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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많은 축구인들은 압도적인 전력을 선보이며 우승을 차지한 1970년 월드컵 때의 브라질 대표팀이야말로 '역대 최강의 팀'이었다고 주장한다. 펠레, 자이르징요, 토스탕, 히벨리노 등은 브라질의 드림팀 시대를 이끈 당대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들이었고, 자갈로 감독 역시 이들을 하나의 팀으로 융화시키며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낸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드림팀' 브라질이 출발부터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 역량 만큼은 충분히 인정받고 있었지만 독선적이고 괴팍한 성격으로 유명했던 살다냐 감독은 1970년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기행'에 가까운 행위를 일삼았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살다냐 감독은 스스로가 세대교체의 중심멤버들이라고 주장했던 토닝요, 스칼라 등의 수비수들을 갑작스레 대표팀에서 퇴출시키는 한편, "지난 두 번의 대회서 부상으로 비틀거렸던 펠레를 제외시켜야 한다", "브라질은 공격축구를 버리고 수비축구로 변신해야 한다" 라고 주장하며 비난의 도마 위에 올라야 했다. 메디치 대통령과의 불화설에도 휩싸여 있던 살다냐 감독은 결국 아르헨티나와의 평가전에서 당한 패배가 결정적 계기가 되어 해임통보를 받았고, 브라질은 대회 개막을 2개월 앞둔 시점에서 젊은 감독 마리오 자갈로에게 지휘봉을 맡기는 파격적인 행보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자갈로는 펠레를 중심으로 한 공격축구의 부활을 선언하며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갑작스런 감독 교체 및 어수선한 대표팀 분위기는 일말의 불안감을 조성하기도 했다. "펠레가 브라질의 흑인들을 대표하는 선수라면, 토스탕은 백인들을 대표하는 선수" 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유능하고 뛰어난 백인 선수였던 토스탕 - 호빙요(레알 마드리드)는 토스탕을 자신의 '롤 모델'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 의 부상 역시 70년 월드컵 제패를 노리는 브라질 팀의 악재 중 하나였다. 토스탕은 연습 도중 동료의 강한 슈팅에 눈을 맞아 각막을 다치는 부상을 입었고, 두 차례에 걸친 미국 휴스턴에서의 대수술 이후 가까스로 대표팀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4년 전 66년 월드컵에서 자존심을 구길대로 구긴 브라질의 의지는 대단했다. 당시의 브라질은 각 주(州)별로 텃세가 심했던 까닭에, 대표팀을 편성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지만 70년 월드컵을 앞둔 시점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브라질 사람들은 4년 전의 실패가 '영국인들과 FIFA의 음모'라고 생각했고, 남미의 개인기 축구가 유럽의 조직력 축구에 비해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해내기 위해 70년 월드컵을 크게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각 주들이 앞다투어 간판 선수들을 대표팀에 보내준 브라질 팀은 100% 풀전력을 구축, 대회 전부터 최강의 우승후보라는 평가를 받았다. 뚜껑을 열어보니 예상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펠레를 중심으로 한 브라질의 공격축구는 실로 대단했다. 70년 월드컵 브라질 팀에서 공격의 시발점 역할을 했던 선수는 넓은 시야와 오차 없는 패싱력을 겸비한 미드필더 제르손이었다. 제르손은 특유의 왼발 롱패스로 자이르징요나 토스탕에게 직접적인 연결을 시도하는 패턴과, 볼을 받기 위해 미드필드 지역까지 내려온 펠레에게 짧고 심플한 패스를 연결하는 두 가지 패턴을 통해 경기를 자유자재로 조율했다. 볼 소유권이 제르손에게서 펠레로 넘어갔을 때, '축구황제'가 보여주는 플레이는 입신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펠레는 미드필드 지역에서 수비수들을 자신 쪽으로 집중시킨 후, 빈공간으로 파고드는 토스탕, 히벨리노, 자이르징요에게 어김 없이 정밀한 패스를 연결했다. 또한 펠레는 때때로 직접 돌파를 시도하거나 슈팅으로 연결하는 등 다양한 패턴의 플레이를 통해 수비수들에게 혼란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마리오 자갈로 감독은 펠레의 완벽한 타이밍을 가리켜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 고 극찬했다. 전 대회 우승국 잉글랜드를 포함, 조별예선에서 3전 3승을 거둔 브라질이 8강전에서 만난 상대는 페루였다. 당시 페루 팀에는 페루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손꼽히는 테오필로 쿠비야스가 버티고 있었을 뿐 아니라, 펠레, 자갈로와 함께 58년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던 디디가 감독으로서 지휘봉을 잡고 있었다. 브라질과 페루의 8강전은 펠레와 쿠비야스, 자갈로와 디디의 자존심 대결로 화제를 모았고, 경기는 토스탕과 펠레가 맹활약한 브라질의 4-1 완승으로 마무리 됐다. 브라질은 이 날 경기에서 페루의 폭발적인 공격력을 완벽에 가까운 수비 조직력으로 틀어막으며 '드림팀'으로서의 위용을 한껏 과시해 보였다. 준결승전에서 우루과이를 3-1로 일축한 브라질 앞에 기다리고 있던 상대는 '카데나치오'를 앞세운 이탈리아였다. 서독과의 명승부 끝에 극적인 4-3 승리를 거두고 올라온 이탈리아는 유로 68 우승 이후 상승세에 올라 있는 강팀 중의 강팀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빗장수비조차 브라질의 공격축구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기대를 모았던 결승전은 당대 최고의 윙백이자 위대했던 캡틴 카를로스 알베르투의 통렬한 오른발 슈팅을 피날레로 브라질의 4-1 대승으로 마무리 된다. 1970년 월드컵 당시의 브라질 팀은 펠레라는 역대 최고의 스타를 보유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공격, 미드필드, 수비의 3박자가 완벽하게 갖추어졌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도 '드림팀'으로 묘사되고 있다. 4-2-4 전형을 바탕으로 카를로스 알베르투, 브리토, 피아짜, 에베라우도가 견고한 수비라인을 구축했고, 미드필드에서는 제르손과 클로도알두가 호흡을 맞췄다. 히벨리누, 토스탕, 펠레, 자이르징요로 구성된 공격진은 브라질 역대 최고라는 찬사를 받고 있을 정도로 그 위력이 대단했다. 이번 대회에서는 호나우딩요, 카카, 호나우두, 아드리아누가 대선배 4인방의 아성에 도전장을 던진다. 한편 '드림팀' 멤버들이 대표팀 1선에서 물러난 이후 오래도록 슬럼프를 겪어야 했던 브라질은 1982년에 이르러 '제 2의 드림팀' 시대를 맞이한다. 지코, 소크라테스, 팔카웅, 세레조, 에데르 등이 버티고 있던 82년 월드컵의 브라질 대표팀에겐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수 많은 축구인들 또한 "지코는 세계 최고의 선수이며, 소크라데스 역시 위대한 미드필더다. 의심의 여지 없이 12년 전의 영광을 재현해낼 것" 이라며 '제 2의 드림팀'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기도 했다. 두 번째 드림팀의 탄생은 이미 1년 전부터 예고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지코와 소크라테스의 브라질은 1981년 1월에 있었던 평가전에서 서독을 4-1로 대파한 것을 비롯, 잉글랜드에게 1-0, 프랑스에게 3-1, 서독에게 다시 2-1, 스페인에게 1-0, 서독에게 또 다시 1-0, 포르투갈에게 3-1, 아일랜드에게 7-0 승리를 거두며 세계 최강팀으로서의 행보를 거듭했고, 당시 브라질에게 3번이나 패배했던 서독은 유로 80 우승팀이었다. 잦은 부상 및 코우팅요 감독과의 불화로 인해 78년 월드컵에서 제대로 된 활약을 보여줄 수 없었던 지코 역시 1981년 남미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며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소련, 뉴질랜드, 스코틀랜드와 6조에 편성된 브라질은 조별예선 3경기에서 10득점을 폭발시키며 3전 3승으로 가볍게 2차 리그로 진출했지만, 이탈리아, 아르헨티나와 한 조에 편성되는 최악의 대진운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 언론들은 "이탈리아와 아르헨티나는 브라질의 벽을 넘어서지 못할 것" 이라며 브라질의 준결승 진출 전선에는 이상이 없을 것이란 예상을 내놓았다. 신예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를 가볍게 3-1로 일축한 브라질이 이탈리아에게 무너질 것이라 예상하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조별예선에서 3무로 조 2위를 차지하는 행운을 거머쥐었을 뿐 아니라, 자국에서 열린 유로 80에서도 기대 이하의 모습으로 일관했던 '한 수 아래의 팀'이었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파올로 로시의 해트트릭을 앞세워 '제 2의 드림팀' 브라질을 3-2로 격파했고, 이후 폴란드와 서독을 연파하며 무려 44년만에 우승을 차지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당시 브라질을 격파한 이탈리아에는 결코 파올로 로시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재치 있는 개인기와 활발한 움직임을 앞세워 브라질 미드필더들을 곤경으로 몰아넣은 브루노 콘티를 비롯, 우아한 미드필드의 조율사 지안카를로 안토뇨니, 부지런한 살림꾼 마르코 타르델리 등이 버티고 있던 이탈리아 팀의 중원은 지코, 소크라테스, 팔카웅, 세레조로 이어지는 마법사 4인방에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브라질은 내용 면에서도 이탈리아에게 패배를 당했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이탈리아 전 패배 후 "마치 교통사고를 당한 듯한 기분이다" 라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12년만의 월드컵 우승을 기대했던 브라질 국내에서도 참사가 일어났다. 2명이 자살로, 5명이 심장마비로 사망하는가 하면 일부 극렬팬들이 일으킨 난동으로 인해 공공기물이 파손되는 사건도 일어났다. 그러나 매우 흥미롭게도, 82년 월드컵에서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고 돌아온 '제 2의 드림팀'은 공항에서 브라질 국민들로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국민들이 원하던 화려한 공격축구를 앞세워 흥미 만점의 명승부를 연출해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는 24년만에 우승을 차지했음에도 불구, 수비축구로 인해 국민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던 94년 월드컵 대표팀과는 사뭇 대조적인 모습이다. 다가오는 2006년 월드컵을 앞두고 '제 3의 드림팀'으로 불리우는 현 브라질 대표팀의 향후 행보에도 많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수 많은 축구인들 또한 "브라질은 최근 3차례 월드컵에서 3번 모두 결승에 올랐지만 이번 대표팀 만큼 화려한 멤버구성을 자랑했던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며 호나우두, 아드리아누, 호나우딩요, 카카, 주닝요 등이 버티는 브라질 팀의 위용에 높은 점수를 매겼다. 각종 도박사들이 일제히 점치고 있는 최강의 우승후보 역시 브라질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지금의 브라질 대표팀이 70년 월드컵 당시의 드림팀 만큼 압도적인 최강팀은 아니며, 82년 월드컵 때처럼 수비문제로 인해 토너먼트에서 '낙마'할 수도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요한 크라이프는 "브라질은 볼을 소유하고 있을 때 누구보다도 뛰어나지만, 볼 소유권을 잃어버렸을 때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 며 브라질의 문제를 지적했고, 로타 마테우스 역시 "이번 브라질 팀은 수비에 문제가 있다. 우승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며 기자들의 질문에 차가운 반응을 보였다. 과연 '제 3의 드림팀'이 펠레의 위업을 재현하게 될지, 아니면 지코의 전철을 되밟게 될지 한 번 두고 볼 일이다. |
첫댓글 방금 1970년 결승을 보고 문득 생각나서 올리는 글입니다...당시 브라질 대표팀은 그야말로 천하무적 이었죠...공격은 그 누구도 막을수 없는 폭발력을 지니고 있었고 수비 역시 최고였습니다...당시 축구 스타일을 뛰어넘는 압박과 양 윙백들의 활발한 오버래핑...플레이메이커 게르손의 환상적인 킬 패스...히벨리노의 저돌적인 돌파와 대포알 왼발....자일징요의 그림같은 돌파에 이은 크로스,득점....공격의 마무리..촌철살인의 토스탕...당대 최고의 윙백인 카를로스 알베르투의 줄기찬 오버래핑...그리고 마지막에 항상 마침표를 찍어주는 축구황제 펠레...
결승에서 이탈리아는 강했습니다...그러나 브라질은 그런 이탈리아를 조롱할 정도로 너무나도 강했죠...경기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탈리아가 할수 있는거라곤 거친 반칙과 브라질의 공격을 간신히 막아내 역습 하는것 뿐이었습니다...당시는 왠만한 격투성 파울로는 경고조차 안나왔으니까요...그러니 이탈리아는 살인적인 태클로 경기를 맞섰던거고...방법이 없으니...
요즘 브라질 대표팀을 보고 있으면 70년 브라질 대표가 얼마나 압도적이었나 새삼 실감합니다...스코어뿐만 아니라 경기력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