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언어학자 겸 철학자 겸 작가인 움베르토 에코가 1980년에 펴낸 소설 '장미의 이름'을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편 제2편을 누구도 읽지 못하게 하려고 늙은 수도사가 책장에 독을 묻혀 호기심 많은 수도사 셋을 독살하는 내용이 기둥 줄거리로 나온다.
그런데 프랑스국립도서관이 19세기 영국에서 인쇄된 네 권의 책 커버에 치명적인 독성을 지닌 비소(砒素, Arsenic)가 묻혀 있을 우려 때문에 서가에서 치워졌다고 영국 BBC가 25일(현지시간) 보도해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네 권 모두 선녹색(Emerald Green) 커버로 제책됐는데 당시 책에 색을 입히는 데 비소 성분이 흔하게 쓰였다는 것이다.
처음 이런 위험을 감지해 경고한 것은 델라웨어 대학 연구진들이었다. 프랑스국립도서관 대변인은 이 책이 경미한 피해만 끼칠 것으로 예상한다면서도 "일단 격리된 장소에 이들 책을 보관한 뒤 외부 도서관의 협조를 얻어 책마다 얼마만큼의 비소가 남아 있는지 분석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가에서 치워진 네 권의 책은 왕립원예협회의 1862-1863년 연감, 에드워드 헤이즈의 '아일랜드 발라드' 두 권(1855년), 루마니아 시인 헨리 스탠리의 두 언어 연대기(1856년)이다.
델라웨어 대학 연구진은 델라웨어 윈터서 미술관과 협력해 'Poison Book Project'를 진행해 이들 책을 간추렸다. 2019년부터 중금속으로 제책한 수백권의 책 커버들을 테스트했다. 이 도서관의 장서는 1600만권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빅토리아 시대 출판업자들은 제책에 색을 입히기 위해 비소를 사용했다. 패리스 녹색( Paris Green) 안료 혹은 선녹색 안료, 독일 출신 화학자 카를 셸레의 이름을 따 셸레 녹색(Sheele's Green) 안료 등으로 불렸다.
Poison Book Project는 독 성분을 지닌 책들을 다루는 이들의 건강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 소장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도서관 측은 나아가 "Poison Book Project의 조사 대상에 들어있지 않았던" 책들까지 조사를 진척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식수나 음식에 함유된 비소 성분에 장시간 노출되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다. 해당 성분이 "유기적이지 않은 형태로 있으면 독성이 강해진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이런 품목을 다룰 때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
지난 2022년 영국 리즈의 도서관 사서들이 희귀한 독 성분이 발라진 책 한 권을 발견한 일이 있다. 1855년 발간된 'My Own Garden: The Young Gardener's Yearbook'이었는데 선명한 녹색 커버 양장본이었다. 조금 더 최근에는 독일에서도 비소 성분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는 이유로 예방 조치로 도서관 사서에서 책들이 제거된 일이 있었다고 방송은 전했다.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청의 종교적 갈등, 가톨릭 교단의 청빈 논쟁, 진리와 지식을 독점하려는 이들과 이를 돌파해 진리와 지식을 얻으려는 이들의 학문적 갈등을 얼기설기 엮은 '장미의 이름' 설정이 책장에 독 성분을 남겨 책을 읽고 싶어하는 수도사들을 살해한다는 것이었는데 19세기에 제책된 책들이 비슷한 이유로 21세기 도서관 서가에서 치워진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이 소설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희곡은 상관없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희곡이라서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편 제2편은 '코미디에 대해' 쓴 글로 알려져 있다. 웃음의 힘을 긍정 평가하는 내용이어서 신앙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앞을 못 보는 호르헤 수도사는 굳게 믿었다는 것이었다. 원작의 마지막에 나오는 도시민들의 반역은 중세 사회가 막장에 이르렀으며 서서히 몰락하는 중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원작에 불 타 없어진 것처럼 실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편 제2편은 전해지지 않는다. 어쩌면, 작중의 호르헤 수사 같은 인물이 소멸시킨 것이 아닐까.
원작 마지막에 윌리엄 수도사 밑에서 많은 것을 보고 익힌 나드소 수도사는 '문서실이 너무 추워 손이 곱는다. 나는 이제 이 원고를 남기지만, 누구를 위해서 남기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무엇을 쓰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장 자크 아노 감독이 숀 코너리와 크리스천 슬레이터를 기용해 만든 영화는 1986년 미국, 1989년 국내에서 개봉했다. 영화 '타이타닉'과 '아바타'의 음악을 맡은 제임스 호너가 만든 OST는 상당히 좋은 평가를 얻었다. 그 중 역시 13세기 수도원의 엄숙하면서도 은밀한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 그레고리오 성가만한 것이 없었으리라. 세 곡이 등장한다. 유튜브의 해당 동영상에 달린 댓글을 보니 이들 세 곡의 레퍼런스를 알려달라는 글이 여럿 눈에 띄는데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음악평론가 진회숙은 "영화에 영혼은 사라지고 공허한 형식만 남은 그레고리오 성가의 처지를 상징하는 장면이 나온다"며 "수사들과 마을 처녀의 화형이 집행될 때, 형장에 무리 지어 있는 수사들이 그레고리오 성가를 부르는 장면이다. 여기서 수사들은 아무런 감정도 느낌도 없는 목소리로 성가를 부른다. 그 무미건조한 울림에서 우리는 중세 교회에 드리워진 절망의 그림자"를 읽는다"고 지적했다.
The Name of the Rose Full Soundtrack (youtub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