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인 기준 요건’ 문제점과 개선방향은 1994년 제정 농지법서 첫 등장 과학·교통 발전으로 개념 모호 각종 혜택 ‘가짜 농민’ 선별 위해 현장 “기준 강화” 목소리 높아 영세농가 지위 상실 등 우려도 농가 유형·규모에 따라 나누고 조세 지원 등 정책 대상 구분을 법적 ‘농업인’ 개념은 1994년 제정 농지법에서 처음 등장했다. 여기서 제시한 ▲1000㎡(303평) 이상 농지 ▲1년 중 90일 이상 농업 종사 등의 기준이 2012년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기본법’에도 유사하게 적용돼 말 그대로 ‘법’이 됐다. 농업계는 이같은 농업인의 법적 개념이 정립된 지 30년 가까이 흐르면서 농업 여건도 크게 달라져 현행 기준을 손볼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법 기준 너무 포괄적=농업인의 법적 개념이 제시된 이후 농정은 그 대상에 예산·세제상 혜택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다만 과거엔 다소 느슨하게 정의된 농업인 기준으로도 상당수 진짜 농부들을 포괄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엉뚱한 이들이 농업인 범위에 들어오는 사례가 나타나는 실정이다.
과학·교통 기술의 발전으로 위탁영농·원격농사·출퇴근영농이 가능해져서 ‘90일 이상 농업에 종사’ 여부를 따지기 어려워졌다. 은퇴농·도시민의 농지 소유가 확대되는 가운데 임대차계약서 없이 농사짓는 농부들은 농업인 자격을 증명하기 어렵다는 하소연을 한다. 새로 취농하는 귀농인·청년농들은 연간 농업 종사일수와 농산물 판매 실적이 없는 탓이다. 반면 여유자금을 가진 도시민들은 형식적인 농지취득자격증명(농취증) 발급 절차만으로 1000㎡ 이상의 농지를 취득해 손쉽게 농업인이 될 수 있다.
대통령 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는 이같은 농업인의 정의를 재정비하는 작업이 농정 개혁의 선결조건이라고 판단, 논의에 착수할 계획이다. 손영준 농특위 농어업정책팀장은 “유럽연합(EU) 등 해외에서도 정책 대상으로서의 농업인을 보다 정교하게 타기팅(선정)하는 추세”라며 “이달 중 전문가 논의를 거쳐 농업인 정의를 어떻게 다듬을지 방향을 모색하고 2기 농특위 체제에서 집중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기준 강화 땐 반발 우려도=농업 현장에선 농업인 정의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최근 ‘농가 및 농업인 정의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통해 지난해 현지 통신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농경연이 조사 대상 2514명 가운데 유효응답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설문 결과에 따르면 농업인 요건 가운데 ‘경영면적(1000㎡)’을 현행보다 상향해야 한다는 답변은 56.5%로 나타났다. ‘농산물 연간 판매액(120만원)’ 기준을 상향해야 한다는 응답도 57.2%에 달했다. ‘연간 농업 종사일수(90일)’에 대해선 현행 조건을 유지하자는 답변이 51%로 높았지만, 강화해야 한다는 응답도 45%로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도시민 등이 농업인 자격을 얻어 각종 정책·세제 지원을 받는 현실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셈이다.
이무진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은 “농업인 정의를 재검토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농업인으로 인정받고 농지 소유가 가능한 것도 느슨한 법적 정의에서 비롯한 문제”라고 진단했다. 강선아 청년농업인연합회장은 “현행법이 정한 경작면적과 연간 농산물 판매액 기준을 상향할 필요가 있다”며 “농지에서 농업생산을 병행하며 6차산업 범주에서 소득활동을 하는 이들도 농업인으로 인정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기준 강화로 ‘가짜 농업인’을 솎아내야 한다는 주장이 높지만 이런 조치가 농업의 외연 확대 등에 실익을 주지 못한다는 신중론도 있다. 농업계의 한 관계자는 “통상 ‘100만 농가, 250만 농업인’이란 식으로 농업계의 외형을 강조하는데, 농업인 기준을 강화할 경우 이런 수치가 축소돼 각종 정책 추진이나 예산 확보의 동력을 잃을 수 있다”며 “농업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영세 고령농이 농업인 지위를 상실한다면 파장이 작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유형별 지원 등 분류 다양화=전문가들은 농업·농촌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농업인 정의를 좁히는 방식보단 유형을 다양화하는 방식을 주장하기도 한다. 현행 법적 기준을 유지하면서 농가의 유형이나 규모에 따라 농업인 분류 방식을 다양화하자는 것이다.
농경연 보고서는 이런 관점에서 농업인을 ▲일반적 농업인 ▲예비농업인 ▲은퇴 자급농업인 ▲중점 지원 대상 등으로 세분화하고 정책의 성격에 따라 적용 대상을 정하도록 제안했다. 현행 기준을 충족하는 수준으로 일반적 농업인을 규정하되 이들에겐 조세 지원이나 농기자재 영세율 혜택 등을 제한적으로 누리게 하는 식이다. 중점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는 이들과 달리 생산성 향상 등의 정책보조는 받을 수 없다.
중점 지원 대상의 조건은 생계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실질적으로 크고 노동시간의 상당 부분을 농업에 투입하는 사람으로 제시됐다. 대표적으로 전업농이 이에 해당되지만 실제 논의 과정에서 일부 겸업농 등이 포함될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임소영 농경연 연구위원은 “농지법과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기본법상 다소 차이가 있는 농업인의 기준을 일치시키고, 특히 경영면적 조건은 논과 밭을 구분해 제시할 필요가 있다”며 “허점이 많은 현행 농업인 확인제도를 개선해 구두로 임대차계약을 맺는 임차농 등의 법적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농업인의 사업자등록제도를 단계적으로 활성화하는 방안도 장기 과제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홍경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