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1908년 일제(日帝)가 조선 및 대만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하고 경제권 이득 착취를 위해 설립된 국책회사.
과거 인도 제국을 식민지화했던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모방하여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줄여서 '동양척식회사' 또는 '동척(東拓)' 라고도 한다.
1905년 조선이 일본과 강제로 체결한 을사조약으로 인해 조선통감부가 설치된 지 3년 후인 1908년, 일제가 조선의 경제권 이득 착취와 토지 및 자원 수탈 목적으로 세워졌으며 인도를 식민지화했던 대영제국의 동인도회사를 대놓고 본따서 세워졌다.
1908년 일본 정부의 훈령 및 내각의회의 승인하에 따라 동양척식회사법이 통과되자 조선에 자원수탈을 목적으로 한 척식(拓殖) 사업하에 회사를 설립하고 조선이 식산(殖産) 진흥을 담당하고 일본에서 근면(勤勉)하고 농업에 전문성을 가진 농민을 육성하여 진보된 농법 전수와 식산사업에 이바지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지만 실제로는 조선의 경제권 이득 착취와 조선의 농광산물 등의 풍부한 자원을 수탈하는 역할을 했다.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지속된 토지조사사업에서 토지를 직접 관리하거나 싼 값에 지주들에게 팔기도 하였다. 직접 관리하는 토지의 소작인에게는 50%가 넘는 소작료를 부여했다,
경술국치 이후 동척은 조선으로부터 출자받은 토지를 매입하고 국유지를 인수했으며 막대한 면적의 삼림지를 매입하였다. 삼림지는 임산물 개발에 쓰였고, 국유지를 포함한 농토는 조선에 이주한 일본인이나 조선인 대지주 등에 불하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조선에서의 활동을 계기로 세력을 확대하게 되면서 1917년 경성부에 있던 본사를 도쿄로 이전하였다. 침탈구역을 확장하여 조선은 물론 중국, 대만, 몽골, 필리핀, 영국령 말레이 반도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 지역에서까지 척식사업을 통해 경제침탈과 물자수탈을 잇따라 강행하였다.
1922년 황해도 재령군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의 농장에서 조선인 소작농을 중심으로 생존권 투쟁이 일어나게 되면서 동척은 이를 무시하고 한반도에 이민을 왔던 일본인들을 동원하여 총을 지급하고 투쟁을 진압한 바 있다. 이 때 1926년 북률 출신이었던 나석주 의사(義士)가 경성부에 있는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사와 조선식산은행 사옥에 폭탄을 투척하여 의거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2. 해방 이후
1945년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면서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미군정 훈령에 따라 '신한공사' 로 바뀌었고 동양척식주식회사 시절 일본인에 의해 강탈된 농토는 토지개혁을 통해 조선의 농민들에게 귀속되었다.
서울에 있던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사 건물은 6.25 전쟁 이후 내무부 청사로 사용하다가, 1970년 외환은행에서 구입한 후 1972년에 철거되고 1981년 1월 30일에 본점을 신축하였다. KEB하나은행 을지로2가 본점 건물이 옛 동척 경성지사 건물이 있던 곳이다. 동척 경성지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 자리는 병원인 제중원이 있었다.
부산과 목포, 대전에는 동척의 잔재인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사와 목포지사 건물이 남아있는데 부산의 경우 한때 주한(駐韓) 미국 영사관으로 사용되었으나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으로 영사관이 폐쇄되면서 오랫동안 방치해 왔다가 1999년에 대한민국 정부로 귀속되어 2003년에 부산박물관 산하 박물관인 부산근대역사관으로 바뀌어서 근현대 부산항 관련 전시를 하고 있고, 목포의 경우 1998년에 철거계획이 있었으나 일제의 만행을 후세에도 전하는 목적으로 그대로 남겨두었으며 지역 보존물로 존치하고 있다. 대전지점은 1922년 세워졌으며 광복 후 체신청과 대전전신전화국으로 사용되다 1984년 신한철강에 매입되었고, 이후 개인에게 매도되어 현재는 1층은 건자재상, 2층은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광복 후 관리 소홀로 땅의 등기가 말소되지 않아서, 전국 18군데의 땅이 2013년까지도 동척의 명의로 되어있는 것이 드러나기도 했다. 다만 광복 시점에 한반도에 잔류한 일본인 자산은 몰수하여 한국인에게 넘겨 주기로 연합국에서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이기에, 이 땅은 자동으로 국유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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