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귀와 코는 참 보수적이다.
그래서 익숙한 음악과 경험한 향기를 좋아 한다.
그러나 눈과 혀는 정반대다.
자꾸만 새로운 것을 갈망하며 풍미있는 맛집을 찾아 전국을 샅샅이 뒤진다.
봄이 왔다.
겨우내 둔감해진 나의 味覺, 그 까끌거리는 여운을 단박에 날려버리고 싶었다.
또한 새로운 남녘의 신선한 봄바람을 진하게 쐬고 싶었다.
내 미뢰들도 남녘의 신선한 갯내음에 화들짝 놀라서 깨어나리라.
기대가 컸다.
삼월 초순, 날씨는 산뜻했다.
겨울의 먼지들을 훌훌 털어내듯이 대지는 본격적으로 따스한 온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아, 봄이구나"
불연듯 봄이 오고 있었다.
봄의 향기가 그리웠다.
떠나고 싶었다.
까짓것 함께 떠나 보자.
이번 여행의 컨셉은 미각투어로 정했다.
그리고 그 대상지로는 거제도와 통영으로 낙점되었다.
고교 동창생 여섯 커플, 열두 명이 길을 나섰다.
KTX를 타고 달렸다.
점심 때 거제도에 도착했다.
본격적으로 봄이 오는 길목, 이맘때쯤 거제의 음식은 누가 뭐래도 단연 도다리쑥국이 제격일 터였다.
모두가 그 음식을 주문했다.
시원한 국물에 봄의 향기가 진동했다.
쑥내음과 도다리의 식감이 나의 미각과 후각을 격렬하게 자극하며 골을 찔렀다.
찌릿하게 온 몸으로 퍼지는 봄의 氣運이 확하고 느껴졌다.
에메랄드빛 거제의 바다도 우리의 눈에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오래된 우정, 봄기운과 갯내음, 개운하고 구뜰한 먹거리, 아름다운 자연과 바다.
절묘했다.
몇 군데 거제여행을 마치고 통영으로 건너갔다.
저녘노을이 곱게 물드는 한국의 나폴리, 통영.
지금까지 여러 번 통영을 探訪했지만 역시 접할 때마다 느껴지는 절대미항의 깊은 품격과 특유의 자연미는 조금도 변함 없었다.
식도락 여행이라는 취지에 걸맞게 바로 중앙시장으로 달려갔다.
팔팔 뛰는 큼지막한 활어들만을 골라 회를 떴다.
숙소로 돌아와 자리를 잡았다.
푸짐했다.
싱싱한 해산물로 차려 낸 만찬의 향연이 이어졌다.
"캬, 바로 이 맛이야"
남해의 쪽빛바다가 입안에 밀물처럼 들어 찼다.
행복했다.
모두의 입이 귀에 걸리기 시작했다.
특히 혀가 즐거웠다.
지루하거나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덩달아 우리의 심장도 친구들의 유쾌한 대화소리에 맞춰 리드미컬하게 방방 거렸다.
통영꿀빵의 달콤하고 바삭한 맛은 덤으로 얻은 축복이었다.
밤이 깊어 질 때까지 소주가 마냥 달콤하고 시원했다.
다음 날 아침.
모두가 서호시장으로 달려갔다.
꼭 먹어보고 싶은 음식이 있었다.
원조 시락국이었다.
서민들의 질박한 삶과 애환이 서려있는 전통 서호시장.
상인들에게 물어가며 골목 골목을 굽이 돌아 식당을 찾았다.
주먹만 했다.
그래도 맛은 끝내준다니 기대가 컸다.
바닷장어의 대가리와 뼈를 시래기와 함께 오랫동안 우려낸 국물이 참으로 담백하고 시원했다.
부추를 듬뿍 넣고 잘게 썬 청양고추를 반 수저 가량 첨가하니 칼칼한 맛이 훅하고 느껴졌다.
그 위에 김가루 얹고 산초를 조금 넣었다.
끝내줬다.
"오메, 환장허겄네"
꾸들꾸들하게 잘 말려 바로 무쳐 낸 무말랭이와 알맞게 곰삭은 새우젓, 아삭아삭 식감까지 좋았던 깍두기까지.
말 다했다.
먹어 보면 안다.
진짜로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한 그릇 순식간에 뚝딱이었다.
장소가 협소해 얼른 일어서야 했지만 친구들은 하나같이 부른 배에 만족의 미소가 질질 흘렀다.
때마침 쏟아져 내리던 맑은 아침햇살에 모두의 눈빛이 더없이 희번덕거렸다.
당근 강추할 집이다.
긍강산도 食後景이라 했으니 자, 다시 길을 나서 보자.
한려수도의 숨막히는 절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안 가볼 수 없었다.
그 일망무제의 비경과 감탄을 어찌 비켜 갈 수 있으랴.
높이 461미터 통영 미륵산 정상에 위치한 展望臺였다.
밥 먹었으니 힘을 내서 올라가자고?
아니다.
걱정 붙들어 매시라.
편하게 앉아서 간다.
한려수도 케이블카를 타고.
한 번 타 보면 안다.
이거 완전 대박이다.
융단처럼 내려깔린 푸른 바다를 팔장끼듯 바로 내 곁에 둔 채 산정으로 스르륵 올라가는 맛과 운치라니.
상상해 보시라.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홍콩의 지붕이라 불리는 높은 산 위의 전망대 'THE PEAK'.
그 가파른 경사를 꾸역꾸역, 알카당 알카당 올라가는 장난감 같은 빨간색 작은 열차, '피크트램'을 타는 것보다
한 열 배쯤 더 기분이 째진다.
진짜로 삼삼했다.
역시 이것도 강추다.
(한려수도의 절경과 벽화마을, 동피랑의 그라피티 감동은 중략함)
여행의 妙味는 의외성과 우연성이다.
이름깨나 알려진 데는 대부분 가본 터라 한적하고 후미진 통영의 속살을 구경하고 싶었다.
친구들에게 의견을 물으니 모두 단박에 오케이.
평상시 지도를 보며 마음에 두고 있던 곳으로 핸들을 돌렸다.
호수같은 바다, 동화속같은 해안은 정녕 아름답고 고왔다.
기대하지 않았으나 때마침 바다목장에서 어민들이 멍게를 수확하고 있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함참을 바라보았다.
싱싱한 멍게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맛을 보고 싶었다.
3만원 어치만 살 수 있는지를 물었다.
인심후한 아지매는 즉석에서 멍게를 손질해 서울 촌놈들에게 건네주셨다.
"오 마이 갓"
손놀림이 번개였다.
모두의 입에서 침이 꼴딱꼴딱 넘어갔다.
아주머니는 잠간 기다리라며 자리를 뜨셨다.
집이 멀지 않았다.
바로 코앞이었다.
묵은지를 큰 그릇에 하나 가득 담아 오셨다.
"갓 수확한 햇멍게는 이 묵은지에 싸서 잡사봐야 제맛이제" 하셨다.
모두가 한 입씩 묵은지에 싸서 먹었다.
"흐미, 이거 완전 사람 잡네 잡어"
정말 죽여주는 맛이었다.
아, 과연 어느 누가 통영의 3월 초순, 그 특유의 향긋하고 짭쪼름한 바다맛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난 필설의 한계를 절감했다.
나의 비루한 어휘와 감성으로는 그 絶對味感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택도 없었다.
아내들이 감동한 눈빛으로 나즈막히 수군거렸다.
"이거 서울에선 십만원도 넘는 양이에요"
우리네 영혼은 만족감과 감사함으로 붙타고 있었다.
그까짓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간의 정이 진하게 녹아든 바다였다.
그렇게 봄이 잔잔한 파도처럼 말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그림같은 풍경 속에 순박한 사람들이 있었고 거울같은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얌체같고 이기적인 도시인들을 한방에 감동시키는 厚德한 인심이 있었다.
그들이 진정으로 알짜배기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냥 진솔하고 질펀했다.
그 순간에 나도모르게 '사다카'가 내 뇌리를 스쳤다.
"그래, 이건 통영판 사다카다"
나는 속으로 읊조리듯 뇌까렸다.
부산역에서 차를 반납하고 KTX에 몸을 맡겼다.
끝없이 평행을 이루며 누워 있는 궤도와 은륜 위로 붉은 황혼이 내리 깔리고 있었다.
또 한 토막의 여정이 感動과 追憶으로 버무려진 채 갈무리되고 있었다.
오도카니 창밖을 내다 보았다.
어두워지는 창밖으로 세상은 하루의 짐들을 내려놓느라 분주했다.
나는, 떠나왔기에 누릴 수있는 감동과 자유에 감사했다.
또한 여독을 녹여주는 거제와 통영의 다채로운 풍광에 마음을 담아 심심한 찬사를 보냈다.
3월 초순의 거제와 통영은 그야말로 찬란했다.
뭍으로 올라갈 채비를 마친 남녘의 봄은 그 길목에서 빛나는 서막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수만 명 앞에서 절규하듯 열창하는, 산발한 어느 중년 로커의 샤우팅보다 더 큰 울림으로 내게 다가왔다.
또한 겨우내 잠들었던 깔깔한 미각을 확 흔들어 깨웠다.
그런 기대를 갖고 왔는데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흠향할 수 있어 행복했다.
수더분하고 군더더기 없는 탱탱한 남녘미각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팔도강산 도처를 여행하며 다양한 문화행사 때마다 여러 번 동행해 준 소중한 친구들과 그의 반려자들에게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전하고 싶다.
"항상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올레회"
2014년 3월, 내 일기장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