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품 붕괴와 전쟁이 덮친 '세계 역사상 최악의 비극적 시대'의 심각성 / 8/15(목) / 현대 비즈니스
왜 국제금융위기는 반복되는가. 세계사 속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금융 위기의 이면에 있는 스토리로부터 국제 금융의 기초 지식을 그려낸 화제서 「교양으로서의 금융 위기」저자로부터 지금 필요한 지식이나 생각을 배운다.
◇ 자금 흐름의 중단
미국→독일→영국→미국이라는 자금의 흐름에 근거한, 세계 경제의 일시적 안정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미국 투자자들이 독일에 투자하는 것 이상으로 유리한 투자 대상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뉴욕 주식 시장은 1927년에 38% 상승한 후 1928년에는 44% 상승합니다. 1928년의 상승은 배당의 증배와 괴리되어 있어 버블의 영역에 이르렀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시장의 과도함을 우려해 1928년 초부터 뉴욕 연방은행은 금리를 인상하고 있고, 미국 투자자들은 주식이든 금융상품이든 국내로 돈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미국에서 해외로의 자금 유출이 1928년 2분기 5억 3천만 달러에서 3분기 1억 2천만 달러로 급감했습니다. 독일 대출은 2분기 1억 5천만 달러 이상에서 3분기에는 거의 제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해외로부터의 자금 유입에 의존하고 있던 유럽 경제(특히 독일)에의 미국으로부터의 자금이 갑자기 말라붙습니다(서든 스톱).
◇ 가장 큰 은행으로 시작되는 금융 위기
오스트리아에서는 큰 기업 그룹에 속하는 은행들이 금융 섹터를 좌지우지하다가 1929년 정부의 주선으로 그 중 몇 개가 최대 은행이었던 '크레디트 안슈타르트'에 구제 합병되었습니다.
이 은행은 자금 조달의 35~40%를 해외로부터의 자금 유입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1928년 이후의 자금 유입 감소와 대공황에 의한 기업 그룹의 실적 악화로부터 손실이 확대되어 마침내 1931년 5월에 파탄납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 은행의 채무를 보증한다고 선언하지만, 당시 오스트리아 정부의 세출액이 약 18억 실링인데도 이 은행의 부채는 12억 실링이나 되었다고 하니 보증의 실행 가능성은 거의 그림의 떡에 불과했고, 단지 정부의 재정과 은행의 명운을 일련탁생에 연결시켰을 뿐이었습니다.
정부의 지원 능력에 회의적인 예금자들은 예금을 인출해 금으로 교환했기 때문에 금 보유량이 감소하고 10월에는 통화와 금의 교환이 제한됩니다. 또, 크레디트 안슈타르트에 채권을 가지고 있는 다른 은행에 대해서도, 외상 거래(예금의 유출)가 일어났습니다.
주요국 중앙은행은 오스트리아 중앙은행에 자금을 융자하지만, 그것이 고갈된 후에는 프랑스가 추가 융자에 반대하는 등 협조 체제는 취약했습니다.
금융위기는 국경을 넘어 이웃 독일에서도 국민들이 예금 인출에 나서면서 은행 위기가 발생했습니다. 국민들은 통화(라이히스마르크)를 금으로 교환했기 때문에 1931년 5월 말 현재 금 보유량의 절반 이상이 6월 중순에 손실되었습니다.
독일 정부는 은행 섹터를 지원하는 재정 여력을 유지하기 위해 위기 속에서 재정을 긴축하지만 공황이 악화돼 실업자가 거리에 넘쳐날 뿐 은행 위기는 수습되지 않습니다.
후버 미국 대통령은 독일→영·불→미국의 자금 흐름을 1년간 정지하는 제안을 해 각국의 동의를 얻지만, 정말 필요한 것은 현재의 자금 흐름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금 보유량을 급속히 잃고 있는 독일에 대해 신규 융자를 실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대출에 정치 조건을 붙이려 하고, 영미는 신규 대출 자체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유럽 국가들은 자국의 금 보유량을 강화하기 위해 보유한 파운드를 금으로 교환합니다. 또 오스트리아나 독일에 대한 투자가 많은 영국에 위기가 미칠 것을 우려해 민간 투자자도 파운드화를 꺼렸기 때문에 잉글랜드 은행은 금 유출을 피하려고 금리를 인상하지만, 그러면 다른 나라도 고정환율제 유지를 위해 금리 인상을 따를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 결과, 금융 긴축이 연쇄해, 위기의 와중에 디플레이션 압력을 높여 가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결국 영국은 9월에 금본위제를 정지하고 이후의 파운드화 폭락을 방치합니다.
◇ 문제 해결되지 않은 채 제2차 세계대전
미국으로부터의 자금 유입이 격감하고, 은행 위기의 파급으로 돈이 유출된 결과, 독일은 이른바 「영안」(1929년)으로 확정되었던 배상금의 지불을 정지합니다.
전승국 측은 1932년에 독일의 배상 책임을 취소하고 각국은 독일로부터 앞으로 한 번만 더 지불받기로 일단 합의합니다(로잔 협정).
미국→독일→영불→미국이라는 흐름의 첫 번째 화살표가 사라졌기 때문에 그 다음인 두 번째 화살표가 사라지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독일의 배상 지불이 없어지더라도 영국과 프랑스에서 미국으로의 전시 채무 상환 취소는 허용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앞 화살표가 모두 사라지더라도 마지막 영불→미국 화살표만 유지하라고 주장한 셈입니다. 영불 입장에서는 '어디서 자금을 가져오면 좋을까?' 라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당연히 납득할 수는 없습니다.
그동안 독일에서는 1933년 히틀러 정권이 성립되고 이후 대외 지불을 거부했기 때문에 결국 독일의 배상금 문제와 미국의 전시 채권 문제는 흐지부지된 채 제2차 세계대전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1920년대 후반의 자금 흐름은 미국→독일의 차관을 기점으로 했지만, 중단 단계에서 독일이 자금사정(파이낸싱) 위기에 빠지는 것은 불가피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국과 프랑스의 자금 조달 위기로 연쇄됩니다.
애초에 변덕스러운 민간 투자자의 투자 자금에 의존한 국제 금융 질서는 서든 스톱에 취약했고 잠재적으로 큰 위험을 안고 있었습니다.
◇ 블록 경제화
위기 시에는 정부는 자국 우선의 정책을 채택하기 쉽습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어쩔 수 없지만, 각국이 함께 자국 제일주의로 달려가면, 세계 경제는 전체적으로 정체되어 갑니다.
대공황의 영향으로 국제 무역은 격감했지만, 그에 더해 영미 등은 의도적으로 역외로부터의 수입을 줄이려고 했습니다.
미국은 스무트 홀리법(1930년)으로 관세를 인상했고, 영국은 1932년 오타와 회의에서 영연방 내부에 특혜관세를 두기로 했습니다. 가급적 외국에는 돈을 주지 않고 필요한 것은 자국이나 관련국에서 만드는 블록 안에서 자급자족해 나가자는 생각입니다. 프랑스도 무역 적자를 피하기 위해 많은 상품을 수입 금지했습니다.
반면 금본위제를 중단하고 고정환율제에서 벗어난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환율을 인하하거나 하락을 방치해 갑니다. 이에 따라 다른 나라에 비해 저가 수출을 목표로 한 것으로, 이러한 환율 인하 경쟁은 일반적으로 '근린궁핍화 정책'이라고 불립니다.
1931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대한 대출이 실패한 것과 1933년 세계경제회의 개최 중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환율 안정에 대한 협조를 거부한 것이 전형적으로 나타나듯이 경제공황과 금융위기 와중에 국제금융시스템을 원활하게 작동시키기 위한 리더가 부재했던 것이 위기에 제동을 걸지 못한 큰 이유입니다.
미야자키마사토
https://news.yahoo.co.jp/articles/70bbec7eaf47457f3455cfa4d4a39a96f8f85251?page=1
金融危機の世界史】バブル崩壊と戦争が襲った「世界史上最悪の悲劇的な時代」の深刻実態
8/15(木) 6:20配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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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ビジネ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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なぜ国際金融危機は繰り返されるのか。世界史の中で起きたさまざまな金融危機の裏にあるストーリーから国際金融の基礎知識を描き出した話題書『教養としての金融危機』著者からいま必要な知識や考え方を学ぶ。
【写真】日本がいつの間にか「モノを売って稼ぐ国」から変貌していた…!
資金の流れの中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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米国→ドイツ→英仏→米国という資金の流れに基づいた、世界経済の一時の安定は長続きしませんでした。米国の投資家が、ドイツに投資する以上に有利な投資対象を見つけたからです。
ニューヨーク株式市場は、1927年に38%上昇した後、1928年には44%上昇します。1928年の上昇は配当の増配と乖離しており、バブルの域に達したと言って良いでしょう。
市場の行き過ぎを恐れて1928年初めからニューヨーク連銀は金利を引き上げており、米国の投資家は、株式であれ金融商品であれ、国内に資金を向け始めます。
その結果、米国から海外への資金流出が1928年第2四半期の5億3千万ドルから第3四半期の1億2千万ドルへと激減しました。ドイツへの貸し付けは、第2四半期の1億5千万ドル以上から第3四半期にはほぼゼロになったと言われます。
こうして、海外からの資金流入に依存していた欧州経済(特にドイツ)への米国からの資金が突然干上がります(サドンストップ)。
最大の銀行に始まる金融危機
オーストリアでは大きな企業グループに属する銀行が金融セクターを牛耳っていましたが、1929年に政府の肝入りでそのいくつかが、最大の銀行であった「クレジットアンシュタルト」に救済合併されました。
同行は、資金調達の35~40%を海外からの資金流入に頼っていたため、1928年以降の資金流入の減少と、大恐慌による企業グループの業績悪化から損失が拡大し、ついに1931年5月に破綻します。
オーストリア政府は同行の債務を保証すると宣言しますが、当時のオーストリア政府の歳出額が約18億シリングであるのに、同行の負債は12億シリングに上ったと言われますので、保証の実行可能性はほとんど絵に描いた餅に過ぎず、単に政府の財政と銀行の命運を一蓮托生に結び付けたのみでした。
政府の支援能力に懐疑的な預金者は、預金を引き出して金に交換したため、金準備が減少し、10月には通貨と金の交換が制限されます。また、クレジットアンシュタルトに債権を有する他の銀行に対しても、取り付け騒ぎ(預金の流出)が起こりました。
主要国の中央銀行はオーストリア中央銀行に資金を融資しますが、それが枯渇した後にはフランスが追加融資に反対する等、協調体制は脆弱でした。
金融危機は国境を越え、隣国ドイツでも国民が預金引き出しに走り、銀行危機が発生しました。国民は通貨(ライヒスマルク)を金に交換したので、1931年5月末時点の金準備の半分以上が6月半ばには失われてしまいました。
ドイツ政府は、銀行セクターを支援する財政余力を維持すべく危機の最中に財政を引き締めますが、恐慌が悪化して失業者が街にあふれるのみで、銀行危機は収束しません。
フーヴァー米大統領は、ドイツ→英仏→米国の資金の流れを1年間停止する提案を行い各国の同意を得ますが、本当に必要なのは現在の資金の流れを止めることではなく、金準備を急速に失っているドイツに対して新規の融資を行うことでした。しかしフランスは融資に政治条件を付けようとし、英米は新規融資自体に賛成しません。
欧州諸国は、自国の金準備を強化するため、保有するポンドを金に交換します。また、オーストリアやドイツへの投資の多い英国に危機が及ぶのを懸念して、民間投資家もポンドを敬遠したため、イングランド銀行は金流出を避けようと金利を引き上げますが、そうすると他国も固定相場制維持のために利上げに追随せざるを得なくなります。
その結果、金融引き締めが連鎖し、危機の最中にデフレ圧力を高めていく結果となりました。結局英国は9月に金本位制を停止し、その後のポンド暴落を放置します。
問題未解決のまま第二次世界大戦へ
米国からの資金流入が激減し、銀行危機の波及で金が流出した結果、ドイツはいわゆる「ヤング案」(1929年)で確定していた賠償金の支払いを停止します。
戦勝国側は、1932年にドイツの賠償責任をキャンセルし、各国はドイツからあと1回だけの支払いを受けることで一応合意します(ローザンヌ協定)。
米国→ドイツ→英仏→米国という流れの最初の矢印が消えてしまったので、その次である第二の矢印が消えるのもやむを得ない、と受け入れたわけです。
しかし米国は、ドイツの賠償支払いがなくなっても英仏から米国への戦時債務返済のキャンセルは認めないとしました。前の矢印が全部消えても、最後の英仏→米国の矢印だけは維持しろ、と主張したことになります。英仏にしてみれば、「どこから資金を持ってくればいいのか?」という話ですから、当然納得するわけにはいきません。
その間ドイツでは1933年にヒトラー政権が成立して、以後の対外支払いを拒否しますので、結局ドイツの賠償金問題と米国の戦時債権の問題はうやむやなまま第二次世界大戦に突入することになりました。
1920年代後半の資金の流れは、米国→ドイツの借款(貸し付け)を起点としていましたが、それが途絶えた段階でドイツが資金繰り(ファイナンシング)の危機に陥るのは不可避でした。そして、それは、英仏の資金繰りの危機へと連鎖していきます。
そもそも、気まぐれな民間投資家からの投資資金に頼った国際金融秩序は、サドンストップに対して脆弱で、潜在的に大きなリスクを抱えていたのです。
ブロック経済化
写真:現代ビジネス
危機の際には、政府は自国優先の政策を採りがちです。それはある程度やむを得ないものの、各国が揃って自国第一主義に走ると、世界経済は全体として停滞していきます。
大恐慌の影響で国際貿易は激減しましたが、それに加えて、英米等は意図的に域外からの輸入を減らそうとしました。
米国はスムート・ホーリー法(1930年)で関税を引き上げましたし、英国は1932年のオタワ会議で英連邦の内部に特恵関税を設けることとしました。なるべく外国にはお金を渡さずに、必要なものは自国や関係国で作るブロックの中で自給自足していこうという考えです。フランスも貿易赤字を避けるために、多くの商品を輸入禁止としました。
一方、金本位制を停止して固定相場制から脱した国々は、競争的に為替レートを引き下げ、あるいは下落を放置していきます。それにより他国に比べて低価格での輸出を目指したもので、こうした為替引き下げ競争は一般的に「近隣窮乏化政策」と呼ばれます。
1931年のドイツやオーストリアへの融資が失敗したことや、1933年の世界経済会議開催中にルーズベルト米大統領が為替安定への協力を拒否したことに典型的に現われているように、経済恐慌や金融危機の渦中に、国際金融システムを円滑に機能させるためのリーダーが不在であったことが、危機にブレーキを掛けられなかった大きな理由です。
宮崎 成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