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지(高仙芝)의 탈라스 전투(Battle of Talas)
현재의 탈라스강. 키르기스스탄 영토이다.
751년 여름 당(唐)과 아바스 왕조(Abbasid Caliphate)의 군대가 탈라스강(Talas River, 현재 키르기스스탄)에서 만나 전투를 벌였다. 역사상 유명한 '탈라스 전투(Battle of Talas)'이다. 당군의 지휘관이 고구려 유민 고선지(高仙芝)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탈라스 전투 전 양측 군대의 경로. 빨간 화살표가 당, 파란 화살표가 아바스 왕조이다.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高斯界)는 처음에 하서에서 근무하다가 쿠차 주둔군의 고급 장교가 되었고, 그 역시 아버지를 따라 서역으로 가게 되었다. 젊은 시절부터 군공을 세운 고선지는 20세 남짓에 장군직을 제수받았고, 740년경에는 안서부도호로 임명되었다. 당시 티베트(토번)가 파미르 고원(Pamir Mountains) 방면으로 세력을 뻗쳐 발루치스탄(Baluchistan, 현재 파키스탄), 길기트(Gilgit, 현재 파키스탄), 와한(Wakhan, 현재 아프가니스탄) 등지를 장악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고선지가 파견되었다.
그는 747년 1만 명의 기병과 보병을 이끌고 카슈가르(Kashgar, 현재 중국 카스)를 거쳐 파미르 고원을 넘어 길기트를 원정했으며, 그 공로로 안서 4진 절도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용맹한 성격 못지않게 의욕도 지나치게 앞서서 750년 석국(石國, 현재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를 공략한 뒤에는 그 국왕을 사로잡아 장안으로 압송하여 처형케 했을 뿐 아니라, 슬슬(瑟瑟, Lazurite)이라는 큰 보석 10여 개와 낙타 5~6마리분의 황금과 명마들을 강탈하기도 했다. 이에 현지인들은 아랍군을 끌어들여 당에 대항하게 된다.
탈라스 전투 장면
이렇게 해서 고선지가 이끄는 당군과 지야드 이븐 살리흐(Ziyad ibn Salih)의 아바스 왕조군은 751년 7월 탈라스 하반의 아틀라흐에서 전투를 벌였다. 5일 동안 대치하던 중 당군의 일부를 구성하던 카를루크(Qarluq) 유목민들이 배반하여 아랍 측으로 넘어갔고, 그 결과 당군은 좌우로 협공을 당하여 참패하고 말았다. 고선지는 퇴각하여 목숨을 구하기는 했지만 패배에 책임을 지고 절도사직에서 면직되었다. 전투에 참가한 양측 병력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분분하다. 당의 역사가 두우(杜佑)가 쓴 <통전(通典)>에는 당군의 숫자가 7만 명 정도였으며, 그중 사망자가 3만 명, 도망자가 4만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탈라스 전투 장면
이 전투는 당시에는 커다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란의 역사가 아부 야파르 무함마드 이븐 자리르 알타바리(Abu Ja'far Muhammad ibn Jarir al-Tabari)를 비롯한 이슬람 측 사가들은 거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의 <고선지전(高仙芝傳)>에도 아무런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건은 장기적으로 볼 때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이슬람권의 정치, 문화적 영향력이 증대하는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자못 크다. 이 일이 있는 직후 안녹산·사사명의 난(755년~763년)이 터지면서 당 제국은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 틈을 이용하여 티베트 세력이 타림 분지와 하서 회랑으로 진출했고, 돌궐 제국 붕괴 이후 카를룩을 비롯한 투르크계 민족들은 톈산 산맥 북방의 초원을 차지했다. 이제 갓 탄생한 아바스 왕조는 군사적 승리에 힘입어 본격적으로 중앙아시아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중앙유라시아를 둘러싼 국제 관계는 이슬람 세력이 서방을, 티베트가 동방을, 투르크 유목민들이 북방을 차지하며 각축을 벌이는 형세가 되었다. 그러나 9세기에 접어들어 티베트와 투르크가 약화되기 시작하자 중앙유라시아에 대한 아랍의 정치적 우위는 확고해졌고, 종교적으로 이슬람화는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 되었다.
종지 제지법
이처럼 탈라스 전투는 중앙유라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퇴조하는 결과를 초래했지만 역설적으로 중국의 문화가 이슬람 세계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전투에서 생포된 중국인 2만 명 가운데 제지 기술자들이 이슬람권으로 제지술을 전파시킨 것이 좋은 예다. 중국의 서쪽에서 최초로 제지 작업장이 만들어진 곳이 사마르칸트였고, 이것이 바로 중국인 포로들에 의해 가능케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학자들의 연구로 밝혀진 바이다. 이렇게 해서 이슬람권에서 널리 명성을 얻게 된 '사마르칸트 종이'는 서아시아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어,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Harun al-Rashid, 재위 786~809)는 바그다드에 제지 공장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 뒤 제지술은 레반트와 북아프리카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마침내 유럽에까지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