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가 창작한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
1972년 창작된 북한의 대표적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의 홍보 포스터. 월북한 친일작가 조명암이 이 가극의 창작 책임자를 지냈다. 사진 출처 조선예술
대북제재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돈줄이 말라버린 김정은이 북한 사정이 어려워진 원인을 간부들의 정신력 탓으로 돌리며 채찍질하자, 문화예술 관련 간부들도 고민이 깊었던 듯하다. 이럴 때는 모범적인 간부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만들어야 하지만 지금은 영화 한 편 찍을 능력도 없다. 그래서 찾은 답이 과거의 인기 영화를 재방영하는 것이다.
문제는 김정은이 수시로 사람들을 처형하다 보니 영화에서 지워야 할 얼굴이 적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마침내 답을 찾은 듯 보인다.
올해 초 방영된 6부작 예술영화 ‘대홍단 책임비서’를 보니 주연배우 얼굴이 컴퓨터그래픽으로 수정돼 다른 배우로 바뀌었다. 1997년에 제작된 이 영화는 대홍단군 당책임비서가 어려운 고난들을 연이어 극복하면서 충성한다는 내용이다.
이 영화에는 장성택의 조카사위인 공훈배우 최웅철이 출연했다. 장성택보다 먼저 처형된 최웅철은 1990년대 가장 유명한 배우였다. 1년에 영화 몇 편 만들지 못하던 시기에 최웅철은 무려 25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최웅철의 얼굴을 지우지 못하면 옛날 선전영화의 상당수를 사장시켜야 한다. 노동당 선전선동부에는 기록영화에서 얼굴을 지우는 작업을 하는 기술팀만 10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앞으로 영화까지 재작업하려면 훨씬 더 많은 인원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컴퓨터그래픽이라도 쓰니 다행이지, 과거엔 배우가 처형되면 영화를 아예 다시 찍었다. 대표적으로 1970년대를 대표하는 미녀배우였던 우인희가 1980년 김정일의 지시로 공개 처형된 이후 그가 출연한 ‘첫 무장대오에서 있은 이야기’ ‘적후의 진달래’ 등 많은 영화가 여주인공이 바뀌어 다시 촬영됐다.
‘반동’의 얼굴을 바꾸는 데 성공한 문화예술 담당 간부들은 지난주 ‘영화예술론’이라는 김정일의 노작(勞作) 발표 50주년 기념보고회를 크게 열었다. 김정일이 31세 때 썼다는 이 저서는 지금까지도 북한에서 인류 영화사의 한 획을 그은 독창적이고 천재적인 저서라고 추앙받고 있다. 영화예술론이 발표된 지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북한의 영화는 이 책에서 지시한 대로 제작해야 한다. 참고로 김정일은 각종 노작이란 것을 수없이 남겼는데, 예술분야만 봐도 ‘연극예술에 대하여’ ‘무용예술론’ ‘음악예술론’ ‘건축예술론’ ‘미술론’ ‘주체문학론’ 등 참견하지 않은 곳이 없다.
영화예술론이 발표됐던 시기는 김정일이 ‘피바다’ ‘꽃파는 처녀’ 등 5대 혁명가극과 5대 혁명연극을 창작한다며 바빴던 때였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 가극들의 실제 창작 책임자는 친일인사로 알려진 조명암이었다. ‘낙화유수’ ‘꿈꾸는 백마강’ 등 광복 전에만 700여 곡의 가사를 쓴 조명암은 천재적인 작사가이자 극작가, 연출가였지만 1940년대 들어 ‘아들의 혈서’ ‘지원병의 어머니’ ‘결사대의 처’ 등 군국가요를 대거 창작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노골적인 군국가요 중 3분의 2가 조명암의 가사라고 하니 그는 진심으로 친일을 했던 듯싶다.
이랬던 조명암은 1948년 월북해 조령출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북한에서 숱한 작품을 남겼다. 항일 빨치산이 나오는 북한의 대표적 혁명가극이나 영화들이 알고 보면 일본군을 칭송하던 친일인사 조명암이 제작한 것이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조명암은 공로를 인정받아 김일성 상과 각종 고위 관직을 받았고 1993년 사망한 이후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주체사상 관련 저서들을 사실상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써줬음을 감안할 때 김정일이 썼다는 영화나 연극, 무용 등의 저서도 누군가 대신 써줬을 것인데 조명암이 써줬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김정일은 영화예술론에서 주체니 혁명이니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 놓았지만, 정작 본인은 전혀 그에 맞지 않게 살았던 위선자였다. 서울에서 성장한 성혜림과 일본에서 온 고용희에게 빠졌던 이유도 북한에서 사상 교육을 받고 성장한 여인들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김정일이 열심히 가르쳤다는 북한의 예술은 지금 영화도 제대로 못 만드는 처지에 빠졌고, 설사 만들어도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맛본 인민에게 재미가 없어 외면 받는다. 이런 처지에서도 반세기 전 발표된 케케묵은 책을 추앙하고 교본으로 삼으니, 마치 거세된 환관이 다산(多産)의 기쁨을 노래하는 광경을 보는 듯한 괴이한 기분이 든다.
주성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