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율법의 행위 그리고 정확한 인식 요한복음 3장에서 흔히 '거듭남'에 관한 말씀으로 알려진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는 믿음이냐 율법의 행위냐에 관한 논쟁이다. 니고데모는 전통 유대교를 대표한 입장에 서고, 예수는 '새로 태어남'이라는 그의 독특한 관점을 제시했다. 니고데모는, 우리 이스라엘은 새로운 것에 대한 실험 대상이 아니며 종래대로 율법을 고수함으로써 그리고 현 지도 체제를 고수함으로써 국가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으나, 예수는, 율법에 대한 전통적 시각은 많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하느님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함으로써 율법의 정신을 제대로 실현시켜야 한다고, 즉 새로 태어나는 마음으로 종전의 많은 제도들을 개혁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이 말씀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해석하고 있다. 특히 시계탑 종파는 비록 하느님을 믿게 되었더라도 다시 한번 특별한 깨달음이 있기 위해서는 성령의 임함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는 다른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임함이 없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그리고 새로 태어남으로써 하늘 왕국의 성원이 된다는 '듣보잡 교리'를 만든 것이다. 그래서 시계탑 교인들 중에는 어느날 저녁에 달을 쳐다보다가 문득 하늘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자기 자신이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그들의 의식인 표상물을 취함으로써 소위 '적은 무리' 반열에 속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영지주의적 발상이다. 예수의 말씀은 인식이 있어야 율법의 참된 정신을 실현할 수 있고 그로 말미암아 인간이 구원을 얻는다는 매우 타당한 말씀을 하신 것이지 신비스런 깨달음으로 하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영지주의적 태도를 취하신 것이 아니다. 그리고 시계탑을 포함한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믿음이란 가상의 세계를 인정하는 것을 믿음이란 말로 대치하였다. 즉 상상의 하느님과 상상의 천국 그리고 휴거나 하느님의 심판 등 현실과 유리된 교리들을 인정하는 것을 믿음이라 주장한다. 이는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정확한 인식은 우리가 실제로 경험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경험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식이 '감성 직관'에 대한 지성의 활동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자력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력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직접 경험과 연결되는 다른 현상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천국이 존재한다거나 1914년에 하늘 왕국이 세워졌다는 주장 등은 어떤 방식으로도 우리의 경험과 연결될 수 없다. 그래서 이런 가상적 교리들을 우리는 '감성'직관'에 대비되는 표현으로 '지적 직관'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 즉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우리의 생각 속에만 머무는 이미지에 해당되는 것들이다. 이러한 것들을 우리는 추측이나 상상이라 말하며 반드시 오류를 일으킨다. 왜냐하면 감성 직관이 결여된 추측과 상상은 무한판단에 속하기 때문이다. 무한한 것 중에 하나를 꺼집어 내어 그것을 참이라 주장한다면 그것이 참일 확률은 [1/무한대]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로또 복권을 100번 연속 당첨되는 확률보다 낮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상상이나 추측에 의한 것들이 되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감성직관을 가지고 있는 가능성, 현실성, 필연성으로 나타나는 것들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정확한 인식 또는 지식이라 할 수 있다. 즉 성서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정확한 지식과 인식을 가르키는 것이지 추측과 상상에 의한 황당한 가상 교리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이 만일 휴거나 공중 재림 또는 셋째 하늘과 같은 교리를 실제로 주장했다면 그의 믿음은 상당한 부분이 '지적 직관'에 의한 가상 교리였다고 판단된다. 우리는 추측이나 상상에 의해서 신을 인정하거나 가상 교리를 만들어 신자들에게 행동을 촉구해서는 안 된다 역사적으로 일어난 많은 종교적 폐단들은 그들이 세운 가상 교리를 현실로 착각함으로써 일어난 것들이다. 인신 공양과 같은 의식들이 대표적인 것이다. 신이 인간이나 동물을 제물로 받아야만 분노를 푼다는 생각이 왜 발생했겠는가? 바로 순전히 생각 속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성 직관'에 의한 것이 아니다. 지난 100년 이상 있어 왔던 시계탑에 의해 이루어졌던 희생들도 전부 가상적인 추측과 상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그 교리들이 감성인가 지성인가의 단순한 판단 기준만 지니고 있었더라도 그와 같은 희생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이 누구인가 그리고 인류의 구원이 무엇인가 등의 문제는 상상의 영역이 아니라 현실과 연계되어야 하는 것이며, 생명과 부활 역시 인간 활동의 결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성서는 인간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지 구체적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희망을 간직하되 우리의 활동으로 미래를 만들어 갈 때, 신의 초월력이 작용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초월력은 초능력이 아니다. 존재를 지향하는 자연의 근원적인 작용을 이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