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제 산을 쳐다본다.
(시집 『산호림』, 1983)
[작품해설]
이 시는, 흔히 ‘사슴과 5월과 고독의 시인’으로 불리며 1930년대 여류 시단을 모윤숙과 함께 이끈 노천명의 대표작이다. 노천명은 시사적 측면에서 현대시다운 시를 쓴 최초의 여류시인으로, 가장 여성다운 시를 남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녀는 여루 시인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센티멘탈리즘을 철저히 억제하고, 절제된 언어에 의해 탁월한 비유법을 구사하였다.
시인은 세속의 흐름에 휘말리지 않고 조용히 안으로 자신을 사스려 온 갊의 자세를 ‘사슴’에 비유함으로써 단아하고 고고한 풍모를 나타내고 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인 ‘사슴’은 ‘관이 향기로운 높은 족속으로’ 자신을 인식하게 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잃었던 전설을 생각하’며 ‘먼 데 산을 쳐다보’는 사슴은 바로 각박한 현실 세계와 영합하기를 거부하며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젖어 일생을 독신으로 살다 가 ㄴ시인 자신의 자아 투영으로 볼 수 있다. ‘잃었던 전설’은 ‘높은 족속’과 관련되어 향수의 근원을 밝힌 것으로, 사슴은 ‘먼 산’이라는 이상[동경] 세계를 바라본다. 사슴은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는 자아 성찰을 통해 자신이 ‘무척 높은 족속’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사슴은 ‘먼 산’의 고향에 돌아갈 수 없어서 ‘어찌할 수 없’이 ‘슬픈 모가지를 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자신에 대한 발견이 다시 슬픔의 원천이 되는 사슴의 운명을 통해 시인의 내면 풍경을 은연중 드러내 보이는 수법이 놀랍다.
[작가소개]
노천명(盧天命)
1912년 황해도 장연 출생
1930년 진명여고보 졸업
1934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 졸업
재학시 『신동아』에 「밤의 찬미」를 발표하며 등단
1934년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
1935년 『시원』 동인
1950년 조선문학가동맹에 관여한 혐의로 9.28 수복 후 투옥
1951년 출감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 출강,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근무
1957년 사망
시집 : 『산호림(珊瑚林)』(1938), 『창변(窓邊)』(1945), 『별을 쳐다보며』(1953),
『사랑의 노래』(19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