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늘을 까며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가깝게 지내온 사람들과 나누었던 지나간 일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명쾌한 기억보다는 그날의 시간과 장소로 돌아가 말과 말 사이, 이렇게 말 했어야 했는데, 또는 저렇게 행동했어야 했다며, 상황마다 딱 들어맞는 말 한마디를 못 해준 것에 인상이 써진다. 뇌의 어느 구석에서 이렇듯 기억의 파편들이 끄집어내어져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인지,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어 있듯 머리를 흔들며 헛마음을 흐트러지게 한다.
사람 되는 과정이 쉽지 않다. 든 사람, 난 사람은 못 되어도 적으나마 된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이도 저도 아니다. 못난 생각들을 떨치려 젖은 손을 닦고 폰에 저장된 음악을 찾는다.
교향곡부터 오페라, 대중가요 등 많은 장르 중에 요즘은 가야금이나 해금으로 바흐와 차이콥스키, 모차르트 곡을 연주하거나, 바이올린이나
첼로로 트로트를 켜는 퓨전에 매료된다,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더 묵은 「황성옛터」 또는 「희망가」를 첼로로 듣는다. 신선하다.
베토벤의 3번, 6번, 7번, 9번 교향곡,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쇼 스타코비치의 왈츠, 슈만의 트로이메라이」 등등, 원곡에 귀 기울이며 즐겼지만 오십이 넘어서부터는 점점 멀어져 갔다.
가야금 줄에 실린 바흐의 곡이 끝나고 다시 노래를 검색한다. 몇 년 전부터 장기하라는 가수를 즐겨 듣는다. 말하듯이 일상을 읊조리는 가사와 단순한 리듬이 독특하다. 그중 '부럽지가 않어', '가만있으면 되는데 자꾸만 뭘 그렇게 할라 그래' 그리고 '그건 니 생각이고', '얼마나 가겠어' 등.
장기하에게서는 어느 가수보다 발음에 신경 쓰며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재밌는 발상의 노래맛들이 미소 짓게 한다.
남다른 창법에 신곡을 발표할 때마다 관심이 간다.
이제 물에 불려진 50통 마늘이 열통 정도 남았다. 수북하게 쌓인 껍질을 보니 왠지 지금까지의 내 삶과 닮아 있는 것 같다. 뽀얀 속살의 마늘을 백일이 아닌 수십 년을 먹어도 나잇값은 여전히 어렵다. 나이는 노력 하지 않아도 누구나 먹는다. 어느 가수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며 그럴 듯하게 낡아가는 인생을 포장했다. 과연 잘 익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낯간지럽다. 부처의 사리 한 조각에도 못 미치는 중생이
중생다운 노랫말로 달달한 위안을 주려 한다.
칼을 쥔 손에 쥐가 난다. 다시 젖은 손을 닦고 잠시 손가락을 주무른다. 듣고 있던 노래를 멈추고 폰에 옮겨놓았던 글을 찾는다. 그중에 숙종 때 학자인 홍만종洪萬宗이
<순오지旬五志> 에서 자신의 사람 됨됨이의 폐단을 적어놓은 것을 다시 읽어본다.
뜻은 크나 재주가 엉성하고, 말은 고상하나 지식이 얕고, 민첩하기를 좋아하나 몸가짐이 둔하고, 방종을 좋아하나 작은 예절에 얽매이고, 군자인 체 소인을 곧잘 책망하는 것, 이러한 데 자신에게도 쓸 만한 성품이 있음을 깨우쳤을 때는 이미 늙어 있었다며, 남을 따라 지조를 바꾸지 않고, 밉다 하여 그 사람을 모함하지 말라.
그 시대에 중국에까지 박식함과 지혜로움을 널린 알린 훌륭한 학자인데, 자신을 꿰뚫어 책을 엮어 이 문장이 내게까지 와닿고 있으니 머리가 절로 수그러진다.
나의 폐단을 짧게 적어보라 하면 무엇이 먼저일까.
반항해야 할 때는 반항하지 못하고 모두가 반항할 때 덩달아 반항 했으며, 부당한 것에 대해 때로는 꼬치꼬치 따지기는 해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지 못할 때가 많다. 별일 아닌 것에 몇 날을 바보처럼 끙끙 않으며, 게으르며 할 일이 있어도 내일 또 내일로 미루기를 반복한다. 빠져 죽지 않을 만큼만 물에 뛰어들고 화상 입지 않을 만큼만 불 앞에 선다. 불의를 보고 뛰어들 만큼 결코 강한 심장도 아니다. 곰에서 사람으로 변신한 웅녀는 늙어가는 여우가 되어갈 뿐. 내 안에서 화근내만 진동한다.
사람이 도道를 넓히는 것이지 도道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마늘을 다듬는 데 두 시간이 넘었다.
이 뽀얀 마늘을 다 먹고 나면 여우에서 초심의 곰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영희
한국산문문학상 수상
수필집 『자궁아, 미안해
어렵게 몸무게를 5kg 줄였다. 하지만 음식과 칼로리, 사이즈와 무게 중에 가장 약한 부분이 언제 치고 들어올지 걱정을 떨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