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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5장 50-58절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이 종말론은 자주 현실도피적 내세론으로 오해되곤 합니다.
여기 오늘 본문에 또 있다시피, 지금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과 우리가 받을 영원한 세상은 연속성이 없다 하는 선언이 있거든요.
50절에 보듯이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그리고 돌연히 51절에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된다`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 이 두 말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의 삶이 그저 어쩔 수 없는 과정인 것으로 지나가야 할 시간으로 우리를 생각에 잠기게 합니다.
그러나 종말론이 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존재와 인생이라는 시간의 실존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승리로 끝난다, 라는 걸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승리가 지금의 삶에 적용된다! 이거죠!
지금의 삶이 헛되지 않다, 지금의 삶으로 종말과 완성을 이루는 것 아닌데, 변화가 되어야 되는데, 그 변화는 하나님 몫이고 그 변화할 우리 자신, 우리의 실존은 우리 거다, 우리가 노력해야 되는 거다, 믿음 안에서 살아내야 되는 거다!`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의 삶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것은 결론에서 분명합니다. 마지막 구절 보시죠.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그러니까 앞에 있는 말씀같이, 지금 삶은 아무것도 아니고 내세지향적이고 영세를 위해서 살고 죽지 못해사는 인생 빨리 죽으면 더 좋은 인생식으로 생각하는 그 이해의 끝절을 갖다 맞추면, 그러니까 지금은 헌신하고 봉사하고 주의 일에 쓸모있게 사는 게 전부인 인생으로 들입니다. 그렇죠?
나중에 보상을 받는다, 그렇게 되죠. 그것보다 더 가고 있습니다!
우리 대표적인 예로 에베소서 4장에 가시면,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2)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자라나고 충만하고 완성되라` 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니 종말론이라는 것을 운명과 상급, 영원한 나라에서 살게되는 궁극적 목적지로만 생각지 마시고, 지금의 인생이 그것과 연속선을 가지는데 중간에 무슨 어떤 지금의 인생과 그 우리가 얻을 영원한 나라 사이에 어떤 돌연한 반전이 있다는 겁니다!
지금 하는 일들이 결코 가치가 없거나 또는 우리에게 영원한 나라를 물려받는 일에 있어서 지금의 것은 약소하다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로마서 8장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이 이런 선언을 하게 만든 것을 기억합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를 믿는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결코 죄를 짓지않는다는 걸까요?
그렇게 우리는 말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현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우리는 더이상 잘잘못으로 운명이 바뀌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녀는 잘잘못을 그를 유익하게 하고 그를 옳바른데 이끌기 위하여 부모가 책망을 하지,
법같이 사정없이 운명을 가르는 심판의 잣대로 쓰지않습니다. 그것은 더욱더 분명하게 2절에 있는 것같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다` 입니다.
조금 전에 든 자녀의 신분과 지위와 그렇지 않은 법으로 상대해야되는 존재들과의 차이와 유사합니다!
그러면 이런 약속들, 우리가 갖고 있는 이런 것들이 실제로 우리 현실 속에서 작동하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어떻게 작동을 하는가?
우리는 지금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도덕적으로 종교성으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기 때문에 매우 모호한 이런 현실성을 시간과 공간과 구체성을 무시한 모호한 단어들, 추상적인 덕목들, 진심, 헌심, 헌신, 믿음이라는 단어들로 말을 하는 바람에,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과 구별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인생을 점검할 때마다 말하는 회개, 후회, 자책,, 그것은 자책이 덕목이 아니고, 그래서 교훈을 얻고 나아지는 것입니다! 후회를 해야 다음으로 나갑니다.
잘하는 것이 만드는 것보다, 잘하면 상을 받고 못하면 사람이 큽니다!
잘못이 사람을 크게 만드느냐 하면 그럴리는 없죠.
`잘못으로도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이게 예수 믿는자들이 말하는 자랑입니다!
우리가 잘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잘못하는 것으로 우리를 키우십니다!
`거 봐 그래봤자 무슨 소용이 있어? 얼마나 민망해? 얼마나 치사해?` 그런 후회 안해보셨어요?
우리는 이걸, 이 잘못을 만회하느라고 그것이 한 일, 그것이 우리 인생에서 만든 유익을 누릴 줄을 모릅니다!
말 잘못했다가 후회한 적은 얼마든지 있으시죠? `왜 내가 그렇게 말했을까?`
그러면 그리로 돌아가서 그 말을 지워버리고 좋은말 하고 돌아오지 마시고 그 후회가 다음 기회에는 일을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이 여기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유가 뭡니까?
이 말씀의 진정성, 영원성, 현실성을 믿는 것 아닙니까?
세상이 말하는 어떤 명분, 어떤 권력, 어떤 단맛보다 이것이 더 더 진실이고 이것이 더 유익하다고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해야죠!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희한하게 이 일을 사망이라는 권력 아래에서 하신단 말입니다!
그러니 세상은 우리 모두를 죽일 권력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신자의 생활도 말씀을 따라 살아도 사망을 이기지 못하는 조건과 정황 속에 있게 됩니다. 이게 우리를 괴롭히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기서 우리가 우리가 한 일이 권력과 보상으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확인된 것을 우리의 힘으로, 동력으로 가진다!` 라는 것이 우리를 만듭니다!
언제나 저혼자 흥분하고 여러분은 태연하고,, 이런 일이 올해에는 반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성가대가 먼저,, ^^
에베소서 1장으로 가보십시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우리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궁극적인 목적, 그 기쁘신 뜻. 계획,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헤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부어진 은혜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감격과 찬송과 항복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은 창세전에 에정하신 하나님이 뜻이고 계획이고 목적이고 그리고 그것을 예수 안에서 이루어 우리에게 확인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이 일은 모두 매구절마다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을 합니다. 다시 보시겠습니까?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러면 하나님이 이미 창세전에,, 세상을 만들기 전에, 인간을 만들기 전에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그 창조계획이 예수 안에서 있었다는 것은 놀랍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가 타락할 걸 이미 아셨다는 거잖아요? 이미,,
그리고 선택권을 줬다고 하시고 우리의 타락을 예수로 다시 회복하여 구원을 주셨다, 그럽니다!
아니 그러면 이게 말이 안맞잖아요?
하나님이 무슨 연극을 하시는가? 하나님이 왜 이런 길을 택하셨는가? 그런 생각이 당연히 드셔야됩니다.
여기에 중요한 비밀이 있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로 이룬 구원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깊다는 얘기입니다!
어떻게 깊으냐?
하나님은 우리를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같이, 예수님이 오시면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인 것같이, 우리를 불러 하나가 되게 하시려고 부릅니다! 우리에게 주신 지위는 존재론적으로는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넘을 수 없는 간격을 가지지만, 관계에 있어서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가지시는 삼위일체의 교제가 우리에게 허락된답니다!
그게 성경이 말하는 <사랑> 입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이렇게 품는 우리와 이렇게 하나가 되는 그런 것이 창조의 가장 중요한 <열쇠>였던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해 버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 뜻을 굽히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배반한 자리, 우리가 끌여들인 사망 안에까지 들어오사, 자신의 뜻을 기어코 관철하셨다, 이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선택한 우리가 만든 사망에까지 오셔서 우리와 함께 죽어버리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함으로써 죽음으로 끝이 나는게 아니라, 죽음이 부활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들어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구원하고, 예수의 수모와 받음 바 모든 박해가 우리가 추구하는 어떤 영광과 승리보다 큰 것을 만들어냈다고 선언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니 이제 다시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안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부르사 그의 영광과 그의 거룩하심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그 길을 살라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살라고 합니다!
우리 인생에 우리 이웃들 앞에서 세상 앞에서 우리만 빛이고 소금이랍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 사망이 우리를 죽일 거랍니다!!
그러면 이게 소용없어지는가? 아니랍니다!
부활은 말그대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죽음이 있어야 다시 살죠!
죽음이란 과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으로는 비극이고 비참한 운명입니다마는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반전시키고 있습니다.
죽음은 생명을 더 빛나게하는 것, 더 충만하게 하는 것, 더 놀랍게 하시는 것으로 사용하십니다!
그게 우리 신자들의 현실이죠!
그래서 우리가 하는 일은 상대방을 설득하고 감동을 주고 우월해지고,, 그런 것들하고 다릅니다!
예수께서 그리하신 것처럼, 우리의 인생을 사는 것 뿐이니다.
그것이 보기에는 아무 소용이 없어 보이고 결국은 우리의 믿음이 이기지않고 세상이 이길 것입니다!
다 죽고 망하니까,, 그러나 세상은 그게 끝이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답니다!
그게 종말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의 타락한 창조를 회복하사, 승리케 하시는 방법은 십자가의 길 뿐이랍니다!
제가 이 문제는 에베소서 1장에서 마지막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뭐가 최고의 권력이라고요? 예수입니다!
예수는 그 권력을 어떻게 가지게 되셨다고요? 죽음을 통과해서 입니다!!
만물 위에 그의 지위를 올리십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그런 의미입니다!
보이는 세상에서는 사망이 최고의 권력인데! 그게 예수 믿는자들에게는 부활로 가는 문이랍니다!
예수 없이 죽는자는 그 반전이 없죠! 그게 종말론입니다!!
반전이 있고, 그 반전은 여기서 지는 것같은 우리의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 고백 속에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이 통과해야 되고, 그 통과는 그냥 시간을 통해서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려서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통과해서 가질 부활의 목적지를 향하여 일관된 연속선상에 있는 신앙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게 종말론입니다!
이까짓 놈의 세상,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 이 따위로 얘기해서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살아있는 동안은 계속 우리에게 역할이 있고, 지위가 있고, 책임이 있고, 명예가 있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아무 쓸모도 없는 것 같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별볼일 없는 그날 그 순간, 그 사건이 말입니다!
이게 예수 믿는겁니다!
여러분이 아는 길로 갔으면 제일 좋겠죠?
추리영화를 볼 때, 제일 영화 제미없게 만드는 게 뭐죠? 범인을 미리 아는 것입니다! ^^ 그러면 그 영화 재미없죠.
끝에 나와야 되고 결과가 누구인가, 범인이 누구인가를 아는 게 영화가 아니고, 그 과정이 재미있고 내용을 담는거죠.
오해를 받았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을 하는가? 그리고 거짓말을 어떻게 하는가? 어떻게 누명을 씌우는가? 또 쓰는가?
그런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런 것들을 보는 게 영화보는 재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채우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예수에게서 그리 하신 것처럼, 뭘 감수하신다고요? 비난, 오해, 수모, 위협, 공갈, 그리고 정말 죽어버리십니다!!
죽음 앞에 죽습니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그 자주 듣는 반론 중에 하나가 예수 믿으면서도 예수 믿는 것이 하나의 그저 고상한 정신, 어떤 신심에 불과한 것같이 얘기하는 사람들이 성경의 초월성을 부인하는 것 중에, <동정녀 탄생>과 <부활>이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가? 믿는다! 그럼 왜 예수님이 빌라도에게는 안 나타났는가? 제 대답은 분명합니다!
`빌라도 같은 건 우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알아들으시겠어요?
빌라도가 무슨 관심이 있겠어요? 빌라도는 그때 완전히 엑스트라예요!
(예화중략)
우리가 하는 일이 얼마나 큰 일들인지 아세요?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요!
하나님의 임재, 연합, 동행으로 존재하는 존재라고요!
우리가 하는 후회, 우리가 하는 자책, 그걸로도 우리는 매일 큰다고요!
그걸 놓치고 뭘 한다고요? 종말이 뭔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1장 끝절에 이렇게 끝이 되어 있어요.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여기서 교회는 조직공동체를 의미하지 않아요.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신자 하나하나를,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고,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교회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 입니다.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의 충만입니다! ■
기가막히죠!
2장에도 나와요. 20절부터 보실까요?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
이 생애에서 일어나는 일이예요! 이 생애에서!!
얼마나 놀라운 기회이고 구체적인 현실인지 모릅니다!
이걸 살지 않습니다!! 이걸 살지않고 책임 안질 소리들만 합니다!
언제 남북이 통일되는가? 거기에는 우리의 할 일이 없습니다!
언제 중국이 기독교에 문을 여는가? 그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매일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매일 만나는 사람들, 가족들, 이웃들, 여러분이 져야되는 책임, 같이 봐야되는 얼굴들 앞에서 신자답게 구십시요!
어제한 실수를 되풀이 하지 마십시요! 나아지십시요!! 나아지십시요!!
멋있어 지십시요! 일단 표정부터 좀 바꿔지십시요! ^^
3장에 오시면 이런 기도가 나오죠.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러니까 각 사람에게 비는겁니다)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굉장하죠! 본문으로 돌아와 보십시요. 고린도전서 15장으로 오시면 이 얘기가 이렇게 씌여있는 겁니다.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생명이 이기는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기고 있습니다!
그것이 보이는 세상, 환경, 그리고 통치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미 우리에게는 현실입니다!
지금은 사망이라는 권세 아레에서 이 일을 하고, 이 삶을 살고, 세상이 바뀌는 그때, 변화된 그때에는
그것이 온세상에 누구에게나 만물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감사하고 찬송하는 자리에 이를 것입니다.
그 연속선상에 오늘이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드라마가 없을 것입니다. 긴장과 공포가 없어서,, 여기에만 있죠!
그러니 사는 동안 멋있게 사십시요!
안심과 평안 외에 구할 것이 없는 애같이 굴지 마십시요!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원망과 불만 외에 우리가 가진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이 무슨 실력과 구체성이 있습니까? 돌이키게 하옵소서!
그것은 꾸중도 강요도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에게 물어야할 자기자신에게 지워져야할 분별이고 책임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현실성이 없다면 내가 각오하고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게 무슨 쓸데가 있겠습니까?
모두에게 이 예수 안에서 보이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이 기회와 자랑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여 책임있는 ,
아니 자랑하는 감사하는 인생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설교펌글입니다.일부예화가 생략되었음을 밝힙니다. 문제시 말씀해주세요)
http://lamp.kr/lamp-sermon/?p=10697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수요예배 설교
(녹취작성자 원글보기 >http://m.blog.daum.net/tjstory/2761)
첫댓글 개혁주의라서 휴거 이야기는 안 하시죠.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여기서 교회는 조직공동체를 의미하지 않아요.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신자 하나하나를,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고,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교회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 입니다.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의 충만입니다!
>> 이 견해도 수용하시는 건가요?
@rose of... 결국에베소서 1장의 교회를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으로 본다는 말이죠. 당연히 동의하죠.
@순수도시 에베소서에 교회론이 나오는데 중요하죠. 구약사람들을 넣지 않죠. 잘 정리가 되시리라 봅니다.
@순수도시 인용글은
'구약의 이스라엘'이 '신약의 교회'와 같음을 설명하는것 아닌가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희한해요
예전에 오 님과 토론때는
오 님편에서 신약성도의 교만을 탓하시더니
이제는 예수님은 절대로 구약성도의 대속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분을 응원하시고...
정체가 뮙니까? 이해가 안되네요
적의 적은 나의 친구 이런논리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