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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의열(義烈) 투쟁의 시작점...김원봉의 의열단, 김구의 한인 애국단 창설의 원동력
나의 거사는 오직 동양평화를 위한 것...우리 민족의 영웅 안중근 32세의 나이인 1910년 '순국'
순국 후 2010년 정진석 추기경이 집전한 명동대성당 추모 미사를 통해 뒤늦게 천주교 품에 안겨
효창공원 내 안중근 의사의 가묘엔 비석은 있으나 아직까지 유해 찾지 못해 빈 무덤으로 혼백 모셔져
뤼순감옥의 안중근(安重根, 1879~1910)/전시실 [정성환 기자]
[투데이광주전남] 정성환의 문화역사이야기(63) =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은 대한제국 말기에 활약한 독립운동가이자 계몽운동가이다. 그는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고 32세의 나이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이번 이야기는 '영웅 안중근을 기리며'의 마지막 편인 「제6편 천주교 품에 안긴 토마스(도마) 안중근」이다.
◆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의열(義烈) 투쟁의 시작이었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재판 과정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한 부당함을 온 세상에 알려, 대한제국의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안중근의 신념이었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유신의 중심인물로 초대 총리를 역임하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제국의 영웅이었으나,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는 침략의 원흉이었다.
안중근은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길 위기 속에서 대한제국의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적군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전쟁터에서 죽이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라고 믿었다.
또한, 안중근은 재판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일본제국의 대한제국 침략에 대한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훗날 김원봉의 의열단, 김구의 한인 애국단 창설의 원동력이 되어 새로운 의열(義烈) 투쟁의 출발점이 된다.
안중근 유묵 극락(極樂, 보물 제569-19호)/해동사 전시실(복사본). ‘극락’ 1910년 3월 여순감옥에서 죽음을 생각하며 쓴 글로 일제가 자신을 감옥에 가뒀지만, 이곳이 극락이라는 역설의 투쟁 속에 자신에 대한 사후세계의 염원을 담아낸 듯하다. [정성환 기자]
독립운동가 조마리아(1862~1927) [출처=네이버]
안중근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아들에게 쓴 마지막 편지/해동사 소재 [정성환 기자]
옥중에서 마지막 모습/해동사 전시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어머니가 직접 지어 준 새 한복을 입고 순국했다. ‘爲國獻身軍人本分’이란 유묵은 3월 26일 순국 직전 일본 간수 ‘지바 도시치’에게 써준 유묵으로 지바 가족이 보관해 오다가 1980년 안중근 의사 숭모회에 기증했다. [정성환 기자]
◆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아들 안중근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장한 아들아 보거라.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안중근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항소를 하지 않았다.
구차하게 그들의 재판에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1910년 3월 26일 운명의 날, 안중근은 평소 안중근의 의연함에 존경심을 가지고 있던 일본인 간수 ‘지바 도시치’를 불러 붓과 종이를 가져오도록 한다.
그리고 바른 자세로 한 획 한 획 정성스럽게 글을 써 내려 간다.
“위국헌신 군인본분 爲國獻身 軍人本分.”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올바른 군인으로 살아온 그의 생애를 정리한 글귀였다.
안중근은 ’지바 도시치‘에게 고마움의 증표로 유묵을 건넨다.
안중근은 마지막 유언을 묻는 집행관에게 “나의 거사는 오직 동양평화를 위한 것이었으므로, 바라 건데 이 자리에 있는 일본인들도 나의 뜻을 이해하고 피차의 구별 없이 합심하여 동양평화를 이루는 데 힘쓰기를 기원하오”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1910년 오전 10시 15분, 어머니가 직접 지어준 하얀색 한복을 입고, 오로지 조국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32세의 짧은 생을 헌신한 우리 민족의 영웅 안중근은 그렇게 순국했다.
그의 두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은 땅에 엎드려 통곡하며 유해 인도를 요구했으나 일제는 이를 철저히 거부했다. 안중근의 유해를 감옥 밖으로 내보낸다면 하얼빈은 독립운동의 성스러운 장소가 될 것이기에 일제는 이를 두려워한 것이다. 결국, 안중근은 뤼순감옥 공동묘역에 묻히게 된다.
일제는 안중근의 매장 위치를 알려주지도 않았다.
2008년 3월 남북공동으로 뤼순감옥 뒤편 야산 일대 등지에서 유해 발굴작업을 벌였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이 때문에 뤼순감옥 공동묘지에 묻힌 안중근의 유해는 아직도 그 정확한 위치를 모른 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1995년 위패봉안식/해동사 전시실. 안중근의 딸 현생(1902~1960) 씨는 1955년 10월 27일 해동사 위패봉안식 행렬에서 아버지 영정을 들었다. [정성환 기자]
안중근 의사 동상/경기도 부천 안중근 공원 소재 [출처=네이버(국가보훈처)]
안중근 의사 가묘(효창공원 소재) [출처=네이버]
안중근 의사 가묘(왼쪽) 3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묘/효창공원 [출처=네이버]
◆ 천주교 품에 안긴 토마스(도마) 안중근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로마 대주교는 안중근의 신자 자격을 박탈한다.
1993년 김수환 추기경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은 “일제의 무력침략에 맞서 독립전쟁을 하는 것은 정당했다”라며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가 더 큰 평화를 위한 노력이었음을 주장했다. 마침내 2010년 정진석 추기경이 집전한 명동대성당 추모 미사를 통해 천주교 신자임이 공인되었고, 안중근 의사는 천주교 품에 안긴다.
해방 후인 1945년, 백범 김구는 독립운동의 3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유해를 일본에서 찾아와 효창공원에 안장했다.
그리고 추후 언젠가는 찾게 될 안중근 의사의 묫자리도 만들어두었다.
효창공원 내 안중근 의사의 가묘에는 비석이 없었으나 2019년 2월 비석을 세우고 “아직까지 유해를 찾지 못하여 빈 무덤으로 혼백을 모시고자 한다”라고 새겼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안중근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안중근 아내 김아려와 두 아들 분도과 준생/전시실 [정성환 기자]
◆ 독립유공의 명문, 안중근의 가문
안중근 의사 가문은 어머니 조마리아와 여동생 안성녀, 두 동생(정근, 공근)을 포함 총 40여 명의 독립운동가와 15인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명문가이다.
그러나 안중근 일가 후손들 대부분이 독립운동 때문에 중국·미국·북한 등지로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었기에 안중근 가문에 대한 정보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임시정부 경제후원회 위원으로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안중근의 두 동생 ‘정근’과 ‘공근’은 백범 김구·도산 안창호 등의 신임을 받으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안공근(1889~1940)은 한국독립당에서 특무공작을 주도하고 ‘한인애국단’ 주요 간부로 활동했으며 좌우 독립운동 단체 통합에 헌신했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안정근(1885~1949)은 1918년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신한청년당 이사·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1949년 중국 상해에서 지병으로 순국했으며,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안중근의 여동생 ‘안성녀’ 씨는 독립군 주요문서를 수발하고 군자금을 전달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광복 후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1954년 부산에서 별세했다. 그러나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독립활동 자료가 부족해 여전히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부인 김아려, 딸 ‘현생’, 큰아들 ‘분도’와 막내아들 ‘준생’이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이후 연해주에 ‘안중근 유족 구제공동회’가 구성되자, 부인 김아려는 두 아들(분도와 준생)과 함께 연해주로 이주한다.
홀로 남은 딸 현생(8세)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5년간 명동 천주교 수녀원에서 프랑스 신부의 보호를 받으며 생활하다가 1915년(13세) 연해주로 건너가 가족과 만난다. 당시 러시아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였던 최재형 선생은 안 의사 부인에게 냉면 가게를 차려주는 등 생계를 지원했다고 전한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안중근 가족은 상해로 건너가 김구와 안창호 등 독립운동가들의 지원과 보호를 받으며 지냈다. 1932년 윤봉길 의거가 일어나고 일제의 검거령을 피해 임시정부가 급히 상해를 떠나 피난길에 오르자, 미처 따라가지 못하고 홀로 상해에 남아 힘든 생활을 보내게 된다.
상해 프랑스 조계지로 이주한 안중근의 맏딸 ‘현생’은 1920년대에 신흥무관학교 1회 졸업생이자 임시정부 초대 군무부 참사를 지낸 황일청과 결혼해 1928년 딸 황은주를 낳았다.
황일청 가족은 임시정부가 상해를 떠날 때 따라가지 못하고 일본군에 붙잡혀 평양으로 압송돼 5년간 연금 생활을 하다가 일본인에 의해 중국 쉬저우(서주)로 옮겨 살다가 광복을 맞았다. 황일청은 귀국선을 기다리던 중 ‘서주 한국 중학교’를 세워 조선 학도병과 함께 학생들을 지도했다. 그때 귀국선을 타기 위해 서주에 온 광복군에게 일제 앞잡이로 오해받아 살해되었다.
임시정부에 있던 이범석 장군(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이 황일청의 친구이다. 이범석 장군은 황일청의 부음을 듣고 그의 부인을 보내 위로했다고 전하며, 당시 안중근의 외손녀 황은주 씨는 17세였다.
‘안현생’ 씨는 해방 후 1953년부터 1956년까지 3년여 동안 효성여대(현, 대구 카톨릭대학) 불문학 교수로 재직하다 지병으로 1960년 향년 58세로 별세했다.
안중근의 외손녀 황은주(1928년생) 씨는 아버지에 대한 연금을 신청했으나 ‘독립운동 이후 행적을 알 수 없다’라는 기각 통보를 받고, ‘기초생활수급자’로 국내에 거주 중 2021년 별세했다.
안중근의 장남 분도(1905년생)는 7살 때 연해주에 피신해 있다가 낯선 사람이 건네준 과자를 먹고 사망했는데, 일제의 사주를 받은 밀정에 의한 것으로 추정하지만, 아직도 정확한 사망연대와 사인을 밝힌 기록은 없다.
안중근의 차남인 준생(1907년생)은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 굴복해 변절한다.
준생은 1939년 이토 가문과의 화해란 명목으로 이토 히로부미 위패가 있는 사찰(박문사)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분키치에게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속죄하고 전력으로 보국의 정성을 다하고 싶다”라고 말한 것이다.
안준생의 비열한 행태는 매일신보 등 친일매체에 의해 대대적으로 선전용으로 보도되었다.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은 “더러운 변절자를 체포해 처단하라”라는 백범 김구의 암살 위협을 받고 도피 생활을 하다 해방 후 귀국했다. 1950년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부산에서 피란 도중 44세에 폐결핵으로 숨졌다고 전해진다.
우리는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삶 속에서 무엇을 알아가고 있는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2월 14일을 1980년대 중반 일본에서 유입된 초코렛을 주고받는 연인들의 ‘발렌타인-데이’만을 기억하는 현실을 비난하거나 탓하고 싶지는 않지만, 113년 전 1909년 2월 14일은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고 사랑하는 아내에게 애틋한 유언을 남겼던 날이라는 것 또한 기억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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