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7주간 목요일 강론>(2024. 10. 10. 목)(루카 11,5-13)
복음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5-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5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6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7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10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12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일은 ‘지금’ 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9-13)”
1)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는, “청하면 주실
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주신 것을 청해서 받아라.”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근거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ㄴ).”
라는 산상설교의 말씀입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는 분이고, 그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이 자동적으로 ‘나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청해서’ 받아야만 ‘나에게’ 옵니다.
만일에 청하지 않는다면, 또는 안 받으려고 하면, 아버지께서
아무리 많은 것을(좋은 것을) 주셔도 받지 못합니다.
내가 안 받아서 못 받는 것입니다.
2)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강도당해서 초주검이 된 그 사람은,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을 것이고, 또 누구든지 아무나 지나가다가
도와주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 지나가는 사제, 레위인, 사마리아인에게
제발 좀 도와달라고 요청했을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그를 도와준
것은, 그의 요청에 응답한 일이기도 하고, 또 그의 간절한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신 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에 살기를 포기하고, 그래서 기도하지도 않고,
사마리아인의 도움도 거절한다면?
그러면 죽는 것입니다.
또 만일에, 자기를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이 동족 유대인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을 알고서 “나는 사마리아인의
도움은 받지 않겠다.” 라고 도움을 거절하거나,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니 사람이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 라고 하면서 도움을 거절했다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께서 ‘직접’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가 아닙니다.
물론 도움이 하늘에서 직접 내려오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사람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어떤 방식으로 누구를 통해서 받든지 간에 내가 받기를
간절하게 바라면서 기도했던 그것을 받는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시기와 방법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십니다.>
3)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라는 말씀도
‘같은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이미 문을 열어 놓으셨으니,
그 문을 찾아서 들어가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스스로, 능동적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으면,
문이 이미 열려 있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문은 닫혀 있는 문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말씀에서, 그리고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을 ‘능동적으로’
해야 한다는 점에서, 묵시록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시고, ‘내가’ 그 문을 열어 드려야 하는
상황은 복음 말씀과는 반대의 상황인데, 그래도 어떻든
‘능동적으로’ 문을 열어야 한다는 점은 같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거나 무시한다면,
그래서 문을 열어 드리지 않는다면,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4) 문을 두드린다는 상황에서 다음 말씀도 연상됩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루카 13,25).”
이 상황은 ‘최후의 심판’이 끝난 뒤의 상황입니다.
안으로 들어갈 자격을 얻은 사람들은 이미 들어갔고,
그 자격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밖에’ 남아 있는데, 그것은
사실상 쫓겨난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는 아무리 문을 두드리면서 열어 달라고
애원해도, 닫힌 문이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심판이 끝나면 모든 상황이 끝나고,
주님의 결정은 번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문을 두드리는 일은, 또는 안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일은,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지금’은 주님께서 문을 열어 놓고서 기다리시는 때이고,
문이 닫히는 ‘그날’은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때입니다.
사실 ‘청하고 찾는’ 일도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나는 ‘지금은’ 특별히 청할 일이 없다.” 라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 오만함과 자만심을 버리지
않으면, 정말로 간절하게 청해야 할 일이 갑자기 닥쳤을 때,
청하지도 못하고 허둥대기만 할 것입니다.
기도는 평소에 꾸준히 하는 사람이 잘하게 되는 법입니다.
어떤 아쉬운 상황이 되어야만 기도를 하려고 하고 평소에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도의 힘’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기도의 힘’은 ‘믿음의 힘’입니다.>
[출처]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