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76/어느 슬픈 조사]또삼촌小傳(1)
‘또삼촌’이 죽었다. 올해 우리 나이로 70. 수명이 급격히 늘어난 요즘에는 거의 ‘요절’이라고 할 것인가. 8년 전 위암이라는 판정에 경악했으나, 인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 위를 절제하고 살려고 모진 애를 썼다. 죽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말이다. 5년만에 완치 판정을 받으려고 간 병원에서 복막으로 전이가 되었다며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미치고 환장하고, 뛰다 죽을 일이었다. 다행히 임상 신약이 효과를 발휘해 포도시 2년을 넘겼다. 사실은 그것만도 기적이었다.
허나. 몸뚱아리 전체에 퍼진 병독은 준동을 멈추는 듯하다가도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오죽하면 제 다리를 고무다리라고 했을까. 사타구니에 매달린 게 퉁퉁퉁 부어 소 뭣같다고도 했다. 의지가 세도 보통 센 친구가 아니었는데, 만사휴의(萬事休矣). 그를 돌보는 아내와 외아들도 애를 쓰며 달라붙었다. 사진으로 맞이한 임종, 완전히 몇 백 년만에 지하에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미이라 모습이었다. 정말로 빼빼 말라도 너무 말라 피골이 상접된 채 눈을 감았다. 어쩌면 좌탈입망하는 선지식(善知識) 고승 그대로였다. 애고 통재라. 누가 뭐래도 누구라도 죽는다는 것은 슬프고 애달픈 일이다.
그나저나, 불쑥 첫 마디에 쓴 ‘또삼촌’은 또 무엇인가. 그가 근 40년 전에 만든 기상천외한 신조어이지만, 역사가 불혹(不惑)을 넘겼으니 신조어라 할 수도 없겠다. 또삼촌은 자기 아빠의 가장 친한 친구를 부르는 우리 두 아들이 그를 부르는 호칭이자 최고의 애칭이었다. 결혼을 하면 친구들끼리 왜 그러지 않던가. 자라나는 토깽이 같은 아이들에게 자기를 ‘큰아버지’라 부르라커니, 또는‘막내 삼촌’이라 부르라커니 호칭을 둘러싸고 찌그락짜그락하지 않았던가. 이 신조어 하나로 그런 문제가 일거에 해결됐다. 친삼촌도 외삼촌도 아니고, 당숙이나 아재(아저씨)도 아닌 존재이지만, 성장 과정에서 어쩌면 가장 많이 만나 어울리는 아버지의 절친. 요즘말로는 ‘찐친’ ‘베프(베스트 프렌드)’라고 한다던가.
나의 두 아들이 근 40년을 그를 그렇게 불렀다. 처음에는 진짜로 친척인 줄 알았다고도 했다. 10대 후반에야 아빠의 ‘둘도 없는’ 최고-최대의 친구인 줄 알았지만, 하도 자연스럽게 써 굳어진 너무나 익숙한 호칭. 또삼촌. 아무리 불러도 눈곱만큼도 싫지 않는 부름말. 당연히 아이들은 그의 ‘또조카’가 되고, 또삼촌과 사는 분은 ‘또숙모’가 아니겠는가. 나의 아들이 아들을 낳으니 ‘또손자’(또손)가 탄생한 것이고, 아이는 ‘또할아버지’(약칭 또할)라고 부르면 될 일이었다. 한때 ‘언어의 조탁사’(신문 편집기자)였던 나보다 생각이 훨 깊고 말 만드는 능력조차 나를 놀라게 하곤 했다.
지난 토요일 저녁, 11살 손자에게 “또할아버지가 돌아가셔 하래비가 너무 슬프다”고 했더니 저조차 무엇을 아는 듯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하여, 싯달타 석가모니의 생로병사를 한자로 한 자 한 자 써주며, 생로병사(生,老, 病, 死)의 비밀을 알려고 출가하여 고행을 한 후 부처(깨달음을 얻은 자)가 된 카필라국의 왕자님 이야기를 해줬더니, 짐짓 심각한 체 했다. 하하. “또삼촌이 갔다”고 전하는 나의 짧은 말에, 해외에 있는 두 아들은 영상통화를 하며 울먹거렸다. 그들의 성장기에 그가 차지한 비중이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아빠만큼 저희를 진심으로 사랑해주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터. 큰아들은 국내에 있었다면 회사에 휴가를 내고 그의 아들인 나의 또조카와 함께 상주노릇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은혜를 모르면 사람이 아닌 것을.
두 아들은 나도 생각지 못한 거액의 부조금(각각 1백만원)을 보냈다고 한다. 그게 무슨 소용이겠냐만, 나보다 더 큰 돈을 또삼촌의 노잣돈으로 보냈다니 할 말이 없다. 과하다 싶으면서도 나는 마냥 흐뭇했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안 나의 '운명공동체' 아내가 “여보, 우리가 애들을 잘 키운 것같다”고 했으니, 아내도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듯. 암 전이소식을 듣고 처음 가진 식사자리에서도 두 아들은 봉투를 내 호주머니에 슬그머니 찔러줬었다. 기특할 손! 그것은 순전히 또삼촌의 사랑에 대한 저들 나름의 보답에 다름아니었을 터.
대체 그는 또조카들을 얼마나 사랑했을까? 여자고등학교 일본어선생님이었던 그는, 방학만 되면 우리집을 제 집처럼 여기고 며칠씩 마음대로 묵으며 아이들과 눈높이를 같이해 놀아줬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이랴. 또한 또조카들은 저희끼리 친사촌과 진배없이 놀았다. 이제는 어느새 벌써 제각각 가정을 이룬 성인이 됐지만, 우리의 우정처럼 아이들도 의가 좋게 성장했다. 수시로 수영장에도 가고 배드민턴도 치고 계곡도 찾았다. 나도 아빠역할을 했다지만 아이들의 눈높이로 그렇게 놀아주는 또삼촌이 어디 흔하랴. 그래서 더욱 좋았을 것이다. 재밌는 이야기도 많이 해준 것은 덤이었다. 한번은 이천의 한 호텔 수영장을 갔는데, 거의 반나절을 물 속에서 노는 바람에 내가 다 기가 질렸다. 두 아들은 지금도 그때 또삼촌이 수영도 가르쳐주고, 물을 먹이고, 잡아 던지며 재밌게 놀았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아이들이 오래 기억해줄 게 틀림없지 않겠는가. 나는 제 아들이 유일한 나의 또조카이지만, 그런 점에선 또조카를 둘이나 둔 그는 '복 많은 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애초부터 그는 실없이 웃기는 소리도 잘 하고, 기발한 생각도 잘 했다. 어릴 적 운동선수답게 운동신경도 탁월했다. 당구, 골프, 탁구, 배드민턴, 하다못해 바둑과 고스톱까지 프로급이었다. 게다가 노래와 사회솜씨라니. 노래방에 가면 독무대였다. 꺾고 감아돌아가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런데도 아무에게나 저를 쉽게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의 진면목을 아는 이 거의 없다. 오직 나에게 집착하는 듯했다. 나는 그게 너무 싫고 부담을 많이 느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을 입버릇처럼 했건만. 사랑과 우정이 깊으면 깊을수록 외로움도 깊어지는 법이거늘.
이제 그와 나의 우정에 대해 말하자. 1973년 고등학교 1학년 같은 반에서 만났다. 친할 일이 별로 없는데, 어느 비오는 날, 전주 공설운동장에서 맨발로 혼자 공을 차던 그를 보고, 그가 몹시 외로운 놈이라고 여겨져 처음으로 말을 걸었던가. 그는 중학교때 축구 선수였다고 했다. 나이는 닭띠 동갑이나, 어릴 적 무척 총명해 별명이 ‘똘똘이’였다던가. 일곱 살에 들어갔다. 운동에 미쳐 명문고를 떨어진 바람에 나와 같은 해 입학, 같은 반이 되어 만난 건 피치 못할 운명이었을까. 첫 인상대로 그는 몸 전체가 우수(憂愁)덩어리였다. 왜냐하면 그의 가정은 영세민을 넘어 도시의 빈민층이었다. 그의 부친은 평생 경제적 능력이 전무했고, 인정 많고 음식 솜씨도 좋던 그의 모친은 6남배(4남 2녀)를 키우기 위해 영세민들이 할 수 있는 벼라별 궂은 일을 다 하셨다. 억척을 부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네 번째 아들로 형들과 달리 진짜 효자였다. 이건 내가 눈으로 본 명백한 사실이다. 그는 육군사관학교에 가 쿠데타라도 해, 제 이름처럼 새나라(新國)를 펼쳐야(張) 했어야 하는 게 좋았을텐데, 라는 생각을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머리가 좋은 집안인데, 무능한 가장 때문에 집안 불화가 도를 넘은 적이 많았다. 장남과 차남은 전북의 명문 중고등학교를 나왔다. 3남은 바둑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려 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프로가 되지 못한 아마추어 강자(장8단)이다. 집안의 희망일 수 있는 장남은 법학을 전공,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으나 10년도 넘게 낙방하는 바람에 모든 게 뒤틀리고 말았다. 이제 그 집안에 대해서 나만큼 아는 사람은 그의 피붙이 세 명말고는 아무도 없을 듯하다.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대형 슈퍼마켓 등에서 발행하는 버려지는 영수증을 쓰레기통 등에서 몇 천 장 모아 일일이 빈 종이에 붙였다. 총액이 100만원이 되어 갖다주면 현금 1만원을 되돌려준 적이 있었다(100분의 1). 그렇게 등록금을 마련하는데, 나도 같이 모아 붙였던 기억이 뚜렷하다. 아시는가? 들어보셨는가? 그런 경험도 같이 했거늘.
아무튼, 그로부터 ‘53년 우정’의 세월이 이어졌다. 반 세기가 넘은 53년이 어디 보통의 세월인가. 온갖 희로애락의 기억을 같이 해왔다 할 수 있다. 그도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파노라마처럼 나와의 53년이 영화필름처럼 빨리 돌아가는 체험을 했을까. 집안이나 성격은 나와 너무나 판이해 갈등도 많았고 여러 번 절교를 선언할 정도로 말다툼도 잦았다. 하지만 질풍노도까지는 아니어도 10대 후반 같이 나누었던 수많은 공통된 추억 때문에라도 시간이 좀 지나면 언제나 흐지부지되기 일쑤였다. 절교는커녕 불통이 한두 달을 넘긴 적은 없었다. 언제나 무슨 경우에도 마음을 같이 하자고 약속한 것을 지켜야 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였던 셈이다. 고등학교 3년, 다른 친구들은 짐작도 못하지만, 우리는 절친이었다.
물론 대학때부터는 다른 길을 걸었으나 우리는 늘 같이 했다. 우리는 고등학교 내내 서로 유일한 친구였다. 세상에, 다른 친구들을 사귈 틈이 없다는 게 연애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 되는가. 함석헌 선생이 말한 <그대는 그런 친구를 가졌는가>에 다름 아니었다. 가정환경으로 성장과정에서 가득 떠안았던 우수에 가득찬 그에게 나와의 우정은 삶의 비타민이었을 것이다. 나는 프로농사꾼 부모 덕분에 농촌이면서도 유복하다면 유복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랐다. 그는 형들이 불쌍한 엄마(딸 그만 낳으라고 이름조차 ‘구만’이라고 지었다고 했다)에게 걸핏하면 삿대질을 하는 불효에 울분을 터트렸다.
결혼을 앞두고도 그는 늘 우정을 애정보다 앞세웠다. 그것은 나와 판이하게 다른, 그만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솔직히 이제 와 말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어떻게 애정보다 우정이 먼저란 말인가. 말도 안되는 말하지 말라고 웨장을 쳐도 소용이 없었다. 그게 얼마나 나에게 부담을 주고 거북한지를 말해도 듣지 않았다. 그냥 아무 말이 없어도 나만 자기 곁에 있으면 만사가 오케이인 듯 행복해했다. 무조건적인 우정은 그만의 전매특허였다. 그러니 나의 아들들을 제 아들과 같이 똑같이 사랑할 수 있었을 게다. 우정에 대한 ‘오버 액션’이 어디 한두 가지였을까. 애정의 결핍에서 나온 버릇이었을까. 제발 그러지 말라해도 ‘제 맘에 나 있다’는 말같지 않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배우 박신양이 드라마에서 말하듯. 물론 나도 내 마음에 그가 있었다고 하겠지만 그렇다고 말할 자신도 없었고, 단 한번도 그런 말을 직접 그 앞에서 하지 않았다. 그가 죽은 지금에는 한번쯤 그 말을 못해 준 게 후회는 되지만, 그것은 이성 사이에나 연애할 때 하는 말이지 정상적인 우정관계에서는 할 말이 아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