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병든 이들을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왔다.”(마르 6,55)
2월 10일 월요일 (백)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렇게 되었다.>
▥ 창세기의 시작입니다.1,1-19
1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2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3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4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5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
6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물 한가운데에 궁창이 생겨, 물과 물 사이를 갈라놓아라.”
7 하느님께서 이렇게 궁창을 만들어
궁창 아래에 있는 물과 궁창 위에 있는 물을 가르시자, 그대로 되었다.
8 하느님께서는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튿날이 지났다.
9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한곳으로 모여, 뭍이 드러나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0 하느님께서는 뭍을 땅이라,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1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땅 위에 돋게 하여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2 땅은 푸른 싹을 돋아나게 하였다.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였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사흗날이 지났다.
14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의 궁창에 빛물체들이 생겨,
낮과 밤을 가르고, 표징과 절기, 날과 해를 나타내어라.
15 그리고 하늘의 궁창에서 땅을 비추는 빛물체들이 되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6 하느님께서는 큰 빛물체 두 개를 만드시어,
그 가운데에서 큰 빛물체는 낮을 다스리고
작은 빛물체는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그리고 별들도 만드셨다.
17 하느님께서 이것들을 하늘 궁창에 두시어 땅을 비추게 하시고,
18 낮과 밤을 다스리며 빛과 어둠을 가르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9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나흗날이 지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53-56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53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54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55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56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의 말씀나눔
나를 떠나 주님께 데려가는 사랑 ♣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배에서 내리시는 예수님을 ‘곧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6,54). 사람들은 온전한 창조질서와 하느님의 선과 온갖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어둠으로부터의 해방을 그토록 갈망하였던 것이다.
더러운 영과 질병, 온갖 고통은 바로 하느님의 선을 거스름으로써 초래된 인간의 왜곡된 실상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고통과 무질서, 반생명적인 가치들을 양산(量産)하면서도 역설적이게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와 해방과 온전한 선을 갈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알아보고 찾아오는 병자들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모두’ 고쳐주신다.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6,56). 여기서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들의 태도에 집중하여 우리가 살아야 길을 짚어보자. 어떻게 병든 이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로 주목할 점은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의 눈길이 다른 이들의 아픔에로 향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자신에 대한 애착과 이기적인 중심성에서 벗어나야 다른 이들이 눈에 들어오고 그들의 아픔에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기 이탈’이야말로 영성생활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첫 단계임을 새겨야 하리라! 자신을 벗어나는 그만큼 다른 이들이 보이고 그때부터 참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다음으로 사람들은 병든 이들의 아픔에 눈길을 고정시킨 것이 아니라 그것을 치유시켜주실 분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보았다. 그들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알았을 것이고, 그분에 대한 소문을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본적이 없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임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이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과 그분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인이 아니라 도구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고 예수님이 진정한 자유와 해방의 힘을 지니신 분이심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수동과 경청의 영성’인 듯하다. 무엇이든 먼저 내가 나서서 내 힘으로 해결해보려 하고, 듣기보다는 말하려고 한다. 내 뜻과 내 힘을 앞세우는 것이다. 이런 삶은 주객이 뒤바뀐 것으로 영성생활이 아니라 우상숭배라 아니 할 수 없다.
끝으로 사람들은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6,54) 나아가‘그들은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시기만 하면,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주십사고 청하였다.’(6,56) 그들은 병든 이들을 직접 예수님께 데리고 갔다.
우리는 몸과 마음의 아픔과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하느님의 선과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도록 그들을 예수님께 데려가야 한다. 나아가 이 사회의 반생명적 문화와 창조질서의 파괴, 진실의 왜곡, 사회적 갈등과 부패, 경제 정의의 상실, 인간존엄성에 대한 무감각 등을 그리스도께로, 그분의 복음의 질서 안으로 데리고 가야 한다. 하느님의 창조질서와 자비와 선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그리스도를 갈망하고 있으며, 깨어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가? 말씀과 성체 안에서, 형제자매들을 통해서, 일상사를 통해서 살아계시는 주님 앞에 얼마나 깨어 있는가?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와 사랑을 회복하도록 부르는 목소리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투신하고 있는가? 이제부터라도 모든 것 안에서 그리스도를 찾으려 힘쓰고, 또 그분께 ‘너와 나의 질병’, ‘이 사회의 질병’을 데리고 가는 사랑의 소명에 더 헌신적으로 응답하자.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