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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요한 11,45-56
착한 목자는 상처 입은 양의 눈동자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사람입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복음 11장 50절)
위 말씀과 관련해서 헨리 나웬 신부님께서는 특별한 에피소드 하나를 우리에게 소개하면서 참된 사목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성찰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한 나라 안에서 두 패로 갈라져서 싸우는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어느 날 한 작은 마을에 어린 병사 하나가 큰 부상을 당해 나타났습니다.
군복을 보니 적군이었습니다.
이장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비록 적군이지만 불쌍한 소년병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어 은신처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상처를 치료해주었고 먹을 것도 갖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즉시 그날 저녁 한 무리의 병사들이 찾아와 그 소년병을 어디에 숨겼느냐고 다그쳤습니다.
그들은 내일 새벽 동트기 전까지 소년병을 내놓지 않으면, 마을에 불을 지르고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모두 본당 신부님을 찾아갔습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가르쳐달라고 자문을 청했습니다.
진퇴양난의 순간 앞에 신부님도 난감했습니다.
소년병을 넘겨주면 소년병이 죽고, 소년병을 안 넘겨주면 마을 사람 전체가 죽고...
무거운 마음을 안고 사제관으로 들어간 신부님은 올바른 길을 열어주시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신부님은 성경 안에 답이 있겠지 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밤새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처럼 동트기 직전 답이라고 여겨지는 성경 구절 하나를 찾았습니다.
그 성경 구절은 오늘 우리가 봉독한 요한 복음 11장 50절의 말씀, 대사제 가야파가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습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신부님을 무릎을 탁 치며 즉시 이장님을 찾아가서 주님께서 위 구절을 답으로 주셨다고 통보해주었습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적군에게 소년병의 은신처를 알려주었고, 병사들은 소년병을 끌고 가 죽였습니다.
그날 밤 마을 회관에서는 큰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지혜로운 신부님의 기도와 조언으로 마을 사람 모두가 살아났다며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마음이 무척 찜찜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살았지만, 불쌍한 소년병의 모습이 계속 머릿속에 어른거렸습니다.
깊은 슬픔과 자책감에 사로잡혀 침실로 들어갔는데, 그날 밤 주님의 천사가 그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너는 무슨 일을 했는가?”
“저는 너무나 난감한 상황 앞에서 간절히 기도하다가, 그래도 응답이 없다 싶어, 성경 말씀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밤새 읽었습니다.
그리고 답이 되는 구절을 찾았기에 그 답을 마을 주민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천사는 화가 나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는 메시아를 적군에게 넘겨주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신부님은 괴로워하며 반문했습니다.
“제가 무슨 수로 그것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자 천사가 말했습니다.
“네가 어젯밤 간절히 기도하고, 열심히 성경을 읽는 대신 단 한 번이라도 그 소년병을 찾아가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면,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이 예화를 통해 헨리 나웬 신부님은 우리에게 강조합니다.
착한 목자는 기도만 열심히 하고 성경만 열심히
읽는 사람이 아니라 양들을 찾아 나서는 사람입니다.
착한 목자는 상처 입은 양의 얼굴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와 눈동자를 마주침을 통해 그의 내면, 그의
영혼의 상태를 확인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결국 사목자는 맡겨진 양들을 위해 발로 뛰는 사람, 양들 사이로 내려가는 사람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요한 11,45-56
자기 영광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는 법: 한 사람을 위한 마음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대사제 가야파는 아주 냉혹하고도 효율적인 논리를 폅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이롭다는 것도 생각하지 못합니까?" (요한 11,50)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추악한 욕망을 '민족의 안녕'이라는 거창한 명분으로 포장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죽이는 행위를 '정당한 희생'이라고 선언합니다.
세상에는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는 선이 있습니다.
특별히 인간의 생명에 관한 것이 그렇습니다.
낙태, 살인, 전쟁과 같은 악행은 그 어떤 숭고한 목적으로도 허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명분만 있으면 너무나 쉽게 칼을 휘두릅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보십시오.
그들이 내세우는 나토 가입 저지나 안보 확보라는 명분이, 지금 이 순간에도 차가운 땅 위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청년과 민간인의 생명보다 소중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이는 핵무기 억제라는 카드를 꺼내 들고 이란을 침공한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이를 살리기 위해 몇몇은 죽어도 된다는 논리입니다.
여기에는 자기 영광이라는 악이 숨어있습니다.
무엇이 ‘정의’냐고 묻는 철학적 논의 중에 '트롤리 딜레마(Trolley Problem)'라는 것이 있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가 5명의 인부를 향해 달리고 있을 때, 선로를 바꿔 1명만 죽게 하는 것이 정의냐는 물음입니다.
많은 이가 '5명보다 1명이 죽는 게 낫다'며 공리주의적 선택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가야파의 논리입니다.
하지만 상황을 조금 바꿔봅시다. 당신이 육교 위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습니다.
기차를 멈추게 할 유일한 방법은 옆에 있는 뚱뚱한 당신의 자녀를 밀어 떨어뜨려 기차를
세우는 것뿐입니다.
이때도 당신은 '5명을 위해 1명을 죽이는 게 이롭다'며 자녀를 밀 수 있겠습니까?
절대 못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인간의 이중성입니다.
대상이 '나'나 '내 것'이 아닐 때만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혈한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당신을 믿지 않는 이유가 바로 '자기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영광에 빠진 자에게 타인은 그저 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부속품일 뿐입니다.
모기가 피를 빨 때 사람의 아픔을 고려하지 않듯, 자기 영광이라는 생존 본능에 사로잡힌 인간은
타인의 눈물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도 우리 삶 안에서 한 생명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지 살펴야 합니다.
한 생명, 그것은 온 우주보다도 소중합니다. 그것이 나의 생명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렇지 못할 경우를 잘 살펴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도 자기 영광의 감옥에서 못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1961년 예일 대학교의 스탠리 밀그램은 충격적인 실험을 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학습 효과 증진'이라는 명분을 주고, 틀린 답을 말하는 학생에게 전기 충격을 가하게 했습니다.
전압이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올라가 비명이 들려도, 권위자가 "책임은 내가 질 테니 계속하라"고 하자 65%의 사람들이 치사량의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들은 '과학 발전을 위해'라는 명분 뒤에 숨어 살인자가 됨을 알면서도 그 길을 선택했습니다
목적(실험 완수)을 위해 수단(인간의 생명)을 도구화한 것입니다. 우리도 '직장 생활을 위해',
'자녀 교육을 위해'라는 명분으로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수단을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출처: 스탠리 밀그램, 『권위에 대한 복종』)
자기 영광이라는 감옥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길은 가야파의 논리를 정반대로 뒤집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위해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많은 사람이
기꺼이 손해 보고 위험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구하려고 모든 이가 마음을 합칠 때,
그곳은 모기들의 전쟁터가 아니라 천사들이 사는 천국이 됩니다.
2001년 1월 26일, 일본 도쿄 신오쿠보역에서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 씨는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습니다.
그는 결국 목숨을 잃었지만, 이 사건은 자기밖에 모르던 일본 사회에 거대한 영적 지진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일본 언론은 이 사건을 '기적 같은 이타주의'로 대서특필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이후입니다.
이전까지는 선로에 사람이 떨어져도 자기 안위가 먼저라 외면하던 문화가, 이수현 씨의 희생 이후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수많은 시민이 함께 선로로 뛰어들거나 기차를 밀어내는 기이한 현상'들이 계속해서 보고되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의 진실한 희생이 수만 명의 자기 영광을 무너뜨리고, 타인의 생명을 자신의 목적보다
소중히 여기는 천상의 문화를 이식한 것입니다.
(출처: 고(故) 이수현 추모 보고서; 「아사히 신문」 2001년 1월 27일자)
미국에서도 이러한 예가 있었습니다. 2013년 11월 1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는 하루 동안 영화 속 '고담 시'로 변했습니다.
백혈병에 걸린 다섯 살 소년 마일스 스콧의 소원이 "하루만이라도 배트맨이 되어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보잘것없는 한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시장, 경찰청장, 그리고 수만 명의
시민이 생업을 잠시 내려놓고 연극에 참여했습니다.
수억 원의 비용과 도시 전체의 행정력이 오직 '한 명의 아이를 기쁘게 하기 위해' 투입되었습니다. 효율성을 따지는 가야파의 눈으로 본다면 이는 엄청난 낭비이자 어리석은 짓입니다.
하지만 그날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은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아이를 행복하게 해 준 것이 아니라, 아이가 우리에게서 이기심을 씻어내고 사랑의 기쁨을 알게 해주었다." 한 사람을 목적으로 대할 때, 공동체는 비로소 지옥에서 탈출합니다.
(출처: 메이크어위시 재단 기록; 다큐멘터리 '배트키드 비긴즈' 2015)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목적이 아무리 선할지라도 수단이 불의하다면, 그 행위는 결코 하느님의 일이 아니다.
악한 수단으로 지은 집은 결국 그 주인을 깔아뭉갤 것이다." (출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마태오 복음 강론』).
또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그대가 누구를 사랑한다면, 그를 결코 그대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지 마라. 사랑은 그 사람을 존재 자체로 목적이 되게 하는 것이다."
(출처: 성 아우구스티누스, 『자유의지론』).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나 자신밖에 없습니다.
나 자신은 나를 영광스럽게 만들기 위해 나를 희생시킵니다.
이 감옥에서 나오는 유일한 길은 나의 생명을 타인을 위해 쓰는 길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따릅시다.
내가 가장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나라는 두려움의 감옥으로부터 가장 빨리 빠져나오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11,45-56: 그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의논하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 문제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의 기득권과 자기 보존의 욕망 때문이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장면을 해석하며, 지도자들이 민족의 안위와 성전을 말하였지만 실제로는 자기들의 자리와 권력만을 염려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민족의 멸망을 걱정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자리와 이익을 잃을까 두려워했다.”(Tractatus in Ioannem 49,7) 이는 곧 하느님의 계획에 자신을 맞추기보다, 자기 이해관계와 안전을 우선시한 인간적 태도의 단적인 모습이다.
대사제 가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50절)라고 말한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를 ‘대사제로서 무의식적으로 한 예언’이라고 설명한다. 교부들은 이 구절에서 하느님의 섭리가 인간의 악한 의도까지도 구원 계획 안에서 사용하신다는 점을 강조한다.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주석한다. “하느님은 때로 악인의 입술을 통하여도 진리를 드러내신다. 가야파는 자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지만, 그 말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인류 구원의 신비를 미리 선포하고 있다.”(Commentarium in Ioannem, XIX, 16) 따라서 인간적 음모와 불의의 말조차도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가야파의 말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의 보존을 위한 희생을 의미했지만, 성경은 이를 보편 구원으로 확장한다. 성 치프리아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 한 민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흩어진 모든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는 희생이었다. 그분의 피는 교회의 일치를 낳았다.”(De catholicae ecclesiae unitate, 7) 교회 헌장에서도 가르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당신 안으로 모아들이시며, 새 백성, 곧 하느님의 백성을 창조하셨다.”(9항 참조)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경고한다.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잃는 것을 두려워했다. 우리가 그들의 어리석음을 보며, 우리의 삶에서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Homilia in Ioannem 65,1) 예수님이 생명의 주님으로 라자로를 살리신 기적을 본 지도자들은 오히려 죽음의 음모를 꾸민다. 신앙이 없는 마음은 기적조차도 믿음을 일으키지 못하고, 오히려 불안과 두려움을 키울 뿐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음모와 불의 속에서도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52절) 돌아가셨다. 사순을 지내는 우리도 그분의 희생 안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내 이익과 체면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사랑의 계명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하겠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선사시대에 한 시기를 공존했던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크로마뇽인이 현재 인류의 기원을 이루고, 네안데르탈인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귀 달린 바늘’의 차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둘이 공존하고 있을 때 빙하기가 찾아왔습니다. 빙하기의 맹추위에서 크로마뇽인은 동물 뼈를 이용해 털가죽을 꿰맨 옷을 만들어 입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네안데르탈인은 훨씬 덩치도 크고 힘도 강했지만, 그 추위를 이겨낼 어떤 방법도 없어서 멸종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작은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능력이 크더라도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음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가장 오랫동안 문명을 유지했던 마야 문명도 무분별한 개발로 산림이 훼손되었고, 이것이 오랜 시간의 가뭄을 가져와 그 화려한 문명을 파괴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함께 사는 길을 쫓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 살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편하고 쉬운 길만을 찾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변화되어 함께 사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 그래서 주님을 받아들이고 주님 뜻에 따라 변화되어야 합니다. 특히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삶으로 함께 사는 길을 용감하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은 라자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오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목격했던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나뉩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반대로 예수님을 고발하는 사람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말합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요한 11,47)
신학적 진리 탐구가 아닌 철저한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말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민중 봉기가 일어나면, 자신들이 누리던 기득권과 로마의 평화가 깨질 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그들은 썩어 없어질 권력과 체제 유지만을 신경 쓰고 있었습니다.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는 말합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요한 11,50)
자기들 다수를 위해 소수인 예수님을 희생시키자는 폭력의 정당화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정당화시킬 때가 많습니다. 자기 삶의 기득권이나 편안함을 위해 주님의 뜻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자기만 사는 길이 아닌, 함께 사는 길인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망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당신은 인생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단,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얻도록 도와주기만 하면 된다(지그 지글러)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3.28.토.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50)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악의와
계산조차도
구원의 도구로
전환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누군가를
희생시키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계산이 아니라
스스로 내어주신
사랑의 봉헌입니다.
자신을 내어주어
모두를 살리는 길을
택하십니다.
죽음이 생명을 낳고,
버려짐이 일치를 이루며,
한 사람의 죽음이
모든 이를 살립니다.
참된 치유는
누군가를 탓함으로
얻어지지 않고,
자기 내면을 정직하게
마주할 때 시작됩니다.
진짜 평화는
누군가를 지워버릴 때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까지도 품을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누군가를 제거함으로
얻는 평화는
참된 평화가 아니라
또 다른 불안을 낳는
씨앗일 뿐입니다.
참된 길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기억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잘못된 수단으로
안정을 얻기보다
올바른 길을 선택하고
결과를 맡기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공동체는
겉으로는 유지되지만
내적으로는 이미
무너지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진정한 공동체는
위기의 순간에
드러납니다.
오늘 우리는
누군가를 밀어내며
평화를 찾기보다,
한 사람을 끝까지
품는 사랑으로
세상을 다시
세워가야 합니다.
희생양을 또다시
만드는 삶이 아니라
희생양을 품어 안는
우리의 삶이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카톡 신부님 - 굿뉴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요한11,53)
'부활의 원조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요한11,45-56)은 '최고 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는 말씀'입니다.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표징을 비롯하여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다른 표징들 때문에 민심이 동요할 것을 우려한 유다 지도자들이 최고 의회를 소집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최고 의회의 결정이니 이제 실행시키는 일만,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 큰 결정적 순간에 가야파가 함께 합니다. 그는 그해의 대사제로서 최고 의회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11,49)
대사제 가야파의 이 예언대로 예수님께서는 이 민족 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 고백하는 이들을 다시 부활시키시려고 돌아가십니다.
오늘 독서(에제37,21ㄴ-28)가 전하는 메시지는 '희망'입니다. 완전 멸망한 바빌론 유배지에서 활동한 에제키엘 예언자가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스라엘 백성의 부활을 알리는 희망'입니다.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에제37,21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부활을 위해 맺으신 계약의 표징은 '성전'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넘어 우리와 모든 민족들을 부활시키시기 위해 맺으신 새 계약의 표징은 '구세주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부활의 원조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보다 더 큰 고난의 길이 없고, 우리의 부활을 위해 예수님께서 겪으신 수난과 고통보다 더 큰 수난과 고통은 없습니다.
이것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믿는 이들이 지금 여기에서 다시 부활합니다.
복음말씀
제1독서
<그들을 한 민족으로 만들겠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37,21ㄴ-28
21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22 그들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결코 두 왕국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23 그리고 그들이 다시는 자기들의 우상들과 혐오스러운 것들과 온갖 죄악으로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모든 배신에서 내가 그들을 구원하여 정결하게 해 주고 나면,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24 나의 종 다윗이 그들을 다스리는 임금으로서,
그들 모두를 위한 유일한 목자가 될 것이다.
그들은 내 법규들을 따르고 내 규정들을 준수하여 지키면서,
25 내가 나의 종 야곱에게 준 땅,
너희 조상들이 살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들만이 아니라 자자손손이 영원히 그곳에서 살며,
나의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제후가 될 것이다.
26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니,
그것이 그들과 맺는 영원한 계약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그들을 불어나게 하며,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27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28 나의 성전이 그들 한가운데에 영원히 있게 되면,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45-56
그때에 45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46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렸다.
47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48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49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50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51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52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53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5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유다인들 가운데로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고,
그곳을 떠나 광야에 가까운 고장의 에프라임이라는 고을에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르셨다.
55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많은 사람이 자신을 정결하게 하려고
파스카 축제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56 그들은 예수님을 찾다가 성전 안에 모여 서서 서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가 축제를 지내러 오지 않겠소?”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