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교행
“다정식당, 반송시장 허름한 골목 / 집처럼 소박한 상차림이 나온다 / 노점으로 찌개를 끓여 나가기도 하고 / 학원가 젊은 강사들에게 밥을 푼다 / 퇴근길 내가 들리면 곡차를 올린다 / 안주는 그냥 콩나물이나 시금치무침도 좋아라 / 주인아주머니가 바쁘지 않으면 / 즉석으로 부추전이나 계란말이가 나온다 …” 언젠가 내가 퇴근길 가끔 들리는 반송시장 ‘시골밥상’을 그린 자작시다.
십이월 둘 때 주 월요일 점심나절 이후는 조퇴였다. 정기고사 첫째 날이라 오후 시간은 자유로웠다. 나는 앞 단락서 언급한 반송시장 다정식당으로 향했다. 점심시간 그 식당을 들리긴 처음이었다. 테이블엔 근처 지구대 경찰관들이 점심을 들고 있었다. 나는 구석 자리서 시락국을 시켜 밥공기를 비웠다. 오후는 학교 들어갈 일 없기에 느긋하게 앉았더니 또 다른 손님들이 들어섰다.
늘 긴장의 연속은 아닐지라도 바쁜 일상 속에서 때로는 점심시간에 이런 여유도 부려 볼만했다. 식후에 시장 골목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족발과 생선 가게가 나타났다. 떡집도 있고 김밥이나 생화를 파는 노점도 있었다. 바깥으로 나가니 한 할머니가 배추 속을 소쿠리에 담아 놓고 쪽파를 고르고 있었다. 고무대야에선 미꾸라지가 꼬물거렸다. 사람 냄새가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나는 시장에서 나와 어디로 향할 것인지 물색해 두었다. 삼귀 해안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창원실내수영장 맞은편으로 갔다. 대방동에서 석교까지 가는 216번 시내버스는 배차 간격이 뜸했다. 충혼탑을 거쳐 양곡에서 두산중공업 앞을 지났다. 합포만 건너 저만치 무학산은 미세먼지가 끼어 흐릿한 실루엣으로 남았다. 호수같이 잔잔한 바다 한복판 돝섬은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삼귀 해안으로 가는 손님은 드물었다. 제 4두부 출입국 관리소에 베트남인으로 추정되는 외국인이 내리고 이후 승객은 나 혼자뿐이었다. 해안선 모롱이를 돌아가니 사장교인 마창대교의 교각과 상판이 드러났다. 용호마을 입구에서 내렸다. 그곳부터 건물이 보였고 방파제엔 몇몇 낚시꾼들이 있었다. 통발처럼 잘록한 바다는 가녀린 햇살에 윤슬이 반짝거렸다.
해안선 들머리 갯가에 세워둔 삼귀 애향비를 살폈다. 사십여 년 전 창원공업기지가 건설되면서 해안가 귀현 귀곡 귀산 세 마을 주민들이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당시 삼백여 세대 천오백여 주민이 살았던 동네라고 했다. 지금처럼 해안도로가 없어도 고기를 잡고 농사를 지었던 자연마을이었다. 현재는 횟집을 비롯한 식당들이 다수 들어서고 낚시꾼들이 모여든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서 마창대교 교각을 응시했다. 부챗살처럼 펼쳐진 사장교 쇠줄가닥이 인상적이었다. 상판 위로는 드문드문 차량이 지났다. 건너편 가포 신항엔 몇 개 크레인이 우뚝하고 커다란 화물선이 정박해 있었다. 용호마을 앞 갯가는 요트 선착장이었다. 나하고 인연이 먼 해양레저스포츠였다. 밀물 때라 해수면이 채워지고 있었는데 바닷물은 무척 깨끗해 바닥이 훤했다.
해안선 산책로에서 길을 건너 낚시꾼들을 겨냥한 가게로 갔다. 주인 할머니는 김장을 위한 배추를 절이고 있었다. 나는 삶은 달걀로 생탁을 한 병 시켰다. 텅 빈 실내 탁자에서 잔을 비우고 일어섰다. 이후 마창대교 교각 아래를 지나 갯마을로 갔다. 그곳 ‘갯마을’은 보통명사가 아닌 고유명사 지명으로 전형적인 어촌이었다. 몇몇 횟집 앞 방파제엔 고기잡이배가 여러 척 묶여 있었다.
삼귀주민센터로 들지 않고 외딴 횟집을 지났다. 산책로가 끊긴 텃밭에서 한 사내를 만나 해안선을 따가라면 석교에 이를 수 있는지를 물었다. 아직 물때가 일러 갈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조약돌과 굴 껍데기가 쌓인 해안은 사람 발길이 닿지 않은 데였다. 비탈을 앞두고 산모롱이를 오르니 석교마을이 나타났다. 석교마을 더 바깥은 해군기지와 가까워 민간인 출입을 제한하는 구역이었다. 16.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