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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고양구 서삼릉에 있는 희릉 전경 [역사이야기] 이조왕릉(李朝王陵) 역사기행(历史记行) ♤고양구 서삼릉을 찿아서♤ 한 주일 전에 서오릉을 탐방하고 내친 김에 다음 주 일요일 오전에 서삼릉 탐방 길에 나섰다. 서오릉보다는 교통편이 불편했다. 서삼릉 입구 초입에 있는 너른마당 음식점에서 통밀칼국수로 점심을 해결했다. 곁들여 잠시 너른마당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는데 광개토대왕비가 모조석으로 세워져 있는데 놀랐다. 너른마당을 뒤로하고 600미터를 걸어서 서삼릉으로 향했다. 떠나기 전 검색해본 지식으로 능 일부는 미개방 상태라고 하여 실상이 어떤지도 궁굼했다. 서삼릉 정문에 도달하니 여늬 왕릉 분위기와 사뭇 다르다. 상당히 넓은 초지도 보이고 또 한국젖소개량사업소 건물들도 나타나고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받은 왕릉 보존에 문제가 많구나 하는 의구심을 안고 정문을 들어서서 탐방을 시작했다. ♤희릉(禧陵)♤ 조선 제11대 왕 중종(中宗 재위 1506∼1544)의 첫 번째 계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1491~1515)의 무덤이다. 3개의 왕릉(희릉·효릉·예릉)과 후궁·대군·공주의 무덤들로 이루어진 고양 서삼릉(高陽 西三陵, 사적 제200호) 경내에 있다. 희릉( 禧陵)은 처음에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쌍릉인 헌릉(獻陵) 서쪽 언덕에 조성되었다. 중종의 부마가 된 김안로(金安老 1481~1537)가 희릉 밑에 큰 돌이 깔려 있어 불길하다 주장하여 1537년(중종 32)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김안로는 당시 세자였던 인종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일을 벌여 당시 능을 조성하는 데 관련된 자들을 처벌하였다. 현 위치로 옮긴 후 중종의 능이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왕릉과 왕비릉이 서로 다른 언덕에 조성된 능)의 형식으로 희릉 옆에 조성되어 능호가 정릉(靖陵)으로 바뀌었으나 1562년(명종 17) 문정왕후에 의해 정릉이 현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선릉(宣陵) 옆으로 옮겨가면서 장경왕후 능은 다시 희릉으로 불리게 되었다. 장경왕후 사후에 벌어진 일이지만 남편 능이 문정왕후에 의해서 서울 강남구 선릉로에 있는 선정릉으로 이장되어 간 연유와 문정왕후 자신은 선릉로 정릉에 묻히지 않고 서울 노원구 화랑로 태릉에 묻힌 사연은 태릉 탐방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장경왕후 이야기♧ 1506년(연산군 12) 9월1일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낸 성희안(成希顔)과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박원종(朴元宗)이 재위 12년간 폭정으로 국가의 기틀을 흔들어 놓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9월2일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맞아 경복궁 근정전에서 오르니 그가 조선왕조 제 11대 왕인 중종이다. 이 정변을 중종반정이라고 한다. 중종은 57년을 살고 39년을 왕으로 있으면서 3명의 왕비와 9명의 후궁 사이에 9명의 왕자와 11명의 공주를 낳았다. 이 중에서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에서 제12대 왕 인종을, 두 번째 계비 문정왕후에서 제13대 왕 명종을 배출했다. 그런데 장경왕후를 이야기 하려면 첫 번째 왕후인 단경왕후 신씨 이야기를 안할 수 없다. 단경왕후는 중종반정 때 아버지가 죽임을 당했는데 중종이 왕이 되면서 왕비가 되었으나 반정 세력들이 나중에 복수할지도 모른다며 왕비 자리에서 쫒아내어 폐비가 된다. 남편인 중종은 그 당시 힘이 없었기 때문에 단경왕후를 보호해 주지 못했다. 단경왕후는 궁에서 쫒겨난 후 인왕산 바위에 올라 궁을 향해 붉은 치마를 널어놓고 남편을 향해 억울함과 그리움을 표시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그 바위를 치마바위라고 부른다고 한다. 중종반정에서 큰 역할을 했던 윤임의 여동생이 장경왕후 윤씨이다. 그녀는 중종반정 이후 후궁이 되어 궁에 들어왔다. 그 당시 궁에는 반정 공신들의 딸들이 후궁으로 많이 들어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단경왕후가 왕비에서 쫒겨나는 바람에 운좋게도 다른 후궁들을 제치고 중전이 되었다.이 때가 1507년 중종2년이었다. 이는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반정의 훈구대신인 박원종이 외숙부였던 것도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은 후 1주일 만에 1515년 25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장경왕후는 9년동안 궁중에 있으면서 스스로는 엄격하면서 아랫사람에게는 후덕해 칭송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중종과 조광조 이야기♧ 중종 시대에 조광조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중종은 국왕 자문 기관인 홍문관을 강화하고 관리들에게 일정 기간 안식 휴가를 주어 고향에서 학문에 매진케 하는 사가 독서를 시행하고 사림을 등용해 왕도 정치를 추진하는등 개혁과 왕권 강화를 시도하나 기득권인 보수 훈구 세력에게 밀려 실패하고 재위 40년간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한다. 1510년 중종 22세 때 반정 공신인 박원종이 사망하고,1512년 중종 24세 때 반정 공신인 유순종이 사망하고, 1513년 중종 25세 때 반정 공신인 성희안이 사망하자 중종은 마침내 훈구 공신의 그늘에서 벗어 난다. 1515년 중종 27세 때 10년 전인 1504년 연산군때 갑자사화로 밀려난 사림파를 중용하면서 조광조가 핵심 인물로 부상한다. 조광조(1482~1520)는 중종보다 6살 연상으로 39세에 사망한다. 1510년 28세 때 진사시에 2등 합격, 성균관에 들어가 경서를 강독한다.1515년 33세 관직에 들어가 선무랑에 임명된다. 사서 삼경, 주자학 공부에 매진하고 기방 출입을 자제한다. 중종이 성균관을 찾아 와 친히 주관한 시험에 눈에 띄어 이 후 고속 승진을 한다. 중종이 묻는다, " 이 어려운 시기에 어떤 정치를 해야 하는가?" 조광조가 답한다, "성실하게 도를 밝히고 항상 삼가는 태도로 나라를 다스려야 합니다" 사간원 정언에 임명된 그는 파격 상소를 한다," 저를 파직하든가 사헌부 사간원 관리를 모두 파직해야 합니다", "상소를 올린 이를 벌 주는 것은 언론을 탄압하는 것이며 이는 국가 존망에 매우 위험합니다 ". 중종이 조광조 손을 들어 준다. 1516년 34세 때 홍문관 부수찬,1517년 35세 때 삼사의 언관을 겸임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당상관인 직제학이 된다.1518년 36세 때 홍문관 부제학, 동부승지, 사헌부 대사헌이 된다. 1519년 37세 때 대사헌인 조광조는 대사간인 이성동과 함께 위훈 삭제를 집행한다. 중종 반정의 공신 중 105명이 공이 없다면서 훈록 삭제의 상소를 올린다. 중종은 이중 76명에 대한 훈적을 삭제하고 이들에게 지급되던 공신전과 노비를 몰수한다. 반정 공신들의 조광조에 대한 원망이 하늘을 찌른다. 1519년 38세 때 공신들의 사주에 의해 궁인들이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라는 조광조를 모함하는 글자를 새겨 그를 역모로 몰아간다.1520년 39세 때 기묘사화가 일어난다. 반정 공신인 홍경주, 남곤, 심정, 김전, 이장곤, 고형신 등이 중종에게 조광조의 역모를 고변한다.(이는 사실이 아닌 중상 모략임) 보수의 벽에 부딪친 조광조는 투옥되고 유배후 사사된다. 그가 죽자 그를 존경하던 유생 선비 백성들이 목 놓아 울고 그가 죽은 다음 해 큰 가뭄이 들고 인심이 흉흉해 지자 조정은 함구령을 내린다. 조광조의 사후 외척 세력이 등장해 대윤의 윤임과 소윤의 윤원로, 윤원형 형제간에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이 벌어진다. 조광조의 과감하고 집요한 개혁은 인재등용제도 개혁의 일환으로 현량과 설치, 소격소 철폐, 토지제도 개혁에 의한 균전법과 한전제 실시, 정국공신 위훈 삭제 실행, 과도한 경연 실시 등 조광조의 올바른 왕도정치에 대한 개혁 의지는 중종의 오로지 왕권 확립 아집과 준비 안된 왕이라는 열등 의식에 막혀 개혁의 뜻을 이루지 못하면서 조광조의 개혁은 중종의 친위쿠테타로 실패로 둘아간다. 이후 이씨조선은 사색당파 붕당정치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조광조는 단 4년간의 정치 인생이었지만 개혁의 정신만은 지금까지도 살아있다. 조광조의 개혁이 실패한 것은 비록 명분에서 백성들의 전폭적 지지를 얻는다 해도 현실적으로 기존 관료세력의 협력과 군권의 장악없이는 또한 조직운영을 위한 자금력 없이는 개혁이 성공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조광조가 내세웠던 성리학이 조선 정치의 근본이 되어 백성이 두루두루 잘 살아야 한다는 이상사회 건설 명분은 그의 사후에도 이황, 이율곡에 의해 계승되어 조선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의 개혁 정신은 지금도 살아있어 매년 3월19일에 신곡서원에서 향사를 지내고 있음에서도 알 수 있다. ♤예릉(철종과 철인왕후릉)♤ 예릉(睿陵 : 철종과 철인왕후)은 철종(哲宗)과 비(妃) 철인왕후(哲仁王后) 김씨(金氏 : 安東)의 쌍릉(雙陵)으로 경기도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서삼릉길 233-126에 있는 서삼릉(西三陵) 중 하나이다. 철종은 조선왕조 제25대 왕(재위 1849∼1863)으로 휘(諱)는 변(昪), 초명은 원범(元範), 자는 도승(道升), 호는 대용재(大勇齋)이다.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의 셋째 아들로 비(妃)는 철인왕후(哲仁王后) 김씨(金氏)이다. 1844년(헌종 10)에 형 회평군(懷平君) 이명(李明)의 옥사(獄事)로 가족과 함께 강화(江華)에 유배되었다가, 1849년(헌종 15)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 : 純祖妃)의 명으로 궁중에 들어와 덕완군(德完君)에 책봉되었으며, 1850년 19세로 헌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조선 철종의 정비인 철인왕후(哲仁王后) 김씨 혹은 명순대비(明純大妃), 후에 대한제국 고종의 추존으로 인해 사후 종묘에는 명칭이 황후로 격상되어 철인장황후 김씨(哲仁章皇后 金氏)가 되었다. 안동 김씨 세도정권의 핵심 인물이었던 영은부원군 김문근의 딸, 순조의 비였던 순원왕후 김씨와 헌종의 첫번째 비인 효현왕후 김씨에 이어 세 번째로 안동 김씨로서 왕비가 된 인물이다. 순원왕후에게는 조카 뻘 친척인 철인왕후가 1851년 15살의 나이로 왕비에 간택되어 철종과 가례를 올렸다.하지만 단지 가문의 이해를 위해 간택되었을 뿐, 정작 왕후 본인은 한 번도 정사에 나서거나 가문을 두둔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말수가 적고 기분의 좋고 나쁨을 얼굴에 잘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며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와 왕대비 효정왕후를 극진히 모셔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철종과의 사이에서 외아들 이융준을 소생으로 두었으며 1878년 42세로 창경궁 양화당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강화도령 이야기♧ 철종은 1849년 (헌종 15년) 6월 6일을 기하여 네 살 많은 7촌 조카 헌종이 23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죽자 강화도를 방문한 신하들을 따라 입궐,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궁중에 들어가 음력 6월 8일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그 이튿날인 음력 6월 9일, 창덕궁의 인정문에서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할아버지 은언군은 사도세자의 서자였고, 아버지 전계대원군은 은언군의 서자였다. 서자의 손자인 서출인데다가 본인도 서자였고, 따라서 왕족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할아버지와 이복동생인 순조의 배려로 일반 백성들처럼 살 수 있게되어 강화도에서 농토를 얻어 농사를 짓고 살았으므로 나뭇꾼으로 있다가 왕이 되었다 하여 그의 재위기간 중 사대부가에서는 그를 강화도령이라 조롱하였고 이는 곧 그의 별명이 되기도 한다. 철종은 5촌 당숙인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즉위 직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사실상 실권은 안동 김씨에게 있었다. 1851년(철종 2년) 김조순(金祖淳)의 7촌 조카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철인왕후)로 맞아들였다. 이로써 순조, 헌종, 철종 세 임금의 중전이 안동 김씨가문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중궁전(대비마마가 사시는 곳)은 안동 김씨의 소유이다는 말까지 나오기도 하였다. 그러하여 김문근을 위시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계속되었다. 학문적인 소양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정사는 세도가들에 의해 처리되었고, 철종 자신도 스스로 이것을 인식하고 술과 궁녀를 가까이 하면서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였다.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하였으나 실권은 일동 김씨 세력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뜻대로 정치를 펼 수 없었다.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통치 기강이 무너지고 삼정의 문란은 더욱 심해져 결국 1862년 진주민란을 시발점으로 삼남지방의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이에 대한 대처로 개혁 정책을 실행하나 지배계층의 이해가 얽혀 성과를 못 거둔다. 이런 혼란을 틈타 최재우가 만든 신흥종교인 동학이 창시되어 세력을 키워나가자 최재우를 혹세무민 죄로 처형하고, 천주교 또한 민중 속에서 유행하므로 조정에서는 이를 탄압하였다. 또한 제주에서도 민중봉기가 일어나 한때는 제주 관아를 점령당하기도 한다. 철종은 자신의 권력을 지지해줄 남인들이 천주교 탄압으로 숙청당하고 아무런 뜻을 이루지 못했다. 철종은 원래 몸이 벙약한데다가 그 자신도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속에서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색을 가까이하여 건강이 점점 나빠지다가 1861년 이후로는 거의 병석에 눕다시피했다. 그가 일어날 가망이 없다고 본 흥선대원군은 이 무렵부터 자신의 서녀를 통해 사돈 이호준, 이호준의 정실 사위 조성하, 조성하의 종형제 조영하 등을 통해 암암리에 조대비와 은밀히 물밑 교섭을 시도하여 다음 왕위 계승권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철종은 1864년 1월 16일 (1863년 음력 12월 8일) 재위 14년 만에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에서 승하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33세였다. 철종 역시 후사가 없이 사망하였으므로 후사는 족보상 7촌 조카뻘이자 흥선군의 둘째 아들인 이명복 (훗날의 고종)이 계승하였다. 철종의 죽음으로 효종의 실제 직계 남자후손은 완전히 단절되었다. 남연군(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은 효종의 동생 인평대군의 종손으로 은신군에게 양자로 입적되었다. 1903년(고종 광무 7년)에 청안군 이재순에 의해 철종 고향 생가(용흥궁)가 중건하였다.그의 생가는 대한민국에 와서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20호로 지정되었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 장조, 정조, 순조, 익종이 황제로 추존되면서 철종에게도 황제로 추존해야 된다는 여론이 나타나 1908년(융희 2년) 순종에 의해 황제로 추존되어 장황제(章皇帝)가 되었다. 출처:인산부루스리(이동호) |
첫댓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4차 대유행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여름 휴가철을 맞아 전국의 피서지에 사람이 몰려 좀처름 잠재워 지지 않는 통계를 봅니다. 선진국의 사례 역시 피할수 없는 코로나와 더불어 생활하고 있지만 철저한 자기 방역만이 유일한 길 입니다. 문을 닫고 자는 서늘한 아침 날씨 입니다. 산책 하시며 주말 잘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