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76-2/어느 弔辭 후기]또삼촌이 남긴 2편의 시
어제는 모처럼 ‘그 친구’ 간 지 며칠만에 정신을 조금 차릴 수 있었다. 지난 주말(토, 일) 잠을 거의 못차고 설쳤더니 정신이 온통 해롱해롱했지만, 그제 저녁 수면제도 먹지 않은 상태에서 연속 9시간쯤 잤더니 컨디션이 좋아진 까닭이었다. 어제밤도 여동생이 찾아와 챙겨주는 바람에 제법 잠을 잤다. 새벽 5시 눈을 떴는데, 또 ‘그 친구’ 생각이 나, 그동안 펴낸 가족문집을 뒤적이며 그가 남긴 시 두 편을 발견했다. 생각해보라. 친구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이런 시를 남겼다는 게 이해가 되는가. 흔치 않는 일일 터. 할머니 시야 지가 자발적으로 써 보여준 것이지만, 2019년 어머니 관련해서는 내가 추모집을 내겠다며 원고 청탁을 하여 참으로 귀한 글을 받은 것이다. 다시 한번 그 우정에 감복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셔 치상을 치르던 1986년 6월초 어느 날, 그분의 일생이 설워 그랬는지, 비가 억수로 내려 꽃상여를 한껏 무겁게 했었다. 막상 산에 도착하자 언제 비가 왔냐는 듯 씻은 듯 그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좋은 데 가시는 모양”이라고 했다. 1908년생 할머니는 15세에 1904년생 7대 독자 할아버지와 혼인하여 두 아들(1927년, 1930년생)을 낳았다. 할머니가 숙부를 낳지 않으셨다면 아버지는 8대 독자가 아닌가. 우리 집안을 위해서 할머니는 진짜 ‘큰일’하신 것이다. 그로부터 자손이 번져 60명을 헤아리게 되었으니 하는 말이다. 야매 치과의사였던 한량 할아버지는 주위에서 걸핏하면 불법이라고 신고하는 바람에 벌금을 내면서까지 구치소 신세를 몇 차례 지셨다고 했다. 면종(얼굴에 난 종기)이 악화돼 그만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게 1934년 겨울이었으니 만 30세때였다. 참척을 당한 상할아버지(증조부)가 너무 상심이 커 다섯 달 동안 곡기(穀氣)를 끊어 아들 뒤를 따랐다니, 이런 참상이 어디 있을까? 천지간에 덜렁 고독하게 놓여진 두 아들과 함께 청상이 된 28살의 할머니. 8살, 2살된 아버지와 숙부. 그렇게 세 식구가 할머니 친정동네에서 알탕갈탕 일평생을 사셨다고 했다. 어머니는 17세에 이 외로운 집안에 합류했다.
이런 내용을 잘 아는 친구였으니, 이런 운문을 제 마음에 우러나 썼을 터. 할머니 역시 넷째 손주의 친구인 그를 보기만 하면 반색을 했다. 말을 잘 들어주니 통할 수 밖에. 내 친구의 이름을 꿰고 사셨다. 생전에 몇 번이나 만났을까? 만나기만 하면 고봉밥을 어거지로 멕였다. 머뭇머뭇하면 찬물을 말아버리니, 배가 터질 지경에도 꾸역꾸역 먹어주는 손자 친구가 얼마나 예뻤을까.
한 떨기 이름없는 꽃 한 송이
한 마리 나비 있어 스치고 갔네
한 없는 몸짓으로 무서리에 떨며
한 자락 꿈을 피우셨다네
한 모금 정한수에 힘을 모으시고
한 몸뚱이 불살러 염원하셨네
한 목심(목숨) 가노라 열 목심아 잘 살거라
한 무리 꽃상여 꽃을 피운다
아무튼, 이 시는 나를 너무너무 감격하게 만들었다. 나로서도 엄두를 못내는, 기발하게 ‘한-’으로 시작되는 두운시(頭韻詩)였다. 그렇다. 할머니는 ‘이름없는 한 떨기 꽃 한 송이’였다. 그리고 할아버지라는 ‘한 마리 나비’가 잠깐 스치고 갔다. ‘한 없는 몸짓으로 한 자락 꿈을 피우’기 위해 ‘한 모금 정한수’에 신새벽마다 ‘힘을 모으셨’지 않았던가. ‘열 목심 잘 살거라’ ‘한 몸뚱이 불살러 염원하’시던 그 할머니가 꽃상여를 타고 가시던 모습을 잘도 읊었다. 그 친구는 이미 시인이 되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어머니 추모집을 낸다는 말에 아래와 같은 6행시를 보내왔다. 또 한번 감격의 눈물이 물결쳤다. 왜 아니겠는가.
어머님, 오늘은 안색이랑 좋아 보이네요.
아버님이 아마 옆 병실에 계시니
든든해 몸 상태가 호전되셨나 봐요.
머 헐라고 또 왔어? 그란히도(그렇지 않아도) 바쁠텐디.
총생들 다녀 갔어요? 누가 그 중에 젤 이뻐요?
모다 다 이쁘제. 밤 늦었어, 어여 가봐야제. 어여.
님(임)자, 머라도 좀 먹어야지. 한 숟가락 떠봐.
못 먹것어? 이러케 하루죙일 입을 안여니, 어쩐다냐?
집에만 가자고 허고? 이러다가 먼 일 나것다.
병원에 매급시 이러케 누워만 있으니 답답허고
병원비만 축나고 집에만 가고 싶어.
아 그리도 한 술이라도 드시고 힘을 내야지요.
집에는 다섯 밤만 자면 퇴원하기로 했으니까,
깝깝히도 좀 참으세요.
“그려? 쪼가 더 있다가 가-. 쪼깨만 더”
문전성시, 서울이고 여주고 광양이고 논산이고
여기저기서 어머니, 할머니, 문병을 온다.
“너그들 다 봤응개. 인자 나 가야것다
글고(그리고) 인자 나 원도 한도 없다”
“저 누군지 아시겠어요?”
“시...ㄴ...구...ㄱ...이”
“와우, 7만원 과속딱지가 값을 했네요”
안녕히, 편안히 복 많이 안고 가세요.
평생 일하고, 원없이 사랑받으며 행복하게 사셨잖아요.
“그러제”
그래도 마음이 아프네요.
산소에서 뵐 게요.
“아이가이- 괜차녀.
머 헐라고 또 와-. 참말로”
그랬다. 2018년 겨울, 전주 고려병원옆 요양병원에 계실 때, 나 없어도 수시로 찾아간 친구는 우리 어머니와 이렇게 대화를 나누웠던 모양이다. 그것을 이런 아름다운 6행시로 정리하던 친구. 이 기막힌 운문의 제목은 <어머님 병문안>이었다. 어머니는 1월 4일 기어이 퇴원하여 당신 스스로 곡기를 완전히 끊고, 모든 약도 끊고 12일만에 두 아들과 세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눈을 감으셨다. 천국에서 당신 뒤를 7년 후 고생고생하다 따라온 아들의 친구를 보고 무슨 말을 하셨을까? “아이가이-, 이럴 수는 없는 일인디, 우리 아들을 두고 어뜨케 이런 일이 다 있대이-, 참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