歸天 詩人천상병
천상병은 마산중학교 다닐 때 시인이자 선생님인 김춘수에게서 시를 배웠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시인 김춘수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재학 중인 1949년에는 잡지 '죽순(竹筍)'에 시를 발표하여,
‘현대문학'에 등단했다.
정치와 무관하던 그가 뜻밖에 1967년 '동 백림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여섯 달 옥고를 치르고 나왔다. 그 후에는 쭉 의정부 수락산 밑에서 살았다.
그리고 인사동에 와서 벗들에게 1000원을 얻어
막걸리를 사 마시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삼았다.
1970년 영양실조로 쓰러진 뒤에 행려병자로 서울시립정신병원에서 누워있었다.
몇 달째 코빼기도 내밀지 않고 소식이 끊긴 천상병이 죽었을 것이라고 짐작을 했다.
누군가 불쌍한 천상병을 위해 유고 시집이나 묶어주자고 갸륵한 뜻을 냈다.
그래서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시집 새'가 나왔다.
이런 미담이 신문에 실리자 한 병원에서 '천상병 시인이 여기에 있다'는 연락이 왔다.
문우들이 비단 보자기에 호화 양장본으로 꾸민 그 시집 10권을 싸 들고 병문안을 갔다.
유고 시집'을 보고 천상병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카랑카랑한 제 일성이 " 내 인세는 어찌 되었노? "
돈 알기를 돌로 보는 그 아닌가? 미처 인세 생각을 못 했다.
죽어서 저승 가는 길에도 노자가 필요하면 어떻게 하노? 하고
걱정하던 시인이었는데. 커피 한 잔과 봉지 담배, 막걸리 한 병을 마시고도
아직 버스 요금이 남았다며 행복해 하던 그였다.
그는 무소유였지만 가난과 불행에 주눅 들지 않고 늘 늠름했다.
오히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 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노라고 말하리라"하는
‘귀천(歸天)'을 썼다. 많은 것을 거머쥐고도 허덕이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귀천(歸天)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향수를 마셨다. 대학시절이었다.
하루는 교수님 집에서, 화장대에 멋있는 병이 있어서 양주인줄 알고 마셨다.
이상하다. 무슨 향이야?
역시 좋은 술은 향기부터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향수였다.
나의 임종은 자정에 오라던 김관식 명함에 자기 이름을 대한민국이라고
써가지고 다니던 추남 시인 김관식은, 선배 시인 서정주의 처재를 보고
첫 눈에 반해 자살소동 끝에 원로 시인과 동서지간이 되었다.
천상병은 절친한 친구인 김관식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하루는 김관식을 골탕 먹이고 술도 사먹고 돈도 벌 겸, 친구 집에 있던
오래된 책을 몰래 헌책방에 팔려고 생각한 일이 있었다.
김관식이 이를 눈치 채고, 천상병이 훔친 책에서 몰래 봉투를 빼고,
대신에 헌 신문지를 넣어두었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책을 팔러 갔던 천상병은 망신을 당하고 돌아왔다.
김관식은 이 광경을 보고 배꼽을 잡다가 도리어 술을 대접했다고 한다.
술값이 세금이라고?
시인은 생전에 세금(?) 명목으로 지인으로부터 500원, 1000원씩을 받아냈다.
징수(?) 원칙은, 짝이 있으면 1000원, 혼자 사면 500원을 받았다.
결혼 여부에 따라 받는 세금이라니?
친한 사람이 아니면 돈을 걷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돈을 주면서도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이발소에서 젊었을 때였다. 누가 봐도 폐인 행색인 천상병 시인은,
머리가 덥수룩하여 얼굴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를 딱하게 여기던 친구가 돈을 주면 술을 사 먹을까봐 그를 직접 데리고
이발소로 갔다. 이발삯을 지불하고 머리를 자르는 걸 본 친구는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데 친구가 나가자마자 천상병은 지금까지
이발한 비용을 제외하고 환불해달라고 요구했다.
어이가 없는 이발사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결국에는 환불을 해주고
머리로 잘라주었다.. 천상병은 그 돈으로 술을 사먹었다고 한다.
신경림 작가의 회고 술동무이고 절친인 시인 신경림의 회고에 따르면,
천상병은 먹성이 좋고 주량도 엄청났다..
또한 몸이 튼튼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험하게 살아, 무쇠가 아닌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한다. 신경림 시인이
영어학원 강사로 근근히 살아 가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생각에 천상병 시인은
취직을 시켜주겠다면서 여기 저기 알아보고 일자리도 알선해 주었다.
일정한 수입이 없는 천상병이 자신의 걱정은 안 하고 남 걱정만 하는 것이
우스워 한마디 했더니, 천상병은
"너와 나는 타고난 생리가 다르다"고 일축했다. 자신은 남들보다 시를
잘 쓰니 자신의 능력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동베를린 사건으로 국사범에 몰렸다.
천상병 시인이 이 사건에 연루된 죄명은 친구 강빈구로부터 공갈을 쳐서
3만 6500원을 갈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친구에게 술값으로
백 원, 오백 원씩 받아서 썼던 돈이었다. 얼마나 술을 좋아했던지?
그일 때문에 하루아침에 간첩으로 몰려 취조를 받을 때 별명은
'천희갑'이었다. 얼굴이 희극 배우 김희갑을 닮아서였다.
남자가 임신을? 천상병이 간이 부어 춘천의료원에 입원했을 때,
친구인 병원장이 복수가 차서 누워있는 시인에게, 왜 배가 부르냐고 묻자
임신을 했다고 하니 개가 웃을 일이다.
저승 갈림길에 포장마차 미망인 목순옥 여사는 인사동에서 귀천이라는
민속 찻집을 운영하였다. 단골손님이 천상병 시인에게, 빌린 돈을
언제 갚으실 거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허허, 내가 죽으면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서 포장마차를 하고 있을 테니,
오거든 빌린 만큼 공짜로 술을 주겠네."
이 이야기는 일본인이 쓴 세계 유명인의 명언이란 책자에 나온다.
이외수와의 인연
춘천의료원에 입원했을 당시 소설가 이외수가 문병을 왔다.
그때 초면인데도 보자마자, 너 외수 아니냐? 넌 이제부터 내 동생이다.
평소에 천상병 시인을 존경하여 직접 만나보고 싶었으나,
정작 기회가 나지 않았는데 뒤늦게 병문안을 가서 뜬금없이 환대를 받고
무척 감격했다며, 이후 자주 만났다고 한다. 이외수가 물었다.
중광 형님 나이가 몇이래요? 그러자 천상병 시인이 희죽 웃으며,
외수 너! 서른 살이지? 아니야 예순 하나야! 중광이는 마흔이고.
그러자 외수는. 상병 형님 나이는 요?
나는 세 살이지! 떼가 뭍은 해수로 본다면 맞는 말이다.
천 시인의 해맑은 웃음을 보니 그렇게 보였다.
부인의 간절한 기도 춘천의료원에 입원했을 때 부인 목순옥 여사가
천상병 시인을 5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놀랍게도 병원에서조차 가망이 없다던 그의 병은 완쾌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정확히 5년 후인 1993년 거짓말같이 세상을 떠났다.
여사는 "5년이 아니라 10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빌어야 하는데!."
시인과 애완견
개를 무척 좋아하여 개와 함께한 천상병 시인이 세상을 떠날 때
기르던 개도 슬퍼하며 주인이 자주 앉았던 서재를 떠나지 않았고,
3년 뒤에 주인을 따라 하늘나라로 갔다고 한다.
조의금이 재가 되었다.
그가 소풍을 끝내고 받은 몇 백만 원의 조의금은 살아생전에 만져본 적이
없는 큰돈이었다. 장모는 제일 안전한 곳이라 여겨 아궁이에 감추어 두었는데
그런 사실을 모르고 아내가 아궁이에 불을 지펴 돈을 재로 만들었다.
은행의 배려로 절반은 건졌다고 한다.
장례식장에서
장례식의 압권은 영혼을 울리는 타고난 소리꾼 장사익이, 무반주로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노래로 불렀다. 귀천과 가요를 애잔한 정서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장사익의 소리는 조문객들로부터 앵콜을 3번씩이나 받았다.
그 때마다 다시 영전에 나와 노래를 불렀다. 마지막 앵콜 요청으로
다시 무대에 올라와서 망부가를 부르며, 예의 수줍은 충청도 사투리로
"고마워유! 아무리 세상이 힘들어도 이렇 정이 오고 가야 살맛나는 거예유-" 하자
관객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다.
가수 최백호도 천상병의 시에 맞춰 작곡하겠다고 약속을 하며
‘낭만에 대하여’를 처연하게 불러 앵콜을 받았다.
장지는 의정부시립묘지. 시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