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냄새를 따라간 대전의 밤
박미정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대전의 거리는 온통 젖어 있었다. 네온사인이 물기를 머금은 보도블록 위로 길게 번지고, 우산을 받쳐 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낯선 도시의 밤거리는 비 때문에 더욱 깊어 보였다. 그런데 한 골목에 이르자 발걸음이 멈췄다. 우산을 든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무슨 특별한 일이 있는 것일까.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곳은 대전의 명물 성심당이었다.
빵을 사기 위해 비를 맞으며 줄을 선 사람들. 처음에는 그 풍경이 조금 낯설었다. 세상에 빵집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비 오는 밤에 이렇게 기다려야 할까. 그러나 사람들의 표정을 바라보니 기다림마저 하나의 즐거움인 듯했다. 검은 우산과 체크무늬 우산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빗방울은 우산 위에서 작은 북소리를 냈고, 젖은 거리는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누군가는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누군가는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가 와도 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성심당이라는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대전에 가면 꼭 들러야 한다는 빵집, 빵 하나로 도시의 이름을 널리 알린 곳이다. 그러나 직접 마주한 풍경은 소문보다 훨씬 생생했다. 빵집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고, 그들의 발길이 골목을 채우고 있었다. 빵을 사는 일이 어느새 여행의 한 장면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 풍경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매장 안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고소한 빵 냄새와 사람들의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졌다. 진열대에는 노릇하게 구워진 빵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소금빵이며 큼직한 빵들이 먹음직스러운 자태를 뽐냈다. 손님들은 쟁반을 들고 이곳저곳을 살폈다. 어떤 사람은 빵을 고르느라 한참을 망설였고, 어떤 사람은 익숙한 듯 망설임 없이 쟁반에 담았다. 계산대에서는 직원들의 손길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 분주함 속에서도 빵집 특유의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빵이 놓인 진열대 앞에서 문득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 빵은 흔한 먹거리가 아니었다. 어쩌다 아버지가 사 오신 단팥빵 하나를 형제들과 나누어 먹던 기억이 있다. 누가 조금 더 큰 조각을 차지할까 눈치를 보면서도, 마지막 한 입은 오래 아껴 먹었다. 입안에 남아 있던 달콤함보다 더 오래 기억되는 것은 빵 봉지를 들고 들어오시던 아버지의 모습이다. 빵은 배고픔을 달래는 음식이기도 했지만, 누군가의 사랑을 전하는 작은 선물이었다.
세월이 흘러 빵은 우리 일상에서 너무나 익숙한 음식이 되었다. 종류도 다양해지고 맛도 화려해졌다. 그러나 빵을 앞에 두었을 때 느끼는 설렘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성심당을 찾은 사람들도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을 것이다. 아이에게 줄 빵을 고르는 부모가 있고, 고향으로 돌아가며 선물할 빵을 담는 여행객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오래전 먹었던 맛을 다시 찾고, 누군가는 새로운 추억을 만들기 위해 이곳에 왔으리라.
매장 한편에는 제빵사 복장을 한 인형들이 다정하게 앉아 있었다. 하얀 모자를 쓰고 나란히 앉은 모습이 정겨웠다. 빵을 굽는다는 것은 참 묘한 일이다. 밀가루와 물, 소금과 효모가 만나 반죽이 되고,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 뜨거운 오븐 속에서 비로소 빵이 된다. 그 과정이 사람의 삶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도 저마다의 시간을 견디며 조금씩 익어 간다. 때로는 뜨거운 시련을 지나야 비로소 자신만의 향기를 갖게 된다. 빵 한 덩이에 담긴 시간의 무게가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밖으로 나오니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골목의 불빛은 더욱 선명해졌고, 우산을 든 사람들의 행렬도 계속되고 있었다. 빵 봉지를 품에 안고 나오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 보였다. 기다림 끝에 얻은 작은 기쁨이 그들의 표정에 묻어나는 듯했다. 나는 잠시 처마 아래 서서 거리를 바라보았다. 빵집 하나가 이렇게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여행은 반드시 먼 풍경을 찾아 떠나는 일만은 아니다. 이름난 산과 바다, 오래된 유적을 둘러보는 것도 여행이지만, 한 도시의 골목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만나는 일 또한 여행이다. 대전의 밤은 내게 그런 풍경을 보여 주었다. 빗속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분주하게 빵을 굽고 판매하는 사람들, 그리고 누군가에게 건넬 빵 봉지를 소중하게 들고 가는 사람들. 그 모든 모습이 한 도시의 따뜻한 얼굴이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삶도 기다림의 연속이다. 봄에는 꽃을 기다리고, 여름에는 그늘을 기다리며, 가을에는 열매가 익기를 기다린다. 사람을 기다리고 소식을 기다리며 때로는 좋은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기다림이 언제나 달콤한 것은 아니다. 지루하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을 지치게 한다. 그러나 기다린 끝에 얻는 기쁨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비 오는 밤 성심당 앞에 늘어선 긴 줄이 내게는 그런 삶의 풍경처럼 다가왔다.
골목을 걸었다. 빗물이 고인 바닥에는 붉고 푸른 불빛이 흔들렸다. 우산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낯설었지만, 이상하게도 정겨웠다. 서로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빵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같은 시간을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대전을 떠나며 생각했다. 훗날 이 도시를 떠올릴 때 무엇이 가장 먼저 생각날까. 아마도 비 내리던 밤의 성심당 골목일 것이다. 노릇하게 구워진 빵보다, 화려한 진열대보다, 우산을 맞대고 기다리던 사람들의 모습이 먼저 떠오를 것 같다. 빵은 먹으면 사라지지만 그날의 풍경은 오래 남는다. 아버지가 사 오시던 단팥빵의 달콤함이 아직도 마음 한편에 남아 있듯이. 비 내리는 대전의 밤, 나는 빵을 찾아갔다가 사람의 온기를 한 봉지 가득 담아 돌아왔다.
첫댓글 성심당 빵도 맛있고 군산의 이성당 빵도 유명하지요. 저는 두 곳 다 체험해 봤습니다. 성심당의 바삭하고 고소한 튀김 소보로와 속이 든든한 부추빵, 이성당의 피가 얇은 단팥빵과 특이한 아라비아 향미가 있는 야채 고로케는 유명하지요. 저는 어느 쪽이 더 맛 있는지 평가는 아니 하렵니다. 편드는 것이 되니까요. 대구의 맘모스를 다시 부활시켜 보면 어떨지^^
서울에서 성심당 빵을 사기 위해 KTX를 타는 고객을 TV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무엇을 팔든 줄서서 고객이 기다리는 곳은 돈 벌게 돼 있습니다.
경주의 황남빵도 주말이면 예약을 해야 한다잖아요.
글 잘 봤습니다. 박 선생님.
대전에 성심당 빵이 있다면 안동엔 맘모스 빵이 있습니다. 그 빵집에도 관광차 타고 빵 사러 온답니다. 저도 안동 출장 가면 맘모스빵 사 가지고 옵니다. 특히 또띠아가 유명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대전 성심당 빵 관광 갈 것입니다. 좋은 정보 감사 합니다.^♡^
어떤 백혈병 환자를 케어한 적 있습니다.
수간호사님이 부탁으로 한 분을 5개월 케어했었네요.무균실에서 울고 웃으며 그 순간들을 즐겼었지요. 환자 따님 넷 중 형편 힘든 이가 서울에서 오는길에 일부러 대전에 내려 성심당 빵을 사다 주더군요. 그 때 보문산메아리란 빵을 처음 맛보았는데 입안에서 상그르르 녹더군요.겉바속촉 자체였어요.
박 작가님 글 읽으니 그때 생각이 나서 글도 사르르 달콤합니다. 늘 성의껏 써 주시고 올려 주셔서 훌륭한 읽을거리 제공해 주심에 감사드려요.
보문산메아리 먹고 싶어요.
겨울여행 가요 대전으로 그 메아리 먹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