문전체로 확대 재생산해갈 수 있도록 역량을 갖추게 한 동몽교육의 양상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먼저,류우잠이 그의 넷째 아들 冶溪柳㰒(1607∼1688)에게 지어준「訓戒詩」와 류학이 훈계시를 받은 후 지은「冠禮日先府君訓戒詩後識」를 보기로 하자.
네 나이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爾年今已到成人
좋은 날 三加의 禮로 새 옷을 입힌다. 吉日三加禮服新
아침저녁으로 군자의 학업을 닦고 夙夜勉修君子業
때 맞춰 효도하며 어버이를 위로하라. 及時爲孝慰雙親
선조의 훈계가 그 지극함이 이와 같으나,불초는 보잘 것 없어 받들어 이을 수 없었다.
오늘에 이르러도 手澤이 완연하니 風樹의 슬픔을 다시 어떻게 할까?
이에 감히 선정의 묵첩 사이에 넣어서 종신토록 영모할 따름이다.갑오년 봄,불초 㰒,피눈물로 삼가적다.96)
위「訓戒詩」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것으로,자식이 成人이 되는 冠禮儀式을 통해 인륜의 근본인 孝를 행하고 君子의 길을 가는 학업을 하라는 경계의내용이다.「冠禮日先府君訓戒詩後識」는 아들이 아버지의 훈계를 평생토록 이어받고자하는 의지를 後識에 담아 다짐하고 있다.실제로 류학은 19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병이 들어 어떤 약으로도 효험이 없게 되자 그 糞을 맛보거나 자輯』에 들어 있는 편명이다. 학봉은『향교례집』중에서 어린이들의 교육에 유용한 「동자례」편과「居鄕雜儀」편을 강조하고 자제들에게 가르쳤다. 그 후 조카인 김용이 1582년에 학봉의 뜻을 받들어『동
자례』라는 제목으로 위의 두 편을 한 권의 책으로 편집하고 적극 보급하였다.
96) “先人訓戒 如此其至 而不肖無狀 無以奉承 式至今日 手澤宛然 風樹之感 當復如何 玆敢粧列于先正墨帖之
間 以爲終身永慕之地耳 甲午春日 不肖孤㰒 泣血謹識”(柳㰒,『冶溪遺稿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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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마시게 하여 낫게 한 후 10여년을 더 봉양할 수있었다.97)
乖厓柳榰(1626〜1701)는 자손들에게 남긴「遺命」을 통해,“너희들이 子弟를 가르치지 않는 것이 심히 걱정된다.지금부터 한 결 같이 내가 적어준 다섯조목을 따라 십분 근면하여 禽獸가 되는 지경을 면할 수 있다면 나는 죽어도죽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고,당부하기를 “진실로 이 다섯 가지를 행한다면 가문을 보존하고 과오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98)또 그는 넷째 아들柳命輝에 의해 지어진「言行記」에서 자신의 독서관과 선비[君子]관에 대해 언급하면서 자손들에게 학문의 목적과 방법에 대해 교훈하였다.그는 또 자손들에게 독서와 학문을 통한 선비와 군자의 길과 공명정대한 출사의 길을 제시하여 후손들을 경계하려는 의지를 전하였다.99)
檟亭柳奉時(1654〜1709)100)는 入鄕祖柳城의 5세손인 柳振輝의 차자로서朴谷[박실]과 大坪[한들]의 分派祖가 된다.그의 문집이 별도로 남아 있지 않아구체적인 교육방법을 살펴볼 수는 없지만,그에 대한 家狀과 蘆厓柳道源이 지97)
“噫 古今天下爲孝者多矣 閱之於古 或有㥯難而亡身者 又有至誠而動物者 事雖不同而爲孝 則一然 千百一
人 豈嘗易得而見哉 歲靑牛春 春堂纔經內外艱 仍致症候沉綿 百藥不效 日漸危劇 余等籲天之悶 有非言語所
殫而貴無格天之誠 未效身代之祝 聚首憂煎 罔知所措矣 侍藥之際 第四弟㰒 泣而言曰 骨肉之血有效久病 此
古人已試之驗 十指雖戕 親病得霽 則肢體何關 請一試之以冀萬一之效 弟之志也 忽斷右手一指 米飮之不進
藥餌之斥去者 已久而進呑此血 喘息漸紓 連嘗一再咽喉積塞之氣 稍稍驅滌 沉痾頓醒협若披雲孝哉 吾弟也
是非格天之慶耶 自玆而歷日已多 漸進粥飮 使余等得覩天日而列侍左右 以祈崗陵者 其有窮已耶 其有窮已耶
夫値親之病 而割肌竭誠質諸神明 而竟獲陰佑使之得愈者 是誰誠爾父母 劬老鞠我五人 而余等不肖 誠未感神
憂遑之夕 但知憫泣而無所爲 獨此幼弟 竟就純孝 豈非余等所愧且幸也耶 噫 爲孝不一叩氷求魚泣竹迸笋 不
獨專美於前也 吾弟至性素與人異 頃年慈闈之病 弟齡纔十一 與姊氏共嘗其糞色憂侍藥不暫離側 曾於伯氏之
疾 與姊氏 亦有是行 其天倫至愛至於同氣 蓋稟於天而不匱者 固然矣 嗚呼 姊氏不幸 今也則亡而至於今日爾
能全孝於兩親 吾昆弟之所追感於姊氏所期望於爾者 當부如何哉 世之爲孝者多矣 徒見悅耳目供甘旨 而値此
異行 則必群駭而衆怪之或以矯激目之若曰 矯激則十歲幼兒蒼卒臨患不遑外事 而有何矯激 有何希望哉 吾弟
至性旣異已能孝悌 又加以學問之力則余等不肖非所比倫 而亦將匹美於古人也 明矣玆叙顚末 私自矜式云爾
靑午春日 三兄㮋記之于侍病之暇” (柳㮋,<斷指說>,『冶溪遺稿』下.)
98) “凡人之死生修短 自有定限 不須爲念 況我年近八旬 更何恨哉 念我家世本淸寒治喪凡節稱家有無而已 冠帶
朝服 雖不得不用 只用黑領 他餘錦段之物 絶勿近身 小殮用單衾 勿爲漆棺 勿求挽詞 葬于楸峴 白氏塋後 父
母墳前 表石牀石 一未設置 此爲不孝地下之遺恨 汝等須念此意 並力拮据 或至於有成 則甚幸 汝輩不敎訓子
弟 甚可憂 今後一從所錄五條 十分勤課 俾免禽獸之歸 則吾雖死而不死 其各惕念 勤讀書 愼言行 崇儉素 力
農桑 謹租稅 苟能行此 則可以保家而寡過矣”(柳榰,『乖崖集』.)
99) “항상 말씀하시기를, ‘讀書를 함은 그 도리를 알아 行事에 적용하기 위함이고 文章에만 마음을 쓰는 것
은 무익하다.’, ‘聖賢의 遺訓이 方冊에 갖추어져 있으니 단지 熟讀하지 않음을 근심할 따름이다.’, ‘士君
子의 立志와 處事에는 正直과 公明을 요하고 邪曲과 사심을 없게 해야 한다.’, ‘士君子가 朝廷에 들어가
서는 오직 마땅히 扶正抑邪하여 公道를 넓히고 私心을 배척할 따름이니, 각기 偏黨을 지어 勝負를 다투
는 것은 사심이다.’” (柳命輝,『乖崖集』.)
100) 류봉시는 생존당시에 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檟亭’은 그의 사후 후손들에 의해 명명되어 호칭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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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父親[慵窩柳升鉉]의 가장에 기록된 傳言을 요약해 보기로 한다.
그는 의리에 독실하여 비록 상인이나 노복들이라도 후대하여 향리에서 ‘好義君子’라 불린 인물로 평가받았고 평생 동안 書史를 공부하면서 훈몽에 매우엄격하고 잘하여 鈍才라도 啓發시켰다고 적고 있다.그는 가정교육에 있어 더욱 엄격하였는데,대표적인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府君의 先考처사공(류봉시)께서는 자식들을 매우 엄격하게 가르치셨다.하루는 부군(류승현)이 마을 아이들을 따라 물고기를 잡아 돌아오니 처사공께서 즉시 버리라 명하시고,슬퍼하시며 당신 자신을 경계하고 책망하셨다.이윽고 살던 곳이 시끄럽고 어지러운 곳이라는 이유로 드디어 10리 밖 산촌의 조용하고 궁벽한 곳으로 옮기시고 3년을 우거하면서 오로지 부군을 가르치고 기르셨다.이때부터 더욱 文學에 노력을 다하였다.101)
위에서 보듯이,류봉시의 자식교육은 孟母의 ‘三遷之敎’와 비견된다 할 수있다.이러한 교육방법은 두 아들 慵窩柳升鉉과 陽坡柳觀鉉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생활에서 선정을 베푸는 등 현실적인 결과로 이어졌다.이후 그는 두 아들의 교육을 위해 이사한 곳에 檟木세 그루를 심어 한 그루는 자신을,나머지 두 그루는 자식들을 채찍질하는 無言의 회초리로 삼았다.이를 계기로,수곡파의 支派에서 또 하나의 가학의 맥이 형성되고 전승되는 상징적 공간
‘三檟亭’이 탄생하기도 하였다.
醉軒柳賁時(1680〜1781)는 류복기의 셋째 아들 龍巖柳知潛의 曾孫이다.그
는 효우가 독실하였고 향당에서는 어려운 이를 구휼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또 매년 춘궁기가 되면 마을을 점검하고 연기가 나지 않는 집에는 반드시 양식
을 전하여 생계가 끊어지지 않게 도와주었다.그는 가난한 자가 집으로 찾아오
면 반드시 먹을 것을 줘서 보내는 인자함을 자식들에게 몸소 보여 주었다.항
상 자질들에게 “『詩經』의 ‘哿矣富人哀此煢獨’라는 뜻을 나는 능히 행하지 못
했지만,너희들은 이것을 힘쓰라”고 훈계하면서 애민정신을 보여 주었다.이 구
절은 맹자도 인용하며 가난 한 자들을 돌보는 것이 선정이라고 거듭 강조했던
말이다.102)
101) “先考處士公 敎之甚嚴 欲大成就之 一日 府君從隣兒獵魚而歸 處士公卽命棄之 痛加警責 已而 以所居喧閙 遂就十里外山村靜僻處 寓居三 爲專意敎養府君也 自是益肆力於文學”(<先考通政大夫工曹參議慵窩府君
家狀>,『蘆厓集』卷9.)
102) “왕이 말하였다. ‘왕정을 가히 얻어 들을 수 있습니까?’ 대답하여 말하되 ‘옛날에 문왕이 기를 다스
림에 경작하는 자는 9에 1하며, 벼슬하는 자를 대대로 녹을 주었으며, 관문과 저자를 기찰하되 세금을
거두지 아니하며, 못과 어량에 금함이 없으며, 사람을 벌하되 처자에게 미치지 아니하니, 늙었는데 아내
가 없음을 鰥라 말하고, 늙었는데 남편이 없음을 寡라 말하고, 늙었는데 자식이 없음을 獨이라 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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陽坡柳觀鉉(1692〜1764)은 류봉시의 둘째 아들이다.그는 형 류승현과 함께
아버지의 엄격한 가정교육을 통해 성장하여 분가한 후 또 하나의 家脈을 잇는
다.그는 자제들이 혹 다른 사람의 과실을 말하면 오히려 그들에게 ‘선’을 다했
는지를 되물으며 스스로 반성하게 하고,또 말하기를,“천하에 가장 억제하기
힘든 것이 利欲같은 것이 없다.내 나이 스무 살에 錢穀이 무엇인지 몰랐으나
후에 가난을 염려하여 産業에 마음을 두었더니 利心이 날마다 자라서 때로는
혹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반성하고 고치려 했으나 매양 이욕이 분수에 넘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너희들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103)라고 하며 재화에
욕심을 버리고 근면,검소할 것을 당부하였다.
蘆厓柳道源(1721〜1791)은 류관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백부인 류승현에
게 出系하였다.행장에 의하면,그는 약관의 나이에 아버지로부터 家事를 물려
받아 서책을 가까이 하지 못하고 농사에 분주한 시절을 보냈다.아내까지 바느
질과 길쌈으로 생계를 꾸릴 정도로 가난하였데,生父인 류관현의 도움으로 생
활을 유지해 오다가 아내까지 세상을 떠나자 장자인 壺谷柳範休에게 다시 家
事를 전한다.이 때 자식들에게 남긴 글에서 다음과 같이 간절하게 당부를 한
다.
다시 家事를 맏이에게 맡기고 先廬로 물러난다.다만 너는 나이는 어리지만 스스로
독서할 줄 아는데 俗務를 맡기니,나의 初年과 같이 심히 걱정할 만한 것이다.그러나
너의 立志가 자못 견고함을 보니,내가 집을 맡아 학문을 폐하고 家兄의 賙救를 염려함
만 못한 듯하다.너희들이 진실로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생활한다면 너희들이 어찌 溝
壑에 빠지겠느냐.지금부터 원컨대,너희들과 함께 농사를 과업으로 하고 학문에 힘써서
고인들이 주경야독하는 뜻에 부친다 하노라.104)
어린데 아비가 없음을 孤라 말하니, 이 네 가지 사람을 천하의 곤궁한 백성이면서 하소연 할 데가 없는
자들이라. 문왕이 정사를 펴 仁을 베풀되, 반드시 이 네 가지 사람들을 앞세웠더니, 시경에 이르기를,
좋기는 부유한 사람이지마는 이 지쳐버린 고독이 가엾도다라고 하였습니다.’” (王曰 王政可得聞與 對曰
昔者文王之治岐也 耕者九一 仕者世祿 關市譏而不征 澤梁無禁 罪人不孥 老而無妻曰鰥 老而無夫曰寡 老而
無子曰獨 幼而無父曰孤 此四者 天下之窮民而無告者 文王發政施仁 必先斯四者 詩云 哿矣富人 哀此煢獨
(『맹자』,「梁惠王下」5장 3절.)) * 번역문 인용 : 『朱注孟子』, 김동길․허호구 역주, 창지사, 1994.
103) “子弟或言人過失 輒呵之曰 汝行事果能盡善乎 吾恐彼亦議汝之得失 不可徒責人而忘自反也 或語及財利
事 輒戒之曰 天下之難制者 無如利欲 吾年二十時 不知錢穀爲何物 及後患家貧 留意產業 利心日長 時或警
懼省改 而每覺利欲上分數多 爾曹宜知之” (李象靖, <通政大夫刑曹參議陽坡柳公行狀>,『大山先生文集』
卷51.)
104) “亦以家事付大兒 而退守先廬 但汝年少自知讀書 而使任俗務 如余之初年 則此甚大可憂者 然見汝立志頗
堅固 似不如余之當家廢學 且念家兄之賙救 汝輩實遵生大人遺意 汝輩豈轉於溝壑哉 自今願與汝輩課農勉學
以附古人晝耕夜讀之義云” (<書家傳雜錄後示兒輩>,『盧厓集』卷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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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류도원은 자신이 초년에 가사를 물려받은 것처럼 자식에게 또다
시 가사를 물려주면서 생계의 어려움을 알면서도 자신의 학문은 물론 자식들의
학문을 염려하며 晝耕夜讀하도록 소원했던 것이다.
행장에 의하면,그는 어린 시절부터 어느 정도 학문에 재능이 있었으므로
마을의 어린아이들을 모아놓고『史略』등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그는 이 경험
을 바탕으로「敎兒說」을 지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나는 어릴 때,마을의 여러 아이들을 모아놓고 史略과 通鑑․經書에 이르기까지 가르
쳤다.사람들이 나를 보고 훈몽에 뛰어나다고 하였으나 자질이 둔한 어린 아이로써 억지
로 한 것이 많았다.사실 나의 훈몽은 별다른 방법이 없다.다만,아침마다 일어나 日課
를 배울 뿐이었으니 실제로는 그 가르치는 법을 얻지 못하였고 또 중년이후는 싫어함을
알았다.금년 봄 家率들을 데리고 윗박실 산중에 우거하니 아이들이 마침 천리 벼슬길로
나가고,집안에 어린 손자 등도 또한 내버려둘 수 없어 70의 나이로 다시 마을 學長의
모양을 갖추었다.매양 가르칠 때마다 앉아 冊竹을 잡고 손으로 이끌어 입으로 가르쳤
다.그런데 마음이 사물에 있어 왔다 갔다 하고 일었다가 사라지면 불과 잠간사이에도
아이들이 句讀를 틀리고 音吐를 잃어버리니 완전히 다 읽는 것이 반드시 3,4번을 읽은
후에야 마쳤다.심하도다.마음을 속이기 힘듦이여.선악의 기미가 겨우 여기에서 동하여
바로 저기에 반응하니 影․響과 같이 두렵기 그지없다.나는 평소 白首가 되어도 분란스
럽게 될까 염려하였으나 아직까지 그 病源의 소재를 알지 못하였는데,지금 아이들을 가
르치면서 마음이 부재한 병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병을 얻었다면 어찌 그 약이 없겠는
가. 傳에 이르기를,‘마음에 두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
어도 그 맛을 모른다.’고 하였다.(缺)105)
여기서 그는 만년에 집안의 후손들 교육에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그는
자손들에게 독서와 학문에 있어 마음[心]으로 沈潛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또 둘째 아들 瓢巷柳洛休에게 쓴 편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네가 만일 그곳에 있으면서 말을 조심하고 사귐에 있어 신중하며 나다니지 않고 꼿
꼿이 앉아 글공부를 한다면 비록 오랫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않더라도 무슨 해될 것이
있겠느냐.그러나 그렇지 않고 心志를 마음대로 놓아 버리고 언행을 어그러뜨려 또래들
105) “余少時 聚村裏羣兒 授以史略至於通經書 人以余善於訓蒙 多以鈍根小兒強之 其實余之訓蒙 非有別法
但朝朝喚起 授以日課而已 實未得其敎術也 且中年以後則知厭之矣 人亦不以訓蒙相強甚是老境省事 今年春 挈家來寓上瓢山中 而兒子適宦遊千里 家裏小孫等 亦不可任其浪過 乃以七十之年 復作村學長貌樣 每授課時
坐執冊竹 手引而口授之 授一字 心在一字 授一句 心在一句 心口相應而儼然如對神明 則兒輒善學而退 或於
俄頃之間 忽爲外物引惹 口授文字而心在事物 往來起滅 不過霎時之頃 而兒已錯了 句讀失其音吐 一讀可了
者 必至於三四讀而後已 甚矣 此心之難誣也 善惡之幾 纔動於此而卽應於彼 如影響然 甚可畏也 余素患思慮
至於白首紛如 而未得其病源所在 今因敎兒而得心不在之病焉 旣得其病則獨無其藥乎 傳曰 心不在焉 視而不
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缺)”(『蘆厓集』卷7,「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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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손꼽히지 못하여 主家에 光榮이 없게 하고 부모에게 누를 끼침이 적지 않다면
무슨 낯으로 돌아와서 나를 보겠느냐.돌아오는 날엔 마땅히 그 눈동자를 보게 되면 알
수 있을 것이다.요즈음 같은 여름철에는 時文을 짓는 것도 좋겠으나 다만 經典의 誦讀
을 완전히 그만두면 안 된다.반드시 아침에는 글을 읽고 낮으로는 時文을 지어 늘 그렇
게 함이 어떠하겠느냐.106)
위 편지에서는 객지에 나가있는 아들에게 언행과 학문에 있어서 ‘愼其獨’의
자세를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또 時事的인 문장에 치우치지 말고 경전
을 誦讀하도록 면려하고 있다.
三山柳正源(1702〜1761)의 동몽교육은 특별히 ‘義’를 중요시하였고 일상생
활 속에서는 자신과 선조의 처신 방법을 모범으로 삼았다.그는 임종 무렵 족
제 江浦柳弘源을 불러「張中丞傳後敍」107)를 읽게 하였는데,‘男兒死耳不可爲
不義屈’이라는 대목에 이르자,“나는 평생 이 敍를 즐겨 읽었다.그런데 이 대
목에 와서는 무릎을 치고 감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지금 너를 시켜 읽히고
들으니 가슴이 시원하다.”고 말하면서,운명의 순간을 맞아서도 후손들에게 ‘의
로운 군자’의 길을 직접 읽게 하고 간절히 당부하였다.어떤 사람이 논에 들어
가 벼이삭을 뽑아 훔치다가 동네 아이들에게 잡혀오자 타일러 보낸 후,아이들
에게 말하기를 “보고서 못하게 하는 것은 옳으나 동네사람들이 알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며 경계하도록 한 일화도 전한다.108) 또 “우리 가문에서는 慵窩
[柳升鉉]공이 모범이 되시니 그 鎭物하는 度量과 恬靜하신 志操를 우리들이 따
라가면 거의 과오와 실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며 祖先들의 일상생활에서의
행적과 교훈을 모범으로 삼아 精進할 것을 훈계하였다.
東巖柳長源(1724〜1796)은 류관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空空齋柳挺輝의
曾孫으로 출계하였다.그는 1764년 生父의 상을 당한 후,큰 형인 范溪柳通源
의 주선으로 중형 류도원과 함께 박곡에 모여『詩經』의「小雅常棣」의 뜻109)
106) “汝若在彼謹言語 愼交際 廢出入 堅坐讀書 雖久不還 亦何有害 如或不然 放倒心志 壞了言行 不數於侑
類 無光於主家 添厥所生大矣 其何顔 歸見我乎 歸日當望其眉睫 而知之也 當此夏節 做得時文亦可 但全廢
誦讀 則不可 須朝讀午做 日以爲常 如何”(<答兒洛休>,『蘆厓集』卷5.)
107) 「張中丞傳後敍」: 唐 韓愈의 문집《창려집》에 실린 글. 張中丞은 御史中丞을 지낸 張巡을 가리킨다.
당 현종 때에 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순과 許遠은 睢陽城을 끝까지 지키다가 부하인 南霽雲, 雷萬
春 등과 함께 장렬하게 죽었다.
108) “有人潛入田 揠稻穗 家少輩執致于前 公若無見也 久之 其人扣頭請罪 公曰 汝以凶歲之故 失其常性 旣
揠者歸以救飢 後勿復爾也 顧謂少輩曰 見而禁之 可也 何必使閭里知之耶” (李象靖, <行狀>,『三山文集』.
)
109) 형제를 燕하는 樂歌이다. “상체의 꽃이여, 그 꽃봉오리 어찌 빛나지 않으리. 무릇 세상 사람들은 형제
보다 좋은 것이 없네.[常棣之華 鄂不韚韚 凡今之人 莫如兄弟] ”라고 노래하였다.
- 38 -
을 빌려 ‘三棣堂’을 짓고 삼형제가 한 동네에 함께 살기로 약속하였다.서로 만
나는 길을 ‘三逕’이라 명명하는 등 형제의 우애를 돈독히 하여 후손들에게 모범
을 보여주었다.당시 류장원은 찾아온 자질들에게 “先父兄께서 매양 불초 등에
게 훈계하시기를 ‘순박하고 진실함이 우리 가문의 본색이다.’라고 하셨는데,근
래 너희들을 보니 자못 꾸미는 것에만 힘을 쓰니 내 심히 걱정되어 매일 한 밤
중에도 땀이 흐르는 것을 알지 못할 정도로 염려된다.너희들도 또한 마땅히
통렬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며 외형적인 꾸밈보다 내면적인 인성을 강
조하였다.
그의 학문적 교육법은「巖齋語錄」110)에 잘 드러나 있다.여기에서 그는 讀
書法에 대해 구체적이면서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즉,『四書三經』-『心
經』-『近思錄』-周濂溪․程子-朱子書-退溪書등으로 순차적 학습교재를
열거하면서 “聖經을 기본으로 삼지 않고 小家의 잡서를 즐겨 보는 것은 실효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독이 된다.”고 하며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또한
일상의 공부에서 가장 절실한 것으로 四書를 꼽았고,문체에 따른 讀聲의 명백
성을 주장했으며,調理가 바로 서고 血脈이 일관된 문장 작성을 추구하였다.111)
大埜柳健休(1768〜1834)는 류복기의 셋째 아들 류지잠의 6대손으로 태어났
다.그는 10세에 아버지 松陰柳和鉉으로부터 배움을 시작하여 18세에 족부인
류장원에게,40세에 損齋南漢朝에게 가르침을 구하기도 하였다.첫 스승이었던
족부 류장원이 세상을 떠나자 스승의 뜻을 받들고자 ‘崇德․修慝․辨惑’등「三
箴」과「閑齋箴」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는 의지를 다졌다.그는 자신의 이러한
의지를 바탕으로 자신과 후학의 경계를 삼기 위해 4字68句의「訓蒙箴」을 짓
기도 하였다.112)
류건휴의 동몽교육에서,주목할 만한 것은「童蒙學令」이라는 교육 지침서
를 만들었다는 것이다.이것은 동몽교육에 대해 강령과 함께 시행규칙에 이르
110) 柳健休, 『大埜集』卷6,「雜著」 .
111) “讀書之法 先讀四書 次讀三經 次讀心近濂洛朱退之書 親切體認 積久潛玩 使許多義理 參伍錯綜 融釋貫
通 然後自家胸中 始有權衡尺度 自見得諸說之輕重長短”, “今汝不以聖經爲基本 而喜看小家雜書 吾恐其無
實效而中實毒也(壬子)”, “四書之切於日用 如布帛菽粟 非眞實玩味 密切착力 無以有得”, “讀聲須要明白洪
暢 亦隨文各有其法 讀詩欲其諷詠 讀書欲其謹嚴 讀四書欲其精密 讀外傳又須洋洋浪讀”, “文章須有頭眉腹
臟 條理相承 血脈相貫 方有體裁 又須平易有典 則不要奇崛 譬如長江大河渾浩流轉觸石而後有波瀾” (柳健
休, <巖齋語錄>,『大埜集』卷6,「雜著」)
112) “造化之原 有理無形 動闢靜闔 陰陽緯經 而生五行 濁降淸升 天地定位 交感妙凝 隨質賦性 物塞人通 惟
愚與聖 不貧匪豊 仁義禮智 喜怒哀樂 一心主宰 衆欲未斲 粹然在中 觸則著外 操存擴充 剛健光大 嗟厥氣稟
厚薄萬殊 百體縱逸 羣邪迭覦 淫聲難色 壅蔽聰明 欲充口腹 病起膏肓 王侯喪邦 卿士捐軀 播惡萬世 嗚呼悲
夫 汝刱若是 克圖變化 休養眞純 逆絶僞詐 愛親敬兄 忠君弟長 灑掃應對 進退揖讓 餘力學文 當惜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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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北大學校文學碩士學位論文
全州柳氏水谷派家學의 形成과 展開
大學院漢文學科漢文學專攻
柳榮洙
2008년 12월
慶北大學校大學院
全州柳氏水谷派家學의 形成과 展開
이 論文을 文學碩士學位論文으로 提出함
大學院漢文學科漢文學專攻
柳榮洙
指導敎授朴英鎬
柳榮洙의 文學碩士學位論文을 認准함
2008年12月
委員場
委員
委員
慶北大學校大學院委員會
- 目次-
Ⅰ. 序 論················································································································· 1
Ⅱ. 水谷派의 形成과 家學의 淵源······················································· 6
1. 卜居 過程과 婚姻 關係·············································································· 7
2. 家學 淵源으로서 岐峯 柳復起 父子와 岐陽書堂························ 18
Ⅲ. 水谷派 家學의 傳承 過程································································ 31
1. 童蒙敎育을 통한 家學傳承의 基盤 造成 ······································ 31
2. 傳承方法의 核心 - 家系內的 師承關係의 形成·························· 47
3. 講學과 討論의 空間 ‘亭子’ ································································ 53
Ⅳ. 水谷派 家學의 展開 樣相································································ 62
1. 程朱學 根幹의 思想的 性向·································································· 62
2. 退溪學脈의 繼承과 ‘湖學’의 完成······················································ 68
3. 多樣한 著述과 學問的 性向·································································· 77
4. 仕宦과 牧民官의 모습 ·············································································· 88
Ⅴ. 結 論·············································································································· 95
【 參 考 文 獻 】······························································································ 101
【 英 文 抄 錄 】······························································································ 108
【 국 문 초 록 】······························································································ 111
Ⅰ. 序論
우리나라 漢文學은,日帝강점기를 벗어난 후 光復을 맞이하였음에도 거의 단절되어 한문학 排除論이 보편화되면서 한문학에 대한 연구는 그 의의를 정당하게 확보하지 못한 채,1)1970년대 초반까지 거의 방치된 상태였다.이후 새로운 국면을 맞아2)지금까지 수많은 선배제현들의 심혈을 바친 노고를 바탕으로엄청난 업적을 이루어냈다.그 동안의 우리 한문학계의 연구업적과 흐름을 분야별로 대략적으로 살펴보면,國文學範疇로의 귀속여부에 대한 논쟁 속에서漢文學의 구체적 위상설정 문제,漢文學樣式에 따른 연구 방법론에 대한 반성과 제시,韓國漢文學史의 정립문제,한문학 작가 발굴 및 작가론․작품론․문학론․비평론․문체론 등의 통상적인 흐름을 넘어 최근에 시도되고 있는 한문 및
한문학 작품의 國譯[飜譯]방법론,經學의 한문학적 접근 시도,한문학 연구주제의 外延擴張을 통한 사회․문화사적 접근,文獻學[書誌學]등 國學全般의 분야별 유기성 문제,地域學[地方學]의 범주 안에서 한문학 연구현황과 가치정립문제 등으로 넓혀져 가고 있다.이 밖에도 가장 최근 한국한문학과 국토산천,한문학 창작공간과 관련유적에 대한 탐색,한문학의 性談論등도 학자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개괄해보면,大主題別包括的인 연구흐름에서 小主題別深層的연구흐름으로 전환되어 한문학 연구의 범위가 세분화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이러한 최근 한문학계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주목할 만한 학술대회가 있었다.먼저,東方漢文學會가 <地域學으로서의 漢文學>을 주제로 기획하여 2003년에 개최했던 ‘제67회 학술발표 전국대회’와 韓國漢文學會가 <地方化와 漢文學> 이란 기획주제로 2006년에 개최했던 ‘동계 학술발표대회’등이 대표적인 것이다.前者의 대회에서 李潤甲교수는 “한문학을 그 자체만 분리시켜 연구하기보다 생활세계의 모순과 변동을 해명하는 지역연구의 일환으로 연구하는 것이 그 실체적가치를 드러내는데 보다 有意味한 방법이 될 것이다.”3)고 하였다.이 말은 漢文
1) 朴英鎬,「韓國에서의 漢文學 硏究 動向」,『退溪學과 韓國文化』35집,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04.
2) 李佑成, 기조강연,「한국한문학연구의 회고와 전망」『제1회 한국한문학대회, 한국한문학연구의 제문제-그 방법적 검토』
3) 『東方漢文學』제26집, 동방한문학회, 2004.6. 이 대회에서는 서울․경기․부산․충남․전라남북도․경상남북도지역 등의 한문학과 관련된 여러 논문들이 발표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진영미「서울경기지역 한문학의특성과 변모양상」, 정경주「한문학에 나타난 부산지역 문화전통의 특성」, 김풍기「오대산 인식의 역사적 변천과 문화사적 의미」, 박우훈「충남지역의 한문학 연구」, 홍성욱「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북)도
- 2 -
學[혹는 漢文學的生活世界]을 떼어놓고서는 지역학 연구에서 실제적 가치를드러낼 수 없고,오히려 한문학계의 역할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後者의 대회에서는 李鍾虎교수가「地域漢文學硏究의回顧와 展望-安東地域을 중심으로」에서 “특정지역에서 생산된 한문학 유산을발굴하고 연구하여 공시적 혹은 통시적으로 존재하는 학문특질을 찾아냄으로써한국한문의 지평을 넓히고 내용을 풍부하게 만드는데 기여하는 학문이다.”4)라고 하면서 ‘지역 한문학’을 정의하였다.
이와 같이,한문학 연구에 있어서 ‘지역’을 연구하는 통합 과학적 학문분야에 일견 분과 학문적 성격의 한문학적 연구를 반드시 선행한 후,그 뒷받침이되도록 해야 하고 ‘지역’의 한문학 유산을 발굴 분석하여 학문특질을 찾아내는데 한문학계의 역할이 요구된다 할 것이다.그렇다면,우리가 ‘지역’의 범위를좀 더 좁혀서 그 지역의 일정 공간을 차지하였으면서 한문학적 연구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자료를 가진 집단,즉 ‘家門’과 그 가문의 학문과 사상을 대변하는 ‘家學’에 대해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다.5)왜냐하면,한문학의지역학이라는 개념에서 각각의 가문들은 ‘地域全體’의 一構成員으로서 각각의역할에 따라 ‘지역’을 발전시켜 왔으며,또한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 속에 해당
지역에서 思想․學問․文化․社會的으로 저마다의 한문학 유산을 남기고,그固有의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본고는 안동의 여러 가문들 중에서 16세기 중반부터 약 450여 년간 慶尙北道安東市臨東面水谷[세칭 ‘무실’]에서 同姓의 마을을 이루며 世居하였던9)‘全州柳氏水谷派’(이하 ‘水谷派’)10)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다.수곡파는 入鄕祖인 柳城이 최초 卜居한 水谷마을을 중심으로 瓢谷[박실]․大坪[한들]․高川[고랫골]․葛田[갈밭]․馬嶺[맛재,午峴]․舟津[배나들,三峴,三山]․靑松[송생]11) 지역 등 주변일대로 가문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家學’을 바탕으로 누대에 걸쳐 가문을 이어 온 가문이다.수곡파에 대해서는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소개된 적이있었고,12) 수곡파 가학과 관련해서는 사상․학문․문화사적 방향에서 접근한본격의 관심과 연구도 있었다.13)
4) 『한국한문학연구』, 제39집, 한국한문학회, 2007.
5) 각각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 家門
①‘집안, 문중, 대대로 내려오는 그 집안의 사회적 지위[지체]’(『국어대사전』,한국어사전편찬회편, 삼성문화사, 1986.)
②‘家族’․‘家’․‘鄕里’․‘門第’․‘上古指卿大夫之家’(『辭海』,상해사서출판사, 1989.]
③‘上古指卿大夫之家’․‘자기 집의 문 ․ 자기의 집을 가리킴’․‘가족과 같음’․‘師門과 같음 ․ 師承傳受의 門戶系統을 이름’․‘家勢․門第’․‘가정의 門風’․‘家鄕’(『漢語大詞典』,漢語大詞典出版社, 2006.]
* 家學
①‘한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학문, 특히 그 집안에서 세습하는 전문적인 학문 ․ 집안에서 배운학문’(『국어대사전』,한국어사전편찬회편, 삼성문화사, 1986.)
②‘家傳之學’(『辭海』,상해사서출판사, 1989.]
③‘가족세대간 서로 전해지는 학문’․‘家塾’: (『漢語大詞典』,漢語大詞典出版社, 2006.]
* 家學淵源:가학이 세대 간에 서로 전해짐이 뿌리와 기반이 깊고 두터움. (『漢語大詞典』,漢語大詞典出版社,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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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地方學]으로서의 새로 한문학적 분야’를 조명해 보고자 하였으며,최근의연구동향을 참고하여 가능한 한 한문학적 자료가 풍부한 가문에 접근하고자 하였다.6)
가문과 그들의 가학을 고찰하고자 한다면,대상으로 삼고자하는 특정가문이대대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한 同姓의 주체여야 하고,그 주체가 세대 간에 서로 수수한 학문의 뿌리와 기반이 깊고 두터워야 할 것이며,그 학문의 뿌리와기반을 바탕으로 한문학적 결과물이 드러나 있어야 한다는 조건,즉 그 사전적의미가 종합적으로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이러한 조건들을 잘 갖추고 있는 가문들을 보유하고 있는 지역 중의 하나가 慶尙北道‘安東[圈]’임은 자타가 공인한다.安東[圈]은 소위 ‘〇〇宗宅’등을 비롯한 ‘門閥’이 姓氏別로 여러 지역에분포되어 있고,7)한문학 관련 자료가 풍부하며,그 가문들의 구성원 중 학문적성취를 이룬 文人및 學者들이 많이 있다.아울러 國學專門硏究機關이 안동을 비롯해 주변의 역사․문화․학문 등에 대해 종합적으로 ‘安東學’이라 통칭하고,그곳에 분포하고 있는 家門[門中]들에 대해 비중 있게 연구와 소개를 진행하고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8)
6) 특정가문에 대한 연구는, 아무리 연구자의 입장에서 객관적 사실과 증거를 바탕으로 논술한다하더라도,자칫 해당 가문을 貶毁하는 愚를 범하기 쉽다. 그 반면 오히려 전자의 그것을 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자신도 모르게 연구본연의 취지를 해치고 특정가문을 선양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숙제로 인해, 그 동안 연구자들에게는 일면 부담되는 분야인 것도 사실이었으나 그 동안 가문과 가학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어왔다. 하지만 그 대부분이 역사학계와 사회학계 및 서지학계의 연구 실적이다.
7) 다산 정약용(1762~1836)은『택리지』 발문에서“우리나라에서 庄土나 別墅의 아름답기로는 오직 영남이최고이다. 그러므로 사대부가 때로 수백 년 동안 액운을 입었어도 그 존귀함과 부유함이 시들지 않았고, 그 풍속은 집집마다 각각 한 조상을 추대하고 한 장토를 차지하며 종족들이 함께 살며 흩어지지 않았는데, 때문에 조상의 업적을 공고하게 유지하면서 근본이 뽑히지 않았다.(國中莊墅之美 唯嶺南爲最
故士大夫阨於時 數百年而其尊富不衰 其俗 家各戴一祖占一莊 族居而不散處 所以維持鞏固而根本不拔也)”또한, 정약용은‘안동’에 대해서“眞城李氏는 退溪를 모시고 陶山을 점유하였고, 豊山柳氏는 西厓를모시고 河回를 점유하였고, 義城金氏는 鶴峰을 모시고 川前을 점유하였고, 安東權氏는 冲齋를 모시고鷄谷[酉谷]을 점유하였고, 의성김씨는 開巖을 모시고 虎坪[海氐]을 점유하였고, 豊山金氏는 鶴沙를 모시고 五嵋[五美]를 점유하였고, 禮安金氏는 柏巖을 모시고 鶴亭을 점유하였고, 載寧李氏는 存齋를 모시고 葛山을 점유하였고, 韓山李氏는 大山을 모시고 蘇湖를 점유하였다.”고 하였다.(如李氏戴退溪占陶山柳氏戴西崖占河洄 金氏戴鶴峰占川前 權氏戴冲齋占鷄谷 金氏戴開嵒占虎坪 金氏戴鶴沙占五嵋 金氏戴柏巖占鶴亭 李氏戴存齋占葛山 李氏戴大山占蘇湖)(『與猶堂全書』第一集詩文集, 第十四卷.)
8) 국학전문연구기관은 ‘한국국학진흥원’을 말한다. 1995년 5월에 설립되었다. 한국국학진흥원은 2001년‘綾城具氏 柏潭宗宅’이 소장하던 국학 자료를 최초 受託한 것을 시작으로 안동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가문과 문중의 자료를 적극 수집하여 보관하고 있고, 문중유물특별전 ․ 기탁문중 특별전-‘全州柳氏 水谷派자료로 본 조선후기 양반가의 생활상’(2004. 5.7) ․ ‘溫溪 家의 학문세계와 현실대응’ 학술대회(2006.06.24) ․ ‘기탁문중특별전-昌寧曺氏 芝山門中’ (2007.10.24) ․ ‘西厓 柳成龍 선생 逝世 400주년특별전’ (2007.12.10) ․ ‘때때옷의 선비, 聾巖 李賢輔’ (2008.4.14)등과 같이 문중과 인물에 대해 특별한관심을 보이며 새롭게 조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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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안동의 여러 가문들 중에서 16세기 중반부터 약 450여 년간 慶尙北道安東市臨東面水谷[세칭 ‘무실’]에서 同姓의 마을을 이루며 世居하였던9)‘全州柳氏水谷派’(이하 ‘水谷派’)10)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다.수곡파는 入鄕祖인 柳城이 최초 卜居한 水谷마을을 중심으로 瓢谷[박실]․大坪[한들]․高川[고랫골]․葛田[갈밭]․馬嶺[맛재,午峴]․舟津[배나들,三峴,三山]․靑松[송생]11) 지역 등 주변일대로 가문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家學’을 바탕으로 누대에 걸쳐 가문을 이어 온 가문이다.수곡파에 대해서는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소개된 적이있었고,12) 수곡파 가학과 관련해서는 사상․학문․문화사적 방향에서 접근한본격의 관심과 연구도 있었다.13)
본고는 ‘水谷派와 그 家學’을 큰 主題로 하였다.따라서 이 주제를 연구하기9) ‘세거하였던’ : 수곡파는 1980년대 후반 국토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추진된 임하댐공사로 인하여 세거지가 수몰되는 가문의 위기상황을 맞게 되었고, 가문의 대부분이 불가피하게 離散하게 되었다. 한편 水谷派 宗宅과 岐陽書堂 ․ 定齋宗宅 등 몇몇 대표적 상징물들은 댐 수위를 고려하여 원위치에서 크게벗어나지 않은 곳에 이건 되어 그 명맥을 보존하고 있으며 또 다른 일부는 우여곡절 끝에 1987년 慶尙北道 龜尾市 海平面 一善里에 새로이 卜居하고, 그 터전을 ‘水柳寓鄕’이라 명명하면서 동성의 집성촌을재조성하였다. 구미시에 의해 문화재마을로 지정되었으며, 가구 수는 약 70여 호이다.
10) ‘수곡파’를 지칭하는 다른 말로는 ‘水柳派 ․ 무실柳氏 ․ 水谷柳氏’등이 있고, 한국국학진흥원의 기탁문중특별전을 계기로 관련 학자들에게는 ‘수곡파’로 통칭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무실류씨’라고 불리는경우가 더 많았다.
11) 瓢谷[박실] 등의 명칭은 거의가 행정구역명[世稱, 異稱]이다. 이하 경우도 같다. 그 중 대평은 수곡2동에 속했으며, 표곡은 동네 생김새가 항아리와 표주박 모양을 닮았다하여 壺谷․瓠谷․瓢溪 혹은 음차하여博谷이라 쓰이고 있었는데, 일제시대에 難字라는 이유 등으로 ‘朴谷’으로 개칭되었다.
12) 박종환에 의해 동족부락의 형성과정과 특색에 대한 연구방향으로 소개된 적이 있으나 지리․문화적 연구 성격에 가깝다. 또 안미경은 전주류씨 수곡파 종택에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기탁한 442건 1150책분량의 고문서에 대해 書誌學的 측면에서 연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안미경은 논문 머리말에서 ‘안동에 거주하는 전주류씨는 定齋 柳致明의 후손’으로 오해하는 실수를 하였다. 또한 그의 연구는 비록 전주류씨 종택의 기탁 문서를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그 중 수곡파 인물이 직접 편찬한 자료는 15% 정도에불과하기 때문에 전체를 살피기에는 매우 부족한 면이 없잖아 있다. 가장 최근에는 2008년 안동대학교안동문화연구소에서『안동무실마을-문헌의 향기로 남다』에서 수곡파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전반적으로다룬 적이 있다.
13) 2004년 5월 한국국학진흥원이 개최한 <문중기탁특별전>을 통해서이다.
이 특별전에서 정만조는 조선후기 수곡파의 문화사적 의의를 고찰하면서 ‘오늘날 다산이 다시 태어나같은 글을 쓴다면 定齋를 받드는(의미상 자칫 전주류씨 上祖가 정재(류치명)인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여지가 있은 말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정재가 퇴계-학봉-대산의 학맥을 잇는 전주류씨 수곡파의 대표학자임을 다산의 입장에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무실의 전주류씨를 반드시 넣었을 것이다.’ 라고 평가하면서 다산이 언급한 지역과 비견할 만한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기도 하였다.(정만조,「조선후기 전주류씨 수곡파의 문화사적 의의」,『조선후기 양반가의 생활상』,한국국학진흥원, 2004.) 권오영은 처음으로 수곡파의 가학에 대해 연원과 전개과정을 인물과 저술활동 중심으로 살피고 사상적으로 퇴계-학봉으로 이어지는 학맥을 계승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권오영,「전주류씨 수곡파의 가학연원과 사상적 특징」,『조선후기 양반가의 생활상』,한국국학진흥원, 2004.) 그는 또 퇴계학맥의 전개과정에서 전주류씨 수곡파의 역할과 위상에 대해 인물중심으로 접근하여 설명한 적이 있었다.(권오영,「학봉 김성일과안동지역의 퇴계학맥」,『퇴계학맥의 지역적 전개』,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04.12.30. 보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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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水谷派와 그 家學’을 큰 主題로 하였다.따라서 이 주제를 연구하기.위하여 기왕의 접근과 연구 성과를 참고하여 水谷派의 形成過程과 背景,家學淵源및 家學의 傳承過程과 展開樣相등에 초점을 맞추어 고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논의 전개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한다.
제 Ⅱ장에서는 全州[完山]를 貫鄕으로 하는 수곡파가 안동의 ‘수곡’에 卜居하게 되는 과정과 그 후 정착하는 데 배경이 되는 卜居初期婚姻關係를 살펴본 후,人物및 空間中心으로 家學의 淵源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았다.
제 Ⅲ장에서는 수곡파가 가학의 전승을 위해 후손들에게 그 기초를 마련해주는 童蒙敎育방법과 이후의 전승 상에 중요하고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家系內的師承關係를 알아보고,마지막으로 수곡파의 대표적인 ‘亭子’를 살펴봄으로서 가학전승의 공간적 역할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제 Ⅳ장에서는 水谷派家學의 展開樣相에 대해 첫째,程朱學根幹의 學問性向둘째,退溪學脈의 繼承과 ‘湖學’의 完成셋째,多樣한 著述活動을 펼치며『全州柳氏水谷派之文獻叢刊』이라는 문헌으로 드러나는 학문적 성향 넷째,仕宦과 牧民官의 모습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이러한 가학의 전개 양상은 자연스럽게 수곡파의 학문적․실천적 특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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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水谷派의 形成과 家學의 淵源
본장의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水谷派以前全州柳氏와 영남과의 인연을 살펴보기로 한다.전주류씨는 본래 全羅北道全州[完山]府의 土姓으로 始祖인 柳濕의 5子1婿가 모두 登科出仕하며 흥기하기 시작하여 麗末新興士大夫로 성장하였다.14)류습의 次孫인 柳濱15)은 前後妻가 모두 禮安에 거주하였던 易東禹倬의 외증손녀인 德山尹氏와 증손녀 丹陽禹氏였다.이를 계기로 전주류씨는 영남과의 인연을 맺었다.또 柳克恕16)․류빈 부자의 묘가 각각 예안의 虎巖洞과 영주 鐘陵에 있다.이후 3대를 지나 16세기 중반에 류윤선이 영주의 사족이었던 朴承張의 사위가 되면서 다시 본격적으로 영남과 인연을 이어갔고,류성이義城金氏靑溪金璡의 사위가 되면서 실질적으로 全羅北道全州를 관향으로 하
는 경상북도 ‘安東府人’이 되어간다.
이어서 水谷派上系17)의 由來와 系譜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이것은수곡파의 ‘上系’와 ‘上祖’를 구분하고자 하는 의도로,이후의 논의를 위해서도필요한 부분이다.『全州柳氏水谷派之文獻叢刊』의「水柳系譜」에서 수곡파의上系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全州柳氏는 고려 말 完山伯으로 受贈한 濕을 본관시조로 하였다.시조의 五子一婿가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그 둘째 아들 克恕는 直提學이고,또 그 둘째 아들 濱은 永興府使를 지냈으며,또 그 둘째 아들 義孫18)은 호가 檜軒이다.(중략)그의 後嗣子는 季4) 전주류씨가 여말 신흥사대부였음은 류습의 차자 류극서가 고려 말 新舊勢力間의 갈등으로 피살된 점과 그의 매부가 沈孝生이고 처남이 河崙이었던 점, 그의 차자 류빈이 태종 이방원과 동갑계원이었다는 사실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류빈은 태종조에 출사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5) 柳濱(1367∼1436):克恕의 子. 1386년 문과 급제. 眞寶縣監 ․ 永興大都護府使 등 여러 官職을 역임.
太宗 李芳遠과 同甲契員으로 交分이 두터웠으며 조선 창업의 功을 인정받아 개국 1등 공신에 錄勳됨.
贈職:嘉善大夫 戶曹參判 同知義禁府事 行通政大夫.
16) 柳克恕(?∼1388): 完山伯 濕의 子. 문과 급제. 내직으로 宗溥令 ․ 判典客寺事 ․ 巡軍衛當直千戶 ․ 寶文閣直提學 ․ 知製敎 역임. 외직으로 驪興郡守 ․ 楊廣道按察使 ․ 延安府使 역임. 贈職:通政大夫吏曹參議.
17) 수곡파의 上系의 기준에 대해서는 약간의 혼동이 있을 수 있다.『柳氏上代文獻』에는 ‘水柳氏上祖文獻’제하에『岐陽世稿』의 서문에 ‘水柳上祖에 회헌선생(류의손)은 전주류씨의 대다수에 선조가 되지만 기봉(류복기) ․ 도헌(류우잠) 兩代는 水柳의 上祖만 되는데, 도헌선생의 년대는 仁祖 때까지니 여러 류씨의名祖도 인조때까지로 한정하였다.’고 하고, ‘上祖’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전주류씨 다른 파들의 상조와 비교하는 차원에서 ‘수곡파만의 상조’를 기준하고 있다. 본고에서 사용한 ‘상계’라는 용어는 ‘수곡파 상조의 선대계보’를 말하는 것이다.
18) 柳義孫(1398∼1450): 자 孝叔. 호 檜軒. 濱의 子. 1426년 문과 급제. 翰林을 거쳐 集賢殿에 뽑힘. 저서 檜軒逸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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潼으로 회헌의 막내 동생 末孫의 막내아들로서 부사직 贈도승지이며 서울 墨寺洞에 주거하였다.그의 장자 軾19)은 호가 西溪이며 강릉판관을 지냈다.(중략)그의 넷째 아들 潤善20)은 引儀[校尉]를 지냈으나 벼슬을 싫어하였고,젊은 나이에 부인을 잃고 伯氏인 監司潤德21)을 따라 영주로 落南한 후 羅州朴氏22)를 娶하면서 이거하였다.그의 長子23)城이 安東臨河縣川前의 靑溪金璡의 사위가 되어 水谷으로 다시 이거하였다.(중략)그러니 류성이 수곡파의 入鄕祖이다.24)
위의 계보를 정리해보면,수곡파의 入鄕祖는 柳城이고,그의 상계는 柳濕-柳克恕-柳濱-柳義孫-柳季潼-柳軾-柳潤善까지이다.따라서 본고는 수곡파의 상계기준을 柳潤善의 代까지로 삼았으며,본고에서 논술되는 수곡파의 最上祖는 류성이 된다.그러므로 수곡파에 있어서 상계라는 용어는 수곡에 입향하기 전의전주류씨 시조까지의 계보를 말하는 것이고,상조는 단순히 當代를 기준으로수곡파 범주 안에서 入鄕祖까지의 선대를 말하는 것이다.즉 류성 代가 水谷派가문 및 가학 연원의 기준이 되는 입향 1세대이다.이후 본고에서 별도의 언급이 없는 경우 ‘세대’는 모두 ‘입향’을 기준으로 삼았다.
1.卜居過程과 婚姻關係
가문과 가학이 형성되고 발전하려면 안정적인 卜居를 바탕으로 世居基盤을마련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또 가학이 형성되어 어떤 형태로든 존재한다면,이후 그것을 傳受하여 발전시킬 수 있는 후손의 번창이 필수요건 중 하나이다.
본절에서는 조선 중기 이전 在京士族이었던 전주류씨가 당시 경상북도 榮川
19) 柳軾(생몰년 미상):자 和仲. 호 西溪. 季潼의 子. 1486년 생원시 합격. 1507년 문과에 冲庵 金淨 ․忠定公 冲齋 權橃 ․ 文簡公 柳公權 등과 동반 급제하였다. 江陵判官 ․ 弘文館典翰 ․ 仁川府使 등을 역임하였고 이조참판으로 증직되었다. 문집은 유실되어 전하지 않고 敬差官으로 陟州[삼척]를 지나며 지은시 1수만 전한다.
20) 柳潤善(1500∼1557):자 善之. 軾의 子. 通禮院 引儀를 지냈고 한양 墨寺洞에서 살다가 당시 榮川郡守에 부임하는 형 潤德을 따라 落南하여 迃川[元川, 외내]에 거주하였다. 전주류씨 수곡파의 落南祖.
21) 柳潤德(1489∼?) : 자는 善叔. 호는 南川. 軾의 子. 150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22) 류윤선은 재혼을 하였는데, 초혼처는 ‘陽川許氏 璫’의 딸이고, 재혼처는 ‘羅州朴氏 承張’의 딸이다.(『全州柳氏大同譜』卷2.)
23) 류윤선은 세 아들을 두었다. 長子는 수곡파 입향조 柳城이고, 次子는 水南位 派祖 柳垣, 三子는 柳堢이다. (『全州柳氏大同譜』卷2.)
24) 인용문 상에 敬稱과 尊稱은 배제하였고 계보와 무관한 부분은 생략하였다. (<解題 1.由來系譜>,『文獻叢刊』第1輯, 安東水柳文獻刊行會,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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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榮州]로 落南한 이후 다시 안동에서 새롭게 ‘水谷派’라는 가문을 형성하는 卜居과정에 대해 알아보고,세거기반을 마련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던 婚姻關係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수곡파는 柳城(1533〜1560)이 安東川前[내앞]의 義城金氏靑溪金璡(1500〜1580)의 長婿가 되어 妻鄕인 安東府臨河縣동쪽으로 약 15里떨어진 ‘水谷’에卜居하고 入鄕祖가 되었다.류성의 부인은 바로 김진의 長女인데,항상 ‘아름다운 딸[令女]’이라며 아끼던 玉貞(1536〜1563)이다.그녀는 鶴峯金誠一(1538∼1593)의 누이기도 하다.옥정은 15세에 수곡파로 出嫁하여 岐峯柳復起(1555〜1617)와 墨溪柳復立(1558〜1593)두 아들을 낳았다.25)류복기 형제는 바로 김진의 外孫이자 김성일의 甥姪이 되는 것이다.26)
수곡파는 당시 안동의 名門士族중 臨河[川前]의 의성김씨의 실질적인 中興祖라 할 수 있는 김진의 長婿家가 되면서 경제적 지원까지 받아 별 무리 없이복거 기반을 마련하는 듯하였다.27)그러나 류성이 28세의 나이로 요절하는 불행을 겪게 된다.28) 김옥정은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손수『家禮』를 언문으로번역해 가면서 3년 상례를 遵行하였고,상을 마치는 날부터 곡기를 끊고 두 아들을 남겨둔 채 남편을 따라 순절하였다.이 일을 계기로 그녀는 仁祖때 조정으로부터 烈女로 旌閭를 받았다.29)
류복기 형제는 각각 3,6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6,9살에 또다시 어머니마저 잃게 되어 고아의 신세가 되었다.이들 형제는 조모 羅州朴氏슬하에서 外家인 鶴峯家에 의탁되어 성장하게 된다.유년기에 류복기 형제가 외가에서 성장한 사실은 수곡파가 학문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초적인 환경을 제공해주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
「鶴峯先生行蹟」에서 류복기 형제가 처한 당시의 상황과 학봉의 생질들에대한 가르침과 보살핌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25) “淑人 姓金諱玉貞 十五歲入門 中宗三十一年 丙申十一月二十七日 誕生 明宗十八年 癸亥正月二十四日殉節 仁祖十三年乙亥旌閭”(柳鼎文,<寺正公諱城配位金氏夫人事蹟>,『文獻叢刊』首篇.)
26) 이런 이유로 지금까지도 세인들은 수곡파에 대해 말할 때 종종 ‘무실의 전주류씨는 모두 의성김씨[청계]의 외손들이다.’라고 하기도 하고, 양 가문의 관계에 대해 ‘450년 世誼’라는 말로 표현한다.
27) 류복기의 처 정씨부인은 시외조부 김진으로부터 皮穀 100석과 奴婢 1구를 받아 46년 만에 마침내 奴婢는 96구, 田畓은 274斗落으로 增殖시켰다. 참고로 당시 전주류씨 수곡파의 경제적 상황에 대해서는‘정진영,「1장 전주류씨와 무실마을 그리고 수류사람들, 4. 전주류씨의 경제적 기반」,『안동 무실마을-문헌의 향기로 남다』, 2008.’ 을 참조.
28) “公生以嘉靖十二年癸巳十二月二十二日 歿以三十九年庚申七月五日 享年二十八”(「七代祖考贈通訓大夫司僕寺正府君墓誌」,『三山文集』卷6, 墓誌)
29) 주2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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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기 형제는 10세 전에 부모님을 잃고 외가에서 자랐다.선생[학봉]께서는 보살펴 주고 길러 줌에 있어서 은혜와 사랑을 지극하게 하여,음식이나 의복,가르치는 일 등에있어서 한 결 같이 자기 자식과 똑같이 하셨다.우리들이 이미 水谷에 자리 잡고 살 때에는 모든 일을 시작하는 단계라서 뒤죽박죽 두서가 없었는데,선생께서는 더욱 더 불쌍히 여겨 돌보아 주셨다.매번 猿谷30)에서 오가는 즈음에 비록 날이 저물어 황급한 가운데서도 반드시 친히 우리들의 집에 오시어 먼저 안부를 물은 다음 祭祀의 절차를 물으셨다.그리고 농사짓는 데 관한 일에 대해서는 奴僕들을 엄하게 신칙하면서 모든 일을지시해 주셨다.또 몸가짐을 단속하고 학문을 부지런히 닦으라는 뜻으로 면려하고 경계하기를 마다하지 않으셨다.우리들이 대충이나마 글을 알고 땅과 家業을 지켜 올 수 있었던 것은 사소한 것까지도 모두 외숙의 힘이었다.그러니 평생토록 그 은공을 사모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후략)31)
다음은 학봉이 생질들을 걱정하며 쓴 편지이다.이 편지를 쓸 때는 류복기가 35세이던 1590년이다.
이별한 뒤에 모두들 편히 잘 있느냐?이곳에서 그리워하는 마음은 말하지 않아도 잘알 것이다.나는 일 때문에 머물러 지체하다가 지금에서야 비로소 배를 타고 동쪽으로떠나게 되었다.구름과 물이 하늘에 닿아 가없이 아득하기만 하니,오늘 저녁에는 어느해안에 정박할는지 모르겠다.모두들 부지런히 공부해서 늙은 삼촌의 소망에 부응하기를바랄 뿐이다.(여러 甥姪柳復起,柳復立,柳仁榮[柳崇祖증손]에게 부친 편지.경인년(1590년,선조23)32)
위의 두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류복기 형제는 10세 전에 부모를 잃고약 10년간을 외가에서 학봉의 어버이 같은 보살핌 속에서 성장하였다.성장기에 외가에서의 생활과 학봉의 가르침은 류복기 형제가 향후 복거기반을 다지는데 전반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주게 된다.
30) ‘원곡’은 학봉의 별저가 있던 곳이다. 속칭 ‘납실’이라고도 한다. “임하현 동30리 지점에 있으니 곧 선생의 별장이다. 선생이 중년 이전에 여기에서 살면서 일찍이 소나무 수백그루를 심었는데, 오늘날까지‘舍人松’이라 일컬으니, 사인으로 재직할 때에 심은 것이기 때문이다.”(‘선조10년정축선생40세’條,「학봉선생년보」,이정섭 역,『학봉의 학문과 구국활동』,학봉선생기념사업회,1993)
31) “復起兄弟 十歲前失怙恃 依養於外家 先生撫育極恩愛 凡飮食衣服訓誨之事 一如己子 孤等旣定居水谷 凡事草刱 罔有紀極 先生尤加愍恤 每於猿谷往來之際 雖昏暮忙遽 必親到孤家 先問安否 次及祭祀之節 農作之事 嚴飭奴僕 指敎凡百 又以勅身勤學之意 勉戒不置 孤等之粗辨魚魯 保守田業 秋毫皆舅氏力也 平生慕恩泣何極 (후략)” (柳復起.「鶴峯先生行蹟」,「岐陽世稿」卷2.)
32) “別後擧得安好否 此中懸懸不須言也 我因事留滯 今始解纜東去 雲水接天 杳無涯畔 未知今夕泊何岸耳 餘冀僉勤鍊 以副老叔之望” (『鶴峯先生文集續集,卷之四』, 書, 寄諸甥姪柳復起復立仁榮. 庚寅). * 번역문인용 : 한국고전번역원. * 이 편지는 학봉이 1589년 12월 일본통신사로 差任되어 가는 도중 1590년 3월 21일에 천전 본가에 들렀다가 4월 말 부산에 도착한 후 일본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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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행적에서 ‘우리들이 수곡에 자리 잡고 살 때’는 류복기가 결혼을 한 후를 말한다.33) 결혼을 한 후에도 당시의 상황이 두서가 없었기 때문에,학봉은 早失父母한 조카 형제를 위하여 祭祀․農事․謹身․學問등을 포함하여 매우사소한 것까지 보살펴 주었음을 알 수 있다.류복기 형제를 위한 학봉의 이러한 생활 전반에 대한 보살핌은 류복기의 결혼초기와 특히 이후 定居과정에 커다란 힘이 되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학봉의 가르침 중에서도 ‘勤愼’과 ‘學問’에 대한 남다른 소망은 류복기 형제와 수곡파에게 가문을 정착시키고 유지해가는 원천이 되었다 할 수 있다.수곡파 학문성향과 후대에 가학의 전개과정에 영향을 준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학봉이 조카들의 안부에 이어 ‘祭祀節次’에 대해 물었다는 점이다.
이는 일면 사소한 것 일 수도 있지만,학봉의 ‘禮’에 대해 정신34)과 수곡파 복거 초기에 ‘예’의 중요성을 제일 먼저 단속했다는 일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류복기가 학봉 사후에 외숙의 행적을 기록하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제사절차’에 대해 단속한 사실을 빠뜨리지 않고 언급한 점을 감안한다면,그 자신도복거 초기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고,학봉의 예학정신을 계승한 일면이라 할 수 있다.이 점은 수곡파가 안정적으로 가문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학정신의 일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류복기의 동생 류복립은 京畿道陽智의 큰집인 柳潤德의 손자로 출계하게 되고,35) 이후 壬辰倭亂이 발발하자 晉州城전투에 참전하였다가 36세의나이로 殉節하였다.36)이로써 수곡파의 운명은 오직 류복기에게 맡겨지게 되었33) 류복기는 약관의 나이에 醮行을 가고 결혼하였다.
34) 학봉의 예학정신과 관련해서는 김언종의 논문 ‘「학봉선생의 예학」,『학봉의 학문과 구국활동』, 학봉선생기념사업회,1993.’에서 구체적으로 논급하였다.
35) “二子長復起 號岐峯 壬辰倡義 官禮賓寺正 贈左承旨 次復立 爲伯祖參判潤德子墀後 居陽智 官宗府主簿壬辰殉節 贈吏曹參判” (「七代祖考贈通訓大夫司僕寺正府君墓誌」,『三山文集』卷6.)
36) 행장에 의하면, 1588년 무렵 큰집으로 출계하였던 류복립은 형을 따라 생가로 가서 잠시 거처한 적이있었다.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에 류복립은 학봉을 따라 참전하여 사천, 고성 등을 수복하였다.
1593년 4월 학봉이 병환으로 전장에서 별세하자 창의사 김천일, 복수장 고종후, 병사 최경희 등과 회합을 갖고 서로 힘을 합하여 성을 사수하기로 맹세하였다. 60여일의 항전 끝에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 고종후, 최경희 등은 모두 강물에 투신 자결을 하였고, 류복립은 오직 단신으로 큰칼을 들고 적에게 달려들어 분전하다 전사하였다.(“公嘗以忠義自勉爲士友所推 萬曆戊子朝廷授宗簿寺主簿不就 棄京家從伯氏岐
峯公於安東寓舍 壬辰夏四月 倭大擧兵來 朝野竄伏 時鶴峯公爲招諭使南下 公慨然撫劒 曰我世臣義當死於國遂往從之 鶴峯公喜與之 參籌畫督 諸軍遂復泗川固城等邑 其拜右觀察守晉州城 公與趙宗道李魯朴惺諸賢 常在軍中 應變決機 忠膽益烈 衆心咸服 翌年四月鶴峯公病且卒以其軍屬公 公與倡義使金千鎰復讐將高從厚兵使崔公慶會同心戮力 誓死捍禦 三里孤堞 當十萬兇鋒而尙且榰拄自六十餘日矣 是歲六月二十九日城陷我軍潰金公高公崔公皆赴江而死 公猶單身赴敵 奮劒而死 時年三十六”,『墨溪先生實記』卷2,「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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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연로한 조모와 일찍 과부가 된 숙모37)를 봉양하면서,그의 가장 큰 책임과의무는 가문을 定居시키고 부흥시키는 것이었다.따라서 그에게는 후손의 번창이 절실하였을 것이다.
류복기의 부인은 參奉盈德鄭氏溍의 딸이다.38)그는 淑夫人으로 受贈한 부인과의 사이에서 友潛․得潛․知潛․守潛․宜潛․希潛등 6명의 아들을 두게되었고,장자 우잠도 直長인 羽溪李氏纘의 딸 사이에서 橚․㮨․㮋․㰒․格등 5男을 두었으며,이하 다섯 아들은 차례대로 2남․2남․1남․4남․2남을 두게 되었다.류복기는 자신의 孫子代까지 가문을 이어줄 22명의 후손을 얻은것이다.이로써 수곡파는 3〜4世代만에 가문의 안정과 번창의 기본적이면서도중요한 요소인 人的土臺를 갖춘 셈이다.이들 자손들은 수곡파 宗家를 중심으로 인근지역으로 분파해가며 지역적 활동기반을 넓혀가기 시작하였다.39)
한편,류복기는 22명의 자손과 함께 딸 3명과 손녀 21명을 두었다.그 딸들은 차례로 東萊鄭氏․全義李氏․義城金氏에게,그 손녀들은 安東權氏․英陽南氏․安東金氏․羽溪李氏․宣城[禮安]金氏․光山金氏․興海裵氏등에게 각각 출가하면서 서서히 지역의 名門家들과 혼인관계를 맺어 가기 시작한다.40)이러한혼인관계는 점차 번창해가는 수곡파에게 지역사회에서 立地의 기반이 된다.
대체로 영남지방 양반후예들의 혼인은 相對先祖의 혈통을 절대적으로 중시한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41) 靑溪[鶴峯]長婿[姊夫]家門인 수곡파는 의성김씨와의 혼인관계를 시작으로 점차 안동을 중심으로 한 명문사족과의 혼인관계를 형성해 나갈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가졌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여기서는『全州柳氏大同譜』42)의 기록을 근거로 수곡파 후손들의 혼인관계를 확인하여 수곡파 ‘卜居初期’에 가문의 입지와 가학형성의 대외적 환경을 살펴보았다.‘복거 초기’의 기준은 입향조 柳城이후 玄孫代인 4세대까지로 하였다.
37) 柳城의 아우 水南位 柳垣의 부인을 말한다.
38) 류복기의 행장에는 그의 결혼과 관련하여 일화가 전한다. 그가 弱冠의 나이로 醮行을 가는 도중에 주변에서 신부가 盲人이고 聾啞라 하는 등 자신을 시험하는 間婚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흔들림 없이 인륜의 도리를 지켜 아내로 맞이하여 주변으로부터 분명 큰 복이 있을 것이라 칭송받기도 했다한다.
39) 수곡파는 3세대에 宗派인 柳友潛의 陶軒派, 柳得潛의 燕巖位派, 柳知潛의 龍巖位派, 柳守潛의 徑谷位派, 柳宜潛의 密洞位派, 柳希潛의 參判位派, 僉知 柳時潛派 등으로 분파되었으며, 4세대에 이르러서는 종파인 도헌파가 상대적으로 왕성한 분파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4세대의 자손의 수와 관련이 있는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40) 『全州柳氏大同譜』에 의하면, 류복기의 세 딸은 차례로 進士 石門 鄭榮邦, 進士 李明遠, 金遠에게 출가하였다.
41) 趙康熙,『영남지방 양반가문의 혼인관계』2006,경인문화사.
42) 全州柳氏時思齋大同譜所 刊行, 1976년 丙辰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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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本貫과 地域別婚姻分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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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별로는 義城金氏․盈德鄭氏․羽溪李氏․延安李氏․順興[竹溪]安氏․丹陽禹氏․安東金氏․英陽南氏․漢陽趙氏․眞城李氏․安東權氏․光山[光州]金氏․永川李氏․固城李氏등이다.이들의 거주 지역별로는 安東臨河[川前]․盈德․奉化[桃村]․醴泉[虎鳴面松谷․沙谷]․英陽․豊山[回川및 莫谷․素山]․禮安[烏川및 佳野․汾川]등이다.
(2)婚姻家門의 主要人物
1세대 柳城의 동생인 柳垣의 妻父44)權安世는 1444년 문과 급제하여 관직이 司諫院大司諫에 이르렀다.45) 그의 조부 權輗도 1516년 문과 급제하였고,1519년 己卯士禍때 靜庵趙光祖의 탄압을 반대하는데 앞장섰다.이후 관직이大司成․慶尙道觀察使등을 거쳐 吏曹判書에 이르렀다.
2세대 류복기와 그의 종제 柳解文의 처부는 참봉을 지낸 鄭溍으로 同壻사이가 되었다.또 처조부 鄭昌世는 隱窩南讚의 長婿이다.46)
3세대 류득잠의 처부 愼庵李成春은 宣祖朝에 蔭補로 참봉․찰방을 역임하였다.그는 鶴川李逢春의 아우이기도 한데,이봉춘은 퇴계의 족자로서 역시퇴계의 문인이자 權希孟의 아들인 松溪權應仁․金湜등과 교유하였고,1576년문과급제 후 成均館學諭로 임명되어 典籍에 이르고,1593년 新寧․醴泉․大邱등의 假守를,만년에 國子監에 들어가 直講에 제수되었다가 1600년 安東堤督을역임하였다.류지잠의 처부 訥軒李應은 퇴계의 제자이다.그는 천부적인 자질로 선조 때 생원이 되었고,당시 쟁쟁한 퇴계의 제자들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이후 경상도관찰사의 추천으로 通禮院引儀에 임명되기도 하였다.그러나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성리학 연구와 수양에만 전념하였다.이때 동문수학하던 학봉․月川趙穆등과 사귀면서 時局과 정치․학문을 논하며 山林學派의 길을 걸었다.또 그의 伯兄梅村李愈와 仲兄栗里李憙도 퇴계의 제자이며,모두 학문과 충절로 『襄陽誌,1616』․『仁祖實錄』․『嶠南誌』․『醴泉郡誌』․『朝鮮寰輿勝覽』등에서 그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47)류희잠의 처부 金元은 縣監을지낸 蒼筠金箕報의 아들이다.김기보는 聾巖李賢輔의 6자이자 퇴계의 제자인梅巖李叔樑의 사위이기도 하다.그는 蔭補로 彦陽․居昌․懷仁등의 수령을44) 이하 指稱은 모두 <표> 항목을 따랐다.
45) 『安東市史』권5, ‘성씨별 인물’ * 이하 안동지역 인물들에 대해 앞의 책을 참조하였다.
46) “公諱鑽 號隱窩 姓南氏系出英陽(중략) 生三男三女 男千齡萬齡億齡參奉 女吳滭鄭昌世朴舜年(후략)” (金道和,「副司果隱窩南公墓碣銘[幷序]」,『拓菴先生文集』 卷27.)
47) 한국국학진흥원, www.ugyo.net,, ‘역사체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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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하며 八弊疏를 올리는 등 당시 지방행정의 모순과 병폐를 지적하고 시정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4세대 류숙과 류위는 종형제간으로 漢陽趙氏의 英陽입향조인 趙源의 손자인 趙佺의 두 딸에게 각각 장가를 들어 同壻사이가 되었다.류직의 처조부權慶生은 惟一齋金彦璣의 제자이다.48) 류욱의 처부 金善繼는 梅隱金安繼와형제지간으로 牧使를 지냈고,김안계는 김언기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賁趾南致利․玉峯權暐․梧峯申之悌등과 교유하였다.류학은 재혼을 하였는데,첫 부인의 아버지 丹邱[또는 ‘光風堂’]權際可는 文學과 行義로 알려진 인물이다.그는 權稑의 손자이며 權善文의 아들이자,평생을 벼슬하지 않고 처사로 지냈으며,퇴계와 서애로부터 “山林掃灑의 풍도가 있다”혹은 ‘江湖高士’라 칭송되면서학봉과도 동문이었던 松巖權好文의 조카이다.권선문은 參議를 지냈으며 가학을 이어받아 寬重厚德하여 향촌의 推重을 받았던 인물로 퇴계의 外從祖가 되기도 한다.둘째 부인은 권승경의 딸로,한강의 문인이었던 權重常의 집안이다.
류격의 처부 金光澍는 金得硏의 아들로,1616년 생원시 합격하였으나 출사하지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김득연은 김언기의 장자로서 서애의 門徒이기도 하다.
한편 김언기의 三子로 숙부에게 출계한 金得礒는 1654년 사마시 합격하였는데,류격의 종제인 류은의 처부가 된다.류래의 처부 이명운은 퇴계의 문인으로 藥圃鄭琢과 교유하였으며 秉節校尉를 역임한 東巖李令承의 손자이다.또 이령승은,聾巖李賢輔의 四子이자 문과 급제 후 청송․안동부사 등을 거쳐 觀察使․右承旨등을 역임한 賀淵李仲樑의 아들이다.류지의 처부 南恕는 김언기의 次婿남태화의 아들이다.
(3)婚姻家門의 社會的地位및 學問力量
수곡파 혼인상대의 사회적 지위를 가늠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여기에서는 몇몇 가문을 선별하여 위 <표>에 표시한 관직과 학문정도및 상기 (2)항에서 언급한 인물들의 이력을 참고하여 판단하였다.
1세대 류성의 처가인 의성김씨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적이 있어 생략하기로 한다.안동권씨는 贈職으로 判書․參判․通禮등과 實職으로 承旨․判書를배출한 가문이다.특히 류원의 처가인 안동권씨는 처부와 처조부는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고,처증조부도 진사였다.
2세대 영덕정씨는 참봉을 지내거나 진사가 된 이도 있다.
48) 「門人錄」,『惟一齋先生實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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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대 혼인가문 중 우계이씨는 直長과 奉事,진성이씨는 찰방,연안이씨는 인의․교위․별좌를,순흥안씨는 郡守를,단양우씨는 奉事․參議․秉節校尉를, 안동김씨는 縣監․司僕寺正․禮賓寺正등을 배출한 가문이었다.
4세대 중 한양조씨는 直長․判決事,안동권씨는 司宰監․同知中樞,의성김씨는 牧使․判官을 배출하였다.류학의 처가 안동권씨는 증직으로 漢城參軍․判決事와 실직으로 四宰正을 배출한 가문이자 敎授도 있었고,권호문과 혈연적관계에 있었다.류간의 처가 안동권씨는 그의 妻父가 訓導였고 軍資正․參奉을 역임한 가문이었다.또 고성이씨는 參奉․判決事,영양남씨는 縣令․正郞,안동권씨는 察訪․僉正을 배출한 가문이었다.이상과 같이 수곡파의 혼인가문은 대체로 관직을 역임하였거나 지역사회에서 어느 정도 역량을 갖추었다고 할 수있다.
학문적으로 살펴보면,3세대에 진성이씨는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고,연안이씨는 이응의 두 형 이유와 이희 등이,안동김씨는 김기보가 퇴계의 제자가되어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다.4세대 류직의 처가인 안동권씨는 권경생,의성김씨는 김선계의 형 김안계가 김언기 문하에서 수학하였다.류격과 류은의 처가인 광산김씨는 모두 생원이며 학덕과 명망을 얻은 바로 김언기 가문이고,류지의 처가는 김언기의 사위 가문이다.류학의 재혼처인 안동권씨는 鄭逑의 문인이었던 권중상의 집안이다.류래의 처가인 영천이씨는 문과에 급제한 이중량과퇴계의 문인으로 정탁과 교유하였던 이령승을 배출한 聾巖후손이었다.
(4)妻外家의 本貫과 官職
4세대까지 수곡파 인물들의 처외가는 驪興閔氏,安東金氏,務安朴氏,仁洞張氏,順興安氏,慶州安氏,全州崔氏,東萊鄭氏,安東權氏,平山申氏,羅州朴氏,眞城李氏,光山金氏,英陽南氏,綾州具氏등이다.더불어 이들 가문의 관직을 보면,증직으로 참의를 지냈거나 秉節校尉․禮賓寺正․佐郞․護軍․僉正․監役․參奉등 어느 정도 그 사회적 역할을 담당한 가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수곡파는 4세대까지만 보더라도 의성김씨와의 혼인관계를 위시하여주변의 士族家門과의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가문의 족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지역별로는 의성김씨의 안동 臨河룰 비롯해 영덕․봉화․예천․영양․풍산․예안 등으로 넓혀갔다.또한 주요 혼인가문의 先代인물들은 대․소과에 급제한 후 각각 여러 대소 관직을 역임하며 사회적 지위를 어느정도 갖추고 있었다.더불어 수곡파는 복거 초기단계에 지역사회에서 인정받을만한 학문역량을 갖춘 가문들과 혼인관계를 맺었다.그 중에서도 3세대에는 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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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의 제자가 된 인물들의 가문들과 혼인을 맺고,4세대에 이르러서는 퇴계학통을 이은 김언기 가문과 직접 혼인관계를 맺거나 그의 제자가 되는 등의 밀접한관련이 있는 가문과 인연을 맺은 점은 더욱 주목을 끈다.이 점은 당시의 대체적은 영남의 학풍과도 연관이 있다 하겠는데,학문적으로 학봉의 영향아래 있던 수곡파의 자연스러운 통혼사례라 하겠다.또 무엇보다도 이러한 혼인관계는 상대의 학문적 역량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일면이다.이 외에도 당대에 名門이었던 영천이씨 가문 등과의 인연도 확인할 수 있었다.
처외가를 살펴본 결과,수곡파는 자신들의 직접적인 혼인관계를 통해 여흥민씨․무안박씨․인동장씨․경주안씨․전주최씨․동래정씨․평산신씨․나주박씨․능주구씨 등과 간접적인 결연을 맺었다.잘 알다시피,일반적으로 족보에그 배우자의 外祖[妻父의 妻父]를 기록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그 중에서도 母系의 가문적 배경을 중요시하였다는 단적인 증거이다.이들 가문의 관직 현황만을 보더라도 어느 정도 그 사회적 역할을 담당한 가문이었다
고 할 수 있는데,수곡파에 있어서 직접적인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적다하더라도 혼인을 통하여 간접적인 족적결속을 맺음으로써 일정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전체적으로,수곡파에 있어서 당시 안동의 여러 가문과의 혼인관계는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그 중에서도 중요한 점은 수곡파 외부로 가문의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在地士族으로서 지위를 형성할 수 있었다는점이다.49)수곡파에 있어서,가학은 당시의 명문가․문벌가와의 혼인관계를 통해서도 자연적인 학문적 교유관계가 구축되었고 발전시켜나갔음을 간과할 수없다.50) 따라서 본고는 婚姻關係에서 발전한 學緣關係[혹은 학연을 위한 혼인관계]에 있어서,수곡파 복거 초기 대표적 인물들의 혼인관계를 선별적으로 살49)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양반을 크게 중앙의 ‘在京官人’과 지방의 ‘在地士族’으로 구분한다.
재경관인은서울을 중심으로 중앙정계를 무대로 삼고 재지사족의 생활터전은 鄕黨과 村落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수곡파는 문과 급제자 10명을 포함하여 다수의 과거급제자도 배출하였고 관직을 경험한 자도 있었지만,거의 전형적으로 향촌을 중심으로 형성 발전한 ‘在地’ 문중이라 할 수 있다. 수곡파 문중에서 대내적으로 발행한「全州柳氏 水谷派 名人錄」등을 살펴보면, 불천위 5인․일천 5인․문무과 13인․생원과 진사 33인․안동 좌수 별감 40인․항일투사 및 삼일독립운동 29인․음사 39인․증직 21인 등이며, 물론 항목 사이에
중복된 자들도 있다. 반면 문집 혹은 遺稿의 유무를 기준으로 분류된 ‘文人’ 의 숫자는 140명이나 되는데, 이것이 이들이 ‘在地’ 하면서 대내외적으로 학문적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었던 가문이었다는 반증일것이다.
50) 이와 관련하여 문화인류학자 故 趙康熙 교수는 문중이 통혼의 단위가 되어 村落의 범위를 넘어서 이루어지는 조선시대 양반후예들의 혼인관계가 어떤 문화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지를 밝혀내고자 노력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전통적인 용례를 통해 영남지방 양반가문의 혼인에 대해 血緣, 地緣, 學緣의 관계에서 분석한 적이 있었다. (趙康熙,『嶺南地方 兩班家門의 婚姻關係』, 경인문화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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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보았다.이러한 혼인관계는 수곡파가 복거 초기단계에 대외적으로 안정적인정착을 도와주었을 뿐 만 아니라 지역적 위상도 제고할 수 있었다.
이상으로 본고는 수곡파 入鄕祖부터 4세대까지 그들의 복거 과정과 혼인관계를 통해 가문과 가학의 형성 환경을 살펴보았다.이는 수곡파가 복거 초기에 가문과 가학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형성해 갈 수 있었던 대외적인 환경들이라고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이와 같은 환경을 갖춘 수곡파가 안정된 복거 기반을 유지하면서 점차적으로 형성하기 시작한 수곡파의 실질적이고 내부적인 학문연원은 어디에있는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또 그 학문의 연원과 정도가 ‘가학’으로서 전승할 만한 가치를 지닌 것인지의 여부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이와 관련하여 본고는 수곡파 가학의 연원에 대해 인물과 공간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한다.
2.家學淵源으로서 岐峯柳復起父子와 岐陽書堂
특정가문의 가학이 있다고 하면,그것을 대표적으로 증거 할 수 있는 자료는 그 구성원들이 남긴 문집이나 저술일 것이다.수곡파와 관련해서,그들 가학의 결과는『全州柳氏水谷派之文獻叢刊』(이하『文獻叢刊』)51)으로 대표될 수있다.따라서 본절에서는 수곡파 가학의 결과가 있기까지 어디에 연원을 두고시작되고 형성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가학의 연원을 탐색하려면 가문의 最上祖인물의 학문정도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수곡파 가문의 입향조는 류성이지만 2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 확인할 만한 자료가 없다.다음으로 수곡파의 실질적인 중흥조는 류복기이다.그러므로51) 『文獻叢刊』은 그 명칭에 있어『河東叢書』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河東’은 ‘임하의 동쪽, 즉 수곡’이라는 뜻이다. 수곡파에서 恬庵 柳淵龜가 상조의 행적을 편성하면서『河東世蹟』이라 제명하였고, 故 李家源 박사가 “貴先祖 岐峯(柳復起)선생의 후손에는 문인과 學士가 배출되었고, 따라서 수많은 저서를 남겼으니 그것들을 年代的 순서로 정리하여『河東叢書』를 간행한다면 반드시 좋은 자료가 될 것이 아니겠는가!”(『全州柳氏 水谷派之文獻叢刊』序文)라고 한데서 연유하기도 한다.
최초의 간행계획은 총 25권이며, 1983년부터 1991년까지 순차적으로 13권이 간행되었다. 13권의『文獻叢刊』에 수록된 문집을 남긴 문인 ․ 학자의 수는 대략 37명 정도이고, 미간행된 것까지 포함하면 약 80여명의 숫자가 된다. 참고로 한문학 관련자료 중 ‘叢刊’의 개념으로 현재 가장 대표적인 것이『韓國文集叢刊』과 『韓國歷代文集叢書』 등이 있다. 모두 ‘문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수곡파는 ‘문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있다. 이것은 수곡파의 저술이 대부분 ‘문집’의 형태로 발간되었으나 일부 필사본이 ‘유고’로 전해지는경우도 있었다. ‘문집’고유의 의미를 감안한다면, 수곡파에서 ‘유고’ 및 ‘별저’까지 포함하여 수록하였기때문에 ‘문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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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學問’淵源과 程度를 반드시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류복기가 生長하여 수곡파의 토대를 마련하던 당시는 학봉에게 학문을 배우고 수학하며 아직 후대에 전해지 않은 시기이기 때문이다.따라서 ‘류복기 자신의 학문 연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그 정도를 살피고자 한 것이다.
한 개인에 대한 학문 연원과 정도를 살피려면,일반적으로 文集이나 著述을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그러나 류복기의 문집은,대부분 화재로 소실되어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고,52)그나마 남아있는 일부와 다른 文籍에서 발견된 漢詩2수 및 附錄을 합친『岐峯逸稿』가 전해진다.그러나 그 양도 극히 소략하여『岐陽世稿』53)에 편입되어 간행되었다.
『岐峯逸稿』중에 류복기의 작품은 漢詩「書齋韻二首」(2수)․「八公山諸義將會盟」(2수),「公山聯句」(1수)등 총 5수만이 전하고,書「與族兄永詢書」․「上鶴峯先生」등 2편과 雜著「鶴峯先生行蹟」1편에 불과하다.부록에는 그의교유인물들과 후손들이 지은 輓詞․祭文․墓碣銘․遺事․行狀등을 편집하여겨우 문집의 면모를 갖춘 정도이다.따라서 그의 학문 연원이나 성취의 정도를 밝히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먼저,貞窩黃龍漢이 지은 류복기의 行狀을 근거로 생애와 행적을 대략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공의 휘는 復起이고 자는 聖瑞이고 岐峯은 그 호이다.(중략)공은 嘉靖乙卯生(1555)으로서 6,9세 때 연이어 考妣를 여의고 외가에서 교육을 받았다.(중략)醮行을 가는 도중에 신부가 귀머거리에 盲啞라는 말이 들리니,어른들이 놀라서 수레를 돌리고자 하였으나 공은 義理상 그럴 수 없다고 하며 行禮를 하고 보니 그 말을 전한 자가 잘못이었다.
외숙 학봉선생을 좇아 수학해서 文學과 德行으로 존경을 받았다.(중략)相國柳永慶54)은 겨우 8촌을 넘는 족친으로서 공의 이름을 사모하여 여러 차례 불렀으나 공은 權門이라는 이유로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거처하는 곳 남쪽 언덕에 書室을 짓고 ‘岐陽書堂’이라 명명하고,날마다 그 안에서 거처하면서 경전을 공부하고 후진을 훈회하면서 일생토52) “府君隱居求志 未嘗聞名於當世 家又失火 遺集燒盡 無以傳信於來後 惟是紀行 乞言責在後人 而因徇至今未有所屬 深恐世代愈下聲響寢遠 則並與其掇拾萬一者 而終歸於泯沒矣”(「遺事」,『岐峯逸稿』附錄.)
53) 『岐陽世稿』 : 류복기의 5대조 柳義孫 문집『檜軒逸稿』, 류복기 문집『岐峯逸稿』, 류복기의 장자 류우잠 문집『陶軒逸稿』 등을 합편하였다.
54) 柳永慶(1550~1608) : 조선 중기의 相臣. 본관은 全州. 자는 善餘, 호는 春湖. 참봉 儀의 아들이며, 예조참판 永吉의 동생이다. 1572년 春塘臺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 등 淸要職을 역임하였고 정승에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간으로서 招諭御史가 되어 많은 의병을 모집하는 활약을 보였다. 선조 말년에 왕의 뜻을 따라 永昌大君을 광해군에 대신하여 옹립하려 하였다. 1608년 선조는 죽기전에 영창대군을 부탁하였는데, 그는 遺敎七臣의 한 사람이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小北의 영수였던 그는 大北의 영수인 觀松 李爾瞻과 萊菴 鄭仁弘 일파의 탄핵을 받고 경흥에 유배되었다가 賜死되었다. 유생의 명단인 靑衿錄에서 그의 이름이 삭제되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官爵이 복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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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은거하면서도 원망과 후회가 없었다.정사년(1617)2월 비로소 禮賓寺正에 제수되었으나,그해 3월 23일 正寢에서 돌아가니 향년 63세였다.임하현 동쪽 林塘산 丙향의 둔덕에 장사지냈다.후에 좌승지로 증직되었고 ‘岐陽里社’에 향사하였다.55)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류복기의 생애를 간략하게 다시 정리해보기로 한다.
그는 1555년에 태어나 열 살이 되기 전 양친을 모두 여의고 외숙이자 스승이었던 학봉을 좇아 수학하였고,弱冠에 부인을 맞이해서는 인륜의 의리를 지키고자 하였다.만년에는 서당을 설립해 자신의 수양처로 삼고 후학을 가르치면서 여생을 보내다가 1617년,6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주변으로부터 문학과덕행으로 존경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구체적으로 그의 성품과 학문 정도를 알아보기로 한다.
다음은 류복기의 행장 중에서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기개가 있어 일에 민첩하고 義에 용기가 있었다.임진년 兵亂이 일어나자 공은 廬江書院[虎溪書院]에 가서 동지를 모아 의거를 首倡하니 여러 郡에서 응하였다.드디어 예안의 翰林金垓를 帥將으로 추대하고 안동의 副率裵龍吉을 副帥로 삼았다.공은 典餉參謀였다가 다시 정제장이 되어 협찬하여 처사를 정당하게 하였다.그해 겨울 예천 松邱에서 적을 쳐서 포로로 잡고 죽인 자들이 많았다.계사년(1593)에 밀양으로 진영을 옮겨적의 공격을 막았으나 경주에 이르러 수장 김해가 진영에서 죽자 군의 사기가 떨어졌다.
공은 더욱 분발하여 도내의 여러 義士들과 팔공산에서 會盟하였다.정유년(1597)에는 방어사 郭再祐공을 따라 창녕 화왕산성을 지켰다.군영에 있은 지가 전후로 6∼7년이었으나 조금도 해이한 적이 없었고 병란과 흉년으로 굶어 죽는 사람들이 도로에 깔리자 공은 길옆에 솥을 걸고 죽을 끓여 유민들을 날마다 먹이니 목숨을 보존한 자가 매우 많았다.56)
인용문에서 보듯이,그는 기개가 있고 義에 용기가 있었다.그는 이러한 성품으로 1592년 38세 되던 해,임진왜란이 勃發하자 제일 먼저 廬江書院57)에서
55) “公諱復起 字聖瑞 岐峯其號也.(중략) 公以嘉靖乙卯生 八九歲時 連喪考妣 鞠於外家 (중략) 旣醮取婦 道聞婦聾瞽啞 長者驚欲回車 公義不可 遂前委禽 實傳者妄也 從舅氏鶴峯先生學 以文學德量見重 (중략) 柳相國永慶於族纔逾緦慕公名 屢欲屈致之 公以門熱終不顧 築室於所居之南厓 命曰 岐陽書堂 日處其中 料理舊聞 訓誨後進 沿齒坎壈而無怨悔也 丁巳二月 始除禮賓寺正 以其年三月二十二日 考終于正寢 享年六十三 葬臨河縣東林塘山丙向之原 後贈左承旨 享岐陽里社”(「岐峯柳公行狀」,『貞窩集』卷10.)
56) “有氣幹 遇事敏給 勇於爲義 壬辰兵起 公出廬江書院會同志首倡義旅 數郡響應 遂推禮安金翰林垓爲帥 安東裵副率龍吉爲副 公以典餉參謀 復爲整齊 將恊贊機宜 其冬 抄賊於醴泉之松邱 多所捕斬 癸巳 移陳于密陽以遏其鋒 至慶州金公歿于陳 軍中喪氣 公益奮與道內義士會盟于八公山 丁酉 從防禦使郭公再祐 守昌寧之火旺城 前後在軍 凡六七年 未嘗少懈 兵荒之後 餓殍載路 公於道傍設釜作糜粥 流民日就餔之 全活甚衆”(「岐峯柳公行狀」,『貞窩集』卷10.)
57) 廬江書院 : 경북 안동시 임하면 소재. 경북유형문화재 제35호. 안동 지방의 대표적인 서원으로 157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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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들을 모아 창의한 후 醴泉․密陽․慶州․八公山등으로 수차례 진영과 임무를 옮겨가며 종군하였다.58) 또 1597년 43세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忘憂堂 郭再祐를 따라 종군하여 火旺山城을 지키는 등 전공을 세웠다.두 차례 전란후에는 유민을 구휼하는 데 적극적으로 힘썼다.
류복기는 전장에서 6여 년을 의병으로 활동하였는데,그가 팔공산에서 여러의병장들과 회맹한 후 지은 시를 통해 다시 한 번 충절과 기개의 면모가 드러난 救國意志를 엿볼 수 있다.
하늘이 이 나라에 불운을 내리시어 天以東方値否運
섬 오랑캐 감히 小中華를 어지럽게 하네. 島夷敢擾小中華
그 누가 능히 나라를 위해 干城將이 되어 誰能爲國干城將
三都의 왜적들을 말끔히 소탕할까. 掃盡三都一隊倭
군왕께서 西行하니 차마 말로 못하겠고 忍說鸞輿西路幸
신하된 도리로 복수할 때 이르렀도다. 爲人臣子復讎時
창을 베고 칼을 밟는 끝없는 憤恨으로 枕戈蹈刃無窮恨
江河를 터트리듯 한 칼에 씻어내리.59) 欲決江河一洗之
그는 또 8圖8幅의 의병용 지도를 직접 그려 의병 활동 시 전장에서 활용하기도 하였는데,이를 통해 그가 병법․지리 등에도 식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60)
그런데 행장에서 류복기가 수학기에 학문적으로 학봉의 가르침을 받았고,만년에는 서당을 지어 학문에 전념하는 등 존경의 대상이었다고는 하지만,그안동부 동북쪽 廬山村 五老峯 아래에 있는 白蓮寺 절터에 廬江書院을 세워 퇴계의 위패를 봉안하고 도학을 강론하였는데, 1605년 대홍수로 인해 유실되자 중창하였다. 숙종 2년(1676)에 현판을 하사하여‘虎溪書院’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安東의 鄕校와 書院』,安東地域鄕校書院發展協議會, 한빛, 2005. 참조) 이 서원은 학봉과 서애의 從享問題를 불러일으킨 소위 ‘屛虎是非’의 虎派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고,그 시비의 전말을 호파입장에서 기록한 ‘廬江顚末’ 등의 제목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원래 月谷面 道谷洞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해 1973년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58) 近始齋 金垓의『鄕兵日記 (壬辰·癸巳)』1592년 8월 13일 條에는 餉軍都監, 동년 9월 3일 조에는 本陣整齊將, 동년 11월 5일 조에는 道軍官을 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59) 「八公山諸義將會盟」,『岐峯逸稿』, 詩.
60) “이 지도첩은 왕고부군(류복기)께서 손수 모사해 작첩한 것인데 세월이 오래되고 글자가 안보여가니불초 榰는 이것이 없어져 전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개고하려는 계획은 하면서도 그 방법도 모르고 손재주도 없어 감히 하지 못하다가 숙종 15년(1689) 여름에 호남 綾州에 목사로 부임하니 하급관리 李應梅라는 사람이 자못 글씨에도 능하고 모사하는 기술이 있어 본첩을 주고 改圖하라고 하였다. 그는 먼저 첩 위에 潔薄한 密紙를 놓은 다음 물에 담가서 배접을 하고 글자를 보충하여 신첩을 하니 중신되었다.”
(후략) (柳榰,『岐峯逸稿』,附錄. 柳正基 譯,『水柳典籍要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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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을 놓고 볼 때 그 학문의 깊이가 어느 정도였는지 여전히 가늠하기 힘들다. 따라서 그의「墓誌」와 寒岡鄭逑[文穆公]의 인물평과 교유인물들의 輓詞를 통하여 그 학문정도를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다음은 三山柳正源이 지은「墓誌」의 일부이다.
만년에는 거처하시는 곳 남쪽 언덕에 집을 짓고 ‘岐陽書堂’이라 명명하고 날마다 그곳에 거쳐하시면서 書史에 흠뻑 젖으시어 사람들이 그 끝을 살필 수 없었다.대개 그 덕성은 深厚하고 操行이 확실하셨다.寒岡鄭逑선생이 매우 敬服하여 말하기를 “류모는가히 心性을 논할 만하다.”고 하였고,息庵黃暹공은 추천하여 말하기를,“그 곧음이 화살과 같다.”고 하였으며,瓢隱金是榲공도 역시 “그 덕행과 학식이 사라져서 전함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니,그 존중됨이 이와 같았다.61)
아래의 글은 정구가 1607년 1월,65세에 安東府使가 되었을 무렵,안동부의여러 儒生들에게 諭示한 것이다.
府의 유생들이 心學에 뜻을 두고 通讀하는 모임을 마련하니 지극히 가상하다.오직 老守는 스스로 득력한 곳이 없어 장차 제현들을 바르게 지도할 수 없음을 걱정하여 밤낮으로 삼가고 두려워하였으나 제현들의 마음을 아끼고 사모하니 또한 스스로 그만둘수 없을 따름이다.다만 講會의 제군은 모두 나이 어린 후학이고,그 중 연로하면서 크게 성취하고 기질이 넓고 순박함이 권순․류복기 등과 같은 24명은 함께 한 자리에서이 모임을 귀하게 생각하면서도 오히려 모두 물러나 앉아 좇아 따르기를 기꺼이 하지않으니 어찌 老物은 함께 배우기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후략)62)
위 두 글에서,류복기는 만년에 書史에 심취하여 그 학문의 끝을 엿볼 수없었고,심후한 덕성과 行身에 志操가 있었다고 평가받고 있다.또 주변의 교유인물들에게도 근후한 심성뿐 만 아니라 학식과 덕행으로도 인정받았다.특히諭示文에서는 류복기가 당시 50세를 넘긴 나이에 향당에서 학문적 성취를 이룬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음은 류복기에 대한 愛景堂金潗과 金得硏의 輓詞이다.
61) “(전략)晩年築室于所居之南岸 命曰岐陽書堂 日處其中 酣飫書史 人不能窺其際 蓋其德性深厚 操履確實寒岡鄭先生逑 甚敬服 嘗曰 柳某可與論心 黃息庵暹薦曰 其直如矢 金瓢隱是榲 亦謂行誼學識 不可泯沒無傳其見重如此(후략)”(柳正源,<六代祖考通訓大夫禮賓寺正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府君墓誌>,『三山文集』卷6.)
62) “俯中儒生 有意心學 方設通讀之會 至爲嘉尙 惟恐老守自無得力之地 將不能導迪諸賢 夙夜兢惕 而愛慕諸賢之心 則又不能自已焉耳 但講會諸君 皆是年少後學 而其中 老大成就 氣質庬淳 如權淳柳復起二十四員 合在席上 以珍斯會 而尙皆退坐 不肯追隨 豈不以老物不足與共學也耶”(후략) (<播諭安東諸生文>,『寒岡先生文集續集』卷5,「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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早年부터 강학하며 함께 노닐었는데 청순한 그 기질은 하늘에서 나온 것.
청춘의 모든 사업은 詩書안에 두었고 만년의 생애는 자연과 함께 했네.
자손들 번성하니 이후 경사 원대한데 유수 같은 세월은 밤 배따라 흘러가네.
이제 수곡63)에 남은 어른 사라지고 백발로 글 지으니 눈물이 황천에 이르네.64)
그대는 동갑의 나의 친구로 서로 종유한지 사십 여년.
初試에서 만나 얼굴 익히고 文會에서 몇 번이나 함께 하였네.
함께 금란의 계를 맺고 서로가 철석처럼 단단하길 기약했네.
서재에서 같은 베게 담소를 나누고 서원에서 등불 마주하며 잠들었네.(후략)65)
위 만사에서는 류복기가 청년시절 교유인물들과 함께 詩書를 강학하고 과거에 응시하거나 文會에서 학문한 모습들이다.
한편,류복기는 학봉과 같은 직접적인 학문연원과 더불어 그 내면에는 또다른 정신적 연원이 있었다.수곡파의 상계에는 始祖柳濕이후 7世柳潤善까지仕宦과 學問으로 명성을 얻었던 이들이 많았다.그 중 류복기가 報本追遠의 의지로 정신적인 연원을 삼은 대표적 두 인물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기로 한다.
그 첫 번째 인물은 檜軒柳義孫이다.그는 1419년 생원시에 합격한 후 世宗朝에 式年文科同進事및 文科重試乙科에 급제하고 世子侍講院左輔德․都承旨등을 역임하면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그는 또 文學에 조예가 깊어『東文選』에 작품이 실릴 정도였고66),敬齋南秀文․權採와 함께 文章과 德行으로 集賢殿三先生으로 일컬어졌다.67)이런 이유로 수곡파는 류의손을 ‘文學의鼻祖’로 추숭하고 있다.
또 眞一齋柳崇祖(1452∼1512,文穆公)는 1489년 式年試丙科에 급제하여 校書館正字에 발탁되고 師儒錄에 들었다.그는 18년 동안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대부분의 벼슬은 거의 성균관에서 역임하였고,靜庵趙光祖등 신진유림
63) 수곡 : 원문의 ‘河上’을 옮긴 것이다. 즉 수곡은 ‘임하의 위쪽’에 있다.
64) “講學同遊自早年 淸淳氣質出天然 靑春事業詩書裏 暮世生涯水石邊 蘭玉滿庭餘慶遠 光陰如水夜舟遷 從今河上無遺老 白首題詞淚徹泉“ (金潗, <輓詞>,『岐峯逸稿』.)
65) “君是同庚友 從遊四十年 試圖初識面 文會幾隨肩 共結金蘭契 相期鐵石堅 黌齋聯枕話 廬院對燈眠” (金得硏, <輓詞>,『岐峯逸稿』.)
66) <誡酒敎書>(「敎書」,『東文選』,제24권.)와 <平海郡風月樓記>(『東文選』,제82권.) 등이 있다.
67) “류의손 선생, 권채 선생, 文僖公 辛碩祖와 南秀文 선생 등이 함께 집현전에 있으면서 그 문장이 다 같이 일세에 유명하였는데, 남선생을 더욱 세상에서 중하게 추대하였다.『高麗史節要』의 초고는 대부분남선생의 손에서 나왔다. 제공들이 모두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柳先生義孫 權先生採辛文僖碩祖 南先生秀文 同在集賢殿 文章齊名一時 而物論尤推重南先生 高麗史節要初草 大抵皆出於南手也諸君皆不大達 惜也”,『筆苑雜記』제1권, 徐居正 撰.) * 번역문 전재 :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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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다수 배출시켰으며 性理學風을 크게 북돋우었다.68) 『書經』․『易經』․『禮記』등에 밝았고,69)특히 天文과 曆象에 통달하여 손수 혼천의를 만들기도 하였다.특히,그가 필생의 정력을 쏟아 만든『七書諺解』는 언해의 효시로 후학들에게 큰 공적을 남겼다.70)또한 그가 벼슬길에서 강직함과 직언을 서슴지않았던 언간의 정신은 또한 후학들에게도 모범이 되었다.
류복기는 류의손․류숭조 등으로 대표되는 先代名祖의 명성을 이어서 ‘水谷’에서 재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내면에 잠재해 있었고 특히,류의손을 수곡파 內의 ‘精神的淵源’으로 삼고 그 유업을 후손들에게 전하여 대대로 계승하고자하였다.
이 점은 류복기에 대한 后山李宗洙의 岐陽書堂追遠祠常享祝文과 陶軒柳友潛의 시를 통해 다시 한 번 잘 드러난다.
檜軒선생의 家統을 이어 받고 鶴峯옹의 제자로서깊은 덕 후손에게 전해주시니 永世라도 잊으리까!71)
위의 축문에는 수곡파 특히,류복기의 내면적 연원이 류의손에게 있으며,직접적으로는 학봉의 학문을 전수받고 있음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다음은 류우잠이 아버지 류복기와 류의손을 추모하여 지은 시이다.
을해년은 바로 나의 회갑이 되는 해이다.늘그막에 온갖 생각이 다 사라지는데 매일68) “성균관을 살펴보았다. 상이 직접 先聖에게 酌獻하고 명륜당으로 물러가서 유생들과 함께 經의 뜻을강론하였다. 하교하기를, ‘經術이 근본이고 詞章은 말단이다. 지금 세상의 선비들이 모두 말단으로 달려가 근본을 추구하지 않으니, 경서를 가지고 묻고 논란한 후에 三所로 나누어 강경하여 선비들을 시취하도록 하라.’하였다. 이어 學田 100결을 하사하였다. 대사성 柳崇祖가 유생들을 거느리고 箋文을 올려 사은하고,《綱目十箴》및《性理淵源撮要》를 올리니, 상이 보고 훌륭하게 여겨 두 책을 간행해서 조정의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명하였다. 류숭조를 가자하고 金帶와 表裏 한 벌을 하사하였다. 다시 하교하기를, ‘성균관에 유생이 많이 모여 공부한다고 듣고 있었는데, 과연 듣던 대로이다. 쓸 만한 자를 뽑아아뢰라.’하였다. 이에 성균관이 趙光祖, 金錫弘, 黃澤 세 사람을 천거하니, 상이 銓曹에 명하여 調用하게하였다.(『國朝寶鑑 』제18권, 중종조 1, 6년(신미, 1511).) *번역문 전재 : 한국고전번역원.
69) “柳崇祖 과거에 급제하여 成均館 同知를 지냈다. 經學에 정통하고 사람을 가르치는 데 부지런하였다.”(『新增東國輿地勝覽』 제33권, 全羅道 全州府) *번역문 전재 : 한국고전번역원.
70) “[선배들의 著述] 우리나라 사람들은 재질이 거칠고 둔해서, 비록 글을 읽었다 하더라도 선배들의 저술이 큰 공력을 들인 것인 줄을 모르고 대부분 인몰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후인들이 저술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없다. 예를 들면, 經書의 諺解는 참의 柳崇祖로부터 시작되었다고 眉菴 柳希春이 日記에서 말하고 있다.” (“前輩著述 東人鹵莽 雖云讀書而不知前輩著述用工之深 而率多湮沒 後人無從而知之 如經書解 始于柳參議崇祖 柳眉菴日記言之矣”(<橡軒隨筆下 戶牖雜錄並附>,『順菴先生文集』卷13,「雜著」.)), *번역문 전재 : 한국고전번역원.
71) “檜爺裘箕 鶴老衣鉢 德深裕後 永世可忘”(<常享祝文>,『岐峯逸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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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홀로 서재로 가서 아버님께서 손수 심은 檜나무를 마주하여 가지를 잡고서 감흥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더욱이 어버이를 모시지 못한 회한이 커졌다.감히 남기신 자취를본받아 또 옛 나무 옆에 작은 회나무를 심어 훗날의 기념으로 삼고자 하여 시 일률을지어 여러 아우와 子姪들에게 보이노라..72)
생각건대 옛날 어버이 회갑 되시던 해에 憶昔先君換甲年
손수 창연한 회나무를 뜰 앞에 심으셨네. 手移蒼檜野堂前
천 가지 빽빽한 잎 지금 땅에 드리웠고 千枝密葉今垂地
열 길 웅장한 재목 이미 하늘을 찌를 듯. 十丈䧺材已拂天
桑梓비록 微小하나 오히려 우러러 공경하고 桑榟雖微猶敬止
선조가 심으신 것 어찌 차마 상하게 하리오. 祖先遺植忍傷焉
백년의 쇠령에도 을해년 감회 새로 나니 衰齡亦感㫋蒙歲
옛 나무 곁에다 새 뿌리를 이어 심네.73) 繼種新根舊樹邊
위의 시는 류우잠이 세상을 떠나던 해에 지은 것이다.그는 이 시에서 1575년 아버지 류복기가 류의손을 추모하며 심었던 檜나무의 의미를 계승하고 있다.즉,그 자신도 아버지가 심었던 자리 곁에 새로운 회나무를 심어 다시 한번 그 유지를 후대에 전하고자 하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결론적으로,류복기의 사상과 학문적 연원은 무엇보다도 혈연적 관계에 있는 의성김씨,특히 학봉의 사상과 학문이었다.이것은 그의 직접적인 연원이었고,내면적으로는 류의손 등의 名祖를 연원으로 하고 있다.하지만 그것은 수곡파의 복거 당시를 기준했을 때,류복기 자신만의 학문연원이었으며 뿌리였다.
그는 이렇게 학봉을 연원으로 하는 수곡파 가학의 바탕을 만들고 자신의 호를‘岐峯’으로 하였다.호에 대한 별다른 설이 없지만 추측컨대,‘기봉’의 의미가 선대가 터를 잡은 鵝岐山74)아래에서 실질적인 중흥조로서 수곡파의 봉우리가 되고자 했고,외숙인 학봉의 가르침을 받고 성장한 만큼 아기산 아래 ‘水谷派의鶴峯’이 되고자 했기 때문이 아니었는지 유추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따라서 그는 퇴계를 嫡傳한 학봉 문하에서 성장하고 수학하면서 전수받은 사상과 학문
72) “乙亥之歲 乃余之換甲也 桑楡已晩 百念俱灰 每於日夕獨徃書齋 對先人手植之檜 未嘗不攀枝興感 益增風樹之懷也 敢效遺跡 又植小檜子舊樹之側 以爲他日記年之地 因草一律 以示諸季及子姪輩”(<種檜 幷小序>,『陶軒逸稿』.)
73)<種檜 幷小序>,『陶軒逸稿』,詩.
74) 수곡파의 최초 복거지역인 수곡[무실]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역이다. 마을 뒤에는 태백산-일월산으로 이어지는 한 자락이 남으로 뻗어와 ‘아기산’을 이루었고, 앞에는 渭水가 흐른다. 『永嘉誌』에는 ‘阿岐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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및 류의손 등의 정신적 연원을 자신의 후대에 전승할 수 있는 방법적 모범을찾고자 하였을 것이다.그것은 바로 ‘書堂’의 건립이었다.
書堂은 조선시대 공교육기관인 鄕校와 함께 향촌 사회에 설립된 초·중등 단계의 사교육 기관이었던 書院의 前身이기도 하였다.또 서당의 주요 기능은 단순히 동몽교육의 기능을 벗어나 점차 학자 및 선비들이 藏修하는 중요한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퇴계가 61세에 陶山書堂을 지어 자신의 수양과 후학의 강학의 장소로 삼았던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수곡파 가까이로는 류복기의 외조부 김진이 일찍이 傅巖書堂과 臨川書堂등을 열어 문중 및 향촌 자제들의 교육에 치력하여75)아들 오형제가 모두 대․소과에 합격하면서 세칭 ‘川金五龍’으로 불리며 천전의 의성김씨 문호를 여는데 크게 기여했다.76)
이러한 모범을 가장 가까이서 보고 경험했던 류복기는 61세가 되던 1615년에 비로소 ‘岐陽書堂’을 건립하게 된다.77)기양서당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2년전에 건립한 것으로,건립당시에는 만년에 이곳에 거처하면서 자신의 공부와 후학을 양성하는 개인 書齋및 家塾의 형태였음은 그의 행장 등에서도 확인하였다.100여년 후 후손들이 1차 重修하여 서당의 면모를 갖추었고,78)1752년 서당 뒤에 追遠祠를 건립하여 祠宇의 형태로 발전시켜 수곡파 文學의 鼻祖로 받들어지는 류의손과 중흥조 류복기를 祭享하였다.79)또 다시 100여년 후 1860년
75) “부암 옆에 서당을 지어 자제 및 마을의 어린 선비들을 모아 학칙을 마련하여 과정을 엄하게 하고 거듭거듭 친절히 가르쳐 싫어하거나 게을리 하지 않도록 하셨다. 이와 같이 하여 수십년 동안 끊임없이계속하시니 학도들이 공부하기를 힘써 글 읽는 소리가 온 경내에 들렸다.(傅巖傍構書堂一區 聚子弟及鄕黨蒙士 立學令嚴課程 敎誨諄諄 不厭不倦 如是積數十年不輟 學徒多興起 絃誦之聲 聞於一境)” (金誠一,<靑溪先生行狀>,『聯芳世稿』 國譯 卷1, 중문, 김시황 역, 1992. )
76) “아들 克一은 嘉靖 병오년(1546)에 문과 급제하여 前密陽府使였고, 차자 守一은 을묘년(1555)에 생원을 했으며, 삼자 明一은 갑자년(1564)에 생원이 되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사자 誠一은 隆慶 무진년(1568)에 문과 급제하여 議政府 舍人이 되었고, 오자 復一은 경오년(1570)에 문과 급제하여 형조좌랑이 되었다.” (“男克一 登嘉靖丙午文科 前密陽府使 次守一 乙卯生員 次明一 甲子生員 早卒 次誠一 登隆
慶戊辰文科 議政府舍人 次復一 登庚午文科 刑曹佐郞”(金誠一, <先考成均生員府君行狀>,『鶴峯先生文集』卷7.)
77) “我家古無家乘 後生渺末於先故事蹟 茫然無可徵已 以今所聞我六代祖秉節公 自洛而南 始寓于榮川 其卜居于水村 則自我五代祖司僕正公始而推其年代 當在嘉靖末乎 越萬曆乙卯年間 我高祖考岐峰公剏書室于村之西偏 則今之所稱岐陽書堂也 ” (柳顯時,<岐陽書堂重修記>,『壺窩遺稿 』卷2.)
78)“今距乙卯 已至百有餘年之久矣” (柳顯時,<岐陽書堂重修記>『壺窩遺稿 』卷2. )
79) “成毁因時運 任玄宰之推遷 繼述在後謨 肯丹雘而塗墍 無念厥舊 有侐其新 恭惟我岐陽世祠 大可徵河東文獻,往在英陵晠際 有若檜爺先生 彤庭對揚,贊繪日於奎翰 黃方高臥 挹淸風於箕山 邃學最瀛,洲殆可擬宋朝 群哲貞忠 貫日月 恨不編魯陵 名臣月樓 華扁尙傳小華 古樂雲端 老石剩葆大笑 遺墟滾滾乎靈醴 眞源繩繩乎弓箕赫業延蔓於海 左千里軒寃 組簪恢拓於山南 一區文章禮樂 粤我岐峯大祖 種德積學 裕後光前受衣 鉢於渭
陽 早承鶴爺旨訣 許襟靈於武屹,晩托岡老 心期烏梅濟飢 范西淮之德惠 白衣糾衆 張南軒之義聲 歌叢桂於小山 世慮雲淡 詠薖軸於衡泌 晩計日賖 不亦樂乎朋來 數楹書屋,誰將儔歟夢破 一榻道經,杖屨遺芬 寔至今而未沫 籩豆縟禮 粤自昔而旣成 遠放白鹿 古規巖爺之經,畫密勿始 在玄狗新創晩 老之偉頌 煥然儼六架之奐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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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중건하였다.80)서당의 구조는 강당인 亦樂堂을 두고 東西에 각각 廣業齋․崇德齋를 두었다.81)
류우잠이 아버지를 대신해 지은「岐陽書齋上樑文」과 이후의 重修記․重建記등을 보면 서당의 건립목적과 학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여기서는「岐陽書齋上樑文」의 일부를 통하여 그 내용을 확인하기로 한다.
가만히 말하건대,家塾과 鄕校는 蒙士를 위하여 학교를 둔 것이고 地靈에 인걸은 또한德丘를 보고서 터를 닦는 것이다.그 누가 “互鄕의 사람들과 말하기 어렵다.”고 하였는가!나는 오직 “어린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노라.(중략)어찌 하늘이 재주를다르게 내렸겠는가!비록 堯舜도 뭇사람들과 같을 뿐이리라.가르침에는 차이를 두지 않음은 이미 聖經에서 교훈을 주셨는데 하지 않고 어찌될까?또 옛말에서 훈계함을 들으니,진실로 흥기하고자 하는 뜻이 있다면 어찌 새로이 만들 방법이 없겠는가!(중략)삼가바라건대,상량한 후에 숲속에서는 虎豹가 멀어지고 골짜기에는 蛟龍이 없게 하소서.동인을 이끌고서 난실에 들어가 麗澤에 힘쓰며 세속 꿈을 사절하고 맑은 물에 몸을 씻고고산을 우러르며 입에는 吟詩가 멈추지 않고 손에서는 책 펴기를 멈추지 않아 더욱 발전하여 앞으로 나아가며,혀는 耕이 되고 마음은 織이 되어 항상 밤낮으로 부지런하면향기로운 덕이 선량하고 어린 초학자들 博文約禮하여 선비가 이에 많이 나서,그 文이여기에 있지 않을까!82)
요컨대,류복기는 서당을 건립하면서 가장 중요한 의식이라 할 수 있는 상량식에서 “어린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孺子可敎]”라고 그 목적을 告하였다.
이것은 바로 그가 성현의 교훈을 바탕으로 진실로 가문을 흥기시키고자 한 절실한 소망이었고,가문의 命運을 오직 후손의 교육과 학문에 걸었다고 할 수
指百世而妥謐 烏鳥情切 嗟未盡觀盥之誠 龍蛇運非遽爾 撤泰山之宇 便齋行萊 已閱二十星霜 滿庭荒榛同憂
五百雲裔 乃聚吳中衆族 俾謀齊力重恢 更就祧廟舊基 頓覺移步 改觀何嫌 講舍前障 亦足摳衣升降 間架規模
不費力於仍舊 刀鉅樸斲 乃省工而維新 土木旣完 風水增色 岐岑橫黛 正似獨樂園屋 上靑山儉溪鳴琴 宛是嶽
鹿 祠劫後眞景 抑有數也 歷四紀於先庚 尙愼旃哉 盍一心於諸子 敢陳偉唱更助脩樑 抛樑東峩岐 秀色入簾櫳
丹禽 不返孤桐 老祗見朝 朝瑞日紅,抛樑西水 箕山何處兮 百世淸風 無地仰孱 孫猶誦笑亭題 抛樑南上屛 縈
繞泗流涵 分明一脈靈源 在剎剎塵塵 報瞿曇 抛樑北巖亭 龜築此中 特傳心的訣 儘如私看 取寒潭秋月色 抛
樑上九天 寥廓星河 朗微風時 灑杏壇 春宛似當年絃誦響 抛樑下密邇 梓桑連舊社 追遠從知 民厚歸一區吳族
應純嘏上樑之後 廟宇益鞏門 風復振春嘗秋 禴更尋昔日儀 文夜誦朝 絃勿替後學規 法堂構世業趾 佳子而令
孫 簪盍朋徒會圓冠 而方領襟佩趨趨 以肆夏花樹 融融乎長春 反朴回淳 所宜 勉於闔族 扶傾補敗 竊有望於
胄宗” (<岐陽書堂追遠祠上樑文>,『汎庵文集』卷5. )
80)柳致皜, <岐陽書堂重建上樑文>,『東林集』.
81) 각 건물의 명칭은 류우잠이 지었다.(<創建沿革>,『岐陽誌』卷1.)
82) “竊以家塾黨庠 旣爲蒙士而設學 地靈人傑又相德丘而開基 夫孰云互鄕難言 吾獨曰孺子可敎(중략) 豈皇天
降才殊哉 雖堯舜與人同耳 有敎無類 旣垂訓於聖經 不爲何成 又聞戒於古語 苟興起之有志 豈作新之無方(중
략) 㐲願上梁之後 林遠虎豹 壑遁蛟龍 提攜同人 襲蘭室而資麗澤 謝絕塵夢 浴淸水而仰高山 口不停吟 手不
停披 益步趣之進進 舌爲之耕 心爲之織 恒晝夜而孜孜 薰德善良 發蒙博約 士多生此 文不在玆”(<岐陽書齋
上樑文 代大人作>,『陶軒逸稿』下,「雜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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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부분이다.따라서 가문을 흥기시키고자 방법을 모색하였던 것은 바로 ‘서당’이라는 공간을 마련하여 ‘훈몽’하는 것이었다.또 훈몽의 결과로서 미래에 수곡파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염원하였는데,그 수단은 바로 ‘글[文]’을 통한것이었다.
그는「鶴峯先生行蹟」에서 학봉의 遺訓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평거하실 때는 매번 자제들에게 각각 뜻하는 바를 말하게 하시고 이어 훈계하시기를“세간의 뜬 영화는 귀하다 할 만한 것이 아니다.입신양명이 내 비록 원하는 바이지만만약 이루지 못한다하더라도 처신에 허물이 없이 한 고을의 ‘훌륭한 선비[善士]’가 된다면 족할 것이다.”라고 하셨다.83)
위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그가 소망한 것은 학봉이 전해준 교훈,즉‘입신양명’보다는 오히려 한 고을의 ‘훌륭한 선비’가 되는 것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기양서당은 가문의 결속을 다지고 가학이 형성되고 발전하는데 있어 공간적으로 중요한 산실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이후 기양서당은 수곡파의 講會와宗會의 장소로 활용되어 19세기까지 지속적으로 그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이 점은『岐陽誌』84)와『朔望講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그 중『삭망강안』은 류치명이 1831년(辛卯)작성한 것인데,기양서당에서 매월 초하루․보름에 학생들을 가르쳤던 講案이다.동년 9월,류치명은 편지를 통하여 가학의 유풍이 쇠퇴하고 후손들이 習俗에 빠져 해이해지는 것을 염려하여 문중 전체를대상으로 학문을 장려하도록 권고하였다.이후 11월,류건휴․류휘문 등과 함께후진들을 倡率하여 본격시행하게 된다.85)특히,師表가 될 만한 선배들을 선발하여 기양서당에 3명의 훈장을 두고,각 지역별로 별도로 훈장을 두어 학문의연속성을 고려하면서,86)「門講時節目」․「齋居學規」등 구체적인 운영방안과학칙을 마련하였다.87) 또「朔望講笏記」88)와「白鹿洞規」를 부록하여 門講절
83) “燕居 每令子弟 各言所志 因戒之曰 世間浮榮 不足爲貴 立身揚名 雖余所望 如其不成 處身無咎 爲一鄕之
善士 足矣”(<鶴峯先生行蹟>,『岐峯逸稿』,「雜著」.)
84) 필사본으로 기양서당 창건 이후의 중요한 사항을 기록한 것으로 서당의 전말을 알 수 있다.
85) 「定齋先生年譜」,『定齋文集附錄』卷1.
86) 講案에 따르면, 당시 岐陽書堂 訓長은 柳健休 ․ 柳徽文 ․ 柳致明 등 3명이었고, ‘各村訓長’은 기록순대
로 馬嶺 柳進文 ․ 水谷 柳觀文 ․ 中坪 柳鮐文 ․ 高川 柳允休 ․ 瓢谷 柳鼎文 ․ 遠坡 柳覺文 등 6명이었고,
執禮 柳致敎 1명을 두었다.
87) 절목은 총 19조목, 학규는 7조목이다.
88) 笏記의 차례는 ‘行謁廟禮-行庭揖禮-行相揖禮’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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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와 교육목표를 분명히 마련해 놓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류복기는 불행히도 서당건립 2년 후 세상을 떠나게 된다.기양서당은그의 다섯 아들 중 수곡파의 또 한 명의 중심이 되는 장자 류우잠이 아버지의뜻을 계승하여 실질적인 가학의 전당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89)
류우잠은 1575년에 태어났다.立齋鄭宗魯가 지은 행장에 의하면 ‘성장하면서 학문을 좋아하고 날마다 書史만을 가까이하고,蒼石李埈․敬堂張興孝․瓢
隱金是榲등과 道義之交로 교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또 임진․정유 양란시에는 아버지를 따라 함께 의병으로 참전하기도 하였다.병란 후에는 당시 體察使가 安東府를 순찰하자 鄕中을 대신하여「體相入府時陳弊條目」을 지어 올려 府民들이 겪고 있는 현안문제에 대하여 진정하는 등 적극적인 애민정신을보여준 인물이다.90)특히,1627년 丁卯胡亂당시 仁祖의 강화도 피난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동지들과 구원을 도모하였다가 三田渡굴욕으로 이어지는 和議소식에 과거를 접고 폐문한 후 독서와 강학에 전념하였고,특히 시문학에 뛰어났다.그는 또 金得硏․石門鄭榮邦․景玉李簠등 교유인물들에게 인정을 받고있었고,91) 당시 權紀가 편찬하던『永嘉誌』편찬에도 김득연․權晤등과 함께하기도 하였다.
류우잠은 수곡파 안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그는 단순히 家系上宗孫이라는 지위뿐 만 아니라,퇴계를 적전한 학봉의 학문을 계승한 아버지 류복기의 사상과 학문을 후대로 전수해야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었기때문이다.그는 먼저「門中完議」92)를 통하여 번창해 가는 후손들에게 報本追
89) “重葺先公弊廬 以讀書敎後進爲樂(중략) 盖自岐峯公學有淵源 用詩禮裕後 公幼襲家庭之訓 長資麗澤之益
沈潛經傳 砥礪名行” (鄭宗魯,<行狀>,『陶軒先生逸稿』下.)
90)「體相入府時陳弊條目」은『陶軒先生逸稿』下,「雜著」에 수록되어 있는데, 도체찰사가 안동부를 방문할때 건의할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6개 조목으로 진술하고 있다. 제 1조는 100여년 만에 다시 量田을 실시했는데 그 결과가 시행되지 않고 있어 조세가 均平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제 3조는 還上의 결손이 수천 석이나 되어 만약 이를 백성들에게 분배하여 징수한다면 그 피해가 엄청날 것이므로 결손 된 수량을검사하여 元數를 경감해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양전과 환상에 대한 두 항목을 뺀 나머지 네 항목은 모두 軍政에 관련된 것으로 三政의 문란이 군정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먼저 안동부의 兵額은 원래 11哨였는데 나중에 4초가 더하여 15초가 된 것에 대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병란으로 인구가 감소하여 늘어난 4초를 채울 길이 없으니 이를 감해 달라고 건의하는 내용이다. 그 외에도 保障을설치하고도 부역은 더 심해진 현실, 그리고 사망한 군졸이나 도망한 군졸의 番價를 隣族으로부터 징수하는 문제, 원래 15세로 되어 있는 軍役을 5·6세나 3·4세 아이에게까지 부담케 하는 黃口簽丁의 현실등을 군정과 연관하여 폐단을 시정해 달라고 건의하는 내용이다.
91) “及歿金葛峯得硏誄之曰 五柳淸風 北窻皇羲 鄕稱領袖 人倚蓍龜 鄭石門榮邦哭之曰 斯人云兦 無復有若人
者 李景玉簠亦云 自少從鄕父老 聞山林宰相 惟柳陶軒其人 觀於此數者 公大致 豈不亦可想也㦲” (鄭宗魯,
<行狀>,『陶軒逸稿』下.)
92) 「門中完議」의 내용은 확인할 길이 없고, 다만 그 序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夫報本返始之誠 尊祖敬宗之義 實民彝之固有 而有家者之所不可一日而不講也 朱文公家禮 有始基之祖 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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遠의 정신을 함양하고 종족 간에 厚意를 모으도록 하였다.입향 초기에,그의學德과「門中完議」는 수곡파가 족적결속의 바탕을 마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한 것으로,향후 450여 년간 끊임없이 지탱해 갈 수 있었던 정신적이고 실천적인 버팀목이 되었다.
이상을 요약하면,수곡파 가학의 연원은 류복기에게 있으며 거슬러 올라가그의 사상과 학문적 연원은 무엇보다도 혈연적 관계에 있는 의성김씨와 학봉의사상과 학문이었다.이것은 류복기의 직접적 연원이었고,내면적으로는 류의손등 선대 명조의 유업를 연원으로 하고 있다.이후,그의 학문은 수곡파 내부적으로 류우잠에 의해 계승되었다.따라서 수곡파 스스로 가문을 중흥시킨 岐峯柳復起와 가문의 결속을 다진 陶軒柳友潛부자가 ‘수곡파 전체의 뿌리이자 가학의 연원’인 것이다.이 점은 수곡파가 류복기 부자의 호를 따서 ‘岐陶遺業’이라고 口號하고 있는 것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된다.93)아울러,岐陽書堂은 그 건립목적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수곡파 가학의 형성초기에 중요한 산실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수곡파 미래에 가학전승의 공간적인 연원이 되었다.
存墓祭 歲率宗人一祭之文 此古人所以奉先祖 收宗族之厚義也 爲人子孫者 可不以此爲心 而畵其追遠之誠哉
惟我先祖寶文閣直提學公墓 在禮安西虎巖山 吏曺參判公墓 在榮川郡南鍾陵山 世代綿邈 子孫遠居 不能保護
松楸 若直提學公墓 則表碣失傳 丘隴崩夷 廢爲無主之山 爲子孫者孰無戚中泚外之痛哉 上年秋 柳公永詢拜
本道監司 入界之初 巡到榮川 祭于參判墓 翼日到禮安 祭于提學墓 又合內外諸族 慨然諗之曰 祖先墳墓蕪穢
至此 而子孫遠在不能省護 修補之事 其可緩乎 玆令族中分定有司 首舉兩處碣石 及鍾陵齋舎之役 越明年寒
食 修改封植 各竪碑碣 嗚呼 累代荒廢之墓 得至今日 封域重新 香火載陳 相公追遠之誠 可謂至矣 後世子孫
不失衣冠之藏 永有報本之地 闔門感幸之心 又如何也 但念世代愈遠 恩愛漸殺 將來之計 難必其永保 故今我
諸族 用是爲懼 相與立議 以爲遠久之計 若兩處祭祀祭器祭田 及齋舎守護等事 一遵約朿 不至墜廢 則此非畵
子孫誠敬之道者乎 惟我一門 荷祖先積德餘蔭 日益蕃衍 若不益懋以奉先祀 則其於報本返始之誠 尊祖敬宗之
意 何如哉 古人云 爲子孫者 常以保墳墓爲心 則祖宗安寧於冥寘之中 而子孫獲佑於昭昭之際矣 凡我一門諸
人 盍相與勉之 約朿諸規 列之如左云” (<門中完議序>,『陶軒先生逸稿』下.)
93) 현재도 류복기가 건립한 ‘水谷宗宅[岐峯舊廬]’ 대청에는 蘭曲 金江漢이 葛筆로 쓴 ‘岐陶遺業’이라 제호
된 현판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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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水谷派家學의 傳承過程
어느 가문의 특정 인물의 학문과 덕행이 연원이 되어 ‘家學’이 형성되었다면,그것이 전승되어 지속적인 학문적 결과를 만들어내야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한 개인의 학문과 사상에 불과하다.
안동의 명문가들이 대부분 이러한 전통을 잘 유지하여 가문마다 가학으로서의면모를 갖추고 있음은 잘 아는 사실이다.대부분의 가문과 가학은 그 전승 과정에 있어 당시의 보편적인 혹은 독자적인 방법으로 전수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제 하에 본장에서는 수곡파 가학의 전승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 논의에 있어서는 가학 전승의 가장 기초적인 것부터 시작하여 심화시켜 발전하는 모습,가학 전승을 위해 제공되었던 공간의 역할 등으로 대별하여 살피고자 한다.
1.童蒙敎育을 통한 家學傳承의 基盤造成
童蒙敎育은 조선시대 어느 가문에서나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논의자체가 진부한 것일 수도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언급하는 것은 가학이 세대별로 형성되어 전승 될 때,그 과정에서 가장 기초적이면서도必須不可缺한 모태가 되기 때문이다.누구에게나 童蒙,특히 子孫교육에 있어서 각기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나 무엇보다도 가정교육이 중요하다.
퇴계는 家庭에 대해서 ‘완결된 宇宙이며,인간의 도덕성이 배양되는 텃밭이며,유교적 인격의 修道場이며,일생을 거쳐 마쳐야하는 學校’등으로 정의를내리면서 가정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였다.94) 또 雲川金涌은「戒子孫」에서,“門戶의 興亡盛衰는 자손에게서 드러나니 자손들의 賢否에 가문의 존귀함이 달려있고,선대에 입신양명을 우러러보면 가정에서의 敎誨가 돈독한데 있다”95)라고 경계하였다.이와 같이 가문을 부흥시키고 입신양명하는 길은 바로
94) 금장태, <제 2부 13장 退溪의 가정관과 인간관계의 규범, 6절 선비가정의 의미>, 『퇴계의 삶과 철
학』,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95) “門戶興衰視子孫 子孫賢否係家尊 仰惟先代身名顯 猶在親庭敎誨敦”(金涌,『雲川集』卷1.)
한편, 金涌은 동몽교재인『童子禮』를 편찬하였다. 이 책은 원래 학봉이 명나라에서 가져온『鄕校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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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에서부터 자손들을 바르게 기르는 ‘童蒙敎育[家庭敎育]’에 있으며,그 교육을 받은 후손들이 선대의 뜻을 얼마나 잘 계승하느냐하는 문제도 중요한 부분이다.이것은 ‘가학’이란 용어 자체가 가지는 여러 가지 의미 가운데,본장의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한 가문이 前代를 계승하고 後代로 이어가서[繼往開來]최소한 數代를 지속할 수 있는 누적된 학문적 성취가 있어야만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만약 그렇지 않고 연속성이 단절된다면 아무리 학문 등으로 인정받는 인물을 배출했다하더라도 단순히 개인의 학문과 사상일 뿐,가학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수곡파가 ‘훌륭한 선비’를 배출하여 가학을 계승,유지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대를 거칠 때마다 그 학문적 기반을 다지고 가문전체로 확대 재생산해갈 수 있도록 역량을 갖추게 한 동몽교육의 양상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먼저,류우잠이 그의 넷째 아들 冶溪柳㰒(1607∼1688)에게 지어준「訓戒詩」와 류학이 훈계시를 받은 후 지은「冠禮日先府君訓戒詩後識」를 보기로 하자.
네 나이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爾年今已到成人
좋은 날 三加의 禮로 새 옷을 입힌다. 吉日三加禮服新
아침저녁으로 군자의 학업을 닦고 夙夜勉修君子業
때 맞춰 효도하며 어버이를 위로하라. 及時爲孝慰雙親
선조의 훈계가 그 지극함이 이와 같으나,불초는 보잘 것 없어 받들어 이을 수 없었다.
오늘에 이르러도 手澤이 완연하니 風樹의 슬픔을 다시 어떻게 할까?
이에 감히 선정의 묵첩 사이에 넣어서 종신토록 영모할 따름이다.갑오년 봄,불초 㰒,피눈물로 삼가적다.96)
위「訓戒詩」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것으로,자식이 成人이 되는 冠禮儀式을 통해 인륜의 근본인 孝를 행하고 君子의 길을 가는 학업을 하라는 경계의내용이다.「冠禮日先府君訓戒詩後識」는 아들이 아버지의 훈계를 평생토록 이어받고자하는 의지를 後識에 담아 다짐하고 있다.실제로 류학은 19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병이 들어 어떤 약으로도 효험이 없게 되자 그 糞을 맛보거나 자輯』에 들어 있는 편명이다. 학봉은『향교례집』중에서 어린이들의 교육에 유용한 「동자례」편과「居鄕雜儀」편을 강조하고 자제들에게 가르쳤다. 그 후 조카인 김용이 1582년에 학봉의 뜻을 받들어『동
자례』라는 제목으로 위의 두 편을 한 권의 책으로 편집하고 적극 보급하였다.
96) “先人訓戒 如此其至 而不肖無狀 無以奉承 式至今日 手澤宛然 風樹之感 當復如何 玆敢粧列于先正墨帖之
間 以爲終身永慕之地耳 甲午春日 不肖孤㰒 泣血謹識”(柳㰒,『冶溪遺稿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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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마시게 하여 낫게 한 후 10여년을 더 봉양할 수있었다.97)
乖厓柳榰(1626〜1701)는 자손들에게 남긴「遺命」을 통해,“너희들이 子弟를 가르치지 않는 것이 심히 걱정된다.지금부터 한 결 같이 내가 적어준 다섯조목을 따라 십분 근면하여 禽獸가 되는 지경을 면할 수 있다면 나는 죽어도죽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고,당부하기를 “진실로 이 다섯 가지를 행한다면 가문을 보존하고 과오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98)또 그는 넷째 아들柳命輝에 의해 지어진「言行記」에서 자신의 독서관과 선비[君子]관에 대해 언급하면서 자손들에게 학문의 목적과 방법에 대해 교훈하였다.그는 또 자손들에게 독서와 학문을 통한 선비와 군자의 길과 공명정대한 출사의 길을 제시하여 후손들을 경계하려는 의지를 전하였다.99)
檟亭柳奉時(1654〜1709)100)는 入鄕祖柳城의 5세손인 柳振輝의 차자로서朴谷[박실]과 大坪[한들]의 分派祖가 된다.그의 문집이 별도로 남아 있지 않아구체적인 교육방법을 살펴볼 수는 없지만,그에 대한 家狀과 蘆厓柳道源이 지97)
“噫 古今天下爲孝者多矣 閱之於古 或有㥯難而亡身者 又有至誠而動物者 事雖不同而爲孝 則一然 千百一
人 豈嘗易得而見哉 歲靑牛春 春堂纔經內外艱 仍致症候沉綿 百藥不效 日漸危劇 余等籲天之悶 有非言語所
殫而貴無格天之誠 未效身代之祝 聚首憂煎 罔知所措矣 侍藥之際 第四弟㰒 泣而言曰 骨肉之血有效久病 此
古人已試之驗 十指雖戕 親病得霽 則肢體何關 請一試之以冀萬一之效 弟之志也 忽斷右手一指 米飮之不進
藥餌之斥去者 已久而進呑此血 喘息漸紓 連嘗一再咽喉積塞之氣 稍稍驅滌 沉痾頓醒협若披雲孝哉 吾弟也
是非格天之慶耶 自玆而歷日已多 漸進粥飮 使余等得覩天日而列侍左右 以祈崗陵者 其有窮已耶 其有窮已耶
夫値親之病 而割肌竭誠質諸神明 而竟獲陰佑使之得愈者 是誰誠爾父母 劬老鞠我五人 而余等不肖 誠未感神
憂遑之夕 但知憫泣而無所爲 獨此幼弟 竟就純孝 豈非余等所愧且幸也耶 噫 爲孝不一叩氷求魚泣竹迸笋 不
獨專美於前也 吾弟至性素與人異 頃年慈闈之病 弟齡纔十一 與姊氏共嘗其糞色憂侍藥不暫離側 曾於伯氏之
疾 與姊氏 亦有是行 其天倫至愛至於同氣 蓋稟於天而不匱者 固然矣 嗚呼 姊氏不幸 今也則亡而至於今日爾
能全孝於兩親 吾昆弟之所追感於姊氏所期望於爾者 當부如何哉 世之爲孝者多矣 徒見悅耳目供甘旨 而値此
異行 則必群駭而衆怪之或以矯激目之若曰 矯激則十歲幼兒蒼卒臨患不遑外事 而有何矯激 有何希望哉 吾弟
至性旣異已能孝悌 又加以學問之力則余等不肖非所比倫 而亦將匹美於古人也 明矣玆叙顚末 私自矜式云爾
靑午春日 三兄㮋記之于侍病之暇” (柳㮋,<斷指說>,『冶溪遺稿』下.)
98) “凡人之死生修短 自有定限 不須爲念 況我年近八旬 更何恨哉 念我家世本淸寒治喪凡節稱家有無而已 冠帶
朝服 雖不得不用 只用黑領 他餘錦段之物 絶勿近身 小殮用單衾 勿爲漆棺 勿求挽詞 葬于楸峴 白氏塋後 父
母墳前 表石牀石 一未設置 此爲不孝地下之遺恨 汝等須念此意 並力拮据 或至於有成 則甚幸 汝輩不敎訓子
弟 甚可憂 今後一從所錄五條 十分勤課 俾免禽獸之歸 則吾雖死而不死 其各惕念 勤讀書 愼言行 崇儉素 力
農桑 謹租稅 苟能行此 則可以保家而寡過矣”(柳榰,『乖崖集』.)
99) “항상 말씀하시기를, ‘讀書를 함은 그 도리를 알아 行事에 적용하기 위함이고 文章에만 마음을 쓰는 것
은 무익하다.’, ‘聖賢의 遺訓이 方冊에 갖추어져 있으니 단지 熟讀하지 않음을 근심할 따름이다.’, ‘士君
子의 立志와 處事에는 正直과 公明을 요하고 邪曲과 사심을 없게 해야 한다.’, ‘士君子가 朝廷에 들어가
서는 오직 마땅히 扶正抑邪하여 公道를 넓히고 私心을 배척할 따름이니, 각기 偏黨을 지어 勝負를 다투
는 것은 사심이다.’” (柳命輝,『乖崖集』.)
100) 류봉시는 생존당시에 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檟亭’은 그의 사후 후손들에 의해 명명되어 호칭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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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父親[慵窩柳升鉉]의 가장에 기록된 傳言을 요약해 보기로 한다.
그는 의리에 독실하여 비록 상인이나 노복들이라도 후대하여 향리에서 ‘好義君子’라 불린 인물로 평가받았고 평생 동안 書史를 공부하면서 훈몽에 매우엄격하고 잘하여 鈍才라도 啓發시켰다고 적고 있다.그는 가정교육에 있어 더욱 엄격하였는데,대표적인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府君의 先考처사공(류봉시)께서는 자식들을 매우 엄격하게 가르치셨다.하루는 부군(류승현)이 마을 아이들을 따라 물고기를 잡아 돌아오니 처사공께서 즉시 버리라 명하시고,슬퍼하시며 당신 자신을 경계하고 책망하셨다.이윽고 살던 곳이 시끄럽고 어지러운 곳이라는 이유로 드디어 10리 밖 산촌의 조용하고 궁벽한 곳으로 옮기시고 3년을 우거하면서 오로지 부군을 가르치고 기르셨다.이때부터 더욱 文學에 노력을 다하였다.101)
위에서 보듯이,류봉시의 자식교육은 孟母의 ‘三遷之敎’와 비견된다 할 수있다.이러한 교육방법은 두 아들 慵窩柳升鉉과 陽坡柳觀鉉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생활에서 선정을 베푸는 등 현실적인 결과로 이어졌다.이후 그는 두 아들의 교육을 위해 이사한 곳에 檟木세 그루를 심어 한 그루는 자신을,나머지 두 그루는 자식들을 채찍질하는 無言의 회초리로 삼았다.이를 계기로,수곡파의 支派에서 또 하나의 가학의 맥이 형성되고 전승되는 상징적 공간
‘三檟亭’이 탄생하기도 하였다.
醉軒柳賁時(1680〜1781)는 류복기의 셋째 아들 龍巖柳知潛의 曾孫이다.그
는 효우가 독실하였고 향당에서는 어려운 이를 구휼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또 매년 춘궁기가 되면 마을을 점검하고 연기가 나지 않는 집에는 반드시 양식
을 전하여 생계가 끊어지지 않게 도와주었다.그는 가난한 자가 집으로 찾아오
면 반드시 먹을 것을 줘서 보내는 인자함을 자식들에게 몸소 보여 주었다.항
상 자질들에게 “『詩經』의 ‘哿矣富人哀此煢獨’라는 뜻을 나는 능히 행하지 못
했지만,너희들은 이것을 힘쓰라”고 훈계하면서 애민정신을 보여 주었다.이 구
절은 맹자도 인용하며 가난 한 자들을 돌보는 것이 선정이라고 거듭 강조했던
말이다.102)
101) “先考處士公 敎之甚嚴 欲大成就之 一日 府君從隣兒獵魚而歸 處士公卽命棄之 痛加警責 已而 以所居喧閙 遂就十里外山村靜僻處 寓居三 爲專意敎養府君也 自是益肆力於文學”(<先考通政大夫工曹參議慵窩府君
家狀>,『蘆厓集』卷9.)
102) “왕이 말하였다. ‘왕정을 가히 얻어 들을 수 있습니까?’ 대답하여 말하되 ‘옛날에 문왕이 기를 다스
림에 경작하는 자는 9에 1하며, 벼슬하는 자를 대대로 녹을 주었으며, 관문과 저자를 기찰하되 세금을
거두지 아니하며, 못과 어량에 금함이 없으며, 사람을 벌하되 처자에게 미치지 아니하니, 늙었는데 아내
가 없음을 鰥라 말하고, 늙었는데 남편이 없음을 寡라 말하고, 늙었는데 자식이 없음을 獨이라 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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陽坡柳觀鉉(1692〜1764)은 류봉시의 둘째 아들이다.그는 형 류승현과 함께
아버지의 엄격한 가정교육을 통해 성장하여 분가한 후 또 하나의 家脈을 잇는
다.그는 자제들이 혹 다른 사람의 과실을 말하면 오히려 그들에게 ‘선’을 다했
는지를 되물으며 스스로 반성하게 하고,또 말하기를,“천하에 가장 억제하기
힘든 것이 利欲같은 것이 없다.내 나이 스무 살에 錢穀이 무엇인지 몰랐으나
후에 가난을 염려하여 産業에 마음을 두었더니 利心이 날마다 자라서 때로는
혹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반성하고 고치려 했으나 매양 이욕이 분수에 넘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너희들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103)라고 하며 재화에
욕심을 버리고 근면,검소할 것을 당부하였다.
蘆厓柳道源(1721〜1791)은 류관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백부인 류승현에
게 出系하였다.행장에 의하면,그는 약관의 나이에 아버지로부터 家事를 물려
받아 서책을 가까이 하지 못하고 농사에 분주한 시절을 보냈다.아내까지 바느
질과 길쌈으로 생계를 꾸릴 정도로 가난하였데,生父인 류관현의 도움으로 생
활을 유지해 오다가 아내까지 세상을 떠나자 장자인 壺谷柳範休에게 다시 家
事를 전한다.이 때 자식들에게 남긴 글에서 다음과 같이 간절하게 당부를 한
다.
다시 家事를 맏이에게 맡기고 先廬로 물러난다.다만 너는 나이는 어리지만 스스로
독서할 줄 아는데 俗務를 맡기니,나의 初年과 같이 심히 걱정할 만한 것이다.그러나
너의 立志가 자못 견고함을 보니,내가 집을 맡아 학문을 폐하고 家兄의 賙救를 염려함
만 못한 듯하다.너희들이 진실로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생활한다면 너희들이 어찌 溝
壑에 빠지겠느냐.지금부터 원컨대,너희들과 함께 농사를 과업으로 하고 학문에 힘써서
고인들이 주경야독하는 뜻에 부친다 하노라.104)
어린데 아비가 없음을 孤라 말하니, 이 네 가지 사람을 천하의 곤궁한 백성이면서 하소연 할 데가 없는
자들이라. 문왕이 정사를 펴 仁을 베풀되, 반드시 이 네 가지 사람들을 앞세웠더니, 시경에 이르기를,
좋기는 부유한 사람이지마는 이 지쳐버린 고독이 가엾도다라고 하였습니다.’” (王曰 王政可得聞與 對曰
昔者文王之治岐也 耕者九一 仕者世祿 關市譏而不征 澤梁無禁 罪人不孥 老而無妻曰鰥 老而無夫曰寡 老而
無子曰獨 幼而無父曰孤 此四者 天下之窮民而無告者 文王發政施仁 必先斯四者 詩云 哿矣富人 哀此煢獨
(『맹자』,「梁惠王下」5장 3절.)) * 번역문 인용 : 『朱注孟子』, 김동길․허호구 역주, 창지사, 1994.
103) “子弟或言人過失 輒呵之曰 汝行事果能盡善乎 吾恐彼亦議汝之得失 不可徒責人而忘自反也 或語及財利
事 輒戒之曰 天下之難制者 無如利欲 吾年二十時 不知錢穀爲何物 及後患家貧 留意產業 利心日長 時或警
懼省改 而每覺利欲上分數多 爾曹宜知之” (李象靖, <通政大夫刑曹參議陽坡柳公行狀>,『大山先生文集』
卷51.)
104) “亦以家事付大兒 而退守先廬 但汝年少自知讀書 而使任俗務 如余之初年 則此甚大可憂者 然見汝立志頗
堅固 似不如余之當家廢學 且念家兄之賙救 汝輩實遵生大人遺意 汝輩豈轉於溝壑哉 自今願與汝輩課農勉學
以附古人晝耕夜讀之義云” (<書家傳雜錄後示兒輩>,『盧厓集』卷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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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류도원은 자신이 초년에 가사를 물려받은 것처럼 자식에게 또다
시 가사를 물려주면서 생계의 어려움을 알면서도 자신의 학문은 물론 자식들의
학문을 염려하며 晝耕夜讀하도록 소원했던 것이다.
행장에 의하면,그는 어린 시절부터 어느 정도 학문에 재능이 있었으므로
마을의 어린아이들을 모아놓고『史略』등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그는 이 경험
을 바탕으로「敎兒說」을 지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나는 어릴 때,마을의 여러 아이들을 모아놓고 史略과 通鑑․經書에 이르기까지 가르
쳤다.사람들이 나를 보고 훈몽에 뛰어나다고 하였으나 자질이 둔한 어린 아이로써 억지
로 한 것이 많았다.사실 나의 훈몽은 별다른 방법이 없다.다만,아침마다 일어나 日課
를 배울 뿐이었으니 실제로는 그 가르치는 법을 얻지 못하였고 또 중년이후는 싫어함을
알았다.금년 봄 家率들을 데리고 윗박실 산중에 우거하니 아이들이 마침 천리 벼슬길로
나가고,집안에 어린 손자 등도 또한 내버려둘 수 없어 70의 나이로 다시 마을 學長의
모양을 갖추었다.매양 가르칠 때마다 앉아 冊竹을 잡고 손으로 이끌어 입으로 가르쳤
다.그런데 마음이 사물에 있어 왔다 갔다 하고 일었다가 사라지면 불과 잠간사이에도
아이들이 句讀를 틀리고 音吐를 잃어버리니 완전히 다 읽는 것이 반드시 3,4번을 읽은
후에야 마쳤다.심하도다.마음을 속이기 힘듦이여.선악의 기미가 겨우 여기에서 동하여
바로 저기에 반응하니 影․響과 같이 두렵기 그지없다.나는 평소 白首가 되어도 분란스
럽게 될까 염려하였으나 아직까지 그 病源의 소재를 알지 못하였는데,지금 아이들을 가
르치면서 마음이 부재한 병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병을 얻었다면 어찌 그 약이 없겠는
가. 傳에 이르기를,‘마음에 두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
어도 그 맛을 모른다.’고 하였다.(缺)105)
여기서 그는 만년에 집안의 후손들 교육에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그는
자손들에게 독서와 학문에 있어 마음[心]으로 沈潛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또 둘째 아들 瓢巷柳洛休에게 쓴 편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네가 만일 그곳에 있으면서 말을 조심하고 사귐에 있어 신중하며 나다니지 않고 꼿
꼿이 앉아 글공부를 한다면 비록 오랫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않더라도 무슨 해될 것이
있겠느냐.그러나 그렇지 않고 心志를 마음대로 놓아 버리고 언행을 어그러뜨려 또래들
105) “余少時 聚村裏羣兒 授以史略至於通經書 人以余善於訓蒙 多以鈍根小兒強之 其實余之訓蒙 非有別法
但朝朝喚起 授以日課而已 實未得其敎術也 且中年以後則知厭之矣 人亦不以訓蒙相強甚是老境省事 今年春 挈家來寓上瓢山中 而兒子適宦遊千里 家裏小孫等 亦不可任其浪過 乃以七十之年 復作村學長貌樣 每授課時
坐執冊竹 手引而口授之 授一字 心在一字 授一句 心在一句 心口相應而儼然如對神明 則兒輒善學而退 或於
俄頃之間 忽爲外物引惹 口授文字而心在事物 往來起滅 不過霎時之頃 而兒已錯了 句讀失其音吐 一讀可了
者 必至於三四讀而後已 甚矣 此心之難誣也 善惡之幾 纔動於此而卽應於彼 如影響然 甚可畏也 余素患思慮
至於白首紛如 而未得其病源所在 今因敎兒而得心不在之病焉 旣得其病則獨無其藥乎 傳曰 心不在焉 視而不
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缺)”(『蘆厓集』卷7,「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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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손꼽히지 못하여 主家에 光榮이 없게 하고 부모에게 누를 끼침이 적지 않다면
무슨 낯으로 돌아와서 나를 보겠느냐.돌아오는 날엔 마땅히 그 눈동자를 보게 되면 알
수 있을 것이다.요즈음 같은 여름철에는 時文을 짓는 것도 좋겠으나 다만 經典의 誦讀
을 완전히 그만두면 안 된다.반드시 아침에는 글을 읽고 낮으로는 時文을 지어 늘 그렇
게 함이 어떠하겠느냐.106)
위 편지에서는 객지에 나가있는 아들에게 언행과 학문에 있어서 ‘愼其獨’의
자세를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또 時事的인 문장에 치우치지 말고 경전
을 誦讀하도록 면려하고 있다.
三山柳正源(1702〜1761)의 동몽교육은 특별히 ‘義’를 중요시하였고 일상생
활 속에서는 자신과 선조의 처신 방법을 모범으로 삼았다.그는 임종 무렵 족
제 江浦柳弘源을 불러「張中丞傳後敍」107)를 읽게 하였는데,‘男兒死耳不可爲
不義屈’이라는 대목에 이르자,“나는 평생 이 敍를 즐겨 읽었다.그런데 이 대
목에 와서는 무릎을 치고 감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지금 너를 시켜 읽히고
들으니 가슴이 시원하다.”고 말하면서,운명의 순간을 맞아서도 후손들에게 ‘의
로운 군자’의 길을 직접 읽게 하고 간절히 당부하였다.어떤 사람이 논에 들어
가 벼이삭을 뽑아 훔치다가 동네 아이들에게 잡혀오자 타일러 보낸 후,아이들
에게 말하기를 “보고서 못하게 하는 것은 옳으나 동네사람들이 알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며 경계하도록 한 일화도 전한다.108) 또 “우리 가문에서는 慵窩
[柳升鉉]공이 모범이 되시니 그 鎭物하는 度量과 恬靜하신 志操를 우리들이 따
라가면 거의 과오와 실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며 祖先들의 일상생활에서의
행적과 교훈을 모범으로 삼아 精進할 것을 훈계하였다.
東巖柳長源(1724〜1796)은 류관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空空齋柳挺輝의
曾孫으로 출계하였다.그는 1764년 生父의 상을 당한 후,큰 형인 范溪柳通源
의 주선으로 중형 류도원과 함께 박곡에 모여『詩經』의「小雅常棣」의 뜻109)
106) “汝若在彼謹言語 愼交際 廢出入 堅坐讀書 雖久不還 亦何有害 如或不然 放倒心志 壞了言行 不數於侑
類 無光於主家 添厥所生大矣 其何顔 歸見我乎 歸日當望其眉睫 而知之也 當此夏節 做得時文亦可 但全廢
誦讀 則不可 須朝讀午做 日以爲常 如何”(<答兒洛休>,『蘆厓集』卷5.)
107) 「張中丞傳後敍」: 唐 韓愈의 문집《창려집》에 실린 글. 張中丞은 御史中丞을 지낸 張巡을 가리킨다.
당 현종 때에 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순과 許遠은 睢陽城을 끝까지 지키다가 부하인 南霽雲, 雷萬
春 등과 함께 장렬하게 죽었다.
108) “有人潛入田 揠稻穗 家少輩執致于前 公若無見也 久之 其人扣頭請罪 公曰 汝以凶歲之故 失其常性 旣
揠者歸以救飢 後勿復爾也 顧謂少輩曰 見而禁之 可也 何必使閭里知之耶” (李象靖, <行狀>,『三山文集』.
)
109) 형제를 燕하는 樂歌이다. “상체의 꽃이여, 그 꽃봉오리 어찌 빛나지 않으리. 무릇 세상 사람들은 형제
보다 좋은 것이 없네.[常棣之華 鄂不韚韚 凡今之人 莫如兄弟] ”라고 노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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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빌려 ‘三棣堂’을 짓고 삼형제가 한 동네에 함께 살기로 약속하였다.서로 만
나는 길을 ‘三逕’이라 명명하는 등 형제의 우애를 돈독히 하여 후손들에게 모범
을 보여주었다.당시 류장원은 찾아온 자질들에게 “先父兄께서 매양 불초 등에
게 훈계하시기를 ‘순박하고 진실함이 우리 가문의 본색이다.’라고 하셨는데,근
래 너희들을 보니 자못 꾸미는 것에만 힘을 쓰니 내 심히 걱정되어 매일 한 밤
중에도 땀이 흐르는 것을 알지 못할 정도로 염려된다.너희들도 또한 마땅히
통렬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며 외형적인 꾸밈보다 내면적인 인성을 강
조하였다.
그의 학문적 교육법은「巖齋語錄」110)에 잘 드러나 있다.여기에서 그는 讀
書法에 대해 구체적이면서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즉,『四書三經』-『心
經』-『近思錄』-周濂溪․程子-朱子書-退溪書등으로 순차적 학습교재를
열거하면서 “聖經을 기본으로 삼지 않고 小家의 잡서를 즐겨 보는 것은 실효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독이 된다.”고 하며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또한
일상의 공부에서 가장 절실한 것으로 四書를 꼽았고,문체에 따른 讀聲의 명백
성을 주장했으며,調理가 바로 서고 血脈이 일관된 문장 작성을 추구하였다.111)
大埜柳健休(1768〜1834)는 류복기의 셋째 아들 류지잠의 6대손으로 태어났
다.그는 10세에 아버지 松陰柳和鉉으로부터 배움을 시작하여 18세에 족부인
류장원에게,40세에 損齋南漢朝에게 가르침을 구하기도 하였다.첫 스승이었던
족부 류장원이 세상을 떠나자 스승의 뜻을 받들고자 ‘崇德․修慝․辨惑’등「三
箴」과「閑齋箴」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는 의지를 다졌다.그는 자신의 이러한
의지를 바탕으로 자신과 후학의 경계를 삼기 위해 4字68句의「訓蒙箴」을 짓
기도 하였다.112)
류건휴의 동몽교육에서,주목할 만한 것은「童蒙學令」이라는 교육 지침서
를 만들었다는 것이다.이것은 동몽교육에 대해 강령과 함께 시행규칙에 이르
110) 柳健休, 『大埜集』卷6,「雜著」 .
111) “讀書之法 先讀四書 次讀三經 次讀心近濂洛朱退之書 親切體認 積久潛玩 使許多義理 參伍錯綜 融釋貫
通 然後自家胸中 始有權衡尺度 自見得諸說之輕重長短”, “今汝不以聖經爲基本 而喜看小家雜書 吾恐其無
實效而中實毒也(壬子)”, “四書之切於日用 如布帛菽粟 非眞實玩味 密切착力 無以有得”, “讀聲須要明白洪
暢 亦隨文各有其法 讀詩欲其諷詠 讀書欲其謹嚴 讀四書欲其精密 讀外傳又須洋洋浪讀”, “文章須有頭眉腹
臟 條理相承 血脈相貫 方有體裁 又須平易有典 則不要奇崛 譬如長江大河渾浩流轉觸石而後有波瀾” (柳健
休, <巖齋語錄>,『大埜集』卷6,「雜著」)
112) “造化之原 有理無形 動闢靜闔 陰陽緯經 而生五行 濁降淸升 天地定位 交感妙凝 隨質賦性 物塞人通 惟
愚與聖 不貧匪豊 仁義禮智 喜怒哀樂 一心主宰 衆欲未斲 粹然在中 觸則著外 操存擴充 剛健光大 嗟厥氣稟
厚薄萬殊 百體縱逸 羣邪迭覦 淫聲難色 壅蔽聰明 欲充口腹 病起膏肓 王侯喪邦 卿士捐軀 播惡萬世 嗚呼悲
夫 汝刱若是 克圖變化 休養眞純 逆絶僞詐 愛親敬兄 忠君弟長 灑掃應對 進退揖讓 餘力學文 當惜村晷 格
致誠正 求得所止 修齊治平 能事畢矣 此謂達道 勉哉小子” (<訓蒙箴(壬子)>,『大埜集』, 卷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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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까지 구체적으로 갖춘 것이라 할 수 있다.모두 12條의 大綱으로 구성하고
각 조마다 필요한 施行規則을 덧붙여 놓았다.113)내용에는 ‘讀書’와 ‘言語’條에
상대적으로 비중을 두었는데,강령의 순서로 보아 일과를 시작하는 아침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지켜야 할 일상의 경계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가 이 학령을 만들고 나서 덧붙인 말을 보자.
무릇 이 절목들은 모두 事親敬長과 修心養性의 바탕이 되는 바이다.그 일용에 상행
113) 12조와 시행규칙은 아래와 같다.
1. 夙興盥櫛;夙悟收斂精神 記取前日所讀書 昧爽而起 盥櫛衣服 務要端莊整肅
2. 晨省;列立唱喏竢長者興斂衾枕置故處 必齊整不得顚倒(事師長同)
3. 灑掃;逐日輪次 灑掃室堂及庭 几案筆硯書冊 皆整頓使無攲側 種爐火傾溺器
4. 讀書;每朝溫習前日所受之業 通貫浹洽然後 改受新課 先須具音釋 讀數十過 令句讀文義通曉
食後寫書 訖復讀二十遍 午如之向夕又如之
〇凡讀書整容端坐 整几案齊書冊 專心一志 徐讀玩味 勿廣視聽 勿雜笑語 尤不可手作雜事 心
作他念 信口胡讀 須是句句分段 字字響亮 不可闕一字添一字倒一字
〇凡書冊須愛護 不可損壞 點汙縐摺讀未竟 雖有急速 事必掩卷 置案上齊整然後起
5. 寫書;每食後 臨帖寫書 硏墨須高執 勿使墨汁汙手 勿使墨錠傾攲 執筆雙鉤 勿以指著毫畫畫致
精要 令畫法方正 間架均一 毋敢胡寫飛草
6. 言語;凡爲人子弟 須是常下氣低聲 詳明緩重 不可喧譁鬪鬨
〇每發言必思而後發 勿戱謔 勿誇誕 毋儳言(長者言事未竟 小者不可擧他事錯雜長者之言) 毋
勦說(不可擥取他人之說以爲己說) 毋雷同(不可聞人言而和附) 勿語侵人家長上(侵人之父 人亦侵
其父 侵人之兄 人亦侵其兄 是自侵其父自侵其兄 況自下犯上害理傷敎乎) 勿論貨色 勿言人過失
(聞人不善且包藏 勿宣洩從容 告諭使之知改下至婢僕亦然)
〇父兄長上 有所撿責 但低首聽受不可分解 或責之過分姑且隱默久 欲徐徐細思條陳云 此事如
此 如此向者 當是偶爾遺忘或云恐是傳者失誤於朋友亦然勿憚受責人必樂告
7. 坐立拜揖步趨;坐毋箕(未有箕踞而心不慢者) 立毋跛(必使兩足齊整 不可偏任一足) 手容恭(常端
拱 不可無事妄動 如畫地無故偶執一物 皆不恭長者之前 揮扇亦不恭) 足容重(不輕擧移也) 行步張
拱徐行 若父母長者召之 則趨進不可徐緩
〇凡父之執友及年長十五歲以上 則當拜 平交則揖之拜 必兩膝齊跪 首至地揖 必俯下手去地
尺復引之至當心
8. 飮食;凡飮食必輕嚼緩嚥 使人不聞飮食之聲 毋放飯(大飯) 毋流歠(長飮) 毋囓骨 毋齒截乾肉
凡與人飮食 勿爭較 多少美惡 凡入人家 勿徵求酒食飮酒 不至醉食 肉不至飽
9. 出入;無故不得出入 雖鄰里出入 亦有節 若遊泛之人 雖來速非有故 亦不必往 凡出入 必告長
者
10. 交接;擇友 必取好學篤行方嚴直諒之人 與之遊處群居攝以威儀久益和敬 不可把臂枕股謔浪詬
辱
11. 夜寐;昏定訖然 燈讀書二三十遍 無燈則誦 或占句 夜久就寐 疊置衣服 有常處 齊手斂足
12. 榎楚;有不如令者 以此物從事如陵辱者(語侵長者 罰尤重) 鬪鬨者(先犯者尤重) 博奕樗蒲者遊
泛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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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은 그렇게 高遠難行의 일이 없으니 비록 幼學이라도 또한 힘써 할 수 있는 것이
다.그러나 내 본성의 단단한 바가 내 직분이 당연히 할 바를 가지는 것이 어찌 여기에
서 그칠 뿐이겠는가.무릇 소학에 드러나고 대학에 갖추어져 있다.또 모름지기 낱낱이
정밀히 살피고 차례대로 역행한 후에야 거의할 수 있는 것이다.다만 대학의 근본은 소
학에 있고 소학의 실마리는 여기에서 시작된다.그러므로 맹자는 ‘堯舜의 도는 孝悌뿐이
다.’라고 하였고,易에서 ‘어렸을 때부터 바르게 기르는 것은 성인의 功業이다’라고 하였
다.무릇 바탕이 되는 터가 있은 후에 집을 지을 수 있고 인품을 닦은 후에 그릇이 될
수 있으니 진실로 여기에서 아침저녁으로 복습하고 나태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 知慮가
조금씩 열리고 陶養이 점점 익을 때를 기다려서 소학에서 미루어 넓혀가고 대학으로 나
아가 통달한다면 성인이 되고 본성을 다하는 방법이 또한 이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어찌
힘쓰지 않으랴.회초리로써 무릇 가르침을 따르지 않은 자를 독려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부득이한 후에 사용하여 매를 대는 것이니 그 후에는 이것이 진실로 형벌의 목적은 형
벌을 쓰지 않아도 되게 하는 뜻을 또한 경계할 따름이다.戊寅正月下澣에 쓰다.114)
윗글에서,대야는 동몽학령을 지은 이유를 ‘事親敬長’과 ‘收心養性’에 두고,
그 바탕은『소학』에서 시작하여『대학』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것이 바로 맹자가 말한 堯舜의 도,즉 ‘孝悌’이며,‘蒙以養正’이 聖賢의 功業이
라고 하였듯이,그가 동몽교육을 얼마나 절실하게 생각하였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또한 학령을 어기거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이에게는 부득이하게
회초리까지 사용한다는 구체적 세칙까지 마련하면서 체벌의 목적이 또 다른 체
벌이 없도록 한다는 데 있다고 말한 점은 示唆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壺谷柳範休(1744〜1823)는 류도원의 장자로서 14권 7책의 문집을 남겼다.
문집의 상당부분이 약 200여 편의 편지로 채워져 있는데,주로 大山李象靖․
蘭谷金江漢․樊巖蔡濟恭․海左丁範祖․后山李宗洙․川沙金宗德등 당대의
명현 및 친족들과 주고받은 것이다.이들 내용은 대부분 경전의 해석과 학문의
현실적인 적용방안에 관한 문답들로서 그의 성리학적 학문 경향을 엿볼 수 있
다.그는 자신의 이러한 학문 자세를 후손들에게「書示兒姪」란 글을 통해 전
하고 있다.핵심적 내용은 ‘장부가 財貨와 科宦에 뜻을 두고 학문에 있어 문장
에 뜻을 둔다면 班馬[班固와 司馬遷]․韓柳[韓愈와 柳宗元]가 될 뿐’이라 하면
서 爲己之學에 힘쓸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 편지의 말미에는 다음과 같이 부언하고 있다.
114) “凡此節目 皆所以事親敬長 而爲收心養性之地也 其爲日用常行 無甚高遠難行之事 雖幼學之士 亦可以勉
而能也 然吾性之所固 有吾職之所當爲者 亦豈止於此而已 凡見於小學 具於大學者 又須逐件精察 循序力行
然後可庶幾也 但大學之本 在於小學 小學之端 始於此 故孟子曰 堯舜之道 孝悌而已 易曰 蒙以養正 聖功也
夫有基址 然後可以築室 有坏樸 然後可以成器 誠能於此 而蚤夜服習 循環不懈 竢其知慮稍開 陶養漸熟 推
而廣之於小學 進而達之於大學 則作聖盡性之方 亦不離於此 可不勉哉 至於榎楚所以勵夫不率敎者 必不得已
而後用之著之 於後是固刑期于無刑之意 亦在戒之而已矣 戊寅正月下澣書” (<童蒙學令>,『大埜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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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형제들이 만년에 너희들을 얻어 단지 아끼기만 할 따름이었다.敎導는 전혀 하
지 못하고 흘러오다가 차례대로 결혼할 나이가 되었다.다행이 너희들은 천성이 그렇게
어긋나지 않으니 다른 걱정을 하지는 않는다.하지만 法家의 規模를 본받아 사업을 향상
한다면 대개 더욱 근심이 멀어질 것이다. 지금 나는 늙고 병들어 드러누워 그 형세가
오래 기약할 수 없으나 너희들이 因循하여 학문을 잃어버림이 날마다 더해져 본성이 더
렵혀지고 家聲을 실추시킨다면 아끼기만 하고 가르치지 못한 죄를 돌려받는 바이다.이
에 병을 무릅쓰고 이것을 적어 가만히 고인들이 付簡한 뜻을 본받으니,너희들이 명심하
여 외우고 익히고 감히 잊거나 소홀히 하지 않을 수 있다면 늙은 아버지는 훗날 그 죄
를 면할 것이다.너희들은 각기 유념할지어다.115)
이 편지에서 류범휴는 자식들의 잘못은 바로 부모의 죄가 됨을 경계하면서,
자식들이 가문의 법도를 이어가도록 하기 위해 학문에 정진하여 가문의 명성을
실추시키지 않도록 당부하고 있다.
壽靜齋柳鼎文(1782〜1839)는 류범휴의 次子이다.그는「窾啓雜識」을 지어
자신이 공부하면서 가정에서 배웠던 교훈을 후손들에게 전하였다.그 서두에
말하기를 “‘한 자를 읽으면 한 자를 행하고,한 구를 읽으면 한 구를 실천하라’
고 한 말은 30년 동안 過庭에서 들은 바는 오직 이것뿐이다.지금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외롭게 훈계로 삼는 것도 또한 이것뿐이다”116)라고 하면서 학문에
있어 知行一致를 강조하면서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그는 또 조
카들에게 “너의 議論은 언제나 의리로써 하니 실천에 힘쓰라”117)고 하고,혹은
“네가 공부하는 것은 枝葉으로 가고 있으니 어찌 本源에 유의하지 않는가”118)
라고 하며 일일이 훈도하는 세심한 교육자세도 보여주었다.
素隱柳炳文(1766∼1826)은 류정원의 손자로 柳徽文의 형이다.7세 때부터
『史略』을 배우기 시작하였고,11세 때부터는 서책과 필묵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9세에 아버지를 잃고,21세부터 류장원․류범휴․남한조 등에게 수학하였
다.41세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두문불출하고 四書와 宋賢의 서적을 熟
覽하고 퇴계와 대산의 학문에 심취하였다.특히,眼疾로 서적을 볼 수 없게 되
115) “吾兄弟晩得爾曹 但愛之而已 敎導則全未而居然次第勝冠矣 幸爾曹天質不甚乖悖 不至有他虞 然律之以
法家規模向上事業 則蓋遠甚焉 今余老病沉淹 其勢不可以久遠期 而爾曹因循失學 日甚一日 以至於索性汚下
墮落家聲 則徒愛不敎之罪 有所歸矣 玆用强病寫此 竊效古人付簡之意 爾曹庶能銘心誦習 不敢忘忽 則老父
他日亦與有免矣 爾曹其各念哉” (柳範休, <書示兒姪>, 『壺谷集』卷9「雜著」.)
116) “讀一字 行一字 讀一句 踐一句 三十年過庭所聞 惟此而已 今孤露銜訓 亦惟此”(「窾啓雜識」,『壽靜齋
集』卷7,「雜著」.)
117) “進兄子致任而語之曰 爾議論 每傳義理 須務充其實”(<柳致明, <行狀>,『壽靜齋集』卷12,「附錄」.)
118) “謂致儼曰 爾所業 終涉枝葉 盍於本源上留意乎”(<柳致明, <行狀>,『壽靜齋集』卷12,「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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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평소 공부하던 四書의 구절을 암송하자 子姪들이 만류하기까지 하였다한다.
그는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임종에도『논어』구절을 외우면서 운명
을 맞았고,주변 인물들에게는 ‘아이들이 힘에 부족한 일은 절대 금지하라’,‘힘
써서 사람 되는 도리를 다하라’라고 당부하였다.그가 가학의 전통을 잇고자 한
가정교육의 의지는「述先訓銘幷序」를 통하여 祖父인 류정원의 유훈을 계승하
고 후손에게 전하려하였다.119)
好古窩柳徽文(1773〜1832)은 柳炳文과 함께 族祖인 류장원에게 수학하면서
퇴계와 대산의 학문 요결을 듣고 “학문의 법은 모두 여기에 있다.”고 하면서
그 학맥을 후학들에게 전수하고자 하였다.그의 저술을 통해 볼 때,동몽교육에
있어서 특별한 관심을 보이며 기본적인 방법을 강구한 면을 볼 수 있다.年譜
에 의하면,그는 43세(1815)되던 해에 자제들의 공부장소가 없음을 걱정하여
‘東園書塾’을 건립하였는데,落成式의례에 있어 독실하게 ‘古禮’에 의거하여 예
법에 관한 모범을 보여주었다.120)
다음은 류병문이 지은「東園書塾記」의 일부이다.
(전략)灑掃應對와 入孝出恭은 인격을 陶冶하는 기본이니 제군들은 반드시 講磨하여
익혀야 한다.科擧와 文辭와 같은 공부에 이르러서는 곧 祖宗朝이래로 用人의 한 방법
이니 또한 儒家사업의 하나이지만 三物四術121)의 가르침에 본말경중의 분변이 있음이
드러나니 제군들은 아마 알지 않겠는가!원컨대,제군들이 여기[동원서숙]에서 노닐고 이
곳에서 거쳐하며 경전에 침잠하고 도의를 강마하면서 스스로 높다 자랑하지 말고 물결
에 휩쓸려 세속에 따르지 않으며,일용 간에 정해진 본분과 규모를 잃지 않고,심상 중
에 스스로 범접할 수 없이 우뚝한 기상을 가지고,의복과 음식은 성현의 법에서 벗어나
지 않으며,고인의 책을 읽고 시문을 짓는 노력은 각자 처지에 따라하되 해이하거나 나
태함이 없다면 덕행과 문장이 안팎으로 일치시켜서 때를 만나든 그렇지 않든지 간에 잃
지 않고 가정과 국가의 賢君子가 되길 바란다.(후략)122)
119) “不肖孤 蚤歲失怙 其於奉生事亡之絶 卽皆闕如 每念及此 不覺汗流涕零 無地自存 竊嘗聞古人一出言 一
擧足 不敢忘父母 凡爲人子者 患不能孝耳 奚患乎做孝之不及乎 惟我先君 不以不肖而不愛 不以不才而不敎
常以小子之不若人爲憂 至發於尋常言語之間者 多激頑起頹之訓 而彼時小子之癡騃 甚於今日 不自知其言之
眞切於吾身 小子今日之痛 爲何如哉 嗚呼 難立者志也 難制者氣也 氣之所昏志隨而懈 自念因循玩愒 無以激
勵其志意 因追記先君之熏以爲銘 ‘皇考有言 命數在天 榮達奚望 學行居先 人曰 某家有士如斯 我庸希汝 㝠
目以期 洋洋一言 宛其盈耳 念玆皇考 上下庭止 小子夙夜 敢不克念 擬保親枝 庶效無忝’”(『素隱集』卷4,
「銘」.)
120) “(純祖大王) 十五年乙亥 先生四十三歲 上立齋先生書 稟庸學疑義 〇東園書塾成 先生憂子弟肄業無所 依
山點地 營立小屋 率諸生以落之 製玄冠 先生篤信古禮 製玄冠爲燕居之用 又製緇冠以備始加之用 嘗曰 以此
見古人 古人必莞爾而笑”(「年譜」,『好古窩文集附錄 』,卷1.)
121) 三物은 六德(知ㆍ仁ㆍ聖ㆍ義ㆍ忠ㆍ和), 六行(孝ㆍ友ㆍ睦ㆍ婣ㆍ任ㆍ恤), 六藝(禮ㆍ樂ㆍ射ㆍ御ㆍ書ㆍ數)
를 말하고, 四術은 詩ㆍ書ㆍ禮ㆍ樂을 말한다.
122) “灑掃應對 入孝出恭 是基本坏樸也 諸君必講之熟矣 至若科擧文辭之習 乃祖宗朝以來 用人一路 則是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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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문에서 알 수 있듯이,그의 교육철학은 가정교육의 기본인 灑掃應待
와 효제충신을 벗어나지는 않는다.서숙의 건립목적을 이 두 가지에 두면서 本
末과 輕重을 분변하고 경전을 통하여 도의를 강마하기를 원한다.이렇게 동원
서숙을 통하여 文行의 일치를 갖춘 가정과 국가의 군자를 만들고자 하였다.
류휘문은 교재편찬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29세에『小學』을 기본으로,
朱子이후 儒賢의 사적과 우리나라 先儒들의 언행을 채집하여 ‘嘉言’․‘善行’3편
으로 구성한『小學後篇』을 편집한 적이 있었다.또 58세에는『小學章句』․
『小學童子問』을 저술하였는데,자신이 쓴「小學章句序」에서 朱子의『小學』
을 토대로 그 本源과 함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데 목
적을 두었다.123) 『小學』이 訓蒙敎材로써 인륜의 회복과 풍속의 교화에 중요
한 것인 만큼 크게는 나라 전체의 교화를 위한 목적을 두었으나 결국에는 자신
의 문중 후학들에게 길을 제시하고자 하는 목적이 더욱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小學童子問』서두에서 그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이 책은
歐陽脩의「周易童子問」과 輔慶源124)의「詩傳童子問」을 본받아 저술된 것으로
『소학』에 대한 요점을 정리하여 어린 아이들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이다.그
일부를 보자.
〇동자가 묻기를,“선유들의 소학 주석은 단지 文義를 해석함에는 부족함이 없는 듯한
데,지금 반드시 그 章句를 분석하여 그 조례를 진술함이 이와 같이 상세하게 한 것은
과연 信心과 日常生活에 또한 상관이 있겠습니까?
〇대답하기를,“대개 독서하는 법은 오직 聖賢의 格言을 깊이 체득하여 力行해야만 한
다.이 조례를 편집한데 있어서는 그것과 비교하여 가벼운 듯 하지만 그 조례의 은미하
고 치밀한 곳에 있어서 만약 얻는 바가 없다면 이른바 격언은 모두 歸趨를 발견할 수
儒業中一事 而視諸三物四術之敎 有本末輕重之分 諸君其知之乎 願諸君遊於斯 息於斯 沈潛經傳 講劘道義
毋標榜以自高 毋隨俗以奔波 日用間 無失素定規模 尋常中 自有壁立氣像 裘褐飮食 不出乎聖賢成法 而讀古
書做時文之工 各隨地頭 而無或弛慢 則德行文章 內外一致 而遇不遇幸不幸之間 不失 爲家國之賢君子矣”
(『素隱集』,卷4, 記.)
123) 柳徽文,『好古窩文集』卷18. 그는 서문에서 “朱夫子의 소학이라는 책은 옛날 8세만 되면 입학해서 교
육하던 遺法이다. (중략) 우리나라에 와서는 列王이 학교를 세워 유학이 일어나 본서의 주해를 모두 취
집하였으나 본서의 종지는 인륜과 예악의 밖에 있지 않은데 가만히 총목 편장의 분석을 보니 빠뜨린 바
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일찍이 본서를 오랫동안 연구해서 조금 알기에 주자의 說 가운데서 그 요령을
얻어 가히 증거가 되는 것은 참람함을 무릅쓰고 채록하여 보수하고 경전의 주소와 그 논단한 것을 채취
하고 또 제가의 설을 취하여 일서를 만들어 當代의 군자에게 질정을 받으려 하니 그 인간을 만들고 풍
속을 이루는데 있어서 어찌 감히 가당하겠는가만은 우리 가정에서 훈학하는데 萬一이라도 조금은 도움
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124) 慶源 : 주자의 문인 輔廣의 本貫. 자 漢卿, 호 潛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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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으니 자기의 공부로 또한 요령을 얻지 못할 것이다.어찌 이것이 급하지 않다고 하여
그만둘 수 있겠느냐?125)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그는 자신이『소학』을 연구하고 분석한 이유를 설
명하고 공부하는 방법에 있어서 반드시 성현의 격언의 은미함을 체득하여 힘써
실천할 것을 동몽들에게 다시 한 번 역설하고 있다.
定齋柳致明(1777〜1861)은 직접『定齋小學』126)을 찬술하였다.앞표지 裏面
에는 ‘奎始開’라는 세 글자가 墨書되어있다.奎星은 文을 관장하는 별로 이 소
학을 통해 筆寫者는 從子의 학업이 이루어지길 내심 바랐을 것이다.127)贈書記
의 ‘竢神駒驤’에는 조카의 앞날을 축원하는 贈書者의 자상한 마음이 깃들어 있
다.필사자가 기록한 ‘神駒驤’字句는 ‘孤鳳翔’과 對句로 장차 遠遊할 조카의 앞
날에 이 책을 통해 孤鳳이 날고 神駒가 달리길 기대하였다.128)이는 필사자로
부터『定齋小學』이 童蒙들에게 文을 시작하는 하나의 교재로 삼을 수 있다는
125) “〇童子問;先儒小學之註 只釋文義 似無不足 而今必分析其章句 指陳其條例 若是詳焉 其果於身心日用
亦有所關歟 〇曰;大率讀書之法 惟當深體聖賢格言而力行之 至於次輯條例比此似輕 然其於條例微密處 若無
所得 則其所謂格言都不見其歸宿 而自己工夫 亦欠要領 其可以此謂之不急而遂已乎” 문헌총간 제10집 소
학동자문 413쪽
126) 이 소학은 2000년대 초 한 고문서 수집가에 의해 발견되어 필자가 소장하게 되었다. 필사본 형태로
傳하고 있다. 藍色 표지에 墨書된 ‘小學’이란 첨지가 좌측 상단에 첨부되어 있다. 이 필사본의 본문 말
미에 行을 달리하여 ‘右 定齋先生所撰’이란 後記가 있어 定齋 柳致明의 찬술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외에 ‘定齋’란 호를 사용하는 인명으로 郭越(1518~1586), 朴泰輔(1654~1689), 柳菶(1538~1596) 등
이 존재하나 이 자료의 末句 ‘非我耄荒’의 ‘耄’의 訓(耄는 70세, 80세, 90세를 뜻하나 70세는 ‘耋’ 字가
많이 쓰인다)과 56行의 ‘或忝科第’(이 句 뒤로 부터 조선 후기 과거제도의 문란을 기술하고 있다)를 참
작하여 정재는 유치명으로 확인된다. 그 후면에는‘ 歲靑馬黃梅月 書贈此○○從豚兒 以竢神駒驤’라는 贈
書記가 기록되어 있어 정재가 소학을 편찬한시기와 전사자의 필사시기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를 통해『정재소학』이 찬술된 시기는 대략 1857년(81세) 전후로 추정할 수 있고, 이것을 후세
에 전한 傳寫者의 필사한 시기는 1894년 6월로 확인된다.
127) 필사한 시기를 추정해보면, ‘歲靑馬 黃梅月’에서 청은 甲과 乙을 대신하고 馬는 午를 뜻하므로 갑오년
이 된다. 10干과 12支의 조합에서 甲午만이 결합하기 때문이다. 黃梅月은 6월 이므로 筆寫者가 조카에
게 證書한 시기는 곧 갑오년 6월이다. 정재의 生沒은 1777~1861이다. 그러므로 1777년 이후의 갑오년
은 1834년과 1894이다. 표지와 속지의 지질의 상태로 보아 필사자의 필사 시기는 일견 1834년인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정재가 소학을 편찬한 시기는 1834년 이전으로 추정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필
사본의 지질로 필사시기를 추정하는 것은 60년 단위의 干支에서 정확성을 기대하기는 의문스럽다. 한편
이 소학 본문의 마지막 두 句는 ‘庸示稚蒙 匪我耄荒’이다. 곧 ‘이로써 소학을 편찬하여 稚蒙에게 보여
주는 것은 늙은이의 荒荒함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耄의 의미는 90세 80세 70세로 쓰인다. 정재의 行年
은 85세이므로 70대나 80대에 편찬하였다. 그런데 정재는 1855년(79세) 장헌세자의 추존에 대한 소
를 올렸다가 유배 안치된 후 석방되었고, 1857년(81세)에는 제자들이 지어준 雷巖의 晩愚齋에서 후진
을 지도하였다. 이런 제반 상황을 고려하면 정재의 소학은 만우정 시절에 지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재소학』의 전사자가 그의 조카에게 증서한 시기는 1894년 6월이다.
128) 朱子의『晦庵集‧逺遊篇』의 구절 “上有孤鳳翔 下有神駒驤” 중 뒷부분으로 조카의 앞날을 축원하고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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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를 받았던 일면이다.
守齋柳致喬(1790〜1862)는 류휘문의 장자로서 평소 자손들에게 “祖先의 遺
訓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훈계하였다.그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교훈을 다음과
같이 후손에게 전하고 있다.
옛날 朱夫子가 소학을 편집하여 고인의 嘉言과 善行을 모아 후세의 법으로 삼았으니,
그 중에 柳開의 할아버지 훈계129)가 가정과 형제의 법도에 가장 간절하다.아버지께서
매양 그 말을 큰 소리로 모든 子婦들에게 애송하셨다.종종 말씀으로 훈계하시고 또 아
녀자의 말에 유혹되지 않음을 治家의 요결로 삼으셨다.불초 등은 비록 지극한 가르침을
받들지 못하는 것이 죄스러우나 당시에는 한 방의 남녀가 숨을 죽이고 서로 경계하여
서로 말을 하지 못한 것은 진실로 아버지의 유훈이 耳目에 젖어있기 때문이다.(중략)아
이들에게 외우고 익히게 하여 밤낮으로 경계하여 대대로 온 집안의 계책으로 삼는다고
이른다.130)
方谷柳洛文(1766〜1807)는 柳泰休의 아들이자 柳健休의 조카이다.그는 임
종에 조카 小隱柳致球에게 이르기를 “나는 평생에『소학』을 尊信하기를 神明
과 같이 하였으니,너도 모름지기 나의 뜻을 體念하여『소학』을 읽어 잊지 않
게 하라.”고 하였다.
修齋柳廷鎬(1837∼1907)는 류복기 이후 수곡파 先代문집과 遺文에서 모범
되는 행적과 교훈을 발췌,집성하여 語行錄體형식으로「完山家訓」을 완성하
였다.편성 시기는 ‘癸巳年’으로 1893년이다.인용한 서목은『岐陽世稿』․『慵
窩集』․『陽坡集』․『蘆厓集』․『東巖集』․『定齋集』등 15편의 선대 문
집이고,‘檢身’․‘家道’․‘處事’․‘出處’․‘治道’․‘爲學’등 6조 아래 23목 340례의
형식으로 구성되었다.그는 小識에서 그 大體를 ‘身心倫常’에서 시작하여 ‘日用
應接’에서 맺어 학문을 하는 절도로써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취지를
밝혔다.131)특히,세상의 법도가 쇠퇴해 가고 가업과 가학이 사라지고 무너져가
129) “柳開仲塗曰 皇考治家 孝且嚴 朝望弟婦等 拜堂下畢 卽上手低面 聽我皇考訓誡 曰 人家兄弟 無不義者
盡因娶婦入門 異姓相聚 爭長競短 漸漬日聞 偏愛私藏 以致背戾 分門割戶 患若賊讎 皆汝婦人所作 男子剛
脹者幾人 能不爲婦人言所惑 吾見多矣 若等寧有是耶 退則惴惴 不敢出一語爲不孝事 開輩抵此賴之 得全其
家云” (「嘉言」廣明倫,『小學集註』卷5, 春坊藏板, 乙亥新刊, 영인본, 학민출판사. )
130) “昔朱夫子編輯小學 取古人嘉言善行 以爲後世法 則其中柳開皇考之訓 最切於人家兄弟之倫 吾先君子 每
愛誦其言大諸子諸婦 往往提說而訓誡之 且以不聽婦人言 爲治家要訣 不肖等 雖不能奉承至敎爲可罪 然當時
一室男女 惕息相戒 人無間言 實由於先訓之擩染於耳目也(중략)使兒輩誦辭服習 夙夜戒飭 以爲世世全家策
云之” (柳致喬,<書示兒輩>,『守齋集』권2.)
131) “昔年 妄嘗蒐聚家先訓語 始自身心倫常 迤及日用應接終之 以爲學節度質之 季父不以爲可棄 而因懼其僭
猥 不敢示人 及此衰頹 日見家緖蕩覆 始乃閱而讀之 雖其條例 未甚淨洗 而撮其始末人道之大要備矣 卽此而
誦念 便是今日耳提面命 何恨乎晩生未及哉 聊繕寫以付家門 後承幸無以一時漫輯而忽之也 癸巳 黃華節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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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후손들이 선대의 유훈을 본받아 소홀히 하지 말 것을 간
절히 당부하였다.이 가훈이 19세기말에 저술된 점과 ‘家訓’이 갖는 자체의 의
미를 고려한다면,인성 배양과 실천 중심의 ‘家學’즉 ‘家庭敎育’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여 당시 시대상황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며,미래에 가학의 단절을 염려
한 것이다.
이상으로 수곡파가 가학전승의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각 세대별로 대표적인
교육방법을 살펴보았다.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방법적인 측면에서는 먼저,특정 한두 사람이 대상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교
육방법을 취하였고,성장과정에 단계적으로 새롭게 길을 제시하였다.둘째,岐
陽書堂을 비롯하여 亭子․書塾[書齋]등의 강학의 공간을 적극적으로 마련하고,
그 강학대상이 한 두 사람을 두고 가르친 것이 아니라 문중의 자제들을 함께
모아 교육하면서 구체적인 훈계내용을 담은 箴․銘등을 지어 가시적인 방법을
활용하였다.셋째,敎育指針書와 學令등의 구체적인 조목을 규정하여 실천적
방법론을 제시하였고,동몽교육의 기본교재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는『小學』등
을 중심으로 한 별도의 교육 자료를 자체적으로 편찬하여 학습교재로 삼았고,
선대의 행적과 언행을 총집한 ‘家訓’등을 만들어 후손들의 모범으로 삼았다.
내용적인 면에 있어서는,수곡파는 ‘글[文]’을 바탕으로 하는 훌륭한 선비를
배출하고 전대의 유업을 계승하는 것이 世代를 거칠 때마다 당면과제였다.따
라서 그들의 동몽교육의 내용은 일상과 관계된 것까지 포괄하는데,결국은 모
두 ‘爲己之學’으로 통한다.이를 위해 독서와 학문에 있어서 성현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소학』을 비롯한 경전을 중심으로 하고,가까이로는 退溪-鶴峯-
大山으로 이어지는 퇴계학풍을 이어갈 것을 권고하는 내용이다.
요컨대,수곡파의 동몽교육의 핵심은 성현의 법도인 灑掃應待와 효제충신을
바탕으로 代를 거칠 때마다 해당 교육자들은 자신의 경험과 선대로부터 물려받
은 유훈을 직간접적으로 再傳하는 데 있다.그들은 科擧를 통한 立身揚名의 길
을 택하기 보다는 爲己之學을 목표로 하는 소위 ‘훌륭한 선비[士君子]’가 되도
록 하기 위한 인륜의 덕목과 소양,학문적 지식을 담은 내용을 교육하였다.이
러한 동몽교육의 결과는,현실 사회에서 時事의 변화에 따라 애국애족하며 명
분과 소신에 따라 행동하는 실천적 모습으로 발현되었고,다수의 문인과 학
자․관료를 배출시키거나 혹은 초야에 묻혀 학문과 강학에 전념하는 등 수곡파
생활 전반에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132)
山 柳廷鎬 謹識” (柳廷鎬,『修齋集』卷8.)
132) 『안동무실마을-문헌의 향기로 남다』,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2008. p273~30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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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傳承方法의 核心-家系內的師承關係의 形成
특정의 사상과 학문에 있어서 가시적인 師承關係는 학맥과 학문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가학의 사승관계와 관련하여 李樹健교수는
“15세기의 성리학은 결코 士林派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시각에서 학문적인 연원
과 계보가 새로 정립되어야 하며,사실 당시에 있어서 학문적인 수수관계는 가
학이 중심이었음을 인식해야 한다.한 가문에 있어서 학문적인 傳授는 父子․
兄弟․舅甥등 가학이 중심이 되었다.지방출신이 처음 上京從仕하거나 鄕貢
으로 진출한 것은 특출한 경우겠지만,일단 학덕을 겸비한 인물이 나왔을 경우
에는 그 인물을 중심으로 一門에 仕宦과 學問이 계승되었던 것이다.”라고 하고,
아울러 麗末鮮初崛起한 명문들 가운데 가학을 계승한 아홉 가문을 들어 예시
하고 있다.133)
수곡파는 16세기 중엽 복거할 당시 류복기는 退溪의 학맥을 嫡傳한 외숙 鶴
峯의 문하에서 학문을 하였다.이것이 수곡파 가학의 시발점이 되었고 연원이
었다는 것은 이미 전술한 바 있다.이후 수곡파가 각 시대별로 배출한 文人과
학자들 중 몇몇은 대외적으로 당대 학자들의 門人이 되기도 하였고,한 스승아
래 동문수학하고 교유하면서 학문의 범위를 넓혀간 경우도 있다.이와 같은 사
례는 家系別로 일시적으로 단절될 수 있는 가학의 맥을 잇거나 가정에서 授受
해오던 자신들의 학문범위를 심화하고 발전시켜주는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수곡파는 시대별로 학덕을 겸비한 인물이 나왔을 경우 家系內的사승관계를 자
연스럽게 구축하면서 가학을 전승하였음을 알 수 있다.
먼저,수곡파 내 사승관계의 맥락에 대해서는「嶺南地域의 退溪學脈圖」(이
하 ‘「학맥도」’)에서 요약하여 보여주고 있다.134)「학맥도」에서는 16세기 중반
柳復起․柳復立형제로부터 시작하는 가학의 맥이 17세기 초에 百拙庵柳㮨․
柳搘․柳挺輝등에게로 이어져 17세기 말〜18세기까지 柳敬時․柳升鉉․柳觀鉉
등에게 이어진 후,18세기〜19세기 초까지 柳道源․柳長源․柳正源․柳範休등
으로 이어진다.또다시 이들의 학문은 19세기 중반까지 壺窩柳顯時․柳健休․
柳鼎文․柳致明등에게 이어진 후,19세기 중반〜20세기 초반까지 東林柳致
皜․起軒柳致任․修齋柳廷鎬․石隱柳基鎬․博羅柳肯鎬․西坡柳必永등에게
133) 李樹健,『嶺南士林派의 形成』7쪽,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0.
134) 한국국학진흥원, 2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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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진다.마지막으로 20세기 초․중반이후는 汎庵柳淵楫․恬庵柳淵龜․東山
柳寅植․晩山柳昌植등에게 전해지는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이「학맥도」에
올라 있는 인물의 수는 모두 26명으로,수곡파의 학맥 흐름을 어느 정도 이해
할 수는 있으며,이들 모두가 문집과 저술을 남기고 있어 학문적 역량은 인정
된다고 본다.다만 이「학맥도」는 간략히 요약한 것으로,수곡파 가학의 구체
적 흐름을 살피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따라서 본절에서는 수곡파의 대표 인
물들의 행적을 통해 사승관계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수곡파 가학은 3세대이면서 가학전승 상 첫 세대인 류우잠 代까지는 부자․
형제 간의 사승관계를 통해 전승하였다.류우잠을 기록한 유사에는 그가 매일
다섯 동생들과 함께 지내며 항상 기쁘게 지내고 가르치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
고 기록하고 있다.또 병이 들어 위중할 때에도 여러 동생들에게 경계하며 말
하기를,“너희가 각자 행동거지를 삼가서 삶에 욕됨이 없다면 나는 유감이 없
다”135)라고 하면서 아버지를 대신해 동생들을 훈도하는 스승이었다.
다음은 冶溪柳㰒의「묘갈명」중 첫 부분이다.
아!우리 陶軒[柳友潛]부군께서는 덕을 품었으나 과거에 나아가지 않고 오직 詩書를
닦고 몸소 孝悌를 실천함을 가르침으로 삼아 집안에 전하셨다.가정의 교육을 받은 五龍
[류우잠의 다섯 아들]은 모두 그 아름다움을 계승하여 세상에 이름이 났다.(후략)136)
이후 류우잠의 나머지 다섯 형제들과 그 후손들은 수곡 주변 일대로 分家하
면서 부자․형제간의 사승관계를 점차 가문 전체로 확대해가기 시작한다.전체
적으로 수곡파의 가계 내 사승관계는 여러 세대를 거치고 후손의 수가 번창하
면서 대단히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따라서 문집 및 유고를 남긴 자와 생원․
진사를 포함한 登科者중 세대별로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을 선정하여 수수관계
를 확인하였다.아울러 家系上直系關係(예를 들어 祖父-父-孫子등)에 있는
인물들은 대부분 기본적인 동몽교육[가정교육]을 통하여 전수된 것으로 간주하
여 설명에서 제외한 경우도 있으나,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부분은 인물에 대한
관련기록과 참고문헌도 일부 참고하여 간략히 언급하였음을 밝혀둔다.137)논의
135) “崇禎乙亥年六十一 寢疾臨終 顧諸弟曰 各愼爾止 無忝所生 則吾無憾矣”(柳晦文, <遺事>,『陶軒逸稿』
下,「附錄」.)
136) “惟我陶軒府君 抱德不試 惟以業詩書躬孝悌爲敎 而傳家趨庭 五龍皆繼佩承綦以名于世”(後略) (柳必永,
<墓碣銘幷書>,『冶溪遺稿』下,「附錄」.)
137) 대표적인 참고문헌으로는 권오영,「전주류씨 수곡파의 가학연원과 사상적 특징」*표 ‘전주류씨 수곡
파의 주요학자와 저술’,(『조선후기 양반가의 생활상』,한국국학진흥원,2004.)과 「성씨별 인물」(『安東
市史』권5, 안동시사 편찬위원회, 안동시청, 1999.)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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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의 편의와 이해를 돕기 위해 주요 인물들이 속한 上祖別로 구분하였다.다
시 말해서,수곡파 가학이 본격적으로 전승되기 시작하는 3세대인 ‘陶軒柳友
潛’系․‘龍巖柳知潛’系․‘柳希潛’系․‘水南位柳垣[柳城의 아우]’系로 구분하
였다.138)또 11세대 이후는 定齋柳致明을 스승으로 삼는 凡水谷派的사승관계
가 형성됨으로 설명을 생략하였다.
(1)陶軒柳友潛系:柳復起長子,3세대.5男(橚․稷․㮋․㰒․格)
4세대에 이르러 류우잠 계에는 柳㮨이 중심에 있다.그는 류우잠의 차자로
서,1630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독서를 즐기며『中
庸』과『大學』등의 경전 연구에 힘썼다.그는 학문에 전심하며 후진양성에 심
력을 바쳐,그 문하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기도 하였다.수곡파에서는 그의 아
우인 柳㰒과 柳希潛계의 족제 柳榰등이 제자가 되었고,5세대인 조카 柳挺輝
및 水南位계의 鰲潭柳啓輝등과 柳敬時[류학의 손자]․柳顯時[류계휘의 아들]
등 족손인 6세대에게 직접적으로 전해졌다.
5세대 水谷派宗孫인 柳振輝는 靈巖柳橚의 장자로 詩文에 능했다고 한다.
그는 顯宗元年1659년에 진사에 합격하였으며,장자 柳宗時․차자 檟亭柳奉
時형제에게 그 학문을 전하였다.
6세대 류종시는 생원으로 密庵李栽․荷塘權斗寅․玉川趙德隣등과 교유
할 만큼 학문적으로 인정을 받았던 인물이었다.그의 학문은 장자 生員月會堂
柳元鉉에게 전해지면서,10세대 생원 松皐柳廷燁을 거쳐 12세대 洙谷柳家鎭,
13세대 洗心齋柳泰永,14세대 慵坡柳東植,15세대 鮮原齋柳鼎熙,16세대 匯
溪柳建宇등에게 차례로 전해지면서 수곡파 宗家의 학맥을 이어갔다.한편,류
봉시는 철저한 가정교육을 통하여 7세대 柳升鉉․柳觀鉉두 아들을 문과에 급
제시키며 류우잠계 가학의 1차 전성기를 맞이한다.
7세대 류승현의 학문은 아우인 류관현을 비롯해 8세대인 장자 류도원․조카
류장원 및 류정원․9세대 족손 遯坡柳龜休에게 전수되었으며,심지어 류복기
의 三子류지잠의 10세대 족증손 鵝山柳潤文이 그의 제자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류승현과 같은 7세대 류관현의 학문은 자신의 從高祖父인 류지잠 계의
현손이자 족제인 松陰柳和鉉등에게 전하였다.그의 가학은 8세대 류통원․류
138) 류복기의 다섯 아들의 후손들 중 문집 등 저서를 비교적 많이 남겼거나 객관적으로 가학을 전승한
증거가 뚜렷하다고 나름대로 판단되는 3명을 선정하였다. 아울러 ‘류원’계는 분가 당시 ‘水南’에 세거하
여 엄격하게 말하면 수곡파라고 하기에는 무리일 수 있으나, 곧 수곡파 분파지역 중 하나인 박곡으로
이거하였고, 특히 입향 5세대에 류계휘는 류우잠의 막내아들 류격의 아들로 출계하였기 때문에 모두 수
곡파라고해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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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류장원 등에게 이어진 후 寒坪柳晦文- 柳致明- 洗山柳止鎬- 水村
柳淵博-一蒼柳東蓍등에게로 직접적으로 전수되어 사승관계를 형성하였다.
류우잠 계는 7세대에 이르러 류승현 형제 등 문과 급제자를 내는 등 수곡파
가학 전반에 전성기를 맞이하기 시작하여 8세대에 이르러서는 학문적으로 더욱
꽃을 피운다.그 중 류도원의 학문은 다시 류승현의 제자이자 出弟인 류장원․
9세대 장자 류범휴와 조카 柳星休․10세대 손자 柳魯文과 류정문․족손 류회문
에게 전해졌다.류도원에게 공부한 류장원도 족손 류정문에게 전하는 상호보완
적 수수관계를 형성하였다.또 그의 학문은 가까이는 장자 柳川休․손자 龜峀
柳約文․종형제인 江浦柳弘源등으로,멀리는 류지잠 계의 조카 류건휴․족손
류병문․류휘문․雅谷柳斗文․류락문 등 9,10세대 후손들에게 전해졌다.
그 중 류장원의 학문전수에 있어서 주목할 점은 수곡파 11세대 족증손 류치
명이 그의 제자라는 것이다.류치명은 류관현의 현손으로 조부 류성휴․아버지
류회문을 포함해 자신의 직전 세대의 여러 학자들로부터 학문적 영향을 받았음
은 당연할 것이다.게다가 당대의 巨儒인 從曾祖父류장원을 嫡傳하여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다.
류정원은 萬嶺柳益輝의 증손이다.그는 류승현의 제자가 된 후 10세대에
손자 류휘문에게 가학을 전수하였다.류휘문은 류정원의 현손인 同窩柳衡鎭에
게 전수하였다.류형진은 자신의 학문을 13세대 조카 柳必永에게 전한 후 14세
대 柳寅植에게로 이어졌다.
류직의 직계로는 증손인 7세대 樸齋柳錫斗와 8세대 柳光濂부자가 그 학문
을 이어갔으며,이들은 모두 이현일의 문인이기도 하였다.또 류우잠의 3자인
류욱의 현손 余隱柳元源이 가학을 이어 생원이 되었으며『軀書』의 저자이기
도 하다.
류우잠의 4자이자 仲兄류직의 제자였던 柳㰒은 손자 류경시를 다시 류직의
제자가 되게 하여 함께 가학을 전수받았다.류경시는 문과에 급제한 후 관직생
활의 청렴함으로 淸白吏에 祿選되는 등 안팎으로 덕행과 학문의 성취를 이루었
고,그의 학문은 다시 아들인 綠筠軒柳晉鉉과 葛天窩柳師鉉형제에게 전승되
었다.또한 8세대 류진현의 아들 柳弘源은 아버지의 교육을 받으면서 族從인
류장원의 제자가 되어 맥을 이어갔다.
이상에서 류우잠 계의 사승관계를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여기에서 주목할
사실은 수곡파 11세대에 이르러 ‘柳致明’이라는 인물을 배출함으로서,그를 중
심으로 가학의 사승관계가 가문전체에 정립되었다는 것이다.이는 류치명 문인
들을 기록한「定齋門人錄」에 수록된 친족인물의 수와 범례를 보면 구체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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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있다.그의 친족 제자 수는 叔行에 南棲柳聖文을 비롯한 9명[10세대]․
同行에 近庵柳致德을 비롯한 38명[11세대]․姪行에 柳廷鎬를 비롯한 40여명[12
세대]․孫行에 柳必永을 비롯한 10여명[13세대]등 70여명 이상이다.이와 같이
류치명을 스승으로 삼은 수곡파 사승관계는 무려 上下4세대를 아우르고 있다.
또한,다수의 제자들은 용암 류지잠 계와 수남위 류원 계의 친족들까지 포함하
고 있는데,이는 수곡파가 11세대에 이르러 류치명을 중심으로 하는 凡水谷派
的사승관계를 구축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 점은「정재문인록」‘凡例’
중 마지막 조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문내 친족 자질들은 직접 배운 高弟가 대부분이고,그 나머지는 모두 책을 끼고 공부
하러 온 자이기 때문에 혐의하지 않고 그 대부분을 함께 차례대로 싣는다.139)
범례에서 보듯이,문인록에 다 기록하지 못한 제자를 포함하면 그 숫자가
상당할 것으로 판단된다.따라서 이후의 수곡파 가학의 수수관계 논의과정에서
수곡파 11세대 이후를 언급한다는 것은 무의미할 것으로 본다.그러므로 류지
잠 계 이후부터는 각 상조 이하 10세대까지로 한정하여 논의를 진행하고,류치
명 세대[11세대]이후의 사승관계에 대해서는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별도로
언급하지 않는다.
(2)龍巖柳知潛系:류복기 3子,3세대,2男(檊․檼)
『大同譜』에 의하면,류지잠은「呂氏鄕約」을 節略하여 가문에서 실천한
인물이다.류지잠 계의 주요한 인물로는 7세대인 柳和鉉과 9세대인 柳健休․柳
韶休[生員]형제,10세대인 柳潤文․雅谷柳斗文․柳洛文등이 있고,11세대에
는 류소휴의 아들인 柳致德과 류두문의 아들인 柳致球등이 있다.
7세대 류화현은 류우잠 계의 족형인 류관현에게 수학한 이후 손자인 류건휴
와 류소휴 형제에게 자신의 학문을 전하였다.류장원의 제자이기도 했던 류건
휴는 류소휴의 손자이자 류치명의 제자인 류치덕과 족손인 류치구에게 전하였
다.
류지잠 계의 冑孫인 10세대 류윤문은 류치명의 문인이 되어 종형제인 류두
문과 류락문 등과 함께 그 학문적 역할을 14세대 野人柳東銖,16세대에 水宇
柳建斗등에게로 전하면서 가학을 이어갔다.
139) ‘門親子姪多親炙高弟 而其餘俱是挾策受業 故不嫌 其多一倂序錄’ (<범례>, 『문헌총간 』권12,「정재
문인록」, 안동수류문헌간행회,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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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參判公柳希潛系:류복기 5子, 3세대.2男(椲․榰)
류희잠 계의 주요 인물로는 입향 4세대에 종형 류직의 문인인 류지와 류경
휘 부자가 있다.류지의 가학은 그의 증손이자 7세대인 생원 羅隱柳台齊가 이
어갔으며,11세대에 이르러 柳致皜140)와 養眞窩柳致碻이 류치명의 문인이 되
면서 가학을 전수하였다.
(4)水南位柳垣系:入鄕祖柳城의 弟
수남위 계의 주요인물로는 그의 현손이자 5세대 柳啓輝와 柳顯時부자와 7
세대 博村柳宅鉉등이 있다.
5세대인 류계휘는 族父인 류직의 문인으로 進士였다.4세대 류현시도 族祖
인 류직의 문인이 되어 류계휘와 함께 부자가 제자가 되었다.류현시의 학문은
7세대에 아들 류택현이 이어갔다.류택현은 아버지의 교훈을 이어 받으면서 한
편,보기 드물게 류우잠 계의 10세대인 족증손인 류정문․류휘문 등을 스승으
로 섬기며 수학하였다.이후 수대를 지나 11세대 嘉齋柳致敎와 12세대 博羅
柳肯鎬등이 류치명의 문인이 되어 다시 한 번 가학을 이었으며 13세대 水西
柳淵根,14세대 醒巖柳東翼등이 차례로 뒤를 이었다.
이상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수곡파는 가계 내 사승관계를 통하여 세대별로
재생산하고 있는데,그 양상을 크게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柳友潛⇨ 다섯 아들 ⇨ 각 계파 주요 직계인물 등으로 대표되는 父
子간 수직적 수수관계
둘째,4세대 柳㮨․柳㰒․柳榰등의 경우와 7세대 柳升鉉․柳觀鉉柳和鉉
등의 경우로 대표되는 (從)兄弟간 수평적 수수관계
셋째,柳㮨⇨ 柳敬時․柳顯時,柳升鉉⇨ 柳長源․柳正源,柳長源⇨ 柳健
休등으로 대표되는 叔姪간 수수관계
넷째,柳道源⇨ 柳鼎文․柳晦文,柳長源⇨ 柳徽文,柳致明⇨ 柳必永,柳健
休⇨ 柳致德․柳致球,柳長源⇨ 柳致明등으로 대표되는 祖孫및 祖曾孫간
수수관계
다섯째,족증손 柳鼎文․柳徽文⇨ 족증조부 柳宅鉉등에게 학문을 전하는
族曾祖孫간 특별한 관계 등이다.
140) 『대동보』에서는 그에 대해 “踐遊定齋先生門 的承旨訣”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수곡파 내에서는 류
치명의 학문을 嫡傳한 인물로 간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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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수곡파가 그들이 자신들의 가학을 450여 년간 누대에 걸쳐 전승할
수 있었던 요인 중에는 친족 간에 형성된 사승관계가 가장 결정적이면서도 핵
심적인 역할을 하였다.수곡파 가학의 가계 내 사승관계는 입향 초기에 가장
기본적인 가정교육을 통하여 부자관계 속에서 각 가계별로 직접적으로 이어져
기초를 마련한 것은 물론이고,이후 대를 거치면서 후손이 번창함에 따라 兄
弟․叔姪․祖孫[曾祖曾孫․高祖玄孫]등의 관계 속에서 파별로 상호 보완해가
면서 끊임없이 학문을 수수하고 가학을 전승하며 재형성해 왔다.특히,師弟관
계에서는 7세대의 上代가 10세대의 下代에게 학문을 구하는 不恥下問의 모습까
지 보여주고 있다.
3.講學과 討論의 空間‘亭子’
亭子의 기능은 산수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그 흥취를 즐기는 풍류의 공간
이지만,조선 중기 이후에는 樓亭이 주로 강학과 수양의 공간으로서 그 역할을
하였다.누정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지역이 영남지역이며,그 중 안동을 중심
으로 한 경상도는 어느 지역보다 퇴계 문인을 비롯해 많은 私淑門人들이 배출
된 지역이다.따라서 경상도는 누정이 건립되거나 경영될 수 있는 제반 여건을
갖춘 곳이라 할 수 있다.한편,수곡파의 대표적인 학자들이 건립한 정자의 수
는 경상도의 전체 혹은 안동의 그것과 비교하여 많은 편이 아니다.
수곡파의 대표적 정자는 최초로 건립된 ‘萬嶺草堂’을 비롯해 대략 아홉 곳
내외이다.수곡파에게 있어서 정자는 무엇이며,어떠한 기능을 담당 했는지,문
중의 가학전승에 있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를 알아보기로 한다.
수곡파의 정자에 대해 언급하려면,또 다시 류의손의 정자를 지나칠 수 없
다.류의손은 安平大君을 포함해 당대의 석학 및 문학 인사들과 함께 교유하며
학문적으로나 문학적으로 인정을 받은 인물이다.그는 1450년에 세종이 세상을
떠나고,1453년에 文宗이 연이어 昇遐하자 端宗이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어받
은 후,또 다시 首陽大君에 의해 時局이 변하자 全州의 黃方山에 들어가 ‘笑臥
亭’을 짓고 은거하였다.
그는 ‘笑臥亭’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소와당의 주인옹 한가로이 누어 웃고 있는데, 笑臥堂翁閒臥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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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우러러 실컷 웃고서 다시 한참을 웃는다네. 仰天大笑復長笑
주인이 웃는다고 옆에 사람들 비웃지 말게, 傍人莫笑主人笑
찡그릴 때 찡그려지듯 웃어야 할 때 웃게 되는걸. 顰有爲顰笑有笑141)
그는 이 시에서 의도적으로 ‘笑’자를 여덟 번이나 사용하였다.이는 바로 수
양대군이 단종에게 한 일에 대해 비유적으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그는 왕조에
충절을 지키며 의리에 맞지 않으면 물러나 은거하고자하는 확고한 의지를 지녔
다.이후 사람들이 時事나 世道를 물어오면 초연히 웃어 버리고는 얼른 누워버
린 채 대화나 질의에 응대하려 하지 않아 ‘笑臥先生’이라고 불렸다고 한다.세
조가 즉위한 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귀양을 가
게 되고 결국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와 같은 행적을 남긴 류의손을,수곡파에서는 문학과 출처의 모범적인 인
물로 추앙하였다.특히,그가 건립한 ‘소와정’은 수곡파에게 隱居와 修養의 상징
적인 장소가 되었다.비록 ‘全州의 笑臥亭’이 지역적으로 안동의 수곡과는 거리
감이 있지만,‘全州’라는 계보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남다른 의미를 가진,‘수곡
파의 정자’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수곡파의 세거지를 중심으로 그들의 정자를 살펴보기로 한다.논의의
전개는 정자의 주인이 속한 파별로 구분하여 진행하였다.즉,萬嶺公派의 萬嶺
草堂,三檟亭派의 三檟亭․枕澗亭․晩愚亭,牧使公派[柳挺輝]의 東巖亭,龍巖柳
知潛派의 大埜亭과 近庵亭,水南位[柳垣]派의 壺窩亭등이 그것이다.이 밖에도
乖厓亭․三山亭등이 있으나 생략하기로 한다.
(1)萬嶺公派의 萬嶺草堂
만령초당은 柳益輝(1629〜1698)가 수곡파 최초로 건립한 특별한 의미를 지
닌 草堂형태의 정자이다.류익휘는 본래 수곡에서 태어나 成年이 되면서부터
본가와 약 10여리 떨어진 ‘만령’으로 분가하였다.그는 아버지 류숙이 세상을
떠난 후 주변에 소나무 백 여 그루를 심은 뒤 그 사이에 띠를 엮어서 초당을
건립하였다.그는 입향조 류성의 5세손으로,수곡파가 입향한 시기로부터 약
100여 년이 지나는 시기에 비로소 초당의 형태로 정자가 건립한 것이다.그 구
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집이다.
그는 초당을 지으면서 처음에는 특별히 당호를 걸지 않았다.다음은「萬嶺
草堂記」이다.
141) 『檜軒逸稿』,「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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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천지간의 만물은 처음부터 모두 이름이 없었고 사람들이 억지로 이름을 붙인
후에 이름이 생겼다.堂․齋․亭․館을 이름 짓는 것도 이것일 뿐이고,이것이 이름의
실상이다.某堂․齋․亭․館이라고 하는 것은 특별히 그 이름에 나아가서 또한 아름다
운 칭호를 더하여 사람들에게 빛남을 자랑하는 것인데 이는 곧 이름의 浮華이다.나의
당 같은 것은 띠를 엮어 지었고 당은 만령에 있으니 그 이름이 ‘만령초당’이다.나의 당
에 오르는 자들과 지나가며 보는 사람들이 모두 ‘만령초당’이라고 하니,바로 나의 당이
진실로 이미 그 이름의 실상을 얻은 것이다.하필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 남의 손을 빌려
글씨를 써 문 위에 걸어두어야만 이름이라 말하겠는가!또한 나의 본성이 졸렬하고 뜻하
고 숭상하는 것이 없고,땅이 누추하고 구석진 곳에 있어 빼어나거나 기이한 장관이 없
다.비록 뜻하고 숭상하는 것을 가지고 이름을 삼거나 경물을 가지고 이름을 삼고자해도
또한 이름이 그 실상을 능가한다는 기롱이 없겠는가?이런 이유로 나는 이름 없는 사람
으로서 이름 없는 집에 거처하여 겨우 무릎이나 놓을 작은 공간에서 즐거워하고 졸렬한
행적을 편안하게 여기면서 분잡화려하게 밖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끊었다.142)
위 기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류익휘는 세상에 명리를 구하거나 이름을 드
러내고자 하는 뜻을 버리고 조용하고 궁벽한 곳을 찾아 은거하며 자신을 수양
하였다.이러한 자세는 세간에서 ‘松間山人’이라고 불리었고 陶淵明에 비견되기
도 하고 仙家的風貌로 칭송되기도 하였고,특히 ‘篤行君子人’이라고 불리며 명
성을 얻었다.또 그의 문집에 시 65수만이 전하는 것을 보면 그 면모를 알 수
있다.
만령초당은 만령공파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데,세대를 거치면서 후손들
에 의해 가학을 전승하고 재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다시 말해서,만
령공파는 대대로 舟津지역을 世居地로 하고 있다.류익휘의 증손인 류정원을
비롯해 柳震休․柳萬休․류병문․류휘문․淸流軒柳致翊․류치교․류형진․可
隱柳箕鎭․류필영․류인식 등의 학자들이 모두 류익휘의 직계후손들인 점을
감안한다면,류익휘의 만령초당은 강학공간으로서 가학 형성과 전승의 구심점
으로서 류정원의 三山亭으로 전수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2)三檟亭派의 三檟亭,枕澗亭그리고 晩愚亭
삼가정은 柳奉時(1654∼1709)가 류승현․류관현 두 아들의 교양과 수학을
142) “凡天地間物 其初皆無名 人乃強而名之 然後有名 如堂齋亭館名之 曰堂齋亭館 是已 此則名之實也 如某
堂某齋某亭館云者 特就其名 而又加美稱 以誇耀於人也 此則名之浮也 若吾堂者 葺茅而堂 堂在萬嶺 則萬嶺
草堂其名也 人之登吾堂者 與過而見者 皆謂之萬嶺草堂云 則吾堂固已得其名之實矣 何必作爲美名 倩人書額 顏之楣間 然後謂之名哉 且我性拙 無志尙 地僻陋 無絶特奇偉之觀 雖欲以志尙而名 景物而名 而無亦有名浮
其實之譏歟 是故 以我無名之人 處我無名之堂 樂我容膝 安我拙蹤 而絶紛華外慕之心” (李簠,『景玉先生文
集 』卷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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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하여 지은 서재의 형태에서 출발하였다.류봉시는 당시 수곡파 종가에서 渭
洞으로 거처를 옮겨 자신의 서재 앞에 檟木세 그루를 심고 마음의 채찍으로
삼아 두 아들이 학문에 전념하도록 하였다.143)이러한 연유로 이후 서재의 이
름을 ‘삼가정’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家系적으로 박곡에 新基한 ‘三檟亭派’의 파
조가 되었다.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팔작 형태인 삼가정은 오로지 학문
과 강학을 위해 건립되었다.
그 뒤 세월이 흘러 건물이 소멸되고 옛 터만 남았는데,「三檟亭約帖」서문
에 의하면,류봉시의 후손 중 柳淵博․柳淵愚․柳淵學․柳淵楫등 백여 명이
1922년 삼가정 재건에 참여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144)그 후 1937
년에 후손들이 옛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류봉시의 종택이 있는 박곡 洞口에 새
로운 정자를 건축하였다.
류봉시의 아버지 류진휘와 형 류종시는 수곡파의 종손으로서,대를 이어 진
사와 생원으로 선대의 가학의 전통을 어느 정도 이어가고 있으면서 류원현에게
전한다.류원현은 호가 月會堂인데,그의 호는 매월 종족들이 회합하여 講信敦
睦하는 장소로서 종가를 의미하기도 한다.류현시가 지은「월회당기」에서,程
子의 ‘人家에는 모름지기 매월 한번 씩 一族이 회합하여 骨肉의 정을 통해야
한다.’는 말을 빌렸다고 한 것을 보면,종손으로서 가학을 전승하는 책임과 종
족을 결속하고자 하는 뜻이 더 컷을 것이다.반면 류봉시는 처사형 인물로서
삼가정을 통하여 수곡파 내에서도 ‘삼가정파’가학을 한 단계 더 성장시키는 역
할을 하였다.
이는 수곡파 宗派系列에 학문적으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준 것으로 볼 수
143) 李濬衡이 쓴「삼가정기」에는 류봉시가 얼마나 자식교육에 힘을 쏟았는지 다시 확인 할 수 있다. “인
륜에 돈독하고 의리를 좋아했으며, 詩禮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중략) 어진 아들을 두었는데 재주가 뛰
어나고 위인의 자질과 도량이 있었다. 그래서 소란하고 어지러운 마을에서 올바르게 가르치기에는 방해
거리가 너무 많다고 생각해 위천 골짜기 산 중으로 두 아들을 데리고 들어가 세속과 격리된 상태에서
10년 동안 전심전력으로 교육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대체로 맑은 물과 돌로 마음을 씻고, 담백한 국과
밥을 취하게 함으로써 학문의 뜻이 굳어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단순히 글공부에만 목적을
두지 않고 그들의 자질을 다듬어 인품이 완성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하였다.(원문과 역문은
『安東의 懸板(下)』, 안동민속박물관, 도서출판 성심․ 영남사, 2004.를 참조.)
144) “歲壬戌春陽 爺胸孫水村翁 率兩派諸晜 徃諗渭川遺址,得之扵野田塍坂之間 盖其川原夷曠 岡巒幽更 允宜
碩人考槃之所也 旣還仍與諸親 約會公私 合力收聚 得百餘金物 爲幾年拮据 營立屋宇 以爲續舊圖新之計 是
日在座者 兩宗兄淵博氏年七十九 淵愚氏年七十八 四從兄淵學氏 年七十六 淵楫年七十 其六十上下至勝冠者
可百餘人 於乎氣數之升沉 不常物理之興廢 有時今此偉論 不倡發扵家門隆盛之時 而今乃欲鳩孱扵六七世 寥
寥之後者 是天意之有待耶 先靈之默佑耶 今此幾個老秃之癃殘謝事者 無能爲耳 其所以建立成就之責 亶在扵
年力富強之諸君 君輩能誠心長殖 努力肯搆 期見眼前突兀 扵是而寓羹墻之慕 扵是而合花樹之歡 扵是而敎迪
後輩,肄工做業 如兩大爺之當日 則其扵報本追遠繼志 述事繩祖武貽 孫謨匹美兼善 而無有欠闕矣 其爲百世
啓佑之㓛 豈但一時丹雘之美而已㢤 帖旣成 畧識卷首 爲諸君奉勗云耳” (柳淵楫, <三檟亭約帖序>,『汎庵先
生文集』卷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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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왜냐하면,이후 류승현은 삼가정을 모범으로 삼아 침간정을 건립하여 강
학장소를 마련하고 후학들을 길러냈고,류관현 계에서도 아들 류통원을 통하여
가학이 전승된 후 류성휴․류귀휴․류회문 등이 차례로 생원 혹은 진사가 되어
학문적 역량을 펼쳐 보이기도 하였다.11세대에 이르러서는 류치명을 배출하며
수곡파 대내외적으로 위상을 높였으며,만우정을 통하여 19세기 중반 또 다시
수곡파 가학의 구심점을 이루게 하였다.
枕澗亭은 柳升鉉(1680〜1746)이 1710년 31세 때 박곡에 건립한 정자이다.정
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집으로 류승현이 만년에 여생을 보내기 위해 건
립하였다.점차 젊은 학생들이 책을 들고 찾아와 배움을 요청하게 됨에 따라
강학의 공간으로서 그 역할이 더 컸다고 할 수 있다.류승현 자신도 아버지에
게 삼가정의 前身인 渭洞의 書齋에서 공부하여 성취한 만큼 정자는 남다른 의
미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또 침간정은 류승현이 생존했던 당시에도 강학의
장소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그의 사후에 류도원이 류장원과 함께 유업을
이어받아 가학 전승의 장소로 더욱 발전시켰다.
「枕磵亭洞約帖序」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선친께서는 만년에 시냇가 위쪽에 정자를 지으시고,이름을 ‘침간’이라고 하고 편히
쉬면서 만년을 보내시려고 계획하셨다.젊은 학생들이 책을 들고 배움을 청하는 자가 많
았는데 가르치는데 게을리 하지 않으셨으니 거의 성취시켰다.그런데 선친께서 돌아가신
뒤 배우던 자들이 그 학업을 강구할 수 없어 불초가 차마 그들이 흩어져 돌아가는 것을
차마 방임할 수 없어 그 幼蒙들을 붙잡아 책 읽는 법을 가르치고 쇄소응대를 과목으로
한 것은 대개 선친께서 좋아하시던 것을 좇아 遺志를 이루려고 한 까닭일 뿐이었다.그
후에 舍弟長源이 이사를 와 함께 모여 날마다 서로 정자에서 학문을 토론하였다.사제
가 동몽들을 가르치니 또한 다른 사람들도 이로써 여러 동몽들이 서로 함께 하였다.재
산과 곡식을 모아 합쳐 學田을 경영하여 설치하여 영구히 공부하는데 보탬으로 삼았다.
문내에서도 한두 명씩 보태고자하는 사람이 있어 또한 허락하였는데 합해보니 수십 명
이 되었다.興源[류도원의 초명]이 삼가 선친의 덕업행의를 생각해보니 실로 후생들의
모범이 되고 이 정자는 선친이 평소에 휴식하시던 곳이다.제군들은 이곳에서 흥기하여
힘써 노력하고 나태하지 않아서 성취하는 바가 있으면,이것이 바로 선친에게 친히 배우
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우리 형제도 또한 제군들과 더불어 강론하여 즐거워하
며 근심이 없을 것이니,제군들은 힘쓸지어다.145)
145) “先君子晩年 築亭于溪上 名曰枕澗 以爲優遊終老之計 後生小子 多有挾冊而請業者 輒誨誘不倦 幾於有
成 而先君子下世 從學之人 將無以究其業 不肖孤不忍任其散而歸也 留其幼而蒙者 授以句讀 課以灑掃 蓋所
以追舊好而成遺志爾 其後舍弟長源移家相就與之 日處亭中 討論舊業 舍弟所授童蒙 亦若而人於是諸童蒙相
與 收合財糓 營置學田以爲永久講業之資 門內有一二願附之人 亦許之 合之爲數十人 興源竊自念先君子德業
行誼 實爲後生之所矜式 而是亭乃先君子平日棲息之所也 諸君倘能興起於斯 而勉力不怠 以至有成 則是無異
親受敎於先君子也 吾兄弟亦將與諸君上下其論 樂而忘憂 諸君勉之哉 茲書數語于條約之首”(<枕澗亭同約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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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류승현이 세상을 떠난 후 류도원이 出弟류장원과 함께 후학들의
공부가 단절될까 염려하여 침간정에서 강학하는 방법과 운영하는 계획과 목적
을 적은 글이다.여기서 주목할 것은,동몽교육에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學田’을 마련하였고,이에 문중의 수십 명이 함께 동조하여 미래의 학생들의
공부에 차질이 없도록 계획하였다는 점이다.
이렇게 가학을 전승하고 재전할 수 있는 학문적 공간이 대를 이어 건립됨으
로서,삼가정파 중 류승현[慵窩公派]계에서는 류도원․류범휴․류락휴․류정
문․류치임․류치엄․류치효․류치호․류치유․류정호․류기호․류장호․류연
구․류연즙․류동환 등이 대․소과에 오르거나 문집과 저술을 남기며 삼가정파
의 가학을 전승하였다.
晩愚亭은 柳致明(1777〜1861)이 1856년에 착공하여 1857년 81세 때 준공한
정자로서 강학과 학문토론의 장소였다.만우정은 건립시기를 전후하여 강학과
토론의 장으로서 수곡파를 포함하여 대내외적으로 상당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
다.실제로 건립 이듬해 7월,류치명은 만우정에서 류치엄․류치익 등과 함께
류정원의『四書纂註增補』등의 저술과 문집의 교정을 보기 시작하였고,「晩愚
亭記後敍」에는 ‘공이 이 정자에 거처하심에 날마다 문인 및 자제들과 함께 名
과 理를 강하여,灑掃應對에서 시작해 天德에 이르고,彛倫에 바탕을 두고서 왕
도를 논한다.’라고 기록하였다.146)이와 같이 만우정은 류치명이 선대에 고조부
류관현으로부터 류통원 - 류성휴․류귀휴 - 류회문으로 이어지는 가학을 계승
하면서 자신의 후대에 아들 류지호 - 류연박 - 류동시 등에게로 이어가는 류
관현 계의 중심에 있다.대외적으로는 19세기 중후반 대내외적으로 수곡파의
학문과 사회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면서 이른바 ‘定齋學派’를 형성하는
중요한 공간을 제공하였으며 동시에 가교역할도 하였다.
(3)牧使公派의 東巖亭
동암정은 柳長源(1724〜1796)의 강학장소로서,1787년 64세에 정면 3칸 측
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집으로 大坪[한들]에 건립하였다.류장원은 건립당시 退溪
의「東巖言志」를 걸어두고 高山景行의 마음을 담아 사숙하였다.
동편 높은 멧기슭에 새로이 집 지었으니, 新卜東偏巨麓頭
序>,『蘆厓集』卷7.)
146) 李源祚,『凝窩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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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 누운 바위들이 모두가 깊숙해라. 縱橫巖石總成幽
내와 구름 아득히도 메 사이에 늙어가고 烟雲杳靄山間老
시냇물 삑 둘러서 들판으로 흘러간다. 溪澗彎環野際流
만권사이 이 생애 의탁 있음 기쁘고녀, 萬卷生涯欣有托
한 보습 이 마음이 무엇을 구하리오. 一犂心事歎猶求
詩僧을 대해서는 정녕히 말을 마오. 丁寧莫向詩僧道
참으로 쉼이 아니라 병나서 이런 것이라. 不是眞休是病休147)
행장에 의하면,류장원은 동암정에 좌우로 서재를 열어 학도들을 맞이하자
공부하러 오는 학생들이 날로 모여들었고,스스로 인재를 양성하고자 自任하여
지도하고 편달하는데 게으르지 않았다고 한다.148) 그는 류관현의 아들로 태어
나 교육을 받았고 성장하면서 伯父류승현과 仲兄류도원의 문하에서 수학하였
다.이후 柳挺輝와 진사 柳昌時부자로 이어지던 가계를 잇기 위해 출계하였으
므로,가계를 잇는 것뿐 만 아니라 류정휘의 학문을 이어야 하는 책임이 있었
다.이러한 책임을 다하기 위한 류장원의 노력은 아들인 류천휴와 손자 류약문
이 모두 생원이 되어 가학을 잇도록 하였다.류장원의 동암정은 직계 후손들
뿐 만 아니라 친족문인들에게도 또 하나의 학문적 공간을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다시 말해서,그 역시 삼가정파의 삼가정․침간정 등에서 류승현․류도
원 등의 제자가 되어 수학을 하였듯이,동암정의 류장원 아래에는 류정문․류
치명․류휘문․류건휴․류홍원 등 친족 他派門人들이 출입하며 학문을 하였다.
(4)龍巖柳知潛派의 大埜亭과 近庵亭
대야정은 柳健休(1768〜1834)의 강학장소로서,그가 환갑을 갓 넘긴 62세에
자신의 집 옆에 건립하였다.정자의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맛배
집인데,東西齋의 이름을 각각 ‘觀善’․‘省愆’으로 하고 자제들을 거처하게 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柳致德(1823〜1881)은 어릴 때 伯祖류건휴로부터 배웠으나 12세 되던 해에
족형인 류치명에게 수학하였다.그는 信庵李秉夏와 같은 방을 쓰면서『중용』
을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人一己百’의 자세를 실천하였다고 한다.만년에는 집
가까운 곳에 작은 서재를 지어 종신토록 후생을 가르치고 저술에 힘쓰는 장소
로 삼고자 도모하여 바로 근암정의 前身인 ‘近庵書齋’를 마련하였다.그러나 류
치덕은 서재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881년,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어
147) 번역문은 이가원, (<동암에서 뜻을 말하다>,『퇴계시역주』,이가원 전집 제 24집, 정음사,1987.) 의
역문을 전재하였음.
148) “闢左右書齋 以待學者 於是從學之士日益衆 先生以成就人才爲己任 獎勤誘掖 未嘗怠倦” (南漢朝,<行
狀>,『東巖文集』卷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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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그 제자들과 후손들의 강학과 토론의 장소로 사용되었는데,대야정
의 학문이 류윤문․류두문․류락문 등에게로 이어진 후 근암정과 류치구에게
전해지고 또 다시 柳元欽․野人柳東銖․水宇柳建斗등에게로 이어져갔다.
(5)水南位派의 壺窩亭
호와정은 柳顯時(1667〜1752)가 박곡[壺谷]에 건립한 정자이다.그는 생원시
에 일등으로 합격했지만 벼슬의 뜻을 접고 후학을 가르치며 일생동안 경학을
실천했던 인물이다.그는 아버지 류계휘와 함께 족조 류직의 문인이 되어 가학
의 연원을 계승하였다.호와정은 그가 일생동안 학문과 수양을 하면서 수남위
파의 가학을 발전시킨 공간이다.또 그의 학문적 역량은 대외적으로도 상당한
인정을 받고 있었는데,안동군지 편찬에도 공헌하였고,都訓長으로 추대되어서
는 학생들을 계도한 교육방침이 후임으로 온 이현일의 조카인 顧齋李槾․訥隱
李光庭등도 그대로 전승해 따랐다는 점에서도 그 학문적 위상을 알 수 있다.
수곡파내에서는 류익휘의 장자 진사 柳憲時․족질 류석두․재종질 류승현
등과 함께 그를 ‘壺谷四老’의 한 사람으로 불렀고,大山은 “문장은 후생들의 표
본이 되었고 세상의 도를 붙들어 세운 분”이라고 극찬했으며,荷塘權斗寅․蒼
雪權斗經등은 ‘호와의 文行이 우리고을에서 제1인자’라고 칭송하였다.149) 이
러한 류현시의 명성에 걸맞게 호와정도 가학의 형성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
였음을 알 수 있다.게다가 수곡파 여러 정자 중 삼가정․침간정과 함께 박곡
에 소재하고 있는 점은 系․派를 뛰어넘어 가학의 전승과 발전 및 후대의 재형
성에 倍加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류직 -류계휘의 가학을 전수한 호와정의 학문은 아들 柳宅鉉,류택현의 高
孫류치교,류치교의 아들 류긍호에게로 계승되어 갔다.이후에도 萬下柳淵
穆․東華柳東建등이 그 뒤를 이었다.그 중 류긍호는 凝窩李源祚의 생질이
며 葛川金熙周의 孫壻이기도 하다.
이상으로 수곡파의 대표적인 정자를 살펴보았다.그 특징을 가학 전승과 강
학 및 토론의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건립 시기적으로 삼가정과 침간정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자 주인의 만
년에 건립된 것이다.삼가정과 침간정은 분파조였던 류봉시․류승현 부자 등이
새로운 파조로서 그 임무를 다하고자 한 때문에 비교적 일찍 건립하였을 것으
149) “少從荷塘權斗寅蒼雪權斗經遊 二公大加歎賞曰 柳某文行 當爲吾鄕第一人”(柳道源,<行狀>,『壺窩遺稿』
卷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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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판단된다.만령초당을 비롯한 나머지 정자는 정자주인들이 각각 자신의 학
문적 성취기라 할 수 있는 만년에 건립한 것으로 보아 藏修의 공간이자 동시에
후손들에게 강학의 장소를 제공되었다.
둘째,정자의 기능면에서 만령초당은 은거와 수양의 기능이 더욱 컸던 것으
로 보인다.삼가정과 침간정 등은 건립목적 자체가 자제들의 교육에 있었고 시
기적으로도 주인들의 중년에 건립된 점을 감안한다면 오랜 기간 후진양성에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이외의 정자들은 각각의 주인들이 학문적 성취를 이루
고 주변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시기에 건립하였다.또 동암정 등은 정자 주인들
이 자신의 정자 건립 이후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나,그들 사후에 수곡파와 문
인들의 강학과 공론의 장소로서 중요한 곳이 되었을 것이다.
셋째,정자의 소재지가 종택과 기양서당이 있는 수곡[무실]150)을 중심으로
만령[삼산]․대평[한들]․박곡[박실]등이다.이 점은 수곡파 가학형성의 연원이
지역적으로 수곡에 있지만 점차 분파되어가는 과정에서 확산되어 재형성되었다
는 것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수곡파에 있어서 정자의 기능은 개인 수양과 은거의 장소였지
만 가학의 전승과 재형성을 위한 강학장소였고,公論을 위한 토론의 장소였으
며,문집과 저술의 교정 및 편집의 공간이었다.특히,그들의 정자는 건립주체
뿐만 아니라 소재지가 가학을 주도하였던 수곡을 중심으로 만령․박곡․대평
등이었음을 감안해 본다면,凡水谷派的으로 가학을 授受하며 지속적으로 유지
할 수 있게 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아울러 수곡파 가학은 경전과 성리학
이라는 공통된 학문주제 아래에서도,세 지역을 중심으로 학문 분야별로 각기
다른 저술경향을 보여주고 있다.예를 들면,만령지역 출신들은 易學分野에,대
평과 박곡지역 출신들은 性理學․經學․禮學․註釋學등에 상대적으로 많은 저
술을 남기고 있다.이와 관련해서는 이후 논의되는 제 3장 2절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될 것이다.
150) 여기서는 단순히 지역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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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水谷派家學의 展開樣相
본 장에서는 전술했던 수곡파의 형성과 가학의 전승 과정을 바탕으로 하여
수곡파 가학이 대내외적으로 어떻게 전개해 나갔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논의는 程朱學根幹의 學問性向,退溪學脈의 繼承과 ‘湖學’의 完成,多樣한 著
述活動과 學問的性向,仕宦및 牧民官의 모습 등으로 구분하여 진행하고자 한
다.
1.程朱學根幹의 思想的性向
수곡파는 고려말 재경사족에서 16세기 중반 落南하여 定居하고 18∼20세초
까지 영남학파의 일원으로 성장한 가문이다.수곡파가 정거할 당시는 퇴계의
사상과 학문이 태동,확립된 후 문인제자들에 의해 전국적으로 전파되기 시작
하는 시기와 일치한다.따라서 퇴계 - 학봉으로 연결되는 학문적 사승관계와
더불어 수곡파 내부적으로 학봉 - 류복기․류우잠 부자로 학문적 계통이 이어
지는 과정에 그 사상적 영향력은 재삼 거론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크다 할 것
이다.
수곡파가 사상적으로 영남학파 즉,퇴계학파의 핵심윤리인 程朱의 性理學을
근간으로 한 양상은 그 예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다.여기서는 대표적인
인물의 행적과 관련 저술을 설명과 함께 소개하기로 한다.
柳㮨(1602〜1662)은『近思錄』한 질을 산 후 지은 律詩에서 다음과 같이 읊
고 있다.
근사록 한 책을 먼 곳에서 찾았더니 近思錄書會遠索
우연히 오늘 저녁 禪林에서 가져왔네. 偶然今夕自禪林
눈으로는 항상 신명을 대하듯 공경하고 目常對越神明敬
손으로는 절로 어루만지며 날마다 무성하네. 手自摩挲皇日森
성현의 종지 모두 이에 발휘되어 있으니 總是發揮前聖旨
볼수록 후인들에게 열어 준바 깊도다. 便看開示後人深
오직 이 책 한질이면 수신하기 족하니 惟玆一帙修身足
벌레와 좀 쓸지 않게 아끼고 지키리라. 愛護無爲蟲蠹侵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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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이 그렇게 찾던『근사록』을 마침내 구하고서 공경하는 마음을 담
아 심취하여 修身의 길잡이로 삼았다.또 孤山李惟樟이 지은 행장에는 “만년
에는 程朱의 모든 책을 좋아하여 그 뜻을 연구하고 궁리하여 닭이 울면 일어나
앉아 염송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날마다 문하 제자들과 도학을 강론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152)
柳慶輝(1652〜1708)는『家禮輯說』을 편성하였는데,주자의 가례의 篇章과
節目에 대해서 선유들이 주석하고 해석한 諸說을 집록한 것이다.
磨泉柳大時(1657〜1739)는『紫陽文集』10권을 주해하여 『紫陽集解』2책을
저술하였는데,이는 朱子의 문집 중 난해한 字句를 해석한 것이다.그는「小
識」에서도 밝혔듯이,退溪의『朱子書節要』는 주자의 서찰 중에서만 발췌하여
편집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나타내면서 주자의 문집과 잡저까지 通讀하여 그
학문을 연구하였다.153)
慵窩柳升鉉(1680〜1746)은 주자의「春日」과 訓蒙絶句중「曾點」등 시 2
수를 유묵으로 남겼다.그 중「春日」은 熊禾가 말하기를,“사물 이치의 表裏精
粗가 이르지 않음이 없다.”154)고 평하였을 만큼 성리학적 理趣를 표현하는 작품
이다.
좋은 날 사수 가에서 좋은 경치 찾으니 勝日尋芳泗水濱
끝없는 풍경들이 한때에 새롭구나. 無邊風景一時新
한가로이 봄바람의 면모를 알아보니 等閒識得春風面
천만 가지 붉은 꽃이 모두가 봄이로다. 萬紫千紅摠是春
위 시의 시어 중 ‘泗水’는 공자가 일찍이 자신의 고향 앞을 흐르는 두 강
151) 柳㮨, <買近思錄>, 『百拙庵集』, 卷1,「시」
152) “晩喜洛建諸書 硏窮其義 鷄鳴後起坐 誦念不倦 日與門生子弟 論道講學” (<行狀>,『百拙庵集』.)
153) “『자양문집』10권은 『朱子大全』 중에서 절취한 것이다. 퇴계선생의『주자서절요』의 서문에서는
魯齋선생이 『주자전서』에서 선발한 것을 가지고 북산 하선생에게 정정을 구했다고 하였으나 그 책을
얻어 보지 못했다고 한탄하셨으니, 아마 그 책이 바로 이 책인 듯하다. 퇴계선생의『주자서절요』는 오
직 서찰 중에서만 그의 중요한 글을 취해서 10권으로 하였으나 이『자양문집』은 잡저까지 함께 취해
서 10권으로 하였으니, 그 取捨하고 詳略함이 비록『주서절요』와는 다른 것이니 또한 그의 본 것도 각
각인 것이다. 돌아보건대, 그 간본에는 訛誤된 것이 허다한데 그것은 대개 刻字할 때 잘못된 것이나 詳
考할 만 한 정본이 없고 奏箚 등 상소문은 주자대전에 의거하여 다시 교정하고 서찰은 절요에서도 나오
는 것인 즉 퇴계선생께서 정리하신 데에 의거해서 교정하였다. 그러나 그 밖의 의심나는 것은 감히 마
음대로 고칠 수가 없으니, 지금 후에라도 정본이 나오기를 기다려서 교정하는 것은 오직 학자들에 달려
있다. 그런데 주해에는 퇴계문하에 선배들의 설을 많이 인용하고 간혹 나의 의견도 부쳤으니 지극히 참
람한 것이나 후학을 계몽하는데 있어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다.”(柳正基,『水柳典籍要覽
(上)』, p39, 聖心, 2003.)
154) “熊禾曰 物理之表裏精粗 無不到” (<謹和朱夫子詩 八首>,『弘齋全書』제7권,「詩」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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洙水․泗水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곳 중 하나로 孔門을 대표하는 말 중 하나인
데,수곡파 세거지 앞을 지나 천전[내앞]으로 흐르는 하천의 이름이 ‘泗水’이다.
류승현이 이 시를 친필로 써서 걸어 둔 것은 아마 주자를 통해 성현을 따르고
자 하는 소망과 후손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뜻을 이어가도록 한 목적이
담겨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8세기 중반에는 수곡파 학자들 중 류화현․류도원․류장원․류범휴등이 다
양한 저술활동을 통하여 역량을 키워나갔다.또 이들이 대외적으로 九思堂金
樂行․蘭谷金江漢․后山李宗洙․川沙金宗德․晩谷趙述道․龜窩金㙆․損齋
南漢朝등과 왕복서신을 주고받는 등 학문적으로 활발히 교유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남학맥의 저변을 구축하는데 나름대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
다.
류화현은 “만물은 각기 다 一理가 있고 萬理는 다 一原에서 나왔다.”고 하
면서 “理란 것은 動靜의 妙이고 氣란 것은 動靜의 機微이니,理는 主가 되고
氣는 資가 된다.主理하여 그 주된 묘를 논한다면 그 능히 동정하는 까닭은 진
실로 理의 用인 것이다.”라고 하며 主理論을 주장하였다.155)또 그의 성리학적
학문 자세는 <一貫>156)이라는 시에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류도원은「童子問」에서 제자들이 성리상의 질문을 한데 대한 답변의 방식
으로 形而上․形而下․理氣․心性․氣質之性․本然之性․情意․人心道心․天理
人慾․四端․鬼神․魂魄․禮樂․忠恕․存養․省察․戒懼․謹愼․知行․五行․
費隱․四書의 大旨등 철학 상의 중요한 요목에 대해 주자의 설을 근거로 자신
의 사상적 바탕을 전수하고자 하였다.157)
류장원은 26세에 金樂行과의 왕복편지를 통해 공부하기 시작하였고,류정원
과 芝谷金正漢에게 각각「河洛指要」와「璣衡制度」를 질의한 후 두문불출하
며 연구에 전념하였다.이후 金江漢과 우의가 긴밀하여 중형인 류도원과 함께
매년 춘추로『심경』․『근사록』등의 성리학 책을 가지고 중도에서 만나 鼎
坐하여 밤늦도록 토론하기도 하였다.安鼎福의『天學或問』에 대해서 淫聲이나
美色처럼 멀리해야 한다고 경계하고 만약 그 신기함에 빠져든다면 程子가 일찍
이 佛徒로 빠져드는 것을 경계하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155) “嘗曰 萬物各有一理 萬理同出一原 若要知到一原 須是隨事精察 眞積力久 (중략) 合二說而融貫之 則理
也者動靜之妙也 氣也者 動靜之機也 理爲之主而氣爲之資 主理而論其所主之妙 則其所以能動能靜者 固理之
用也” (柳健休,「遺事」,『松陰遺稿』.)
156) “一理渾然無限量 大通天地細毫芒 欲求上達須眞積 不析千條豈識綱” (『松陰集』 卷1.)
157) 『蘆厓集』卷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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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성리학적 사상을 바탕으로,류장원은 守夢鄭曄의『近思錄釋義』622조
를 뽑아서 논변한『近思錄釋義辨』이라는 평론서를 지었다.그는 또『四書簒註
增補』를 편찬하였는데,그 내용에서 특히 주목할 것이 있다.바로 주자가 자신
의『四書集註』와『論孟精義』에 대해서는 先儒의 주석을 집대성하였으나 정작
朱子자신의 주석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한 것을 보고『四書或問』『朱子大全』
『朱子語類』등에서 사서에 대한 주자의 해설을 총괄하여 채집하고 재편성하였
다는 것이다.
류범휴는『湖上記聞』․『泮村問答』․『索居或問』․『蘆原雜錄』등을 지
었다.이 저술들은 그가 평소 성리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파악하게 된 학문적
사유체계를 정리한 것이다.
이후,18세기 말∼19세기 중반까지 수곡파 학자들 중 류건휴․류휘문․류정
문과 19세기 말 류정호 등은 성리학을 再解釋하거나 註釋하고 新學[異學]에 대
해 논변하는 저작을 많이 남겼다.
류건휴는 일찍부터『四書』를 비롯한 경전에 정통하였다.1792년『東儒四書
解集評』을 지었는데,당시 25세의 나이였다.이 저술은『사서』의 해석에 관계
된 東儒의 여러 설을 37종의 각각의 문집에서 인용하여 총집한 것이다.그는
채집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기도 하였고,그가 선정한
東儒들의 제설은 거의 모두가 주자를 사숙한 退溪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특히,
이른바 ‘異學’에 관계된 서적에도 관심을 보여 공부하기도 하였다.그것은 당
시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한 사상의 다양성을 자신의 그것과 비교하는 학문적
방법론이었다.자신의 연구결과를『異學集辨』158)을 통하여 ‘儒學’및 ‘新儒學
[성리학,주자학]’내외의 제설에 대해서 비판하는 모든 설에 대해 邪正是非를
분변하는 주장을 폈다.159) 또 스승 류장원의 부탁으로 주자의「感興詩」에 대
한 제가의 주석을 모아 편집하기도 하였고,「武夷櫂歌」시에 대한 제가의 주해
를 참고하여 고증을 붙이기도 하였다.
류휘문은 특히 성리학 관련 저술을 많이 남겼는데,문집 雜著에 四書五經
중 要語의 뜻을 논변한「讀書瑣語」․『四書』․『大學或問』․『聖學十圖』등
에 대해 류장원과의 문답을 기록한「巖齋語錄」,誠齋南漢皜등과 함께 太極
158) 『이학집변』은 필사본 총5책이며 유일본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재는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 소장되
어 있다.
159) 故 柳正基는 ‘『大埜集』해제’에서 “荀子․陸象山․王陽明 등 주자학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정도를 벗어난
설은 내적인 것이고, 그 외 제자백가의 설은 외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야의 이러한 사상은
子思가 異學이 진리를 흩트리는 것을 염려하여『중용』에서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라고
한 중용의 사상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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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를 중심으로 강론한 「泉齋講錄」․『소학』․『근사록』․『서경』․『강
목』․『역학계몽』등에 대한 견해를 밝힌「管窺僭言」등이 있고,「冠服考
證」․「家禮攷訂」․「啓蒙攷疑」․「傳疑餘論」등의 저술을 통해서는 太古부
터 周代에 이르는 제도를 고증하고 주자의 가례에 대한 제설을 정리하였다.특
히 유교적 실천윤리를 강조하는 영남 사림파가 숭상하는160)주자의『소학』에
대해 제유의 설을 총집하고 요점을 초록한「小學章句」․「小學童子問」을 저
술하여 성리학의 이론을 기초부터 다시 정립하고자 하였던 점은 수곡파 동몽교
육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다.그의 저술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그는 주로
논변,문답,강론 등을 통해 유학의 경전과 주요 성리서를 탐구하였다.
류정문은 영남 성리학에 대한 논의에 있어 자주 거론되는 학자는 아니지만,
그의 學績과 저술을 통하여 사상적 근간이 程朱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조
부 류도원에게 수학하다가 종조부 류장원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자연스럽게
대산의 학문을 전수받았다.그는 宋나라 葉采의『近思錄集解』의 錯誤를 刪削
하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近思錄集解增刪』을 저술하였다.류치명은 그 서
문에서 “建安葉氏의『近思錄集解』는 후학을 계몽하는 공이 크지만 살피건대,
혹 선유의 논란이 있음을 면치 못하고『近思錄釋疑』에 이르러서는 指摘이 더
욱 많아 程朱의 大訓을 근본으로 하는 바른 해석이 책 속에 없는 것이 많으니
유감이 없을 수가 없다.우리 재종숙 수정재공이 이 책을 받들어서 깊이 연구
하고 공부하였으니 바로 정주의 定論으로부터 선유의 辨析에 이르기까지 손수
뽑아 기록하고,또한 本解를 가지고 釋疑를 참고하여 최선의 것만 취하고 또한
강론과 질의를 덧붙였다”라고 하였다.161) 그는『근사록』에 대해 그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切問’하는 연구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특히 초학자들의 입문과
정에 논변과 분석의 중요성을 제시하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
柳廷鎬는 19세기 중엽 이후 수곡파 내에서 퇴계의『朱子書節要』를 精緻하
게 연구하여 주자의 성리학을 분석한 인물로 인정받는 학자이다.그는 5세에
季父柳致儼에게 수학하기 시작하면서 항상 하늘을 향해 꿇어 앉아 “使我願爲
善人願懋學業”이라고 기도하였을 정도로 학문을 통한 훌륭한 사람이 되길 원
했다고 家狀에서 전한다.162)이후 10여세 무렵부터 歷史書와 四書를 비롯한 경
160) 이수건, 『영남사림파의 형성』,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1980.
161) “建安葉氏 爲集解 以牖來後 其功大矣 顧或不免有儒先議到處 以至釋疑 指摘愈多而本其程朱大訓正解
多不在卷 不能無遺憾焉 我再從叔壽靜齋公 尊信是書 硏究工深 乃自程朱定論 以及儒先辨析 隨手箚記 以備
覃思 旣又將本解 參以釋疑 惟善是取 亦或有附入講質者” (柳致明,「近思錄集解增刪序」,『近思錄集解增
刪』)
162) 柳淵楫,「修齋公家狀」,『完山世蹟』, 柳淵龜 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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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을 섭렵하자 류치엄과 족부인 柳致游에 의해 “가학의 혈통[家學種子]”163)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그는『朱子書節要』에 심취하여 기존 해석에 의문을 갖고
자신만의 懸吐로 재해석하였는데,이것은 자신은 물론이고 자손들의 공부를 위
한 독본으로 삼기 위함이었다.여기서 류정호의 학문 방법과 해석상의 새로운
시각을 엿볼 수 있는데,바로『修齋懸吐朱子書節要』164)가 그것이다.
이밖에도 류치구는『山窩雜錄』과『軀書』및『天君實錄』등의 소설류를 통
하여 理氣說과 心性[天君]에 대해 논변하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수곡파의 사상은 철저하게 程朱學을 근간으로 시
대적 학문경향에 대응하여 論辨과 講論을 통해 성리학의 이론을 재확립하고 학
풍의 復古指向을 이끌면서도 新儒學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자 하였다.15세기
후반 영남 사림파는 성리학의 실천윤리와 교육 및 행신의 기본으로 삼아 주자
의 경전교육에 역점을 두었다.165)수곡파는 복거이후 이러한 영남 사림파의 학
풍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그 사상적 기반을 程朱學에 기본을 두고 있다.따라서
시대적으로나 사상적으로 16세기 중반부터 학봉의 영향아래 영남학파의 큰 범
주에 속한다.
18세기를 전후하여 조선은 다양한 학문을 수용하면서 실학과 같은 새로운
학풍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던 문예부흥의 시기로 인식되고 있다.노론중심의
근기지역 학파 활동과 실학의 등장으로 자연스럽게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의
소론 남인계의 재야학문과 사상은 소외되어진 면이 없지 않았다.그러나 이러
한 흐름 속에서도 18세기 중반에 활동했던 수곡파 학자들은 가문의 범주에서
드러나지 않게 성리학의 종지를 유지하고 후대로 발전시켜 나갔음을 알 수 있
다.
18세기 말∼19세기 초반에 在野學風은 華西李恒老․蘆沙奇正鎭․定齋柳
致明․寒洲李震相등에 의해 性理學이 다시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당시 영
남사림의 성리학자들은,당시 전국적으로 일어난 동학의 민중봉기와 학문적으
로 진보적인 경향에 맞서 극복하고자 하였다.이러한 그들의 시대와 사상극복
의식은 학문적으로 철저한 이론무장과 체계 확립이 다시 요구되는 보수적 자세
를 견지해 나갔는데,이것이 비록 그들만의 국지적인 양상이라 하더라도 최소
163) 위의 책.
164) 柳廷鎬의 5대 冑孫인 柳會鵬에 의하면, 본서는 원래 류정호가 正楷 筆寫하여 당시 단 3질을 완성하
였다고 한다. 그 중 한질이 ‘修齋古宅’에 소장되어 오다가 관련 연구자들의 요청으로 2000년 한 출판사
에 의해 영인 간행되었다.
165) 이수건,「제3장 영남학파의 형성과 발전」,『영남학파의 형성과 전개』, 일조각,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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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상적으로 영남사림파와 퇴계학파의 정신무장의 의지가 담겨져 있었던 것
이다.이는 退溪이후 영남유학에서 성리학이 확대 전개되는 과정을 지나오면서
나름대로 느꼈던 성리학 주변학문이 몰고 온 학풍의 위기를 회복하고자 하는
것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보편의 사상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수곡파도 이
론적 탐구와 논변을 바탕으로 성리학적 학풍을 견지하면서 19세기에 접어들면
서 더욱 활발하게 전개하여 근대까지 지속시켜 나갔다.이 점은 그들의 다양한
저술을 통하여 수곡파가 누대에 걸쳐 退溪를 사숙하고,18세기 중반 8․9세대
부터는 본격적으로 大山의 사상 및 학문을 만나면서 자체적으로 정립한 후,퇴
계학맥의 거유인 류치명으로 전승되는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구체적인
내용은 본장 2절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2.退溪學脈의 繼承과 ‘湖學’의 完成
영남학맥 중 退溪學派166)의 큰 줄기가 大山이후 柳致明으로 이어지며,수
곡파 내에서는 대산의 학문을 이론적으로 정립하여 완성한 것으로 보이는 萬山
柳致儼이 등장한다.
일반적으로,嶺南學派[退溪學派] 鶴峯[金誠一]系는 張興孝- 李玄逸․李栽
父子-李象靖으로 이어지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특히 대산은,‘갈
암 이후로 영남의 학자들은 七情을 氣發로만 규정하였던 영남학파의 사단칠정
설의 단점을 보완하여 퇴계 ‘四七說’의 본래 모습을 복원한 학자’167)로 평가받기
도 한다.이러한 대산의 성리설은 그 이후 영남학맥의 설정문제에서 최근 寒州
李震相과 류치명에 이르러 재론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168)본고는 이런 문제를
166) ‘영남학파[퇴계학파]’라고 지칭한 것은 이수건 교수의 “지역적 범위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대신 학통과 정파 및 학설에 관해서는 시기와 사람에 따라 분립과 분열 및 통합이 있기도 하였다. 16세
기 후반에는 퇴계와 남명학파가 영남의 2대학파로 존재하다가 인조반정(1623)을 계기로 남명학파가 남
서인 양편에 분속되면서 자체의 학파를 제대로 유지시키지 못하고 17세기 후반부터는 거의 퇴계학파에
통합되었다시피 하였으니 그때부터 영남학파는 바로 퇴계학파를 지칭하게 되었다(「조선조 영남학파의
형성과 그 전개」,『한국의 철학』21호, 경북대 퇴계연구소, 1993.)”고 한 정의를 따랐다.
167) 이상하,「한국 성리학 主理論의 발전 上에서의 大山 李象靖」,『대동한문학』제25집 270쪽, 대동한문
학회,2006.12.
168) 이와 관련하여 현상윤은 1982년『조선유학사』에서 ‘갈암-대산-정재로 이어져 心卽理라고 단언하여
주리설의 절정을 지은 것은 한주’라고 하였고, 이상하는 2006년, 晦峯 河謙鎭의『東儒學案』을 인용하
여 “갈암에서 대산에 이르는 과정은 그렇다 하더라도 정재에서 한주로 이어지는 학맥은 도식적은 것일
뿐 사실은 무의미하다.”고 하면서 한주가 정재를 사사한 것만으로 학설을 계승한 것이 아니며 “그가 事
師한 정재를 뛰어넘어 대산에로 바로 이어도 무방할 것으로 생각한다.(「한국 성리학 主理論의 발전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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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치하고,퇴계학파에서 대산 이후 류치명이 거론되는 점을 주목하였다.
류치명은 18세기말〜19세기 중반에 수곡파 가학의 역량을 대내외적으로 대
표할 수 있는 일원이고 조선후기 道學者로서 퇴계학파 중의 일파로 분류되는
‘定齋學派’169)의 주인공이다.더군다나 수곡파에서는 류치명 이전세대부터 류도
원․류장원․류건휴 등 수곡파 대표학자들과 류치엄 등이 대산의 학문을 계승
하는 과정에 깊이 관련되어 있었음을 더욱 주목하였다.
사실,류치명과 관련해서는 직간접적으로 몇몇 연구논문이 발표되었기 때문
에170)본고에서는 간략하게 언급하고,류치명을 있게 한 수곡파의 여러 학자들
과 특히 류치엄에 대해 좀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살펴보고자 한다.
수곡파는 퇴계학맥의 큰 흐름에서 ‘小退溪’라고 불리는 대산의 사상과 학문
을 그들 내부적으로는 (柳道源)-柳長源-(柳範休)-柳致明으로 계승․발전
시켜 퇴계학맥을 이음과 동시에 그 연장선상에서 특히,대산의 학문을 ‘湖學’171)
으로 명명하고 그 이론을 집성하여 완성시키고자 하였다.따라서 수곡파가 ‘호
학’을 완성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퇴계학맥을 계승하여 전개해 나가
에서의 大山 李象靖」,『대동한문학』제25집 270쪽, 대동한문학회,2006.12.)”고도 하였다. 본고는 20여
년 간의 간격에서 오는 관점의 변화에 주목하기도 하지만 상기 언급한 학맥의 문제를 깊이 논하고자 하
는 것이 아니다.
169) 姜允丁,「定齋學派의 現實認識과 救國運動」p27. 檀國大學校大學院 史學科, 박사논문, 2006,12. “본
격적인 정재학파의 형성은 1827년 21명의 전주류씨로 구성된「大坪約案」이 만들어지면서부터이다. 류
치명의 아들 柳止鎬는 문인들을 案에 올리고 결속을 다져나갔다. 1830년에 龜溪書院에서 강론이 열렸
는데, 류치명은 李秉遠․류건휴와 함께 강론을 주관하는 자리에 참여하였다. 이 해에 18명(전주류씨 14
명, 안동권씨 2명, 의성김씨․광산김씨 각 1명)이 계안에 등록되었다. 이어 1831년 16명 (전주류씨 14명,
의성김씨 1명, 심씨 1명), 1832년 11명 (전주류씨 7명, 안동권씨 1명, 재령이씨․영천이씨 각1명, 영양남
씨 1명), 1839년에 2명(전주류씨)이 등록되었다. 183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류치명 문하에는 주로 전
주류씨 집안 자제들만 출입하고 있었다. 물론 姜楗·李敦禹등이 이 시기에 류치명의 제자로 활동하였지
만, 아직「大坪約案」에 등록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류치명 문하는 혈연적 학문집단을 크게 벗어
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1846년 고산서당 강회와 1855년 莊獻世子 추존상소와 관련한 智島유배를 계기
로 영남의 여러 지역 유생들이 입문하였다. 1856년에는 46명, 1857년에는 81명이 문인이 그의 문하에
입문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류치명의 문인록에는 543명의 문인이 올라있다.”
170)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박원재,「후기정재학파의 유교개혁론 연구-해창 송기식의 유교유신론을 중심으로」,『국학연구』 , 한국
국학진흥원,2007,제10집.
권오영,「학봉 김성일과 안동지역의 퇴계학맥」,『퇴계학맥의 지역적 전개』, 퇴계연구소 편, 보고사,
2004.
,「19세기 영남이학의 전개와 그 실천적 성향, 영호남 사림의 학문과 실천의식 비교연구」,『지방
학연구 활성화를 위한 2006 한국국학진흥원 한국학 학술대회 발표논문집』, 2006.
,「조선후기 유림의 사상과 활동」, 도서출판 돌베게, 2003.
홍원식,「근대 시기 영남유학의 운동과 사상」,『한국유학사상대계Ⅲ』, 한국국학진흥원, 2005.
윤동원,「定齋 柳致明의 生涯와『坪上及門諸賢錄』에 관한 硏究」,『도서관』제62권제2호, 국립중앙도서
관, 2007.12.
171) 여기에 쓰이는 ‘湖學’은 大山 李象靖의 학문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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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수곡파와 대산과의 관계를 살피려면,우선 葛庵李玄逸과의 관계부터 확인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왜냐하면 그들의 가학이 크게는 이현일-이재-이상정에
이르기까지 地緣과 血緣을 통하여 상당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갈암은 당시 자신보다 27년 연장이었던 수곡파 종손인 柳橚의 壽宴자리에
서 次韻詩172)를 지었고,류직에 대한 만시173)를 지어 올릴 만큼 상당한 교분이
있었다.이후 柳敬時,柳慶輝,柳錫斗,柳升鉉,柳觀鉉형제 등은 갈암의 문인이
었다.그의 아들이자 당시 문인들 중 가장 연장자 중 한 사람이었던 밀암 이재
는 金聖鐸․李萬敷․權斗經․權斗寅등과 갈암의 동문제자로서 함께 교유하면
서 文丈으로 대우받았다.수곡파에서 이들과 교유한 대표적인 인물은 柳顯時이
다.그는 권두경․권두인 등이 “柳某의 문장과 덕행은 우리 향토에서 제일인자
이다.”라고 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었고,특히 밀암과 더불어 太極에 대한 토
론을 하다가 의견을 모으지 못하고 그만 두었으나 후일 밀암은 “柳某의 설이
과연 틀리지 않았다.”고 칭찬하기도 하였다.또 김성탁은 “호와옹의 才操는 蘇
東坡에 비견할 만하다.”고 하는 등 학문과 덕행으로 상당한 인정을 받았다.밀
암은 자주 수곡파를 출입하며 상당한 친분관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174) 수곡
파 인물 중에서 밀암에게 직접 수학한 문인으로는 林隱柳光濂등이 있다.이
러한 관계 속에서 대산은 밀암의 외손자로서 14세부터 그의 문하에 들어 수업
하면서 수곡파 출신 동문들과 자연스럽게 교유하였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수곡파와 대산의 직접적인 관계는 대산이 1737년 27세에 黃山文會에 참석해
류장원의 對策試券에 대해 칭찬하기도 하고,1740년 30세에 枕澗亭으로 류승현
을 찾아와 인사를 하는 등의 기록을 보더라도 일찍부터 왕래가 있었다.하지만
수곡파에서 대산에게 직접적으로 수학을 한 제자는 柳道源을 비롯해 柳長源․
柳星休․柳川休․柳範休․柳洛休․柳玄休․柳晦文․柳龜休등 9명 내외로 확인
된다.175) 그 중 류장원은 46세의 나이에 대산의 문하에 들어가 10여년을 제자
가 되는 계기로 그 동안의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湖門의 그것과 접목시키며 재
172)“春風冠冕正相隨 殊錫恩光動壽巵 偕老芳盟徵此日 俱存至樂會今時 斕斕綵服聯裾戲 炯炯方瞳壓座奇 孤
露增添風樹感 休嗔屬和久愆期” (李玄逸,「次柳護軍橚壽席韻」,『葛庵先生文集』卷1. )
173) “先賢澤已斬 末俗眩淫辭 阿好人心僻 循私道術岐 騰章公辨白 抗志孰磷緇 閑距功非細 誰刊第二碑” (李
玄逸, <挽柳丈㮨改葬>, 『葛庵先生文集』卷1.)
174) “少從荷塘權斗寅蒼雪權斗經遊 二公大加歎曰 柳某文行 當爲吾鄕第一人”, “賞與密庵李公栽論太極之旨
不合而罷 密庵後語人曰 柳友之說 果不謬矣”, “霽山金公聖鐸言 壺翁才調可比東坡” (柳道源, <行狀>,『壺
窩遺稿』卷2.)
175) 收錄順.『대산 이상정 제자전기 高山及門錄』, 영남퇴계학연구원, 국학미디어,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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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립하게 된다.류범휴는 아버지 류도원의 명을 받고 대산의 제자가 되었는데,
대산의 나이 66세에 직접 ‘造德凝道之方’인 4言4句의 16字교훈을 받았다.176)
한편 류회문이 대산의 장자 艮巖李垸의 사위가 되면서,수곡파는 韓山李氏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게 되었다.당시에 이미 여러 제자들이 湖門에 들어가 공
부하고 있기도 한 상황에서 혼인관계까지 맺게 된 수곡파는 자연스럽게 퇴계-
학봉-갈암-밀암-대산으로 이어지는 학통의 정맥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특히,
류장원 문하에서 수학한 류건휴․류병문․류휘문․류정문․류치명 등의 친족문
인들이 관련저술을 속속 편찬하면서 전개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류장원은 대산의 학문의 요점을 분류별로 편성하여「湖書類
編」177)을 지었고,류건휴는 퇴계와 대산의 학문의 요점을 취하여 근사록 체제
로 편성한 13권 2책의「溪湖學的」을 지었고,류범휴는 대산에게서 견문한『대
학』『중용』과 心性理氣의 설을 듣고 기록한「湖上記聞」을 지었고,류병문은
「湖書要訓」을 지었다.178)이들 저술제목의 대부분이 ‘湖書’,‘溪湖’,‘湖上’등을
쓰면서 공식화하고 있다.
그 중「계호학적」서문과 「호서요훈」발문을 살펴보자.
퇴계선생은 덕이 성하고 도가 높아 주자의 학통을 계승해서 그 문인에게 전수하였다.
그의 계통이 대산선생에게 이르러서 다시 여러 先儒의 정수를 모으고 유학의 바른 전통
을 이으셨다.두 선생의 一言一行은 오묘한 도와 정의가 발현한 것이니,그 저서에 나타
난 것은 모두 귀신에게 물어보고 백세를 지나도 의심이 없는 것이다.그러므로 학자들이
그 학설을 배우고 體行을 하면 저절로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성현의 영역으로 들어갈
것이다.그런데 우리 족조 대야공(류건휴)은 어려서부터 동암옹을 사사하여 대산의 지결
을 받아 白首가 되도록 경서를 공부해서 성리를 연구하는 동시에 두 선생의 전서를 숙
독하고 심사하여 그 정밀한 요체를 뽑아 분류하고 편차하였으니,그 편차는 근사록을 모
방한 것이다.179)
176) “‘立志居敬 致知力行 剛健中正 含弘光大’ 柳君天瑞從余遊 志專而功深 一日以數紙要余書古今格言 以佩
服終身 余昧於學而拙於書 何足以及此 顧其意甚懇 遂書此以與之 蓋以立志居敬爲基本田地 而竆理以致其知
力行以踐其實 則造德凝道之方 盡於是矣 熟玩於聖賢之書而充廣焉 持之以悠久 懋之以篤厚 則其進也將孰禦
焉 剛健以下八字 卽乾坤之德 能體此以成其德 則無負於天地降衷之性 而亦天瑞分上變化氣質之道 故特致意
焉 不以書拙而忽之則幸也” (<書與柳天瑞十六言帖後丙申>,『大山先生文集』卷45.)
177) 산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178) 저술 제목 중 ‘溪’는 退溪를, ‘湖’는 모두 대산 이상정이 태어난 ‘蘇湖里’를 말한다.
179) “我陶退老先生 德盛道尊 承考亭之統 其門人弟子 相與授納 至于湖上李先生 復集羣儒之粹 紹斯道之傳
兩先生一言一行 無非妙道精義之發 而其所筆之於書者 旣皆質鬼神竢百世 而無疑 學者誦其雪而體行之 自當
不流於他岐 而入聖賢之城 不遠矣 我族祖大埜公 少師東巖 獲聞湖上之之旨 白首窮經 沈潛性理 嘗於兩夫子
之全書 熟讀而深思之 遂就其中 摭取其精要之語條 分類別畧 倣近思錄編第 凡十四卷 名之曰 溪湖學的”
(柳致皜,「溪湖學的序」,『文獻叢刊』6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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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 이선생의 글자 하나 말씀 한마디는 모두 ‘師法’이라 할 수 있는데,같은 마을 가
까운 곳에서도 집집마다 가질 수 없어 사람들은 그것을 외웠다.권질이 많고 널리 유포
되지 못하여서 불녕은 일찍이 한 본을 빌려 論禮여러 조목을 뽑아서 ‘상례답문’2책을
만든 적이 있었다.이윽고 선생께서 理를 논하고 學을 논한 글을 차례대로 모아 책을 완
성하였는데,‘호서요훈’이라 명명하였다.모두 24권으로,상자에 넣어두었다가 아침저녁으
로 읽어보니 선생의 오묘한 도와 정밀한 뜻이 담겨 있고 성현을 잇고 후생을 열어주는
[繼往開來]공업이 元稿를 보지 않고도 가히 여기에서 살필 수 있었다.그러나 이 책은
다만 궁벽한 마을에 사는 후생이 마음대로 편리하게 할 계책일 따름이니,어찌 감히『朱
退書節要』와 견주어 스스로 외람되이 뛰어넘는 죄에 빠지겠는가!본서의 처음과 끝을
보면 저절로 類例가 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180)
요컨대,柳致皜는 퇴계 이후 영남의 학통이 대산에게 전해진 후 수곡파 내
부에서는 류장원을 거쳐 류건휴로 이어진다고 하였다.그 다음은 대산의 高弟
중 한 사람인 류장원을 적전한 족증손 류치명로 이어지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또 류병문은 ‘대산의 隻字片言’을 師法으로 규정하고,먼저 대산이 禮를
논한 부분을 모아「喪祭禮答問」2책을 만들고,‘理’와 ‘學’을 논한 글을 순서대
로 모아「湖書要訓」24권을 지었다고 하였다.
아울러,류건휴와 류병문은 류장원의 제자이기도 하였는데,각각 스승의 사
상과 학문을 기록한「巖齋語錄」과「巖齋記聞」을 지었다.여기에서 대산의 학
문이 당시 수곡파의 사상과 학문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
음을 알 수 있는 단적인 증거라 하겠다.이렇게 수곡파 내에서는 대산의 사상
과 학문에 대한 추종과 그 결과 만들어진 여러 저술들이 바탕이 되어 이후 류
치명을 배출하고,류치엄에 의해「湖學輯成」을 통해 이론적으로 종합되어지고
「湖學十圖」181)로 완성되어간다.
180) “大山李先生隻字片言 皆可師法 而同鄕近壤 亦不得家有而人誦之 蓋緣卷帙之夥 流布之未廣也 不佞嘗借
一本抄取論禮諸條 爲喪祭禮答問二冊 旣又摭其論理論學文字次輯而成書 命曰湖書要訓 凡二十四卷 藏弆篋
笥 蚤晩看讀 先生妙道精義之蘊 繼往開來之業 不待元稿而可攷於此矣 然此特爲窮巷晩生自私自便之計而已
豈敢比擬於朱退書節要 以自陷於僭踰之罪哉 觀於本書首末 則自可知類例之不侔矣”(柳炳文,<湖書要訓跋>,
『素隱集』卷4.)
181) 柳致儼,『萬山文集』卷4.
「湖學十圖」의 구성과 내용은 아래와 같다. 〇 第1 理氣彙編圖 (按此編於理氣之論 疤剔無遺 卽此題目 而其同異分合體用微顯之蘊 無所不備 眞千古
說理氣者之指南也 今摭其目爲圖 俾窮理者 有所考云爾) 〇 第2 率性之謂道說圖 〇 第3 一性具四德說圖 〇 第4 中庸首章圖 (按此圖 先生所手畫其於性道之原 存省之實 明白齊整 皆有下落實會極之要也 以上四
圖明性理之蘊) 〇 第5 心動靜圖 〇 第6 心無出入說圖 (按此說 因孟子所引孔子之言 采摭程朱說 以著明
操存之法者也 今摭爲圖如右) 〇 第7 敬齋箴集說圖 〇 第8 制養錄圖 〇 第9 九條疏圖 (按先生之學 本
末始終 莫詳於九條疏 今攝其精要 排列成圖 以見先生明體適用之道云爾) 〇 第10 約中編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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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치명은 류회문의 장자로서 바로 대산의 외증손이 된다.그는 대산의 고향
인 蘇湖里外家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친․외가를 아울러 학문적 환경은 갖추어
져 있었다.세 살 되던 해인 1781년,대산이 세상을 떠나 직접 배울 기회를 얻
지 못하였다.이후 본가로 돌아와 5살 때부터 류장원에게 입학하여 류장원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약 15년을 수학하였다.이후 류치명은 損齋南漢朝의 제자
가 되어 14년을 공부하였다.33세가 되던 해,남한조가 세상을 떠나자 3개월 服
制를 갖추어 心喪의 예를 갖추었다.이러한 혈연 및 대외적 사승관계는 류치명
의 학문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향후 영남사림을 대표할 수 있는 위치
에 오르게 하였다.
수곡파 사승관계에서 보았듯이,류치명은 가학의 범주에서는 물론이고,18세
기 말〜19세기 중엽의 영남 성리학풍을 주도하였다.이 점은 여러 차례의 강회
와 다양한 저술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그는 24세에「朱節彙要」를 완성하
고,26세 때 孤雲寺에서『大山文集』교정에 최연소자의 나이로 참여하여 두각
을 나타내기 시작하였고,35세에 류범휴가 高山講會에서 대산의 性道諸說을 敎
講할 때 배종하여 주변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이후 48세〜54세까지 黃山
寺182)에서『중용』을 강의하고 沙濱書院에서『심경』을 강의하였으며,류장원
의 저작인『상변통고』를 교감하였다.60세에『가례집해』를 완성하였고,69세
에『大山先生實記』10권 5책을 완성하였다.70세에 陶山精舍에서 강회를 열어
유림의 宗匠의 역할을 맡게 되었고,72세까지 沙濱書院에서『鶴峯先生文集』과
류건휴의『異學集辨』을 교감하였다.78세에 류치엄의『湖學集成』을 교감하였
고「大山先生神道碑」를 지었다.79세에 유배지인 호남의 智島에서 돌아와「葛
庵先生神道碑」를 지었다.
그의 문집에 대해 살펴보면,원집 37권 19책․속집 12권 및 부록 5권 등 8
책으로,총 54권 27책의 방대한 문집을 남겼다.그 중 원집 2〜16권은 스승인
남한조에게『심경』과『맹자』등에 관해 질문한 편지 2통을 비롯하여 당대의
학자와 관리 등과 政事와 학문에 관해 문답한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주목할
만한 별저로는 異學을 배격하고 儒道를 주창하며 논변한「讀書瑣語」가 있고,
有子의 ‘禮之用和爲貴’를 주제로 예의 근본원리를 闡明하고 나아가서 관혼상제
의 문제까지 총 백 수십여 조로 論及한「禮疑叢話」가 있다.성리학에 관한 주
된 논변설로는「理動靜說」․「八條目先後說」․「格物致知說」․「不睹不聞
說」․「程子冠說」․「操存說」․「鬼神章說」등이 있으며,明陳建이 王陽明
182) 黃山寺 : 臨河縣 동쪽으로 15리 떨어진 岐山(아기산) 아래에 있는데, 수곡파 세거지와 至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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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致良知說」에 대해 비판한 것을 읽고 논변한「讀陳淸瀾學蔀通辨」과 퇴계
의『주자서절요』에서 그 요절을 발췌하여 6편으로 재구성한『朱書彙要』등이
있다.
류치명은 혈연적 관계․사승관계 등에서부터 관련저술에 이르기까지 외증조
부 대산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그의 여러 저술들은 모두 정주학[성리학]
관련설을 이론적으로 논변하고 퇴계 중심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대산의 학문을
접목시켜 재정립하였다고 할 수 있다.그의 문인이 540여명이 넘는 것을 감안
한다면,그의 강론과 諸說및 論辨은 조선후기 영남유학이 이론적 체계로 무장
하는 데 상당한 전파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수곡파의 여러 학자들은 갈암․밀암 부자가 활동
하던 당시부터 퇴계학파의 중심에 있었고 사승관계와 혈연관계를 바탕으로 그
학맥을 계승해오고 있었다.또 대산의 학문을 傳受하는 과정에 류범휴가 받은
16字訣,다수의 대산 제자들 및 대산학문관련 저술,류치명의『大山先生實記』
편성 및「대산선생신도비명」등은 최소한 수곡파가 대산을 정통으로 계승하면
서 조선후기 여타 及門高弟들과 더불어 퇴계학맥의 중심에 있었다는 반증일
것이다.이러한 결론은 대산의 학문을 ‘湖學’으로 명명하며 한 단계 더 발전시
켜가는 양상을 살펴보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앞에서 거론한 인물들 외에 ‘호학’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수곡파 학자로서
柳致儼을 간과할 수 없다.그는 정재의 문인이면서 三從弟가 되고,역시 대산의
외증손이며 류장원이 從曾祖父이다.류치명이『대산선생실기』를 편성할 때 처
음부터 끝까지 협찬하는 역할을 맡았다.이 때 류치명의 나이는 69세였고 류치
엄은 46세였다.1855년 류치명이 莊獻世子추숭문제에 대해 상소하였다가 智島
로 유배를 가게 되자 형 柳致任과 함께 배종하기도 하였다.그는 당시 자신의
저술 중의 하나인「호학집성」을 류치명에게 교감과 자문을 구하였다.류치엄
이 大山實記편성에 참여하고 대산의 학문을 집성할 수 있었던 것은,그의 사
상과 학문이 (류도원)- 류장원 -(류범휴)- 류치명를 통해 전해지는,가학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는 또 조부 류범휴가 대산으로부터 받은 16자
교훈에 대한 해설서라 할 수 있는「學符演義」를 짓는 등 대산의 학문을 깊이
전수하여 ‘호학’의 요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나가고 일목요연하게 완성하는
핵심역할을 하였다.
류치엄의 문집은 그 학문성취에 비해 그 양이 비교적 소략하다.183) 그러나
183) 류정호가 류치엄의 초고를 정리한 필사본이며 8卷 4冊이다.『문헌총간』제 12집에 수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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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내용면에서는 그의 철저한 성리학적 학문세계를 확인할 수 있다.학자들과
주고받은 편지는 대부분 性理상의 문제를 논변한 것이고,잡저의 여러 ‘說’은
그 학문적 논변을 이론적으로 정리한 것이다.184)
그의 사상은 대산을 계승하고자 하였는데,‘만산’외에 별도로 사용한 호 ‘操
庵’에 대한 설에서 잘 드러나 있다.
나는 본래 마음이 보존하지 못하는 병이 있어 독서를 하면 바로 잊어버리고 應事에
는 미끄러지고 넘어져서 잠간사이에도 그 소재를 모르게 되어 친구들이 여러 번 경계를
해도 개선할 수가 없었다.(중략)그러므로 나의 거처하는 방을 ‘操庵’이라고 편액하였다.
(중략)대개 나는 들으니 一心을 정하여 여러 사특함을 물러나게 하는 것은 오직 ‘敬’뿐
이다.그것은 朱夫子의 ‘敬箴’에서 포괄하였는데,대산선생의 ‘발휘’에도 다 드러나서,남
아 있는 것이 없다.존심의 방법을 구하고자하는 자가 여기에 무엇을 더하겠는가?그러
나 存心만 알고 학문으로 천명하지 않으면 어찌 그 맥락을 알아서 冥冥한 곳으로 돌아
가지 않을까!지금 이후로는 경계하고 노력하여 한 마디의 말실수도 마음에 책망하고 한
가지 일 실수도 마음에서 구해 어디에서나 방임함이 없이 또한 이치를 밝힌다면 존심의
묘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후략)185)
류치엄 자신은 ‘心’에 대해 주자의 敬箴과 대산의 학문에 그 근원을 두었음
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그렇다면 그가 호학을 집성하고 완성했다는 근거는 어
디에 있는지 확인해 보지 않을 수 없다.그것은 그가 미리 저술해 놓은『호학
집성』에서 대산학문의 핵심을 이론적으로 집성한 후,이를 바탕으로『호학십
도』로 圖式化하여 완성한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湖學輯成」의 序文과 小識를 통하여 차례대로 그 집성 및 완성과정과 배
경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姨弟치엄이 外曾王考대산 이선생께서 친구 문인들과 주고받은 편지와 ‘實記’와 같
은 잡저를 모아 ‘근사록’의 편목에 따라 정리하여 8권을 만들고,그 면에 제목하기를
「호학집성」이라 하였으니,대산선생께서는 영남의 永嘉[안동]蘇湖里에 거주하시면서
유학을 크게 창도하시어 세상의 宗師이기 때문이다.일찍이 그 초고를 여러 번 고치면서
오래전에 간여하여 편차한 뜻을 들었다.을묘년에 나(치명)는 호남의 智島로 수 개월간
184) 잡저의 여러 ‘說’은 <孤雲記聞>․<四七分配本然氣質辨>․<高山講義>․<禮疑私箚>․<心喪追服議>․
<師服當否議>․<支孫祔祭說>․,先師考終記事>․<追遠祠撤享當否> 등이 있다.
185) “余素患心不存之病 讀書則乍記旋忘 應事則指東倒西 俄頃之間 莫知 其鄕尹友士 善累戒之 而余固未能
改也 昔朱夫子嘗於臥雲庵敎門弟以操存之法 今吾亭適在雲水山中 吾病又在心不存 故名吾室曰操庵 (중략)
盖吾聞之 一心才正 而羣邪退聽者 惟敬是已 朱夫子敬箴括盡條貫 而大山先生發揮無餘蘊 欲求存心之方者
孰有加於此哉 然徒知存心而不學而明之 則亦何以審其路脉 而不歸於冥寂乎 繼自今惕然知警勉焉 孜孜一言
才差便責於心一事或誤 卽求於心 隨時隨處 無少放過 而又必明理以先後之 及其澹然純一到底專精 則存心之
妙 始可得而言矣(후략)” (<操庵說>,『萬山文集』, 卷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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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책되었는데,치엄이 그 책을 가지고 따라와 함께 한 번 읽은 적이 있었다.간간히 살
펴보니 종묘백관의 성대함 모두 그 안에 있음을 안 후 이 책은 버릴 수 없음을 알았다.
대개 그 全書는 이미 집집마다 전해져 읽고 외우나 바다 속에 들어가 용을 보는 것 같
이 아직 그 靈珠를 얻기 쉽지 않고,지금의 이 책은 중추적인 요점을 끌어 그 종지를 밝
혀 한 눈에 보아도 강령과 조목이 찬연하니,학자들은 따라갈 바가 없음을 근심하지 않
는다.186)
대산선생께서 도를 論하고 학문을 講한 종지는 모두 유문에 갖춰져 있어 받들어 배우
고자 하는 선비가 진실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몸소 究明한다면 저절로 밝혀 알기 쉽다.
그러나 유문의 篇帙이 넓고 크며 의리가 精深하여 실로 쉽게 엿볼 수 없는 것도 있다.
그 문호에 증숙부 동암선생께서 일찍이 ‘호서류편’을 지었는데 질서정연하고 조리가 있
었으나 불행히도 어린아이들에게 잃어버렸다.나는 참람함을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대
략 근사록 편제를 모방하여 자르고 요약하고 분류하여 모두 500여조가 되었고 이를 정
리하여 8권으로 만들었다.그 편집조례와 같은 것은 장차 師門에게 질정을 바라면서 혹
동암선생의 책이 세상에 드러나면 마땅히 이 책은 버려서 濫越疊床하는 경계로 삼는다
고 할 따름이다.187)
류치엄의「호학집성」은 대산의 학문요체를 일목요연하게 밝혀 그 종지를
알 수 있도록 한 글이다.류치엄 자신의 소지를 보면,「호학집성」을 류장원의
「호서류편」을 대체하여 대산의 학문을 계승하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두
편의 인용문에서 수곡파가 대산학문에 얼마나 깊이 관련되어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류치엄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대산의 실기편성에 협찬한 경험과「호학집
성」․「학부연의」등을 저술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호학십도」를 완성하
는데,이것은 ‘호학’의 결정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그는 대산이 직
접 그린 제 4도․제 5도를 그대로 인용하고,나머지 8도는 대산의 학설과 저술
186) “姨弟柳致儼 採摭外曾王考大山李先生所與知舊門人往復書牘 曁夫雜著若實紀 倣近思編目 釐爲八卷 而
題其面曰 湖學輯成 以先生居嶺之永嘉蘇湖里大倡斯學 爲世宗師也 嘗屢易其稿 久已與聞次輯之意 歲乙卯
致明責湖南之智島數月 而致儼携其書以從 相與讀一過 間有丁乙 因以窺宗廟百官之盛 盡在其中 然後知是書
之不可已也 蓋其全書 固已家傳戶誦 然如入海觀龍 未易得其靈珠 而今是書挈其樞要闡其旨歸 一擧目而綱條
粲然 學者不患於無所從入矣 竊惟先生之學 本之平易而造夫高深 資之博大而反乎至約 極一生之力 而窮千聖
之旨 義理融爛 門路端的 直可百世以俟而非區區贊揚 所可萬一也 使夫承學之士案是書而嚌其胾1) 不覺其志
愈遜而心愈下坐了春風和氣於莫可承聆之後者 乃其威德之餘輝 有以默喻於指引導迪之外也 讀之已訖 俾余書
其撰輯之意則非所敢也 特其用意之勤 有可歎尙且勸其益加精審而去其重復 庶幾無憾於傳之來裔云爾” (柳致
明, <湖學輯成序>, 『定齋集 』卷22.)
187) “大山先生論道講學之旨 悉具於遺文 承學之士 苟能潛心體究 則自是簡暢易知 然篇帙浩穰 義理精深 實
有未易窺 其門戶者 曾叔祖東巖先生 嘗有湖書類編 井井有條 不幸爲童行所竊 致儼僭不自揆略 倣近思篇第
而節約彙分 凡得五百餘條 釐爲八卷 若其編輯條例 將以就正於師門 而叔祖之書 其或復出於世則此當毁去
以爲濫越疊床之戒云爾” (柳致儼, <湖學輯成小識>,『萬山文集』卷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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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바탕으로 직접 그려 편성하였다.또 각 圖의 끝에 ‘按’자를 사용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부언을 하고 일부에는 부언 아래 小註를 병기였는데,여기에서
그 작성 배경과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188)아울러 퇴계의 學問精髓가「聖學
十圖」에 있다고 하듯이,대산의 그것도 비록 대산 자신이 모두 그린 것은 아
니라하더라도「호학십도」에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이상을 논의를 간략히 요약해보면,수곡파 가학의 전개과정에서 사상적․학
문적으로 정주학을 근간으로 영남학맥의 퇴계-학봉-갈암 부자-대산 계통을 이
어오고 있다.다시 말해서,수곡파는 17세기〜18세기 말까지 영남 성리학맥의
큰 범주 안에서 나름대로의 학문적 기반을 꾸준하게 유지해 왔다.최초 수곡파
의 학문과 사상은 비록 학봉 김성일을 통해 시작되었지만,이후 철저하게 정주
학과 퇴계 및 학봉의 사상과 학문을 근간으로 하면서 견고한 家系內的師承關
係를 통하여 누대를 걸쳐 전수되었고 발전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특히 18세기 중반을 거쳐 19세기까지 류장원을 비롯한 대산 문하
의 여러 수곡파 제자들을 학문적 배경으로 한 ‘류치명’이라는 수곡파의 대표인
물을 배출시킴으로써 그 영향력이 대내외적으로 최고조에 올려놓았다.게다가
‘류치엄’을 통하여 대산의 학문을 ‘호학’을 완성하며 자신들만의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또 이러한 수곡파의 학풍은,구한말〜20세기 중반
외세에 의한 사회적 혼란과 국가존망의 위기를 거치면서도 선대를 이어 가문의
사상과 학문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실제로
앞에서 언급된 여러 인물들을 제외하고도 수곡파에서 19세기말을 전후로 태어
나 20세기중엽까지 활동하며 유고를 남긴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점에서도 그
일단을 확인할 수 있다.189)
3.多樣한 著述과 學問的性向
본절에서는 수곡파 가학의 전승과정에 이룬 학문적 성취를 다양한 저술과
기록 활동을 통해 실천적으로 전개했다는 점을 서술하고자 한다.이런 실천적
모습은 수곡파 기록정신의 산물이자 사상적․학문적․문학적 결과물을 총집하
188) 「호학십도」에 대해서는 별도의 고찰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189) 출생년도 순으로 西坡 柳必永(1841∼1924)․水村 柳淵博(1844∼1925)․汎庵 柳淵楫(1853∼1933)․晩山
柳昌植(1858∼1912)․恬庵 柳淵龜(1861∼1938)․東山 柳寅植(1865∼1928) 등을 비롯하여 대략 40여 명
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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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간행해오고 있는『문헌총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여기에서는『문헌총
간』에 수록되었거나 수록예정인 문집과 저술들의 개괄적인 현황을 살펴본 후,
그 성격과 저술경향 등에 대해 개략적으로 고찰하기로 한다.논의전개는『文獻
叢刊』에 수록되어 있는 별저와 개별 문집 내 잡저를 중심으로 그 저술의 성격
과 분야별로 살피는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우선,수곡파가『文獻叢刊』을 영인발간하기 시작한 1983년 당시의 배경과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이것은 수곡파가 남긴 문헌의 양을 단적으로나마
가늠해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래는『문헌총간』간행사이다.
(전략)전주류씨 수곡파는 侍正公(류성)이 肇基하사 岐峯公(柳復起)이하 十數代를 尙
文의 기풍으로 내려와서 문사가 배출하고 문헌이 瞻富하기로는 전국적으로 최고라 해도
과언은 아닌 만큼 일반이 공인하는 것이다.그러나 세대가 멀어갈수록 그 문헌이 散亡되
어가니 우리들은 이것을 憂嘆하여 이 문화유산을 全體로 길이 보존하려는 의도에서 그
것을 총수집하여『全州柳氏水谷派之文獻叢刊』으로 영인하게 되어 그 제1집․제2집을
동시에 발간하고 다음으로 총 20책을 순차로 발행하려는 바이다.이에 제 1집은 時字行
列以下5代로 하고 제 2집은 三檟亭派鉉字․源字行의 兩代로 했으며,제 3집은 三山(류
정원)공의 문헌으로서 하고,다음은 休字行列以下순서로 발행할 것이다.(후략)190)
수곡파는 10여 세대에 걸쳐 누적된 문헌이 각기 흩어져 사라질 것을 염려하
여 하나로 모아 보존하려고 하였다.또 각 세대별로 편차를 나누어 간행하면서
전체 20책으로 계획하였다.이후,수곡파에서는 당초 20책으로 간행하려던 계획
을 간행과정에서 추가로 수집된 문집과 지면의 증가로 인해 25책으로 증간할
계획으로 수정하였다.
전주류씨 수곡파『문헌총간』영인사업은 1983년 6월부터 1991년 10월에 이르기까지
우리 수곡파의 문집 및 전적을 영인 간행하였는데,각 문집 典籍머리에 明谷(柳正基)공
의 해제를 붙여서 총 25輯을 간행할 목적으로 시작하여 그동안 여러 가지 곡절을 겪으
면서 13집까지 60여 전적을 간행하였다.(후략)191)
위에서 알 수 있듯이,『문헌총간』은 현재까지 총 25집 중 13집이 간행되
었다.『문헌총간』은 집수별로 평균 약 750여 쪽이다.고문집 4면을 양장본
190) 柳正基,「水柳文獻 刊行의 辭」,『國譯 全州柳氏水谷派之文獻叢刊 附文集解題』, 全州柳氏岐山會,
2004, 대보사.
191) 柳昌勳, 「編者序」,『水柳典籍要覽(上)』,성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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輯數收錄內容備考
1輯
檜軒逸稿/事蹟續錄1책,岐峯逸稿1권,附錄-八道地圖(義兵用),陶軒文集2
권1책,百拙庵文集4권2책,冶溪文集2권1책,乖厓文集4권2책, 萬嶺詩稿1
책,空空齋實記2책,蒙泉逸稿2책/家禮集說6권3책,磨泉逸稿/紫陽集解11
권3책,涵碧堂文集4권2책
문집20여권15책,
別著15권4책
2輯
慵窩集4권2책,陽坡集4권2책,蘆厓集10권5책,退溪先生文集攷證8권4책,
戊申倡義錄5권2책,表忠綸音/致祭事蹟1책
문집18권9책,
별저8권4책,
기타7권3책
3輯
壺窩遺稿2권2책,綠筠軒遺稿/葛天窩遺稿3권2책,三山文集8권4책,易解參
攷17권10책,壺溪遺稿1권1책,附錄-恭人聞韶金氏殉節事蹟
문집14권9책,
별저17권10책,
기타 1건
4輯
東巖文集14권7책,
四書簒註增補(大學4권,論語14권,孟子8권)
문집14권7책,
별저22권
5輯四書簒註增補(中庸5권),附錄-小註攷疑,常變通考30권16책 별저35권16책
6輯
醉軒詩集1권1책,月會堂世稿/松陰遺稿1권1책,江浦文集3권1책,大埜文集
10권5책,東儒四書集評6권,溪湖學的13권2책,異學集辨5권5책
문집16권9책,
별저24권7책
7輯國朝故事40권 별저 40권
8輯
驅書上下2권,부록-琴操,壺谷文集14권7책,壽靜齋文集12권6책,近思錄集
解增刪14권
문집26권13책,
별저16권
9輯素隱文集6권3책,好古窩文集19권10책 문집25권13책
10輯
好古窩外集8권4책,附錄-滄浪問答,好古窩續集2권1책,小學章句/小學童
子問6권3책,濂洛風雅補遺7권2책,易說管窺1권,龜峀文集1권1책,守齋文
集권2책
문집15권8책,
별저15권6책
11輯定齋文集37권
12輯定齋續集/附錄17권,朱書彙要4권2책,定齋門人錄4권2책,萬山文集8권4책
문집62권19책,
별저8권4책
13輯方谷文集4권2책,小隱文集4권2책,近庵文集6권3책,典禮攷證25권
문집12권7책,
별저25권
(19cm X 26cm)1면으로 편성하여 영인하였다.따라서 추산하면 약 18,000여
쪽이 된다.
『문헌총간』의 구성 체제와 수록내용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92)
<표 2> 『문헌총간』의 구성과 수록내용
이상은 수곡파가 자신들의 선대문헌을 현재까지 영인하여 간행한 집수별 수
록내용이다.미 간행본은 脚註에 제시하여 참고하도록 하였다.193)『문헌총간』
192) 『國譯 全州柳氏水谷派之文獻叢刊 附文集解題』와 『水柳典籍要覽(上)』을 참고하였다.
193) 향후 간행예정 목록은 아래와 같다. 起軒文集 2책, 櫟庵文集 5책, 東林文集 6책, 同窩文集 3책, 易說
窺管 1책, 隱臺文集 1책, 東獻通攷 12책, 可隱文集 6책, 伯窩文集 1책, 石下文集 2책, 石隱文集 3책, 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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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내용을 종류별로 대략 나누어 보면,문집류 약 80종 200여 책․별저류 20
여종 70여 책․기타 5종 3책 등이다.194)
(1)禮學분야의 저술
수곡파의 禮學傳統은 입향초기부터 이어져 온다.수곡파 입향조 류성의 부
인 金玉貞은 남편 상을 당하자『가례』에 準據하여 상례를 마쳤고,류복기의
外叔인 학봉은 조카가 수곡에 정거하는 시기에 喪祭禮에 대해 일일이 물어 절
차를 확인해 주기도 하였다.예학은 수곡파가 매우 중요하게 인식하였던 분야
중 하나이면서 가학의 전통과 특징을 가장 잘 대표하는 분야로서 관련저서에서
도 주목할 만한 것이 많다.
그 중 수곡파의 예학관련 저술을 대표하면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것이 류장
원의『常變通考』30권 16책이다.195) 류장원은 이종수․김종덕 등과 더불어 이
른바 ‘湖門三老’로 불리면서 대산의 학문을 계승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그는
『상변통고』를 지으면서 범례 10조를 시작으로 인용서목 246종과 唐宋학자
및 우리나라 학자 106명의 예설을 인용하였다.본문은 ‘通禮(권1)’부터 ‘家禮考
疑(권30)’까지 총 2,000조의 세목으로 구성되었다.본서의 특징으로는 예에 있어
‘常禮’와 ‘變禮’를 구분하였다는 점이다.이는 변치 않는 예의 기준을 정하고 시
대와 경우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기준을 분리함으로써 ‘體用’의 관계를 포괄하였
山文集 2책, 修齋文集 3책, 守齋文集 3책, 汎庵文集 5책, 水西文集 5책, 天山文集 1책, 石山文集 2책,
西坡文集 13책, 恬庵文集 8책, 古山文集 2책, 琴下文集 3책, 曙山文集 1책, 廣林文集, 洙谷文集, 愧軒文
集, 洗心文集, 平川世稿, 東山文集 2책, 海東詩史 2책, 大東史 10책, 可林文集 4책, 誠庵文集 2책, 雅林
文集 4책, 醒庵文集 3책, 慵坡文集 1책, 立軒文集 2책, 芙溪文集 1책, 農圃文集 2책, 聽山文集 1책, 所
潭文集 1책, 一耕文集 1책, 包堂文集 3책, 時堂文集 1책 등이다.(『水柳典籍要覽』을 참조하였으며, 책
수가 명기되지 않은 것은 1책으로 산정하였다.)
194) 통계는『문헌총간』만을 대상으로 하였다. 특히, 別著의 통계에 있어서는 문집 내에 수록된 저술은
제외하였다. 따라서 각각의 기준에 따라 변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권오영은 그의 논문 ‘「전주류씨 수
곡파의 가학연원과 사상적 특징」*표’에서 별저류를 약70여 종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문집류에 포함
된 잡저[별저류]를 나누어 설명한 것이며, 전체『문헌총간』간행목록에서 누락된 것까지 포함한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류희걸은 “文獻으로 單行本 著述과 개인의 文集을 남긴 분은 모두 77명이나 된다. 책의
性格은, 性理學的 바탕위에 禮學과 實學的 또는 考證學的인 面과, 經書, 易書, 天文書, 曆書, 參考, 人物
辭典, 兒童敎育書가 大部分이며 심지어는 宗敎批判書까지 실로 多樣하여 學者들은 이들 文獻을 높이 評
價하면서 지대한 關心을 모으고 있다. 文集 77, 逸稿 4, 曆書, 天文書, 易書 4, 人物 12, 經書 3, 宗敎批
判書1, 考證書 7, 遺稿 12, 實記, 世稿 3, 敎育書 2, 禮書 3, 其他 10, 총 135種에 551卷이나 된다.”(柳
熙杰,「全州柳氏 水谷派文獻 및 古文書 考察」,『안동문화 12집』,안동문화원,1994.)고 하는 등 차이를
보이고 있다.
195)『상변통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권진호의「수곡류씨의 예학적 전통과 동암 류장원의『상변통
고』」(『안동무실마을-문헌의 향기로 남다』,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예문서원, 2008.)를 참조하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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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할 수 있다.특히,류장원은 예학가의 예설을 인용함에 있어 退溪․鶴峯․
西厓․葛庵․大山등 영남예설과 栗谷李珥․澤堂李植․沙溪金長生․愼獨齋
金集․尤庵宋時烈․農巖金昌協․南溪朴世采․明齋尹拯등 인용학자의 1/3
에 해당하는 西人老論과 少論의 예설까지 비교분석하는 등 黨色을 초월하여 수
용하는 개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류지는『邦禮辨證』7조목을 지었는데,이 저술은 그가 禮曹正郞에 재직하면
서 孝宗이 승하한 후 송시열 등이 大王大妃의 服制를 朞年服으로 정하자 그 부
당성에 대해 변증한 것이다.
류경휘는『家禮輯說』을 편성하였다.그 편성과정에서 아버지 류지와 주고
받은 편지를 통해 수곡파가 예학에 관하여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단적
으로 알 수 있다.196)『家禮輯說』은 古禮와 중국학자들의 예설과 퇴계를 비롯
한 鄭逑․旅軒張顯光․愚伏鄭經世등과 서인학자 이이․김장생의 예설을 수
록하고 있다.197)
류건휴는 김장생이 증보․교정한『喪禮備要』를 정리하여 견해를 밝힌『喪
禮備要疑義』를 지었는데,이것은 류건휴의 예학적 관심의 소산이며 나아가 퇴
계와 가학연원으로부터 내려오는 예설과 이식․윤증․박세채 등의 설을 인용하
여 김장생 등 서인의 설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198)
류휘문은『家禮』의 논란이 되는 부분을 적시하여 자신의 예학적 견해를 밝
힌『家禮攷訂』2권 1책과 太古부터 宋明대에 이르기까지 大夫와 士의 冠․服에
대한 경전에 근거하여 자료를 수집․고증하고 도식화 한『冠服攷證』2권 1책을
지었다.
류치명은 스승 류장원의 상변통고를 근간으로 중요한 조목을 抽錄하여 자신
의 견해를 밝힌『家禮集解』4책 및 禮의 體用의 관점에서『禮疑叢話』120조를
지었다.
류치덕은 예학 관련서적 162책과 학자 95명의 예설을 인용하여 편찬한『典
禮攷證』25권 12책을 지었다.『典禮攷證』은 류장원이 편찬한 상변통고가 士禮
196) 류경휘의 아버지 류지의 편지가 그것인데, “禮說을 수집하던 것은 頭緖를 이루었느냐? 빨리 보여주면
좋겠다. 예전에 나는 邦禮가 잘못 되었음을 말한 적이 있는데 처음에는 妄發할까 겁을 냈으나 경전의
제설을 참고해 보고 一家의 식견을 얻었다고 자신하게 되었다. 禮를 강론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와 같음을 너희들은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전략)禮說蒐輯已成頭緖耶 從近來示爲好 年前吾嘗言邦禮
之誤 初以妄發爲懼 及攷經傳諸說 始信一得之見 禮之不可不講如此 汝輩宜識之”<柳榰, <奇慶輝>, 『乖厓
文集』 卷2. )
197) 권진호,「수곡류씨의 예학적 전통과 동암 류장원의『상변통고』」,『안동무실마을-문헌의 향기로 남
다』,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예문서원, 2008.
198) 위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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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만 상세하고 국가의 大禮는 논급하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경전과 歷代禮
誌및 國朝典憲을 널리 詳考하면서『상변통고』의 편례를 모방하여 편찬한 것
이다.류치덕은 수십 년 동안 정력을 바쳐 편찬한『전례고증』이 사례의 전범
이 되는 상변통고의 속집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리라고 자부하였다.199)
이밖에도 류도원은『四禮便攷』를 지었고,류연구가『가례집해』의 편찬취
지와 같은 이유로『常變要解』등을 지었다.200)
수곡파가 예학을 중요시하고 예학에 관한 저서를 많이 남긴 점은 안으로는
누대로 가문의 전통과 질서를 유지하게 하고 밖으로는 사회변화에 따른 시대질
서 유지에 일조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할 것이다.다시 말해서,예학과 관련하여
17세기에 류지와 류경휘,18세기에 류도원․류장원․류건휴․류휘문,19세기와
20세기까지 류치명․류연구 등까지 끊임없이 저술을 남기면서 예학적 전통을
전개해 왔다.
수곡파의 예학자와 그 저서를 통해 한 가지 더 추론할 수 있는 점이 있다.
수곡파가 예학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류지가 중앙의 禮曹에 있던
17세기 중반(1659)부터 서인과의 禮說대립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이는 퇴계
학파의 예학적 면모가 당시 서인 노론계의 예학적 전통과 차별성을 지녀 갈암
을 통해 18세기 대산에게로 전해지는 경향과 맥락을 같이 한다.201)그러나 동
시대에 활동하였던 수곡파의 류장원은 상변통고를 저술하면서 인용학자의 1/3
에 해당하는 서인 노론과 소론의 예설까지 비교분석하면서 수용하는 개방적 자
세를 견지하였다.이 점은 류장원이 영남의 예학 전통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당
시 조선 예학을 재정립하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이와는 저술방향을 약간 달
리하여 류건휴는『상례비요의의』를 통해 여러 제설을 인용하면서도 유독 서인
의 설만을 비판한 점은 특이하다 하겠다.전체적으로 볼 때,수곡파는 상변통고
를 계기로 東儒의 제설을 수용 비판하고 20세기까지 더욱 많은 예학관련저술을
쏟아내면서 독자적으로 그 체계를 세우면서도 퇴계학맥상의 예학적 전통을 이
어갔다고 할 수 있다.
(2)註釋學분야의 저술
수곡파 학자들 중 몇몇은 독서법을 통하여 이 분야에 주목할 만한 주석서
199) 위 같은 책.
200) 산실되어 현재 전하지 않는다.
201) 권진호,「수곡류씨의 예학적 전통과 동암 류장원의『상변통고』」,『안동무실마을-문헌의 향기로 남
다』,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예문서원,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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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남겼다.그들의 주석서는 주로 경전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고,퇴계를 비롯한
선현들의 문집을 깊이 있게 연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그 대표적인 저술
들은 다음과 같다.
류장원은 자신의 문집이 14권 7책이고 영남예학의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상변통고』30권 16책,『사서찬주증보』31권의 저자이다.이러한 저술들은
그의 연구하고 고증하는 학문 자세를 잘 대변하고 있다할 것이다.그는 9세에
백부인 류승현에게 수학하기 시작하여 13세에 黃山寺文會에서 對策을 지어 장
원을 하면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이상정과 김락행 등으로부터 학문
적으로 인정을 받았다.그는 매일 닭만 울면 일어나 세수를 하고 의관을 정제
한 후 저녁까지 책만 보다가 의문점이 있으면 철저하게 연구하여 깨치면 불을
켜고 기록하였다고 한다.
그의 저술 중『四書纂註增補』는 57세에 편성하였다.이 책은 총 31권으로
대학 4권․논어 14권․맹자 8권․중용 5권 등으로 세분되었다.그는 小識에서
“선유가 경서를 해석한 것이 여러 서적에서 다수 나오니 그것을 전부 보기는
용이한 일이 아니다.송대에 여러 학자들이 이미 주석을 편성하였던 것이 지금
경서의 小註로 되어있지만 그 微言을 분석하는 데는 오히려 미진한 것이 있기
때문에 다만 오늘에 모두 채집해서 참고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는 바이니 감히
纂註만 많이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것으로써 나 자신이 考閱하는데도 편의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202) 여기에서 그의 연구 자세와 저술 취지를 엿볼
수 있다.
류장원은 사서를 통해 성현의 은미한 도를 구현하는데 있어 기존의 주석이
미진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따라서『論孟正義』․『中庸集略』․『四書或
問』․『朱子大全』․『朱子語類』등 5종의 인용서를 바탕으로 빠진 부분을
‘纂註’의 형식으로 보충하였다.본서는 부록을 포함하고 있는데,『小註攷疑』가
그것이다.이 부록은 元代의 道川倪氏가 지은『輯釋大全』의 일부 오류를 추
출하여 대산에게 교정을 구한 것이다.그러나 그 자신도 신빙성을 보장하지 못
하였기에 속편을 만들었던 것이다.
류건휴는『東儒四書集解評』6권을 지어 四書章句에 대한 동유의 評註를 집
성하였다.18세에 류장원의 가르침을 받아 25세의 나이에 이 책을 지었는데,그
학문 정도를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이 책의 편집과정에서 “내가 본서를 편
202) “先儒解經文字 散見雜出 未易遍觀 永樂諸儒 固已裒稡 爲纂註(則今小註) 然微言大倫 猶有未盡載者 今
悉採摭以備參考 非敢求多于纂註 聊以私便考閱云爾 庚子仲春 完山 柳長源 識”(<纂註增補識>,『東巖文
集』 卷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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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하다가 동암선생을 뵈오니 선생께서 ‘무릇 학문하는 법은 먼저 經文을 깊이
體認하고 융해가 되면 자연히 權衡尺度가 되어 제설의 輕重長短을 알 것이니
그러면 더욱 배움이 넓어지고 이치는 더욱 밝아질 것이다.그런데 지금은 경문
을 근본으로 하지 않고 먼저 제설만 보니 나는 그것이 실효는 없고 독만 있을
까 걱정이다’라고 하시기에 물러나와 스스로 경계하고 또한 훗날 본서의 독자
들을 경계하는 바이다”203)라고 하였다.이와 같이 류건휴는『동유사서집해평』
를 편찬하면서 경전의 본문에 가장 중점을 두면서 73종의 문집에서 관련 제설
을 채집하여 자신 뿐만 아니라 후학들이 참고하도록 한 것이다.다음으로 先儒
文集을 주해한 것이 있다.류대시의『紫陽集解』와 류도원의『退溪先生文集攷
證』(이하 ‘『溪集攷證』’)등이 그것인데,각각 주자와 퇴계의 문집을 주석한 것
이다.『자양집해』는 이미 간략하게 설명한 적이 있으므로,여기서는『계집고
증』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계집고증』은『退溪文集』에 나오는 난해한 문구를 추출해서 주석을 첨가
한 것이다.204)총 8권 4책 목판본으로 각각의 難句에 대하여 그 소재는 음각으
로,주석은 작은 글자로 기록한 것이다.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이 책이 만들어
진 시기이다.류도원은 1721년에 태어나 71세의 일기로 1791년 세상을 떠났는
데,이 책은 68세의 晩年에 成篇한 것이다.퇴계는 1571년에 서거하였으니 그
차이가 산술적으로도 220여 년이 차이가 난다.그럼에도 불구하고『퇴계문집』
에 등장하는 인명․지명․역사․고사 등의 내용을 고증하여 기록하였다는 것은
그의 박식과 노력 및 퇴계에 대한 追崇程度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스스로도 말하기를 “가만히 생각건대,老先生의 유집은 실로 우리나라에서
는 광범한 내용을 가진 서적이니 학자들은 마땅히 朝夕으로 讀誦하여 衣食처럼
필요로 할 것이다.그러나 그 중 고사명언이나 동방문헌에서 나오는 문구들은
초학자들로서는 능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어 책을 펴면 전혀 모르고 의문되
는 것이 가득하기 때문에 이에 감히 전기에서 고증하고 붕우에게 문의하여 상
203) “健休方輯是書 謁東巖先生 曰凡爲學之法 先就經文 親切體認 融釋脫落 則 胸中自有權衡尺度 見得諸說
之輕重長短 若是則學愈博而理愈明 今不以經文僞本 而先看諸家雜書 吾恐其無實效而中實毒也 健休退而書
其語 以自警且以戒後之覽是書者”(柳健休,「東儒四書解集評識」,『東儒四書解集評』.)
204) 『퇴계선생문집고증』은 1992년 국역되어 출간되었다. 여기에서 이장우 교수는 본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이『퇴계선생문집고증』이라는 책은 한국의 한문 훈고․주석학사에서 매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한문으로 된 책을 훈고․주석하는 경우에도 모두
중국의 『사서』․『삼경』같은 경서나 불경, 또는 주자서 같은 책에나 관심을 기울였지, 한국 사람의 손
으로 저술된 한문책에 대해서는 훈고․주석을 가한 책이 거의 없는 것 같고, 설령 그러한 책이 더러 있었
다고 하더라도, 이『퇴계선생문집고증』과 같이 목판본으로 정리되어 인쇄되어 나온 것은 아마 필자의
과문인 탓일지 몰라도, 별로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장우, <해제>,「국역퇴계선생문집고증」,『퇴계
학연구』, 제19집, 사단법인 국제퇴계학회 경상북도지부, 경상북도, 199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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략함을 불구하고 아는 대로 기록하였다.”205)고 하였다.그는 퇴계를 깊이 私淑
하는 모습을 보이며 考證과 質議를 통하여 확인한 바를 모두 기록하였다.이는
또 그가 퇴계의 학문을 동방의 精髓로 인식하면서 초학자들이 퇴계의 학문을
이해하여 계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사명감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밖에도 수곡파 저술의 성격상 ‘攷[考]’로 제명된 것은 거의가 주석서라
해도 무방할 것으로 판단된다.
(3)易學분야 저술
수곡파는 역학에 있어서도 상당한 학문적 성취가 있었다.아래 인물들의
저술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류관현은 1759년 弼善으로 思悼世子에게 경전을 강의하였다.당시 세자가
역학공부에 어려움을 갖자『易圖撮要』를 作圖하여 그 요령을 터득하게 하였
다.206)『역도촬요』는 첫 머리에 日月을 합한 ‘日月爲易’圖를 시작으로 총 10도
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의 설명을 덧붙였다.207)
류정원은 어릴 때부터 천문․지리․음양․數理에서부터 병법․음률․道家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부하였으나 20세 전후로는 사서삼경에만 전념하면서 “儒家
의 사업은 모두 이에 있다.”고 하고,208)역학에 조예가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후
학들에게는 “이것을 배우는 것은 학자의 先務가 아니니 모름지기 논어,맹자
등 평이한 글을 숙독하여 체득한 후에 배워도 늦지 않으리라.”라고 강조하며209)
경전공부의 순서를 제시해 주기도 하였다.그의 경학에 대한 조예는 역학분야
에서 제가의 易說을 수집해서 참고하고 자신의 설도 덧붙여『易解參攷』를 편
성하였고,『韓氏意見諸圖』를 편성한 후 주자설에 근거하여 50圖를 만들어 다
시『河洛指要』210)를 지었다.『역해참고』는 총 17권 10책의 량으로 晦齋[李彦
205) “道源竊伏以老先生遺集 實吾東方地負海涵之書 學者當朝夕誦讀 以爲飮食裘葛 而其中故事名言 東方文
獻 有非初學之所能曉解者 每一開卷 疑晦滿目 乃敢考之傳記 訪於朋友 不拘詳略 隨得隨錄” (柳道源,
<識>,『退溪先生文集攷證』.)
206) “世子邸下 留心經學 日親宮僚 以爲易學諸圖 頭項甚夥 難於考究 遂命臣觀鉉 撮其緊要排圖以進 臣誠
愚踐迷昧 有不敢當 然依樣摸進 亦或有補於睿學之萬一 謹就易學圖啓蒙易目等書 撮得十一圖寫進 伏願邸下
省覽焉” (柳觀鉉, <通論>,「易圖撮要」,『陽坡集』卷3.)
207) 10도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1.河圖 2.洛書 3.伏羲八卦次序圖 4.伏羲八卦上各生八卦圖 5.伏羲八卦方位
圖 6.六十四卦配 節侯圖 7.文王八卦次序圖 8.文王八卦方位圖 9.伏羲八卦文王八卦方位合圖 10.文王十二月
卦氣圖
208) “二十後 熟讀四子 乃曰 儒家事業盡在是矣”(李象靖, <行狀>,『三山文集』.)
209) “輒曰 此非學者之先務 須取語孟等平易文字 熟讀玩味 有得而後 及易未晩也”(위 같은 책.)
210) 『河洛指要』는 8권 4책이며, 주자, 서산, 면재, 소자 등의 제설을 바탕으로 제1「河圖」~제50 「卦
爻變不變之圖」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가장 중요한 학설을 그림으로 그리고 나서 그 아래에 해설을 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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迪]와 퇴계 두 先儒의 역설을 포함해 총 177명의 易學관련 제설을 총 집대성
한 것이다.이 책은 류장원이 범례를 만들어 편차를 완성하고 류휘문과 류형진
이 교정을 맡았다.
류정원은 본서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생각건대,易에는 천지자연의 역이 있고 伏羲의 역이 있으며 문무․주공․공자의 易,
또 정주자의 역도 있으니 복희 이후로는 다만 卦象만 있어 역을 지은 본원을 살피는데
가장 마땅하였으나 문왕이하에서 문자를 붙인 것이다.그러나 독자는 또한 각기 본문의
消息을 연구해야만 할 것이니 공자의 역을 문왕의 역으로 삼거나 주자의 설로 정자의
설을 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그 외에 제유의 역설은 각각 그 본 것에 깊고 얕음이 있
고 입언에 同異가 있으니 비록 본문의 정의에 출입해도 또한 스스로 일가의 易을 이룬
것이다.따라서 인자는 인이라 하고 지자는 지라고 하니 해롭지 않다.모름지기 서로 참
고해서 연구한 연후에야 거의 그 귀취를 얻어서 無窮한 易道를 보는데 족할 것이다.211)
위 인용문에서 보듯이,류정원은 역학 공부의 방법론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는 14살에 처음으로 주역을 접하였으나 자신의 독서철학에 따라 30년 뒤인
44살 때 역해참고와 하락지요를 같은 시기에 완성하였다.그는 세상에서 주역
을 공부하는 이들이 주역의 글에만 몰입하면 지리멸렬해 산만함에 빠지고,세
부적인 卦만 주목하면 陰陽術數의 말단에 빠지기 쉽다는 문제의식을 가졌다.
그래서 漢․晉․元․明으로부터 朝鮮에 이르기까지 선배 학자들의 학설을 상호
참작하고 자신의 견해도 더해 이 책들을 저술하였다.
류휘문은 수곡파에서 자신의 문집 총 29권 15책(원집,별집,속집 포함)과
많은 저술을 남긴 인물 중 한 사람이다.그는 문집의 량과 저술의 종류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양한 분야에 박식하였다.자신의 저술에 대한 배경과 경위에
대해 解題성격의「管窺僭言」212)을 지어 각각의 설명을 하기도 하였다.그 중
역학에 관련된 대표적인 것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周易經傳通編』을 지으
면서 “『易經』은 漢儒들에 의해 흐트러진 이후 朱子와 鄭玄이 원래대로 복구
하였고 또 明儒들이 朱子와 王弼이 고심하던 부분들을 보완하였다.啓蒙·蓍卦·
考誤·筮儀·五贊등을 첨부해 만들었다”213)고 하고,『啓蒙考疑』는『啓蒙』이 易
붙인 것이다. 즉,「河圖」·「洛書」·「河洛經緯」·「天地之數」등을 비롯하여「以六十爲節之圖」·「五音
六律司日辰之圖」·「陰陽穉盛不同之圖」·「水火互根金木定質之圖」·「方圓經緯之道」·「河洛三同二異之
圖」 등 희귀한 그림과「先天卦氣疏密之圖」·「離當寅坎當申之圖」·「虛一無爲之圖」·「一奇象圓二偶象
方之圖」 등이 있어 새로운 학설을 전개하기 위한 좋은 자료이다. (해제, 국학진흥원, www.ugyo.net)
211) 柳正源,『易解參考』卷1.
212)『好古窩集』卷13,「雜著」.
213) “易經爲漢儒所亂者 至朱子東萊 始復其舊 明儒又一從王弼篇第二先生苦心釐正之意(중략) 次附啓蒙蓍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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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의 근본이 되는 책으로 元․明易學의 宗匠이라 할 수 있는 玉齋胡氏가 종
합하였으나 그 역시 정밀하지 못하여 本旨를 잃거나 의심나는 곳이 없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을 箚錄함으로써 잃어버리거나 잊혀지는 것에 대비하고자 지었다
고 하고,『啓蒙』을 상세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圖畵卦說』을 지었다고 하였
다. 또『一元消長圖說』『變占圖說』『傳疑餘論』과 朱子의 『蓍卦攷誤』의
句語를 訓釋하고 오류를 바로잡고자 지은『蓍卦攷誤解』등의 설명이 있다.
류형진은 류정원의『역해참고』를 교정하면서 인용서목을 모두 열람하기도
하고 류휘문의『계몽고의』등을 베껴 쓰면서 오류를 바로 잡기도 하였다.그는
재종형 류기진이 ‘역에 전문가다’라고 하였을 만큼 상당한 재능을 보였고,『讀
易管窺』를 저술하여 그 견해를 밝히기도 하였다.
전술한 인물 중,류정원․류휘문․류형진은 모두 수곡파에서는 萬嶺公派[柳
益輝]의 후손들로서 다시 三山派[柳正源]의 직계들이다.이들을 세칭 ‘三山派易
學’이라고도 하는데,214)수곡파 중에서도 삼산파가 유독 역학분야에 많은 저술
을 남긴 점은 또 다른 양상이라 하겠다.
(4)史學분야 저술
사학 분야에 대표적인 저술로는,『國朝故事』․『동헌통고』․『大東詩
史』․『大東史』․「金史記誤」등이 있다.차례대로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국조고사』는 조선왕조 22왕 408년간(太祖元年〜正祖末年)의 역사 사건
을 왕조본위의 편년체 서술방식으로 기록한 총 40권의 歷史書이다.이것은 류
건휴가 편저하고 류정호가 淨書한 필사본이다.『東獻通攷』는 柳致翊이 퇴계
문하의 언행과 제현들의 사적을 뽑아 20권으로 편찬한 인물사 저술이다.『대동
시사』․『대동사』․「김사기오」는 모두 류인식의 저술이다.
『대동시사』는 일국의 정치를 기록하는 史와 문학의 詩는 원래 체재가 다
른 것이지만 詩歌는 사물에 접촉하여 그 안에 감정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백성 및 인물에 대한 모든 것이 시에 반영된다고 생각하였다.따라서 시
를 보면,그 나라의 역사를 알 수 있다는 취지에서,조선조 개국 이래 조정과
재야의 시가 수백 편을 채집하여 본서를 편찬하였다.
『대동사』는 류인식의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자신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
고,다른 사서와는 그 체재와 성격을 달리하고 방대함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考誤筮儀五贊等 篇命曰 周易經傳通編” (『好古窩集』卷13,)
214) 권오영,「2장 무실의 가학과 학문경향」,『안동무실마을-문헌의 향기로 남다』, p99, 안동대학교 안
동문화연구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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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이라는 점에서 보면 연구와 편찬저술의 기간이 불과 10년이라는 점을 미루
어 본다면 전무후무한 거작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215)이 책은 檀君元年戊
辰年부터 庚戌年國恥까지 4,243년간의 우리나라 역사를 編年體로 서술한 21권
11책의 通史이다.각각의 왕조별로 四佳徐居正의 東國通鑑,金澤榮의 東史輯
略,茶山丁若鏞의 疆域考,柳健休의 國朝故事등은 물론이고 稗史․野談등의
관련 자료를 참고하였다.류인식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함에 있어 인용한 제설
에 대해 ‘某氏曰’이라 하고 자신의 견해에는 ‘按’이라고 분명히 표기하여 구분하
였다.216)이 책의 여러 특징 중 두 가지만을 언급하고자 한다.먼저,조선조에
있어서 조선왕조 창업 이후 나라를 잃게 되는 역사적 과정을 시대적으로 구분
한 점이다.이는 다른 史家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시각이라 할 수 있을 것이
다.217)다음으로는,각 왕과 왕조의 말년에는 반드시 論贊을 붙이고 그 논찬에
대해서 역사사실 기록과 마찬가지로 인용된 것은 ‘贊曰’로 자신의 창작에는 ‘野
史氏曰’로 구별하였다.
「김사기오」는 金澤榮의『韓史綮』에 대한 류인식의 서평 겸 비판서로
1923년에 저술되었다.즉 김택영이 조선족과 이래한 중국인의 관계를 미국인과
영국인에 비유한 점,少昊金天氏의 후예가 김씨라고 한 견해를 인정한 점,고구
려와 백제를 북부여의 客族이라고 한 것,箕子가 周나라를 피해 와서 군왕으로
볼 수 없다고 한 점,고구려를 高辛氏후예라고 한 점 등과 같이 이와 유사한
崇華事大主意의식으로 서술한 부분에 대해 ‘단 하루도 이와 같은 역사서는 檀
君疆域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혹평하면서 자주적이고 민족적인 역사의식을
보여주었다.
이 밖에도 류도원의『동헌집록』등이 있으나 산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4.仕宦과 牧民官의 모습
215) 金龜鉉,「동산 류인식의 애국계몽운동과 대동사」,『안동문화』 2집, 안동문화원, 1994.
『대동사』의 체재와 구성 등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2006년 표점영인총서『대동사』(한국국학진흥
원)의 해제를 참조.
216) 송찬식, <해제>, 『東山全集』, 동산선생기념사업회, 1978.
217) 金龜鉉은 또「동산 류인식의 애국계몽운동과 대동사」(『안동문화』 2집, 안동문화원, 1994.)에서 創
業文明時代(태조〜성종), 萎靡不振時代(중종〜선조), 閏委渾濁時代(연산조〜광해조), 黨禍紛爭時代(인조〜
숙종), 勳戚竊命時代(경종〜고종) 등 다섯 시기로 구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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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곡파 중흥조 기봉 류복기는 외숙이자 스승인 鶴峯儀法을 傳受하면서 명
분과 의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훌륭한 선비[善士]’가 되고자 하였다.그리
고 류복기 이후 수곡파 후손들은 동몽교육을 통하여 이러한 선대의 정신을 계
승하고 실천하고자 하였다.본절에서는 수곡파가 입향 이후 십 수대를 거치면
서 가학의 또 다른 전개 무대였던 관직생활에서 보여준 모습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여기서는 수곡파의 仕宦者와 官職을 역임한 인물들 가운데 문과 급제자
를 대상으로 그 면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柳挺輝는 수곡파 최초로 문과에 급제한 인물이다.그는 1651년 27세에 문과
을과에 급제하였지만 숙부 류직이 牛栗文廟從祀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관직을 받지 못하였다.그러다가 1658년 殿重監을 시작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
였다.청하현감․옥천현감․기장현감․고성현령․고부군수 등 외직을 지내다가
1675년 성균관직강을 지낸 후 예조정랑․사헌부장령․사간원정언․성균관사예
등 중앙 관직을 역임하였다.이후 고향의 부모를 모시기 위해 예천군수를 자원
하였고,양친의 상을 당한 후에 벼슬에 뜻이 없었으나 다시 중앙 관직을 제수
받고 통정대부로 승진하여 경흥도호부사가 되었다가 驪州牧使를 끝으로 관직생
활을 마쳤다.그는 백성을 다스림에 한결같이 ‘仁愛’를 주로 하고 목민관으로서
청렴결백했으며 치도를 행하여 업적을 쌓았다.한편,류정휘는 여러 관직을 역
임을 역임하면서도 다수의 저술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그러나 자신의 글에
대해 스스로 평가절하하면서 임종 시에 모두 불태워버렸다고 한다.218)
柳榰는 1646년 생원시에 합격하고,1654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강직한 성품과 ‘公正之治’를 행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그도 종형 류직과 함
께 이이․성혼 문묘종향에 반대하였다가 尙州敎授에 좌천되기도 하였으며,성
균관전적ㆍ형조ㆍ예조좌랑을 거쳐 結城縣監을 역임했다.이후 10년간 향리에
있다가 1671년 예조좌랑에 복직하고 이후 丹城縣監ㆍ蔚珍郡守등 외직을 지냈
다.다시 사헌부지평ㆍ장령을 거쳐 사간원 정언으로 재직하며 시정의 폐단을
진술하고 聖學과 聖志를 정치의 본령으로 삼았고 言諫으로서 척신을 탄핵하는
데 앞장섰다.밀양부사 재직 시에는 백성을 보호하고 부패한 관리를 단속하며
양로연을 베풀기도 하였다.이후 陵州牧使를 거쳐 吉州牧使등을 지냈다.길주
를 떠날 때는 고을 백성들이 백 리 밖까지 나와서 전송하였다고 한다.이어 慶
州府尹으로 재직하다가 당쟁이 심해져서 벼슬에서 물러나 臨東高川에 乖厓精
舍를 짓고 후진을 양성했다.
218) “吾平生無可稱道 死後不可以虛辭溢美求文於當世之聞” (李簠, <行狀>,『空空齋實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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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敬時는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의복도 제대로 못 입고 나뭇잎으로 발을 싸
서 추위를 막으며 솔방울을 태워가며 독서를 하였다고 한다.그는 1689년 향시
를 거쳐 1694년 別試丙科에 급제하였다.그는 청백리에 오를 정도로 관직생활
의 청렴결백함을 보였다.또 황해도사로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자기의 아들이
都會試에 급제할 수 있도록 부탁을 하면서 수꿩을 뇌물로 주자,그에게 벌을
내리고 그의 아들에게는 도회시를 보지 못하도록 하였다.검재관으로 임명되어
여러 고을의 피해를 조사하여 실정을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허세를 감면하게 하
였다.龍岡縣令으로 재부임해서는 고을에 학문을 진작시킨 공로와 백성들의 세
곡을 감면해주었던 일에 칭송을 받았다.또 당시 용강에는 많은 支勑銀錢의 문
제가 있었는데 류경시는 자신의 봉급 8,000緡錢을 내어 그 결손액을 모두 갚게
하였고 후임 현령들에게 모범이 되었다.풍기군수로 부임해서는 법을 굽히지
않으면서 민폐를 제거하고,양양부사로 부임해서는 화적들을 진정시켰고,1728
년 이인좌 등의 역변이 일어나자 관군들에게『兵學指南』․『兵機練要』등 병
서를 활용하여 진법을 가르쳐 정비하는 등 문무를 겸비한 모습도 보여주었다.
또 戚誼가 있는 敬差官金聖鎔이 큰 소나무를 棺材로 주자 “양양군수가 되면
모두 양양목으로 死後에 棺을 하는가”하며 거절하였다한다.219)그는 또 사헌부
장령시절 흉년이 들자 백성들을 진휼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220) 류치명
은 류경시가 龍岡․韓山․基木․襄陽․順天을 다스릴 때에 가지고 다니던 상자
에 대하여「五郡篋銘」라는 銘을 지어 류경시의 治民에 義․廉․仁․厚․儉의
덕이 깃들어 있다고 칭송하였다.221)
柳升鉉은 1719년 40세의 나이로 증광시 병과에 급제하여 太學館典籍․禮曹
佐郞․正郞등을 거쳐 공조참의를 역임하였다.그는 외직으로 鍾城府使를 역임
219) “仁同金公聖鎔 爲黃脹 敬差 於府君有戚誼 言于府君曰 吾爲老親壽器 方以封餘板海運 公以餘板付之 則
可謂順便也 府君笑曰 作吏襄陽 必入襄陽之木耶” (柳弘源, <遺事>, 『涵碧堂文集』 卷4.)
220) 장령 류경시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해 흉년은 을해년과 병자년 보다 심하여, 곤궁한
백성이 1백 畝의 수확을 모두 모아도 오히려 積穀을 바치기에 부족합니다. 따라서 길거리에서 갓난아이
를 버리는 경우가 많고, 대낮에도 남의 재물을 위협하여 공공연하게 빼앗고 있습니다. 方伯과 守令이 賑
救하는 계책을 강구하고 있으나, 백성은 많고 곡식은 적으니, 청컨대, 常平廳과 賑恤廳의 元會耗穀과 各
營의 別會耗穀을 일제히 합쳐 여러 고을에다 갈라서 지급하여 진휼하는 자본으로 보충하게 하소서.”하
고, 또 大同米를 作布하여 받아들이던 것을 절반은 우선 물려서 추수를 기다리도록 청하였다. 또 절검
(節儉)을 숭상함으로써 財用을 넉넉하게 하는 근본을 삼고, 하늘의 노여움을 공경함으로써 재앙을 그치
게 하고 화기를 이루는 방법을 삼기를 청하니, 批答하기를, 상소한 것은 廟堂으로 하여금 稟處하게 하였
으며, 권면하고 경계한 말은 의당 유념하겠다.”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8년 임자(1732, 옹정 10) 3
월 17일(갑술) 상평청·진휼청·각영의 모곡을 합쳐 진휼에 보태자는 장령 류경시의 상소.) *번역문:한국
고전번역원 전재.
221) 柳致明,「五郡篋銘幷序」,『定齋先生文集』, 卷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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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귀향할 때는 헤진 의복 한 벌을 입고 있었으며,딸의 결혼에 北道의 물품
은 하나도 없었다한다.함안군수로 재임 시에는 군민들이 전례에 따라 집으로
돈 400꾸러미를 보내오자 모두 돌려보내고 寒士처럼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 안
빈낙도하는 모습을 견지하였다.222)그는 풍기군수로 재직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당시 풍기군민들이 부의를 전하자 아들인 노애 류도원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
어 되돌려 보냈다.
柳觀鉉은 1735년 44세의 나이로 증광시 병과에 급제하였다.그는 1753년 종
성판관으로 재직할 당시 그는 백성의 교화에 힘써 풍속을 변화시켰고,자신을
제약하면서 백성을 애호하여 그 치적이 현저하였다.임기가 다할 무렵 마을에
흉년이 들어 1년을 더 유임하게 되자 지극한 정성으로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퇴임할 때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눈물로 전송하고 몇몇은
자원해서 가마를 멨다고 한다.그의 치적은『牧民心書』에 기록되어 모범이 되
고 있다.223)
柳正源은 1729년 생원시를 거쳐 1735년 34세의 나이로 증광시 을과에 류관
현과 동반 급제했다.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상을 당해 오랫동안 관직에 나아가
지 않다가 1749년에 성균관전적을 시작으로 벼슬생활을 시작하였다.경상도 慈
仁縣監이 되어 농상을 장려하고 풍속을 교화하였다.당시 자인에 牛疫이 돌자
官錢으로 백성들의 소를 사주기도하고 경상감영에 진정을 넣어 세금부담을 줄
이기 위해 노력했다.이듬해 홍문록에 올랐으나 臺諫職을 거치지 않았다는 이
유로 持平徐海朝의 비판을 받아 이름이 삭제되기도 하였다.224)1752년 鄭羽良
222) “居官淸愼 常俸之外 無一物私 子弟之從在官者 不得使一錢 或請造刀鞋微細物 亦不許曰 吾受國恩以有
官祿 若等因父兄以糊口足矣 初自鍾城還 先送一木榼 家人意其有異物 發之 只鄕書數束 凡所著巾帽筆硏之
屬 所覆單衾 弊而不易 一女新嫁 粧奩之用 出於北土者 無一物齎 其自咸安就理 郡人依例齎錢四百緡 追贐
于家” (李光庭, <通政大夫工曹參議柳公行狀>, 『訥隱先生文集』卷17.)
223) ①『牧民心書』卷1, 律己六條 飭躬律己第一條 : 斷酒絶色屛去聲樂齊遬端嚴如承大祭罔敢游豫以荒以逸,
“柳觀鉉性儉約其在官對方丈曰不如鄕園鰌魚煮耳聽妓歌曰不如聽隴晦農謳耳” ②『牧民心書』卷2, 律己六條
第二樂施條 : 節其官俸以還土民散其家穡以贍親戚則無怨矣, “柳觀鉉爲鏡城判官乙亥之饑至誠賙救一境賴而
全活一日監賑者請曰南路饑荒與關北無異城至旣以俸祿活民命又當仁及親族已自賑廳有若干別儲請急足送致公
曰祿俸亦出於民豈可視爲私財先恤家族遂不許”③『牧民心書』卷14, 解官六條, 遞代解官第一條 : 父老相送
飮餞于郊 如嬰失母 情見于辭 亦人世之至榮也, “柳觀鉉爲鏡城判官乙亥之飢至誠賙救丙子春解紱而歸一府士
民擁路餞別飢民受賑者各聚升龠設餞路左至不可行行到鬼門關飢民丁壯數十人隨後曰無以報明府恩願備籃輿卒
公曰自有擔夫不須勞爾輩也飢民擠擔夫爭先擔舁出平途上馬然後揮涕拜辭而去李時顯爲開寧縣監時國內大饑道殣相枕公措置有方流丐家歸傍邑效之移赴星州開之髫白彌山滿野攀援涕泣曰微公則吾皆爲餓鬼矣”
224) 지평 徐海朝가 상서하기를, “柳正源은 臺職을 거치지 않고 갑자기 都堂錄(홍문관의 교리·수찬을 임명
하기 위한 2차 선거기록)을 더럽혔으므로 物情이 모두 해괴하게 여기니, 改正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
다.”(“持平徐海朝上書言 柳正源未經臺職 遽玷堂錄 物情俱駭 不可不改正”. 조선왕조실록, 英祖 73卷, 27
年 1번째 기사.) *번역문 인용 : 한국고전번역원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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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천거로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했으며,그 후 수찬에 여러 번 임명되었으
나 나아가지 않았다.1753년 다시 弘文錄에 올랐다.1754년 필선이 되어 세자를
시강하였는데,이때 세자가 허물을 고칠 것을 청하는 글을 올려 세자의 답을
받아내기도 하였다.225)같은 해 수찬·사간을 거쳐 교리에 임명되었다가 통천군
수가 되었다.그의 목민관으로서의 모습은 통천군수 시절 언행에서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그는 통천이 해변 僻地로 문헌이 전혀 없음을 염려하여 훈장을
두어 수업을 시키고,흉년이 들자 양식 1,800석을 구하여 일일이 백성들을 찾아
다니며 賑恤하였다.이후 1756년 應敎였던 元仁孫과 우승지 樊巖蔡濟恭의 추
천으로 부교리가 되어 상경하게 되자 군민들이 말을 가로막고 울기도 하고 혹
은 길 위에 누워 가지 못하게 제지하였으며 후에 비를 세워 칭송하기도 하였다
한다.그는 “수령은 목민하는 관리로서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해도 오히려 부족
할까 걱정인데 하물며 威力으로만 임한다면 저들은 누구를 믿고 살 것인가
?”226)라고 하며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어버이 같이 인애하는 자세를 보여주었
다.이후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고,1758년 춘천현감에 부임하였고,
1760년 형조참의·동부승지·우부승지·판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였
다.그 뒤 대사간·호조참의에 임명되었다.그는 임종에도 “나는 國恩을 받고도
報國을 하지 못하였다.”227)라고 하면서 신하의 책무를 다하고자 하였다.그도
225) 대사간 류정원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요즈음에 거행한 進見과 筵對 등의 절차는 바야흐로
그것을 행하지 못했을 때를 말한다면 참으로 그보다 더 큰 것이 없는 欠闕이 되었지만, 그것을 이미 거
행한 데에 이르러 말한다면 역시 이것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늘 해야 할 일이니, 어떻게 이것을 믿고서
‘이미 이 일을 잘하였으니 다른 것은 고쳐야 할 과실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하께서 지난겨
울부터 신료들의 勉戒에 대하여 으레 깊이 유념하겠다는 것으로 말씀하셨지만 공정하게 그 뒤를 논하여
보면 일찍이 한 가지 일이라도 펴거나 시행하여 행동에 이른 것은 없었으니, 이는 ‘깊이 유념하겠다.[體
念]’는 두 글자가 단지 酬應하고 대답하는 좋은 제목일 따름임을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諭示한 바 가
상하게 여기고 마음과 뼈에 새겨 두겠다는 등의 말 또한 지난날에 하던 것과 같지 않아 기필하지 못하
겠으며, 마침내는 즐겁게 하되 계속하지 못하는 데로 돌아가도록 할 뿐이니, 저하께서는 한갓 허물을 고
친다는 이름만 있고 허물을 고치는 실상은 다하지 않으며, 한갓 이미 지난날의 일을 부끄럽게 여길 줄
만 알고 바야흐로 닥쳐오는 일이 근심스러움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계속해서 아첨하
면서 뜻을 받들고 윗사람을 인도하면서 버릇없이 구는 자는 물리쳐서 멀리 배척해 버리고, 진기한 노리
개나 기이한 의복으로 심지를 미혹되게 하고 어지럽히는 자는 엄중히 금지하고 통렬하게 끊어 버리도록
하소서.”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말이 매우 절실하고 지극하니, 깊이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
였다.(大司諫 柳正源 上書略曰 “近日擧行進見筵對等節, 方其未行而言之, 誠爲莫大之欠闕, 及其旣行而言之
亦是日用間常事 何可恃此 而謂旣能是他無可改之過哉 邸下自前冬 臣僚之勉戒 例以體念爲言 而夷考於後
未嘗有一事敷施而底行者 是知體念二字 只是酬答之好題目而已 今玆所諭嘉尙 銘諸心骨等語 又未必不如前
日之爲 則終歸於悅而不繹而已 邸下徒有改過之名 未盡改過之實 徒知旣往之可愧, 不念方來之可憂 繼自今
阿諛承順 導上褺狎者 屛逐而斥遠之 玩好奇袤 惑亂心志者 嚴禁而痛絶之焉 ”王世子答曰 “言甚切至 可不體
念” (조선왕조실록, 영조 97권, 37년(1761,신사/청 건륭26년) 6월 23일(경인) 5번째 기사.) * 번역문
전재 : 한국고전번역원.
226) “公曰 守令字民之官 愛之如子 猶懼其不蔇 況奮其威怒以臨之 彼亦何所恃耶” (李象靖, <行狀>,『三山文
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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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적 또한『목민심서』여러 조목의 모범사례로 꼽히고 있다.228)
그 밖에도,柳之源은 1786년 문과 급제에 급제하였으나 뜻을 펴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또 류치명은 29세에 증광시 병과에,孔庵柳致好는 45세에
식년시 을과에 급제하여 형조참의를 지냈고,柳章鎬는 39세에 식년시 병과에
급제하여 正字․郡守를 역임하였다.한편,柳致百․柳星鎬․柳琓등은 무과에
급제하여 각각 五衛將․營將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수곡파 인물 중 문과 급제자를 중심으로 관직에 등용되어 자신들
의 학문적 역량을 펼친 모습을 살펴보았다.
대체적으로 수곡파의 仕宦者들은 문과 급제자였던 만큼 학문적 역량을 갖춘
인물들로서 중앙관직에 재직할 시에는 성균관․태학관․사헌부․사간원․시강
원․예조․형조 등에서 자신들의 역량을 발휘하였는데,각각 그 학문적 성향과
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또 지방직에 부임하여서는 목민관으로서 공
사의 구분을 분명히 하면서 민생을 살피는 데 역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이
러한 일련의 모습은 제 Ⅲ장에서 살펴 본 수곡파 가학전승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童蒙敎育과 그 핵심인 家系內的師承關係등 여러 방법을 통해 수대를 걸
쳐서 시청각적으로 훈련되었을 것이며,지역사회 뿐 만 아니라 중앙사회에서도
先代의 유훈인 ‘善士’가 되고자 노력하였던 또 하나의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본장을 마치면서 450여년 수곡파 가학의 흐름을 시기별로 정리해 보고자 한
다.연속성을 내포하고 있는 사회적 현상과 사물 등의 대상에 대해서 ‘期’라는
용어의 틀에 맞춰 구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특
히,가문과 가학이라는 것은 有機的인 것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며,수곡
파와 관련해서도 예외는 아니다.따라서 의도적으로 그 시기를 구분한다는 것
은 어리석은 일일 뿐만 아니라 임의적으로 구분한다는 자체가 오히려 연속성을
단절시키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그러나 수곡파 가학의 전개과정을 나누어
227) “吾受國厚恩 未有絲毫之報” (위 같은 책.)
228) 그 해당 조목만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卷二 律己六條 第二 節用律己第五條
卷三 奉公六條 宣化,守法禮際文報貢納往役, 貢納奉公條五,
卷四 戶典六條 田政稅法穀簿戶籍平賦勸農 田政考績議敎民爲戶典之第一條,
卷五 戶典六條 田政稅法穀簿戶籍平賦勸農
卷七 戶典六條 勸農戶典第六條 / 禮典六條祭祀賓客敎民興學辨等課藝, 敎民禮典第三條。
卷九 刑典六條 聽訟斷嶽愼刑恤囚禁暴險害, 聽訟下
卷十 刑典六條 禁暴刑典第五條
卷十三 賑荒六條 設施賑荒第四條
卷十四 解官六條 遞代歸裝願留乞宥隱卒遺愛, 遺愛解官第六條 / 願留解官第三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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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자하는 이유는 단절의 의미보다 전승과정 상의 큰 흐름을 살피고자 하였기
때문이다.따라서 본고는 수곡파 가문과 가학을 주제로 한 만큼 家門的연속성
과 家系的연결성을 고려하여 세대별로 가학의 盛衰程度즉,문인학자의 수와
문집 등 저술 및 科宦與否를 전제 기준으로 삼아 大分하여 간략하게 정리하는
수준에서 서술하기로 한다.수곡파의 가학의 전개 과정은 대략 다음과 같이 나
눌 수 있다.
먼저,16세기 중반 학봉의 학문을 전수받으면서 토대를 마련한 18세기 중반
까지를 形成및 傳受期,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말까지를 全盛期,19세기 말부
터 20세기 초까지를 維持期라고 할 수 있다.이후는 별도로 정의하지 않았다.
‘形成및 傳受期’는 16세기 중반〜18세기 중반까지로 볼 수 있는데,류복
기․류우잠 부자를 위시하여 6세대까지 약 10여명이 가학의 바탕을 형성하여
후대로 전수하였다.‘全盛期’는 18세기 중반〜19세기 말까지 7세대에서 11세대
의 인물들이 활동하던 시기이다.대표적으로 류승현․류관현 형제와 류정원․
류장원 등을 비롯하여 류범휴․류건휴 등을 거쳐 이후 류치명과 그의 친족문인
을 포함하여 약 50여명이 활동하였다.이 시기는 수곡파 가학이 최고조로 흥성
하였던 시기였으나,19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수곡파가 입향한 이래로 약 300
여년이 지나는 무렵이고,당시 조선은 국내외적으로 정치적으로 혼란기를 맞이
하면서 외세가 몰려오는 상황 아래 그 혼란이 가중되는 상황을 맞았다.이러한
상황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던 19세기 말〜20세기 초까지 영향을 미쳤다.많
은 유학자들이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하였고 수곡파도 예외는 아니었다.그럼에
도 불구하고 수곡파는 12세대 류정호․류지호․류형진․류긍호 등과 13세대 류
태영․류연구․류연즙․류연박․류필영․류연근 등과 이후 세대 류동식․류동
환․류창식․류인식․류기식․류동수․류동익 등 30여명이 가학의 맥을 유지하
면서 항일운동에 적극 동참하기도 하였다.이 시기를 ‘維持期’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중반,우리나라는 국가 존망의 위기에서 벗어났으나 연이은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해 또다시 위기를 맞이하였다.수곡파에 있어서도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이었다.현재 그들의 전통적인 가학은 소수자에 의해 내부적으로
명맥을 유지하면서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학문적 부흥을 기대하고 있다고 해
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왜냐하면 모든 사물과 현상은 盛衰를 반복하기 때문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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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結論
본고는 최근 漢文學硏究主題의 外延擴張이라는 一動向속에서 ‘지역’의 한
문학 유산을 발굴 분석하고 그 특징을 찾아내는데 있어서 한문학계의 역할이
요구된다고 판단하여 논의된 것이다.따라서 문집과 저술로 대표되는 한문학적
자료를 보유한 집단,즉 ‘家門’을 선정하고 그 ‘家學’에 대해 전반적으로 고찰해
봄으로써 새로운 한문학적 분야에 접근해 보고자 하였다.이런 맥락에서 경북
안동의 ‘全州柳氏水谷派와 家學’을 주제로 하여 가문의 形成過程및 背景,그
리고 家學의 淵源․傳承過程․展開樣相등으로 大別하여 살펴보는데 목적을
두었다.本論의 주요 論旨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제 Ⅱ장에서는 水谷派가 안동에 卜居하는 과정과 복거 초기 혼인관계를 살
펴서 세거기반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알아보았고,人物및 空間을 중심으
로 수곡파 가학의 연원을 탐색하였다.
(1)全州柳氏는 본래 全羅北道全州府의 土姓으로 始祖인 柳濕의 5子1婿가
모두 登科出仕하며 흥기하기 시작하여 고려 말 新興士大夫로 성장한 在京士族
이었다.數代를 지나 16세기 중반에 류윤선이 落南한 후 장자 류성이 義城金氏
金璡의 사위가 되면서 실질적으로 全羅北道全州를 관향으로 하는 慶尙北道
‘安東府人’이 되었다.입향 당시,수곡파가 안동의 대표적인 명문거족이며 500여
년 동안 문호를 번창시켜 오면서 鶴峯金誠一로 대표되는 退溪學脈의 일맥을
형성한 의성김씨 천전파와 맺은 첫 혼인관계는 복거기반을 마련하고 가학형성
의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특히,류성의 두 아들 柳復起형제가 의성김씨 가문
에서 訓育되었다는 것은 당시 최고 수준의 문화적 동력에 의하여 견인되고 육
성되었다는 점을 의미한다.류복기는 그런 문화를 자기 것으로 흡수하여 수곡
파의 가문을 定居시키고 가학을 형성할 수 있었다.즉 가문이 성장할 수 있는
심리적 토대를 갖춘 것이다.이런 토대아래,복거 초기 안동의 여러 명문가문과
의 혼인관계는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그 중에서도
중요한 점은 대외적으로 가문의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在地士族으로서 지위를
형성할 수 있었다.또 당시의 명문가․문벌가와의 자연적인 학문적 교유관계를
구축하면서 가학을 발전시켜 나갈 수도 있었으며,점차 지역적 위상도 제고할
수 있었다.
(2)수곡파 가학의 연원은 岐峯柳復起․陶軒柳友潛부자이다.또 류복기의
사상과 학문적 연원은 혈연적 관계에 있는 의성김씨,특히 鶴峯의 사상과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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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다.이것은 직접적 연원이었고,내면적으로는 檜軒柳義孫등 名祖를 연원
으로 하고 있다.류복기가 가학의 기반을 마련한 후,류우잠은 이를 계승하여
문중의 결속을 다지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그는 단순히 수곡파 宗孫으로
서의 家系上지위뿐 만 아니라,가문의 학문적 연원을 계승하였고,「門中完
議」를 통하여 종족 을 결속시켰다.이 점은 두 사람의 호를 따서 ‘水谷宗宅[岐
峯舊廬]’에 扁額된 ‘岐陶遺業’이 모든 것을 대변해 준다 하겠다.즉 수곡파를 중
흥시킨 柳復起와 가문의 결속을 다진 柳友潛부자가 ‘수곡파 전체의 뿌리이자
가학의 연원’인 것이다.아울러 ‘岐陽書堂’은 그 건립 목적과 講案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수곡파 가학 형성초기에 중요한 産室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수곡파
미래로 이어지는 가학 전승의 공간적인 연원이 되었다.
제 Ⅲ장에서는 수곡파 가학의 전승 과정상에서 방법적으로 그 기초가 되는
童蒙敎育,그 핵심이 되는 家系內的師承關係그리고 강학과 토론의 공간으로
서의 亭子의 기능을 확인하면서 세대별로 再傳되는 양상을 살펴보았다.
(1)수곡파는 가학의 전승 과정상에서 그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각 세대별
로 다양한 동몽교육을 실시하였다.방법적으로 단계적인 길을 제시해주면서 전
체적인 교육방법을 취하였고,岐陽書堂을 비롯하여 書塾[書齋]등의 강학의 공
간을 적극적으로 마련하거나 구체적인 훈계내용을 담은 箴․銘등을 지어 가시
적인 방법을 활용하였다.또 敎育指針書와 學令[學則]등을 규정하여 실천적 방
법론을 제시하였고,『小學』등을 중심으로 별도의 학습교재를 편찬하거나 ‘家
訓’등을 만들어 후손들의 모범으로 삼았다.내용적으로는 ‘글[文]’을 바탕으로
하는 훌륭한 선비를 배출하고 전대의 유업을 계승하는 것이 世代를 거칠 때마
다 당면과제였기 때문에,모두 ‘爲己之學’으로 통한다.특히 일관되게 경전을 중
심으로 하면서,가까이로는 退溪-鶴峯-大山으로 이어지는 학풍을 고수하였다.
이러한 동몽교육의 결과는 현실 사회에서 時事의 변화에 따라 실천적 모습으로
발현되었고 학문적으로 나름대로 상당한 성취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었다.
(2)수곡파가 자신들의 가학을 450여 년간 누대에 걸쳐 전승할 수 있었던
요인 중에는 가계 내적으로 형성된 사승관계가 가장 결정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사승관계는 매우 복잡하면서도 견고한 구조를 이루고 있었는데,
입향 초기에 기본적인 가정교육을 통하여 각 가계별로 父子간의 직접적인 사
승관계는 물론이고,이후 대를 거치면서 후손이 번창함에 따라 兄弟․叔姪․祖
孫[曾祖曾孫․高祖玄孫]등의 관계 속에서 派別로 끊임없이 상호 보완,전승하
며 재형성해 왔다.특히,師弟관계에서는 7세대의 上代가 10세대의 下代에게
학문을 구하는 不恥下問의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고,주목할 사실은 11세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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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러 ‘定齋柳致明’이라는 인물을 배출함으로서,가학의 사승관계가 가문전체
로 확산되었다는 것이다.이는 류치명의 학문적 역량과 위상을 대변해 준다고
할 수 있다.또 류치명을 스승으로 삼은 수곡파 사승관계는 무려 上下4세대를
아우르고 있으며,다수의 제자들은 支派親族들까지 포함하고 있는데,이는 당
시에 류치명을 중심으로 하는 凡水谷派的사승관계가 구축되었다고 할 수 있
다.
(3)수곡파의 亭子는 개인 수양과 은거의 장소인 곳도 있지만 주로 가학 전
승을 위한 강학장소였고,토론 장소였으며,문집과 저술의 교정 및 편집의 공간
이었다.특히,건립 주체뿐만 아니라 가학을 주도하였던 수곡을 중심으로 그 소
재지가 만령․박곡․대평 등이었음을 감안했을 때 凡水谷派的으로 가학을 授受
하며 전승할 수 있었던 공간이었다.아울러 수곡파 가학은 경전과 성리학이라
는 공통된 학문주제 아래에서도,세 지역을 중심으로 학문 분야별로 각기 다른
저술경향을 보여주고 있다.예를 들면,만령 지역 출신들은 역학분야에,대평과
박곡 지역 출신들은 성리학․경학․예학․주석학 등에 상대적으로 많은 저술을
남긴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제 Ⅳ장에서는 수곡파 가학의 학문적 성향과 그 결과물[한문학 자료]을 고
찰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思想的根幹,退溪學脈및 ‘湖學’과의 관계,『文獻叢
刊』으로 代辨되는 학문적 결과,몇몇 인물들의 仕宦과 牧民官의 모습 등을 통
하여 對內外的展開樣相을 살펴보았다.마지막으로 그 전개과정을 시기별로
구분하여 수곡파 가학의 전체적인 흐름을 정리해 보았다.
(1)수곡파의 사상은 철저하게 程朱學을 근간으로 當代別로 그 학문경향에
대응하며 論辨과 講論을 통해 이론을 재확립하고 학풍의 復古指向을 이끌면서
도 新儒學을 능동적으로 수용하였다.수곡파는 16세기 중반부터 영남 士林派의
학풍을 계승하면서 학봉의 영향아래 嶺南學派라는 큰 범주에 속한다.이러한
학문적 성향은 18세기 말까지 이론적 탐구와 논변을 바탕으로 성리학적 학풍을
견지하였고,19세기에 접어들면서 더욱 활발하게 전개하여 新學問에 대항하면
서 근대까지 지속시켜 나갔다.이 점은 그들의 다양한 성리학 저술을 통하여
수곡파가 누대에 걸쳐 退溪를 사숙하고,18세기 중반 8․9세대부터는 본격적으
로 大山의 사상 및 학문을 만나면서 자체적으로 정립한 후,퇴계학맥의 巨儒인
류치명에게 계승되는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2)수곡파의 여러 학자들은 퇴계학파의 중심에 있었고,사승관계와 혈연관
계를 바탕으로 그 학맥을 계승해오고 있었다.특히,대산의 학문을 傳受하는 과
정에서 수곡파 제자들이 여러 관련저술을 짓는 등 깊이 관련된 점을 볼 때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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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한 수곡파가 대산을 정통으로 계승하면서 조선후기 퇴계학맥의 중심에 있었
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이러한 결론은 수곡파가 대산의 학문을 ‘湖學’으
로 명명하고,그 요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서「湖學十圖」완성하는 핵심역할을
하였던 ‘萬山柳致儼’에게서도 구체적으로 확인 할 수 있었다.요컨대,18세기
중반∼19세기까지 수곡파는 ‘류치명’이라는 인물을 배출시킴으로써 그 영향력을
대내외적으로 최고조에 올려놓았다.또 ‘류치엄’을 통하여 대산의 학문을 ‘호학’
으로 완성하며,자신들만의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3)수곡파 가학의 전개 양상 중 학문적인 부분은 다양한 저술활동이 누적
된『文獻叢刊』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그 개괄적인 현황과 저술경향 등에 대
해 살펴 본 결과,文集類약 80종 200여 책․別著類20여종 70여 책․其他5종
3책 등이었으나,이 통계에 대한 재검증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수곡파가
『文獻叢刊』을 영인발간하기 시작한 것은 1983년부터인데,총 25책 분량이다.
『문헌총간』은 현재까지 총 25집 중 13집이 간행되었다.수곡파의 저술은 性
理學․禮學․易學․註釋學․史學등 다양한 분야에 다양한 저술을 남긴 것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특히,수곡파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었던 분야 중 하나인
禮學관련 저술이 많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이 점은 수곡파의 예학정신과 학
문적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으로,안으로는 가문의 전통과 질서를 유
지하게 하고,밖으로는 사회변화에 따른 시대질서 유지에 일조하였다는 반증이
다.이 밖에『退溪先生文集攷證』등은 註釋學분야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
었으며,易學과 史學분야에서도 각각 주목할 만한 저술이 있었다.수곡파의
『문헌총간』은 그 자체가 기록정신의 산물이자 가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이것이 수곡파가 가학을 형성-전승-전개해 왔던 가장 뚜렷한 증거이
고,그들의 정신은 가문을 계승하고 유지할 수 있었던 源泉이라고 생각하기 때
문이다.
(4)수곡파 인물들 중 문과 급제자였던 仕宦者들은 학문적 역량을 갖춘 인
물들로서 중앙관직에 재직할 시에는 성균관․태학관․사헌부․사간원․시강
원․예조․형조 등에서 자신들의 역량을 발휘하였는데,각각 그 학문적 성향과
도 무관하지 않았다.또 지방직에 부임해서도 목민관으로서 公私를 분명히 하
면서 무엇보다 민생을 살피는 데 盡力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이러한 일련의
모습은 그들의 童蒙敎育과 家系內的師承關係등 여러 방법을 통해 수대를 걸
쳐서 視聽覺的으로 훈련되었을 것이며,지역사회 뿐 만 아니라 중앙사회에서도
先代의 유훈인 ‘善士’가 되고자 노력하였던 또 하나의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수곡파 가학의 전개 양상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그 흐름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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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별로 정리해 보았는데,대략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먼저,16세기 중반
학봉의 학문을 전수받으면서 토대를 마련한 18세기 중반까지는 形成및 傳受期
로 약 10여명이,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말까지는 全盛期로 약 50여명이,19세
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는 維持期로서 약 30여명이 활동하였다.이후는 가문
과 가학의 유기성 및 연속성을 고려하여 별도로 정의하지 않았는데,현재 그들
의 전통 가학은 소수자에 의해 내부적으로 명맥을 유지하면서,아울러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학문적 부흥을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으로 본론에서 논의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였다.마지막으로,향후
연구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잘 알다시피 안동의 각 가문은 同姓의 集姓村을 이루며 저마다의 역
사적 儒學傳統을 固有하고 있다.수곡파도 16세기 중반이후,안동이라는 地域性
과 性理學的學風이라는 공통분모 속에서 살아왔던 일구성원이다.따라서 전주
류씨 수곡파에 대한 본론의 내용들은 다른 가문들도 가질 수 있는 공통점일 수
도 있고,오직 수곡파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인 것도 있을 수 있다.이는 특정
가문을 고찰하면서 여타의 가문들보다 상대적으로 특별히 浮刻시키거나 格上시
키고자 하는 의도가 절대 없고자 하였기 때문이다.그런 맥락에서 가능한 한
餘他가문과의 상대적 비교방법도 채택하지 않았고,비교우열을 논하는 서술도
최대한 배제하였다.이러한 自制로 인해,본론의 논의 결과가 여타 가문 및 가
학과 비교하여 수곡파를 대변할 수 있는 변별성을 갖느냐하는 한계성을 지닌
다.이 한계는 연구방법론 측면에서 관련자료 전반에 대한 深度있는 정밀한 연
구가 진행되지 못한 결과이다.이는 450여년의 역사를 가진 가문과 가학에 대
해 제한된 시간에 연구를 진행하였던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따라서 향후 심층
적인 연구가 필수적으로 수행되어 수곡파 뿐만 아니라,모든 가문과 가학의 개
별특징을 점진적으로 찾아내고 통합적으로 정리하여,우리나라 지역한문학의
성향과 특징을 究明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
둘째,수곡파 가학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당시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의 일반적이고도 보편적인 학풍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는 수곡
파가 大山의 ‘湖學’을 발전시키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부득이한 과정이었다.
그 결과,‘湖學’과 관련하여 柳範休․柳長源등을 비롯한 수곡파 인물의 역할과
영남학맥의 큰 흐름 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다만,退溪學脈의 계보에서 류장원이 자주 거론되지 않은 점은 다시 살
펴볼 필요가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근래 ‘嶺南禮學’과 관련하여 류장원이 주
목받기 시작한 점은 나름대로 상당한 의미가 있다 하겠다.류장원은 대산과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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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동시대에 활동하며,대산의 제자로서 그 사상과 학문을 계승한 후 자신만의
사상․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다.이후의 학문적 수수관계를 감안한다면,류장원
뿐 만 아니라,퇴계학맥상의 주요 인물들을 再考察하여 조선 후기 퇴계학맥의
사승관계를 다시 정립해야 할 과제가 남아있다.
셋째,수곡파 가학의 결과물인『文獻叢刊』에 대해서는 가학의 전개 양상의
범주에 포함시켜 그 規模와 大體는 살펴보았으나,한문학 연구 분야별로 정밀
한 고찰이 미흡했다는 점이다.한문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한문학 자료에 대
한 분석은 절대 선행되어야 할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제한된 시간으로 부득이하
게 소홀히 다룬 아쉬움이 있다.이 부분은 작가와 작품론,문학론 등 향후의 개
별 연구과제로 남겨두면서 관련 연구자들에게 한문학적 자료로서 그 가치를 판
단할 수 있게 하는 계기로 삼았다.
끝으로,본고는 수곡파가 450여 년간 동성의 가문을 이루어 세거하면서 학
문과 저술활동이 끊이지 않고 지속해 올 수 있었던 이유와 故李家源박사가
『文獻叢刊』의「서문」에서 ‘水谷氏의 그 淸浻한 眉目과 蒼古한 모발이 依依
히 보이는 듯 할 뿐 아니라,이에서 옛날 안동선비의 청아한 풍모와 淵懿한 사
상의 일면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 말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되짚어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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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tudyontheGenerationandDevelopmentofSoogokLineageinJeonJu
Ryu'sFamily*
RYU,Young-Su
DepartmentofKoreanLiteratureinClassicalChinese
GraduateSchool,KyungpookNationalUniversity
Daegu,Korea
(SupervisedbyProfessorPARK,Young-Ho)
(Abstract)
Thepurposeofthedissertation istoinvestigatethespecificfamily whichhavepossessed
variousstuffsrelatedtoancientKorean literatureand itsfamily study in ordertodiscover
andanalyzetheancientKoreanliteratureheritageinspecificarea.Forthisobjective,JeonJu
Ryu family's[全州柳氏] Soogok lineage[水谷派] was selected and its family study was
studied.
JeonJuRyufamilywasgeneratedasthenativesurnameofJeollabukdoJeonjubuProvince
and was a famous centralgentry as Newly-Arisen Scholar-Officials ofthe end ofKorea
dynasty,andthen movedtothesouthern areain themiddleof16thcentury.Theorigin of
Soogoklineageisfrom RyuSung(柳城)whowasconnectedby marriagewithEuisung Kim
family and hedecided theresidenceatGyeongsangbukdo Andongbu Province.In thattime,
thehisconnection by marriagewith Euisung Kim family whoserepresentativescholarwas
HakbongKim Sung-Il(鶴峯金誠一)hadofferedaimportantchancetosettletheresidencefor
Soogok lineageandbuilditsthefamily study.RyuBok-Gi‘sbrotherswhoaretwosonsof
Ryu Sung have been educated by Euisung Kim family which is outstanting in terms of
culturelearnedanddevelopedSoogoklineage'sfamilyandstudy.Onthebasisofthis,inthe
beginning ofsettlement,Soogok lineageenlarged itsfamily powerviamaritalrelationswith
variousfamousfamily,resultinginmakingasucceedasalocalgentry.
Main contents of this dissertation are as follows;In chapter II, the process of the
settlementofSoogok lineage maritalrelation in its beginning atAndong area was shown
and also Soogok lineage'sorigin and study wasinvestigatefrom theview pointofpeople
and space.In chapter III,the education for young children and successive relationship
betweenmasterandpupilandthefunctionofaspacesuchasanarborinavillage.
*A thesissubmittedtotheCounciloftheGraduateSchoolofKyungpookNationalUniversity
in partialfulfillmentofthe requirements forthe degree ofMasterofArts in Februrary,
2009.
- 109 -
In chapterIV,studies on ideologicalroot,the relationship ofSoogok lineage study with
ToegyeschoolandHohak(湖學),academicalresults,roleasofficialoflocalgovernment,and
soon werefocused in ordertoinvestigatetheacademictendancy ofSoogok lineagestudy
and stuffs ofancientKorean literature.Finally,the characteristic ofSoogok lineage study
waschronicallyinvestigated.
Asmentionabove,theoriginofSoogoklineagestudyisfrom GibongRyuBok-Gi(柳復起)
and Dohun Ryu Woo-Jam(柳友潛)whoisson ofRyu Bok-Gi.ThethoughtofRyu Bok-Gi
succeeded in mentally the several predecessors containing Ryu Eui-Son(柳義孫). Ryu
Woo-Jam as the eldestgrandson ofthe main family succeeded family's academicalorigin
andalsoconsolidatedsignificantlythelineagesystem usingadocumentoffamily'ssolidarity
andharmony(門中完議).
In Soogok lineage,many distinguished literary men were raised by various children
educationsbasedonscholarlyattainments(글[文]).Theyintendedtoachievewikijihaklearning
for self-perfection(爲己之學).Children educations resulted in appearing with the practical
featureskeepingpacewiththecurrentofthetimes.
The relationship between master and pupil, which was characterized by the very
complicated and solid structures,have played a importantrole in succeeding constantly in
Soogok lineage study for about450 years.Especially,itis noted thatthe distinguished
scholar,Ryu Chi-Myeong(柳致明)appeared atthe 11stgeneration ofSoogok lineage.He
contributedgreatlytothecomprehensivedevelopmentofSoogoklineageandthesolidification
ofitsrelationshipbetweenmasterandpupilstudy.
The pavilion in Soogok lineage is a effective place for the success offamily study,
education,discussionandwriting.Especially,sincealotofpavilionweredistributedevenat
regionsnearsoogokareasuchasManryeong(萬嶺),Bakgok(朴谷)andDaepyeong(大坪)areas
other than Soogok area,Soogok lineage study could be welleducated in same manner
irrespectiveofregion.
ThethoughtofSoogoklineagewasbasedonstudyofNeo-Confucianism (ZHENG-YIand
ZHU XI)andalsohavereinforcedthetheoryofSung Confucianism(性理學).Periodically,the
ideologicaltendency ofSoogok lineagefollowed theacademictradition ofYeongnam Literati
(嶺南士林派) from the middle of16th century Choson Dynasty,formulated the academic
traditionofConfucianism throughvariousargumentandsermontothelate18thcentury,and
developed greatly itsthoughtin 19th century.Thiscould beconfirmed from thefactthat
the study on Toegye's thought was performed by various writings for theory of
Confucianism overseveralgenerations,Soogoklineageformulateditsstudy byitselfmeeting
with thoughtand academicalstudy ofame Daesan LeeSang-Jeong(大山李象靖)from 8th
and 9th generations and then great confucian scholar in Toegye School,Jungjae Ryu
Chi-Myeong(定齋柳致明)washandedtofamilystudy.
Severalscholars ofSoogok lineage,who were scholastic successor to Toegye school,
handed its academic tradition to generations to come even untilbased on the relationship
between masteraswellaspupiland family relationship and especially played a important
- 110 -
rolein succeeding Daesan'sthought.They referred toDaesan'sstudy asHohak(湖學),and
pen nameMansan Ryu Chi-Eom(萬山柳致儼)completed Hohak by writing ten ofdiagram
'Hohaksipdo'(湖學十圖).
AcademicresultsofSoogoklineage'sstudycouldbeshowninthe Moonheonchonggan(文
獻叢刊)ofallworkcollectionsofSoogoklineage,inwhichvariouswritingssuchascollected
worksofaround 200 bookswith 80types,supplementsofaround 70 bookswith 20 types
andothersofaround3bookswith 5typeswererecordedandTodate,Moonheonchonggan
of13thvolumewerepublished.Thissyntheticcollectionofworksindicatedthatthetrendof
Soogok lineage'sacademicwriting wascharacterized by writing forvariousacademicfields
such as Sung Confucianism(성리학),decorum,the science ofdivination,annotation and
historysoon.Andalsoitwasworthyintheaspectsoftheproductofrecordmentalityand
the essence offamily study,because itwas the key proofofgeneration - inheritance -
developmentforSoogoklineage'sstudy.
Central Government officials from Soogok lineage showed their abilities with their
scholasticpotentialswhen they'reworking forthestategovernmentandsoon,which was
related totheiracademicdisposition.They alsofocused on promoting thepublicwelfareas
localgovernors with discerning the officialaffairs from private ones.These chains of
appearances musthave resulted from family discipline generation aftergeneration such as
children education andrelationshipbetween masterandpupilwithin Soogoklineage'sfamily
and could beoneofthemostconvincing examples,which showed they weretrying to be
"themenofvirtue"inthegovernmentaswellaslocalcommunities.
Finally,thedevelopmentoffamily study ofSoogok lineageissummarized chronically as
follows;the period offormation and inheritance from the middle of16th century to the
middleof18thcentury,theperiodofprosperityfrom themiddleof18thcentury tothelate
19thcentury,andtheperiodofthepreservationfrom thelate19thcenturytotheearly20th
century.
Furtherstudiesofthisdissertationaresuggestedasfollows;
First,astudy on geographicalcharacteristicsofancientKorean literaturewillberequired
bycomparingwithstudyofvariousfamily.Second,therelationshipwithmasterandpupilin
the late Chosun dynasty shoud be restabilized by investigating principalsuccessors to
Toegye schoolcontaining Soogok lineage scholar.Third,further study with category of
ancientKoreanliteraturewithinMoonheonchongganwillbeneededindetail.
- 111 -
全州柳氏水谷派家學의 形成과 展開
柳榮洙
경북대학교 대학원 한문학과 한국한문학전공
(지도교수 박영호)
(초 록)
본고는 ‘지역’의 한문학 유산을 발굴 분석하고 그 특징을 찾아내기 위하여 한문학적 자료를
보유하고 있는 특정 ‘家門’과 그 ‘家學’에 대해 전반적으로 고찰해 봄으로써 새로운 한문학적 분
야에 접근해 보고자 하였다.이런 맥락에서 ‘全州柳氏水谷派와 그 家學’을 주제로 전반적으로 살
펴보고자 한다.
全州柳氏는 본래 全羅北道全州府의 土姓으로 고려 말 新興士大夫로 성장한 在京士族이었다
가 16세기 중반에 落南한 후 柳城이 義城金氏가문의 사위가 되면서 수곡파를 형성하였으며 慶
尙北道‘安東府人’이 되었다.입향 당시,鶴峯金誠一로 대표되는 의성김씨와 맺은 첫 혼인관계는
수곡파가 卜居基盤을 마련하고 가학을 형성하는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류성의 아들 柳復起형제
는 당시 최고 수준의 문화적 동력인 의성김씨에 의하여 견인되고 육성되었고,류복기는 그것을
흡수하여 수곡파의 가문과 가학의 바탕을 만들었다.이런 바탕아래,복거 초기 안동의 명문 가문
과의 혼인관계를 통하여 가문의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在地士族’으로서 立地하였고,더불어 자연
스럽게 학문적 교유관계를 구축하면서 자신들의 가학을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본론의 논의 전개는 다음과 같다.제 Ⅱ장에서는 水谷派가 안동에 卜居하는 과정과 복거 초기
혼인관계를 살펴보았고,人物및 空間중심으로 수곡파 가학의 연원을 탐색하였다.제 Ⅲ장에서
는 수곡파 가학의 전승 과정상에서 방법적 역할로써 그 기초가 되는 동몽교육,그 핵심이 되는
사승관계,亭子의 공간적 기능 등을 살펴보았다.제 Ⅳ장에서는 수곡파 가학의 학문적 성향과 그
결과물[한문학 자료]을 고찰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사상적 근간,退溪學脈및 ‘湖學’과의 관계,
『文獻叢刊』으로 代辨되는 학문적 결과,仕宦과 牧民官의 모습 등을 통하여 對內外的展開樣相
을 살펴보았다.마지막으로 그 전개 과정을 시기별로 구분하여 수곡파 가학의 전체적인 흐름을
정리해 보았다.주요 論旨는 다음과 같다.
수곡파 가학의 淵源은 柳復起․柳友潛부자이다.또 류복기의 사상과 학문은 직접적으로는
鶴峯,내면적으로는 류의손 등 先代名祖를 연원으로 하고 있다.류우잠은 단순히 수곡파 宗孫으
로서의 家系上지위뿐 만 아니라,가문의 학문적 연원을 계승하였고,「門中完議」를 통하여 종
족을 결속하였다.‘岐陶遺業’이 모든 것을 대변해 주고 있다.아울러 ‘岐陽書堂’은 수곡파 가학의
중요한 산실역할을 하면서 전승의 공간적인 연원이다.
수곡파는 각 세대별로 다양하면서도 구체적인 동몽교육을 ‘글[文]’을 바탕으로 하는 훌륭한 선
비를 배출하였으며 그 목표는 ‘爲己之學’이었다.이러한 동몽교육의 결과는 현실 사회에서 時事의
변화에 따라 실천적 모습으로 발현되었고,다수의 문인과 학자․관료를 배출하거나 혹은 초야에
묻혀 학문과 강학에 전념하는 등 수곡파 생활 전반에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음을 알 수 있었다.
- 112 -
수곡파가 450여 년간 끊임없이 가학을 계승할 수 있었던 요인 중에는 매우 복잡하면서도 견
고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家系內的師承關係가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주목할 사실은 수
곡파 11세대에 이르러 ‘定齋柳致明’이라는 인물을 배출함으로서,그를 중심으로 가학의 사승관계
가 가문전체로 확산되어 凡水谷派的사승관계가 구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수곡파의 정자는 가학의 전승과 再傳을 위한 강학장소였고,토론의 장소였으며,문집과 저술
의 교정 및 편집의 공간이었다.특히,소재지가 水谷을 중심으로 萬嶺․朴谷․大坪등이었던 점
은 가학을 凡水谷派的으로 授受할 수 있었던 공간이었다.
수곡파의 사상은 程朱學을 근간으로 시대적 학문경향에 대응하여 論辨과 講論을 통해 성리학
의 이론을 재확립하고 학풍의 復古指向을 이끌면서도 新儒學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자 하였다.
16세기 중반부터 嶺南士林派의 학풍을 계승하면서 영남학파의 큰 범주에 속해 있었던 수곡파의
사상적 성향은,18세기 말까지 이론적 탐구와 논변을 바탕으로 성리학적 학풍을 견지하면서 19세
기에 더욱 활발하게 전개하여 근대까지 지속시켜 나갔다.이 점은 다양한 성리학적 저술을 통하
여 수곡파가 누대에 걸쳐 退溪를 私淑하고,8․9세대부터는 大山李象靖의 사상 및 학문을 만나
면서 자체적으로 정립한 후,퇴계학맥의 거유인 류치명에게 계승되는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
다.
수곡파의 여러 학자들은 퇴계학파의 중심에 있었고,사승관계와 혈연관계를 바탕으로 그 학맥
을 계승해오고 있었다.특히,수곡파는 대산의 학문을 ‘湖學’으로 명명하고,萬山柳致儼은「湖學
十圖」로 완성하는 핵심역할을 하였다.또 퇴계학맥의 巨儒인 ‘柳致明’을 배출시킴으로써 그 영향
력이 최고조에 달했다.
수곡파 가학의 학문적 결과는 다양한 저술활동이 누적된『文獻叢刊』에서 확인할 수 있다.문
집류 약 80종 200여 책․별저류 20여종 70여 책․기타 5종 3책 등이다.『文獻叢刊』은 총 25책
분량으로 현재까지 13집이 간행되었다.수곡파의 저술 성향은 性理學․禮學․易學․註釋學․史
學등 다양한 분야에 다양한 저술을 남긴 것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문헌총간』은 그 자체가
기록정신의 산물이자 가학의 총집이라고 할 수 있다.왜냐하면,이것이 수곡파가 가학을 형성-전
승-전개해 왔던 가장 뚜렷한 증거이고,그 정신이 가문을 계승하는 요인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
다.
수곡파의 문과 급제자들의 일련의 모습은 童蒙敎育과 家系內的師承關係등 여러 방법을 통
해 수대를 걸쳐서 시청각적으로 훈련되었을 것이며,지역사회 뿐 만 아니라 중앙사회에서도 ‘훌
륭한 선비[善士]’가 되고자 노력하였던 또 하나의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수곡파 가학의 전개 흐름을 시기별로 정리해 보았다.먼저,16세기 중반∼18세기
중반까지는 形成및 傳受期,18세기 중반∼19세기말까지는 全盛期,19세기 말∼20세기 초까지는
維持期라고 할 수 있다.이후는 가문과 가학의 유기성과 연속성을 고려하여 별도로 정의하지 않
았는데,현재 그들의 전통적인 가학은 소수자에 의해 내부적으로 명맥을 유지하면서 전통과 현대
를 아우르는 학문적 부흥을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으로 본론에서 논의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였다.마지막으로,향후 연구 과제를 제
시하고자 한다.
첫째,향후 여타 가문들과의 객관적 비교를 통하여 심층적인 연구를 필수적으로 진행하여 수
곡파 뿐만 아니라 모든 가문과 가학의 개별특징을 찾아내서 통합적으로 정리하여,우리나라 한문
학의 지역적 특징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둘째,수곡파 인물들을 포함한 퇴계학맥상의 주요 인물들을 再考察하여 조선 후기 퇴계학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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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승관계를 다시 정립해야 할 과제가 남아있다.
셋째,수곡파 가학의 결과물인『文獻叢刊』에 대해서 한문학 연구 분야별로 정밀한 고찰이 미흡하였다.이 부분은 향후의 연구과제로 남겨두면서 관련 연구자들에게 한문학적 자료로서 그 가치를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계기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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