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 휘종 평가 최고 화가 세 명 宋徽宗评价最高的三位画家
출처: 시나 컬렉션 소스: EK 이페어케이 플러스
송 휘종 조길은 천고의 화제로 불리며, 그의 글씨를 쓴 화조는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고, 시대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고금의 아름다움을 관절한다"고 칭송하였다.회화에 대해 송휘종은 창작뿐만 아니라 수집도 좋아했고 감상에도 더 애착을 가졌다.창작과 수집, 감상을 두루 갖춘 화단의 최고 고수로서, 분명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그의 법안에 들어갈 수 있는 비범한 부속자이며, 대가급 인물이 아니라, 중량급 선수이며, 그를 탄복하게 한 것은 화단의 거장으로서, 범상치 않다.
송(宋) 휘종(宗宗) 조길(趙吉, 1082년 5월 5일 ~ 1135년 6월 5일), 서화 작품.宋徽宗赵佶(公元1082年5月初5—1135年6月5日),书画作品
송 휘종이 재위하는 동안 궁내에는 역대 최대 수의 역대급 그림들이 수장되어 있었다.송휘종의 직접 주재로 궁내에 소장된 명화 작품 목록을 책으로 엮은 '선화화보(宣和畵》,)'는 위진 이래 배출된 화가 231명과 작품 6,396점을 수록한 것으로, 화가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소개와 평이 이어졌다.황제가 직접 편수를 주관하고 송 휘종이 전문가인 이상 당연히 논평에 자신의 의견과 견해를 넣을 수밖에 없었으며, 그중 역대 화가들에 대한 평가가 가장 높았던 것은 구카이즈, 장승요, 오도자였다.
《선화화보》 권2에 오도자를 소개할 때, "고관우전, 장절후, 도자겸유"라는 돌파천경(石天天之)의 말이 있는데, 이른바 '공전절후'이다.여기서 '고'는 구카이(恺之)이고, '장'은 장승요(張繇;), '도자(道子)'는 오도자(吳道子)다.구카이의 업적은 선조들을 능가하고, 장승요의 작품은 후세에 미치지 못하며, 오도자의 그림 솜씨가 겸비되어 있다는 뜻이다.송휘종에게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을 보면 이 세 사람의 기예는 틀림없이 청초하고 절정에 달할 것이며, 그 영향은 틀림없이 고금을 뒤흔들고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것이다.그리고 이들 세 화단 분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자.
구카이지 자는 창캉(長康)이다.《여사잠도》(국부)顾恺之(348年— 409年),字长康。《女史箴图》(局部)
구카이지는 동진의 화가로 인물초상, 신불상 등에 능했고, 동진의 재상 셰안은 그를 매우 중시하여 그의 재능이 '창생 이래 유례가 없다'고 여겼는데, 당시 '재절, 그림절, 치절'이라고 불렸다.구카이(人物顾)의 그림 캐릭터는 '전신사조(傳神史照)가 눈동자 속에 가득하다'고 했다.그가 난징의 와관사에서 《유마질상》을 그리자 모두들 앞다투어 관람하여 한 시대를 뒤흔들었다.당인은 그의 그림에 대해 "장승은 살을 얻고, 육탐은 뼈를 얻고, 구개는 신을 얻는다"고 평했다.구카이의 대표작으로는 《낙신부도》, 《여사잠도》 등이 있으며, 모두 중국 고전 회화의 예술 보물입니다.후대의 송휘종(宋宗宗)은 그 뛰어난 화술에 감탄하여 선인을 크게 앞섰다고 여겼다.
장승요, 중국 남조의 화가.《오성 28숙신형도》(국부)张僧繇,中国南朝画家。《五星二十八宿神形图》(局部)
장승요는 남조의 양나라 화가로 불도, 인물 등을 잘 그려 양무제의 칭송을 받았다.양무제는 불교를 좋아하여 대개 불가의 절을 장식하고 장승요에게 화벽을 그리라고 명하였다.장승요는 "선투탑묘, 군공을 초월한다"는 찬사가 나왔다.양무제는 장승요(張地的为)를 외지에 주재하는 왕자의 초상화로 보냈는데, 그 그림은 양무제에게 '견지여면(之之面面)'하게 할 정도로 실감나는 예술 기법을 보여준다."장·오의 묘(,)와 필치(筆一二)가 하나같이 훌륭하다"는 평이다.여기서 '장'은 바로 장승요를 가리킨다.'화성(畵聖)'으로 불리는 당나라 화가 오도자(吳道子)의 기법도 장승요(張繇僧)를 본받았다.장승요가 가장 재미있게 이야기한 것은 바로 회자되고 명성이 자자한 '화룡점정(畵龍點、)·벽파출(壁飞)이 날아갔다'는 전설이다.장승요, 그의 화룡점정의 신필은 후대의 화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중국 고대 회화사에서 영원히 빛을 발하고 있으며, 그 화술은 후세에 미치지 못하므로 송휘종이 "절대후"라고 탄식한 것은 당연하다.
오도자(公元道子, 약 680~759)는 당나라의 유명한 화가로, 화사는 화성(畵聖)으로 존칭하고 도현(道玄)이라고도 한다.《87신선권》(국부)吴道子(约公元680~759年),唐代著名画家,画史尊称画圣,又名道玄。《八十七神仙卷》(局部)
당나라 화가인 우다오쯔는 젊은 시절 회화로 유명했고, "젊은 나이에 벼슬을 잃기 전에 단청지묘"는 종교 벽화에 능했고, 산수에도 능했다.개원년 선화로 당 현종(唐宗宗)이 궁궐에 불러들여 "조서가 없으면 그릴 수 없다"고 명했다.당 현종이 가릉강 삼백리 풍경을 그리게 했는데, 오도자가 하루 만에 완성되자 현종은 "이사훈의 수개월 공로도 오도자의 하루 행적이 모두 절묘하다"고 탄식했다.오도자가 벽화를 만들었을 때 백성들은 '관지경보(觀之者)', '망자(望者)가 막히기를 기다렸다.그의 명작 '지옥의 변상'이 완성된 후, 관객들은 '모두 죄를 두려워하고 선을 행하며, 두 도시에서 도살하고, 생선과 고기를 팔지 않는다'는 예술적 효과가 놀라웠다.당나라 사람들은 "오도자는 하늘이 제멋대로 하고 독보당세" "고금 독보, 앞에는 구육이 보이지 않고 뒤로는 오지 않는 자"라고 평했고, 그 화풍을 '오대당풍'이라 불렀고, 후대에는 '화성'이라고 존칭했다.송 휘종이 전무후무한 후를 칭찬한 것은 결코 허언이 아니다.
송(宋) 휘종은 황제가 되기에 그다지 전문적이지 않지만, 회화에 대해서는 매우 정통하다.그는 최고 화가로서 구카이지, 장승요, 오도자를 평가하여 선인들의 의견을 계승·수용하고 후대의 인정을 받았다.구카이지, 장승요, 오도자가 중국 고대 화단에서 전무후무한 숭고한 위치를 굳건히 다져온 것도 그의 극찬 덕분이다.선화화보 편찬을 맡아 옛 명화를 보존하는 데 마멸할 수 없는 공헌을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선화화보가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김병(金兵)이 남하해 개봉(開封)을 공략했고, 송 휘종은 금인의 포로가 됐다.그가 소장하고 있는 수많은 명화들은 불에 타거나 약탈당했고, 송휘종은 "듣자니 한숨을 쉬자"며 평생을 헛되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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