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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7: 22.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23. 죽임을 당하고 살아나리라
3. 죽음과 부활을 다시 이르시다 ( 17: 22-23 )
22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23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마 17: 22.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두 번째로 하신 말씀이었다.
1] 갈릴리에 모일 때에
'모이다'(*, 아나스트레포데논)란 '거류하다', '머물다', '살다' 등의 뜻인 '아나스레포'의 현재 분사다.
예수께서 수 주간을 팔레스타인 북단에 머무시다가 다시 헤롯 안디바의 영지인 갈릴리 지역으로 조용히 접근해 들어오셨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갈릴리 복귀는 예루살렘으로의 최후 여행을 위한 마지막 준비 작업이었다.
막 9: 30은 이와 같은 사건을 다루면서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라고 기록함으로써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를 통과하지 않으시고 윗 갈릴리의 한적한 사잇길을 통해 자신의 고향이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셨음을 암시한다.
* 막 9: 30 -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일반적으로 갈릴리 지역은 북쪽으로 헬몬산 근방에 위치한 티타니(레오테스)강, 서쪽으로 갈멜산을 중심으로 한 지중해 연안, 남쪽으로 에스드렐론 평원, 동쪽으로는 요단강과 갈릴리 호수 등으로 구성된 남북 약 96km, 동서 약 48km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이다.
본문에서는 헬몬산 아래에서 갈릴리 호수 근처에 있는 가버나움 지방으로 오시는 장면을 묘사한 것 같다(24절).
'갈릴리에 모일 때에' 주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약 38Km 떨어져 있는 높은 산 '헬몬산'에서 변형되셨던 사건이 있었고, 또 산에서 내려와서는 귀신들린 어린아이를 치료해 주셨다.
이 지역은 팔레스틴 북단지역으로서 당시 헤롯 안디바가 통치하던 곳이다. 이제 예수님은 그곳에서 조용히 자신의 복음 전도 기지인 갈릴리 지역으로 조용히 복귀하셨다.
막 9: 30은 똑같은 배경을 설명한 곳인데,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라고 나와 있다. 이곳은 예수님이 고향처럼 여기시던 가버나움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 오셔서 예수님은 십자가 수난에 대해 예언을 하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무슨 말씀인가? 주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리라는 예언을 지금 하고 계신다.
2]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수난에 대해 말씀하신 두 번째 예언이다.
* 마 16: 21 -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넘겨져'(*, 파라디도스다이)란 두 가지 점에서 애매모호(曖昧模糊)하다.
이는 '넘기다', '배반하다'는 뜻일 수 있는데, 문맥에 따라서 강한 의미를 가질 때는 후자의 뜻이고, 한 의미를 가질 때는 전자의 뜻을 가진다.
수동형('넘겨주다')을 취할 때, 하나님께서 예수를 넘겨주신 것인지(Origen, Clark), 가롯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것인지(Bengle) 모호하다. 본문 전체의 문맥으로 볼 때 이 같은 다양한 견해는 조화될 수 있다.
본문의 '사람들의'란 말은 유대인의 대표자로서의 대제사장 또는 십자가 처형에 관여한 이방인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 마 20: 19 -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이 같은 수난 고지(受難告知)는 순전히 믿음이 부족한 제자들을 위한 것으로서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이 일을 뚜렷이 기억하게 된다.
* 눅 24: 6 -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장차 십자가를 지실 것을 예언한 내용이 세 번이나 나온다. 마 16장에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시몬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난 다음, 예수님께서 장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붙잡혀서 고난을 당하고 마침내 십자가를 지게 될 것을 예언하셨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끝 나는것이 아니라 사흘 만에 부활하여 사망 권세를 이기신다고 반복해서 강조하셨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변화 산 사건 이후에 말씀하셨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사건을 말씀하셨다.
마 17: 23. 죽임을 당하고 살아나리라 -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
예수께서는 패역한 인간들의 순간적인 승리('죽음을 당하고')와 하나님의 영원한 승리('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를 대비시켜 닥쳐오는 당신의 삶을 정확히 예시하셨다.
부활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들의 모든 궤계와 포악을 일거에 물거품으로 돌릴 수 있다는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예시한 것이다.
1]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이 논지의 초점은 승리의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순간적인 죽음을 필연적으로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러한 예언을 반복적으로 하실까?
(1)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준비시키기 위함이다.
어머니가 아이들 젖을 뗄 때에 갑자기 떼지를 않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양육해 왔던 제자들을 놓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해서 승천하실 텐데 이런 일들은 제자들이 혼자서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하기 위해서였다.
(2) 십자가 구속의 중요성
십자가의 구속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주신 것이고, 제자들에게도 십자가의 고난이 올 것을 대비하여 준비하자는 뜻이다.
(3) 예수님 예언의 신실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예수님께서는 이 예언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가를 제자들로하여금 기억하게 하고 예수님이 지금까지 가르쳤던 모든 말씀이 하나도 거짓됨이 없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제자들에게 깨닫게 하려고 말씀하신 것이다.
신앙은 준비다. 평안할 때에 준비를 잘해야 한다. 평안할 때 준비하지 아니하면 환란이 올 때에 감당을 못한다. 그런데 제자들의 모습은 '심히 근심하더라' 였다. 엉뚱한 대답으로 질문자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을 가리켜서 동문서답(東問西答)이라 한다.
묻는 사람은 동쪽을 묻고 있는데 답하는 사람은 서쪽을 대답하고 있더라는 말이다. 이런 일은 질문자와 답변자 사이에 서로 뛰어넘을 수 없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종종 발생한다.
둘 중 어느 한쪽이 잘못될 경우 동문서답식으로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을 수 있다. 질문자의 질문 자체가 잘못되어 있기에 대답하는 자가 잘못 알고 이상한 답변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지만 질문자는 정확하고 바르게 질문했어도 답변하는 사람의 이해력이 부족해서 서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질문자와 답변자 사이에 존재하는 생각의 차이, 가치관의 차이, 이해의 차이, 신앙의 차이 등이 벌어져있으면 있을수록 이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이 분명하다. 지금 주님은 제자들에게 인류의 구속사를 이루기 위해 말씀하시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그 말씀의 깊이를 알지 못하고 '심히 근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믿고 따랐던 스승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무력하게 죽어버리면 장차 자신들의 진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에 더 불안했다. 그래서 근심한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별로 없다.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성도 여러분, 분명한 것은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에게 부활의 영광이 주어진다.
2]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막 9: 32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의 수난 예고를 깨닫지 못하고 그에 대해서 더 이상 묻기도 두려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막 9: 32 -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그들은 예수의 수난 예고 소식에 온 정신이 쏠려 그 이후에 있을 영광스러운 부활에 관해서는 관심을 가질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계시의 불완전한 이해 때문에 인간적인 두려움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 이후에야 비로소 수난의 참 의미를 이해하는 완전한 신앙으로 발전하여 진정으로 자유 할 수 있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제자들이 슬퍼하겠으나 다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슬픔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 계시의 동시적 이해를 촉구하고 있다.
* 요 16: 16-22 –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3] 하나님의 계획과 성도의 역활
예수의 수난에 대한 예고는 산에서 내려오신 후로는 두번째(9절)이고 먼저 하신 것(마 16: 21)까지 치면 세번째다. 맨 처음에 말씀하실 때는 갈릴리에서 북쪽으로 가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마 16: 21. 막 9: 30-31)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였으며, 두번째는 변화 산에 올라가셨다가 내려오실 때(마 17: 9)하셨고, 세번째는 갈릴리에 돌아오신 다음에 하셨다.
수난에 대한 예고를 이렇게 자주 하시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가까워졌기 때문이며 제자들의 마음 준비를 위해서였다.
(1) 사람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함
① 사람들의 손에 넘기움
예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말씀하실 때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22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의 제물로 삼으실 때에 인간들의 손에 넘겨 이 일을 집행하실 것을 뜻하는 것으로서 여기에 구체적으로 동원된 도구들이 가룟유다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었다. (마 16: 21)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 인간의 선악간의 생각과 행동을 동원하시고
ⓑ 자연 만물과 천재지변을 동원하시며,
ⓒ 천사와 사탄도 동원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신다.
* 욥 1: 6-12 – 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7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9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1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악인들을 동원하여 집행하게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는 오늘날의 모든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내가 악한 일에 동원되지 아니하고 선한 일에 동원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오로지 성령의 능력에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 갈 5: 16-17 –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② 하나님의 계획과 인간의 역할
하나님은 인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삼라만상의 운행까지도 계획하고 집행을 하고 계신다. 거기에서 인간의 모든 행동, 그리고 인간의 계획, 판단, 선택까지라도 선악을 막론하고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실천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야곱의 아들이던 요셉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그가 소년 시절 꾼 꿈(하나님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며, 거기에 그 형들과 애굽의 대상들과 보디발의 아내 등이 악역을 담당하고 옥중에서 만난 술관원장과 애굽 왕 바로는 선한 역할을 담당했다.
* 창 41: 39-40 – 39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40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연출자이시고 인간은 배우이며 세상은 무대라 할 수 있다.
(2) 하나님에 의하여 살아나심
① 부활은 하나님의 단독 사역이다.
죽은 자의 부활은 하나님의 단독 사역이다. 아무도, 어떤 존재도 이 부활의 사역에 가담할 수가 없다. 부활은 생명에 관한 것이므로 그것은 하나미의 전권에 속한다. 생명의 영역을 아무도 침범할 수가 없다.
예수의 부활은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의미의 부여이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첫 산물이다.
* 고전 15: 20-24 –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 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예수의 부활은 영생에 이르는 문이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은 이 생명의 문을 통해서만 영생에 이르게 된다.
* 요 10: 9 -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② 부활은 참 생명의 원리
참 생명은 죽지 않는다. 죽는 것은 참 생명이 아니다. 땅 속에 묻힌 밀알은 썩는 것 같으나 다시 소생한다. 그것은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죽음을 삼킨다. 생명은 오히려 어둠 속에서 생명 활동을 시작한다. 모든 생명은 어둠 속에서 잉태한다. 초목도, 동물도, 다 그러하다. 그것은 어둠의 힘이, 죽음의 힘이 생명을 속박할 수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만이 참 생명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이 아닌 것은 쭉정이와 같은 생명이다. 쭉정이는 땅에 떨어져 다시 살아나는 능력이 없다. 그것은 참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알곡만이 참 생명이다. 그래서 우리는 알곡과 같은 성도가 되어야 한다.
(3) 십자가와 부활의 삶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으며, 어떤 의미를 가져다줍니까?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시고 속죄의 제물이 된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실제로 성도의 삶 속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타인의 삶의 고통에 동참하여 인생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는 삶, 그러기 위하여 자기의 물질과 시간과 지혜와 노력을 희생하는 삶이어야 하며, 이러한 삶만이 부활에 참여할 수 있는 삶이 된다.
* 요 11: 25-26 –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죽어도 살고 영원히 죽지 않는 것, 그것이 생명이다. 빛은 어둠의 토양 속에서 온다.
* 창 1: 2-3 –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생명은 죽음의 피안에서 얻는다. 죽지 않으면 살아날 수가 없고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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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두 번째로 하신 말씀이었다.
💖보좌의 능력과 축복을 가진 자의 지혜로운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도 멋진 날 되시길 바랍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두 번째로 하신 말씀이었다.
설교 감사합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두 번째로 하신 말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