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삼성가의 장손이고 이건희 회장의 큰 형인 이맹희가 삼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화제다. 이맹희가 1993년에 쓴 자서전 형식의 이 책은 삼성가의 내막과 후계승계를 둘러싼 내밀한 얘기들이 묻어 있다. 동시에 자본과 권력이 어떻게 결탁해왔는지도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우익과 재벌들의 자서전 읽는 게 취미다. 자서전은 본래 미화, 찬양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한 명의 것만 읽으면 빨려들기 쉽지만, 여러 명의 자서전을 읽다보면 서로 얽히고설킨 얘기 속에 객관적 실체가 조금씩 드러난다. 서로 원수처럼 싸웠지만 이승만의 자유당과 윤보선의 집안이 친일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로 묶여 있고, 재벌들이 복잡한 혼맥 속에 한 덩이로 뭉쳐 있는 것도 보인다.
이 책 <묻어둔 이야기>는 삼성가의 장자로 태어나 온갖 기행으로 아버지 이병철에게 쫓겨난 이맹희의 자기변명이다. 이 책은 ‘이맹희 회상록’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이맹희는 어려서부터 공부는 안하고, 돈 많은 아버지 밑에서 왈패짓을 하면서도 전두환 정호용 김윤환 노태우 윤필용 등과 학창시절 인연을 놓지 않았다. 한국전쟁 땐 군대 가기 싫어 일본으로 밀항했고, 아버지의 일본인 첩을 보고 자라 결국 자신도 복잡한 여자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
한창 한국전쟁 중인데 재벌 자식들은 일본으로 밀항하고, 공무원들은 밀항한 있는 집 자식의 보증이나 섰던 대한민국. 삼성의 사업은 자주 미군용기나 군용 트럭의 도움으로 번창했다. 자기 공장의 여공들을 끔찍히도 아낀 삼성이 파업만 하면 곧바로 해산시켰다. 매점매석으로 시작해 세계 굴지의 재벌로 성장한 회사가 어디 삼성뿐이랴.
박정희 권력과 함께 청와대 회의실에서 밀수를 사업이라고 공동추진했다. 화장실 변기까지 밀수해야 했던 우울한 60년대 한국 사회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박정희를 향해 “밀수 왕초”라고 외쳐 구속된 장준하 선생은 진실을 말했다.
자기 소유의 언론을 이용해 서로 치고받는 재벌들의 더러운 속성은 이 시절부터 시작됐다. 군사정권 시절 재벌은 늘 군홧발 아래 숨죽였던 것만은 아니다. 박정희 정권과 갈등하던 삼성은 1967년 총선에서 중앙일보를 이용해 이만섭 등 공화당 후보 5명의 낙선캠페인을 벌인다. 지금의 대권주자 박근혜의 또다른 아킬레스 중 하나인 영남대는 1970년대 초 원래 삼성이 소유했던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을 합쳐 박정희가 먹었다.
에어컨을 설치해 석굴암 습기를 없애자고 주장하는 이맹희는 그러면서도 박정희 정권의 날림식 경주개발을 민간기업들에게 맡겼더라면 더 훌륭하게 해냈을 것이라고 기염을 토한다. 이 코미디 같은 자서전은 삼성가의 맨얼굴이다. 저자 이맹희가 쓴 소제목을 그대로 살려 내용을 요약했다.
어머니, 고마운 어머니
93년 올해로 87세 된 어머니는 아직도 맏아들이 늘 걱정이다. 어머니는 장충동 집에서 내 아내인 맏며느리와 손자 내외 등과 더불어 노년을 보낸다.
아내는 맏딸 이미경, 맏아들 이재현, 막내 이재환을 훌륭히 길렀다. 맏아들 이재현이 결혼 뒤 할머니를 모시고 살겠다고 자청했다. 우리 부부가 모두 낯선 미국땅에서 공부하던 시절 큰딸 이미경과 맏아들 이재현을 얻어 이들이 제법 자란 다음에 조국 구경을 했다. 미경이는 불어와 영어 외에도 중국어를 잘한다. 상해의 어느 대학에서 교환교수로 일했다. 어렵다는 중국어 계통의 만다린과 칸톤니즈도 한다. 맏아들 재현이는 92년 연말에 제일제당 이사가 돼 삼성전자로 옮겼다. 재현이는 고려대를 졸업했다.
미안한 가장과 든든한 식구들
재현이는 처음에 “삼성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재현이는 전공이 법학인데 경영학도를 뽑는 외국계 은행에 합격했다. 안국화재에 근무하는 외삼촌에게 경영학을 배웠단다. 한참동안 그 은행에서 근무했다.
여동생 명희가 어느 날 재현이를 삼성에 보내라고 했다. 내 큰며느리 이름은 ‘희재’고 둘째며느리 이름은 ‘재원’이다. 우리 부부는 20년 동안 떨어져 살았다. 아내는 서울 장충동에서 어머니와 큰 아들 내외와 살고 나는 쭉 대구에서 살았다. 나는 국민학교, 중학교 시절을 보낸 대구가 편했다.
나는 체질적으로 술을 못 마신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술을 잘 마시지 못했고 세상을 떠난 창희나 건희도 술을 마시지 못한다. 나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오른쪽 다리를 한동안 절고 다녀서 엉뚱하게 입에 오르내렸다.
우리집의 내력, 아버지의 입지
우리 집안의 재산규모가 ‘풍년이면 2천석, 가물면 1500석이었다. 의령일대 부자였지만 달성군 외가가 더 부자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16살, 19살에 혼인했다. 아버지는 늦게 9살에 서울 수송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갔다. 내가 태어날 때 아버지는 일본 와세다대 정경과에 다녔다. 아버지는 1929년 19살에 얻은 큰딸 인희 누나 아래로 2년 뒤 1931년 21살에 나를 낳았다. 아버지는 1932년 일본에서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2남2녀의 막내였다. 내 큰아버지는 이병각, 고모부는 이은택 씨다. 할머니는 1941년 70살에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는 1957년 87살에 돌아가셨다.
나는 1931년 6월 20일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다. 2살 아래 1933년생인 내 동생 창희가 아버지의 수리능력을 제일 많이 물려받았다. 창희는 나와 함께 제일제당이나 제일모직, 전자산업 운영 때도 주로 회계를 담당했다.
아버지는 진주 지수보통학교에서 서술 수송국민학료로 전학해 중동중학교를 다니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아버지는 부모님 몰래 일본으로 유학가는 일을 조홍제씨와 함께 도모했다. 조홍제씨는 삼성에서 아버지와 일하다가 나중에 효성그룹을 일으켰다. 조석래 회장의 아버지다. 아버지가 유학을 계획할 때 조홍제씨는 우리 고향 옆 동네에 살았는데, 아버지는 조홍제씨에게 유학경비를 빌리려 했다. 순사 월급이 5원이던 시절 조홍제씨와 아버지가 거금 1천원을 준비해 일본 유학자금을 마련해 같이 갔다. 우리 집에는 약 30명의 가노가 있었다. 아버지는 전부 자유롭게 떠나보냈다.
귀에 생생한 국수기계 돌아가는 소리
당시에 정미소 주인들이 큰 부자였다. 농토까지 매점매석해 쌀의 생산, 가공, 판매를 체인화했다. 아버지도 김해평야 논 1/3를 가진 적도 있어 지주 계급에서 재벌이 됐다. 1938년 국수공장 삼성상회의 기계 돌아가는 소리는 내 귀에 생생하다. 1930년대 후반 대구에선 5층 건물이 최고층이었다. 이 국수공장을 아버지에게 넘겨준 사람은 대구에서 5층 건물을 가진 큰 사업가였는데 공산주의자였던 것 같다.
공장은 8시간 운영하나 24시간 운영하나 설비의 기본 경비는 마찬가지로 소요된다. 인건비가 더 든다지만 초과분은 생산품의 부가가치와 대비하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특히 당시 인건비가 그리 부담이 되지 않았다.
뒤에 아버지는 대구 인교동에 집을 마련해 순희 건희 명희가 태어났다. 나는 대구 수창국민학교와 경북중학교를 다녔다.
경북 동기생은 기라성 같은 TK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친구인 전두환 전 대통령은 삼성상회 앞 개천 너머에 살았다. 어린 시절 그의 집안을 퍽 가난했다. 그 집안의 사람들도 공장에 일하러 왔다. 경북중에는 정호용 의원이나 김윤환 의원, 노태우 전 대통령, 김복동 의원, 유수호 의원, 김상조 전 경북지사 등이 나와 동기생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원래 대구공고를 다니다가 4학년 때 전학왔다. 성적은 정호용 의원이 제일 좋았다. 동아일보 사장인 권오기씨도 기억에 남는 친구다.
학창시절 나는 정호용 의원과 친했다. 1~3학년까지 단짝이었다. 해방 직후부터 6.25직전까지 교내 좌우익 대립으로 시끄러웠다. 남로당 조직과 서북 청년단과 학련이 있었다. 나는 ‘학련’에 가입했다. 학련 소속이었던 나 역시 여기저기 몰려다니는데 재미를 붙여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자장면과 배갈을 실컷 먹은 다음 하나씩 도망쳤던 일과 이른바 김윤환 의원의 ‘소변 사건’이 가장 생각난다. 학교 건물 2층 교보재 창고에서 김윤환이 오줌을 쌌는데 늦은 점심을 먹던 호랑이 훈육주임 선생 도시락에 떨어졌다. 나는 학업 성적이 좋지 않았다. 나는 공부 대신 주로 왈패짓을 하고 다녔다. 윤필용씨는 나보다는 두 살인가 위인데 대구중 왈패 대장이었다.
6.25전란 중의 가족사... 삼성 스타트
6.25 당시 아버지는 8남매를 두고 있었다. 고향 의령에선 인희 누이와 나, 창희와 숙희가 태어났고 대구 이사와서 순희 덕희 건희 명희가 태어나 3남 5녀였다.
아버지는 삼성상회에서 나온 이익금으로 양조장을 몇 개 인수했다. 조선양조장의 탁주와 동인양조장의 ‘월계관’ 청주가 상당한 인기였다. 아버지는 서울로 올라와 1948년에 현재 YMCA 인근 영보빌딩 1층에 삼성물산공사를 차렸다. 집은 혜화동에 한옥집을 마련했다. 나는 당시 대구에서 혼자 고모집에 기거하면서 경북중에 계속 다녔다. 삼성물산공사는 만주 북경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 등으로 교역하던 무역회사였다. 아버지는 40년대에 시보레 승용차를 탔다.
6.25때 우리 가족은 처음엔 피난을 못 가고 서울에서 적 치하에 살았다. 위대식씨는 암달러를 구해 아버지에게 전했다. 위대식씨는 꽤 오랫동안 삼성에서 일했고 삼성에서 일하는 동안 아버지의 승용차를 운전했다.
이창업씨는 대구상고를 나와 누룩제조회사의 경리를 하다가 아버지가 동인양조장 인수할 때 아버지 밑에서 일했다. 나중에 제일모직 임원을 거치며 평생 삼성에서 일했다. 이창업씨는 아버지가 대구에 두고 간 조선양조장과 동인양조장, 과수원을 대신 운영했다. 빈털터리로 아버지가 6.25때 대구로 내려왔을 때 이창업씨는 3억원을 내놓았다. 아버지는 그 돈으로 부산 부평동에 15평 집을 구하고 삼성물산주식회사를 부산 대교로에 세웠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이력...밀항
전쟁 중 부산에 내려온 뒤 나는 일본으로 밀항했다. 20살 입대할 나이였다. 정호용은 이미 통역병으로 근무중이었다. 5.16때 대위였던 정호용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공부하고 싶다고 해 서울대에 편입했다. 나는 인희 누이가 시집가 살던 마산에서 도일했다. 대마도에 처음 내렸다.
나와 함께 밀항한 사람은 당시 갑부 서갑호의 사위 3명이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아들과 사위가 밀항한 점 부끄럽다. 나는 일본 세계일보 기자 신분증을 얻어 일본 본토로 갔다. 나는 동경 농과대에 입학했다. 입학 때 일본어와 일본역사가 과락이었는데 주일 한국대사관 관리가 보증을 서 무사히 입학했다. 불법 유학생을 변호해 주던 부끄럽고 어설픈 시절이었다. 다음해인 52년 창희가 일본으로 정식 유학해왔다. 창희와 함께 온 이는 효성그룹 현재 회장인 조석래씨였다. 나는 노는데 정신이 팔려 공부는 뒤로 했다. 당시 유학생활은 아버지가 보내준 돈과 몰래 어머니가 준 돈으로 풍족했다.
동생 창희는 일본 유학시절 제수인 이영자를 처음 만났다. 집안이 몰락했지만 원래는 조부가 공작이고 부친은 자작인 명문 규수였다. 연애결혼은 창희와 순희 밖에 없다. 창희는 집안 허락없이 혼자 동경의 데이고쿠(제국) 호텔에서 결혼했다. 나는 당시 미국으로 옮겨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어 결혼에 가지 못했다. 92년 조카 이재관의 결혼에도 나는 가지 못했다. 제수씨 이영자는 한국인으로 귀화해 조카 재관이와 더불어 새한미디어를 이끌고 있다. 동경 유학시절 나는 아버지에게 손찌검을 당했다. 아버지의 일본인 아내 구라다 상 때문이었다.
소문과 진실...안개 걷어내기
아버지와 일본 여자 구라다상의 관계는 80년대 초 외부로 알려졌다. 아버지는 구라다상과 낳은 태휘(야스테루)와 혜자를 호적에 올렸다. 그때 태휘는 서른을 넘겼다. 태휘가 삼성에 출근하면서 “너무 건방지다”는 소문도 돌았다. 내가 삼성 후계자가 못 된 게 구라다상을 두고 아버지와 나 사이에 묘한 관계라는 터무니없는 소리도 있다.
몇 해 전 ‘유0성’이라는 소설 속에 삼성그룹과 우리 형제 이야기가 실렸다. 이 소설의 여류작가는 한때 내가 사냥 다니던 시절 산간주택의 안주인이다. 그 여자의 남편은 대구 어느 방송국 사장을 한 적이 있고 그 여자는 대구에서 간호대를 나와 음악실을 운영했다.
내가 처음 구라다상을 만난 건 51년 동경 농과대 입학 때다. 구라다는 시골 출신의 여자다. 내가 동경에 가서 아버지와 더불어 지내는 구라다상을 처음 보았을 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아버지께서 구라다상에게 우리 형제들의 숙식을 맡겼다. 어느 날 창희와 나는 계란 20여 개를 삶아서 한꺼번에 먹어치웠다. 구라다상은 우리에게 화를 냈고 나는 구라다상을 붙잡고 한참 욕을 했다. 그후 나와 나이가 비슷했던 구라다상은 나에게 무척 조심했다. 아버지에게 매를 맞은 건 우리 남매를 통틀어 나뿐이었다.
그까짓 설탕 만들기의 대역사
나는 56년 아버지의 명령으로 귀국해 결혼하고 57년에 미국으로 유학 갔다. 귀국해 나는 첫 직장으로 안국화재에 61년에 들어갔다. 동생 숙희가 나보다 10개월 먼저 럭키금성에서 일하는 구자학과 결혼했다.
오늘 삼성을 이룬 모태는 누가 뭐래도 제일제당이다. 제일제당은 53년 6월에 설립했다. 당시 국내 설탕가격은 근당 3백환이었는데 제일제당이 설탕값을 50환으로 낮췄다. 제일제당의 초기 설탕부대 깁는 기계는 결국 미군 군용기 신세를 졌다. 내가 미군 파일럿 중위에게 얼마간 돈을 주고 기계를 부산의 미 공군 영내까지 날랐더니 미군들이 군용 트럭으로 우리 공장까지 운반해 주었다. 제일제당의 설탕 생산과 관련 경제학자들이 매스컴에 나와 ‘소비재 산업’을 했던 삼성에 공격 일변도의 태도를 취했다.
검은 액체가 설탕이 되어 쏟아지기까지
당시 제일제당 공장 설립에 모두 반대했다. 젊은 관리였던 신현확씨만 긍정적이었다. 그는 이승만 정권의 부흥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아버지도 평생 신현확씨를 고맙게 생각했고 신씨도 아버지를 늘 존경했다. 둘은 금전 몇 푼과 적당한 특혜로 맺어진 사이가 아니었다. 당시 원당은 중국의 장개석 정부가 보내준 것으로 충당했다. 나중에야 대만 정부에서 정식으로 수입했다.
당시 원심분리기 축이 자꾸 부러져 문제였다. 이를 해결한 사람은 외부 용역팀으로 공장에 들어와 일하던 용접공이었다. 그는 지나가다가 보고서 “웬 원료를 그렇게 많이 넣는가요?”라고 한마디 던졌다. 맞았다. 원료량이 너무 많아 축이 자꾸 부러졌던 것이다. 원료를 줄이니 하얀 설탕이 쏟아져 나왔다. 그날이 제일제당 창사기념일인 53년 11월 5일이었다. 나중에 그 용접공을 찾았으나 허사였다. 제일제당 공장 건립의 공신은 김재명씨다.
아버지가 평생 고마워했던 사람이 이창업과 김재명이다. 김씨는 공장 설립 뒤 24시간 가동을 지휘하느라 고생했다. 50년대 후반 미국은 잉여생산물로 골치 아팠다. 피난지 부산에서도 미국의 갖가지 관련 기관을 통해 우리는 여러 원조를 받았다. 삼성도 제일모직 건설 때 상당한 미국의 도움을 받았다. 설탕은 만드는 대로 팔렸고 팔리는 대로 상상도 못할 이익이 생겼다. 54년 설탕공장의 이익과 차관을 합쳐 제일모직을 건설했고 연이어 시중은행도 인수했다. 나와 창희는 각각 동경 농과대와 와세다에서 공부하고 뒤이어 건너온 막내 건희도 일본에서 국민학교를 다녔다.
20년 전 집안에서 점 찍어둔 규수감
56년 아버지의 명령으로 귀국한 나는 25살에 동경 농과대학원생이었다. 내 결혼은 20여년 전부터 결정돼 있었다. 나와 숙희의 결혼이 있기 오래 전부터 집안끼리 인연이 있었다. 나의 장인은 경기도 지사와 농림부 양정국장을 지낸 손영기씨다. 아버지와 장인 어른은 상당한 친분이 있었다. 내 처의 이름은 손복남이고 이대 교육학과 출신이었다. 우리 부부와 구자학 부부 4명은 비슷한 시기에 미국으로 유학갔다.
자리가 사람을 잔인하게 만드나?
매제인 구자학과 내가 먼저 57년 2월 미국으로 떠나고 여자들인 아내 손복남과 동생 숙희는 4월에 미국으로 왔다. 나는 테네시 주립대 대학원으로 갔다가 미시건 주립대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아내는 당시 아동교육학을 공부했다. 우리는 미국 유학때 미경이와 재현이를 얻었다.
아버지를 두고 ‘냉정한 기업가’라고 한다. 나는 귀국 후 5.16을 맞았다. 나는 당시 삼성이 보유하던 한일은행에서 일했다. 내 봉급은 6만6천원이었고 일반 직원은 4만원이었다. “오너 아들이라고 특별대우”라고 직원들이 공개 스트라이크를 일으켰다. 그들은 아버지를 한때 대학생들이 주창했던 ‘악덕 기업가’로 생각했다.
짧은 밀월과 긴 갈등의 시작
아버지와 나는 여공들의 후생에 지나칠 정도로 신경 썼다. 제일모직 여직공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켰다. 제일모직 여공 스트라이크가 벌어지자 아버지는 단호했다. 바로 공장 문을 닫아걸고는 직원들을 해산시켜 버렸다. 6개월 뒤 문제는 원만히 해결됐다. 여공들은 본인이 원하는 경우 전원 복직했다.
나는 한일은행 행원 생활을 거쳐 안국화재로 옮겨 1년 정도 총무부장으로 일했다. 나는 은행, 보험회사에서 시큰둥하게 2년 남짓 새월 보냈다. 5.16이 나면서 박 정권과 삼성은 ‘짧은 밀월과 긴 갈등’을 겪었다.
오랜 숙원인 비료공장에의 첫발
비료 공장은 아버지의 오랜 꿈이었다. 정부가 주도해 시작한 비료공장인 충주비료, 나주비료가 제 구실을 못했다. 아버지는 신년이면 늘 동경에서 사업을 구상해 발표했다. 아버지는 오쿠라 호텔에서 TV로 일본방송을 보다가 개인 사기업도 차관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이렇게 한국비료를 지을 차관을 구상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외국에서 차관을 얻는데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갖고 있었다. 이 대통령은 우리 집안 할아버지와 면식 있고 친구의 아들인 셈인 아버지에게 호의적이었다. 5.16 무렵까지 아버지는 외국에서 차관을 얻는 문제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다.
8년 허송, 그러나 삼성의 공신력 확인
정작 비료공장 설립은 무려 8년 뒤였다. 차관 교섭을 위해 처음엔 독일 크루프 철강회사를 갔다가 실패했다. 한일은행 등 금융기관 운영에 참여한 아버지는 은행 지불 보증이란 퍽 손쉬운 해결책을 깨달았다. 나와 아버지 사이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일들도 바로 이 비료공장의 건립 후부터였다.
5.16쿠데타...갈피를 잡을 수 없는 우격다짐
5.16 군사 쿠데타 때 나는 안국화재에 근무하며 필동에서 분가해 결혼생활을 하고, 부모님은 장충동에 살았다. 쿠데타 당시 아버지는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회사는 조홍제씨가 전체적으로 진행하면서 기업인 구속 때 함께 구속됐다. 아버지는 군사정부에서 보낸 사람을 동경에서 만난 뒤 귀국했다. 아버지를 설득하러 일본에 간 사람은 육군 중령 이모씨로 이후 국회의원을 지냈다. 아버지는 동경에서 귀국하기 전 외신기자들을 모아 놓고 전재산을 국가에 자진헌납한다는 성명을 냈다.
아버지는 당시 내게 “우리 삼성이 낸 세금이 국가 전체의 3%쯤 된다”며 걱정하지 않았다. 밀가루 설탕 시멘트 등 삼분폭리사건도 있었다. 삼성은 그중 밀가루와 설탕에 해당했다. 어떤 신문이 악의적으로 왜곡했다.
혁명 초기 아버지는 경제인협회장으로 우리 경제에 길이 남을 하나의 업적을 남겼다. 아버지는 당시 박대통령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울산공업지역을 선정했다. 박 정권의 핵심과 가까운 관계는 5년 정도였다.
한국비료공장건설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비료 공장 건설은 64년 가을에 다시 이야기가 돌았다. 아버지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비료공장 건설을 제의 받았다. 64년 박정권이 아예 기업들에게 대놓고 정치자금을 요구해 정국을 요리했다.
미쓰이 재벌과 차관교섭이 승사됐고 단일공장에서 4천2백만달러의 외자를 도입하는 당시 최고 규모였다. 한국비료의 연간생산 33만톤 규모는 세계 최대였다. 비료의 농협 인도가격은 1톤당 86~90달러였는데 한국비료는 56달러에서 가능했다.
잘못한 일은 드러나기 마련...연속 터진 자충수
문제는 차관 4천2백만달러로부터 시작됐다. 미쓰이가 삼성에게 제공한 리베이트는 모두 1백만달러였다. 한국비료 건설결정에는 박 대통령, 장기영 부총리, 이후락, 김성곤, 김형욱, 아버지가 논의했다. 박 대통령은 1/3은 정치자금, 1/3은 부족한 공장건설대금, 1/3은 한비 운영자금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이렇게 한비 밀수사건의 토양이 갖추어졌다.
청와대 회의에서 밀수를 하기로 결정하고 나서 정작 밀수의 진행은 다름 사람들이 맡았다. 동생 창희와 이일섭 상무, 신운철 상무, 손영희 과장, 내가 현장에서 밀수를 진행했다. 우리는 이참에 평소 들여오기 힘든 공작기계나 공장 건설용 기계를 가지고 오려고 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손영희 과장이다. 손 과장은 정부에 불려가 고춧가루 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다.
일본에서 물건을 들여와 국내 시장에 팔면 약 4배 정도 돈이 생긴다는 계산이 나왔다. 정부와 협의한 밀수가 엉뚱하게도 국내 시장의 영세성으로 애를 먹였다. 우리가 밀수한 주요 품목은 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스테인리스판 등이었다. 암시장에서 잘 팔리는 품목을 조사해서 정했다. 나중에 말썽이 된 사카린의 원료인 OTSA도 들여왔다.
당시 설탕은 값이 비싸니 빵이나 과자 등은 전부 사카린으로 단맛을 냈다. 여러 공장에서 사카린을 제조했는데 문제의 금북화학과 우리는 이미 OTSA를 들여오면 사겠다는 계약을 맺었다. 그 무렵 부유층 사람들은 외제 화장실 양변기를 사용했다. 외제 양변기 가격이 암시장에서 대략 15만원 정도였다. 우리는 화장실 양변기도 포함시켰다. 문제는 양변기를 들여온 다음 국내에 풀었을 때 일어났다. 원래 양변기는 암시장 가격이 15만원인데 우리가 울산을 통해 들여온 양변기 100개를 남대문 암시장에 푸니까 갑자기 가격이 10만원으로 떨어졌다. 냉장고나 에어컨도 마찬가지였다. 퍽 초조했다.
사카린 제조의 원료인 OTSA는 비료공장과 아무 관계가 없다. OTSA는 들여오면 살 회사가 있었고 그런 회사 중 하나가 금북화학이었다. 정부 파견기관들은 감시는커녕 우리의 밀수를 약속대로 도왔다. OTSA는 66년 5월 일본 신슈우마루를 통해 울산에 2400부대를 들여왔다. 문제의 OTSA는 66년 5월 세관에 걸렸다. 이후 넉달 뒤 삼성은 무려 반년 동안 융단폭격을 당했다.
타오르는 재난의 불길...불씨는 정치자금
66년 9월16일 세무국장이 삼성 밀수를 발표했다. 4개월 전 정치권은 유야무야 했다. 다시 9월에 터졌다. 공장 건설의 주무장관이던 김정렴씨가 밀수 사건의 진상을 정확히 발표하도록 지시했다. 김정렴 장관은 지금도 내가 퍽 존경하는 경제인이다. 실물경제를 운영한 적은 없지만 경제관료로 이분만한 이론을 갖춘 분도 드물었고 청렴했다. 김정렴 당시 재무장관의 지시로 9월에 사건이 다시한번 공개됐다. 김 장관은 여론에 밀려 이런 조치를 취했다.
당시 공화당 내부 사정이 단순하질 않았다. 당시 공화당 실력자인 이후락, 김형욱과 사이가 벌어졌던 김모씨가 삼성에 손을 벌렸다. 김씨의 요구가 있은 뒤 박 대통령에게 그 상황을 전했더니 박 대통령은 웃으며 형편되는 대로 한 5천만원 정도 주라고만 해 그렇게 했다. 그러나 김씨는 더 요구했다. 금북화학은 공교롭게 김씨의 형과 관련이 있었다. 다시 불을 지른 건 김씨였다. 김씨가 일부 매스컴과 연대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일으켰다.
맹희야, 정치한다는 사람 믿지 마라
66년 9월 15일 기사로 실리자 전체 신문이 포문을 열었다. 박정희, 이후락, 김형욱, 장기영이 한쪽이고 반대쪽은 김씨였다. 아버지는 박 대통령을 두고 욕을 했다. ‘너무 약고 의리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처음 밀수를 제안한 것도 박 대통령이고 밀수의 진행을 뻔히 알면서도 대통령은 한비사건을 모른 척했다. 장기영 경제기획원장관은 한비밀수 비난 기자회견을 했다. 9월22일 김두한 의원이 의사당에서 오물을 투척했다. 정일권 내각이 총사퇴했다. 해임된 건 김정렴 재무장관과 민복기 법무장관 두 사람뿐이었다. 그나마 공정했던 두 분이 물러난 건 뼈아팠다.
창희가 1966년 9월 22일, 이일섭 상무가 25일 검찰에 자진 출두했다. 1966년 10월15일 당시 <사상계>사장이던 장준하씨가 대구에서 ‘재벌기업 삼성 밀수 규탄대회’에서 “박정희야말로 밀수 왕초”라고 발언해 구속됐다. 창희와 이일섭 상무는 27일 구속됐다. 창희의 담당판사는 김모 였는데 다행히도 아버지와 김판사의 아버지가 오래 전부터 친분이 있었다. 난 창희를 구명하러 김 판사를 만났다. 66년 연말 추운 겨울 밤 김판사를 기다리다가 얼굴이 붉어져 밤 12시 넘어 만났는데 다음날 신문에 ‘삼성 이맹희 부사장이 동생인 한비 사건 주모자 이창희 재판의 담당판사에게 술에 만취해 행패를 부렸다’고 났다. 아버지는 40일 뒤 10월 22일 회견을 열어 은퇴했다.
등 돌리고 가는 사람...그리고 은퇴선언
아버지가 은퇴한 큰 이유는 박 대통령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56살에 불과했다. 박 대통령은 아버지를 ‘호사스럽게 자라 사치스럽게 사는 사람’ ‘소비재 장사나 하는 사람’으로 치부했고, 아버지는 대통령을 ‘일본인이 세운 만주 사관학교를 나온 천박한 군인’ ‘좌익으로 잡혀 동지들을 배신한 신의없는 사람’으로 알았다. 박 대통령 시절엔 삼성이 어떤 사업이라도 새로 시작하려면 늘 힘들었다.
청와대 윤필용 당시 방첩부대장과 박종규 경호실장 등은 삼성에 그리 나쁜 감정을 갖지 않았다. 나는 삼성에서 일하다 배신한 S씨를 박종규씨와 함께 만났다. 퇴직금을 정하는 자리였다. 약수동 고급 요정이었다. 결국 3억원으로 끝냈고 그후로도 S와는 불편했다.
이만섭 등 5명은 떨어뜨려라
삼성을 내가 독자 운영한 건 한비사건이 터진 다음해 67년 7월부터였다. 헌납받은 정부는 당시 은행에서 물러나 실업자였던 박모씨를 한비 사장을 앉혔다. 나의 절친한 친구인 당시 농수산부 장관 정모의 장인이었다.
67년 총선과 대선이 있었다. 아버지도 두 번의 선거에서 박 대통령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 아버지는 나를 불러 이만섭 의원과 권, 민모 등 5명은 꼭 낙선시키라고 지시했다. 나는 당시 중앙일보 부사장이라 이들의 불법 선거운동을 감시하기 편리했다. 4명은 낙선하고 이만섭만 당선했다. 이만섭도 2, 3천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당선됐다. 국민학교 동창이기도 한 이만섭은 선거 중에도 걸핏하면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이병철이가 날 떨어뜨리려고 야단’이라고 외쳤다. 선거 뒤 나는 이만섭과 화해했다.
무슨 도장을 또 찍어?
나는 이후락 김형욱을 반도 호텔 803호에서 만났다. 김형욱은 그 자리에서 한국비료 전체를 다 헌납하라고 했다. 우리는 51%의 소유 지분을 다 내놓겠지만 나머지 주식은 그들의 몫이라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아버지는 결단의 순간에도 여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한비를 헌납하고 나서도 일상은 여전했다.
아버지는 1967년 7월 첫 월요일에 나를 삼성의 총수로 정하고 대외에 발표했다. 나는 정부 요로에 중학교부터 친분있던 윤필용 선배와 박종규 경호실장으로 그리 힘들지만은 않았다.
무섭게 휘몰아쳐간 7년 역사
당시 내 나이 36살. 아버지의 자서전엔 내가 기업운영을 잘못해서 불과 6개월만에 물러서고 아버지가 어쩔 수 없이 다시 복귀했다고 기록됐다. 그러나 내가 일한 기간은 7년여였다. ‘맹희는 경영자로서 문제점이 있어서’라거나 ‘둘째 창희는 본인이 중소기업을 운영하겠다고 해서’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신운철 상무와 나는 미국의 코닝 글라스와 합작해 삼성코닝을 만들었다. 나는 신 상무 아내가 출산할 때도 집에 보내지 않았다. 나보다 나이 많은 그에게 못할 짓이었다. 나는 직원들의 결혼 휴가를 이틀로 줄이라고도 지시했다.
이보게 삼성의 젊은 부사장...
한국비료가 허사로 돌아간 마당에 내가 가졌던 생산업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시작한 게 바로 전자산업이었다. 전자산업으로 한국비료에서 돌아온 인원을 어느 정도 흡수했다.
미국이라고 로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당시 상당액의 돈과 정열을 코닝 글라스와 합작에 투자했다. 밤에도 대낮같이 불을 밝히고 24시간 일했다. 아내가 출산해도 신혼여행도, 제사는 물론 집안에 환자가 있어도 허락하지 않았다.
약 주고 병 주는 실력자의 제의
국내 커피 사용량은 한해 4백톤이었다. 일본 맥스웰하우스의 야마모토와 한국에서 커피 생산에 합의했다. 이후락이 제안한 사업인데 나중엔 서정귀에게 흘러갔다. 나는 손을 뗐다. 서씨가 실패하자 우여곡절 끝에 김재명씨가 삼성의 퇴직금으로 동서식품을 인수해 홍희 형님과 운영하면서 큰 회사로 키웠다.
나일론 백을 둘러싼 파워 게임
정부 관리들은 경제 특히 기업운영에 어두웠다. ‘나일론 백 위장수출사건’은 67년12월29일 윤필용 방첩부대장이 내게 털어놨다. 인천 앞바다에 김형욱 당시 중정부장이 중정 조직을 이용해 당시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나일론 원사를 수출용 제품을 만든다고 수입한 뒤 몰래 국내시장에 팔아치우고 대신 마치 수출을 한 양, 가짜 수출품 꾸러미를 만들어 인천세관으로 통과시킨 다음 그걸 전부 인천 앞바다에 버린 것이다.
중앙일보가 나일론 백 사건을 가장 먼저 보도했다. 이 사건으로 나는 김형욱 부장과 더 사이가 멀어졌다. 박 대통령은 이 사건을 묵인하면서 김형욱에게 돈을 받았고 그걸 정치자금으로 이용했다.
박종규 실장, 윤필용 장군과 친하게 지냈다. 정보제공은 박종규 경호실장이 하고, 행동은 윤필용이 하고, 돈은 이맹희가 댄다는 쿠데타 모의 소문도 돌았다.
70년대 초반 삼성은 대구대학을 소유했다. 이후락이 정부에 넘기라고 해 줬다. 청구대학이 부실공사건으로 걸려들자 청구대학도 차지해 두 대학을 합쳐 오늘날 영남대를 만들었다. 삼성은 60년대 후반엔 윤필용 박종규 전두환과 친분이 강했다.
모두 제정신이 아니던 시절
1년 동안 중정 직원이 내 뒤를 따라다녔다. 나와 친분 때문에 전두환 소령도 어려움을 겪었다. 권력 핵심은 전반적으로 음모와 서로 고자질하는 일로 지새웠다. 하나회 대부 윤필용씨가 엉뚱한 죄로 구속되고 나는 자연히 영남파 군인과 친할 수밖에 없었다.
언론인 출신으로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 측근이던 신모는 나에게 노골적으로 검은 돈을 요구했다. 73년 3월 윤필용 사건 때 나는 이미 삼성과 멀어져 혼자 지방에서 사냥하고 있었는데 중정으로 연행돼 서울로 압송됐다.
아버지의 원대한 건설개발의 꿈
68년 완공한 고려병원을 지은 건 몸이 아픈 인희 누나에 대한 배려였다. 고려병원은 자유당 실력자 이기붕의 집 부지를 사서 지었다.
경주는 박 대통령의 지시로 개발했다. 경주개발공사 중에 석굴암 보수공사가 기억에 남는다. 당시엔 습기를 제거하는 방법을 몰랐다. 습기와 악취 제거를 현대 문명인 에어컨 설치로 해결했다. 경주 개발을 정권 홍보용으로 급하게 진행하지 않고 민간기업들에 맡겨 규모있게 했더라면 좀 더 훌륭한 유적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도청과 부끄러운 이야기
69년 나는 우연한 기회에 국방대 강의를 했다. J대령의 부탁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가능하다는 소리를 듣고 시작했다. 직격탄으로 중정을 공격했다. 또 중정에 불려갔다.
중정이 내 전화를 도청하는 바람에 내가 바람 핀 일이 탄로났다. 김재규씨가 중정부장일 때 나는 마흔을 갓 넘은 나이에 간호원이던 26살의 아가씨를 깊게 사귀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미국으로 갔다. ‘미국 병’에 결려 무작정 계약결혼 해 미국으로 간 것이다. 나는 귀국을 전화로 종용했고 그 내용이 드러났다. 그녀는 미국에서 한국 정보기관에서 온 사람들에게 협박당했다. 김재규씨가 녹음 내용을 아버지에게 전했고 결국 아내까지 알게 됐다. 김재규 부장은 자신이 ‘바깥에서 아이를 낳은 일을 박 대통령에게 보고해 허락을 얻었다’고 나에게 이야기할 정도로 친했는데.
우리 삼성이 전자산업을 하는 게 그토록 금성의 구회장을 자극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전자산업 시작을 구 사장에게 “우리도 앞으로 전자 산업을 하련다”고 말하자 구회장은 벌컥 화를 내면서 “남으니까 하려고 하지”라고 쏘아붙였다. 두 분은 이 일로 아주 서먹서먹해졌다.
부산의 국제신문과 중앙일보 사이에 이 문제로 공방전이 벌어졌다. 부산의 국제신문은 금성사에서 인수해 운영하던 신문인데 ‘삼성의 전자선업 진출은 부당하다’는 기사를 연속해서 내보냈다. 후발업체가 생겨 금성사도 자극되고 두 회사 모두 오늘날 대외적으로 수출할 정도로 성장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제일제당의 미풍과 미원을 둘러싼 싸움도 잊지 못한다.
삼성을 떠날 무렵에 벌어진 불행한 촌극
아버지의 복귀 의사와 창희의 모반, 갖가지 오해와 부자지간의 마찰이 생겼다. 아버지와 틈이 생긴 건 박 대통령의 삼성에 대한 태도와 관계있다. 72년 유신 이후 말 많고 탈 많던 공화당이 장기 집권의 체제 구축에 성공하면서 한결 부드러워졌다. 정부와 삼성 관계도 부드러워지자 아버지는 서서히 복귀를 결심했는데 나는 눈치 못 챘다.
이때 창희의 아버지에 대한 모반 사건이 있었다. 창희는 출옥 후 아버지에게 불만을 쌓아갔다. 나는 69년 연말 독일 필립스와 합작문제로 출장 갔다. 당시 창희를 포함해 5명이 아버지를 사직당국에 조사하라는 탄원서를 냈다. 3명이 창희를 부추긴 것이다. 아버지가 해외로 1백만달러를 밀반출해 외화도피했고 현충사 지을 때 삼성에서 조경비 3천만원을 부풀렸고 제일모직과 제일제당 탈세 건도 있었다. 이 문서를 청와대에서 제일 먼저 손에 넣은 사람은 전두환 중령이었고 이걸 박종규 실장에게 보여준 다음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나도 이 일에 개입한 것으로 오랫동안 생각했다.
아버지는 건희가 방위병 입대할 때도 나에게는 숨겼다. 나와 창희는 필동에서 아래, 윗집에 살았다. 창희 주변 사람들은 계속 창희를 부추겼다. 창희는 미국으로 출국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에도 처음엔 강하게 반발했다. 나는 이 일로 청와대 그룹들과 일체 관계를 끊었다. 나는 그들에게 더 큰 배신감을 느낀다.
조용한, 그러나 냉엄한 복귀 선언
창희의 미국 출국날 공항엔 어머니와 나만 배웅을 왔다. 아버지는 70년을 기점으로 자신의 복귀 사인을 보냈지만 난 깨닫지 못했다. 내가 둔해서. 73년 여름 아버지는 내 직함의 숫자를 물었다. 17개 였다. 아버지는 연필로 직함에 줄을 죽죽 그었다. 삼성물산, 삼성전자, 제일제당 부사장과 삼성문화재단 상무, 안양골프장 운영위원 등 5개 정도가 남았다.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갈수록 벌어져 간 부자의 고랑
아버지와 내가 멀어진 건 이후 여러 사건이 겹쳐 더 심해졌다. 내가 일선을 떠나 동경에 있을 때 아버지가 일본에 왔는데 내가 공항에 마중 나가지 않았다. 동경지점 직원들을 모아 회식하는 자리에서 이번엔 아버지의 지시에 직접 제동을 걸었다. 75년 봄 일본에서 돌아와 다시 회사에 나갔다. 나는 어느새 이방인이 됐다.
나는 기다리며 근신하는 대신 다시 아버지의 의도에 정면으로 반항했다. 총을 메고 사냥터를 찾아다녔다. 겨울엔 사냥하고 여름엔 워커힐에서 말을 탔다. 고향 의령으로 가 세월을 보냈다. 경북 의성에서 사냥을 다녔다. 다시 서울로 돌아와 거의 골프장에서 보냈다. 해운대 별장에서 낮엔 골프, 밤엔 책을 읽었다. 부산행도 반항이었다.
드디어 내려진 총수 승계 선언
동생 창희가 6년만에 77년 귀국했다. 아버지는 창희에게 각급 사장들 찾아가서 빌어라고 지시했고 창희는 따랐다. 그 뒤 아버지는 창희의 새한미디어에 여러 혜택을 주었다. 아버지는 창희에게 당신의 제일합섬 주식 전량을 넘겨주었다. 이는 나에게 보내는 아버지의 신호였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해운대에 있었다.
아버지의 유언은 모두 구두였고 우리 식구 외 신현확씨만 유일하게 배석했다. 아버지가 섬성의 차기 경영자로 건희를 발언한 건 76년 9월 중순이었다. 암수술 뒤에도 아버지는 11년을 더 사셨다. 아버지는 암수술차 일본 출국 하루 전날 밤의 가족회의에서 건희의 후계를 처음 언급했다. 나는 충격을 잊지 못한다. 다시 아버지는 운명 직전에 인희 누나, 누이동생 명희, 건희, 내 아들 재현 등 5명을 모아두고 구두로 건희에게 정식으로 삼성의 경영권 이양을 유언했다.
얼음 같은 절제와 정확한 판단...거인이었다
나는 후계 뿐만 아니라 유산 분배에서도 철저히 배제됐다. 나를 잘 아는 이들이 날더러 ‘성격이 급하다, 불덩이 같다’고 평한다. 내 자존심을 조금만 죽이고 아버지에게 매달렸으면 문제는 잘 풀렸을 것이다. 아버지의 지시를 받고 온 사람을 폭행하는 등 완강한 몸짓으로 거부했다. 내 불 같은 성격 때문이었다.
너는 아직 기업가가 아니다
나에게는 아버지와 일하던 70년대 초 우연히 마련했던 대구 동대구역 부근의 땅이 있었다. 개발 정보를 미리 얻어 샀다. 내 돈 1억, 제일모직 1억, 아버지 돈 1억으로 역 예정지 인근 땅 수십만 평을 샀다. 나는 자랑스럽게 아버지에게 보고했다. 아버지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그 땅 바로 팔아라’고 했다. 아버지 몫의 땅은 한달 반 사이 9억8천만원이 됐다. 아버지는 1억만 챙기고 나머지 수표는 연필로 쭉 밀어내며 ‘이건 내 돈 아니다’고 했다.
자꾸만 조여드는 압력의 조짐
어머니가 내가 살던 부산 해운대로 왔다. 부산 별장의 한 달 유지비는 매월 3백만원 정도였는데 내가 오면서 월 6백만원으로 늘었다. 내가 성격이 난폭하다고 소문난 건 해운대 골프장 지배인을 때린 일 때문이다. 별장에 불러다 골프채로 때려 2주일간 입원시켰다. 안양골프장에서 다시 그를 보자 산으로 도망가는 그를 끝까지 따라가 때린 적도 있다. 나이 50에.
그 지배인은 정식 입사가 아니라 삼성 어느 임원의 편의로 입사한 전직 관리였다. 나는 정식 입사가 아니라 옆길로 입사하는 것을 싫어했다. 이 친구는 그때 한참동안 내 골프장 출입료를 받고 있었다. 내가 지배인을 별장으로 불러 골프채로 때린 것은 또다른 목적도 있었다. 아버지에게 보내는 ‘대답’이었다.
치안본부에서 일하는 친구 김모가 급히 전화해왔다. 내가 성광증(섹스중독)이 심해 삼성이 서울대 병원에 입원시키려하고 있다는 거다. 이는 삼성의 비서실이 개입했다. 이미 기흥에 내가 살 집까지 마련했다. 피를 나눈 식구들도 나한테 이런 귀띔을 하지 않았다. 부산에 괴전화가 왔다. 웬 여자가 그 집은 위험하니 피하라고 했다. 창희가 여자를 시켜 나에게 전화했다. 나는 거실의 의자 아래에 늘 휘발유 통을 3개 준비했다.
갈수록 태산
거실에서 책을 보는데 건장한 젊은 청년 두 사람이 거실로 쑥 들어왔다. 별장을 돌보는 집안 친척 봉희는 꽁꽁 묶여 있고 봉희 아내와 아이들은 방에 갇혀 있었다. 별장의 내 짐을 전부 실어갔다. 부산 시절, 사촌 형님인 이동희 제일병원장이 나에게 돈 1백만원을 줬다.
나는 대구 대명동에 셋집을 하나 구했다. 서울에선 나를 서울 데려와 기흥 별장에 둘 생각이었는데 나와 아내만 몰랐다. 용인의 가족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진행했고 집안 식구끼리 일을 분담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나에게 ‘인간적인 해명과 사과’도 없었다는 점은 한참 동안 나를 섭하게 했다.
가다 가다 마라도까지
나는 소 실장이 나에게 ‘이맹희 선생님’이란 호칭을 쓰는 것을 들으며 사태를 정확히 알아차렸다. 소 실장이 대구에서 나를 만난 뒤 나는 대구를 피해 도망갔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보위 시절이었다. 나는 광주 목포로 갔다. 설렁탕 한 그릇에 8백원이고 전라도 인심은 좋았다. 두 달 떠돌았는데 50만원도 쓰지 못했다.
목포 인근 비금도라는 섬에서 좋은 분재할 나무도 봤다. 비금도에서 하루 밥값 5백원, 한달에 1만5천원을 주기로 하고 어느 집에 기식했다. 한 달 정도 비금도에 있다가 파출소에서 검문을 나왔다. 다시 광주로 나와 군산 이리 대전 속초로 갔다. 잠시 대구로 돌아와 친구 김모의 주민증을 빌렸다. 경북 청송 인천 백령도 여천 제주도 마라도까지 갔다.
바닷가 영덕에서 살려는데...
영덕에 집을 하나 지었다. 생활비는 누이동생 명희가 보조해 주었다. 산과 대지를 합쳐 3천평 정도를 평당 80원에 샀다. 내가 영덕에 정착할 무렵 전두환 대통령이 아버지에게 연락 한 것 같았다. 나는 영덕에서 ‘건축법 위반’등에 휘말려 다시 대구로 나왔다.
애증을 넘어
내가 대구로 온 뒤 아버지와 더 이상 겉으로는 드러나는 마찰은 없었다. 대구 살던 1987년 9월경 이동희 형님이 아버지의 병세를 전해주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날만 기다렸다. 나는 56살, 아버지는 77살이었다. 병상엔 어머니와 인희 누이, 창희 명희 덕희 야스테루도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서럽게 울던 최관식 고문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최 고문과 동서식품 김재명, 내 친척 이홍희 회장을 나는 늘 존경했다.
정주영 씨가 마지막 가시는 길을 끝까지 지켰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나는 외국으로 떠났다. 동생 건희에게 부담 줄 수 없었다. 이번엔 자발적으로 택했다. 5년 동안 아프리카, 남미, 미국, 일본을 돌았다. 귀국 때 김포공항에서 총기 밀수를 ‘색다르게 해석’해 건희를 쏘려고 총을 갖고 왔다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