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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29. 묵상글 (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 가족으로 사랑하기.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4:16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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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7.29 04:10
- 가족으로 사랑하기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축일-2024
아시다시피 오늘 축일이 옛날에는 성녀 마르타의 축일이었습니다.
이 말은 옛날에는 마르타의 동생과 오빠는 성인으로 공경받지 못했다는 말이고,
마르타만이 가족들을 대표하는 성녀가 되었다는 의미로도 읽힐 수 있을 겁니다.
이런 면에서 세 분을 성인으로 같이 기념하는 새로운 전례는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의미도 있고 과거에 제대로 조명하지 못한 것을
이제 제대로 조명하는 의미가 있을 텐데 제 생각에 이것이 더 중요한 의미입니다.
한 가족이 모두 주님의 사랑을 받았고,
한 가족이 모두 주님을 사랑한 것에 의미를 두는 것 말입니다.
비슷한 의미에서 저는 이순희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 동정 부부를 높이 삽니다
부부가 같이 하느님께 나아간 경우이니 말입니다.
사실 서로 사랑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것이고 그래서 대단히 훌륭하지만
같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신앙인에게 귀감이 되지요.
그렇지요.
서로 사랑하는 것이 훌륭하긴 하지만
그것으로 그친다면 그 사랑은 갇히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사랑에 갇히는 것이요,
이 세상에서의 사랑에 갇히는 것입니다.
사실 요즘 많은 사람이 자기 사랑에 갇히고,
기껏해야 가족 사랑에 갇혀 더 이상 사랑이 확장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사랑에서 하느님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한세상 서로 사랑하다가 같이 사랑을 끝내는 것으로 그치게 됩니다.
이것을 심하게 얘기하면
고양이를 사랑하며 한 생을 살다 가는 것처럼 슬픈 사랑입니다.
인간이 되어서 그래 고양이나 사랑하며 살다가 간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인생입니까?
마찬가지로 신앙인이 되어서 하느님 사랑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슬픈 신앙생활입니까?
이는 천국에 가려 하지 않고 기껏 이 세상에서 복되게 살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참으로 슬픈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자주 얘기합니다.
연인들의 풋사랑은 서로를 보지만
부부의 익은 사랑은 같이 한곳을 바라본다고.
그런데 부부의 사랑이 같이 한곳을 바라보긴 하지만
그 한곳이 하느님이 아니라 자식일 수도 있지요.
이번 행진자 중에 딸이 출산하여 첫 손주를 본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딸이 출산하러 가는 날 행진에 참여하신 겁니다.
어떻게 보면 출산하는 딸 옆에 있지 않은 비정한 엄마일 수도 있지만
내가 옆에 있을 테니 잘 갔다가 오라고 한 남편이 있어 자녀도 같이 사랑하고
주님도 같이 사랑하는 것을 동시에 실현한 성숙한 부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요.
아무튼 교회는 오늘 한 가족의 축일을 통해
한 가족의 거룩한 삶에서 자극도 받고 본도 받으라고 합니다.
우리 프란치스칸에겐 성녀 클라라의 가족이 이 거룩한 가족의 본보기이지요.
세 자매가 클라라의 수녀가 되었고 나중에 어머니까지 수녀가 되었으며
마침내 세 자매가 모두 성녀 또는 복녀가 된 거룩한 가족이니 말입니다.
한 가족이 거룩한 가족이 되는 것은 욕심을 내도 좋을 욕심일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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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환대의 사랑, 환대의 집, 환대의 공동체
“베타니아의 집; 성녀 마르타, 성녀 마리아, 성 라자로”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4)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은 아마도 예수님이 자주 찾은 베타니아의 집일 것입니다. 베타니아의 집하면 저절로 떠오르는 환대의 사랑, 환대의 집, 환대의 공동체입니다.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삼남매가 살았던 집이 바로 베타니아의 집입니다. 이런 베타니아의 집을 그대로 닮은 여기 성 요셉수도원이요, 세상에는 이와 비슷한 무수한 환대의 집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만세칠창에 “베타니아의 집 만세!”하나 덧붙여 만세팔창을 했습니다.
제 집무실도 오늘 하나 덧붙여 “베타니아의 방”이라 칭하고 싶습니다.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삼남매는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여 환대한 환대의 사람들이었고 아마도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분들일 것입니다. 어찌보면 참으로 믿는 환대의 사람들에게는 삼남매의 특성이 정도의 차이일뿐 고스란히 지니고 있음을 봅니다. 밖으로는 활동의 마르타요 안으로는 관상의 마리아요 속으로는 병자인 라자로이기 때문입니다. 삼남매처럼 예수님을 환대해야할 운명애의 우리 신자들임을 깨닫습니다.
환대의 기쁨은 물론 냉대의 아픔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무시와 불친절의 냉대의 아픔을 겪은 분들이라면 친절한 환대를 꼭 실천하려는 결심도 새로이 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잊지 못할 어느 수녀원 방문시 극진한 사랑으로 환대 받았을 때 흡사 왕자로 격상된 느낌의 기억입니다. 그래서 정주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 반드시 따라 붙는 환대입니다. 정주영성은 환대영성과 그대로 직결됩니다. “찾아오는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할 것이다”, 바로 성 베네딕도 규칙에 명문화되어 있는 구절입니다. 환대하면 떠오르는 아주 오래 전 <해바라기꽃>입니다.
“해를 향해,
해를 닮아, 해를 담아
크고 둥근 환한 얼굴
해바라기꽃들
주변이 환하다
저절로 활짝 열리는 마음
환대는 해바라기꽃처럼 하는 것이다.”<2007.8. >
정말 환대의 사람은 낮에는 “해바라기-주바라기꽃”으로, 밤에는 “달맞이꽃-주맞이꽃”으로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바로 베타니아의 집, 삼남매의 얼굴이 해바라기를 닮은 주바라기꽃들처럼 보입니다. 오늘은 베타니아 집, 삼남매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의 기념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2020년까지는 성녀 마르타만 기념했지만 2021년 부터는 전임 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각별한 배려로 삼남매 기념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2021.1.26.일 교령을 반포했고 그중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주 예수님은 베타니아의 집에서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의 가족 정신과 우애를 경험하셨고, 이런 까닭에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다고 말한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너그러운 환대를 베풀었고, 마라아는 주님의 말씀을 온순히 경청했으며, 라자로는 죽음을 굴복시킨 분의 명령으로 무덤에서 즉시 나왔다.”
오늘 제1독서 요한1서는 오늘 기념일에 걸맞게 사랑에 대한 금과옥조의 가르침을 줍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답게 무려 사랑이란 말마디가 18회 나옵니다. 여기 사랑은 그대로 집착없는 초연한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깨끗한 아가페 사랑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다음 대목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이런 사랑이 우리를 아름답게 합니다. 이래서 <사랑하면 예뻐진다>라는 말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사람들을 통해 자연을 통해 아름다움으로 표현됩니다. 예뻐지고 싶습니까? 화장할 것이, 성형수술할 것이 아니라 사랑과 사랑의 기도를 간곡히 권합니다. 성 베네딕도가 꿈꾼 사랑의 공동체도 그대로 요한을 닮았습니다.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하고,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서로 다투어 순종하고, 아무도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남에게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를 것이며, 형제적 사랑을 깨끗이 드러내고, 하느님을 두려워할 것이며,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지 말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규칙72장>
바로 사랑의 공동체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분이 그리스도 주 예수님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우애는 신자들 행복의 열쇠이다”(Friendship with Christ is the key to Christian happiness), “신자의 집은 그리스도 반석위에 세워져야 한다”(A Christian’s house must be founded on rock, Christ), 바로 엊그제 레오 교황의 말씀입니다. 베타니아 사랑의 공동체 삼남매는 각자 나름대로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우애를 날로 깊이했음을 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우애의 사랑은 동료 형제자매들과의 우애의 사랑과 함께 갑니다.
“주님의 집에 사는 자 얼마나 행복되리!”
성가정 축일 미사때 흥겹게 불렀던 화답송 후렴이 생각납니다. 베타니아의 집에, 가톨릭교회 공동체에, 주님의 집에 속해 한가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1인가족 시대에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거칠고 험한 광야 인생에 오아시스와 같은 베타니아의 집을 영원한 모델로 삼는 여기 성 요셉 수도원입니다. 옛 현자의 지혜도 공동생활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타인이 나의 거울이 되듯, 나 또한 타인의 거울이 된다. ‘나는 얼마나 밁고 깨끗한 거울인가?”<다산>
우리는 서로 보고 배울 거울이 된다. 거울중의 거울이 둥글고 큰 거울이, 얼굴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거울이자 얼굴입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좋은 점은 배워 본받고, 좋지 않은 점은 나 자신을 바로잡는 거울로 삼는다.”<논어>
상호보완의 형제들 공동체요, 서로를 비춰주는 거울이 됨으로 서로 보고 배움으로 날로 깊어지는 우애와 더불어 상호감사의 마음들이 됩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단연코 성녀 마르타입니다. 얼마나 그리스도 예수님과 돈독한 우애의 관계인지, 우리는 마르타 덕분에 주님의 정체에 대한 놀라운 진리와 참 좋은 신앙고백을 배웁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고백은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평생 지니고 살아야 할 만고불변 진리의 문답입니다. 베타니아의 집의 삼남매의 주님과의 우애가 막상막하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형제자매들간의 우애와 환대의 기초가 되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우애와 환대입니다. 말그대로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주님과 우애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는 물론 형제자매들간의 우애를 날로 깊이해 줍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
주님을 경외하는 이에게는 아쉬움이 없으리라.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시편34,9-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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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우리는 성녀 마르타와 마리아와 성 라자로를 기념하며, <복음>을 통해 부활의 믿음에 대한 초대를 받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나는 안다”에서, “나는 믿는다.”로의 초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빠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마르타와 마리아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러자 마르타가 집밖으로 뛰쳐나와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21)
이 인사말에는 예수님께 대한 마르타의 원망과 섭섭함이 묻어납니다. 그래서 오빠가 죽은 이유가 예수님이 여기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럴 법도 합니다. 임종 때에도, 장례식 때에도 오시지 않고 사흘이 지나서 이제야 찾아오시는 예수님이 섭섭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타는 계속해서 마치 떼를 쓰듯이 하느님의 권능을 강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2)
그러나 그분의 권능을 ‘알고 있다’고 고백할 뿐, 여전히 ‘믿는다.’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압니다.”(οιδα)라고 고백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πιστιω)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요한 11,23)라고 말씀하셔도, 여전히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3) 하고, 또 다시 “압니다.”라고 고백할 뿐, 여전히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부활에 대한 믿음’을 일깨우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6)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부활과 생명을 너에게 준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는 이것을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이는 믿을 때라야, 그 ‘믿음 안’에서 부활과 생명이 부여된다는 말씀입니다. 곧 ‘부활과 생명은 믿는 이에게 주어집니다.’
마침내, 마르타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7)
그리하여, 마르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믿음에 대한 확증’을 일깨워줍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40)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사도 요한은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1요한 4,16).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6)
주님!
제 생명이 죽고, 당신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 안에 살아계신 당신 생명을 보게 하소서!
제가 사라지고 당신이 드러나게 하소서!
당신의 생명을 살게 하소서!
제가 믿음으로 당신의 영광을 보리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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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벗이자 제자였던 세 사람, 마르타와 마리아, 라자로를 함께 기억하며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머무르셨던 한 가정의 구성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고단한 길 위에 따뜻한 ‘숨구멍’이 되어 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많은 이들의 요청을 받으셨지만,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라자로는 예수님을 위해 먼저 다가갔던 이들이었습니다. 마르타는 부지런히 음식을 장만하며 예수님의 피로를 돌보았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향유를 부어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라자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복음의 한 구절은, 그들과의 관계가 단지 사명의 관계를 넘어 깊은 우정과 사랑의 관계였음을 보여줍니다. 이들의 삶은 예수님의 복음 여정 속에서 숨통을 틔워준 ‘쉼터’였고,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몇 안 되는 ‘숨구멍’ 같은 존재였습니다. 신앙 여정에서도 우리에게는 그런 ‘숨구멍’ 같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저에게도 그런 분들이 계셨습니다. 언제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셨던 어머니, 제 성격을 이해하며 묵묵히 함께해 준 직원들, 성지순례나 행사 때 뒤에서 도와주시는 이름 없는 봉사자들, 그리고 낯선 타지에서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동료 사제들. 이분들은 제가 지쳐 있을 때마다, 때로는 외로울 때마다 조용히 곁에 있어 주신 분들입니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아도 그 사랑과 동행이 제 삶을 숨 쉴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위안부였던 이옥선 안나 어르신이 지난 5월 11일 하느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어르신은 9년 전 달라스를 방문하였습니다. 당시 어르신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어릴 때는 나라가 약해서 종군 위안부로 끌려갔답니다. 세월이 흘러서 내가 종군 위안부의 삶을 증언하기 위해서 이렇게 달라스를 방문한 것은 아직도 우리나라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는 5,000개가 넘는 대학이 있다고 합니다. 그중에 정의와 인권을 연구하는 단체가 있는 대학은 6개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달러스에 있다고 합니다. 저는 달라스에서 개최되는 이옥선 안나 어르신의 추모식에 함께 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기꺼이 참석했습니다. 추모식에 함께 한 분들은 대부분 미국 분이었습니다. 한국 분은 저를 포함해서 많지 않았습니다. 추모식은 불교에서 법사님이 예불드렸고, 제가 고인을 위해서 추모의 인사와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뒤로 9년 전에 어르신의 방문을 준비했던 인권위 관계자들의 인사말과 학생의 추모 시가 있었습니다. 진행을 맡았던 분의 이야기가 가슴에 남았습니다. “비록 할머니는 이제 더 이상 우리와 함께하시지 않지만, 할머니의 마음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합니다. 나는 할머니를 잊지 않고 계속 기억하겠습니다.” 저 역시 이옥선 안나 어르신께서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안식 누리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이옥선 안나 어르신의 삶도 그랬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자신의 고통을 기억하고, 증언하며 살았던 이 어르신도 우리 시대의 ‘숨구멍’이었습니다. 불의한 기억 속에서도 정의를 향한 끈을 놓지 않으셨고, 끝까지 사랑의 언어로 진실을 전하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그 사랑이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지만, 그분을 믿고 사랑하는 우리가 서로를 통해 하느님을 보게 됩니다. 마르타와 마리아, 라자로는 예수님의 벗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말없이 음식을 장만하고, 말없이 향유를 바르고, 말없이 죽음조차 받아들이는 그들의 존재는 곧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집은 ‘하느님 나라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숨구멍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 주는 존재, 힘들고 지친 이에게 쉴 자리를 내어주는 사람, 말없이 곁에 있어 주는 사람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마르타와 마리아, 라자로를 기억하면서 묻습니다. 나는 누구에게 ‘숨구멍’이 되어 주고 있는가? 혹시 내 가족, 내 이웃, 내 공동체가 나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을까?
우리의 신앙은 거대한 선언보다도 작고 따뜻한 동행 안에서 빛납니다. 오늘 하루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실히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누군가에게 ‘숨구멍’이 되어 주면 좋겠습니다. 그 작은 사랑 속에 하느님께서 머무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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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완벽주의: 선과 은총의 원수!
하느님의 숨
2025.07.28. 20:40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7월 28일 월요일 - 서른한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우리의 불완전함을 끌어안기
하느님께서는 거룩함을 오직 겸손하고 불완전하고 성실한 이들만이 찾을 수 있도록 숨겨 두십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평범한 일상의 선과 기쁨을 방해하는 가장 큰 원수는 불완전함이 아니라 완벽하다고 여겨지는 어떤 것을 차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 리처드 로어,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Eager to Love)
리처드 로어는 프란치스칸 삶 초기에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1873-1897)의 글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리처드는 데레사의 가르침을 "불완전함의 영성"이라고 설명합니다:
리지외의 데레사는 최소한의 교육만 받았던 프랑스 가르멜회 수녀였는데, 그녀는 24년이라는 자신의 짧고 숨겨진 삶 안에서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근본적인 가르침의 정수를 깨달았습니다. 데레사는 교회의 박사로 선포되었는데, 이는 그녀의 가르침이 전적으로 믿을 만하고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녀는 조셉 슈미트 형제(수사)가 말했듯이, "인생 여정이 계속해서 펼쳐지는 순간순간에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기꺼이 행하고자 하는 이라면 누구나 이 거룩함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그녀는 거룩함을 민주화하여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1]
데레사는 노기를 띠고 징벌하고자 하는 하느님과 완벽주의, 그리고 개인의 선한 행위로만 거룩함이 검증된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믿었던 19세기의 가톨릭 교회 안에서 산 사람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아주 매우 불안정하고 환상에 지나지 않는 믿음입니다. 이런 경직된 환경 한가운데서 데레사는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가르쳐 주신 메시지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2] 급진적인 은총을 제시해 주는 복음을 많은 그리스도인이 모두 잊어버렸기 때문에 데레사는 이것을 "새로운 것"이라고 말해야 했던 것입니다.
데레사는 이렇게 단순하며 어린이와 같은 길을 "작은 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불완전함의 영성입니다. 그녀는 아돌프 룰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 제 생각에 자신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하느님 품에 맡기는 것으로 충분할 만큼 저에게는 완덕(완전함)이라는 것이 아주 단순해 보입니다." [3] 사실상 그리스도교 "완덕"이란 우리의 불완전함을 포용하고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우리의 능력을 말합니다. 제가 종종 말했듯이, 우리는 무언가를 올바로 함으로써보다는 무언가를 잘못함으로써 훨씬 더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성장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핵심적인 교훈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내면의 에고의 경향은 그것을 믿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만일 인간적인 완전함과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어디에나 있는, 특히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불완전함을 다루는 방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 불완전함은 하느님께서 거룩함을 숨기시는 참으로 기발한 장소입니다. 그래서 오직 겸손하고 '미천하고' 성실한 이들만이 그것을 찾을 수 있게끔 하신 것입니다. "완벽한" 사람은 자신이 자신의 불완전함을 전적으로 넘어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그 불완전함을 의식적으로 용서하고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크게 소리내어 말하면 이 사실은 더 분명해집니다. [4]
데레사는 죽음에 이르렀을 때 자기 자매에게 자기의 이 '작은 길'을 설명해 주었는데, 이것이 그녀의 자서전 "한 영혼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영웅적인 완벽주의가 지향하는 "커다란 길"과는 대조적으로 그녀는 본질적으로 "모든 불완전함을 지닌" 작은 자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다다른다고 가르칩니다. 하느님은 그녀가 "완덕의 험난한 계단을 오르기에는 너무 작기" 때문에 그녀를 도와주셔야 했습니다. [5] 그녀는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자신이 무한한 사랑으로 무한히 사랑받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6]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교회도 다른 어떤 기관들과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교회도 때때로 다른 이들에게 심각한 해를 끼치는 불완전한 사람들에 의해 운영됩니다. 이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저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교회를 하느님 사랑에 뿌리를 두고 예수님 안에서 그 사랑을 초월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헌신하는 신앙 공동체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 초월적인 사랑에 대한 헌신이 저를 그리스도인으로 머물게 해주는 것입니다.I
—Mark S.
References
[1] Joseph F. Schmidt, Walking the Little Way of Thérèse of Lisieux: Discovering the Path of Love (The Word Among Us Press, 2012), 22.
[2] Story of a Soul: The Autobiography of St. Thérèse of Lisieux, trans. John Clarke, 2nd ed. (ICS Publications, 1976), 207.
[3] Thérèse to Adolphe Roulland, May 9, 1897, in Thérèse of Lisieux: General Correspondence, vol. 2, 1890–1897, trans. John Clarke (ICS Publications, 1988), 1094.
[4] Story of a Soul, 207.
[5] Père Liagre, A Retreat with St. Thérèse, trans. P. J. Owen (Little Way Association, 1947), 22. Note: This is the book that Father Richard read during his novitiate year.
Adapted from Richard Rohr, Falling Upward: A Spirituality for the Two Halves of Life, rev. ed. (Jossey-Bass, 2024), xx; and “Discovering the Little Way,” Daily Meditations, September 25, 2022.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Martin Baron, untitled (detail), 2025,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우리는 우리의 깨어진 조각들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신뢰하면서 우리 자신에 대해 온화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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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마음(동정심)으로 초대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라자로의 죽음과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다시 살려 내시는 이야기 속으로 깊숙히 들어가 그 장면들 하나하나를 차근차근 마음에 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요한 복음 11장 전체에 걸쳐 전개되고 있을 만큼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이야기 안에 예수님의 민감한 정서를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 이전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느님과 하나라고 말씀하신 것 때문에 유다인들이 돌을 던져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다고 합니다. 이 일로 인해 예수님은 그 유다인들의 손을 벗어나 제자들과 함께 요르단강 건너편으로 숨어(?) 들어가십니다.
그러고 나서 전개되는 이야기가 바로 11장 전체에 걸쳐 나오는 라자로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입니다.
당신이 죽음의 위험을 피해 요르단강 건너편으로 가셨지만.... 라자로의 죽음 때문에 예수님은 다시 유다로 가기고 결심하십니다(요한 11,7). 이때 토마스가 이렇게 말하지요?! "우리도 스스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라고요....
라자로의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조하는 것일 뿐 아니라 라자로의 죽음으로 인해 시작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 깊은 곳에는 그분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11장 35절에 보면 성경 전체의 절들 가운데 가장 짧은 절이 나옵니다. 아주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이 내용을 이 내용 바로 다음 절, 즉 36절과 함께 붙여 놓아도 무방할 수도 있었는데, 성경의 장과 절을 나누던 사람들은 달리 생각했나 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영감을 주셔서 그리했겠지만 말입니다.
36절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고 말하였다." 여러분도 이 두 절을 붙여 놓아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여기에는 참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눈물을 흘린다는 것]과 관련하여 말입니다.
누군가가 눈물을 흘릴 때 우리는 그 사람이 눈물을 흘리도록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많은 말을 담고 있습니다. 아니 말이라기보다는 마음에 이는 정(情)이겠지요.... 그러나 눈물은 언어가 아닙니다. 흐르는 눈물은 대답이나 설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 눈물은 우리로 하여금 그저 또 다른 정(情)으로 받아들여 동정심으로 들어서게 해주는 초대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아픔과 고통을 가벼히 보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만, 요한 복음 11장은 예수님의 이런 마음을 매우 특별하게 우리 마음에 전해 주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수님의 정과 같은 동정심으로 초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는 그 심장부에 이 동정심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새겨 보아야 합니다. 요한 복음에 의하면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고 결의한 것이 바로 이 라자로의 죽음과 부활로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상에서 처절하게 돌아가신 이유가 바로 동정심 때문이라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라자로 한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고통과 아픔 전체를 끌어안으시며 우리 모든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온통 다 당신의 마음에 품고(com-passion) 받으신 것이 그분의 고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컴패션(com-passion)은 "수난(고통)을 함께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더 중요한 것은 이 동정심이 바로 그 모든 수난과 죽음까지도 이겨내는 부활을 가능하게 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믿음에서 나온 신앙 고백이 바로 마르타의 신앙 고백입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했다 해서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하였는데, 마르타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했다는 것에는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마르타의 이 고백에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마음을 담고 계신 존재라는 믿음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말하자면,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과 아들 예수님의 마음이 하나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하신 말씀과 같은 믿음 고백인 것입니다!
우리는 '나'와 가까운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에는 같은 아픔과 고통을 품게 되지만 나와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대할 때는 잠깐은 같이 아파하지만 곧 잊어버리고 말지 않습니까?!
하지만 예수님(하느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우리가 가장 큰 고통이라고 여기는 죽음까지도 다 당신 마음에 품으시는 분이시며 함께 이 여정을 끝까지 걸어가 주시는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궁극적인 부활이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인격 자체인 복음이 전하는 궁극적인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이신 그런 동정심의 영역으로 들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어줄 수 있는 그런 동정심이 바로 부활의 전조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면서 말입니다.
본래 마르타만 기념하였던 오늘의 기념일에 마르타의 두 형제가 함께하게 된 것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다고 저는 봅니다. 어찌 보면 이 두 사람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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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믿는 이들은 영원히 산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믿는 이들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고 히십니다. 그들의 육체는 죽더라도 다시 생명으로 돌아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라는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분을 믿는 사람은 라자로처럼 죽었더라도 산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래전에 죽은 선조들,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 관한 유대인들의 물음에 대한 그분의 대답이었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마태 22,32; 루카 20,37-38). 그러니 여러분이 비록 죽더라도 다시 살리라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비록 살아 있더라도 죽은 것입니다. 그분을 따르기를 미루며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마태 8,21) 하고 말하는 이에게 주님께서는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22) 하셨습니다. 장사를 치러야 하는 죽은 이가 있고, 죽은 이들을 장사지낼 죽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앞의 사람은 육체가 죽은 이고, 뒤의 사람들은 영혼이 죽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영혼의 죽음은 언제 옵니까? 믿음이 없을 때 옵니다. 육체의 죽음은 어떻게 옵니까? 영혼이 없을 때 옵니다. 믿음은 영혼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1
세가지 탄생
우리의 탄생, 하느님의 탄생, 하느님 자녀인 우리의 탄생
평화로운 침묵이 온 세상을 덮고 밤이 달려서 한고비에 다다랐을 때(지혜 18,14).
이교의 한 대가가 다른 한 대가에게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훌륭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무언가가 내 안에서 번쩍이고 있음을 압니다. 그것은 나의 이성 속에서 번쩍입니다. 나는 그것이 있다는 것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잡을 수만 있다면 모든 진리를 알게 될 텐데 하며 상상만 할 따름입니다" 이 말을 들은 상대방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멋진 일이군요! 그것을 구하십시오! 당신이 그것을 붙잡을 수만 있다면, 당신은 모든 선의 본질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까지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이와 동일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내 안에 무언가가 있어서 내 영혼 앞에서 반짝이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것을 내 안에 온전히 그리고 영구히 간직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숨어 있다가도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그것은 마치 도둑처럼 다가와서 영혼에게서 모든 것을 훔치려고 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어 알리려고 한다. 그것이 영혼을 유혹하여 자신을 따르게 하고, 영혼을 빼앗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예언자는 이렇게 말했습나다 “당신께서 ... 숨을 거두어들이시면 죽어서 먼지로 돌아가지만, 당신께서 입김을 불러 넣으시면 다시 소생합니다”(시편 104,29-30). (아가서에 등장하는) 신부의 말도 그런 뜻입니다. “내 사랑하는 임께서 말씀하실 때, 나의 넋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아가 5,6). 말씀이 안으로 들어오면, 나는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이것을 염두에 두고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무언가를 포기하는 사람은 백 배로 돌려받을 것이다. 나를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여의어야 할 것이고, 나를 섬기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관심사를 따를 것이 아니라 나를 따라야 할 것이다"(참조: 마르 10,29; 마태 16,24; 19,29; 요한 12,26).(436)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거룩한 성심에 대한 묵상, 요셉 맥도넬 신부
성심에 대한 묵상
첫 번째 시리즈
첫 금요일 신심
VI.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의 이미지
제3 묵상. 십자가, 열린 상처
VII. 우리 각자를 향한 예수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성심의 사랑에 대하여
제2 묵상
나는 누구이며, 어떤 존재이기에 그분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1. 나는 철저히 하찮은 존재입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나는 어떤 존재입니까?
지구상의 인류가, 천상의 무수한 천사들과 성인들에 비해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천국과 땅과 지옥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 앞에서 어떤 존재일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하느님과 비교할 때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일까요?
(성 이냐시오의 『영신 수련』 참조)
그러나 바로 그 하느님께서,
바닷가의 모래알보다도 작게 여겨질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지금도 미사 안에서 나를 위한 희생 제물로 매일 바쳐지고 계시며,
감실 안에 기꺼이 머무르시는 감금된 분,
성체 안에서 내 영혼을 위한 하늘의 양식과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2. 나는 큰 죄인입니다.
내 영혼은 더럽고 혐오스러운 악창 같아서
각양각색의 독과 부패가 끊임없이 솟아납니다.
나의 죄는 마치 소름 끼치는 나병과 같아,
존엄한 하느님의 형상을 파괴하고,
내 존재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그분의 모상을 일그러뜨립니다.
적용
그런데도,
이토록 비참하고 사악한 내 모습에도 불구하고,
은총에 대한 수많은 배신과,
반복된 약속의 파기,
성심께서 나를 일으키시고 용서하신 후에도 다시 죄에 빠진 그 모든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결코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지치지 않으시고,
늘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며 기다리고 계셨으며,
애틋한 사랑의 음성으로 나직이 속삭이십니다:
“얘야, 너의 마음을 내게 다오.”
애정과 결심
“주님, 제가 당신을 알게 하소서.
그리고 저 자신도 알게 하소서.”
(성 아우구스티노)
오, 예수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성심이여,
저로 하여금 당신의 사랑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고 제 안에 있는 지극한 부적합함, 감사 없음, 죄된 실상을 보게 하소서.
사랑으로 가득하신 성심이여,
제 가난한 마음을 당신을 향한 사랑으로 채워주소서.
다시는 당신을 거스르지 않음으로써
당신을 사랑함을 드러내게 하소서.(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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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께 청하는 것을 그분이 모두 들어주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종 자신들에게 좋지 않고 올바르지 않은 것을 청하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좋지 않고 올바르지 않은 것을 청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불평과 불만을 쏟아냅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유치원생인 어린아이가 냉장고에 있는 소주를 가지고 와서는 엄마에게 소주를 마시겠다고 말합니다. 엄마는 당연히 안 된다고 말했지요. 아이는 목이 너무 탄다면서, 어젯밤에 아빠가 이 소주를 마셨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자기도 마시겠다는 것입니다. 엄마는 “안 돼. 이 소주는 어른이 마시는 것이지, 네가 마실 수 있는 것이 아니야.”라면서 아이의 부탁을 절대로 들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이 엄마는 아이에게 무엇이 유익하고 해로운지를 잘 알기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 엄마의 판단보다도 더 바른 판단을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기준은 우리에게 무엇이고 유익하고 해로운지에 있습니다. 우리의 판단은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데 있다면, 주님의 판단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께 어떤 청을 해야 할지 잘 판단해야 합니다. 주님 뜻에 맞는 청을 하는가? 아니면 자기 욕망만을 채우기 위한 청을 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라자로의 죽음으로 인해 마르타와 마리아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마르타는 그 슬픔 속에서도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희망을 표현합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21)라고 말하지만, 여기에는 안타까운 마음만 담겨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 믿음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요한 11,23)라고 응답하십니다. 물론 마르타는 주님께서 어떻게 살릴지를 잘 모릅니다. 그냥 믿을 뿐이기에, 마지막 부활 때를 이야기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 신원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
마르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7)라면서 베드로의 고백과 같은 응답으로 믿음을 표현합니다.
우리 역시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주님께 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은 항상 바르다는 믿음, 부활이요 생명이신 분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을 때,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구름 뒤에는 항상 빛이 존재한다(루이자 메이 올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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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고백한 라자로의 동생 마르타
박윤식 [big-llight] 250728. 20:19 ㅣNo.183766
오늘은 성녀 마르타와 마리아, 성 라자로 기념일이다.
마르타는 라자로의 동생이자 마리아의 언니로 예루살렘 근처 베타니아에 살았다.
나흘이나 무덤에 묻혀 있던 라자로는 예수님 덕택으로 다시 살아난 이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이는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 믿는 이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그녀가 답하였다.
“예, 저는 주님께서 오시기로 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마르타의 이 신앙고백은 베드로 사도나, 백인대장의 그것에 못지않다.
이는 라자로가 죽어 큰 슬픔에 빠졌을 때 비로소 한 엄청난 고백이기에.
사실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고백하는가?
언제 어디서나 마르타마냥 우리 구세주로 고백하는가?
마르타의 이 믿음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살려 내셨다.
하느님에 대한 이 믿음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기적을 만들어 내었다.
베타니아에 있던 마르타의 집은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에 지치셨을 때
찾아와서 쉬이 쉴 수 있는 오아시스와 같은 곳이었다.
그때마다 예수님 발치에만 머문 마리아보다 그녀는 그분을 편안히 모시려고 정말 온 정성을 다했다.
그것은 그녀가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생명마저 주관하시는 분이시라는 믿음을 가졌기에,
죽은 오빠를 다시 살리시는 그분 기적을 직접 체험하였다.
이렇게 마르타는 활동적인 신앙인의 모범으로 주님 말씀에 따라 충실히 살아,
믿음의 삶에서 관상생활의 모범으로 공경 받는 성녀중의 성녀이다.
이 마르타를 쭉 보면서 우리가 믿는 참 신앙은 사랑과 믿음의 결과물임을 분명히 알게 될게다.
비록 때로는 서로가 서로에게 다소 다툴 때도 있지만, 서로 믿고 사랑해가면서 그 믿음은 더욱더 굳건해지리라.
따라서 우리가 신앙을 말로만 고백하면서 깊숙이 체험하지 않는다면, 신앙의 정도가 점점 깊이가 덜해질 수밖에.
그렇지만 믿음으로 우리가 서로 늘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함께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될 것이리라.
사람들은 늘 바쁘단다.
어쩜 고통 앞에서마저 눈코 뜰 새가 없이 바쁘다나.
그러나 주님은 바쁘지 않으시다.
우리만 조급할 뿐이지 그분께서도 그러려니 생각해서는 안 된다.
기적은 언제나 천천히 일어나니까.
조건이 갖추어진 뒤에야 주어질 게다.
예수님은 죽은 지 분명히 나흘이나 지난 라자로를 살리셨고 마르타는 그 기적 체험에 고백했다.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믿음이라는 게,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우리들이 따르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영원한 구원의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리라.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렇게 이르셨듯이,
당신께서 바로 부활이시요 생명이시라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을 믿는 이들은 하나같이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게다.
그런데 주님께서 되돌려 주시는 것은 단순한 육신의 숨이 아니다.
주님께서 되찾아 주시고자 하는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영원한 생명이다.
그 생명은 창조 이전부터 우리에게 계획된 생명으로 이 땅에서 이미 우리 모두가 누리고 있는
생명이며 육신의 숨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계속 이어지는 그러한 생명이다.
믿음이 깊어질 때 삶과 죽음은 분리되지 않고 하나이다.
우리도 그녀의 이 고백을 언제 어디서나 되풀이해야 한다.
주님의 부활과 생명의 자리가 우리에게 이미 와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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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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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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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 들어가세요.
늦게 올라오거나 다음날 또는 게재 아니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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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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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ofmkorea.org/ofmhomily
위 “작은형제회 홈페이지– 나눔방– 말씀 나눔.” 리스트에서 ‘김명겸요한’으로 들어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오전 시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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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요한 11,19-27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의 장례식과 아무 것도 믿지 않는 비신자들의 장례식은 분위기가 다릅니다. 비신자들의 장례식은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죽은 이들이 지내는 죽은 이들의 예식’입니다.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는 이들은 한 번 죽으면 그대로 끝나버리는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 매일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니 ‘죽은 이들’일 수 밖에 없고, 그런 이들이 지내는 장례식은 죽음이라는 한계 앞에서 인생의 허망함을 절감하며 떠나간 이에게 더 잘 해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자리가 될 뿐이니 ‘죽은 예식’인 겁니다. 그러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들의 장례식은 ‘살아있는 이들이 지내는 살아있는 예식’입니다. 저는 얼마 전, 함께 지구 초등부 일을 했던 한 자매의 모친 장례식장을 방문하여 그 점을 분명하게 체험했지요. 그 자매와 형제들은 어머니께서 너무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음에도 그저 슬퍼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어머니께서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는 병마와 싸우시느라 고생하셨지만, 이제는 하느님 품 안에서 참된 안식과 평화를 누리고 계시다는 분명한 믿음을 말로 그리고 손님들을 기쁜 얼굴로 맞이하는 씩씩한 행동으로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이 끝이 아니며 하느님 나라로 건너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고 믿었으니 ‘살아있는 이들’이며, 그런 믿음으로 어머니를 잘 떠나보내고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다시 만나리라 희망하니 ‘살아있는 예식’이 되는 겁니다.
오늘 우리는 성 라자로와 성녀 마르타, 마리아 남매의 삶과 신앙을 기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참된 믿음으로 이끄시지요. 우리가 ‘나는 주님을 안다’라는 인지의 차원에서, ‘나는 주님을 믿는다’라는 신앙의 차원으로 넘어가도록 이끄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오빠 라자로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져있던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를 찾아가십니다. 그러자 마르타가 예수님을 마중나가 그분께 이렇게 말하지요.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말에는 자기 오빠가 중병에 걸려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했음에도 즉시 달려와주지 않으신 예수님께 대한 원망과 섭섭함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예수님만 계셨다면 그분의 능력으로 자기 오빠를 반드시 치유해주셨으리라는 믿음 또한 담겨 있지요. 그리고 마르타는 오빠가 세상을 떠난 지금도 예수님의 신원과 권능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권능에 대해 ‘알고 있다’고 고백할 뿐, 그 권능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마음만 먹으면 하느님께 청하여 오빠를 다시 살려주실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계심을 ‘알지만’, 그분께서 반드시 그렇게 해주시리라고 ‘믿지는’ 못했던 겁니다. 그런 태도는 부활신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요. 그녀는 세상 종말의 날에 죽었던 모든 이들이 부활하여 주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일이 자신에게 반드시 일어나리라고 ‘믿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머리로만 이해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믿음은 내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마르타를 참된 믿음으로 이끄십니다. 당신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가 죽더라도 멸망하지 않고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신앙생활을 그저 머리로만 하려고 들지 말고 실제 생활에서도 주님과 상관있는 모습으로 살라고, 그래서 주님께 대한 믿음이 내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쳐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나의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이 되고 내가 하느님 앞에서 참으로 살아있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신앙은 어느 수준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그저 주님을 ‘알고’만 있습니까? 아니면 그분을 ‘믿고’ 따르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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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 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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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4299
7월29일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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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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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수원교구 최재관 암브로시오(안녕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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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무한 리필 에너지 충전소, 베타니아!>
아동 양육 시설에서 일할 때의 기억도 생생히 떠오릅니다. 명절이나 휴가 기간에도 갈 곳 없는 아이들을 잔뜩 데리고 언제든지 마음 편히 찾아갈 수 있는 가정집이 있었습니다. 넓고 쾌적할 뿐만 아니라 전망도 탁 트여 아이들도 무척 좋아했습니다.
마음씨 좋은 주인 내외는 식욕 왕성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도 절대로 당황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환한 얼굴로 환영하시면서“오랜만에 냉장고를 싹 비울 좋은 기회가 왔다.”며 기뻐하셨습니다.
하루 온종일 아이들 위해 별미를 만들어 내느라 쌩고생을 다 하셨습니다. 생각해보니 그 집은 저희들에게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장소, 무한 리필 에너지 충전소 같은 집이었습니다.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도 그런 무한 리필 에너지 충전소 같은 집이 있었으니, 베타니아에 위치한 절친 라자로의 집이었습니다.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15스타디온(약 2.8킬로미터) 떨어진 곳, 올리브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오르내리실 때 마다 자주 라자로의 집에 들르셔서 숙식을 해결하곤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종종 벌어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의 껄끄럽고 날선 대화로 끝내신 예수님께서는 지친 몸을 이끌고 베타니아로 내려오셔서 휴식을 취하셨습니다. 그런 날 밤에는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와 마주 앉아 밤늦도록 포도주잔도 기울이셨습니다.
손님 맞이의 총 책임자는 언제나 마르타였습니다. 그녀는 엄청나게 먹고 마셔대는 제자들을 위해 빵을 굽고 또 구웠습니다. 하루 온 종일 지지고 볶았습니다. 그들이 떠나고 나면 사흘씩 앓아 누울 정도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본당 성모회장으로 적격인 인물이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힘들고 굳은 일은 도맡아 하는 사람, 이웃의 필요성에 언제나 즉각적으로 응하는 사람이 마르타였습니다. 성격은? 착하고 성실했습니다. 그러나 때로 과격하기도 하고 쉽게 흥분도 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과 일행들 식사 준비에 바빠 죽겠는데, 동생 마리아를 아무리 찾아도 없었습니다. 나중에야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는 마리아를 발견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마르타는 주저없이 예수님께 따집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10,40)
마르타는 예수님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힘들 때면 힘들다고 솔직하게 그분께 털어놓을 수 있는 용기를 지녔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예수님과 절친했습니다. 친한 오빠처럼 예수님을 각별히 신뢰했습니다.
그럼 마리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동생을 향한 언니 마르타의 까칠하고 날선 발언을 통해 마리아의 성격을 대충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돌아가는 분위기 파악에 더딘 사람이었습니다. 살짝 ‘공주과’라고나 할까요?
산더미 같은 일감 앞에 언니가 쩔쩔 매고 있으면,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도와주는 것이 당연할텐데, 동생에게는 그런 ‘촉’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마리아는 종종 존재 자체로 마르타에게 스트레스를 안겨주곤 했습니다.
마리아가 그렇게 된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과의 운명적인 만남 이후 모든 것이 180도 바뀌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리셨습니다. 이제 그녀에게 있어 예수님은 삶의 유일한 의미가 되어버렸습니다.
마리아는 이제나 저제나 예수님을 목빠지게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시기만 하면 만사 제쳐놓고 쪼르르 예수님께로 달려갔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분을 바라봤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 라자로 기념일을 맞아 주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베타니아의 세 남매처럼 따뜻하고 호의적인 시선인지?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부모나 형제, 절친 같은 존재로 여기는지?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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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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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당신 ‘소원’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여러분, 오늘 조금은 도발적인 말씀으로 시작하겠습니다. 하느님은 여러분의 ‘소원 리스트’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으십니다. “신부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매일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는데요?” 라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이런 경험 없으십니까?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눌렀는데 음료수가 안 나오면, 우리는 자판기를 발로 툭툭 차며 “이거 고장 났네!”라고 소리칩니다.
솔직히 우리가 기도를 그렇게 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건강’ 버튼, ‘합격’ 버튼, ‘돈’ 버튼을 절박하게 누르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대체 제 기도를 듣고는 계신 건가요?”라며 하느님이라는 자판기를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왜 기도해도 바뀌는 게 없을까?’라는 탄식은 바로 이 오해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알라딘의 램프 속 지니가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을 믿고, 어떤 ‘싸움’을 시작하는지에 훨씬 더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세상에도 이런 원리를 보여주는 놀라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헬렌 켈러’와 그녀의 스승 ‘앤 설리번’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헬렌 켈러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삼중고의 어둠, 그야말로 ‘영혼의 무덤’ 속에 갇힌 아이였습니다. 가족조차 포기했던 이 아이에게 스승 앤 설리번이 찾아옵니다. 앤 설리번이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녀는 헬렌을 위해 “보게 해주세요, 듣게 해주세요”라는 소원을 대신 빌어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헬렌의 손을 잡고 펌프가로 데려가 차가운 물을 느끼게 하면서, 그 손바닥에 ‘w-a-t-e-r’라는 단어를 수없이 써 내려가는, 지독하고 고된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어둠 속에 갇힌 영혼이 세상과 연결될 수 있는 단 하나의 통로, 그 작은 돌멩이 하나를 함께 치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침내 헬렌이 펌프가에서 물의 실체와 단어를 온몸으로 깨닫는 순간, 그녀의 무덤 문이 열리고 기적이 시작되었습니다. 앤 설리번은 헬렌의 ‘소원’을 들어준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헬렌이 스스로 세상과 연결될 수 있도록, 가장 단단한 불신의 돌, ‘나는 불가능하다’라는 돌을 함께 치워준 것입니다. 하느님도 우리 소원을 아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 소원을 위해 움직일 의지가 있는지만 관심이 있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나는 라자로의 무덤 앞에 서십니다. 이미 모든 것이 끝난 절망의 현장입니다.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마르타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21) 이 고백은 훌륭해 보이지만, 사실 여기에는 교묘한 불신이 숨어있습니다.
‘과거에’ 계셨더라면 살리셨을 것이고, ‘미래에’ 부활하리라는 것은 믿지만, ‘지금 여기’ 이 절망의 현장에서 무언가 하실 수 있다는 것은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내가 바로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선포하신 뒤, 사람들을 향해 전능하신 명령을 내리십니다. “저 돌을 치워라.”(요한 11,39)
예수님은 손가락 하나로 돌을 날려버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절망하고 있는 우리에게 먼저 ‘행동’을 요구하십니다. 냄새나고, 힘들고,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그 일,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불신의 돌’을 우리 손으로 직접 치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지극히 현실적인 마르타가 가로막습니다.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이것이 바로 ‘이게 되겠어?’라고 말하는 우리 안의 목소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믿으라고 하시며, 사람들이 마침내 돌을 옮기자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하고 외치시어 죽음을 이기십니다. 기적은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신 사건만이 아닙니다. 진짜 기적은, 사람들이 절망 속에서도 ‘말씀에 순종하여 돌을 옮긴’ 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한 주, ‘소원’을 비는 기도를 잠시 멈추고 ‘싸움’을 거는 기도를 시작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의 소원보다는 ‘그래서 뭐를 했는데?’에 더 관심이 있으십니다. ‘이건 절대 안 될 거야’라고 단정 지었던 내 삶의 무덤을 딱 하나 정하십시오. 그리고 그 무덤의 돌멩이를 옮기는 아주 작은 행동 하나를, 주님께 대한 순종의 기도로 봉헌해보십시오. 용서할 수 없던 그 사람의 SNS에 ‘좋아요’ 한번 누르는 것이 바로 돌을 옮기는 것입니다. 엄두가 안 나던 자격증 시험의 원서 접수 버튼을 누르는 것이 돌을 옮기는 것입니다.
‘나는 기도할 자격도 없어’라는 생각과 싸우며 1분이라도 성경을 펼치는 것이 돌을 옮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돌멩이와 씨름을 시작할 때, 하느님은 여러분의 소원보다 훨씬 더 위대한 당신의 ‘관심’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바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당신의 권능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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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벗이자 제자였던 세 사람, 마르타와 마리아, 라자로를 함께 기억하며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머무르셨던 한 가정의 구성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고단한 길 위에 따뜻한 ‘숨구멍’이 되어 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 많은 이들의 요청을 받으셨지만,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라자로는 예수님을 위해 먼저 다가갔던 이들이었습니다. 마르타는 부지런히 음식을 장만하며 예수님의 피로를 돌보았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향유를 부어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라자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복음의 한 구절은, 그들과의 관계가 단지 사명의 관계를 넘어 깊은 우정과 사랑의 관계였음을 보여줍니다. 이들의 삶은 예수님의 복음 여정 속에서 숨통을 틔워준 ‘쉼터’였고,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몇 안 되는 ‘숨구멍’ 같은 존재였습니다. 신앙 여정에서도 우리에게는 그런 ‘숨구멍’ 같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저에게도 그런 분들이 계셨습니다. 언제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셨던 어머니, 제 성격을 이해하며 묵묵히 함께해 준 직원들, 성지순례나 행사 때 뒤에서 도와주시는 이름 없는 봉사자들, 그리고 낯선 타지에서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동료 사제들. 이분들은 제가 지쳐 있을 때마다, 때로는 외로울 때마다 조용히 곁에 있어 주신 분들입니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아도 그 사랑과 동행이 제 삶을 숨 쉴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위안부였던 이옥선 안나 어르신이 지난 5월 11일 하느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어르신은 9년 전 달라스를 방문하였습니다. 당시 어르신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어릴 때는 나라가 약해서 종군 위안부로 끌려갔답니다. 세월이 흘러서 내가 종군 위안부의 삶을 증언하기 위해서 이렇게 달라스를 방문한 것은 아직도 우리나라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는 5,000개가 넘는 대학이 있다고 합니다. 그중에 정의와 인권을 연구하는 단체가 있는 대학은 6개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달러스에 있다고 합니다. 저는 달라스에서 개최되는 이옥선 안나 어르신의 추모식에 함께 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기꺼이 참석했습니다. 추모식에 함께 한 분들은 대부분 미국 분이었습니다. 한국 분은 저를 포함해서 많지 않았습니다. 추모식은 불교에서 법사님이 예불드렸고, 제가 고인을 위해서 추모의 인사와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뒤로 9년 전에 어르신의 방문을 준비했던 인권위 관계자들의 인사말과 학생의 추모 시가 있었습니다. 진행을 맡았던 분의 이야기가 가슴에 남았습니다. “비록 할머니는 이제 더 이상 우리와 함께하시지 않지만, 할머니의 마음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합니다. 나는 할머니를 잊지 않고 계속 기억하겠습니다.” 저 역시 이옥선 안나 어르신께서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안식 누리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이옥선 안나 어르신의 삶도 그랬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자신의 고통을 기억하고, 증언하며 살았던 이 어르신도 우리 시대의 ‘숨구멍’이었습니다. 불의한 기억 속에서도 정의를 향한 끈을 놓지 않으셨고, 끝까지 사랑의 언어로 진실을 전하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그 사랑이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지만, 그분을 믿고 사랑하는 우리가 서로를 통해 하느님을 보게 됩니다. 마르타와 마리아, 라자로는 예수님의 벗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말없이 음식을 장만하고, 말없이 향유를 바르고, 말없이 죽음조차 받아들이는 그들의 존재는 곧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집은 ‘하느님 나라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숨구멍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 주는 존재, 힘들고 지친 이에게 쉴 자리를 내어주는 사람, 말없이 곁에 있어 주는 사람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마르타와 마리아, 라자로를 기억하면서 묻습니다. 나는 누구에게 ‘숨구멍’이 되어 주고 있는가? 혹시 내 가족, 내 이웃, 내 공동체가 나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을까?
우리의 신앙은 거대한 선언보다도 작고 따뜻한 동행 안에서 빛납니다. 오늘 하루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실히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누군가에게 ‘숨구멍’이 되어 주면 좋겠습니다. 그 작은 사랑 속에 하느님께서 머무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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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주님께서 사랑하는 이가 병을 앓고 있다고 알립니다(요한 11,3 참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은 다음에야 두 자매를 방문하십니다. 이에 마르타와 마리아는 주님께 일종의 원망을 쏟아 놓습니다. 사랑하는 사이에서 원망을 하기도 하지만, 이는 사랑하기 때문에 솔직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뜻대로 해 주시지 않았다고 해서 그분을 저버리지 않고 여전히 그분에 대한 믿음 안에 머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의인의 부활을 생각하는 마르타의 답변을 보면 ‘지금은 살아나지 못할 것’이라는 체념이 묻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하실 일에 확고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부활이요 생명이신 당신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시고, 그는 훌륭하게 고백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11,27)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시려고 “돌을 치워라.” 하셨을 때, 마르타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11,39)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을 보면 그의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뜻인지 잘 모른 채, 오직 그분의 말씀을 따르겠다는 의지에서 한 동의 차원의 믿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부족한 믿음에도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마르타는 오빠 라자로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분께서는 믿음의 크고 작음보다는 믿겠다는 마음을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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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1,19-27: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오늘은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축일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라자로의 집에 들르셔서 쉬고 계실 때에, 마르타는 부엌에서 열심히 음식 준비를 하고 있었고, 예수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던 마리아에게 자기 일 좀 거들어 주게 하라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를 보고,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1-42)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매우 활동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 때문에 마르타는 활동적인 그리스도인의 상징이고 동생 마리아는 관상생활의 모델로 공경을 받는다. 또한, 성녀 마르타는 요리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25절)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장면을 보고 그분이야말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임을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타는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21-22절)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서 예수님은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23절) 하시고 라자로를 살려 주시면서 “부활이요 생명이다.”(25절) 라는 말씀을 하셨다.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예수님이 마지막 날에 죽은 자를 살려주시는 분으로서가 아니라, 구원은 “지금 여기서”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구원은 바로 지금 내가 사는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구원이 단지, 내가 죽은 다음에,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다음 결정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구원은 이 세상에서부터 체험되고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지금 구원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죽은 다음에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원을 주시는 그분을 믿고, 따르면서, 즉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지금 여기서”부터 살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 하느님의 뜻 때문에 나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삶, 죽으려 노력하는 삶을 통해 우리는 부활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다. 이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기 전에 이미 고통의 신비를 체험하게 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혹은 이웃에게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낳아줄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탄의 신비, 십자가의 신비,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게 된다. 이때 우리도 “예, 주님,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27절)라고 고백할 수 있다. 우리가 체험하는 부활은 바로 구원의 체험이며 그럼으로써 부활 신앙을 올바로 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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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 계시니>
요한 11,19-27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그때에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당신 계시니>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21)
때와 곳
안에서
살아가면서
때와 곳
너머를
품습니다
때와 곳
안에
갇힌 나이지만
때와 곳
너머까지
계신 당신을
때와 곳
안에서도
모시고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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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긴 잠’과 같은 것입니다.>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19-27)
1)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이야기는, 예수님은 ‘인간의 생명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증언하는 이야기이고, 예수님의 부활을 예고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증언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힘이 없어서 당한 일이 아니라, 당신이 목숨을 내주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에 들어 있는 다음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이유와 목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요한 11,4)
“라자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이제 라자로에게 가자."(요한 11,14-15)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1,41-42)
<예수님께서 ‘마르타의 믿음에 응답’하려고 라자로를 살리신 것은 아닙니다. 라자로는 들러리가 아닙니다. 그 일은, 마르타를 위해서 일으키신 기적이 아니라, 군중이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 즉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기 위해서 일으키신 기적입니다. 물론 마르타도 그 군중에 포함됩니다.>
2) 앞의 6절에,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예수님께서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는 말이 있는데(요한 11,6), 예수님께서 라자로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신 것은 아닙니다.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가 전한 라자로의 소식을 예수님께서 들으셨을 때에 라자로는 이미 죽은 뒤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뒤의 39절에,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더 머무르신 시간이 이틀이기 때문에, 자매가 보낸 심부름꾼이 예수님께 오는 데에 하루 걸렸고, 예수님께서 자매에게 가시면서 또 하루가 걸린 것으로 계산이 되는데, 아마도 라자로는 자매가 예수님께 심부름꾼을 보낸 직후에 죽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를 사랑하시면서도(요한 11,5),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가시지 않고 이틀을 더 머무르신 것은, “예수님은 인간적인 애정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의해서만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3)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신앙인에게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새 생명을 얻어 누리는 새 인생으로 건너가는 과정일 뿐이다.” 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 ‘영원한 새 생명’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는 말씀은, “나는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주님이다.”라는 뜻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안 죽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믿는 사람들도 한 번은 죽겠지만, 묵시록에서 말하는 ‘두 번째 죽음’은(묵시 20,11-15)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에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게 된다면,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재림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1테살 4,17) 따라서 누구나 한 번은 죽어야 한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4) 죽었다가 살아난 라자로는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막연하게 전해집니다. 그래서 라자로가 다시 살아난 일은 ‘부활’이 아니라 수명이 조금 더 연장된 일이었을 뿐입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수명을 조금 더 늘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병에 걸렸을 때 주님께 ‘치유의 은총’을 청하는 것은, 조금 더 오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갈 힘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마르타의 희망도 단순히 라자로의 수명을 조금 더 늘리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라는 말은, 예수님만이 메시아로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고,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다고 믿는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 신앙고백은,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만큼이나(마태 16,16) 중요한 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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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께 대한 사랑 고백은 삶으로 해야한다>
사랑을 고백하려면 진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마음을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 마음은 있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그 진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되면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깊이 헤아려 볼 것입니다. 꼭 말을 해야 하느냐? 할 때는 해야 합니다. 이심전심을 확인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마르타는 마리아보다 더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일(루카10,40)에 있어서도 그랬고, 오늘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하고 말하는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마르타는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하며 오빠를 구지 낫게 해 달라고 청하지 않으면서도 주님의 특별한 개입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핏줄인 라자로를 살려내고자 하는 절박한 심정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생각했고 여전히 예수님께서 라자로가 죽기 전에 함께 계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부활이 현재 사건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 안에 있는 한 영원한 생명은 죽은 다음에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하고 있다면 오늘로부터 생명을 누리는 것이요, 지금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의 생명 없이 영원한 생명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마르타는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고백함으로써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의 표양을 보여 주었습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믿었습니다.’의 고백이 아니라 ‘믿습니다.’ 하는 현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나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좀 더 적극적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에 더디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입술에 익숙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으로 말해야합니다. 주님께서 나의 삶을 통해서 말씀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스스로 행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전한다고 하면 오히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다”(히브11,6)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사랑의 실천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 루치아노는 “나는 그리스도교 신자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명예이며 또 하느님께 받은 최대의 은혜입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신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만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고백은 말로나 혀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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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라자로와 마리아의 누이로 예수님을 극진히 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 당신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의 집을 방문하시는데(요한 12,2 참조),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잡히시던 날까지 그분을 모셨던 이가 바로 마르타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마르타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되살려 주시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시며 그들 집, 곧 베타니아로 가십니다. 그러자 마르타는 주님이 계셨더라면 라자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며 오빠를 살려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면서 마르타는 예수님이야말로 메시아이자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깊이 믿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믿음을 보시고 라자로에게 생명을 되돌려 주십니다. 이렇게 보니 마르타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봉사로 똘똘 뭉친 여인이 분명합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살릴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되돌려 주시는 것은 단순한 육신의 숨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되찾아 주시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창조 이전부터 우리에게 계획된 생명으로 이 땅에서 이미 우리 모두가 누리고 있는 생명이며 육신의 숨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계속 이어지는 그런 생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라자로에게 되돌려 주시고자 하는 생명은 육신의 숨이 아니라 바로 이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라자로가 되돌려 받은 육신의 생명은 다시 끊겼지만 그가 되돌려 받은 영원한 생명은 세상 종말이 오더라도 영원히 이어질 것입니다.
오늘 마르타는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많은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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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마르타는 동기간인 마리아, 라자로와 함께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어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지났을 때에야 도착하신 것입니다.(요한 11,17 참조)
마르타는 예수님을 맞으러 나가 아쉬운 마음을 표현합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토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마르타는 아직도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하였지요. 예수님께서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자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지만 바리사이들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마르타는 라자로가 살아날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을 바리사이들처럼 세상 마지막 날 부활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생명의 주관자, 죽은 이마저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심을 명확히 밝히십니다.
이제 마르타는 확고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그런 마르타의 신앙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죽은 라자로를 살려 내십니다.(요한 11,43-44 참조) 결국,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기적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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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요한 복음은 다른 복음보다 대화를 중요하게 보여 줍니다. 등장인물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일상적인 대화를 넘어 신앙의 견지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라자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슬픔에 잠기시어 그가 살고 있던 마을인 베타니아로 가십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마르타를 만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마르타의 믿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표현은 마르타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안타까움을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죽음을 맞지 않았을 것이라는 마르타의 생각은 예수님에 대한 신뢰와 함께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려 줍니다.
그러나 마르타의 믿음은 여전히 부활에 대한 믿음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녀는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지막 부활 때에 일어날 일로 받아들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것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설명을 들은 마르타는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마르타의 믿음은 이미 우리에게 대단해 보입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믿음이 한층 더 깊어지는, 예수님을 좀 더 알아 가는 마르타를 보여 줍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파견하신 당신의 아드님이시자 부활과 생명이신 분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과의 대화는 이렇게 우리를 더 깊고 굳은 믿음으로 이끌어 줍니다. 믿음은 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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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환대의 사랑, 환대의 집, 환대의 공동체>
-“베타니아의 집; 성녀 마르타, 성녀 마리아, 성 라자로”-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 34,4)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제 매일 강론은 일종의 기도입니다. 위기는 기회입니다. 국난의 시대입니다. 극한호우와 찜통더위로 모두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애국가 가사처럼 반만년 자랑스런 국난극복의 우리나라 역사입니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사대강국의 틈바구니에서, 남북분단의 대처상황에서, 계속되는 내란 종식 상황에서, 특히 미국의 무리하고 거친 관세 협상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나라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 있는 힘을 다해, 지혜를 다해 나라를 이끄는 이재명 대통령이 흡사 소년가장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흡사 임진왜란때의 소년가장처럼 나라를 구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충신 류성룡을, 병자호란때의 충신 최명길을 연상케 합니다. 아무쪼록 미국과의 관세 협상이 잘 타개되어 대한민국 공동체를 참 좋은 '베타니아 공동체 국가'로 잘 이끌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은 아마도 예수님이 자주 찾은 베타니아의 집일 것입니다. 베타니아의 집하면 저절로 떠오르는 환대의 사랑, 환대의 집, 환대의 공동체입니다.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삼남매가 살았던 집이 바로 베타니아의 집입니다. 이런 베타니아의 집을 그대로 닮은 여기 성 요셉수도원이요, 세상에는 이와 비슷한 무수한 환대의 집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만세칠창에 “베타니아의 집 만세!”하나 덧붙여 만세팔창을 했습니다.
제 집무실도 오늘 하나 덧붙여 “베타니아의 방”이라 칭하고 싶습니다.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삼남매는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여 환대한 환대의 사람들이었고 아마도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분들일 것입니다. 어찌보면 참으로 믿는 환대의 사람들에게는 삼남매의 특성이 정도의 차이일뿐 고스란히 지니고 있음을 봅니다. 밖으로는 활동의 마르타요 안으로는 관상의 마리아요 속으로는 병자인 라자로이기 때문입니다. 삼남매처럼 예수님을 환대해야할 운명애의 우리 신자들임을 깨닫습니다.
환대의 기쁨은 물론 냉대의 아픔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무시와 불친절의 냉대의 아픔을 겪은 분들이라면 친절한 환대를 꼭 실천하려는 결심도 새로이 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잊지 못할 어느 수녀원 방문시 극진한 사랑으로 환대 받았을 때 흡사 왕자로 격상된 느낌의 기억입니다. 그래서 정주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 반드시 따라 붙는 환대입니다. 정주영성은 환대영성과 그대로 직결됩니다. “찾아오는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할 것이다”, 바로 성 베네딕도 규칙에 명문화되어 있는 구절입니다. 환대하면 떠오르는 아주 오래 전 <해바라기꽃>입니다.
“해를 향해,
해를 닮아, 해를 담아
크고 둥근 환한 얼굴
해바라기꽃들
주변이 환하다
저절로 활짝 열리는 마음
환대는 해바라기꽃처럼 하는 것이다.”<2007.8. >
정말 환대의 사람은 낮에는 “해바라기-주바라기꽃”으로, 밤에는 “달맞이꽃-주맞이꽃”으로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바로 베타니아의 집, 삼남매의 얼굴이 해바라기를 닮은 주바라기꽃들처럼 보입니다. 오늘은 베타니아 집, 삼남매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의 기념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2020년까지는 성녀 마르타만 기념했지만 2021년 부터는 전임 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각별한 배려로 삼남매 기념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2021.1.26.일 교령을 반포했고 그중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주 예수님은 베타니아의 집에서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의 가족 정신과 우애를 경험하셨고, 이런 까닭에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다고 말한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너그러운 환대를 베풀었고, 마라아는 주님의 말씀을 온순히 경청했으며, 라자로는 죽음을 굴복시킨 분의 명령으로 무덤에서 즉시 나왔다.”.
오늘 제1독서 요한1서는 오늘 기념일에 걸맞게 사랑에 대한 금과옥조의 가르침을 줍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답게 무려 사랑이란 말마디가 18회 나옵니다.
여기 사랑은 그대로 집착없는 초연한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깨끗한 아가페 사랑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다음 대목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이런 사랑이 우리를 아름답게 합니다. 이래서 <사랑하면 예뻐진다>라는 말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사람들을 통해 자연을 통해 아름다움으로 표현됩니다. 예뻐지고 싶습니까? 화장할 것이, 성형수술할 것이 아니라 사랑과 사랑의 기도를 간곡히 권합니다. 성 베네딕도가 꿈꾼 사랑의 공동체도 그대로 요한을 닮았습니다.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하고,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서로 다투어 순종하고, 아무도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남에게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를 것이며, 형제적 사랑을 깨끗이 드러내고, 하느님을 두려워할 것이며,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지 말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규칙 72장>
바로 사랑의 공동체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분이 그리스도 주 예수님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우애는 신자들 행복의 열쇠이다”(Friendship with Christ is the key to Christian happiness), “신자의 집은 그리스도 반석위에 세워져야 한다”(A Christian’s house must be founded on rock, Christ), 바로 엊그제 레오 교황의 말씀입니다. 베타니아 사랑의 공동체 삼남매는 각자 나름대로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우애를 날로 깊이했음을 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우애의 사랑은 동료 형제자매들과의 우애의 사랑과 함께 갑니다.
“주님의 집에 사는 자 얼마나 행복되리!”
성가정 축일 미사때 흥겹게 불렀던 화답송 후렴이 생각납니다. 베타니아의 집에, 가톨릭교회 공동체에, 주님의 집에 속해 한가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1인가족 시대에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거칠고 험한 광야 인생에 오아시스와 같은 베타니아의 집을 영원한 모델로 삼는 여기 성 요셉 수도원입니다. 옛 현자의 지혜도 공동생활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타인이 나의 거울이 되듯, 나 또한 타인의 거울이 된다. ‘나는 얼마나 밁고 깨끗한 거울인가?”<다산>
우리는 서로 보고 배울 거울이 된다. 거울중의 거울이 둥글고 큰 거울이, 얼굴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거울이자 얼굴입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좋은 점은 배워 본받고, 좋지 않은 점은 나 자신을 바로잡는 거울로 삼는다.”<논어>
상호보완의 형제들 공동체요, 서로를 비춰주는 거울이 됨으로 서로 보고 배움으로 날로 깊어지는 우애와 더불어 상호감사의 마음들이 됩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단연코 성녀 마르타입니다. 얼마나 그리스도 예수님과 돈독한 우애의 관계인지, 우리는 마르타 덕분에 주님의 정체에 대한 놀라운 진리와 참 좋은 신앙고백을 배웁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고백은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평생 지니고 살아야 할 만고불변 진리의 문답입니다. 베타니아의 집의 삼남매의 주님과의 우애가 막상막하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형제자매들간의 우애와 환대의 기초가 되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우애와 환대입니다. 말그대로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주님과 우애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는 물론 형제자매들간의 우애를 날로 깊이해 줍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
주님을 경외하는 이에게는 아쉬움이 없으리라.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시편34,9-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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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가족으로 사랑하기>
아시다시피 오늘 축일이 옛날에는 성녀 마르타의 축일이었습니다. 이 말은 옛날에는 마르타의 동생과 오빠는 성인으로 공경받지 못했다는 말이고, 마르타만이 가족들을 대표하는 성녀가 되었다는 의미로도 읽힐 수 있을 겁니다.
이런 면에서 세 분을 성인으로 같이 기념하는 새로운 전례는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의미도 있고 과거에 제대로 조명하지 못한 것을 이제 제대로 조명하는 의미가 있을 텐데 제 생각에 이것이 더 중요한 의미입니다.
한 가족이 모두 주님의 사랑을 받았고, 한 가족이 모두 주님을 사랑한 것에 의미를 두는 것 말입니다.
비슷한 의미에서 저는 이순희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 동정 부부를 높이 삽니다 부부가 같이 하느님께 나아간 경우이니 말입니다.
사실 서로 사랑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것이고 그래서 대단히 훌륭하지만 같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신앙인에게 귀감이 되지요.
그렇지요. 서로 사랑하는 것이 훌륭하긴 하지만 그것으로 그친다면 그 사랑은 갇히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사랑에 갇히는 것이요, 이 세상에서의 사랑에 갇히는 것입니다.
사실 요즘 많은 사람이 자기 사랑에 갇히고, 기껏해야 가족 사랑에 갇혀 더 이상 사랑이 확장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사랑에서 하느님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한세상 서로 사랑하다가 같이 사랑을 끝내는 것으로 그치게 됩니다.
이것을 심하게 얘기하면 고양이를 사랑하며 한 생을 살다 가는 것처럼 슬픈 사랑입니다. 인간이 되어서 그래 고양이나 사랑하며 살다가 간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인생입니까?
마찬가지로 신앙인이 되어서 하느님 사랑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슬픈 신앙생활입니까?
이는 천국에 가려 하지 않고 기껏 이 세상에서 복되게 살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참으로 슬픈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자주 얘기합니다. 연인들의 풋사랑은 서로를 보지만 부부의 익은 사랑은 같이 한곳을 바라본다고.
그런데 부부의 사랑이 같이 한곳을 바라보긴 하지만 그 한곳이 하느님이 아니라 자식일 수도 있지요.
이번 행진자 중에 딸이 출산하여 첫 손주를 본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딸이 출산하러 가는 날 행진에 참여하신 겁니다.
어떻게 보면 출산하는 딸 옆에 있지 않은 비정한 엄마일 수도 있지만 내가 옆에 있을 테니 잘 갔다가 오라고 한 남편이 있어 자녀도 같이 사랑하고 주님도 같이 사랑하는 것을 동시에 실현한 성숙한 부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요.
아무튼 교회는 오늘 한 가족의 축일을 통해 한 가족의 거룩한 삶에서 자극도 받고 본도 받으라고 합니다.
우리 프란치스칸에겐 성녀 클라라의 가족이 이 거룩한 가족의 본보기이지요. 세 자매가 클라라의 수녀가 되었고 나중에 어머니까지 수녀가 되었으며 마침내 세 자매가 모두 성녀 또는 복녀가 된 거룩한 가족이니 말입니다.
한 가족이 거룩한 가족이 되는 것은 욕심을 내도 좋을 욕심일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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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1)
<불완전한 믿음에서 완전한 믿음으로!>
오늘 복음(요한11,19-27)은 '예수님과 마르타의 대화인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라자로가 죽어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난 때에,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집을 방문하십니다. 라자로에게는 마르타와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예수님과 마르타의 대화가 이렇게 이어집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압니다."(11,21-22)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11,23)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11,2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11,25-26)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11,27)
'불완전한 믿음에서 완전한 믿음으로!'
마르타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어 고백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믿음도 드러냅니다. 그러나 마르타의 믿음은 불완전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부활이요 생명 자체이신 하느님으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곧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부활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제와 영원한 부활을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이제와 영원한 부활을 믿는 것이 '완전한 믿음의 한 모습'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부활해야 하고, 지금 여기에서 생명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믿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선물)이 바로 영원한 부활이요 영원한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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