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因緣
<제15편 태양의 세상>
④사진한장-1
서둘러 순자의 집을 나온 천복이 집 모퉁이를 돌아서자, 한훈은 이제껏 넘실거리며 흐르는 개여울을 내리어다보고 서있었다. 필시 그를 기다리느라, 그러고 서있었을 거였다.
해는 아직 시루봉재를 넘어서지 않은 거만 같은데, 큰비는 그치었지만, 빗방울을 드문드문 떨구면서 비구름이 걷히지 않고 내리어앉았으니, 사위가 적이 어둠침침하였다.
오토바이는 세워놓은 대로 비를 쫄쫄 맞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리로 다가가서 짐받이에 실어놓은 술 한 병과 고기를 내리어 손에 들었다.
“사촌, 어서 방으로 들어가!”
한훈이 앞장서 들어가자, 천복은 그를 따라서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마침 사촌누나 점순이 부엌에서 저녁밥을 짓는지, 아궁이에 불을 지피다가 반기듯, 소리치었다.
“야, 용훈아, 넌, 사촌 집에 와서 게우, ...순자랑 언제부텀 짝짜꿍이야?”
그녀는 우스워죽겠다는 듯이 파안대소를 하면서 부지깽이를 마구 흔들어 보이는 거였다.
“아, 누님이 소개해줬잖아요? 아하하.”
천복도 지지 아니하고, 아무렇게나 둘러대는 거였다.
“어엉? 쟤 봐! 내가 언제...”
천복의 말에 그녀는 기가 막힌 듯이 얼버무리자, 그는 손에든, 술과 고기를 그녀에게 건네고는 후딱 방으로 들어가 버리었다.
방은 이제나저제나 단칸방이라 구석구석에 너절한 살림살이가 쌓이고 흩어지어 있었기에 산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속에서도, 동혁과 동수의 사진을 간직하고 있다니, 거짓말처럼 들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한훈은 지레 그가 사진을 가지러왔다는 눈치를 알고, 대뜸 너절한 살림살이 속에서 낡고 허름한 가방 하나를 들어내어다가 가방을 열고는 속을 뒤지기 시작하는 거였다.
그의 손에 집히어 나오는 사진들은 할아버지 두현 씨의 중판사진을 비롯해서 큰할머니 김씨의 명함판사진이며, 동룡과 동오 형제가 각자 낳은 어린 딸들 점순과 숙이를 안고, 찍은 중판사진들을 죄다 꺼내어놓는 거였다.
그러더니, 그는 드디어 동혁의 명함판사진 한 장을 꺼내, 그의 코앞에다 디밀어 보이어주는 거였다.
“헉!”
천복은 동혁의 사진을 보자, 대뜸 콧등이 시큰하여지면서 무엇이 목으로 치밀어 올라 순간적으로 목구멍이 막히는 거였다.
머리는 삭발하여 까까머리이었고, 학생복차림은 턱밑으로 여러 개의 단추가 종을 그리고 있었다. 빛나는 눈빛과 두터운 입술, 남자다운 콧날과 두툼하면서도, 해맑은 얼굴이 과연 남아다운 뛰어난 기상으로 수재처럼 보이었다.
그는 콧등이 시큰거리더니, 눈망울에 물기가 번지면서 눈물방울이 그리로 떨어지자, 재빨리 사진을 옷에 문질러 눈물방울을 지우는 거였다.
사진은 좀 노리끼리하게 퇴색되었으나, 또렷한 모습을 온전히 간직하였는데, 그 사진은 분명히 정읍 칠보소학교 사절에 찍었을 거라 짐작되었다.
동룡이 격변하는 시대에 굴곡진 삶을 살아오면서 비록 이복동생일망정 동혁과 동수를 갈라 세우지 않고, 사진 한 장일망정 고이 간직하였다는 거를 미루어 생각하여보면, 눈물겨운 가정사이기도 하였다.
“삼촌사진이 어딨더라?”
한훈은 이제 동수의 사진을 찾느라고, 꺼내어놓은 사진을 죄다 가방속에 담았다가 다시 하나하나씩 꺼내면서 스스로 묻고 있었다.
천복은 손에 쥔 동혁의 사진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보고,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보기를 거듭하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면, 그 눈물을 끔쩍거리어서 마를라치면, 또 속에서 울컥거리어서 눈물이 다시 솟고는 하였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가장 치명적인 거는 아버지를 잃는 거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으면, 말할 나위 없지만, 중년을 지나 늙어서라도, 아버지를 잃는 거는 마치 태양을 잃는 거와 같다고, 그는 믿었다.
배가 선장을 잃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선장을 잃은 배는 망망대해에서 갈 길을 잃게 되고, 길을 잃으면, 갈팡질팡 표류한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는 동혁의 사진을 손에 쥐고서 아버지를 잃은 자신이 마냥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몽유병자처럼 방황하는 자화상을 스스로 그리어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있었더라면...?’
그는 아버지와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의사가 되었을 거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다 그를 의학박사로 키우겠노라고, 노래를 불렀으니, 의사가 될게 빤하였다.
그러면, 구명공덕을 쌓아서 생의 보람을 가지게 되었을 거였다.
“삼촌사진 여깄네! 사촌. 아하, 한참 찾았네!”
첫댓글 감회가 새롭겠습니다
사진은 비록 실물은 아니더라도 실체의 그림자이니
시각적으로 감회가 새롭겠지요. 그러나 그감회로써
위안은커녕 되레마음을 아프게하죠. 천복도 한때는
사진업에 종사했지만 사진에 나타난 현상이 마음을
끓이게하는지 알거예요. 인연이란 그림자도 인연이
된다는걸 알게 되고 그인연이란 덫에서 몸부림치는
인간의 헛헛함도 가히 짐작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