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특집
다섯 개의 짧은 글
안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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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긴 글을 쓰기가 어렵다. 20매 정도의 원고청탁도 적지 않은 부담이 되고, 50매가 넘어가는 글은 아예 시작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겨우 네다섯 페이지짜리 단문 하나를 붙들고 한나절을 씨름하다 보면, 내가 글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 아닌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라서 노트를 펴고 몇 줄 적어놓고는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할 때가 많다. 해야 할 이야기는 분명히 더 있을 텐데, 주춤거리다 보면 어느새 오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다. 그러면 어김없이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 나오고, 그때부터는 글쓰기가 아니라 지우기, 짜깁기가 시작된다. 단어나 토씨 하나를 붙들고 고쳐쓰기를 반복하고, 끝내 문장을 통째로 들어내기에 이른다. 집을 다 짓기도 전에 수선부터 하는 꼴이니, 처음에 괜찮을 것 같았던 글이 만신창이로 끝나곤 한다.
20년 가까이 한 월간지에 원고지 대여섯 장짜리 짧은 글을 연재하면서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 습관이 되었는지 모른다. 나이 들면서 집중력이 떨어진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글을 쓸 때 내가 아무런 계획을 하지 않는 데 있다. 무엇에 관하여 쓸지,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갈지를 정해 놓고서, 도중에 엉뚱한 샛길로 빠지지 말아야 제대로 된 글이 될 터인데 그러기가 어렵다. 그때그때 스쳐 가는 낯선 생각이나 짧은 질문들을 따라가고, 그 흔적들을 붙잡아 두는 글에만 만족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글의 호흡이 짧고 깊이가 없고 산만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변잡기, 소소한 사물들의 관찰기록, 동네 한 바퀴를 돌아오는 산책과도 같은 짧은 글 한 편을 마감 날이 되어서야 겨우 넘겨준다. 짧은 해방감 뒤에는 긴 침묵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구석에 처박혀 있는 미완성 메모들을 뒤적이고, 어딘가에 숨어서 달아날 기회만 노리고 있을 아이디어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잠이 안 온다고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잠이 오지 않듯이, 초조해할수록 글로 옮길 만한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다. 연필은 허공에 멈춰 있고, 펼쳐놓은 노트는 며칠째 그대로 비어있고, 부서진 낱말들은 지우개 가루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럴 때는 써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글이 아닌 다른 것으로 그 빈 자리를 채워 넣으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은 내게 일관된 관심사나 뚜렷한 목표가 없어서일 것이다. 이 글들에는 목적지 없는 배회, 그 길에서 만난 것들에 대한 기록 이상의 그 어떤 원대한 계획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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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나무는 집이 되고, 어떤 나무는 나룻배가 된다. 무거운 짐을 싣는 수레가 되고, 천상의 소리를 전하는 악기가 된다. 천 길 깊은 땅속의 검은 석탄이 되고,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이 된다. 그러나 나무는 자신이 나중에 무엇이 될지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무엇이 되려 하지 않고, 무엇이 되든, 무엇에 쓰이든 개의치 않는다. 세상에 대한 원망도 분노도 없이 한결같은 자세로 지금 해야 할 일에 전념하며 한세상을 견뎌낸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책상의 나뭇결은 어느 깊은 숲속에서 물푸레나무 한 그루가 지나온 긴 세월의 기록이다. 그 안에는 속세의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고요한 수도자의 영혼이 숨 쉬고 있다. 그 앞에서, 무엇이 되거나, 되지 않으려 안달복달하는 것으로 전 생애를 탕진한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보잘것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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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껍질을 벗기면 희고 달콤한 과육이 나오고, 그 안에는 다섯 개의 검고 단단한 씨앗이 들어있다. 사과 열매는 이 작은 씨앗들을 옮겨주는 들짐승과 새들을 위해 사과나무가 마련한 넉넉한 선물, 일종의 사례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이 거래는 공정하다. 받기만 하는 쪽도, 빼앗기기만 하는 쪽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사과의 과육을 취하고 씨앗은 버린다. 씨앗들이 어딘가에서 싹을 틔우든 말든 개의치 않는다. 사과가 우리에게 준 것만큼 우리 쪽에서도 뭔가를 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다. 선물을 받기만 하는 것, 누릴 줄은 알지만 베풀 줄 모르는 것, 이것이 우리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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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에서 방어하는 적을 제압하려면 공격하는 부대는 최소 세 배의 전력을 가져야 한다. 오른팔을 다쳐서 보름 동안 깁스하고 지내면서 이 말을 떠올렸다. 까마득한 대학 시절, 교련 시간에 주워들었던 말 중 유일하게 기억에 남은 말이다.
한쪽 팔을 쓸 수 없게 되니, 하다못해 생수병 뚜껑을 여는 것도 쉽지 않았다. 팔꿈치와 갈비뼈 사이에 병을 끼워 넣어 붙잡고 왼손으로 병마개를 비틀어 열어야 했다. 샤워나 면도 같이 간단한 일들이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까다로운 일이 되었다. 왼손만으로 세상과 마주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평소의 절반이 아니라 3분의 1도 안 된다. 아무리 하찮고 무해하게 보일지라도 우리 앞에 있는 물건들은, 한쪽 팔을 못 쓰는 사람이 자신에게 시키는 일을 고분고분 해줄 생각이 없다. 그것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가하는 폭력을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 않고, 그 저항은 만만치 않다. 그것들을 제압하여 일을 시키려면 평소의 세 배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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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우리가 하려는 일들은 대개 원하는 결과를 얻을 때까지 숱한 시행착오와 실패를 겪을 것을 요구한다. 우리의 모든 연습과 훈련, 계획과 시뮬레이션은 의도와 결과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고 실패의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실패의 쓴맛을 차례차례 경험하는 동안 우리가 어디에서 실패하는지, 실패를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운다. 그러고도 실패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그 어머니가 반드시 성공만을 낳는 것은 아니다. 좌절과 체념, 낭패와 치욕, 원망과 회한도 모두 그녀의 자식들이다. 성공이란 이런 형제들 사이에서 어쩌다 태어나는 돌연변이일지 모른다. 세상은 우리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아무 관심이 없지만, 성공이 흔해져서 자신이 호락호락해 보이는 것만은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세상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고 크고 작은 실패와 재난을 나눠줌으로써, 우리에게 세상살이가 손바닥 뒤집듯 쉽지 않다는 것을 가르친다. 우리가 세상을 울면서만 살 수 없듯이, 웃기만 하며 살 수도 없게 한다. 세상은 행운만큼의 불운을 우리 앞에 풀어놓는다. 끝없이 시험에 들고 끝없이 실패하고 끝없이 원점으로 돌아가지만, 그래도 우리는 끝까지 그 품에 남아있기를 원한다. 그 밖에 있는 세상, 실패도 성공도 없고, 행운도 불운도 없는 세상에서는 우리가 할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