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청 문건 상당수 위조”라던 김태효 “美측이 유감 표명”
“진위 성급한 결론으로 혼선” 지적
金 “정상회담 의제 계획 없다” 선그어
“한미 정보동맹에 日 포함 검토”
미국을 방문한 뒤 15일 귀국한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미국 정보기관의 동맹국 감청 의혹과 관련해 미국 측이 유감을 표명했다고 밝혔다. 김 실장은 미국 출국 전만 해도 “감청 의혹이 제기된 유출 자료 상당수가 위조라는 데 한미가 일치했다”고 밝힌 바 있는데 미국은 감청 의혹 일부를 인정하며 유감을 표시한 것. 대통령실이 유출 자료의 진위에 대해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 결과적으로 말이 바뀌는 혼선을 일으켰다는 지적도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 일정을 조율하기 위해 3박 5일 일정으로 미국을 방문한 김 차장은 이날 인천공항으로 귀국한 뒤 기자들과 만나 “(미 측이 감청 의혹에 대한) 심각한 인식을 공유하며 저를 만날 때마다 유감을 표명하고 앞으로 긴밀한 공조를 하겠다고 약속했다”면서 “‘앞으로 어떤 경우에도 양국은 신뢰와 믿음이 흔들리지 말자. 더 굳건히 하는 계기로 삼자’는 부분에 대해 인식이 확고하게 일치했다”고 말했다. 김 차장은 방미 전인 11일만 해도 “누군가 위조를 한 거니까(미국에 입장을 전달) 할 게 없다. 미국이 어떤 악의를 갖고 한 정황은 없다”고 했으나 말이 달라진 것.
김 차장은 이 사안이 정상회담 의제로 다뤄질지에 대해선 “그럴 계획은 없다”며 양국이 함께 이것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신뢰 관계를 갖고 더욱 내실 있고 성과 있는 정상회담을 만드는 데 의기투합이 돼 있는 상태”라고 강조했다.
베트남을 방문 중인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15일(현지 시간) “우리는 이번 유출 사건이 발생한 후 동맹 및 파트너들과 고위급 차원에서 접촉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동맹 및 파트너와의 협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떤 것도 듣지 못했다”고 밝혔다.
김 차장은 또 향후 한미 ‘정보 동맹’에 일본이 포함될 수 있음을 시사하기도 했다. 김 차장은 “‘파이브아이스’라는 영어권 국가의 정보 동맹이 있고 우리는 사이버 정보 공유를 하고 있는 한미 정보 동맹이 있기 때문에 이를 더 굳건히 하고 있다”면서 “한미 정보 동맹에 어떤 파트너들을 추가로 초대할 것이냐는 논의도 앞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미 정보 동맹에 일본도 포함될 가능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가능성도 큰데, 그것은 단계적으로 사안에 따라 검토될 수 있다고 본다”고 답했다. 일본을 ‘협력’ 대상이 아니라 ‘동맹’ 대상으로 거론한 것. 한국과 일본 사이에 동맹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민감한 사안이란 점에서 논란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신규진 기자
한미동맹 ‘복원’ 중요하지만 ‘과신’은 위험
美 감청 의혹에 “상당수 위조” 운운했다가
‘자기 과시’ 21세 병사 체포로 머쓱해진 용산
尹정부, 너무 미국 의식하며 조심조심하는 듯
단호할 땐 단호해야 한미동맹 더 견고해질 것
어느 전직 외교 수장과 미국 정보기관의 감청 의혹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재미있는 영어 표현을 들었다. ‘클라이언타이티스(clientitis)’라는, 필자에겐 생소한 단어였다. 외교 당국자나 현지 주재원 등이 본분을 망각하고 클라이언트, 즉 ‘고객’인 상대국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방어하는 경향을 보일 때 쓰는 말이라고 한다. 협상 상대국 과신(過信), 의존국 과신 증후군 등으로 번역될 수 있겠다.
미 기밀문서 유출 사건으로 용산에 대한 감청 의혹이 불거졌을 때 우리 대통령실이 보인 대응 방식이 딱 그랬던 것 아니었나 싶다. 정작 미국은 ‘진본’이 유출됐다는 점을 인식하고 유감을 표시하며 색출 작업에 나섰는데, 무슨 연유인지 우리 대통령실은 “상당수 위조됐다는 데 한미 평가가 일치한다” “악의적 도청 정황은 없다” 등 실드 치는 데만 급급한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기밀 유출의 용의자는 21세 하급 병사로 밝혀졌다. 빨간 반바지 차림으로 잔뜩 겁을 먹은 채 장갑차와 소총 등으로 중무장한 FBI 요원들에게 체포되는 모습을 보니 허탈함마저 들었다. 정부 정책에 분노한 내부 고발자도 아니고, 러시아 등 제3국의 개입도 아니고, 고작 자기 과시욕이 강한 일개 병사의 ‘철부지 일탈’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런 코미디 같은 사건이 세계 최강대국이라는 나라에서 벌어진 것도 황당하지만,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우리 정부의 ‘조심조심’ 대응 방식이다. 용산에 대한 감청이 실제 이뤄졌는지,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지 등에 대한 테크니컬한 측면의 진상 규명도 중요하지만 더 본질적인 문제는 이번 사건을 다루는 현 정부의 위기관리 역량, 동맹의 가치에 대한 현 정부의 인식일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동아일보 창간 여론조사에서 ‘미국에 대한 한국인의 호감도’가 84%에 달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주한미군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87%, ‘한미 연합훈련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88.8%에 달했다. “반미면 어때” 했던 말이 먹히던 시절이 불과 20년 전 일이니 상전벽해가 아닐 수 없다.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 지난 정부의 친중 노선에 대한 반작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그 바탕엔 높아진 국가 위상에 대한 자존감이 깔려 있다고 본다.
이번 사건에서 친미-반미의 진영에 얽매이지 않은 보통의 국민은 국가 안보와 관련된 깊은 논의가 오가는 우리나라 최고의 권부(權府)가 진짜 뚫렸는지, 방어 태세에 허점은 없는지, 중국이나 러시아 등에도 뚫리고 있는 건 아닌지 등을 걱정했다. “용산 이전 때문”이라는 식의 정치 공세와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우려다. 정보전의 세계, 다른 나라도 우리나라도 다 하는 활동임을 모르지 않는다. 다만 문제가 드러난 이상 응분의 해명과 조치를 요구하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도 정상회담 불똥만 의식한 듯 “사과 요구 않겠다” 등의 반응만 나오니 의아했던 것이다.
한미 동맹 70주년을 기해 훼손됐던 동맹 복원의 기틀을 잡고 또 다른 미래를 열어가는 것은 중차대한 과제다. 그러나 지나친 동맹 의존이나 동맹 과신의 심리나 태도는 독(毒)이 될 수도 있는 만큼 경계해야 한다. 70년 전 “강대국은 믿어선 안 된다”고 했던 이는 다름 아닌 이승만 전 대통령이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이듬해인 1954년 미국을 방문한 그는 환영 행사에서 휴전에 대해 “미국이 겁을 먹어서”라고 일갈한 데 이어 의회 연설에서도 “나약하다는 것은 노예가 된다는 걸 의미한다” 등 미국을 대놓고 질타했다. 당시 국제 정세에 맞는 발언인지 여부를 떠나 적어도 결기는 있었다.
바야흐로 천하 양분의 시대라고 한다. 미국도 중국도 전 세계를 상대로 줄 세우기 압박에 나서고 있다. 고난도 외교일수록 당당함이 깔려 있어야 한다. 이번 건만 해도 미국 당국자들이 먼저 굉장히 곤혹스러워하고 미안해해서 “고맙다”고 했다는 식으로 넘어갈 문제는 아니라는 얘기다. ‘밥 먹을 때 매너’와 ‘공식 석상의 매너’는 달라야 한다. 한미 동맹의 본질적 가치, 상호 신뢰에 대한 문제 제기를 단호히 하는 모습을 보일 때 동맹도 더 견고해진다. 곧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다. 국빈이란 형식이 아니라 국익을 깐깐히, 또 담대하게 챙기는 모습을 보일 때 흔들리는 지지율도 반등할 수 있다. 그래서 궁금하다. 대체 어느 단계에서 “상당수 위조” “한미 견해 일치” 등의 정부 메시지를 정했던 건지…. 흐지부지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정용관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