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또 새로운 만남들이 기록될 날, 화룡점정의 그 날이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의 뜻을 새삼 찾아 보니 무슨 일을 할 때 최후의 중요한 부분을 마무리함으로써 그 일이 완성되어, 또한 일 자체가 돋보인다는 것을 비유한다. 다음은《수형기(水衡記)》에 전하는 이야기.....
"양(梁)나라의 장승요(張僧繇)가 금릉(金陵:南京)에 있는 안락사(安樂寺)에 용 두 마리를 그렸는데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상히 생각하여 그 까닭을 묻자 `눈동자를 그리면 용이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라고 대답하였으나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용 한 마리에 눈동자를 그려 넣었다. 그러자 갑자기 천둥 · 번개가 내려치며 용이 벽을 박차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는데, 눈동자를 그리지 않은 용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한편 어떤 일이 총체적으로는 잘 되었는데 어딘가 한군데 부족한 점이 있을 때 ‘화룡에 점정이 빠졌다’고도 한다."
올 봄 황토현에서 열렸어야 할 동학제가 정읍시내 천변으로 옮겨왔다. 이런저런 핑계로 회원으로서 당해내야 할 현장복무에 거리를 두고 집 안에 앉아 창문 밖으로 불꽃놀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축포소리와 함께 사방에 흩어지는 불꽃이 뇌성벽력을 동반하며 검은 하늘을 밝게 수놓던 순간, 이름없이 산화해 간 농민군의 넋이었을까? 나는 잠시 `눈동자를 그리자 용이 날아 올랐다`는 그 대목과 함께 순간 용이 승천하는 경천동지의 현장에 있는 듯, 아찔한 곤란감에 빠져 있었다. 기실 그것은 부패권력에 저항하여 목숨을 내 놓은 수많은 농민군들의 혼을 기리고 정읍시민을 포함한 우주 안에 온 생명을 새롭게 하고자 준비된 의전행사였을 뿐인데......
그런데 우연한 오늘의 이 `찰나`가 범상치 않았다. 묘하게도 이제 막 객지를 떠돌다 부모의 품 안에 안겨 고향에 돌아 온 `아가(아름다운 가게의 줄임말)`가 다시 일가 친척부치의 환영을 받으며 여의주를 얻어 득의한 용의 모습으로 잠자던 연못을 박차고 떨쳐 일어나는 모습 아닌가? 용이 뭇 구름의 비호를 받으며 하늘로 치솟아 날아오르던 그 순간의 그 엉뚱한 착시 말이다!
정읍은 전국에서도 인구감소가 유독 또렷한 곳이라고, 사람들이 때로 입을 모은다. 정읍은 띠모임이 출세를 위한 사다리처럼 곳곳에 즐비한 `완장문화`가 주류 아니냐고 사뭇 의심스런 눈총을 보내는 이도 있다. 아니 진정, 우리 모두는 무자비한 농촌붕괴의 현장에서 무의미한 줄서기로 많은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현실에서 가짜 희망구호는 사람들을 서글프게 할 뿐이다. 이 총체적 위기에서 우리가 할 일은 이 모든 현실을 가감없이 진단하고 남은 자들끼리의 굳센 연대로, 온 몸으로 가장 약한 고리, 헐거워진 그물코, 가난한 이들을 감싸 안으려는 몸부림이 아닐까?
아름다운 가게 사이트(www.beautifulstore.org)를 들려보니, 국외 현장 가운데서도 지난 1월 12일이래, 아이티 지진현장에서 희망을 나누고 있다거나, 국내 지역아동센타 등 한부모·조손 가정의 아이들에게 정서지원을 시작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보인다. 2002년 이래 지난 8년간 총 120억 이상이 국내외 현장에 기부금으로 전달되고, 이제 정읍의 108번째 매장개장 즈음엔 단 일 년 매출이 100억에 육박하는 쾌거를 기록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가게 소식에서 아쉬우나마 간략한 소식을 옮겨본다. "`아가`가 영국의 옥스팜과 함께 진행하는 아이티의 이 긴급구호활동은 지진 피해 사흘만에 시작된 후 지난 3개월간 약 25만의 이재민에게 식수와 화장실, 공중보건시설과 임시숙소용텐트를 지원해왔다. `아가`는 옥스팜과 함께 앞으로 파괴된 지역사회 복구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바, 난민캠프 지역을 포함해 6개월간 60만 명에게 물과 식수 지원사업을 진행하고 아이티 시도정부와 협력하여 장기적인 수도설비 시스템을 계획할 수 있도록 돕는다. 특히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작은 생계수단 지원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이제 아이티 사람들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자신들의 집과 학교, 나라를 일으킬 것이다!" 한국의 후원자들이 아름다운가게를 통해 이들을 위로하고 염려하였다. 가게 매장과 홈페이지, 트위터와 블로그를 통해 많은 분들이 기부금과 따뜻한 위로의 말씀을 전하였다.
참고로 새로 개장하는 정읍매장의 경우, 당분간 수익금은 전액 이 지역에만 배분된다. 정읍에 내려오기 전, 나는 서울 안국동 거리에서 아름다운가게에 이웃하여 지내고 있었다. 감옥에서 오랜 세월을 지내고 나오신 비전향장기수들의 자활을 돕던 불교인권운동의 대모격이던 한지흔 선생이 송환운동의 마무리단계에서 이 분들의 삶을 기념하는 0.75평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었다. 역시 이 분이 경영하던 엔틱상점 `되살림 숲`은 가까이에 `아가` 1호점이던 안국점과 기부물품들의 생산을 담당하던(현재는 용답 되살림터에서 하고있다) 리폼센타가 있었다. 리폼센타에서 생산된 물품들은 하루종일 도르래 소리와 함께 가까운 안국점으로 옮겨졌다. 되돌아 보면 일상적으로 바닥을 긁어대는 그 편치 않은 소음에 대해 이웃에 큰 불만은 거의 없었다는 기억이다. `아가`의 입성에 거리 자체는 물론 다른 가게들도 큰 활력소를 얻고 있었다. 내가 당시 보았던 1호점에서 불과 10분거리의 `독립문점`은 `일제 때 항일독립지사들의 자취가 남겨진 `독립공원 건너편에 있었다. 영구임대아파트와 수다한 브랜드아파트 단지가 공존하던 인구밀집지역에서 쓰레기가 될 뻔한 많은 자원들이 여기서 수거되고 생산을 거쳐 판매되었다. 여기에 지역사회의 약한 고리들과 연대해 나가는 독특한 활력이 있었다. 철거민들을 할퀴고 지나간 상흔이 고여있는 재개발 아파트 단지의 각박한 도시환경에서 철거민이자 영세민으로서 자칫 마음이 짜부러들기 일쑤인 이들이 저렴한 생필품과 정다운 이웃을 함께 만나는 공간기능이다. 지난 경험들을 돌이켜 보며, 정읍 아름다운 가게가 돌파해 나가게 될 운명과 그 사명을 미리 점 쳐 보게 되는 것이다.
정읍 칠보면에는 오늘날까지도 `시산리 남전마을`에서 `고현제`로 내려오는 조선조 초(1401-1481) 불우헌 정극인선생이 창시한 고현향약이 있다. 옛부터 돈이 없어 장가 못가는 이들을 구제하는 전통이 있었지만, 역시 오늘날 고현제에서 `무료 전통혼례`를 제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불우헌의 나이 75세 되던 성종6년(1475) 고현(정읍시 칠보면) 내 주민들을 교화하기 위해 향약(보물 1811호 `고현향약`)을 제작 실시하였는데 이는 관권이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향당의 자치적인 것이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향민 자치의 향약으로서 처음이었다고 알려진 이 황의 禮安향약 보다 81년이나 앞선 것이다. 이제 `아름다운가게`의 개점을 축하하는 잔치마당에서, 우리 정읍 시민 모두는 어느 고장보다도 앞서 가꿔 온 주민자치의 전통에 대한 자부심과 더불어 그 탐구를 계승해 가야 할 사명을 새롭게 다짐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역시 태산선비문화권과 고부황토현 전적지를 양 날개로 한 정읍시민들의 고민은 이제부터 새로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사뭇 이질적이면서도 우리 안에 이미 내면화된 가치를 일깨우는 신선한 면이 있지 않은가?! 전국 단위에서 이미 `생활문화운동`의 가치를 실천하고 검증케 한 수많은 사례를 보유한 `아가`와 도타운 `전통의 파일`을 지닌 정읍의 만남이란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일찌기 불우헌 상춘곡에서 송순·정철로 이어진 `남도풍류일번지`의 명성이나 일 천년 후 광폭한 권력에 처절하게 대응한 민중자치의 기치에서 한국도교의 체현자 강증산에 이르기까지, 정읍에는 이 모든 종교·문화·사회윤리강령의 후견인이자 비조로 일컬어지는 태산태수 고운 최치원이 있다. 그는 희망이 없는 중앙정치무대를 떠나 일 천년전 그의 첫 부임지 태산에서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었다. 끝없는 전화戰禍과 왕권다툼 사이에서 수렁에 빠진 민중들에게 곧 "우리 사상 風流道가 지극히`玄妙한 道`로서 민중을 교화할 수 있는 능력(접화接化)과 뭇 생명을 살리는(군생群生) 처방이며, `저 중국이나 인도`보다도 먼저(1500년이상) 이미 유·불·선 三敎을 내면화해 온 심원한 철학임"을 자부하고 자임하는 것이다. 난랑비문을 숙독하면서 저 동학東學·동인東人의 자부심이 이미 일 천년전 최고운의 난랑비鸞郞碑에 온축돼 있음을 발견한다. 다른 것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관대함과 진정한 융합과 창조정신의 바탕은 이런 자신감에 기반한다. 이러한 자부심만이 민족·국가를 구원할 뿐 아니라, 진정 이웃에 대한 열절한 연민과 충직한 사랑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고운선생은 부임지마다 연못을 조성하셨고, 이 연꽃이 `우주에 光明의 신비를 구현하는` 우리 사상의 한 상징이 되고 있다. 아름다운가게 상임대표님께서 `아가`를 연꽃에 비유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아가`가 진정으로 지역정서 안에서 깊이 사랑받고 또 이웃을 섬기는 역할에 다하여지기를 진심으로 기대해 마지 않으며...... 아가야! 정읍에 너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