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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중의 서시(花中此物似西施)”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년 ~ 846년)는 그의 시에서, 진달래를 왕소군(王昭君), 초선(貂嬋),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중국 역사상 4대 미인 중 한 사람으로 일컬었던 춘추시대 월나라 태생 서시에 비유했습니다.
서시가 강가에 앉아 빨래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때 물고기가 강물에 비친 서시의 아름다움에 반해 헤엄치는 것을 잊고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고 합니다. 이런 서시의 아름다움에 빗대어 생겨난 고사가 ‘침어(沉魚)’입니다.
과연 활짝 핀 영취산 진달래는 “꽃 중의 서시”였으며 이를 보는 이는 순간 ‘침어(沉魚)’로 화(化)하게 되는 극강의 “봄의 전령사(傳令使)”였습니다.
버스가 여수시 묘도와 광양시 금호동 사이의 바다위에 건설된 이순신 대교를 지납니다. 이곳 일대는 노량 해협과 인접한 지역으로, 임진정유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의 주 활동 무대 중 한 곳입니다.
이순신(李舜臣)대교는 세계 4대 미항도시 여수에서 광양을 잇는 순수 우리 기술로 시공한 국내 첫 현수교로 총연장 2,260m, 폭은 25.7m, 주탑과 주탑사이 주경간장 1,545m는 충무공(忠武公) 탄신해인 1545년을 기념한 왕복 4차로의 3경간 대칭 현수교로 국내최대, 세계7위 규모의 현수교입니다.
이순신대교를 건너서 "묘도 이순신대교 홍보관"에 도착합니다. 묘도는 이순신장군이 조선수군을 거느리고 건너편 순천왜성에 주둔했던 고니시 장군과 대치했던 유서깊은 곳입니다.
이순신대교 홍보관에 들러서 10분 경관을 보고서 다시 버스를 탑승하여 10여분을 더가서 오늘 산행의 들머리인 "돌고개 주차장"에 도착합니다.
곧바로 산행을 시작합니다.
영취산(靈鷲山)은 본시 불교와 관련된 지명으로 고대 인도의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그리하(王舍城) 주위에 있던 산인데 석가모니의 설법장소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여수 영취산의 생김새가 인도의 영취산과 비슷하다 하여 “영취산”이라 했다고 합니다. - 『대동여지도』에는 영취산이라는 지명이 전국적으로 8곳이라 함 -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이자 나라의 역사가 시작된 곳에 대해서 두 가지 설이 전해오고 있다고 합니다. 한 곳은 오늘의 산행지인 영취산이 있는 “여수”이고 또 한 곳은 여수 서편의 “고흥”으로 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비파형동검 - 검이 아니라 창임 - 의 90%가 바로 영취산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단일 화학공단으로서 세계 최대규모인 여수화학공단을 조성할 때에 지표조사를 통해서 발굴된 것이라고 합니다. 여수는 상고시대에 강력한 정치집단이 있었다는 것을 발굴 유물을 통해서 추정을 가능하게 합니다. 전남에는 전세계고인돌의 약 30%가 산재하고 있어서 이곳이 인류문명의 시원지이며 상고시대 천하의 중심지였음을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최소한 기원전 4세기에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하는 중국의 고대 신화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의 서술형식을 보면 먼저 산경(山經)과 해경(海經)으로 나뉘고, 해경(海經)은 "바다(海)"를 기준으로 목차를 잡기를 1권 해외남경(海外南經), 2권 해외서경(海外西經), 3권 해외북경(海外北經), 4권 해외동경(海外東經), 5권 해내남경(海內南經), 6권 해내서경(海內西經), 7권 해내북경(海內北經), 8권 해내동경(海內東經), 9권 대황동경(大荒東經), 10권 대황남경(大荒南經), 11권 대황서경(大荒西經), 12권 대황북경(大荒北經), 13권 해내경(海內經) 등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상고시대에는 중국인들이 보기에 바다의 나라인 한국이 바로 천하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바다"를 기준으로 해서 목차를 구분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료를 하나 옮겨봅니다.
《潜夫论•三十五卷•志氏姓》【漢】王 符/撰
昔周宣王亦有韓侯,其國也近燕,故詩云:“普彼韓城,燕師所完。”其後韓西亦姓韓,為魏滿所伐,遷居海中
옛 주선왕 때 또한 한후(韩侯)가 있었는데 ,그 나라는 연(燕)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옛시(故诗)에서 " 그 거대한 한성(韩城)은 연(燕)의 백성에 의해 완공이 되었다. " 라고 했다. 그 후 한서(韩西)이고 또한 성(姓)이 한(韩)이다. 위만(魏满)에 의해서 정벌 당하여 海中(해중)으로 옮겨갔다.
위의 기록은 기자조선이 위만조선으로 대치되고 기자조선 세력은 남하하여 마한을 건국한 후에 건국주체가 한씨(청주한씨)가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위와 같이 중국사서를 보면 한반도 남부지역을 가르키는 말로 " 海中(해중) "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본래 상고시대에 한국이 천하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한국을 기준으로 동아시아를 " 海中(해중) " 해내(海內) " " 해외(海外) " 등으로 구획해서 불러왔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중국인들에게는 한국은 " 바다 속의 중원(中原) 즉, 해중(海中) " 입니다.
현대에 들어서 소위 순수 중국인을 말하는 "화하족(華夏族)"은 고대 한국인임을 중국학자들이 인정하는 바입니다. 부계유전자 O3a3 P201은 한국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인골에서 추출되는 유전자인데, 정통중국왕조인 하은주를 관통하는 중원대륙에서 출토되는 지배계급 인골이 바로 이 유전자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또한 중국 소수민족 묘족의 부계유전자인데 묘족은 치우천황을 시조로 섬기는 민족입니다. 중국은 예전에는 염황(炎黃)의 후손 즉,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와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의 후손이라고 했는데, 현대에 들어서 이에 더하여 치우천황(蚩尤天皇)을 함께 중국의 시조로 모신 "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 "이라는 사당을 중국정부가 건립하여 치우천황을 중화민족 시조의 한 분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하화족 즉, 중화민족이 고대 한국인임을 밝히는 논문 등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즉 고대한국인(東夷族)=하화족(중화민족)입니다. 오늘날 일본의 메인스트림도 또한 바로 이 부계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나아가 한국은 인류문명의 종주국입니다. 이를 증명해주는 것이 바로 전세계에 분포하고 있는 고인돌유적입니다.
여수 화학공단은 이곳이 인류문명의 시원지였음을 알려주는 역사적으로도 그 의미가 지대한 유적지라는 것을 만세토록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진례봉 0.9km 지점을 통과합니다.
산행 20여분 후부터 본격적으로 진달래 군락지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마치 "기승전결"의 진달래 이야기를 해주듯이 진달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진달래 군락지를 지나면서 산행을 계속하는데 오늘 산행을 함께한 미산대장님께서 하늘의 구름을 가리키면서 동물을 닮았다고 하셔서 쳐다보니 제가 보기에는 강아지를 닮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구름의 형태는 사라졌으나 오늘 산행을 구름도 반기는 것같아서 사진촬영을 합니다.
영취산의 최고봉인 진례봉(進禮峰)에 도착합니다. 정상석의 필체가 힘차고 수려합니다.
진례봉에서 북쪽을 바라보니 하이스코 순천제철소가 멀리 보입니다. 이 하이스코 제철소 바로 왼쪽에 나즈막하게 보이는 산이 전라도에서는 유일한 왜성인 순천왜성(順天倭城)이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고니시 유키나가 장군이 왜성을 축조하고 점령했던 곳인데 바로 이 일대에서 조명수군 15만여명, 조명 육군 20여만명, 그리고 왜군 10여만명이 최후의 전투를 벌여 임진, 정유 조일전쟁을 종식시킨 최대의 격전지입니다. 순천왜성이 바로 임진, 정유 7년 조일전쟁이 사실상 막을 내린 곳입니다.
순천왜성은 행정구역 상 순천시 신성리인데, 조일전쟁 후에 왜귀(倭鬼)가 출몰하여 인근에 사람이 거주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후 100여년간 무인지경이 되었고, 다시 사람들이 이곳에 돌아왔으나 여전히 왜귀(倭鬼)가 출몰하여 이를 물리치기 위해서 주민들이 이순신 장군 사당을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이후에 비로소 왜귀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예전처럼 이곳에 정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유서가 있는 이순신 장군 사당이 바로 순천 "충무사(忠武祠)"입니다. - 순천 충무사 최초건립 년도 1697년 -
또한, 이 일대에는일본인이 군함이나 배를 타고 들어오면 피를 토하고 죽을 것이라고 했다는 이순신 장군의 일화가 전해오는데 ,일제 때도 일본인들이 이러한 터부를 무서워 해서 일본사람들은 이곳으로 배를 타고 들어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호국의 신이며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온 충무공은, 현대에 들어서는 바로 앞에 건설된 하이스코 순천제철소 직원들이 자진해서 사당을 돌보며서 국가의 안녕과 회사의 안전과 번영을 기원하는 장소로 자리잡았다고 합니다.
진례봉을 내려와 도솔암 입구에 이릅니다. 그런데 예전에 왔을 때는 이곳을 갔었는데 오늘은 공사중이라 출입금지 입니다. 조그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머뭇거리다 다시 하산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또 다른 이정표가 두 개 붙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눈에 띕니다. 바로 "김총(金摠) 동굴" 표지판입니다.
이 동굴은 후백제 건국과 관련이 있는 김총 장군이 도를 닦으면서 만년을 보냈다고 전해지는 곳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이곳 진례산 성황신으로 모셨고, 여수시 적량에 사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김총 장군은 통일신라 수군으로써 진례산 아래 적량에 치소를 만들고, 왜적의 침입에 맞서 싸우던 중, 방수군일 때 견훤을 만나 인정을 받아 후백제를 건국하면서 경호대장인 인가별감이 되었다고 전해지는 인물입니다.
후백제와 관련하여 순천지역의 대표적인 인물이 둘 있는데 순천김씨 시조 김총 장군과 견훤의 사위인 순천박씨 시조 박영규입니다.
박영규는 왕건에 귀부하여 개국공신이 되었고, 또한 왕건에게 딸인 동산원부인을 시집보내 군(君) 작위를 받았는데 동산원부인은 견훤의 외손녀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왕건의 아들 정종에게 동산원부인의 친동생들인 문공왕후와 문성왕후를 시집보내 국구(國舅)로서 큰 권력을 누렸습니다.
반면에 김총 장군은 왕건에게 귀부하지 않고 이곳 진례산 김총 동굴에서 최후를 맞이했다고 합니다.
후백제와 고려 왕건의 대립의 실상은 순천을 중심으로 하는 전남 동부지역 정치세력과 나주를 중심으로 하는 전남 서부지역 정치세력 간의 대립으로서, 나주에서 출생한 나주오씨 장화왕후 소생 고려 2대 황제 혜종대왕을 옹립한 나주세력이 승리함으로써 고려가 개국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 연유로 조선왕조가 전주를 본향으로 했듯이 고려는 사실상 나주를 본향으로 대하여 고려의 도성인 개성 다음으로 나주에 많은 군사력을 배치하고 이곳을 지키게 하였으며 나주평야에는 1천 여년간 혜종대왕을 모신 사당이 있어왔는데 이것을 일제가 허물었다고 합니다.
김총 장군은 순천김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그 후손으로는 영의정 김종서 장군이 있고 현대에는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 있습니다. 김총 장군은 훗날 순천시의 성황신이 되었습니다. 성황신(城隍神)은 민간에서 숭배하는 마을의 수호신입니다. 지금도 순천시에는 김총 장군을 성황신으로 모시는 사당이 있습니다. 또한 그는 태봉을 건국한 신라왕자 궁예 대왕의 장손이라고 전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시루봉이 보입니다.
시루봉 아래 평상에서 간단한 요기를 합니다.
막 일어서서 시루봉을 가려고 하는 한동안 해어졌던 미산대장님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도솔암을 다녀왔는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출입금지"라고 적혀 있어서 가지 않았다고 했더니 미산대장님은 통제선을 넘어서 그곳을 다녀오셨다고 합니다. 역시 '대장(隊將)님"은 "대장(大將)님"이십니다. 저는 다시 평상에 앉아 미산대장님이 요기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미산대장님은 준비해오신 요깃거리를 자꾸 저에게 주십니다.
이후 시루봉을 오를 때 내내 건네주신 오렌지는 참 꿀맛이었습니다.
미산대장님이 점심요기를 마치자 가방을 평상에 놔두고 시루봉 정상으로 올라갑니다.
이곳에서 다음매일산악회 회원 몇 분을 만났는데 이분들은 서둘러서 영취산으로 향했습니다. 멀리서 보니 가볍게 영취산을 오르는 모습에서 산행의 이력이 느껴집니다.
흥국사를 둘러보는데 시간을 할애할 작정으로 영취산으로 가지 않고 시루봉에서 다시 하산하여 흥국사로 갑니다.
영취산 흔들바위에 도착합니다. 커다란 바위가 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 것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바위가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 어울릴 것같습니다.
산행길 양쪽에 거대한 많은 돌탑들이 조성되어 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백팔돌탑공원"의 돌탑이었습니다. 이곳에 예전에도 여러번 왔었는데 왜 지금까지 안내표지석을 보지 못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생각없이 주마간산으로 등산을 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백팔돌탑공원 표지석에 도착합니다. 이곳 계곡 건너편이 우리나라의 대표적 호국사찰인 흥국사(興國寺)입니다.
흥국사로 들어가서 사찰의 요모조모를 둘러봅니다. 볼거리가 의외로 많은 사찰입니다.
끝으로 여수에 있는 이순신장군 사당을 소개합니다.
‘國家軍儲皆靠湖南(국가군저개고호남) 若無湖南是無國家(약무호남시무국가)
‘국가 군량을 호남에 의지했으니 만약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이순신 장군이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 적은 내용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으로 관민의 영수가 되어 곡창 호남을 지켜내고 왜군을 패퇴시켜 나라를 보전하셨습니다.
장군의 주요 활약지가 바로 전라좌수영이 있었던 여수였던 이유로 선조대왕은 손수 조칙을 내려서 여수에 이순신 장군의 사당을 건립하게 하였으니 그곳이 바로 충민사(忠愍祠)입니다. 충민사는 선조대왕이 직접 건립한 이순신 장군 사당으로서는 유일무이한 사당입니다. 또한 우리나라에 수백 곳에 이르는 이순신 장군 사당중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여수 충민사의 건립연도는 1601년(선조 34년)으로 통영 충렬사보다 62년, 아산 현충사보다 103년 전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호국충정과, 그리고 장군과 함께 했던 이 지역의 수많은 호국영령의 후세를 향한 가르침을 되세겨 보면서 오늘 산행을 마감합니다.
산행을 내내 함께했던 미산대장님, 감사합니다.
정말 즐거웠고, 봄날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었던 산행이었습니다.
그리고 흔쾌히 여정을 변경하여 이순신대교를 경유해주신 기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P.S.
백팔 돌탑은 이 지역 출신 향토 실업가 대신기공 대표(김철희, 62세)가 사비를 들여 임진왜란 당시 이 계곡에서 전투에 맹활약하다 산화한 의승군의 넋을 기리고 또한 여수 산단 조성 시 희생된 산업역군들을 위로하고 나아가 산업단지 내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5년에 걸쳐 조성한 108개의 돌탑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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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후기 끝내줍니다
이런 후기가 진짜 후기
수고하셨습니다
수상비님, 아름다운 답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남은 저녁시간도 의미 있고 행복한 시간되세요...
멋진 후기 잘 보았습니다
영취산은 하늘이 열렸군요
완주모악산은 하산할때까지 보슬비가 내렸는데요
란초님 답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광양에 도착할 무렵에 햇볕이 났습니다.
진달래 군락지의 진면목을 보고 왔습니다.
남은 저녁시간도 행복하세요...
아는만큼 보이죠
산행도 예습하고 가면 더 많이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예습 복습이 완벽한 산행기의 달인
보나파르트 님 덕분에
산행 후기 게시판이 더욱 빛을 발합니다
동행한 영취산 산행 유익한 하루 여정이었습니다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영취산 일정에
순수 우리 기술로 건설한 역사적인 의미가 담긴 이순신 대교 전망대를 경유하는 것으로 지정했으면 좋겠습니다
요청 덕분에 다같이 좋은 구경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취산 정상 진례봉 아래 절벽 한켠에 자리한 도솔암이라는 암자 이름에 마음이 끌려 선을 넘어 다녀왔습니다
지리산 칠암자 순례 중에서
처음 만나는 암자 이름도 도솔암입니다
미산대장님, 답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함께한 산행 정말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통제선을 용감하게 넘어서 도솔암을 다녀오신 것을 보고서 놀랍기도 하고 유쾌하기도 했습니다.
다음 산행에 또 뵙기를 기대해봅니다.
남은 저녁시간도 유익하고 즐거움으로 채워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