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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2일 대림 제1주일
대림 시기
대림 시기는 ‘예수 성탄 대축일’ 전의 4주간을 말한다. ‘대림’(待臨)이라는 뜻은 오시기를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이 용어는 ‘도착’을 뜻하는 라틴 말 ‘아벤투스’(Adventus)를 번역한 것이다. 오실 분은 물론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그분은 이천 년 전에 이미 이 세상에 오셨던 분이시다. 교회는 전례를 통하여 그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을 해마다 되풀이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신비를 새롭게 기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대림 첫 주일에 한 해의 전례주년이 시작된다. 교회 달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니 올해 대림 시기에도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려야 한다.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열망하며 기다리던 그 마음으로 예수님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한편 대림 시기는 종말에 오실 예수님도 묵상하게 한다. 이 분위기는 대림 첫 주일부터 12월 16일까지의 전례에 많이 나타난다. 성경 말씀도 ‘깨어 기다리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12월 17일부터 성탄 전야인 12월 24일까지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렇듯 대림 시기는 예수님의 오심을 두 부분으로 묵상하게 한다.
대림 시기에는 사순 시기와 마찬가지로 ‘대영광송’을 노래하지 않는다. 그러나 ‘알렐루야’는 노래한다. 사순 시기는 회개와 보속이 강조되는 슬픔의 기간이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대림 시기는 기다림이 강조되는 희망의 기간이다.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께서 오시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알렐루야’를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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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마태오 24,37-44)
Therefore, stay awake!
For you do not know
on which day your Lord will come.
종말은 언제 올지 모른다. 예수님께서는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다. 그러니 깨어 있어야 한다. 매일의 기도에 충실하는 것이 깨어 있는 삶이다. 날마다 선행을 베풀고자 노력하는 것이 준비하는 삶이다. 예수님께서는, 도둑이 언제 올지 알면 대비하는 것처럼, 확실한 종말을 대비하며 살라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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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많은 기다림을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설레는 기다림도 있었고, 피하고 싶은 기다림도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그 모두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이든 사건이든 밝은 관계는 기쁨을 남겼지만, 어두운 관계는 활력을 앗아 갔습니다. 기다림은 어떤 형태로든 인생에 의미를 남깁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기도가 잘 되지 않는다고들 합니다. 그럴 때에는 주님과 맺은 관계를 잊고 살기 때문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린이들은 기도를 잘합니다. 기도하자고 하면 금방 눈을 감고 중얼거립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순진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큰 힘을 지니셨고, 어머니처럼 사랑을 주시는 분이시라고 믿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의 이러한 마음이 기도를 쉽게 하도록 합니다.
믿음은 관계 속에서 성장합니다. 그러니 주님과 맺은 관계를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내 인생에 들어와 계시는 그분을 만나지 못하면 신앙생활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대림 시기의 첫 번째 기다림은 이러한 주님을 느끼는 데 있습니다. 그러기에 한 해가 가고 새해를 맞는 길목에 성탄 시기가 있습니다. 새롭게 새해를 시작하라는 메시지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아기의 모습으로 오실 것입니다. 아기와 맺는 관계를 어렵게 생각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새벽을 열며
어떤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 법망을 피해 오랫동안 도망을 다녔습니다. 그가 저지른 죄의 공소시효는 6년이었지요. 그래서 그는 늘 공소시효가 끝나기만을 바라면서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드디어 6년이 지났다고 생각한 그는 경찰서로 가서 자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사람이 날짜 계산을 잘못해서 공소시효 만기 3일전에 자수를 한 것입니다.
결국 그는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아 그 간의 고생이 헛되이 쇠고랑을 차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억울하겠다. 정말 재수 없다. 시간 계산만 잘 했어도…….”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사람이 억울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시원하고 후련합니다. 사실 저는 그 동안 단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이제라도 죄 값을 치르게 되었으니 두 다리 뻗고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두 다리 뻗고 잘 지낼 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감에 잘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를 잊기 위해서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그 불안감을 없애려고 하지만, 일시적으로 잊힐지는 몰라도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께서는 이러한 죄의 상태에서 우리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더군다나 언제 올지 모를 사람의 아들이 재림하는 최후의 심판 때를 잘 준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교회력으로 새해에 해당되는 오늘 대림 제1주일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노아 때의 일을 생각하라고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생각하지 않았지요. 그들은 하느님을 생각하기보다는 인간적인 생활을 더 강조했고, 그래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쾌락만을 추구하는 급급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습니다. 세상 마지막 날 어떻게 될 지를…….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노아 시대의 사람들처럼 아무런 대책없이 쾌락만을 추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만약 그렇게 쾌락만을, 즉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권력과 부만을 좋아한다면, 크게 후회할 날이 온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대림 제1주일. 교회의 새해인 오늘, 나의 모습은 어떠한지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의 뜻에 맞게 잘 준비를 하고 있는지, 여전히 다음에 하겠다면서 뒤로 미루고 있는지…….
나의 삶을 봉헌하며 묵주기도를 바치세요.
빠다킹신부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배광하 신부-
그리운 기다림
제과점 빵이 귀하던 시절, 성탄 때면 성당에서 나누어주던 그 맛있던 빵이 얼마나 먹고 싶던지 다가올 성탄을 손꼽아 기다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신학교 입학의 날을 기다리던 시절이 있었고, 멋진 수단을 입고 싶어 착의식 날을 기다리던 때가 있었고, 사제로 수품 될 날을 고대하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인생은 어찌 보면 기다림의 연속된 삶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떠나간 자녀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승진될 날을 기다리며, 자식이 제대하여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식당에서는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며, 경제가 나아지기를 기다리고, 결혼할 날을 기다리며, 심지어 술안주 나오기를 기다리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립니다.
미사 시간을 기다리고, 병이 낫기를 기다립니다. 신앙도 기다림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수천 년 메시아께서 오시기를 기다렸고, 신약의 하느님 백성들은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재림하실 날을 기다립니다.
사실 우리네 삶에서 기다림이 아닌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는 우리가 이 지상에서 과연 무엇을 기다렸는가 하는 것이 심판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참다운 기다림은 두 손을 놓고 막연히 넋 놓음의 기다림이 아니라, 진정 내 전 존재를 투자할 가치의 존귀함 앞에 자신의 현재를 부단히 사랑하며 가꾸어 나가는 기다림이어야 함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현재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을 나누고 사랑하며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주어진 시간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일 년의 가치를 알고 싶다면, 학점을 받지 못한 학생에게 물어 보세요. 한 달의 가치를 알고 싶다면, 미숙아를 낳은 어머니를 찾아가세요. 하루의 가치는 신문 편집장들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한 시간의 가치가 궁금하면,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물어 보세요. 일 분의 가치는, 열차를 놓친 사람에게, 일 초의 가치는 아찔한 사고를 순간적으로 피할 수 있었던 사람에게, 천 분의 일 초의 소중함은, 아깝게 은메달에 머문 육상 선수에게 물어 보세요.
모든 순간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또한, 당신에게 너무나 특별한, 그래서 시간을 투자할 만큼 그렇게 소중한 사람과 시간을 공유했기에 그 순간은 더욱 소중합니다.
시간은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 어제는 이미 지나간 역사이며, 미래는 알 수 없습니다. 오늘이야말로 당신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Present)를 선물(Presant) 이라고 부릅니다.”
한 순간 순간을 진정 아끼고 사랑하며, 참된 진리의 생명을, 영원한 삶을 기다려야 합니다.
버림과 떠남의 기다림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마태 24, 38~39).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 우리는 버림과 떠남을 기억합니다. 버림은, 세속적인 가치와 물질적 욕심에 집착함을 버리는 것입니다.
끝내는 그것들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함이요, 결국 가져갈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떠남은, 우리가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무를 수 없기에, 결국 세상과 하직할 날이 오기 때문에 끊임없는 떠남의 연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는 거듭 우리 주변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가벼워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날의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너무도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것에 희망을 둡니다.
그 기쁨의 희망은 계속된 버림과 떠남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버림과 떠남에 우리 신앙인은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 27).
프랑스의 사상가 ‘파스칼(1623~ 1662)’은,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 가슴에 구멍 하나씩을 지니고 태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빈 구멍을 세상 것으로 메워 보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지식, 권력, 부귀, 영화, 온갖 흥미로운 일들과 미신적인 행위들로 말입니다.
그러나 인생 종말엔 그 모두가 허망한 실패로 끝났습니다. 운명처럼 만들어진 구멍은 하느님께서 당신으로 메우도록 만드셨기에, 하느님으로만 구멍을 메울 수 있다고 파스칼은 말합니다. 우리의 고독과 황량함을 채우러 오시는 주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기는 참된 기다림의 대림이 돼야 합니다.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조명연 신부-
현관 앞에서 한가롭게 오후를 즐기는 노인에게 지나가던 부인이 다가가
말을 걸었습니다. “당신은 무척 행복해보이는군요.
그렇게 행복하게 장수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요?”
이에 이 노인은 “저는 하루에 담배 3갑을 피웁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소주 1박스를 마시지요,
고기도 무척 좋아하지만 결코 운동은 하지 않습니다”라는
깜짝 놀랄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나쁜 것만 행하는데도
장수하는 것이 신기한 부인은 다시 물었습니다.
“정말로 신기하네요. 그런데 할아버지,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그러자 그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요? 저 올해 스물아홉인데요?”
이 노인, 아니 청년이라고 말해야 하겠지요?
아무튼 이 청년은 건강에 대해서 잘 준비하지를 못했지요.
그래서 자기 나이와는 다른 모습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준비가 필요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
그 준비를 바로 오늘, 아니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준비하고 있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노아 시대의 사람들처럼 아무런 대책 없이 쾌락만을
추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만약 그렇게 쾌락만을,
즉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권력과 부만을 좋아한다면,
앞선 이야기에 나오는 그 청년처럼 자기의 본 모습이 아닌
전혀 다른 모습이 되고 말 것입니다.
마지막 도래에 대한 준비
-조욱현 신부-
제1독서: 이사 2,1-5: 그들의 칼을 보습으로 만들 것이다
독서에서는 두 가지 사상을 전하고 있다. 첫째,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으로 쏟아져 들어올 때가 올 것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는 주님께서 ‘당신의 길을 가르쳐주시고’ ‘당신의 법과 말씀을 선포하실’(3절) 주님의 성전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주님의 말씀을 모든 민족들이 듣게 됨으로써 서로 다른 민족들 사이에 일치와 화해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이 예언의 말씀은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란 바로 ‘형제애’와 ‘평화’가 정말로 실현되어야 할 공동체 즉 ‘멧부리 위에 우뚝 서서’(2절) 찬란히 빛나고 있는 예루살렘 공동체, 즉 교회이다. 교회의 기능은 ‘하느님과의 친밀한 일치와 전 인류의 일치의 표지이며 도구’(교회1항)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기록은 결코 끝나지 않는 ‘주님의 도래’, 즉 그리스도의 최초의 도래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의 힘겨운 성장,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끊임없이 ‘오시는 분’(사도 1,4 참조)을 만나러 가는 여정임을 기술하고 있다.
복음: 마태 24,37-44: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
주님과의 ‘만남’을 한 순간도 그냥 지나치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늘 ‘깨어있어야’ 한다. 즉 오랜 기다림 속에서 엄습되는 잠이나 피곤함의 유혹을 극복해야만 한다. 오늘 복음은 이 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노아 시대의 일을 회상시키면서(37-39절)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신다. 첫째, 하느님께서 ‘불시에’ 찾아오시리라는 사실을 잊은 채, 매일의 일상적 삶의 문제에 너무 빠져있으면 안된다는 것과, 둘째, 홍수 때처럼 주님의 ‘오심’에 따르는 위협적이며 위험스런 상황에 관한 점이다. 노아의 홍수 사건은 파괴와 저주의 사건이기도 하였지만, 노아와 그의 가족을 위한 구원의 기회이기도 하였다(창세 7,11-23 참조). 오시는 하느님 앞에서의 심판은 이렇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인내롭게 방주를 만들었던 노아처럼 당신께 개방되어있고 당신의 말씀을 온순히 따르는 사람은 구원하시고, 당신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당신을 거절하여 마음을 당신께로 향하지 않는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또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41절).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그 모든 것을 마지막 날에 드러내 보이실 것이라는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뜻을 잘 받아들여 온순히 따르고 실천 했는지 아닌지가 그 때에 드러날 것임을 가르쳐주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이 오시는 그 날이 언제이든 간에 두려움과 ‘깨어있음’으로 그분을 기다려야 한다. 그 두려움이라는 것은 무서워함이 아니다. 나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지 못하여 하느님의 자녀로서 품위를 잃을 수 있는 것을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있어라”(42절). 이 말씀은 여러 군데서 반복되고 있는 말씀이다. 이는 밤을 지키는 야경꾼들과 같이 잠을 잠으로써 도둑에게 기습을 당하지 않도록 깨어있는 것과 같이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는지 집주인이 알고 있다면 그는 깨어있으면서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43-44절). 도둑이 오는 때는 언제인지 모른다. 항상 준비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오시고자 하는 그 때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깨어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깨어 기다림’은 주님께서 우리 생활 가운데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이루시는 그 모든 ‘오심’를 하나도 놓치지 않음으로써 그분의 마지막 ‘도래’에 대해 더 잘 준비하는 우리의 정신적 자세를 의미한다. 이것을 이미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하고 있다. “두 번째 오심에 놀라지 않기 위해서는 첫 번째 오심을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Enarrat. in Psalmos, Ps 95,14).
제2독서: 로마 13,11-14: 잠에서 깨어날 때
바오로 사도는 잠자지 말라는 권고에서 더 나아가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과거생활이 그리스도라는 ‘빛’ 속에서의 삶이 아니라, ‘밤’에 묻혀있는 ‘잠’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 생활에 들어와 계신 지금은 그 ‘밤’에서 벗어나 ‘대낮처럼’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와 그리스도의 만남을 위한 근본적인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그분의 오심과 더불어 ‘때가 찼기에’(갈라 4,4 참조) 구원의 마지막 국면이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처음 믿던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11 절). 이 말씀은 이미 이 순간부터 여러 가지 형태의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 점점 더 실현되어 가는 ‘구원’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마지막 도래는 우리의 삶과 역사 가운데 이루어지는 다른 모든 ‘도래’의 종합이며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얼마나 나의 일상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하여 깨어있고, 주님을 맞아 드릴 수 있도록 늘 준비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밤’의 ‘잠’에서 깨어나 빛 속에서 구원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여야 하겠다.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허영엽 마티아 신부-
신학생 시절 농촌 봉사활동을 갔을 때 시골에서 만난 한 할머니가 들려 준 슬픈 이야기이다. 그 날은 비가 많이 와서 밖에서 봉사활동을 못했다. 그래서 그 할머니 집의 마루에 모여 담소를 나누었다. 대학생이던 그 할머니의 외아들은 6·25전쟁이 터지자 학도병으로 전쟁터로 나갔다. 그리고 전쟁이 끝났지만 할머니의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후 그 할머니의 아들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그 할머니는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죽었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 지 30여 년이 지났는데도 할머니는 밤에 사립문을 잠그지 않고 잠을 잔다고 하셨다. 그 할머니는 이야기중에 머리에 쓰셨던 수건으로 눈물을 훔치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 할머니는 아들이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아셨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 속에서 아들을 지울 순 없었다. 그 할머니의 기다림이 다른 사람에게는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홀로 사는 그분에게 기다림은 삶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이제는 그 할머니도 그렇게 그리워하던 아들을 하늘나라에서 만나시지 않았을까?
전례력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첫 주간인 오늘, 우리는 “깨어 준비하라”는 권고를 듣는다. 대림시기는 구세주이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것을 기다리는 때이다. 회개와 속죄로 구세주를 맞기 위해 준비하는 시기로서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우선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는 성탄 대축일을 준비하는 시기이다. 또한 종말에 있을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을 기다리는 시기이다. 우리의 구원이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그 가운데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하느님의 시간은 구원의 시간이며 완성의 시간이다.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따라 온갖 무질서와 애착에 빠져 현실적인 행복만을 추구한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항상 깨어 준비하는 삶을 산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언제 오실 지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마태 24,42.44). 이 말씀은 우리가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삶이다. 따라서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는 말씀은 죽음과 심판을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에게 거룩하고 위대한 기다림을 불어넣어 주시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세상의 것을 기다리지 않고 영원한 하느님을 기다리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언젠가 바뀌고 변화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래서인지 “기다림은 욕망이 아니라, 무엇이든 받아들이기 위한 마음의 준비”라고 했던 앙드레 지드의 말이 더 마음에 와 닿는다.
유다인과 동방박사들의 다른 두 기다림
-이기양 신부-
유다인과 동방박사들은 메시아가 오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영광과 감사의 예물을 드린 사람들은 가까이 있었던 유다인이 아니라 산 넘고 물 건너 온 페르시아의 현자들이라 알려진 동방박사들이었습니다.
왜 가까이 있었던 유다인은 수천 년 기다려온 메시아를 만나지 못한 것일까요? 더구나 그들은 헤로데가 메시아가 태어 날 곳이 어디인지를 물었을 때 "유다 베들레헴입니다"(마태 2,5)라고 답하며 메시아가 어디에서 날 것인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유다인은 하느님 뜻이 아니라 그들 욕심을 채워 줄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로마를 쳐부수고 해방시켜 세계 일등 국민이 되기를 염원했기에 초라한 마굿간에서 태어나고 끝없이 용서하라는 말이나 하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예수는 바로 그들 옆에 있어도 관심 인물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을 살피고 오실 메시아를 고대하며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준비했던 동방박사들은 그분을 직접 뵙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시기를 살면서도 유다인들과 같이 내 욕심으로 꽉 차 있다면 매년 성탄을 맞아도 곁에 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처럼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그분께 드릴 선물을 정성껏 준비한다면 오실 주님을 맞는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대림 시기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오늘 독서와 복음은 대림과 성탄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아주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24,42-44).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 역시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로마 13,13)며 오시는 주님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고백록의 저자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방탕한 생활 중에도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와 암브로시오 주교의 영향으로 명예, 결혼, 재산 등의 문제로 갈등하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헌신해 살려는 소망이 불길처럼 치솟기도 했습니다. 이런 갈등 속에 정원을 산책하다가 어린이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들어서 읽어 보아라! 들어서 읽어 보아라!"
방에 들어와 상 위에 놓인 성경을 펴보니 로마서 13장의 말씀이었습니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13-14절).
아우구스티노는 이 말씀을 통해 진리이신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고 일생을 맴돌았던 의문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확신의 광명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참회의 일생을 통해 하느님 안에 살아갈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대림의 완성인 성탄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한 순간에 내 전 존재가 바뀌어 지는 것, 곁에 계신 주님을 깨달아 하느님의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는 순간이 바로 성탄이지요. 예수님을 만나면 그 전에 내가 추구했던 모든 것의 가치가 없어져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와 자유에 감사드리며 기쁨과 소망에 찬 삶을 새롭게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림 시기는 내 욕망에 가려 볼 수 없었던 주님을 만나기 위해 욕심 덩어리들을 씻어내고 곁에 계신 하느님을 깨달아가는 시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성탄절을 맞아 송년회다 망년회다 하며 술에 취해 방탕하게 산다면 오신 주님을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처럼 하느님 뜻을 헤아리며 준비하는 이들만이 주님을 만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사랑만이 살 길
-양승국 신부 -
그 참혹했던 대구 지하철 참사가 발생한 지도 꽤 세월이 흘렀습니다. 당시 온 나라를 뒤덮었던 분노도, 슬픔도 점점 우리 기억에서 사라져갑니다. 이제 온전히 남은 것은 살아있는 가족들의 슬픔뿐인 듯 합니다. 아비규환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온 생존자들이 당시 받은 충격으로 인한 악몽과 싸움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금쪽같은 자식들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들은 죽음과도 같은 나날들을 겨우겨우 견뎌내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자식의 죽음 앞에서는 시간도 결코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남매를 한꺼번에 잃은 한 부부는 아직도 자녀들의 부재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지금껏 단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었어요. 아이들이 왜 그렇게 허망하게 먼저 가야 했는지… 아직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해 방황을 거듭하던 부부의 머릿속에 퍼뜩 이렇게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건 억울하게 먼저 떠난 자식들에게 차마 보일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뭔가 의미있는 일을 찾자. 우리 아이들에게 미처 다 쏟지 못한 사랑을 누군가에게 주자. 사랑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있을테니'하고 수천번도 더 다짐하면서 부부는 조금씩 마음을 잡아나갔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떠난 빈 자리에 더 큰 사랑을 필요로 하는 한 아이를 받아들였습니다. 한 가련한 어린아이를 입양한 것입니다. 부부는 새 아이를 통해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사랑만이 끝내 절망을 치유할 수 있다는 진리를 말입니다.
두 분은 매달 자녀들의 흔적이 담겨있는 납골당을 찾아갈 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자녀들과 나눈답니다.
"우리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 착했던 너희들이 먼저 떠난 건, 남은 우리보고 그만큼 좋은 일 더 많이 하고 오라는 뜻이겠지? 그래, 엄마, 아빠가 그때까지 힘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게. 그러니 너희도 하늘나라에서 잘 지내야 한다"(이준희, 「세상 속으로」, 이문당 참조).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죽음과도 같은 나날을 보내던 부부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그 모진 고통 속에서도 '사랑만이 살길이다'며 어린아이를 입양해서 친자식처럼 키우고 계시는 두 분의 삶이 거룩해 보입니다. 애통함을 넘어 처절한 나날을 견뎌가면서도 아이들을 자신들보다 먼저 불러가신 하느님 뜻을 찾아나가는 두 분의 신앙이 진정 부럽습니다.
오늘 대림 제1주일을 맞아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이 언제일지 모르니 늘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고 당부하고 계십니다. 또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를 통해 '깨어 준비하고 있음'이 어떤 상태인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밤이 거의 새어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가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 몸을 무장하십시오."
대림절을 시작하는 우리에게, 마지막 날을 준비해야 할 우리에게 참으로 적절한 권고요 탁월한 행동지침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가 비록 죽음과도 같이 힘겨운 나날이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주신 '오늘'이란 선물에 의미를 부여하며, 빛의 자녀답게 최대한 밝고 단정하게 살아가려는 삶이야말로 주님의 날에 합당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끝도 없는 고통 그 한가운데를 걸어가면서도 '사랑만이 내가 살길이다'고 수백 번, 수천 번 다짐하는 길, 어렵지만 또 다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 몸을 무장하고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길, 그 길이야말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결국 주님의 날을 잘 준비한다는 것은 매일의 좌절과 실의, 죽음과도 같은 슬픔을 잘 견뎌내는 일이며, 나란 존재의 부족함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계속되는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기꺼이 하루를 살아 주님께서 오시는 날이 공포와 멸망의 순간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의 순간, 은총과 희망의 순간이 되길 기원합니다.
그 마지막 날은 오랜 세월 우리가 품어왔던 모든 두려움과 고통, 십자가가 영원한 삶으로 승화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그날은 하느님께서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시는 날, 하느님 얼굴을 마주 뵙는 은총에 너무 기뻐 뛰노는 날이 될 것입니다.
깨어 있어라
-최혜영 수녀·-
오래 전에 보았던 폼페이 유적지의 인간 석고상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갑작스런 화산 폭발로 산 채로 화산재를 뒤집어쓴 수많은 남녀가 죽음 직전의 공포와 경악의 표정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화석처럼 굳어 있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이런 죽음이 다가오면 어떨까 생각하니, 온몸이 조여 오듯 그들의 두려움이 생생하게 전달되었습니다.
종말이 도둑처럼 불시에 온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실상 우리가 인류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자만 한다면 개인의 죽음이나 역사의 종말이 필연적인 사건으로 찾아온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 날과 그 시간을 하느님밖에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노아 때 홍수가 닥쳐 모든 것을 휩쓸어 갈 때까지 흥청망청 살았던 것처럼, 예수님 시대에도 또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일상사에만 매달려 살아가는 듯합니다.
하느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은 분명 다릅니다. 인간이 임의로 만들어 놓은 양적인 시간 곧 연대기적 시간(chronos)과는 달리, 하느님의 시간은 결정적인 구원의 시간(kairos)이며 완성의 시간입니다. 그 운명적인 시간을 만들어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며 선택입니다. 이러한 각자의 선택이 어떤 이에게는 구원을 가져오고 어떤 이에게는 심판을 가져옵니다.
세상의 종말 곧 그리스도의 재림 때는 더 이상 선택이 불가능한, 인간이 그저 순응할 수밖에 없는 ‘때’가 닥쳐옵니다. 겉으로는 똑같이 두 사람이 밭에 있거나 맷돌질을 하고 있지만, ‘그 때’에 이르러서는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지는 극적인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마태 24,40-41). 다시 말해 회개한 사람은 구원받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멸망당하는 상황을 절실하게 보여 줍니다. 그 판단 기준은 분명 하느님 눈에 비춰진 각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도둑을 지키는 집주인의 비유(마태 24,43-44; 루가 12,39-40)는 종말 위기가 언제 닥칠지 모르니 늘 대비하고 있으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는 순간이 종말이라고 여기시고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겠지만, 그리스도인은 종말이 되면 사람의 아들(인자)이 내림하여 하느님 나라를 이룩한다고 보았기에 “하느님 나라가 옵니다”를 “사람의 아들이 옵니다”라고 말합니다.
전례력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첫 주간인 오늘, 우리는 ‘그 날과 그 시간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는 권고를 듣습니다. 하느님 나라 곧 영원한 생명을 위해 깨어 준비하는 회개의 결단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십시오”(로마 13,13-14).
“늘 깨어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자”
-허성 신부 -
장래 오실 주님
전례력으로 가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전에는 이날을 장래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첫번째 주일이라고 불렀습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뱀의 꼬임에 넘어가 죄를 범한 탓으로 낙원에서 쫓겨나게 되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교활한 뱀에게 『너와 여인 사이에, 네 족속과 여인의 후손 사이에 원수관계를 맺어 주리니 너는 그의 발 뒤꿈치를 물으려 하다가 도리어 너의 머리를 짓밟힐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인류를 불행으로부터 구원해줄 구세주를 보내주실 것을 선언하셨기에 우리 선조들은 죄악과 고통에 시달릴수록 애타게 구세주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림의 첫 번째 뜻은 바로 그 시기를 뜻합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인류 구원
하느님은 진실하시고 성실하신 분이시기에 마침내 당신이 약속하신 구세주를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보내주셨고 그 분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구원된 것은 아니고 구원 사업이 완성된 것은 더욱 아닌데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시고는 이별을 아쉬워하는 사도들을 남겨둔 채 승천하셨습니다.
구름 속으로 사라지시는 주님의 모습을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는 사도들에게 『너희는 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너희 곁을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시던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라고 천사들이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구세주께서는 이미 오셨다가 승천하셨지만 세상 종말에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기에 우리는 다시 대림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마음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분이 먼 곳에서 나를 데리러 곧 오시겠다고 소식이 왔다면 얼마나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까?
그 분을 맞이하기 위해서 얼마나 세심한 준비를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고 하는 것이 큰 축복이듯이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 있다고 하는 것은 크나큰 괴로움인 것입니다.
불국사의 석가탑을 조성하러간 남편을 매일 서서 기다리다가 망부석이 되었다는 안타깝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어떤 개는 자기를 키우던 주인이 며칠동안 여행을 갔다 왔더니 그동안 그 개는 밥도 안먹고 잠도 안자고 앉아서 주인이 떠난곳만 바라다보고 있더라는 애처로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부산과 같이 바다를 끼고 있는 곳에는 해양가족들이 많습니다.
어선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늘 가족들을 그리워하고 아내나 자식이 자기를 대신해서 가족들을 잘 돌보고 살림을 잘 살아주기를 바라며 귀항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집에 있는 가족들 역시 남편이나 아버지를 대신해서 성실히 알뜰히 살아가며 남편이나 아버지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간혹 남편이나 아버지가 안 계시는 동안 바람을 피우거나 재산을 낭비하거나 큰일을 저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뒤탈이 겁이 나서 남편이나 아버지가 귀항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늘 준비하고 있어라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은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고 하십니다.
성 알로이시오께서 소신학생이었을때 일입니다. 교장 신부님께서 쉬는 시간에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만일 내일 이 세상이 끝나고 공심판이 있다면 너는 지금 무엇을 하겠느냐?』고 질문을 하시니까 어떤 학생은 지금 당장 고해성사를 보고 누구와 화해하겠다고 하고, 어떤 학생은 남의 물건을 불법으로 가지고 있던 것을 돌려주고 성체 조배를 하겠다고, 어떤 학생은 미루고 안한 보속을 먼저 하고 부모님을 찾아가겠다고 하는데 알로이시오 신학생에게 너는 무엇을 하겠느냐고 물으니 지금은 쉬는 시간이니까 이대로 쉬고 있겠다고 대답하더랍니다. 우리도 등잔에 기름을 늘 채우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립시다.
-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은 창세기가 전하는 노아 홍수 이야기를 상기시킵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상에 골몰하다가 다가오는 불행을 모르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니 깨어 있고,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으로 오늘 복음은 끝났습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을 기준으로 하느님이 우리를 심판하시리라고 믿고 있는 초기 신앙인들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삶을 배워 실천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자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제1독서 이사야서는 하느님에게로 시선을 돌린 사람의 마음 자세를 말합니다. 그는 “사는 길을 주님께 배우고 그 길을 따라가고...주님의 빛을 받으며” 걸어갑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 더불어 사는 사람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컫는 것은 그분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아버지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철저히 실천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생명의 기원으로 또 우리 삶의 원천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선해야 하고 자비로워야 하는 것도 우리 생명의 기원이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이시고, 우리 삶의 원천으로 그분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는 하느님이 죄인을 버리신다고 가르쳤지만, 예수님은 죄인들과 어울리면서 하느님이 그들과도 함께 계신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고통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믿었지만, 예수님은 고통을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해서 퇴치해야 하는 불행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서 하느님이 죄에 대한 대가로 병고를 주시지 않는다는 것과 하느님은 고치고 살리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말은 우리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에게 성령이 살아계시면, 그는 예수님 안에 볼 수 있는 하느님 생명의 일을 실천합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진리의 영, 그분이 오시면 그대들을 모든 진리 안에 인도하실 것입니다”(16,13). 성령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사는 길을 주님께 배우고 그 길을 따라가자...주님의 빛을 받으며 걸어가자”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에게는, 예수님의 길을 따르고 그분의 진리를 배우자는 말로 들립니다. 그 시대 유대교가 죄인이라고 버린 사람들과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우리도 배워서 실천하자는 말입니다. 성령은 그것을 배우고 실천하는 우리의 마음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의 숨결이십니다.
예수님의 삶을 배우고 그 길을 따라 실천하는 것은 먹고 마시는 일상에 묻혀서 자기 한 사람 사는 데에 골몰하던 과거와 결별하고, 우리 생명의 원천을 찾아 새롭게 사는 일입니다. 나와 무관하게 보이던 내 주변 사람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한 내 형제자매로 보이는 새로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과 주변을 새롭게 발견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 말하고 세례를 받은 사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을 원천으로 내 삶 안에 새로움을 발생시키는 일입니다.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가꾸는 일, 내가 획득한 자격증, 내가 가진 재물 등이 나의 참다운 미래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내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깨어 있어라” 또 “준비하고 있어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우리 생명의 원천이 우리 안에 살아 숨 쉬게 하라는 말입니다. 나를 사로잡고 있는 욕심과 허세에서 우리가 한발 물러서면 하느님의 숨결이 살아날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오늘 살아있는 것도 하느님이 하신 은혜로운 일로 새롭게 보일 것입니다. 은혜로운 삶입니다. 나 한 사람을 위하라고 주어진 생명이 아닙니다. 은혜로움을 깨달은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선하고 자비롭게 처신해서 은혜로움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우리가 깨어서 준비해야 하는 새로움입니다.
우리는 대단히 제한 된 시야를 지니고 삽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고 우리 자신만 크게 보이는 시야입니다. 이해타산(利害打算)이 가장 소중한 원칙으로 보이는 시야입니다. 우리의 욕심과 허영심을 채워주는 사람들만 돋보이는 우리의 시야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과 우리가 누리는 것이 절대적으로 소중한 우리의 시야입니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과 우리의 안락함을 위협하는 것은 무엇이든 단호히 거부하는 시야입니다. 오늘 이사야서가 말하듯이 “사는 길을 주님께 배우고 그 길을 따라 가는” 것은 주님의 시야 안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시야에는 우리 삶이 은혜롭게 보이고 우리의 이웃에게도 은혜로움을 보여주는 우리의 몸짓이 보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미래는 ‘먹고 마시는’ 우리의 일상적 삶이 보장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면서 열리는 그분의 시야 안에서 발생하는 우리의 실천이 우리에게 하느님의 생명과 미래를 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시야에서 은혜로움을 실천하며 산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운명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는 길을 주님께 배우고 그 길을 따라 가서” 하느님 생명의 새로움을 찾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높으신 분, 저 멀리 계시는 분, 우리가 정성을 바쳐 섬겨야 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삶 한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실천하는 은혜로움 안에 그 원천으로 함께 계십니다. 이웃에게 은혜로움을 실천하는 사람이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자유는 선하고 자비로운 실천을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자유의 숨결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우리의 창의력으로 자유롭게 또 다양하게 당신의 일을 실천하도록 우리 안에 침묵으로 함께 계십니다. “꽃처럼 피어났다가는 스러지고, 그림자처럼 덧없이 지나가는” 우리의 삶이라고 구약성서 욥기(14,2)는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이 살아 숨 쉴 때만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우리 일상 세상살이가 그 덧없음을 넘어 하느님과 더불어 남을 것입니다. 오늘부터 대림시기가 시작합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과 같이 우리도 “사는 길을 주님께 배우고 그 길을 따라...주님의 빛을 받으며 걸어가야” 하는 시기입니다. 하느님의 시야 안에서 은혜로움을 찾아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시기입니다.
새로운 전례주년의 첫날
-박상대 신부-
오늘 대림 제1주일과 함께 교회는 새로운 한해의 전례주년을 시작한다. 전례주년의 기본적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공생활, 그리고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한 하느님의 인류구원역사를 “오늘”, 그리고 “여기”에 재현하고 기념하는데 있다. 가톨릭교회는 하느님의 인류에 대한 구원사건의 신비를 1년의 전례주년 안에서 시기별로 나누어 기념함으로써 구원사건의 신비를 재현하고 이에 신자들의 삶을 질서 지우고자 한다. 전례주년은 특히 시간(時間)과 장소(場所)의 성화(聖化)를 강조한다. 매년 반복되기에 지루한 감을 주기도 하지만, 전례주년은 하느님께서 전 인류와 전 역사에 베푸신 구원의 신비를 1년이라는 주기(週期) 속에서 바로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사건으로 체험함으로써, 신자들이 자신의 삶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찬미와 기쁨으로 아버지 하느님 앞에 조금씩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지속적으로 마련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들은 이러한 전례주년의 신비 속에서 매번 그 사건(구원사건과 성인축일)의 의미를 충분히 묵상하여 전례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성화하여 이 세상과 인간의 구원을 위한 참다운 ‘성사(聖事)’로서의 사도직을 충실히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전례주년의 중심은 예수님의 성탄과 부활사건이다. 그래서 주님성탄대축일과 주님부활대축일이 전례주년의 두 기둥이 된다. 교회는 12월 25일 성탄대축일을 준비하기 위해 4주간의 대림시기를 지내며, 그 다음 주님세례축일까지 성탄시기를 보낸다. 주님세례축일 다음 월요일부터 연중시기를 지내는데, 이는 대략 연중 제5~7주간으로 중단된다. 그 이유는 주님부활대축일을 준비하는 사순시기 때문이다. 부활대축일은 매년 “춘분(3월21일)이 지나 만월(음력 15일) 다음에 오는 첫 주일”로 정해진다. 당해의 부활대축일이 정해지면, 거꾸로 46일째 되는 날이 사순시기(총40일)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이다. 이 기간 중 6번의 주일은 사순시기에서 제외된다. 주님부활대축일부터 부활시기가 시작되는데, 이는 주님승천대축일과 성령강림대축일까지 50일간 계속된다. 그 다음 월요일부터 사순시기로 말미암아 중단되었던 연중시기가 계속된다. 우리는 편리상 사순시기 이전의 연중시기를 연중시기[I], 부활시기 이후의 연중시기를 연중시기[2]라고 할 수 있다. 연중시기[2]는 한해 전례주년의 마지막인 연중 제34주간으로 끝난다.
따라서 전례주년은 크게 그 순서에 따라 대림시기 -> 성탄시기 -> 연중시기[1] -> 사순시기 -> 성주간 -> 부활시기 -> 연중시기[2]로 구분되는 것이다. 전례주년의 모든 시기는 통상 그 날의 사건과 의미를 밝히는 특별전례와 함께 성체성사, 즉 미사로 기념된다. 미사는 “주일미사”와 “평일미사”로 구분되며, 그 미사의 등급이나 중요성에 따라 “대축일미사”, “축일미사”, 또는 “기념미사”로 불리며, 모든 미사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구성된다. 특히 말씀전례를 다양하고 풍요롭게 하기 위하여 교회는 주일을 3년 주기 [가해, 나해, 다해]로 정하였고, 평일을 2년 주기 [홀수해, 짝수해]로 정하였다. 이는 말씀전례의 독서와 복음을 지정하기 위한 목적이다. 따라서 모든 주일미사에는 3년을 주기로 같은 독서와 복음이 봉독되며, 가해는 마태오복음을, 나해는 마르코복음을, 다해는 루가복음을, 부활시기에는 요한복음을 위주로 선택하였다. 평일미사의 독서는 홀수해와 짝수해의 원칙을 따라 신․구약성서에서, 복음은 매년 같은 복음으로 봉독된다.
그러므로 오늘 대림 제1주일을 시작으로 우리는 2005년 “가해”와 “홀수해”의 전례주년을 시작한 셈이다. 따라서 올해의 전례주년동안 우리는 부활시기와 특별한 대축일을 제외한 모든 주일미사에서 마태오복음을 미사의 복음으로 봉독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전례주년은 매번 기다림과 준비로 특성화된 대림시기로 시작된다. 대림(待臨)은 말 그대로 “올 것에 대한 준비”를 말하며, 대림시기는 그 준비기간이다. 무엇이 온다는 것이며, 어떻게 준비하라는 것인가? 교회가 말하는 대림은 이중적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하느님의 이 땅에 “벌써 오심”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성탄과 인자의 재림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의 종말설교(24-25장)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늘 깨어 준비하고 기도함”을 인자의 재림에 대한 준비과제로 제시한다. 노아의 홍수(창세 6-8장) 때나 재산을 노리는 도둑처럼 인자의 재림이 들이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재림하시는 인자 앞에는 누구나 철저히 홀로 서야 한다. 따라서 ‘늘 깨어 준비하고 기도하는 일’은 남이 대신해 줄 수 없는 각자 스스로가 해야 하는 일이다.
“예수님의 성탄과 재림”,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내포하고 있는 대림시기는 우리에게 과거지사의 성탄과 미래사건의 재림을 한꺼번에 묵상하도록 가르친다. 과거의 일과 미래의 일을 한꺼번에 현재의 순간으로 포착할 수 있는 방법은 “하느님을 내 삶의 한가운데 현존시키는 것” 뿐이다. 매년 같은 일을 한다고 식상해서는 안 된다. 벌써 오셨던 하느님과 다시 오실 하느님은 한결같은 분이시나, 우리 자신이 달라졌음을 깨달아야 한다. 나는 분명 작년의 내가 아니며, 어제의 내가 아니다. 거울을 앞에 놓고 자신의 겉과 속을 비추어 보라. 분명히 나의 모습을 달라졌다. 우리는 성장했고, 변했다. 그래서 올해의 대림도 그만큼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전례력의 마지막 날인 어제 연중 제34주간 토요일의 복음(루가 21,34-35)과 새 전례력의 시작인 오늘 대림 제1주일의 복음(마태 24,37-44)이 ‘늘 깨어 기도하고 준비하라’는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알파요 오메가이신 하느님 안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부디 우리 모두에게 아주 특별한 대림시기가 되기를 기원한다.
노아의 방주가 필요한 시대
-황창연(베네딕토) 신부 -
현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살얼음판을 걸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이 노아 시대에 홍수로 사람들을 하루아침에 쓸어 버렸듯이 도시 문명은 하루아침에 무너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도시는 먹고 마시고 소비하는 일 외에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습니다. 도시의 밤거리를 상상해 보십시요! 온갖 네온싸인와 등불들은 석유 에너지와 원자력 에너지를 무한정으로 소비해 버리는 행위입니다. 또 각종 술집과 음식점은 엄청난 양의 식량을 소비합니다. 1992년도에 15달러 하던 석유 값이 앞으로 20년 내에 100달러를 돌파할거라는 예측이 나옵니다. 2070년이면 북극의 얼음이 다 녹습니다. 지구 온난화로 빙하의 두께는 30년 전에 비해 그 두께가 반으로 줄어들었으며 지금도 빙하는 녹고 있습니다. 지금 이대로라면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 될 것이고 그로 인해 석유값은 폭등을 할 것이며 우리나라 경제 시스템과 사회 시스템은 멈춰버리게 될 것입니다. 재생가능한 에너지(대체에너지)에 대한 국가적, 종교적 준비가 없다면 우리나라는 노아의 홍수에 해당하는 재앙을 맞이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이 단 한 사람이라도 도시를 떠나 전기 없이도 살 수 있고 석유 없이도 생활할 수 있는 노아의 방주를 준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스콧니어링은 부부가 700평의 밭만 있으면 쌀을 제외한 모든 먹을거리를 제공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황토집을 잘 지어 나무로 불을 때면 에너지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 평창 생태마을에 황토집을 짓고 있습니다. 벽두께를 60cm로 지어 여름에는 에어콘과 선풍기가 필요 없고, 겨울에는 한 번만 불을 때도 한 주일 정도 훈훈할 수 있도록 구들을 놓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회 풍토는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어라 공부해서 좋은 대학 들어가서 남보다 더 많이 벌어 더 넓은 아파트 사고 더 부자가 되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죽는다면 그 인생이 얼마나 불쌍한 인생입니까?
우리네 인생은 키잡이를 놓친 방황하는 배와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산, 구름, 별들을 느끼고 감탄하기에도 우리의 인생은 짧습니다. 이제 많은 분들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경쟁사회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자연과 벗 삼아 존재의 충만함을 느끼는 전원생활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수원교구는 주교님의 특별한 배려로 평창(1만 9천 평)과 황간(13만 평)에 생태마을을 꾸며 놓고 있습니다. 이제 자식 다 키워 놓으시고 도시에서 살 만큼 사신 분들은 하느님과 함께 이 생태마을에서 농사를 지으시지 않겠습니까? 노아의 방주를 만들어 보시지 않겠습니까? 현대의 노아란 온갖 에너지를 소비하는 도시에서 빠져나와 농사를 짓는 사람들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교회 전례력은 오늘부터 새해를 시작하며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합니다. 예수님을 맞이할 그날은 개인적으로는 내 생의 마지막 날이요, 인류 공동체적으로는 세상의 마지막 날이기도 합니다.
사형수들은 자신이 죽을 날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피 말리는 날의 연속이라고 합니다. 특히 아침마다 교도관의 발소리가 어느 방 앞에서 멈추는지 숨죽이는 그 마음을 생각하면 살아 있는 것이 그들만큼 절실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과연 마지막 날을 아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르겠지만, 예수께서는 당신의 재림에 대해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마태 24,36ㄱ)고 하시며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모른다는 말씀을 짧은 문장에서 세 번이나 언급하십니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24,38-39ㄱ) 노아가 방주를 만들고 있어도 그것이 그들에게 아무런 경고가 되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날도 우리는 여전히 위기 불감증 환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상사’는 중요한 일입니다. ‘장애가 있기 전에는 일상의 평범함이 이렇게 소중하고, 행복한 일이란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고 어느 장애인이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시집가고 장가가고 장사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둔 사람들은 그 이유 때문에 주님의 잔치에 응하지 않았습니다.(루카 14,15-21 참조) 그러나 깨어 있는 사람들은 똑같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지만 주님의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그렇게 합니다. 남전선사는 ‘도란 평상심이다.’고 했습니다. 똑같이 일상을 살지만 각기 다른 차원에서 할 수 있습니다. 잠자는 사람은 밥을 먹으면서 어제 일을 후회하고 길을 가면서 미래를 걱정하지만, 깨어 있는 사람은 밥을 먹을 땐 밥만 먹고 잠잘 땐 잠만 자는, 현재를 충만히 사는 사람입니다. 현재에 몰입할 수 있는 것은 어린이다운 특성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24,42ㄱ) 어떻게 해야 깨어 있는 것입니까? 스물네 시간 잠을 자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영적으로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들 자신이 깨어 있다고 생각하며 사는 데 있습니다. 눈을 뜨고 있다고 다 보는 것도 아니고, 귀를 가지고 있다고 다 듣는 것도 아닙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요한 9,41ㄴ),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3ㄴ),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0,6ㄴ) 곧 눈 뜬 장님도 있고 귀를 가지고도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양들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천상병 시인은 <귀천>에서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했습니다. 고문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었으니 상처 속에 신음해야 할 것 같은 그가, 이 세상살이가 소풍이었고 아름다웠노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 다른 차원의 시각으로 삶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에페 5,14) 깨어 있지 않는 것은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열려 있고, 열려 있는 사람은 쉽게 깨닫고, 깨달은 사람은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어둔 밤의 절망과 타는 갈망과 노력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을 산행 길에서 절로 영글어 떨어진 밤 한 톨 줍다/만지작거리다 꽉 깨무는 순간 밤벌레 한 마리/고개를 쏙 내민다/나도 깜짝 놀랐지만/그 녀석은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이다/나는 하마터면 그 녀석의 징그러운 몸뚱이를/깨물 뻔했다는 사실에 놀랐고/그 녀석은 태어나면서부터 살아온 세상 전체가/갑자기 두 쪽이 나고 생명까지 두 동강 날 뻔한/일생 일대의 엄청난 사태에 놀랐다/아, 누가 있어 어두운 밤 속에 있는 나의 이 집도/흔들어 깨물어 줄 것인가?/그 앞에 나도 이 추한 몸뚱이를 그대로 드러내고 싶다/자기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세계가 박살나면서 나타난/시리도록 푸른 하늘/그 하늘을 보면서 밤벌레는 죽었다/나도 그처럼 죽고 싶다/단 한번만 그 하늘을 볼 수 있다면/굳이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지 않아도/그냥 지금 이대로 죽어도 좋다”(이대근, <가을 산행 길에서>)
이 글을 읽는 순간 ‘푸르고 시린 하늘을 단 한번만 볼 수 있다면 굳이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지 않아도 그냥 지금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그 깨어나고 싶은 절박함이 눈물겹도록 절절히 다가왔습니다. 저자가 밤벌레의 세계를 박살냈듯이, 주님이 바오로 사도의 세계를 박살냈듯이 나의 어둡고 단단한 세계도 깨물어 흔들어 주시기를 소망하며 한동안 ‘나도 그처럼 죽고 싶다’란 구절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문화와 상업 중심의 대도시 타르수스 출신, 벤야민 지파, 로마 시민권자,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구사할 줄 알았고, 율사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서 촉망받던, 누구보다도 철저히 율법을 준수하며 하느님을 섬겼던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기 위한 임무를 띠고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 지금까지 지녀온 가치관 전체가 두 쪽이 나는 체험을 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9,4-5) 그는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사흘 동안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세계가 박살난 충격과, 새롭게 열린 푸르고 시린 하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생은 이로 인해 대전환을 맞고 새롭게 태어나 깨달은 자로서의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필리 1,20)
아, 주님께서 어둔 밤 속에 있는 나의 이 집도 흔들어 깨물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깨어 준비하는 삶
-경규봉 신부-
오늘부터 교회력으로 새해가 시작된다. 교회는 예수님 기다리는 대림절로 새해를 시작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곧 기다림 - 자신의 완성을 기다리고 하느님을 기다리는 것임을 가르쳐준다.
기다림은 삶의 특징이다. 기다림이 없는 삶은 죽은 삶이다. 그것은 지독히도 지루한 삶이고, 사람으로 하여금 낙담과 절망에 빠지게 한다. 의욕을 잃게 하고, 우울증이나 기타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리게 한다.
미국의 어느 의과대학에서 쥐를 가지고 실험을 했다. 쥐를 세 그룹으로 나누어 첫째 그룹의 쥐에게는 가두어둔 상태에서 음식을 풍부히 제공하여 언제든지 먹고 싶을 때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했다. 둘째 그룹과 셋째 그룹의 쥐에게는 우리 안에 쳇바퀴를 넣어두고 매일 30분 동안 전류가 흐르도록 했다. 그런데 둘째 그룹의 쥐에게는 어떤 일을 해도 전류가 통하도록 장치해 놓았고 셋째 그룹의 쥐에게는 쳇바퀴를 50번 돌리면 잠시 동안 전류가 끊어지도록 장치를 해놓았다. 물론 전류가 흐르는 시간은 둘 다 똑같이 30분이 되도록 했다. 이렇게 3주 동안 실험을 계속 했는데, 첫째 그룹의 쥐들은 우울증이 시작되었고, 둘째 그룹의 쥐들은 거의 우울증에 걸려서 전기 자극에도 무감각해졌는데, 셋째 그룹의 쥐는 건강했다고 한다.
이 실험결과 ‘물질이 풍요로운가? 그렇지 않은가?’ 또는 ‘고생이 심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 우울증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장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 의학적으로도 증명되었다고 한다(이상구저 “복음과 건강”).
기다림의 삶을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고, 기다림의 삶을 살 때 사람은 건강하고 밝은 삶을 살 수 있으며 모든 역경과 고난을 이겨낼 수가 있다. 기다림은 우리로 하여금 역동적인 삶을 살게 하며 의미와 보람을 찾게 한다. 그리고 누구나 기다림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다만 무엇을 바라고 기다리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이 결정되고, 그의 삶의 아름다움과 추함이 결정된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적 이득만을 바라고 원할 때 그의 삶도 결코 아름다울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다갔지만, 우리에게 기억되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은 까닭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현실적인 이익만을 바라고 살았기 때문이다. 나와 내 가족, 내 주변의 사람들에 대한 이익만을 꿈꾸었을 때,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 주변의 소속의 사람들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러나 백범 김구 선생 같은 분은 조국이 일제치하에 있을 때에도 언제나 조국의 해방을 바라고 기다렸으며, 조국이 해방된 후 남북으로 분단되었을 때에는 조국의 통일을 바라고 기다리는 삶을 사셨다. 그래서 누가 당신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내 소원은 첫째도 통일이요 둘째도 통일이며 셋째도 통일이라고 답하셨다. 그분이 칠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강미가 넘치고 정력적이었던 이유는 당신의 숭고한 꿈과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분이 비록 통일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비명에 가셨지만, 그분의 희망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그분의 삶 또한 아름다웠고 모든 한국인들로부터 존경받는 분이 되셨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희망, 원대한 꿈을 갖는다는 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해준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인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바라고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지금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임하시기를 기대하고 종말에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과 만물의 완성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이처럼 원대한 꿈과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 세상을 보면 그가 비록 그리스도인이지만 그의 삶은 결코 아름답지 못한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성당 다니는 사람도 도둑놈이고 사기꾼이고 못된 놈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 대림절이 시작된 지 십 수세기가 흘렀지만, 아직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희망하고 기다리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한지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우리는 그리스도와 너무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임하시기를 아직도 기도하지 못하고 있다. 그 때문에 세상은 여전히 변화되지 않고 있으며, 오늘도 많은 이들이 불의에 쓰러지고 상처받고 신음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 그리스도를 희망하는 삶이 우리에겐 절실히 필요하다.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먼저 우리자신이 변화를 구해야 한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기다림의 삶의 자세에 대해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노아의 홍수 때의 일을 말씀하시며, 노아가 방주에 들어갔던 날까지도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다가 홍수를 만나 모두가 휩쓸러 갔다고 말씀하신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 그것은 누구나 하는 일이고 극히 일상적인 일이다. 거기에는 선악의 구별이 있을 수가 없다.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삶의 밑바탕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홍수에 휩쓸려갔다. 더 나아가서 밭에 두 사람이 있고, 두 여인이 맷돌을 갈고 있는데 하나는 데려가고 다른 하나는 버려둔다고 말씀하신다. 똑같은 상황인데도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께서 먹고 마시고 시집 장가가는 일 자체에 관심을 두고 말씀하신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런 일상적인 일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일을 하는 중에도 어떠한 삶의 자세를 갖고 사느냐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자세, 하느님을 가다리는 삶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하느님을 기다리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아무리 그가 그리스도인이며 세례를 받았을지라도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다림의 자세에 대해 뒤이어 설명해 주신다.
“깨어 있어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들지만, 그런 일상적인 일에 취해서 빠져있지 말고,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정신을 흐트러지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일상적인 것에만 얽매이게 하는 모든 것들에서 깨어있어라. 마약, 알코올, 도박, 춤 등 세상 것의 재미에만 빠지지 말고 깨어있어라. 형이하학적인 것에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쏟지 말고 깨어 있음으로써 형이상학적인데 마음과 정신을 기울이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면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고 동물과 다른 바 없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은 저 높은 곳을 향해야 하므로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영혼과 지성이 맑은 상태로, 깨어있는 상태로 유지되지 않고 지상 일에만 마음을 쏟아 흐려진다면 우리는 결코 기다림의 삶을 살수도 없고 예수를 맞이할 수도 없으며 자신의 완성을 이룰 수도 없다. 그러므로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준비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신다.
삶은 곧 준비이다. 미래를 향한 준비이다. 학생들이 시험을 준비하고, 결혼 적령기의 처녀들이 결혼을 준비하듯이, 삶은 어떤 결실을 얻기 위한 준비이다. 준비하지 않은 상태로 좋은 결실을 맺을 수가 없다. 화가가 한 점의 좋은 그림을 얻기 위해 수없이 그림을 그리는 연습을 하고, 똑같은 그림을 수없이 반복하여 그린다. 좋은 그림은 그가 얼마만큼 연습했고, 준비했느냐에 따라서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얼마만큼 나의 삶을 준비했느냐에 따라서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 우리가 우리 삶의 결실을 얻고자 한다면, 자아 완성과 하느님 나라라는 결실을 얻고자 한다면 그에 알맞은 준비를 해야만 한다. 아무런 준비 없이 우리 인생의 결실을 맺을 수가 없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성당에 다니고 아름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 나라를 위한 준비요,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준비이다.
오늘 대림 첫 주일을 지내면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자.
나는 정말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나의 영혼과 마음과 정신을 맑은 상태로 깨어 있음으로서 그리스도를 맞이할 자세를 갖추고 있는가?
나는 내 삶의 결실을 맺기 위하여 오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하여 그에 합당한 준비를 하고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준비하며 깨어있는 삶을 살 때,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임하시고, 종말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고, 우리의 삶의 열매가 풍성히 맺어질 것이다.
기다려라
-정 승 현 신부-
하느님은 우리의 꿈,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그분은 넘치게 우리의 꿈을 이루어주십니다.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현실의 거짓과 부정에 맞서지 않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사실 하느님이 필요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께서 오시기를 고대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가며 부르짖습니다.
우리는 현실의 어둠을 밝히려 애쓰며
진리와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위해 투쟁합니다.
우리는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 꿈을 이루어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바를 온전히 이루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이천 년 전에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꿈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그냥 물거품으로 사라지지 않음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꿈이 되셨습니다.
그분 안에 이루어졌던 그 꿈은
그분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
우리 - 인류 공동체 - 안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충분히 깨닫지 못해, 정확히 표현할 수 없어 안타깝지만
분명 인류의 꿈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처음 오셨을 그때처럼 말입니다.
이사야는 그 꿈을, 그 꿈이 실현될 날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장차 어느 날엔가 주님의 집이 서있는 산이 우뚝 서고
모든 언덕 위에 드높이 솟아 만국이 그리로 물밀듯이 밀려들리라.
그때 수많은 민족이 모여 와서 말하리라.
‘자, 올라가자, 주님의 산으로, 하느님께서 계신 전으로!
사는 길을 그에게 배우고 그 길을 따라가자.’
그가 민족 간의 분쟁을 심판하시고
나라 사이의 분규를 조정하시리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아니하리라.”
사람들이 하느님의 길을 따라 삶으로써
전쟁이 없는 그 날이 오리라는 우리의 꿈은 꼭 실현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되었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두 종류로 구분하십니다.
하나는 깨어있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깨어있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표현대로 한다면
꿈이 있는 사람과 꿈이 없는 사람으로 나누어집니다.)
어느 시대나 깨어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꿈이 이루어지는 그 날, 그 때에도 그럴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에도, 그리스도 예수의 탄생 때에도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노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도 바로 그럴 것이다.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도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다가 홍수를 만나 모두 휩쓸려갔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또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하지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깨어있어라.”
바오로 사도는 진정한 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로마 사람들에게,
군대와 법으로 이른바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구가하던 사람들에게,
헛된 꿈에서 깨어나라고 외칩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처음 믿던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밤이 거의 새어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십시오.”
우리의 꿈은 “꿈 깨라!” 할 때의 그 꿈이 아닙니다.
그런 꿈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꿈, 하느님의 꿈이 아닙니다.
우리의 꿈은 하느님과 함께 꾸는 꿈입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꾸는 꿈이 아니라 대낮에 두 눈 부릅뜨고 꾸는 꿈입니다.
그 꿈을 위해 지금은 깨어있을 때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깨어 기다립니다. 우리의 꿈을 이루어주실 그분을!
[“지금의, 있는 그대로의 이 세상에 만족하시오.”
“내가 만약 행복한 세상을 꿈꾸지 않는다면
나는 그런 세상을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어째서 당신은 그런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시오?”
“내가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 일 이외에는 하고 싶은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L. 뒤발 뤼시엥, 『달과 놀던 아이』, 159면.]
하느님의 때를 준비하자
-강길웅 신부-
하느님의 계산은 인간의 계산과는 다릅니다. 정말 다릅니다. 신앙인은 진정 하느님의 계산을 늘 염두에 두고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기쁨과 은혜는 바로 그것을 아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이 은혜를 모르면서 사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신앙을 자꾸 인간의 계산으로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외롭고 팍팍하며 또 믿는 것만큼 고달픕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제 또 기다림의 자세로 성탄을 준비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가슴 조이며 기다리고 있고 또 그 준비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인생은 그 자체가 기다림이고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기다리셨습니다.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하느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너무도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오늘 성서가 전하고 있는 중요한 단어는 시간입니다. 즉 때를 말합니다. 그것도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계획하시는 때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보통 때가 아닙니다.
세상 만사는 다 때가 있습니다. 전도서(3장)의 말처럼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고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은 때를 잘 알아야 합니다. 메뚜기도 철이 있다고 사업이나 장사도 때를 놓치면 큰 손해를 봅니다. 공부도 그렇고 사는 삶의 여러 부문이 그렇습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구원의 때를 잘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생각하는 때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또 그분이 원하시는 때를 말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중요한 때를 카이로스(Kairos)라고 합니다. 여기서 카이로스라는 말은 충분히 찬 시간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곡식이 익은 것은 익을 만한 시간과 노력이 충분히 차 있었기에 익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다 때가 되어 오신 것입니다. 이게 카이로스며 또 때가 차면 재림하십니다. 이것이 카이로스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때는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섭리요 계획입니다.
이처럼 대림절은 두 가지 형태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그 분을 영접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닦고 생활을 준비하는 경건한 때입니다. 그리고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시간이 됩니다.
어떻게 보면 대림절은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때이지만 더 분명하게 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기를 뜻 없이 헛되게 지내서는 안됩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희망의 메시지가 들려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 북쪽의 이스라엘은 이미 망해 있었고 남쪽의 유다 왕국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 격이었습니다.
백성들도 공포와 불안에 떨었으며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에 이사야가 나타나서 하느님께서 다시 찾아오신다는 기쁨과 희망의 소식을 전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절망이라는 막다른 골목에서 새 길이 열립니다.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의 말씀에서도 깨어나야 할 때가 왔다고 바오로 사도가 외치고 있는데, 성 아우구스띠노가 바로 이 성서 구절을 읽고는 완전히 변화되며 새 인생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는 본래 행복은 쾌락에 있다 하여 온갖 탐욕적인 생활을 다 했지만 그러나 그럴수록 더 허전하고 삶은 메마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번민과 몸부림 끝에 우연히 "집어서 읽어라."라는 말을 듣고는 얼른 방으로 달려가 바오로 서간경을 펼쳐 보니 바로 로마서 13장 13절이 나왔습니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그때까지 눈물 속에서 몹시 괴로워하던 아우구스띠노는 바로 이 대목에서 너무도 큰 하느님의 은총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드디어 찾던 것을 찾았고 만나고자 하던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실로 구원의 때를 만났던 것입니다.
대림절은 우리가 지난 1년을 반성하면서 보다 더 성숙하고 새롭게 변화되는 은혜로운 시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림절은 성장의 시기이고 또한 회개의 시기입니다.
하느님의 계산은 우리의 계산하고는 다릅니다. 정말 다릅니다. 우리가 원하는 때에 그분이 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원하시는 때에 불쑥 오십니다. 따라서 늘 단정한 몸과 마음으로 깨어 준비하도록 합시다. 그것이 축복의 길이요 또한 아름답고 멋지게 사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