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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和會(종교간 화합을 위한 모임) 會報
푸른 들 소리 [제 13권 14호](통권 229호)(2011년 7월 20일)
경천애인(敬天愛人)
장 기 홍
‘역사의 주인은 민중’이라는 말을 흔히 듣는다. 전에는 영웅사관이라 하여 영웅과 제왕이 역사의 주역(主役)이라 보았는데, 그것은 틀렸다 하면서 민중이 역사를 이끈다고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하면 일반인은 듣기가 좋아서 호응을 하는 모양인데, 사실인즉 역사는 모두가 합세하여 만들어가는 것이다. 누가 주인인가 하는 질문은 흑백논리여서 타당치 않다. 하느님이 역사의 주인이라 할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사람이 주인이라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흑백으로 볼 일이 아니다.
역사를 더 크게 보아 우주의 역사를 말해보면 인간이 출현한 것은 최근이므로 시간의 대부분은 사람 없는 상태에서 진행되어왔다. 우주역사의 주인은 결코 사람이 아니라 우주자신이다. 이렇게 보면 ‘하느님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사관(史觀)이 그럴 듯하다. 우리는 흔히 신(神)중심의 사고방식은 묵은 것 같이 생각하는데 옛 것을 고쳐 생각해보면 ‘하느님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생각은 옳다. 하느님은 우주 자신이라 보는 견지에 서면 더욱 타당하다.
나는 요즘 얼마 전부터 위와 같은 생각에 잠겨 있다. 그런 기분으로 길을 걷고 차를 모는데, 대구 시내 어느 서점 앞에 경천애인(敬天愛人)이라 쓴 액자가 매입(買入)할 주인을 기다려 오래 동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두어 달 동안 서 있어도 주인을 찾지 못하여 그대로 서 있었으므로 내가 반값에 사들였다. 오래 안 팔리기 때문에 값이 반으로 떨어진 것이다.
서예가의 이름이 낯익지는 않으나 경천애인이라는 네 글자의 붓글씨는 아주 잘 썼다. 보기 드문 서예작품이다. 내가 탄식한 것은 한문 글씨 솜씨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한자의 뜻을 아는 사람도 쉽지 않다. 敬天愛人이라 하면 다 아는 문구겠지만 모르는 사람이 급증하고 있다. 여하간 그것이 내 손에 들어올 때까지 아무 임자도 못 만났다는 사실은 가치관의 부재(不在) 때문이라고 나는 느낀다.
敬天愛人은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엄청난 요지(要旨)이다. 그 뜻이 심금을 울리는 그런 사람이 드물다는 이야기였으니, 어딘가 조금 잘못된 세태다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며 길을 걷는데 한길 가에 ‘어린이 영어학원’이라 간판이 붙은 미니버스가 서 있고 어린이들이 차에 오르고 있는데 한 아이가 인도(人道)를 걸어오면서 계속 땅바닥의 친구 책가방을 발로 차면서 온다. 축구를 하는 것처럼. 그런데 그것을 보는 영어학원 운전기사?(혹은 영어교사?)는 그 아이의 행실에는 아랑곳 않고 모두가 차에 오르기만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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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아이에게 다가가 책가방을 발로 차면 안 된다고 타 일렀다. 내 타이름을 보고 있던 교사?(운전기사?)는 ‘별 참견을 다 한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아이들 상대로 장사를 하는 데 왜 방해를 하느냐는 듯이. 아이도 나를 힐껏 보는 양이 ‘왠 참견이요?’ 하는 것 같았다. 학동들을 제 멋대로 두어야 영어학원이 잘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이들 비위를 거슬리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것이 학원운영에 이익이 되겠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모두가 교육을 기피히면 이 세상이 어찌 되며 아이들은 누구에게서 행실을 배우겠는가?
이런 저런 생각 때문인지 나는 그만 조그마한 실물(失物)을 하고 말았다. 우리 집 마루의 형광(螢光) 전구가 터져버려서 새 전구를 하나 사가지고 다니다가 그만 지하철역 의자에 놓고 전동차에 올라버렸다. 그것을 깨닫고 되돌아왔을 때는 전구는 이미 누가 가져갔는지 그만 없어지고 말았다. 지하철 사무실의 유실물(분실물) 함에도 내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이런 실물은 벌써 여러 번 째다. 내가 그 짓을 잘 한다. 그런데 하나 특기할 것은 지난 수십년 동안 진보 없는 것은 ‘주인 찾아주기’라는 그 도덕이라는 사실이다. 지난 수십년간 컴퓨터나 핸드폰이나 기타 문명은 큰 진보를 했다. 그러나 도덕문화는 그대로다. 왜 남의 것을 가지고 가는가? 모두들 체질화된 도둑의 원리에서 벗어나야 되겠다.
정직(正直)의 진리를 체득해야 정말 선진화될 줄로 안다. 민족적으로 참사람이 되는 그 일이 중요하다. 양심을 속이면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하는 질책을 당할 것이다. 그 경우의 ‘하늘’이 天이다. 경천(敬天)이란 그런 것이다.
물건을 잃은 사람이 자기 가족이요 식구라 생각하고 사랑할 수는 없는가? 애인(愛人)이란 그런 것이다. 경천애인(敬天愛人)! 만고의 교훈이다.
돈의 신 마하락슈미 사원 탐방 회상기
장 기 홍
“돈의 남편 노릇하던 그 자들이나
돈비를 바람에 흩날리던 그 자들이나
땅은 누구도 돌보지 않나니
묻힌 뒤엔 다시 나오기 원할지라도.”
어리석은 돈 사랑이나 부자의 사치에 대한 야유 같은 이 오마르 하얌의 ‘루바이’는 인간 실존의 딱한 사정을 떠올리게 한다. 돈의 사슬에 묶인 채 태어나서 죽을 때도 돈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음은 무덤을 마련하는 데도 돈이 필요하므로 자명하다.
인도에 가면 드물지만 자이나교도들을 만날 수 있는데 그 종교는 불교와 대략 같은 시기에 불교와 더불어 인도의 고대종교에서 파생했다. 무소유와 불살생을 강조하는 점에서 불교를 닮았으나 더 근본주의적이다. 나체 생활은 자이나교 성자들이 보여주는 무소유의 극치이다. 그런데 그들마저도 소유를 완전히 떠날 수는 없다. 돈과의 결혼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결혼이다.
인도에 가면 돈에 대한 사랑은 돈神 락슈미에 대한 예배로까지 발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힌두교에는 세 주신(主神)이 있는데 창조주 “브라마,” 파괴의 신 “시바” 그리고 세계를 유지 운영해가는 “비슈누”가 그들이다. 힌두교에는 “신들의 사전”이 있는데 거기 보면 돈의 여신 “락슈미”는 비슈누의 아내라 되어 있다.
인도에서 내가 다녀본 사원들 가운데 가장 붐비던 곳은 봄베이에 있는 “마하락슈미 사원”이었다. 큰 락슈미라는 뜻으로 ‘돈의 여제(女帝)’ 쯤 된다. 그녀 앞에 꽃을 바치고 절하고 기도하며 예배 드리는 군상으로 성시(盛市)였다. 마하락슈미 사원의 뒤로 가면 사원건물 벽에 동전을 붙이느라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청년들이 줄을 잇고 있다. 수직으로 선 바람벽에 동전이 붙을 리가 없으나 많은 세월 많은 사람의 끈질긴 노력 탓으로 불가능이 가능해진다. 동전에 손때를 묻혀 겨우 붙여놓으면 곧 떨어지곤 하지만 만일 붙어 있어주면 환호한다. 기적에 가깝지만 어떤 사람은 계속 애써서 마침내 벽에는 홈이 파이고 그 홈 속에 동전이 박혀 얼마 동안은 머문다. 그 주인은 부자가 될 터이다. 그래서 그 벽은 무수한 홈이 파여 곰보가 되어 있다. 그렇게 정성을 쓰는 사람에게는 돈이 붙는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돈을 벌기란 그렇게 어렵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마하락슈미像 앞에 헌화하며 절하는 사람들은 돈이 이 세상을 유지 운영해가는 신이라 생각할 터이다. 그러나 그들은 뇌물을 먹게 해 달라거나 부정부패에 가담하게 허락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니다. 돈의 신도들은 모두 알뜰한 사람들 같이 보였다. 돈에 정성을 쏟는 양이 마치 탐욕에서는 떠난 것 같고 근엄한 종교인임이 분명했다. 검은 돈을 챙기기에 급급한 사람들은 이들 인도인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 락슈미, 마하락슈미 등 돈의 여신들이 있다는 사실은 힌두교가 얼마나 현실주의인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그러한 현실주의 때문에 힌두교는 한때 인도에서 우세했던 이상주의의 불교를 쫓아내고 국교의 위치를 만회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힌두교는 무수한 신들을 받드는 다신교(多神敎)이다. 가장 널리 사랑받는 신(神)은 ‘크리슈나’인데 그는 고대의 왕자였으며 힌두교에 심오한 사상을 불어 넣은 존재이다. 4,200년쯤 전에 생존했던 그는 의무를 존중하고 그것을 위해 행동했다. 그는 ‘행동하되 자아(自我)에 집착하지 말라‘는 철학을 힌두교에 뿌리박게 했는데 그 교리는 ’바가바드 기타‘에 수록되어 있다. 힌두교에서는 ’바가바드 기타‘라는 책 자체를 신으로 모시기도 한다.
힌두교에서는 주신(主神)의 개념이 있고 거기서 파생된 무수한 신이 있다. 크리슈나는 어느 주신의 분신(分身 혹은 分神)인가? 세계 운영(運營)의 신 비슈누의 분신으로 믿어지고 있다. 돈의 여신 락슈미는 비슈누의 아내이니 신분이 높다. 말하자면 비슈누는 돈의 남편이다. 세계 운영에는 돈이 필요하다는 이치의 표현이다.
어떻게 돈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가? 돈을 벌고 쓰는 것이 공무(公務)인줄 알면 집착에서 벗어나리라. 돈 거래가 사적(私的)인 것에서 나아가 공공한 일이 될 때 그것이 곧 무집착이다. 돈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는 것이다. 돈을 다루면서도 돈에서 해방된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무집착의 타당성은 죽음이 증명한다. 누구에게나 한번 죽음이 와서 돈에 대한 집착이 헛 것이었음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무집착은 오직 진리 만에 집착하라는 뜻이 거기 들어있기 때문에 하나의 훌륭한 보편사상이다. 바가바드 기타가 가르치는 의무 존중과 무집착이라는 현실 긍정의 사상 덕분으로 그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힌두교는 인도에서 불멸의 종교가 되어 있다.
산 사람들에게는 육체를 가졌다는 사실만큼이나 집요하게 돈의 필요성이 따라 다닌다. 돈은 물물교환의 불편을 덜기 위해 자연적 필요에 따라 생겨났다. 바른 거래에만 쓴다면 그것은 수학의 등식과 같이 깔끔하리라. 그런데 사람들은 때때로 이 등식을 깨트린다. 침탈(侵奪)로 제왕이 된 자는 그가 만일 소나 말이나 가옥을 빼앗아 차지하자면 물량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돈을 만들어 놓으면 무한정 뺏을 수 있다. 이처럼 돈이 생겨나자마자 도둑이 먼저 차지하게 되었다. 5만원권이 든 상자를 땅에 묻는 이치도 그러한 것이다. 돈은 생겨나와 부정부패에 도용되고 있다. 바른 거래 바른 등식(等式)을 떠나 암거래와 약탈로 빗나가면 반드시 피해자들을 만들게 마련이므로 악(惡)이 되는 것이다. 돈이 말을 못하는 것을 기화로 “돈은 만악의 근원”이라는 식으로 흔히 사람들은 그들 잘못을 돈에게 책임전가를 하나 돈 그 자체는 물건이므로 선일 수도 악일 수도 없다. “돈은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성서의 구절은 새겨들어야 한다.
드문 예지만 사람들 가운데는 장가를 들어서도 돈을 벌어 아내와 자식을 먹여 살릴 걱정은 않고 계속 놀거나 노름에 빠지는 사람이 있다. 이런 몹쓸 예를 들지 않더라도 젊은이에게는 마땅히 돈을 벌려는 의욕을 장려하는 것이 마땅하다. 수출을 권장하고 경제를 중시하면서 돈은 나쁘고 더럽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돈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하며, 돈을 남용 오용하거나 부정부패의 도구로 전락시키지 않을 책임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유산을 학원이나 교회 등에 기부하면 돈이 좋은 위력을 발휘한다. 돈을 좋게 쓰는 법을 보급시켜야 할 것임은 물론이다.
정당하게 자기 몫을 챙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요 의무이기도 하다. 왜냐 하면 자기 몫을 자기가 챙기지 않으면 그 돈을 가로챌 도둑을 장려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돈을 정당하게 챙기는 사람을 보고 흔히 “돈에 밝다” “돈을 너무 챙긴다” 등등으로 매도하고 야유하는 예를 보는데 이는 비뚤어진 가치관이다. 진리를 따르자는 것은 다소 추상적이다. 그러나 진리 대신에 정직을 대치하면 알아듣기 쉽다. 정직은 어디서 배우는가? 맨 먼저 돈 셈을 잘하는 데서부터 배운다. 어릴 때 돈에 대해서 정직한 것을 배우지 않으면 사회에 해독을 끼치는 사람으로 자라나기 때문에 사려 깊은 부모들은 돈 셈을 엄히 가르치는 것이다. 심부름을 시킨 후 꼭 거스름 돈을 받는다든지 서양 부모들이 자식에게 물건을 줄 때 다소의 돈을 받고 파는 것이 그 예다. 서양 아이들은 평소에 저축을 해두었다가 그것을 부모에게 대금으로 지불한다. 이렇게 자란 사람들은 부패하지 않을 것이다.
슬로트 머신이나 카지노를 경영하면 떼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은 돈을 그렇게 쓰는 대중이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이 모두가 돈의 비리요 부정이 아닌가! 필자는 대구 가창에 살면서 하루에 한 번씩 화상(畵像)경마장을 지난다. 주말이면 도박꾼들의 차들로 길이 막힐 지경이다. 공짜와 요행 좋아하는 의식구조를 고쳐야 한다는 주장에 필자는 전적으로 동감이다.
지난날 우리는 “돈을 멀리 하라” “돌을 보듯 보라” “돈을 똥 보듯 하라”고 가르치고 배워왔으나 별 실효가 없었다. 차라리 힌두교에서처럼 돈을 긍정적으로 보게 하는 것이 옳겠다. 돈을 벌고 밝히기는 우리 민족도 으뜸에 손꼽힌다. 기왕 그럴 바에는 돈을 부정적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보게 터놓고 그 대신 돈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도록 유도함이 옳다. 우리의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덮어두었을 때는 모두가 미남이요 존경받던 사람들인데 헤집어 놓았을 때는 시체처럼 되어 들것에 실려 나오는가? 어디가 잘못 되었기에 이 사회는 주검을 만드는 기계와 같은 구실을 하는가? 멀쩡한 사람들을 이 장치 안에 넣고 병신을 만들어 끌어내기 그 몇 번이었던가? 공화국이 바뀔 때마다 모두들 수북이 들 것에 들려 나왔다.
오랫동안 불교가 성했던 우리나라에는 해탈을 인생 목표로 하는 전통이 이어져 왔으며 고승들은 그러한 목표에 무한히 접근한 사람들이다. 그들 덕분으로 무집착, 무소유, 불살생과 같은 정신이 우리에게는 결코 낯설지 않다. 그러나 그 정신은 다 어디로 가고 부정부패로 유명한 나라가 되어버렸는가. 어쩌다가 우리 사회는 돈만을 목표로 삼는 사람들로 충만하게 되었는가? 기독교, 불교, 유교 등의 교인들이 인구의 대부분을 이룬다고는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돈의 우상숭배자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지 않나! 우리는 돈을 벌어서 인류와 세계를 위해서 쓴다고 하는 대의를 보여 주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경제행위가 비로소 가치있는 것이 된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놀랍게도 인도에 가면 인생의 목표를 성자가 되는 데 두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발견한다. 육신의 욕망을 벗고 무소유와 불살생의 이상에 무한히 접근한 성자들을 섬기고 받드는 뚜렷한 풍조가 인도에는 보편해 있다는 것을 보고 나는 참으로 감격을 느꼈다. 그러한 풍조와 전통이 지난 날 마하트마 간디와 같은 聖人을 낳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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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지 시 항 : 2011년 7월 모임
3木 모임 -- 2011년 7월 21일 (목) 7 시
장소: 경북대학교병원 606병동 7층 회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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