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넷 위키백과사전에서 퍼왔습니다.] "경찰개혁 국민연대 고문이신 박찬종 변호사님이 걸어온길..."1. 정계입문 [편집]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출신으로 경남중학교,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 이후 고등고시 사법과와 행정과를 모두 합격하고, 이어 공인회계사 시험에도 합격하였다. 검사생활을 하다가 1971년 제 8대 국회의원선거에 여당인 민주공화당 공천을 받아 부산직할시 서구 선거구에 출마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2. 공화당 국회의원시절 [편집]소선거구제였던 8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신민당 국회의원 후보였던 야당 거물인 김영삼에 이어 2위로 득표하여 낙선, 같은해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선포와 함께 8대 국회가 해산되자 이듬해 1973년 9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여당인 공화당 소속으로 다시 출마하여 중선거구제로 변경된 선거법에 따라 1위를 한 김영삼에 이어 2위로 당선되었다. 1976년에는 37세의 나이에 2차 투표까지 가는 박빙의 승부끝에 한국공인회계사회 회장에 당선되었다. 유신하의 국회의원으로서 그는 간이공판제도의 신설에 반대하고 유정회 의장의 아내 비서관 채용을 비판하는 등 여당내의 야당으로 불렸다. 이어 1979년 10대 국회에서도 당선되지만 10·26 사건 이후 공화당 내에서, 권력으로 치부한자, 해바라기정치인 등의 자퇴 또는 당직에서 제외를 요구하는 등 정풍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국회개헌특위 위원으로 활동하다 1980년 4월 공화당에서 제명되었다. 3. 양김과 함께 [편집]1980년 8월 전두환이 유신헌법하의 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이어 10월 제 5공화국 헌법이 국민투표를 통과하면서 10대 국회가 해산되자 11월 정치규제대상 811명에 포함되어 1981년 3월의 11대 국회의원선거에는 출마하지 못한다. 1983년《부끄러운 이야기》(일월서각간)를 펴내 유신정권에 참여한 과거를 반성하였고, 1985년 1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 김대중이 주도한 신한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부산에서 출마, 당선되었다. 민주화추진협의회의 인권옹호위원장, 신한민주당의 인권옹호위원장으로서 1985년 5월 미문화원점거농성사건이 터지자 함운경, 김민석 등 점거주동 대학생들의 변호를 맡아 운동권 학생들을 변호하는 인권변호사로서 이름을 날리게 되었고, 이해 9월 '고대앞시위사건'으로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기소되어 3년 6개월간 변호사 업무를 정지당하였다. 박종철군 사망사건에서도 고문치사사건 진상규명 위원장으로서 사인을 고문에 의한 것으로 밝히는데 앞장섰다. 이러한 인권변호사, 민주화 운동가로서의 업적을 인정받아 1987년 제 1회 아키노자유평화상을 수상하였다. 4. 양김과의 결별 [편집]1987년 6월 항쟁 이후 야당을 주도했던 김영삼, 김대중의 통일민주당이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과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으로 분열하여 양김이 각각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자 합류를 거부하고 이철, 홍사덕, 조순형 등과 함께 7인의 서명파를 조직하여 단일화 삭발농성을하는 등 양김 후보의 단일화를 끝까지 주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지역선거 광풍이 몰아친 1988년 13대 국회에서 서울 서초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7인의 서명파 중 유일하게 당선되었고, 1990년 3당합당 이후에는 여당으로의 합류를 거부한 통일민주당 소속 의원인 이기택, 노무현, 김정길등과 민주당 (이른바 꼬마민주당)을 구성하였다. 5. 14대 대통령선거 [편집]1991년 이기택이 김대중의 신민당과 합당하자 이에 합류를 거부하고 신정치개혁당을 창당[1], 1992년 대통령 선거에 "깨끗한 정치"를 기치로 출마하여,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에 이어 4위를 기록했다. 이때 홀로 거리를 누비며 돈안드는 선거유세를 펼쳐 "깨끗한 정치인"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고, 이를 통해 "무균질우유" 광고에도 등장하게 되었다. 대통령선거 이후 정주영이 탈당하고 무주공산으로 남은 통일국민당 잔류파와 합당하여 1993년 신민당을 결성, 1994년 김종필이 이끌던 자민련과 김동길이 이끌던 국민당과 합당을 시도하였으나, 각목 전당대회 파동이 일어났다. 6. 초대 민선서울시장 선거 [편집]1995년 서울시장선거[2]에 무소속으로 나서 선거초반 2위조순 후보에 20% 이상 앞서가다 《부끄러운 이야기》에서 스스로 고백했던 사실인, 유신선포를 옹호하는 글을 변호사 시절에 일간지에 실은 사실이 조순 후보 측에 의해 폭로됨으로써 그의 "깨끗한 정치" 이미지는 큰 타격을 입고 선거에서도 낙선하게 된다. 7. 15대 대통령 선거[편집] 1996년 총선에서 여당인 신한국당에 입당하여 지역구를 떠나 전국구 2번을 배정 받았으나 이를 자진하여 반납하고 당선권 밖의 번호를 자원하여 낙선한다. 1997년초 그해 말에 있을 15대 대통령 선거 출마예정자를 대상으로한 각종 지지도 조사에게 부동의 1위로 앞서 갔으나, 여당인 신한국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당내조직의 미비로 통과가 불투명해지자 폐쇄적인 경선규칙 그리고 이회창 후보측의 돈 선거를 비난하며 결국 경선 마지막날 후보에서 사퇴하였다. 후에 이회창 후보에게 불공정경선에 대한 대국민 사과와 이인제 후보의 경선불복에 대하여 이를 포용할 것과 이회창후보의 두 아들 병역미필에 대한 대국민 사과를 조건으로 지지의사를 밝혔으나 이회창 후보가 이에 불응하자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역시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한 이인제 후보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이인제가 여당인 민주당에 입당하자 그와 결별하였다. 8. 국민의 정부, 참여 정부시절 [편집]김대중 정부 시절 중, 독도가 일본령이 될 수 있다며 한일어업협정 반대운동을 펼치기도 했었고, 2000년에는 김윤환, 이기택과 함께 민주국민당을 창당하여 정치적 고향인 부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고 말았다.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와 화해하고 그의 선거운동을 도왔으나 이회창 후보가 낙선함으로써 이것이 그의 마지막 정치활동이 되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중에는 대통령의 개헌발언에 강하게 비판하기도 하였으나 [3] 더 이상 정치가로서의 발언은 아니었다. 9. 정치가로서의 평가 [편집]그의 정치 역정에 대해서는 두 극단적인 평가들이 있다. "나는 우리 정치계에서 왕따당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평하듯[4] 권위주의 정치, 3김 정치, 패거리 정치에 도전하였으나 끝내 실패한 시대를 앞섰던 정치인으로 평가되기도 하고, 조직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다닌 철새정치인,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독불장군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10. 다시 변호사로서 [편집]92년 14대 총선의 선거비용과 관련해 진 빚으로 2007년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가 하루 만에 석방된 후 "평소에 사법제도개혁을 해야 한다는 소신이 있었으나, 그 필요성을 더 절실히 느꼈다”는 소회를 밝힌 후 다시 변호사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석궁 테러사건의 수학자 김영호, BBK사건의 김경준,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사건,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 등의 변론를 맡았다. 특히 미네르바 사건에서는 무죄평결을 이끌어내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5] 현재 올바른 사람들의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 - 서울,이대로 좋은가?:지방자치시대의 그 개혁과 발전방향, 1991.
- 경제의 틀을 새로 짜 21세기를 열자 신국부론, 1996.
- 박찬종이 찾아낸 일본도 놀란 일본의 성공 벤쳐이야기, 1999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