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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사
마가복음 15:1~15 / 이규현 목사
오늘 우리는 빌라도라는 인물을 보게 됩니다. 빌라도는 AD 26-36년까지 유대의 총독으로 재임한 실제 인물입니다. 2천 년 역사에 걸쳐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자로 언급됩니다. 어떻게 보면 인류 역사에 빌라도는 참 불행한 인생을 산 사람이 됩니다. 빌라도가 어떻게 예수를 죽인 자로 지목되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연루된 자는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빌라도를 지목합니다. 그가 사형집행을 언도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식민지로 있던 유대의 입장에서는 종교지도자들이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해도 죽일 권한이 없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예수를 정치범으로 몰아 빌라도 앞에 세웠습니다. 빌라도는 신성모독의 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로마의 반역자요, 황제를 위협하는 자인지 확인하려 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모독을 했다며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본심이 따로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가 그들을 위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은 백성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오병이어 사건 때는 절정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열기는 당시 기득권에 속한 종교지도자들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기존의 종교체제를 다 흔들어 놓았습니다. 종교지도자들 눈에는 예수가 가시처럼 보였습니다. 빌라도는 종교지도자들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에게로 데리고 왔는지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10절에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님을 넘겨 준 줄 앎이러라”라고 말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정당한 재판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멈칫합니다. 빌라도의 관심은 공정한 재판이 아닌 권력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게 권력자의 속성입니다. 무엇보다 권력 유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권력에도 일종의 중독 현상이 있습니다. 한번 맛을 보면 내려놓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사울과 다윗의 관계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사울은 자신의 권력 기반이 다윗에 의해 흔들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부터 광기 어린 행동을 서슴지 않습니다. 사위가 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왕이 되는 과정도 험난했습니다.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폭력은 언제든지 정당화될 수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정치적인 혐의를 찾아내려고 했습니다.
빌라도가 누구입니까?
로마에서 유다를 통치하기 위해 보낸 총독입니다. 그는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 전체를 지휘하는 권한을 가졌습니다. 당시에 지배국과 피지배국간의 팽팽한 긴장감이 있었습니다. 유다의 독립을 위한 열심당원들이 활동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유월절기라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까지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폭동이 일어날 수 있기에 로마의 당국자들이 예민해 있을 때였습니다. 빌라도의 역할은 국내의 복잡한 상황을 조율하고 평안을 유지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관심사는 황제로부터 신임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만약 폭동이 일어나면 로마 황제로부터 소환을 받거나 그의 직위가 박탈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결단을 내리는 것을 주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초기에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석방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요한복음 19장 12절에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풀어주기만 하면 황제에게 고발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권력자의 일상을 살짝 들여다보게 됩니다. 힘의 정점에 앉아 있지만 불안에 떨고 있는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권력을 잡으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겉은 굉장히 화려한데 안을 보면 흔들리고 있습니다. 권력자들이 왜 전쟁을 일으킵니까?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권력은 쉽게 폭력성을 드러냅니다. 종교적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지도자들 역시 그들이 가진 힘으로 예수를 제거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권력자의 불안은 대중의 눈치를 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권력의 정점에 있지만 여론 조사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합니다. 자신에게 불리해지면 통계들이나 언론을 임의로 조작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을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문제는 그가 공의로운 재판을 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본문 12절은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라고 말합니다. 분명히 빌라도가 결정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백성들에게 판결을 맡기고 있습니다. 무책임한 모습입니다. 그는 자신의 판단을 대중에게 맡겨 버렸습니다. 책임을 져야 하는데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입니다. 책임을 져야 할 자가 행동하지 않을 때 백성들의 소리는 더 높아집니다. 본문 13절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그들은 이미 폭도로 변해 있습니다. 이어서 14절에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라고 말합니다. 군중들의 소리에 빌라도의 말은 다 파묻혀 버렸습니다. 군중들은 지금 이성을 잃었습니다. 다수의 폭력성을 늘 조심해야 합니다. 집단 안에 들어가면 개인의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다수가 늘 옳다는 등식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역사 속에 언제나 다수가 진리를 선택한 게 아닙니다. 지금 이 군중들이 누구입니까? 이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환영했던 사람들입니다. 군중들은 이렇게 쉽게 변합니다.
다수의 압력에 드디어 빌라도가 결정을 내립니다.
역사의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15절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 그리스도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여기에는 공의가 없습니다. 바라바는 누구입니까?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을 한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형이 언도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를 놓아주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빌라도 자신의 만족을 위해, 자신의 안정을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빌라도는 기회주의자였습니다. 공의에 대해 눈을 감고 현실에 따라 타협하는 자였습니다. 기준이 없으면 상황에 따라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상황이란 늘 변하는 것입니다.
그때그때 적당하게 반응하며 살아간다면 얼마나 피곤합니까? 매번 눈치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것 하나가 ‘기준’입니다.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을 자세히 보면 삶의 기준을 정확하게 제시해줍니다. 기준이 없으면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합니다. 빌라도는 군중들의 요구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군중들의 요구는 늘 바뀝니다. 군중들의 표피적인 필요만 채워주려고 하면 인기주의, 편리주의가 됩니다. 그러면 지도자와 백성이 함께 망합니다. 우선은 백성들의 귀를 가려주지만 결국은 백성들의 눈을 감기고 속이는 길로 갑니다. 백성들의 필요를 살펴야 하지만 너무 눈치를 보는 것도 문제입니다. 때로는 백성들의 욕을 먹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해야 지도자입니다.
빌라도는 소리치는 군중들 앞에서 고민에 빠집니다. 바라바냐 예수님이냐. 그것은 군중의 소리이기도 하지만 빌라도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였습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양심의 소리가 있습니다. 양심의 소리에 정당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갈등은 계속 커집니다.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죄목을 찾지 못했습니다. 풀어주려니 군중들의 압박이 거세고 십자가에 내어주자니 양심이 괴롭습니다. 한순간 편할 것인가? 당장은 어렵지만 영원을 선택할 것인가? 이것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늘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타협에 대한 압박이 치열할 때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순간 밀려올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눈앞에 어른거릴 때 우리는 주저하게 됩니다. 어려움이 올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할 것인가? 현실적인 문제들 앞에서 양심을 무시하고 현실적인 실익을 선택할 것인가? 내가 안전한 길을 선택했다고 과연 안전할까요? 우리는 예수와 현실 사이에서 갈등할 때가 있습니다. 타협을 거부하려면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은 언제나 용기가 필요합니다. 크고 작은 일들 속에서 예수냐 아니면 세상이냐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오늘의 빌라도를 우리는 우리 안에서 만나게 됩니다.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군중들의 요구대로 넘기고 맙니다.
마태복음 27장 24절에 “…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넘겨주고 난 다음에 빌라도는 양심에 어마어마한 가책을 느끼면서 그 죄책감을 씻기 위해 손을 씻습니다. 그러나 물로 손을 씻는다고 그의 죄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때 백성들이 소리를 지릅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신에게 돌릴지어다”(마27:25)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모릅니다. 이 대답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스라엘의 역사는 비운의 역사가 많습니다. 빌라도 자신은 죄 없다며 손을 씻었지만 성경은 빌라도의 죄를 묵인하지 않고 그의 죄를 영원히 묻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떠넘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죄가 다른 사람에게로 돌려질 수 없습니다.
빌라도의 죄는 무엇입니까?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죄입니다. 빌라도의 비겁한 인간성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거부한 사람입니다. 정의를 말하지만 정의를 지킬 능력이 없었던 지도자였습니다. 빌라도는 구원자로 오신 예수를 죽인 희대의 악인이 됩니다. 빌라도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을 가능성이 언제든지 있습니다. 현실의 문제에 너무 빠져있으면 진리의 눈이 가려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너무 현세적으로만 기울어져 있지 않습니까? 내가 할 일을 마땅히 하고 있습니까? 내가 살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일이 없지는 않습니까? 제2의 빌라도는 얼마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빌라도를 몰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현실과 타협하려는 유혹과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장 살기 위해 영혼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영원과 진리를 위해 현실의 순간적인 유혹으로부터 매일 싸워 이기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빌라도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왕이십니다. 물론 빌라도가 생각하는 왕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나라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왕은 오직 한 분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5년간 이끌 대통령을 선출하는 투표가 시작됩니다. 누군가 세워질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에 관심이 매우 많습니다. 대통령제 시스템 안에서 대통령의 역할이 큽니다. 무엇보다 불안한 역사를 지나오는 가운데 지도자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가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완전하고 영원하신 통치자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탁월한 왕이 다윗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도 밧세바 사건으로 기울어지고 말년에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하여 얼룩진 역사로 쓸쓸히 마감합니다. 다른 왕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통치를 넘어 하나님의 통치를 기대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십시오. 그 기구한 질곡 속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인간의 통치를 넘어선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역사는 위대한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고 그분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에 의해서 돌아갑니다.
빌라도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질문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마가는 마가복음을 통해 진정한 왕이 누구인가를 독자들에게 계속 묻고 있습니다. 과연 누가 왕입니까? 빌라도는 질문을 통해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심을 선포한 셈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만의 왕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십니다. 주님은 모든 열방을 다스리시는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들은 왕을 세워달라고 조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왕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왕을 원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인간의 왕의 통치를 받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거역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왕을 허락하십니다. 하지만 그 왕들을 통해 이루었던 남북열조의 역사는 질곡으로 얼룩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한나의 노래를 통해서도 확인이 됩니다.
사무엘상 2장 6-7절에 “6창조주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권력이 인간에 의해 돌아가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권력의 실세는 하나님이십니다. 권력자들이 민심을 조작하려고 해도 마음대로 안 됩니다. 민심도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권력을 재분배하시는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을 보면 엎치락뒤치락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쥐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을 보십시오. 그는 이미 어린 시절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때 이미 하나님의 주사위는 던져져 있습니다. 다윗은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깁니다. 그가 도망을 칠 때의 모습을 보면 왕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사울의 공격과 다양한 사건들로 역풍들이 있었지만 또 다른 바람이 계속 불어닥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적 행동이나 인간의 숱한 선택에도 불구하고 더
강력하게 움직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연출이 역사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질문에 예수님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본문 5절 “예수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 거짓과 불법 앞에 주님은 침묵하십니다. 침묵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자포자기일까요?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 앞에서의 침묵은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털 깎는 자 앞에서 양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온갖 고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잠잠하십니다. 이사야 53장 7절의 말씀처럼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은 당신을 죽이려는 자들 앞에서 저항하지 않습니다. 자기변호하지 않습니다. 반란죄로 붙잡힌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넘겨졌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세상에는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보면 억울한 정도가 아닙니다. 이쯤 되면 억울함을 넘어선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억울해도 주님과 비교해보면 우리의 억울함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왕 중의 왕이시고, 불의가 전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순한 양처럼 모든 것을 다 받아 내시고 계십니다. 불의한 자들에 대해 자신을 맡기십니다. 자신의 정당성을 변호하지 않습니다. 항거나 투쟁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습과 얼마나 다릅니까? 세상은 시비가 붙으면 끝이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오해를 받으면 참 힘듭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정말 힘듭니다. 그때 사람들은 자기변호에 열을 올립니다. 자기를 변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침묵은 자신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사람들을 정당화시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침묵합니다. 주님은 모든 모함을 뒤집어 쓰기로 작정하신 분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죽으셨습니다.
마가복음 전체에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것이 마가복음의 핵심구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오직 섬김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에게 진노를 퍼부으셨습니다. 그 앞에서 예수는 침묵하십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억울함의 또 다른 항변이 아닙니다. 그 침묵은 때로는 무기력해 보입니다. 침묵은 쉽지 않습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거대한 영성의 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침묵은 할 말이 없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게 아닙니다. 침묵은 언어의 또 다른 방식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는 침묵의 영성을 배웁니다. 예수님은 침묵을 통하여 십자가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보면 그 안에 침묵하는 그리스도를 통해 많은 메시지를 받게 됩니다. 말이 아니라 침묵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말을 많이 해야 권위가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말을 많이 함으로 나의 존재를 알리고 싶은 유혹과 싸워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말을 적게 하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권위가 주어집니다.
그리스도의 침묵은 하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침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정당성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무죄함이 증명되는 것도 아닙니다. 나의 억울함이 밝혀지는 것도 중요한 게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나의 정당성을 입증하다가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사는데 다른 사람은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침묵을 통해 하나님의 공동체가 평화를 누리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고, 구원의 역사, 사람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오늘 침묵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승리의 비결을 배웁니다. 우리의 의지적인 노력보다 더 크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믿으십시오. 침묵의 영성으로 더 신앙이 깊어져 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알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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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